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일전에 연세탈박 50주년 기념공연(연세대 대강당, 9. 16.)이 있었다. 1980년, 나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서울의봄을 맞이하여 탈춤반 써클에 들었고, 그후 운동권학생이 되었다. 당시 탈춤은 매우 효과적인 정치운동의 방법이었다. 40년도 더 된 일이지만 지금도 눈앞의 일처럼 생생한 기억들이 있다.
연세탈박 50주년 기념공연 팸플릿 |
기억 하나
1980년 4월 어느 봄날, 학교 체육관에서 공연이 열렸다. 오후 늦게 시작된 공연은 길놀이가 끝나자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앉고 사방이 점차 어둑해지고 있었다. 갑자기 요란한 꽹과리 소리가 앞장서더니 장구와 북들을 둘러맨 이십여 명이 일제히 악기를 치며 체육관을 점령하듯 장악했다. 경쾌한 꽹과리의 자지러지는 소리를 가슴을 치는 북소리가 받치고, 그 사이를 섬세한 장고의 잔가락이 메웠다. 가끔 부아아~앙 퍼져나가는 징 소리가 체육관 전체를 정화하기라도 하듯 주기적으로 환기시켰다.
왁자한데 조직적인 풍물패의 기세와 짜임새가 놀랍고 신기했다. 어느새 풍물패들은 소고잽이들을 꼬리삼아 모조리 빠져나가고 없다. 순간 마당판이 텅 비는가 싶더니만 이번에는 10여 개의 횃불들이 줄지어 들어와 체육관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둥그렇게 판을 짰다. 그러자 체육관 벤치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체육관 바닥으로 우루루 몰려 내려오더니 횃불을 따라 둥그렇게 둘러앉았다. 크지 않은 키에 두루마기를 걸쳐 입고 굵은 안경을 쓴 남자가 어느새 걸어 들어와 둥근 마당판 한켠에 끼어 자리를 잡았다. 가부좌를 틀고 제 자리를 잡는가 싶더니, 들고 있던 꽹과리를 땅땅 치기 시작했다. 옆에 앉은 장고도 잔가락을 얹었다.
장단이 몇 번 반복되자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시뻘건 탈을 쓴 괴물 같은 것이 둘러앉아 있는 사람들을 거칠게 밀치듯 밀고 들어와 마당판 안으로 불쑥 뛰어들어서는 둘러앉은 관객들을 향해 “아~ 쉬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연속 세 번을 지르는데 관중들도 따라서 “쉬이~” 하자 좌중은 일순 조용해졌다. 이렇게 순식간에 주목을 끈 다음, 괴물은 고함을 지르듯이 뭐라 뭐라 재담을 했다. 소란스런 체육관의 울림에 잘 듣지는 못했지만, 주변에 앉은 관객들이 “옳소~” “그러게~” 하며 대거리를 하는데 당시 정치상황을 풍자하는 내용 같았다.
재담을 마치고는 펄쩍펄쩍 뛰며 춤을 추기 시작하는데, 솟구쳐 오르다 주저앉고 웅크리다 펼쳐내는 동작 하나하나가 그렇게 용맹스럽고 기운이 넘칠 수가 없었다. 마당을 두루두루 다 밟으며 관중들의 “얼쑤! 얼쑤!” 추임새를 끌어내며 한바탕 흐드러지게 춤을 추었다. 그러다가 지치는지 동작이 느려지고 제자리를 맴돌 무렵, 비슷한 듯 다른 탈을 뒤집어 쓴 또 다른 놈이 마당판 안으로 뛰어들어서는 지쳐서 비실대는 놈을 뒤에서 냅다 후려쳐 쫓아내고는, 마찬가지로 재담을 하고 또 춤을 한바탕 그렇게 신바람 나게 추었다. 이렇게 여덟명의 탈패들이 릴레이식으로 앞의 놈을 내쫓고 들어와 춤을 추고 나서 또 쫓겨나가곤 했다.
횃불이 시커먼 그을음을 뱉어내며 일렁일 때마다 내 가슴도 뜨겁게 일렁였다. 땅, 땅, 따, 당, 장단을 치는 꽹과리는 마치 내 마음을 벼리는 대장간의 망치소리와도 같았다. 체육관 안에서 벌어지는 이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완벽한 한바탕의 소동처럼 충격이었다. ‘역시, 이런 게 대학이구나.’ 난 내가 비로소 대학생이 되었다는 뿌듯한 자부심이 가슴에 차올랐다. 그후 며칠 새에 나는 대강당을 찾아가 연세탈춤반 써클룸의 문을 열었다.
80년대 대학탈춤현장 ⓒ유창복 |
기억 둘
“얘들아~ 나가자.”
