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모차르트와 밥 딜런의 광팬(狂fan)
이만주_춤비평가

예술가에게는 팬덤(fandom)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예술가에게는 그저그런 천 명의 팬보다 한 명의 광팬이 중요하다. 예술가가 광팬을 갖게 되는 것은 실력 때문인지 운 때문인지,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운은 다음 문제이고 광팬이 있으려면 우선 탁월한 실력이 있어야 하고 그에서 우러나오는 매력이 있어야 하리라. 광팬(狂fan)은 한자와 영어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신조어이다. 일반적으로 광팬이라 할 때는 특정 예술이나 스포츠를 미치도록 좋아하는 팬을 얘기하는 것으로 영어의 superfan이나 aficionado에 해당한다. 하지만 지금 필자가 이 글에서 사용하는 광팬은 어떤 특정 예술가나 스포츠맨을 광적으로 존경하거나 매료되어 경제적으로 또는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거나 그 상대를 위해 헌신하는 팬을 뜻한다. 영어의 superfan, patron, sponsor를 다 아울러도 그 뜻을 나타내기에 부족하다.


모차르트와 니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세계음악사에 있어 그가 불멸의 존재임을 의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차르트의 중간 이름인 아마데우스를 제목으로 피터 셰퍼가 쓴 동명의 희곡을 바탕으로 1984년 밀로스 포먼 감독이 만든 영화, 〈아마데우스〉는 그해 아카데미상 최우수작품상 등 여러 부문의 상을 받았으며 언제 보아도 감동을 주는 명화이다.

영화는 천재인 모차르트의 범인과는 다른 기벽과 일탈성을 보여주며 그의 천재성을 시기하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처럼 전개된다. 그러나 영화 중 많은 내용이 작품의 재미를 위해 꾸며진 이야기라고 한다. 영화 내용과 달리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관계는 실제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허구가 많다고 하지만 영화는 어쨌든 모차르트에 관한 많은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와 같이 모차르트에 관한 많은 사실이 전해져 내려오고 오늘날 그의 유물들이 고스란히 남아 후세 사람인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모차르트의 한 광팬, 니센(Georg Nikolaus Nissen, 1761~1826)이 존재했던 덕분이다.

모차르트 사후, 미망인 콘스탄체(Constanze Mozart, 1762~1842)의 두 번째 남편이 된 니센은 덴마크 출신 외교관이었다. 보통의 상식으로는 일반 남자 같으면 자기 부인 전 남편의 유품이며 편지를 모두 불태워버리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차르트의 유품들을 모으고 보관했으며 가족들이 가지고 있던, 특히 연로한 누나가 가지고 있던 모차르트의 편지 수백 통을 물려받아 간직했다. 그는 모차르트 생존 시에 알았던 사람들을 인터뷰했으며 전기적 자료를 모으기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했다.

그런 후, 그는 오랫동안 계획해 왔던 모차르트 전기 저술에 착수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1826년 3월, 62세의 나이로 잘츠부르크에서 사망했다. 자료 수집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그는 불완전한 서문만을 남겼다. 그가 남긴 자료와 메모에 기초한 전기 작업의 완성은 피르나(Pirna)에 거주하는 의사로 또 한 명의 모차르트 광팬인 포이어슈타인(Johann Heinrich Feuerstein, 1797~1850)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전기는 1829년, 〈모차르트의 전기〉(Biographie W. A. ​​Mozart's)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1792년, 덴마크 외무부의 외교관이 된 니센은 1793년부터 주(駐)오스트리아 대리대사로 일했다. 그는 모차르트가 사망한 1791년에서 6년이 지난 1797년 말경, 세입자로 미망인 콘스탄체를 처음 만났다. 그 1년 후, 1798년 9월부터 두 사람은 함께 살기 시작했고 1809년 6월에 정식으로 결혼했다.

콘스탄체는 모차르트의 사후, 자신과 두 아들을 위해 가난을 벗어나려고 힘든 시간을 보내던 중, 황제로부터 연금을 받고 궁핍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상당한 돈을 모으게 된 것은 모차르트와 관계된 일들에 니센이 참여하여 상대방과 협상하는 일의 대부분을 유리하게 처리한 덕택이었다. 그로 인해 콘스탄체와 두 아들은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모차르트의 두 아들을 보살피는 아버지의 역할도 충실히 수행했다.

니센이 처음 콘스탄체 집의 세입자가 된 것을, 필자는 우연이 아니라 타국인으로서 모차르트의 전기를 쓰려고 작정한 광팬의 의도적인 행위였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우연이었다면 세상일에서 신기하게도 일어나는 필연일 수밖에 없는 우연이었으리라.


