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춤전용소극장 엠극장이 손짓하던 세월
이만주_춤비평가

바깥세상에 어둠이 내리면 반대로 극장 안 무대는 불을 켠다. 환상의 불을. 그러면 새 세상이 열린다. 우리는 속세를 잊고 그 환상의 세상을 맞으려 극장에 간다~~~. 신을 잃어버린 시대에 극장은 신전이다. 대웅전보다 작은 산신각에서 비는 것이 더 영험 있듯, 오히려 소극장이 더 영험 있다. - 앞의 글은 필자가 과거 썼던 글들에서 간추린 것이다.

소극장은 중ㆍ대형 극장에 비해 적은 제작비로 공연을 할 수 있다는 경제적 장점이 크다. 무엇보다 공간이 작고 기존의 프로시니엄(proscenium) 무대와는 달리 대부분 박스(box) 형이기에 관객과 가까이서 교감과 소통을 할 수 있다. 동작 자체가 중요한 춤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작은 공간에서 새롭고 다양한 춤사위와 동작을 추구할 수 있으며 다양한 연출과 극적 표현을 시도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소극장은 젊은 무용가들에게 안무와 춤에 있어 실험의 공간과 연습장 역할도 한다.

영어로 Little Theater라고도, Small Theater라고도 하는 ‘소극장’은 미국연극사에 있어서는 1910년대와 1920년대 초,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가 기존 상업적 연극의 지위를 위협하기 시작할 때, 비상업적이며 실험적인 작은 연극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작은 극장’에서 비롯된다. 그와 같은 흐름을 소극장운동(Little Theater Movement)이라고 일컫는다.

작은 연극은 기존의 연극 제작이 갖던 경제적 부담에서 벗어나, 미국 극작가들의 새로운 희곡들로 실험적인 작품을 시도함으로서 미국 현대연극의 씨앗이 되었다. 그 시기 소극장은 시카고, 보스톤, 시애틀, 디트로이트 등에서 파상적으로 출현하며 우리가 익히 아는 유진 오닐(Eugene O'Neill)도 미국 소극장운동에서 선구적 역할을 했다. 이후 소극장 공연은 1950년대 뉴욕 오프 브로드웨이(Off-Broadway)에서 일반적인 경향이 된다.




테드숀 시어터 ⓒ김채현




춤전용 소극장은 1942년, 미국 현대무용의 창시자의 한 명으로 일컫어지는 테드 숀(Ted Shawn, 1891~1972)에 의해 1942년, 매사추세츠주 베켓(Becket), 제이콥스 필로우(Jacob's Pillow)에 만들어진 것이 효시라 알려진다(소극장으로서는 큰 중극장이다). 그리고는 춤전용극장으로 뉴욕시에 항용 DTW로 일컫어지는 ‘Dance Theater Workshop’이 1965년에서 2011년까지 활발히 운영되다가 그 이후 병합 확장되어 ‘뉴욕 라이브 아츠’(New York Live Arts)가 되었다.

영국 런던의 경우는 1970년대 후반 영국 예비군이 사용하던 건물에 The Place라는 명칭을 붙이고 London Contemporary Dance School과 London Contemporary Dance Theatre가 들어선 것을 시작으로 오늘날 극장과 여러 개의 ‘스튜디오 춤’을 위한 복합공간이 되었다.

한국은 1977년 김수근 건축가가 사옥을 증축하며 지하에 ‘공간사랑’이라는 현대적 소극장을 만든 것을 시발로 1980년대 ‘공간사랑’에서 실험적 춤창작 활동이 활발히 전개된다. 이 시기 사설 소극장으로 미리내소극장, 바탕골소극장, 산울림소극장, 창무춤터 등에서 가히 ‘춤소극장운동’이라고 명명될 만큼 많은 공연이 이루어지며 춤계 전체의 창작 역량이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1990년 6월 춤전용 소극장으로 개관되었던 두리춤터는 2009년, 리모델링을 통해 새 면모를 갖추고 현재도 운영되고 있다.

춤소극장운동 기획의 중심에 섰던 인물은 춤비평가 김태원이다. 그는 1988년 〈제1회 서울춤페스티벌〉 기획을 시작으로 1989년~1990년에는 공간사랑 〈안무와 즉흥시리즈〉 〈제5세대 춤꾼전〉 등을 주도했다.

얼마 전 가보니 ‘공간사랑’은 놀랍도록 작은 공간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작은 공간에서 그렇게 수많은 좋은 공연이 이루어졌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필자는 그 시절, 어떤 계기로 현대무용을 접하고 현대무용이 갖는 드라마성, 당시로서는 춤의 전위라고 할 수 있는 실험성, 자유롭고 아름다운 춤사위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공간사랑을 열심히 드나들었다.

김태원은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필자가 공간사랑에 현대무용을 보러 갔다가 우연히 그를 만났다. 당시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고 둘 다 30대였다. 그는 공연을 보고 나오는 나를 보더니, 현대무용 공연을 보러온 것이 가상했던지 아니면 미래에 내가 춤비평가가 될 것임을 예감했는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어떻게 나이도 많으신 분이 현대무용을 보러 오십니까? 다음부터는 표 사지 말고 그냥 관람하세요.” 그때 내 나이 대략 30대 후반이었건만 그의 말을 듣고는 속으로 “나도 이제 늙었군”하고 생각했다.