선배가 쇠를 잡더니 한 판 놀자고 불렀다. 오후 내내 총학생회장과, 복학생 선배들 여럿이 나와서 연설을 하고 결의문도 낭독했다. 매우 중요한 결정을 하느라 심각한 거는 알겠는데, 영 재미가 없었다. 그 얘기가 그 얘기구만, 판 도는 거 마냥 반복되니 지루하기만 했다. 연단 앞에 모여 앉은 학생들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일단 행사를 마치자 땡볕에 늘어진 풀들처럼 하나같이 다 처져있다. 그해 4월은 학생회관 앞이나, 도서관 앞 광장에서 수시로 집회가 열리고 시위로 이어지던 것이 5월이 되자 아예 도서관 앞에 진을 치기로 하고 철야농성을 했다. 그럴 때마다 탈반이 나서서 분위기를 돋우었다.
선배가 굿거리 장단으로 서서히 앞길을 잡아가자, 우리는 악기 하나씩 집어 들고 따라 나섰다. 나는 물론 장구를 메고 따라나섰다. 우리들은 모두 중의적삼을 입고 있어서 서너 명만 함께 나서도 보기에 그럴듯했다. 하얗게 표백한 것도 깨끗하니 예쁘지만, 누런 채 거친 질감이 더 좋았다.
“창복이는 중의적삼 입었을 때 참 예뻐.”
선배들이고 동기들이고 내가 중의적삼을 입으면 모두 한마디씩 해주었다. 윗저고리를 걸치고 고름을 매어 잘 여미고, 아랫바지를 추켜 입고 나서 장단지에 행전(行纏)을 꽉 동여매면 그렇게 가뿐할 수가 없었다. 홑겹의 광목옷이니 일단 가볍고 단출한 데에다 거추장스러울 게 없어 펄펄 날 것만 같았다. 늘어진 사람들 깨워 일으키는 데에는 쇳소리만한 게 또 없었다. 일단 소리가 요란해서 화들짝하고, 따당 따당 경쾌해서 신이 난다. 가락이 빨라지기 시작하면 숨 가쁘게 다그치다가는 자지러지는 지경으로까지 몰고 간다. 기필코 상쇠의 대를 잇겠다고 안팎으로 공언을 하고 다니던 동기 녀석이 부쇠를 자처하며 상쇠 뒤에 바짝 붙었다.
상쇠, 부쇠 두 쇳소리가 어울어지면 훨씬 부드러워진다. ‘쨍~’하고 깨질 듯 생경한 소리가 서로 엉기며 ‘챙~’ 하는 한층 찰지고 상쾌한 소리가 된다. 여기에 장구가 거들고 나서면 쇠와 가죽이 만나 푸근한 화합의 소리가 만들어진다.
장구는 부드러운 가죽이 통을 울리고 통 안에서 공명된 소리가 강한 쇠소리를 감싸고돌아 튀는 걸 잡아준다. 훨씬 안정감이 든다. 게다가 채편을 두드리는 열채는 소리를 자잘하게 쪼개는 게 가능하여 다양한 변주를 만들어낸다. 장구가 쪼개는 소리가 쇠가 쪼개는 소리와 포개질 때는 짜릿한 화음 같은 것이 온몸에 전율처럼 타고 흐른다.
북은 우직한 힘의 소리다. 북소리는 귀로 듣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듣게 된다. 가슴을 때리고 가슴을 울려 결국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그래서 사물에서 그것도 마당에서 농악놀이를 벌일 때 북이 빠지면 통 매가리가 없다. 아무리 용을 써도 당체 힘이 오르지 않고 쉽게 지친다. 악(樂)을 치는 사람도 그럴진대 듣는 이들은 더 할 거다. 북치는 동작도 크고 힘차다. 발걸음이 크고, 박차고 뛰어오르다가 좌우로 휘젓고 다니면서 북을 두드린다.
징은 다른 악기에 비하면 한가해 보인다. 징 자체가 크고 쇳덩어리라 무거워서 그렇기도 하지만, 몇 번 두드리지도 않는다. 징은 사물(四物)에서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한다. 첫 박에서 놓치지 않고 소리를 내준다. 또 그 소리가 멀리가고 오래간다. 가락이 단순해서 다른 악기보다는 신경을 덜 써도 되는 만큼, ‘딴짓’ 할 여유가 생긴다. 껴들지 못하고 기웃대며 겉도는 사람에게 다가가 괜히 집적대기도 하고, 까불며 몰려다니는 애들에게 장난을 건다. 탈춤의 잡색 같은 역할을 하면서 관객들과 소통을 한다. 첫 박에서 ‘부와아아앙~’ 하며 공간 자체를 울리며 퍼져나가는 징소리는 마치 사찰의 종소리처럼 경건한 기운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예닐곱이 사물을 치고 나서니 도서관 앞은 금방 소란스러워지고 다들 뭐야 뭐야 하며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사람들이 어느새 우리 꽁무니를 좇고 꼬리를 물어 50명이 넘는 기다란 행렬이 만들어졌다. 교문에 이르자 거의 백여 명에 가까운 시위대 아닌 농악대가 교문을 사이에 두고 경찰과 대치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경찰 간부들이 긴장한 듯 무전기를 들고 왔다갔다 부산을 떨었다. 선배들의 리드로 교문을 향해 경찰에 대고 하는 듯 구호를 외쳤다.
