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도쿄 시어터카이 기획 프로젝트 ‘Dancing Fairy’
에이징 바디, 춤추는 요정!
남정호_안무가

세계 춤 현장에서 에이징 바디(aging body)라는 용어가 대두한 지 한참 되었다. 기세등등 무대를 주름잡던 무용가들, 특히 현대무용가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자신들의 춤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몸에 대한 가치관과 철학을 자연스럽게 드러내어 불을 지핀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국내 춤 현장에서도 최근 들어 조금씩 에이징 바디가 화두로 등장하는 것은 반가운 현상이다. 지금까지 대학교수 무용가들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한국 무용계의 축이 현장으로 이동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Dancing Fairy: 춤추는 요정’은 2006년부터 동경의 시어터 카이(Theater X)에서 기획하는 프로젝트이다. 격년제로 해왔는데 코로나로 멈추다가 올해가 6번째이다. 요정은 나이와 성별이 없다지만 일반적인 요정 이미지를 뒤흔든 노년의 여성 무용가 너댓 명의 솔로 공연에 붙인 이 모순된 농담 같은 타이틀이 유쾌하다. 요정이 아니라 마녀라고 낄낄거리는 소리가 뒤에서 들리는 것도 같다.

참여무용가는 70세 이상을 불문율로 하고 대부분 현대무용가들로 구성되지만 일본 전통무용에 남다른 애착을 가진 프로젝트 코디네이터 케이 타케이(ケイ タケイ)의 취향으로 일본전통무용가들의 춤도 가끔 끼어 있다.

이 프로젝트를 거쳐 간 요정 중에 아키코 간다(カンダ アキコ)와 오리타 가츠코(折田克子)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아키코 간다는 마사 그레이엄의 첫 번째 일본인 무용수이고 오리타 가츠코는 이시이 미도리(石井 みどり)의 딸로서 한국 공연도 온 적이 있다. 80년대 초에 일본현대무용협회 내한공연을 본 사람이라면 이 무용수의 독특한 존재감과 탁월한 신체성에 압도된 기억이 있을 것이다. 무용수뿐이 아니다. 오랜 친분을 유지해 온 무용비평가 하세가와 로쿠(長谷川 六)와 야마노 하쿠다이(山野博大)도 코로나 기간 동안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인지 이 무대를 위해 만난 사람들은 자신의 차례를 의연하게 기다리며 어쩌면 마지막 춤이 될지도 모른다는 어떤 결연함으로 무장된 무사처럼 보인다.






시어터카이 ⓒhttps://ja.wikipedia.org, www.timeout.jp




시어터카이는 도쿄도(東京都) 스미다구(墨田區) 료고쿠(兩國)에 위치한다. 전철을 타고 가던 중에 갑자기 나타나는 스미다강을 보고 덩달아 따라 내리면 스모경기장이 주역인 장소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 극장도 에도시대에는 스모가 이루어진 장소였는데 1991년도에 극장으로 거듭났다고 한다. 나는 이 무대에서 2004년에 독무 〈신부〉를 공연한 적이 있고 2007년도에 일본의 이시이 가오르(石井 かほる)와 중국의 센 페이(Shen Pei), 캐나다의 린다 라빈(Linda Rabi)과 AST(Asia Round Table) 프로젝트를 수행하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 테시가와라 사브로(勅使川原三郞)의 춤도 자주 이 극장에서 보았는데 코로나 이전 그러니까 3년 전쯤에 좀 낡은 인상을 주던 극장의 로비와 좌석이 이번에 깨끗하게 재정비된 것을 발견했다. 끔찍한 코로나 시기였지 공연예술에 대한 일본 문화예술정책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고, 평소 쓴소리 잘하던 케이코 타케야(竹屋啓子)씨가 이번에는 조금 우쭐대는 어조로 말한다.




ⓒ남정호




올해 3월에 케이 타케이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코로나로 3년간 치를 수 없었던 Dancing Fairy에 참여 의사를 타진하였다. 기다리던 프로포즈였다. 나도 언젠가 끼워달라고 농담조로 이야기한 지 4년이 지났다. 그동안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고 나도 백발이 되었다. 그래도 최연소 출연자!

근 한 달 계속되는 시어터 카이의 제15회 국제 연극 무용제(IDTF 2022)의 개막 프로그램, 단 하루의 단 한번 공연이다. 함께 한 멤버들은 일본무용을 하는 하나야기(花柳)씨를 빼놓고는 30여년에 걸쳐서 언젠가 어딘가에서 공연과 프로젝트로 인연을 맺은 적이 있는 무용가들, 빨간 구두의 마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지 않은 이들이다.