밥 딜런과 고든 볼

2016년 10월, 스웨덴 한림원이 그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미국의 가수 겸 작곡가 밥 딜런(Bob Dylan, 1941~)을 선정, 발표하자 각국의 문단은 물론 세계인들이 놀랐다. 현금까지 문학상은 전통적으로 시인, 소설가, 극작가, 논픽션 작가가 타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노래 가사는 문학적 영역에서 고려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 같은 이변이 벌어진 것은 밥 딜런을 존경하는 한 광팬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대학생 때, 우연히 밥 딜런의 공연을 본 후 30년이 지나 추천 자격을 갖게 된 어느 광팬이 노벨문학상위원회에 20여 년에 걸쳐 12번 이상 끈질기게 추천한 노력의 결과였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데이비슨대학(Davidson College)의 학생이던 고든 볼(Gordon Ball)은 3학년과 4학년 사이에 하버드대학의 여름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1965년, 음악축제에 별 관심이 없던 그는 친구가 티켓을 구입하고 교통편을 제공해 주는 바람에,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New Port Folk Festival, 1965)에 참석했다. 그 축제에서 밥 딜런의 노래와 연주를 멀리서 보고 들은 후, 볼은 밥 딜런을 존경하게 된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볼은 채플 힐에 있는 또 다른 명문대학인 노스캐롤라이나대학에서 영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그는 ‘버지니아 군사학교’(우리나라 사관학교에 해당)에서 시, 창작, 영화, ‘비트 세대(Beat Generation)의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 2년간 그는 ‘워싱턴 앤 리 대학’(Washington and Lee University)에서 방문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대학교 4학년 시절, 밥 딜런의 문학성에 경도되기 시작한 이래, 볼 자신의 학문이 깊어갈수록 딜런의 문학적 예술성에 대한 이해와 인식 역시 깊어졌다. 하지만 볼은 “나는 밥 딜런의 팬이 아니었고 단 세 번만 그의 콘서트를 보았다”고 말했었다. 그는 롱아일랜드에서 친구 결혼식 피로연 때 딜런을 잠시 만난 적이 있을 뿐이었다.

볼은 밥 딜런을 노벨문학상에 추천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가 왔다. 볼이 추천에 인연을 갖게 된 것은 노르웨이의 밥 딜런 애호가 두 명, 저널리스트 레이다르 인드레보(Reidar Indrebø)와 변호사 군나르 룬데(Gunnar Lunde)에게서 비롯되었다.

노벨문학상 추천은 문학이나 언어학 교수, 과거 수상자, 각국의 작가협회 회장, 스웨덴 한림원 회원 또는 유사 단체 회원만이 할 수 있다. 따라서 노르웨이의 그 두 명, 밥 딜런 애호가에게는 노벨문학상 추천 자격이 없었다. 그들은 미국의 시인인 알렌 긴즈버그(Allen Ginsberg)에게 밥 딜런의 추천에 관한 의견을 보냈다. 하지만 긴즈버그도 추천을 할 자격이 애매한 상황이었다.

고든 볼은 긴즈버그와 가까운 사이였다. 영문학 교수인 볼은 노벨문학상 추천 자격이 되었다. 1996년 8월, 볼은 처음으로 밥 딜런을 위한 노벨문학상 후보 추천서를 작성해 노벨문학상위원회에 보냈고, 그 후 20여 년 동안 12번 넘게 추천을 끈질기게 반복했다.

밥 딜런의 노래 가사를 문학으로 인정하고 탁월한 문학적 업적으로 내세워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하는 볼의 처사에 대해 몇 명의 교수가 동조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미쳤거나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실은 볼조차도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해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20여 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볼은 노벨문학상위원회로부터 “편지, 감사합니다”라는 짧은 답장을 딱 한 번 받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추천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노벨문학상의 선정 기준은 작품이 ‘이상주의적 성향’이어야 하고 ‘인류에게 가장 큰 혜택을 주었어야 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The Nobel committee's standards for selection stipulate that works must be ‘of an idealistic tendency,’ and must ‘have conferred the greatest benefit on mankind.’)

볼은 추천서에서 밥 딜런의 문학성이 노벨문학상이 추구하는 목표에 합당한다는 식으로 논리를 구성했다. 그는 "이상주의적 성향과 인류에게 가장 큰 혜택은 종종 손을 맞잡고 어우러지며 밥 딜런의 이상주의적이고 행동주의자적인 노래 가사와 노래는 실제로 세상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되었다. ~중략~ 딜런의 상상력과 사고의 독립성은 1960년대 미국의 창의성을 상징하며 세계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라는 주장을 폈다. 실제로 1960년대 딜런의 〈Blowin' in the Wind〉 〈The Times They Are a-Changin'〉 등은 그를 ‘의식의 대변자’로 칭해지게 했으며, 민권운동과 반전운동의 상징적인 노래가 되어 전세계에서 널리 불렸다.

볼은 또 추천서에서 고대 그리스의 호머(Homer)가 음유시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옛 현악기의 일종인 라이어나 포르밍스(lyre, phorminx)를 연주했을 것이라는 일부 학자들의 학설을 언급했다.

마침내 2016년, 스웨덴 한림원은 ‘문학의 더 넓은 정의’를 수용하면서 미국 노래 전통 속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한 밥 딜런을 그해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했다. 노벨문학상의 상임간사인 사라 다니우스(Sara Danius)는 "시를 노래의 형태로 낭송하며 연주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인들과 다르지 않다. 그들의 작품은 종종 음악에 맞춰 연주되었다. 밥 딜런은 귀를 위해 시를 썼지만 그의 가사 작품들을 읽으면 시로서 완벽하다"라고 발표했다.

50년 이상 수많은 노래를 작사, 작곡한 작가이자 가수, 연주자로 활동한 밥 딜런은 또 1992년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이 수상한 이래 14년 만에 미국 문학가로 노벨문학상을 받는 수상자가 된 것이다.

노벨문학상의 선정 과정은 공개되지 않기에 고든 볼의 계속된 추천이 위원회의 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그러나 영향을 미쳤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볼 자신은 말한다. “저 자신, 제 노력이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중물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이만주

춤비평가. 시인. 사진작가. 무역업, 건설업 등 여러 직업에 종사했고 ‘터키국영항공 한국 CEO’를 지냈다. 여행작가로 많은 나라를 여행하며 글을 썼고, 사진을 찍었다. 사회성 짙고 문명비평적인 시집 「다시 맺어야 할 사회계약」과 「삼겹살 애가」, 「괴물의 초상」을 출간했다.​​​​​​

2023. 3.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