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발레를 만나면 발레를 깨부수라
이만주_춤비평가

봉불살불 봉조살조(逢佛殺佛 逢祖殺祖).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중국 선종사(禪宗史)에서 6조(祖) 혜능(慧能) 이래 가장 위대한 선사(禪師)라고 일컬어지는 임제(臨濟)의 말이다. 그래야만 도를 닦음에 있어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비로소 해탈하여 자유자재하게 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임제의 말을 발레에 대입해 보면 “발레를 만나면 발레를 깨부수라”는 말이 되겠다.

올해 하반기, 3편의 발레 공연을 보았다. 지난 8월 6일에는 광명시민회관 대공연장에서 김용걸 안무, 연출의 〈모던발레 갈라(김용걸의 유럽 발레 여행)〉를 보았고, 9월 7일에는 이화여대 삼성홀에서 ‘조기숙 뉴발레단’의 〈RE:CONNECT〉를, 이튿날 9월 8일(7, 8일 이틀 공연)에는 서강대학교 메리홀 대극장에서 김유미가 예술감독으로 안무를 한 YOOMIQUE DANCE의 〈EDGE〉를 관람했다.

이번 김용걸 공연은 그가 이제까지 창작 안무한 발레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특별한 기회였다. 지극히 감성적인 면을 가진 그는 작품에서는 특유의 반항 기질, 반골 기질을 여지없이 내보였다.




김용걸댄스씨어터 〈Vivaldi 붉은 머리의 사제〉 ⓒ김용걸


김용걸댄스씨어터 〈선입견〉 ⓒ김용걸


김용걸댄스씨어터 〈여정〉 ⓒ김용걸


김용걸댄스씨어터 〈바람〉 ⓒ김용걸




첫 작품 〈Vivaldi 붉은 머리의 사제〉는 안토니오 비발디의 곡 〈La Stravaganza〉를 사용해 안무했다. 다섯 명의 무용수가 추는 발레의 춤사위가 어째 기이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김용걸의 설명을 들으니 일부러 무조건 기존의 발레 동작과는 반대로 안무해 본 것이라고 했다. 사제이면서 사제보다는 음악가의 길을 걸었던 붉은 머리의 사제, 비발디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까? 두 번째 작품 〈선입견〉(Prejudice)은 카미유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Le carnaval des animaux) 14편의 소품곡 중에서 13번째 〈백조〉를 갖고 안무한 것이다. 미하일 포킨이 〈빈사의 백조〉에서 이 곡으로 안무했듯이 본래 발레 안무에서 많이 사용하는 이 곡으로 그는 백조가 아니라 뒤집어서 흑조의 이미지와 감성으로 안무했다. 세 번째 〈여정〉( L’Itineraire)은 16세기 말에 존 다울랜드(John Dowland)가 작곡한 기타의 원조격인 오래된 현악기 루트가 반주 악기로 나오는 루트 송(lute song)인 ‘Flow my tears’를 사용함이 놀라웠다. 네 번째 〈바람〉은 그가 부상으로 쉴 때 산속 절에서 우연히 목격한 한 줄기 회오리바람을 보고 영감을 얻어 안무한 것이라고 했다. 국악, 〈성금연류 가야금산조〉에 맞춰 발레 안무를 한 파격적인 시도였다. 마지막으로 공연한 〈로미오와 줄리엣〉 또한 상당히 도발적인 작품이었다. 프란츠 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 B minor S.178〉 곡에 맞추어 ‘로미오와 줄리엣’을 ‘신부’의 시각에서 재해석해서 작품을 만들었다. 그의 반항 기질과 결기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는 모든 작품에서 어깃장을 놓고 있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졌다.




  

김용걸댄스씨어터 〈로미오와 줄리엣〉 ⓒ김용걸




김용걸은 아시아인 최초로 파리국립오페라발레단의 솔리스트(soliste)였으니 그가 무용수들에게 요구하는 기량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거기에 더해 그는 나름대로의 안무 철학과 기법을 갖고 있다. 안무를 함에 있어 음악 선곡에 매우 신경을 쓴다는 것 또한 특징이다. 발레에서 국악의 사용이라는 탈법의 경지를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한국적 발레의 가능성을 엿보게 했다. 그는 무대에 올라 관객에게 자기 작품에 대해서 일일이 설명을 했는데 자기 나름의 논리가 정연했다. 작품에 대해 조리 있게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은 세계적으로 도약하려는 우리 예술가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능력이다. 앞으로 발레 대작의 창작을 기대해 볼 수 있겠고 그 어떤 역할도 수행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조기숙 뉴발레단'의 기획공연인 〈RE:CONNECT〉는 세 명의 에이스(ace)인 한혜주, 정이와, 이정민이 같은 주제 아래 각각 독립된 작품을 안무했다.  




