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30년 전, 그러니까 1993년에 처음으로 재학생과 동문들이 함께 준비하여 〈연탈 창립 20주년 공연〉을 노천극장에서 했다. 그 후로 10년마다 기념공연을 이어왔다. 10년 전 40주년 기념공연을 마치고, 50주년도 할 수 있을까 의문을 가졌다. 더욱이 40주년 공연 마치고 학내 탈박 동아리가 가입하는 신입회원이 없어서 사라지고 말았다. 간당간당 이어오던 탈반이 막상 없어진다니 허전하고 안타까웠다. 동문들이 다시 대학에 입학해서 재건하지 않은 한 어찌 해볼 방도가 없었다. 결국 동문들의 동아리를 만들기로 하고, 춤추고 싶은 동무들이 매주, 격주모여 꾸준히 춤을 추었다. 〈춤패-연〉이라는 이름도 걸었다.
작년 겨울 동문회 총회에서 50주년 기념공연이 도마에 올랐다. “할 수 있냐?” “해야 하지 않겠느냐?” 현실론과 당위론이 맞섰다. 하고야 싶지만 여력이 없지 않느냐. 50주년이 마지막일 거 같은데 힘들더라고 밀어부처야 하지 않겠냐. 역시 ‘대책 없는’ 낙관론이 목소리가 컸다. 아직 이 사람들이 열정이 있구나 싶었다. 나 역시 낙관론에 줄 선 죄로 총연출이라는 과분한 소임을 받았다.
출연자들뿐만 아니라, 관객들도 ‘연로’한 연배가 대다수일 텐데, 옥외 마당무대는 아무래도 부담이다 싶었다. 40주년 때 공연 중에 비가 와서 데미지가 컸던 기억이 있었고, 기후위기 시대에 날씨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팽팽한 격론 끝에 실내무대로 결정했다.
옥외 (반)원형 마당에서 실내 극장무대로 옮긴 터라, 영상, 조명, 음향 등 기술적 요소들을 도입해야 했다. 하지만 탈박들에게는 생소한 것들이었다. 프로의 도움이 필요했다. 결국 총연출의 핵심 미션은 영역별 전문가들로 스텝진을 짜고 실내무대에 걸 맞는 공연을 구현하는 일이었다. 성미산마을극장 극장장 노릇과 마을극단 무말랭이 단원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주리라 믿기로 했다.
[길놀이]
대강당 앞에 치배들이 모였다. 왕년에 백양로를 휘젓던 전설의 상쇠들 중에 82학번 상쇠가 앞장을 섰다. 그 뒤로 줄줄이 쇠와 징, 장구와 북이 따라붙었다. 교문까지 내려가 지신을 밟고 백양로를 다시 거슬러 올라왔다. 관객들을 죽 매달고 드디어 대강당에 들어섰다. 힘찬 인사굿으로 길놀이를 마치자, 미리 준비된 고사상 앞에 탈박 동문회장이 하얀 두루마기 차림으로 서서, 손수 써온 제문을 읽었다. 유세차~! 상향! 관객들이 이제 나이가 지긋해서인지 고사상 쟁탈전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그때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다들 서둘러 강당으로 밀려들어갔다.
마침내 공연이 시작되었다. 50년전 탈박 창립 당시 첫회장 이셨던 72학면 백규서 선배가 무대에 서서 관객에서 인사를 했다. 나이 들어 추는 춤이니 곱게 잘 봐달라고 엄살을 떨었다.
[동래학춤]
스물두 마리의 고귀한 학이 우아한 날개 짓으로 날아오르며 공연이 시작되었다. 나이 먹은 사람들이 대충 추겠거니, 기대수준을 한껏 낮추고 너그러이 봐주려했던 관객들이 의자에서 등을 뗐다. 오늘 공연 괜찮겠구나, 안도의 마음이 들었다. 연탈 동문들의 춤패인 연, 서강대 탈패 출신들이 주축이 된 춤패 마구잽이가 함께 무대에 올라 더더욱 의미가 깊었다.
[1970년대, 봉산목중]
봉산탈춤 특유의 화려한 의상을 입은 일곱 명의 목중들이 차례로 나와, 대지를 박차 오르는 힘 찬 몸짓에, 허공을 가르는 사위질을 했다. 외사위에 이어 연풍대로 튀어 오르며 휘감아 돌아나가는, 나이 든 목중들은 무대 배경에 투사된 김봉준 화백의 작품과 잘 어우러졌다.
객석 이곳저곳에서 팜플렛을 뒤적이는 모습이 눈에 띠었다. 72에서 79학번까지, 평균 나이 68세.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이 사람들 정말 탈춤에 진심이었구나” 흔들리는 몸의 중심, 잠긴 목소리, 가끔 엇박들이 어우러지자, ‘진정성’이라는 감동적인 마음이 관객들을 하나로 묶었다.
사실 학춤과 목중춤 두 무대로 공연장의 긴장감과 무대와 객석 사이의 거리감은 일찌감치 해제되었다.
[대북과 앉은반]
칠흙 같은 어둠에 한줄기 대금 소리를 타고 웅장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70대 중반의 다부진 노인의 격렬한 대북 연주가 관객들을 쉴 새 없이 몰아붙였다. 이어진 사물의 연주는 천둥(꽹과리) 치고 바람(징)이 몰아치는 검은 바다, 짙은 먹구름(북) 속에 쏟아지는 비(장구)와 어우러졌다. 하늘의 쇠 소리와 땅의 가죽 소리가 혼연일체가 되었다. 춤패 연이 신작으로 준비한 회심의 레퍼토리로서 전혀 손색이 없었다.
