에세이

탈춤: 춤추는 청춘들 3
탈박, 반백년의 역사를 보다
유창복

연세대학 탈춤반은 1973년에 창립이 되었으니 올해로 꼭 50살이다. 반백년의 짧지 않은 세월이 한결 같을 수만은 없었다. 각각이 처한 시대의 상황이 달랐고, 시대가 원한 탈박의 역할이 달랐던 때문에 춤에 대한 생각과 태도 역시 당연하게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돌아보니 매 10년마다 변화의 매듭이 있었다. 지난 50년 변동이 심했던 한국 사회의 흐름 속에서 탈박의 부침도 뚜렷하였다. 그 매듭들을 간략하게나마 짚어보면 탈춤 활동을 접하는 데 있어 이모저모 참조가 되리라 믿는다.


1970년대: 암흑 시대에 피어난 탈박

1970년대의 시대 키워드는 단연 유신(維新)이었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이용하여 10월 17일, 장기집권을 노리고 헌법 개정을 단행한 박정희는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 해산, 정당활동 중지, 일부 헌법 효력 정지 등의 비상조치를 발표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구성했다. 11월 21일 국민투표로 유신헌법을 확정하고, 12월 23일 체육관에서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선출함으로써 유신체제가 시작되었다.

이듬해 73년 9월, 유신체제의 살벌한 상황 아래에서도, 코쟁이 소비문화에 휩쓸리는 대학문화의 세태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청년들은 우리 민족의 한과 얼이 담긴 탈춤과 풍물의 복원을 통하여 민족문화를 창달한다는 기치를 올렸다. 쌍쌍파티로 상징되던 대학축제에 탈춤과 풍물, 대동놀이를 끌어들였다.

한편, 탈춤의 사위 사위에 담긴 민중의 한과 재담에 스며있는 해학의 시대적 의미를 깨달아가면서 이와 함께 진정한 전통의 계승에 대한 고민 깊어졌다. 전통의 단순 복원을 넘어 ‘창조적’ 계승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것은 당대의 시대정신과 사명을 끌어안는 것이라 생각했다.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 직접 들어가 민중의 삶을 배우고, 나아가 민중이 스스로 역사의 주체로 서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자임했다.





 



1980년대: 탈박,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서다

1979년 10·26 사건(박정희 대통령,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총격으로 사망)은 얼어붙어 있던 대학을 깨웠다. 엄혹한 유신체제의 감시와 탄압에 숨쉬기조차 힘들었던 대학가는 개학을 기다렸다. 마침내 사북-부마 민중항쟁에 이어 독재자들의 내분으로 열린 틈을 비집고 나설 채비를 했다. 3월부터 5·18 휴교령까지 두 달 보름만의 짧은 봄이었지만, 이미 봄의 향기를 맡아버렸고 봄의 자유를 몸에 새기는 데 열중한 대학은 80년대 내내 이어져갈 질긴 민주화투쟁의 여정을 열었다.

10·26 직후에 당시 79학번들이 주축이 되어 선배들과 겨우내 준비하여 80년 4월에 초연한 창작마당극 <통일무>는 80년대 탈반 공연의 기본 포맷이 되었고, 이를 토대로 꾸준한 변형이 이루어졌다. 특히 봉산탈춤의 노장과장을 변형하여, 소무를 한반도의 운명을 상징하도록 하고, 노장은 외세와 그에 빌붙은 매판세력으로, 취발이를 민중으로 표현했다. 취발이가 노장을 물리치고 민중들의 군무로 마무리했던 극의 구성은 민족-계급’모순으로 중첩된 한반도의 운명과 혁명적 해결의 주체로서 민중의 계급성을 강조했던 당시 탈박의 시대의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탈박들은 이렇게 정치적 메시지가 분명한 마당극 공연을 매년 올리는 한편으로는 학내시위 주동자로 직접 나서는 등 적극적인 정치행동도 불사했다. 82년 이후부터는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위한 지하조직을 별도로 꾸리기까지 했다. 탈박들에게 1980년대는 말하자면 정치행동의 시대였다.