한혜주 〈세 자매〉 ⓒ조기숙뉴발레단




한혜주의 〈세 자매〉는 같은 자매이지만 주어지는 환경은 다르기 마련인 세 자매의 인생행로를 둘째인 안무가의 관점에서 보여주었다. 네 소절로 되어 있는 작품은 어쩌면 안무자 한혜주 본인의 자적적 이야기인 것 같아 호소력을 발휘했다. 한혜주와 홍세희, 이윤서가 출연했는데 거의 현대무용에 가까웠다. 유럽의 기본춤은 발레이기에 사실 컨템퍼러리 발레와 컨템퍼러리 댄스에 큰 차이가 없다.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와 비음악적인 천둥소리 같은 음향을 사용한 것이 이채로웠다. 한혜주는 작년 12월 21일 서강대학교 메리홀 대극장에서 〈지젤의 방〉을 공연했었다. 고전발레의 〈지젤〉을 현대 젊은이가 부딪히는 현실 상황에 대입해 만든 작품이었는데 비록 소품이지만 노력하고 고심한 흔적이 역력했다. 발레의 미감을 흠뻑 보여준 역작이었다. 이번 작품 〈세 자매〉에서 한혜주는 공주 같은 이미지, 발레의 모범생 같은 이미지를 과감히 벗어던졌다. 이제 발레의 생태계가 크게 변하였기에 너무 예전의 고식적인 발레 문법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세계를 목표로 꿈을 높게 잡고 사고의 지평을 크게 넓힐 필요가 있다.






한혜주 〈세 자매〉 ⓒ조기숙뉴발레단




정이와의 〈흔들림에 대하여〉는 얽혔다가 풀리고 풀렸다간 얽히는 인간관계의 끊임없는 변화를 ‘흔들림’으로 표현하면서 한편으로는 균형을 잡고 한편으로는 그 관계의 속박에서 해방되고 싶은 바람을 그렸다. 정이와와 이수민, 남성 무용수 김명윤이 출연했는데 남녀 2인무가 수작이었다. 얇은 천 밑에서 셋이 손을 잡으며 화해와 화합의 이미지로 끝나는 엔딩이 인상적이었다.

이정민의 〈혼선〉은 남자 무용수 한 명, 여자 무용수 일곱 명이 등장하는 비교적 큰 무대였다.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안무자는 물론 모든 무용수들이 각자 겪은 인간관계, 즉 관계가 생기고 이어지고 시간이 가면서 복선이 생기고 복잡해지는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다. 일종의 공동창작의 형식을 취한 것 같았다. 뉴욕주립대 무용과를 나와 이화여대 무용과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한 안무자는 도입부부터 과감하게 조명에 있어 암전의 효과를 사용하여 관객을 몰입시켰다. 간단한 오브제인 비닐과 테이프를 사용해 인간사회와 인간관계의 상징 내지 메타포로 표현한 연출이 돋보였다. 역시 빗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를 음향으로 사용한 것이 이채로웠다.

‘조기숙 뉴발레단’은 같은 대학 출신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점, 그러기에 순혈주의의 여성무용단이라는 특성이 과거에는 그 강한 결속력으로 인해 강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다양성이 요구되는 예술계에서는 불리한 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기숙 뉴발레단’은 ‘한국적 New Ballet’라는 기치를 앞세우고 각종 실험을 계속해왔다.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봤던 필자로서는 조기숙만큼 몸과 춤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는 발레 무용가도 드물다고 생각한다.(필자가 그 철학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유럽의 흐름을 알고 있는 그녀는 갖가지 실험을 시도했고 지금도 실험 중이다.

그녀의 "몸을 중요시하는 몸의 철학(Somastics)", "춤은 머리를 비우고 몸으로 하는 해방의식"이라는 철학을 가장 잘 볼 수 있었던 작품이 지난 연말 한혜주가 〈지젤의 방〉을 하던 날에 공연한 〈순이와 철수〉였다. 작품은 춤춘다는 강박관념을 놓고 완전히 동심으로 돌아간 유희였다.