[1980~90년대, 창작무 시리즈]
1980년, 파릇한 신입생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던 공연, 〈통일무〉 중 외세과장을 재현했다. ‘한반도-외세-민중’ 역시 간명하고 명쾌한 ‘스토리’ 구조였다. 40년 세월에도 그대로인 외세와 허리는 좀 뻣뻣해졌지만 입심(재담) 만큼은 여전했던 취발이를 보았다.
이번 공연의 유일한 창작무인 〈민중군무〉는 민중의 저항과 부활을 상징하는 몸짓을 잘 만들어냈다. LA에서 달려온 탈박(80형균)과 미정 후배의 합류로, 내내 부진하던 군무 팀은 일취월장, 공연 당일까지 춤사위를 수정하며 끈질기게 진화했다. 이 날은 군무 팀의 승리였다.
문선대로 깃발춤을 추면서도, ‘춤’ 그 자체에 몰입하며 현대무용, 전통무용을 넘나들며 시대의 몸짓을 찾아내려 몸부림 쳤던 90년대, 그들의 춤으로 〈진혼무〉 독무를 무대에 올렸다. 관객 모두 한 차원 높은 춤 그 자체에 빠져들었다. 현장에서 화가가 춤을 직접 보며 그린 '라이브 드로잉’ 화면이 배경에 투사되었다. 춤과 그림이 디지털을 매개로 만나 어울려보았다.
[재학생, 판굿(고창농악)]
1982년 탈반이 주최한 대농악대 공연 이후 단대에 뿌려진 씨앗들이 1986년 농악반 〈떼〉로 결실을 맺었다. 10년 전에 사라진 탈반 동아리와는 달리 그들은 여전히 학내에 살아남아, 전통을 이어왔다. 젊음의 기운이 물씬한 20대초 청춘들의 판굿 공연에 50대 이상의 관객들은 환호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2000년대, 강령/고성 기본무]
전통에서 시대정신의 원형을 길어 올렸던 1970년대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다시’ 전통으로 돌아가 시대의 몸짓을 탐구했던 밀레니엄 세대의 탈박들이 올라왔다. 강직하고 힘찬 강령 기본무와 경쾌하고 유연한 춤사위의 고성 기본무를 보며, 그들이 전통춤에 쏟은 진정한 마음이 어루만져졌다.
[2010년대, 진도북춤]
춤패 연이 다시 등장했다. 마지막 리허설 때까지 소리와 움직임의 질서를 다잡으려 애를 쓰더니만, 막상 무대에 서니 물 흐르듯이 움직였다. 질기고 탄력 넘치는 상쇠의 쇳소리와 주거니 받거니 호응하며 관객들을 들썩이게 했다. 환한 미소들이 조명에 반짝이며 대강당을 흥으로 가득 채웠다. 그렇게 그들은 공연을 열고 또 공연의 대미를 장식했다. 이후 탈박들이 새로운 10년을 준비하는 거처가 될 게 분명했다.
[대동놀이]
비록 단이 높은 무대였지만, 관객들은 몸이 기억하는대로 움직였다. 팔을 들어 어깨를 들썩였고, 다리를 들어 내리면서 오금을 접었다. 강강수월래 소리에 손을 맞잡고, 빙빙 돌며 마주 바라보았다. 길놀이와 고사로 열린 판(무대)을 마침내 대동으로 닫았다.
드디어 공연이 끝났다.
*
연초부터 4개월여 이어진 지난한 기획회의의 결실이었다. 기획, 의상, 기록, 재정 등 연출부 스텝들의 5개월 동안의 헌신적인 노력의 성과였다. 연출이 공연을 ‘준비’한다면, 뒷패는 공연을 ‘실현’한다. 뒷패들의 기민하고 침착한 진행이 공연을 순조롭게 풀어냈다. 무대에 오르기 전 5개월 동안 주말을 반납하고 연습에 매진한 출연자들의 노고로 무대가 살아 움직였다. 날씨가 화룡정점 했다. 길놀이하고 고사 지낼 때까지 멀쩡하더니만, 공연하러 대강당에 들어가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1982년 마당극 연출 이후, 41년 만에 다시 해보는 연출이었다. 쉽지 않았어도 할 만했다.
과거 선조들의 탈춤 마당은 마당이 곧 삶의 연장이자 삶의 일탈이 되는 장소였다. 원색의 의상과 이글이들 타오르는 횃불은 그것만으로도 화려한 무대연출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입체적인 무대설치는 물론이고 LED조명에 CG까지 동원되는 대중공연 예술무대에 익숙한 관객들을 감안하면, 무대의 현대적인 재구성이 절실하다. 물론 전통의 복원은 복원이라는 의미가 있다.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나아가 대중적인 공감을 목표로 한다면, 현대의 미감각에 걸맞은 적응이 절실하다. 무대의 활용, 더욱이 물리적 한계를 넘도록 도와주는 ‘영상을 활용한 무대 예술’에 대하여 진지하게 학습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유창복
성공회대 사회적경제대학원 겸임교수, 전 성미산마을극장 극장장, 전 서울시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 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