게다가 조명을 소가 마사루(曾我 傑)씨가 맡다니! 소가씨는 다양한 역할을 하는 좀 불가사의하기도 한 사람. 2008년 멕시코투어와 인도네시아프로젝트에서 조명과 음향을 헌신적으로 책임져준 스탭인데 국제무용페스티벌의 프로듀서도 하지만 나는 작곡가로서의 그를 더 쳐준다. 아직도 내 즉흥 클래스에서 그의 음악은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이번에도 백여곡이 들은 usb를 건네어 주며 자유롭게 사용하란다. 한번 맺은 인연을 예사롭지 않게 지키는 마음이 와닿는다.

‘Dancing Fairy: 춤추는 요정’은 매번 공연 주제가 있다. 이번에는 ‘은혜 갚는 학’이라는 민화이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일본에만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뒤적거려 본 자료에 의하면 이 이야기가 무대화되면서 노부부와 학의 관계가 젊은 남자와 학의 관계로 바뀌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상투적인 낭만성을 제공하기 위해서. 일본이나 한국이나 ‘은혜’라는 단어가 새삼스러운 세상이다. 은혜를 갚기 위하여 자신의 깃털을 뽑아 베를 짜는 학의 희생에 공감할 수 있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바치는 것은 가장 숭고한 경지일 것이다. 희생은 고통이 따르고 고통이 커질수록 덕이 더 커진다. 이 순교자적 희열은 십자가의 예수그리스도 그리고 모든 중생의 고통을 아우르는 반가사유상의 깨달은 미소와 연결된다. 학은 자연의 비유이다. 엿보지 말라고 경고한 학과의 약속을 저버린 인간. 학-자연은 은혜를 배반한 인간에게 등을 돌린다.

〈학은 왜 떠나버렸나〉
이번에 춘 독무 제목이다. 3월 초에 발목을 수술한 터라 움직임을 자유롭게 구사하지 못했다. 겸손한 자세로 바닥과 만나고 그리고 공기의 냄새를 맡으며 팔을 휘둘렀다. 무대 바로 앞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시작하여 그대로 뒷무대까지 수직 이동하는 미니멀 공간구성. 게다가 움직임들 사이에 꽤 긴 정지까지. 단순한 춤! 몸이 성할 때는 도저히 안 되던 것들이다. 이렇게 철이 드나보다.

나는 춤을 잘 추기 위하여 일상의 쾌락을 조금 즐겁게 희생한다. 문을 걸어 잠그고 몰래 자신의 깃털을 뽑아 베를 짜는 학처럼 나도 문을 닫고 매번 지루하고 고통스런 스트레칭을 한다. 그 결과로 나오는 춤이 박수를 받는다면 그동안 고생한 몸에게 은혜를 갚는 셈이다. 프로그램에 적기에는 꽤 장황한 넋두리. 첫 리허설에서 만난 모든 이들과 같은 생각을 가진 공범의 미소를 교환하며 힘을 얻는다.




ⓒ남정호




함께 한 케이 타케이, 우에스기 미츠요(上杉滿代), 타케야 케이코의 춤을 글로 쓰고 싶지 않다. 아니 나의 글 솜씨로는 무리다. 긴장된 침묵, 우울하고 흥분된 생생한 현장의 숨소리와 땀 그리고 전장에 나서는 전사의 비장함을 글로 담을 자신이 없다. 배울 게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삶은 추락한다는데 다행히도 이 일본 할머니들에게서 배울 것을 발견하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춤을 한국 무대에 소개하여 모두와 나누는 것일 것 같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흥행이 잘되지 않았다는 〈크라이 마초〉(Cry Macho)를 보았다. 1930년생인 노장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21년도 작품. 젊은 시절 냉소적인 미남 배우였는데 지금은 자신이 걸어 온 길, 이미지 그리고 정열을 다 쏟아내어 성실하게 할 것을 하는 한 인간으로 보인다. 늙어가고 있지만 삶은 아직 남아 있지 않은가. 큰 키라서 더 두드러지는 구부정한 등을 보며 에이징 바디의 매력을 만끽하였다.

남정호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 무용원 창작과 명예교수​
2022. 8.
사진제공_남정호, ja.wikipedia.org, www.timeout.jp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