YOOMIQUE DANCE 〈EDGE〉 ⓒ김유미 




영어에서 커팅엣지(cutting edge)는 최첨단이라는 뜻이다. 십수년 전 국산 드라마에서 밑도끝도 없이 ‘멋있게, 상큼하게’라는 뜻으로 ‘엣지(edge) 있게’라는 표현이 사용된 다음부터 ‘엣지 있게’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이번 YOOMIQUE DANCE의 예술감독인 김유미가 안무한 〈EDGE〉는 그야말로 엣지 있었다. 별 기대를 안하고 갔다가 놀란 경우이다. 그 주제의 폭이며 내용의 스케일이 상상 이상으로 컸다. 김유미는 발레 작품에서 우주와 지구의 역사 속에서 진화하며 무한히 탄생, 소멸, 탄생을 반복하며 걸어온 인류의 의미를 헤아려 보이려고 했다. 그러면서 인류의 그릇된 주인의식과 이기심으로 파괴된 자연과 환경이 오히려 거꾸로 인류를 위협하는 상황에 처한 오늘의 모습을 성찰하는 내용을 그렸다. 이러한 거대담론이 이번 작품 〈EDGE〉에서 잘 구현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는 차치하고 지금까지 클래식 발레의 주제라는 것이 동화 같은 이야기,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 같은 것이었던 데 비해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기존의 발레 내용과는 다른 주제를 표현하다 보니 안무도 그에 맞추어 색달랐다. 그녀는 미국 조지아주의 공식 발레단인 애틀랜타 발레단의 정식단원으로 10년간의 국제적 감각을 쌓았다. 그 경험으로 현재 구미의 컨템포러리 발레의 흐름을 타고 있어 개성 있는 안무가 두드러졌다.

어떻게 뽑아왔는지 출연진들이 월드클래스, 최고 수준의 발레리나, 발레리노들이었다. 그것은 발레단을 이끌고 있는 그녀의 대단한 역량과 리더십이다. 그래서 김유미라는 안무자가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는데 나중에 로비에서 보니 의외로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였고 회임 중이었다. 숭고함이 느껴지면서 그녀에게 존경심이 일었다.




YOOMIQUE DANCE 〈EDGE〉 ⓒ김유미 




미국의 발레는 파리에서 명성을 떨치던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Ballets Russes, 러시아 발레단이란 뜻)가 파산하고 단원들이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을 때, 그 중의 한 명인 조지 발란신을 다재다능했던 신비스러운 유태계 미국인 링컨 커스타인(Lincoln Kirstein)이 뉴욕으로 데려와 1948년 ‘New York City Ballet’를 함께 창단하므로써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그 후 오랜 기간, 커스타인이 단장을 함). 그런데 지금 우리의 경우는 영국에서 춤과 발레를 연구한 조기숙, 프랑스 호랑이굴에서 솔리스트로 활약한 김용걸, 미국 현지에서 보고 배운 김유미와 같은 많은 해외파들이 국내에 포진해 있다.

나는 이번 3편의 발레 공연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문화예술계 분위기가 그들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고 성원해 주면 세계적인 발레안무가가 탄생하고 세계적인 작품이 나올 만한 가능성을 느꼈다. 프랑스를 제외하고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이제 자국민들은 발레를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로 독일이나 스웨덴 발레단을 보면 자국의 무용수는 많아야 한, 두 명뿐 전체가 외국에서 수입해 온 발레 무용수들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유아기부터 발레를 시키는 가정들이 많다. 한국은 혼란의 와중에도 국운이 기운을 타고 있으며 모든 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다. 한국은 발레의 무시할 수 없는 강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공연 보러 이대 삼성홀에 갔던 날, 브로슈어가 없길래 “어디에 있느냐” 물어보니, 티켓에 있는 QR코드를 찍어 보란다. QR코드에 스마트폰을 대니 그 안에 들어 있었다. 디지털 리터러시(digital literacy)가 요구되는 시대에 적응 못하면 고학력자라 하더라도 문맹자나 마찬가지가 되는 세상이다. 제4차산업혁명의 시대, 디지털시대. 모든 것은 급변하고 있고 발레도 변하고 있다. 요즘 유럽에는 “이제 클래식 발레를 보려면 한국으로 가라”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고 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는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말이나 임제의 ‘봉불살불’은 같은 맥락의 말이다. “늘 새로워져야 하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일 게다.

이만주

춤비평가. 시인. 사진작가. 무역업, 건설업 등 여러 직업에 종사했고 ‘터키국영항공 한국 CEO’를 지냈다. 여행작가로 많은 나라를 여행하며 글을 썼고, 사진을 찍었다. 사회성 짙고 문명비평적인 시집 「다시 맺어야 할 사회계약」과 「삼겹살 애가」, 「괴물의 초상」을 출간했다.​​​​

2022. 11.
사진제공_김용걸 조기숙 김유미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