“유신철폐” “계엄철폐”.
80년대 대학탈춤현장 ⓒ유창복 |
기억 셋
소련놈에 속지말고 미국놈을 믿지마라
일본놈이 일어선다 일본놈이 일어선다
조선사람 조심해라 조선사람 조심해라
‘울밑에선 봉선화야’ 노랫가락에 맞추어 비장한 듯 처연하게 부르는 노래가 끝나자 어느새 마당 한가운데에 누군가 들어와 조신하게 서있다. 하얀 치마저고리에 하얀 탈을 썼는데, 이목구비가 오종종한 데다 입술이 발그레한 것이 태가 고운 처자가 틀림없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비구니들이 승무(僧舞) 출 때 쓰던 고깔로 수줍은 듯 얼굴을 가린 채, 두 팔만 살짝 들어 움직이며 얌전하게 춤을 추고 있다. 잠시 후에 기다란 지팡이를 든 사내가 느끼한 동작을 하며 마당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복장이 특이했다. 탈춤에 어울리지 않게 양복을 입고, 마당을 어슬렁 어슬렁 거만하게 돌더니만 어느새 한쪽에서 춤추고 있던 처자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먼발치에서 흘끗 보고는 돌아서서 흐뭇해하고, 또 반대 방향으로 건너가 슬쩍 훔쳐보고는 돌아서서 몸달아했다. 그럴 때마다 처자는 내외를 하는지 샐쭉거리며 외면을 했다. 이렇게 몇 차례 시도하더니만 이번에는 아주 대담하게 다가가서 희롱을 했다. 그러자 관중들이 외쳤다.
“양키, 고 홈.”
마당판 이곳저곳에서 욕을 하듯 ‘양키 고 홈’을 외쳐대기 시작했다. 처자는 양키의 거듭된 희롱 공세에도 수줍은 듯 피하며 양키 애를 닳게 하더니만, 양키가 뭔가를 건네주면서부터는 돌변하여 양키가 거는 수작을 적극적으로 받아주는 게 아닌가. 심지어 이제는 아주 대놓고 즐기는 분위기로 넘어갔다. 서로 안듯이 마주잡고 덩실대더니 갑자기 장단이 빨라지고 요란하게 바뀌었다. 양키와 처자는 내숭을 내던지고 대담하게 함께 춤을 추는데, 그게 또 디스코였다. 그러자 양키를 욕하던 관객들이 이젠 둘을 싸잡아 아유를 했다. “야, 돈이면 다냐” “돈 몇 푼에 나라를 파냐” 괘씸한 두 연놈이 추는 춤이 차마 디스코일 줄은 예상치 못해 관객들은 놀라면서도 모두들 신나했다. 욕을 하면서도 또 몸은 들썩거리는 묘한 상황이 벌어졌다. 양키가 건네준 것이 뭔가 궁금했는데, 처자가 받아서 허리춤에 끼워 넣은 것을 자세히 보니, 커다란 종이뭉치인데 굵은 글씨로 달러($) 표시가 그려져 있었다. 그제야 상황은 분명해졌다. 양키가 순진한 처자를 돈으로 꼬여 매수를 한 것이었다. 양키의 돈에 넘어간 처자는 한국의 권력자나 자본가를 상징했다.
둘이 신나게 춤을 추고 있는 도중에, 건장한 체격의 인물이 마당으로 뛰어들었다. 빨강과 초록색이 섞여 번쩍번쩍 광택이 나는 옷을 입고 시뻘건 바탕에 우락부락한 인상의 탈을 쓰고 있었다. 악당 양키를 쳐부술 구세주가 온 것인 양 관객들은 환호의 고함을 질렀다.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처자에게 뭐라 뭐라 나무라는 듯했고, 양키에게는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내 양키와 대결이 벌어졌다. 서너 합을 겨루자 양키는 곧 뒷걸음을 치더니 마당 밖으로 쫓겨났다. 쫓겨나가면서도 주변에 앉아 있던 관객들에게 욕을 먹고 또 등짝을 얻어맞기도 했다. 적을 물리친 승리자는 처자를 구하고 다정하게 함께 어울려 춤을 추었다.
봉산의 노장과장을 변형한 창작탈춤 <통일무 외세과장>이었다. 노장을 양키로 바꾸고, 소무는 한반도를 상징하고, 취발이가 민중을 상징했다. 1979년 10.26 사건이 터지자 기회가 왔다며 78, 79학번의 탈박들이 겨울 내내 창작하여 ‘서울의 봄’에 공연을 했다. 그 후 80년대 내내 <통일무>는 마당극의 원형이 되었고, 학번을 이어가면서 변형되고 발전되었다.
유창복
성공회대 사회적경제대학원 겸임교수, 전 성미산마을극장 극장장, 전 서울시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 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