 



1990년대: 민주화 시대, 전환의 모색

87년 6월 항쟁으로 직선제개헌을 쟁취하고, 89년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며 민주화 공간이 열리고 노동자가 중심적인 사회정치세력으로 등장하였다. 또한 1990년을 전후하여 설립된 시민단체들이 사회혁신 운동을 주도하는 가운데, 학생운동의 역할과 방향성에 대해 새로운 모색이 시작되었다.

이른바 ‘서태지 현상’으로 불리던 대중문화 환경의 변화, 청년-대학 문화의 다원적 전개의 흐름 속에서, 탈춤의 시대적 역할과 정체성에 대한 자리매김이 시급한 과제로 등장하였다. 당시 대학문화패들이 분화하는 과정에서 노래, 악(농악), 연극(마당극)이 독자적인 동아리로 떨어져 나가면서 탈박은 ‘춤’의 전문성을 강화하는 시도를 하였다. 즉 탈춤에 억매이지 말고 ‘무용패’로서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에 주력하여, 고전무용과 현대무용을 넘나들며 무용의 기본기 연마에 주력하고, 마침내 발레를 익히는 시도까지 하였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진입이 쉬운 노래, 악, 극과는 달리 무용 자체는 생각보다 장벽이 매우 높았다. 정기공연에 현대무용극 실험을 지속하다가 90년대 중반 이후 중단되기도 했다. 신입생 모집은 탈춤으로 하면서 정기공연은 현대무용을 올리고, 대학문화패로서 요구받는 활동은 선동무였던 상황 속에서 정체성의 혼란은 더욱 깊어갔다.





 



2000년대: 다시 전통에서부터

IMF를 거치면서 사회적 불평등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고착되어 갔으며, 생존을 위한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졌다. 대학은 취업이 지상과제로 되고, 대학 동아리의 활동 역시 실용적인 수요를 중심으로 급변해 갔다. 이러한 대학의 변화는 1990년대에 이루어진 모색과 방황에 종지부를 찍도록 하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불러들였다.

2000년 밀레니엄 탈박은 다시 ‘전통으로부터’ 길을 찾아 나섰다. 1970년대 선배들이 전통으로부터 대학문화의 뿌리를 이어내고, 나아가 사회변혁의 정신을 민중문화에서 찾아내려 했던 것처럼, 2000년대의 탈박들은 ‘다시 전통’에서 출구를 찾으려 했다. 봉산은 기본이고 강령과 고성탈춤 등 다양한 탈춤의 익히면서 70년대 선배들보다 더욱 다양하고 깊이 있게 전통에 천착했다.

한편 사회의식의 면에서도 변화가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민주, 민족, 계급 등 거대담론을 벗어나, 개인과 일상의 문제에 집중하고 일상 속 관계와 소수자 인권 등 미시적 가치에 주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2010년대: 탈박 동문들의 몸부림

하지만 쉽지 않았다. 실용주의적이고 경쟁적인 대학문화의 분위기가 더욱 가속화되면서 탈박은 신입생 모집에서 갈수록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결국 2013년 40주년 공연 이후, 탈박 동아리는 스스로 문을 닫고 말았다. 참, 유감스런 일이다.

스스로 문을 닫는 후배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졸업동문 탈박들은, 절절히 안타까워하던 끝에 학교 밖에서라도 탈박을 다시 만들기로 마음을 모으고 춤패 <연>을 결성했다. 그후 10여년 동안 한 달에 두세 번씩 정기적인 연습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진도북놀이, 동래학춤, 앉은반 사물놀이 등은 초청공연을 할 정도의 기량에 도달했다.

춤패 <연>은 지난 9월 성황리에 마친 <연세탈박 50주년 기념공연>에 주력으로 참여하였다. 탈춤이 올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된 것을 계기로 분명 앞으로 탈춤 부흥의 불씨를 지피는 데 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가져본다.

매 시대마다 탈박들의 고민과 실천은 달랐지만, 탈춤의 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한다는 목표는 동일했고, 시대에 맞서 치열하게 고민했던 것은 모두 한결같았다. 어느덧 반백년이 흘러 20대 푸른 청년에서 70대 노령 청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세대로 만나도 여전히 탈박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유창복

성공회대 사회적경제대학원 겸임교수, 전 성미산마을극장 극장장, 전 서울시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 센터장​​​

2023. 12.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