그럭저럭 세월이 흐른 후, 내가 언제부터, 왜, 김태원, 장석용과 어울리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 이후 그들을 따라 열심히 춤 공연을 보러 다녔다. 현대무용과 창작춤의 세계가 경이로웠다. 당시 그들 덕에 수유리 근처에 살던 무용가들과도 어울렸는데 지금이야 교수 아니면 중견 무용가들이 되었지만 당시로는 열렬히 춤 창작을 하는 젊은 춤꾼들이었으니 1주일이 멀다 하고 그들과 어울리는 일들이 황홀했던 시간들이었다.




  

M극장 외관 ⓒ이만주




그러다가 2006년 5월 어느 날, 강남 개포동 주택가에 춤전용 소극장이 생기니 가자고 해서 김태원과 장석용을 따라나섰다. 당시로서는 춤전용 소극장의 탄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앞으로 그 M극장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를 전혀 모른 채, 그야말로 떡 주고 술 준다고 해서 따라나선 것이었다. 그날 M극장을 설립한 이숙재 교수를 처음 만났던 것 같다. 그러면서 그녀가 1984년부터 밀물현대무용단을 이끌어 오면서, 수많은 현대무용 작품을 안무했으며 한글을 주제로 〈한글춤〉을 안무해 20여년 간 국내외에서 거의 100회 가까운 공연을 했음을 알게 된다.

그때부터 거의 매주말 M극장에서 춤 공연을 보며 M극장과 사랑에 빠졌다. 2007년부터는 ‘떠오르는 안무가전’ ‘춤과 의식전’ 등 여러 기획 프로그램과 함께 매년 유망하고 뛰어난 젊은 안무가들의 춤 창작 작품 100-120여편이 무대에 올려졌다. M극장은 당시 일년에 평균 90여 편의 레퍼토리를 무대에 올리는 뉴욕의 DTW를 앞지르고 있었다. 짧은 기간에 M극장은 한국 창작 무용의 대표적인 산실이 되었고 아시아, 더 나아가서는 세계의 컨템퍼러리 댄스, 허브(Hub) 중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M극장 내부 ⓒ이만주




요즘에는 카메라 성능들이 장족의 발전을 했고 스마트폰으로도 어둠 속에서 촬영을 할 수 있으나 당시만 해도 어두운 극장 안에서 움직이는 춤 공연을 사진촬영한다는 것은 특수기술이었다. 나는 10대 때부터 카메라를 만졌었기에 춤 공연 사진에 흥미를 느껴 열심히 찍었다. 몇 년이 지난 후에는 M극장 로비에서 춤 작품 사진전도 열었다. 무용가의 자태를 중심으로 또는 스튜디오에서 연출해 찍은 춤 사진으로 전시회를 연 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실제 춤 공연 사진으로 전시회를 연 것은 필자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춤비평가로 변신한다. 그리고는 간간이 M극장에서 영문행정 일도 보았고 해외섭외 일을 거들었다.

이숙재 교수는 M극장을 운영하면서 춤극장으로 시도해볼 것은 거의 다 시도했다. 수 회에 걸쳐 국제포켓춤축제(International Pocket Dance Festival)를 개최했고 국제적인 제휴관계(International Partnership)를 맺어 유럽의 극장, 무용단들과 교류와 공동작업도 했다. 소극장 규모로서는 한국 최초로 ‘댄스플랫폼’(Pocket Dance Platform)을 열었다. 이는 한국 춤의 작은 견본 시장이라 할 수 있는데 매우 뜻깊은 행사였다. 그녀가 시도한 사업은 하도 많아 일일이 그 구체적인 사례를 다 소개할 수가 없다.




M극장 공연행사 브로슈어들 ⓒ이만주




M극장에서 공연이 끝나면 주위 음식점이나 치맥집에서 소위 쫑파티가 이루어졌다. 김태원, 김채현, 장석용, 필자 등과 그날의 안무자와 공연팀, 일부 관객과의 자연스런 피드백(feedback)이 이루어지곤 했다. 잊지 못할 추억이다. 그런데 영국 런던의 극장가인 웨스드엔드(Westend)에는 뮤지컬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가 드나드는 펍(pub)이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 남아 있는데 우리의 음식점이나 술집은 계속 생기고 사라지곤 하는 것이 아쉽다.

이숙재 교수는 여성으로서는 놀랄 만치 통이 커 무용가들에게 많은 배려를 베풀었다. 필자에게는 자상하게 챙겨주는 다정다감한 누님 같았다. 그녀의 선후배들 말을 들어보면 젊은 시절 그녀가 방이나 홀로 들어서면 갑자기 실내가 밝아지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런데 나 역시 M극장에서 여전히 그와 같은 화사한 느낌을 받았었다. 김태원은 실력과 리더십, 기획력, 저돌적인 실천력, 인간 관계에서의 장악력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를 따라다니기만 하면 되었다. 당시의 이해준은 M극장의 총무이자 간사이자 살림꾼으로 큰일에서 온갖 궂은일까지 모든 것을 도맡아 했다. 그러기에 세 사람의 기여로 M극장은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세월이 감은 막을 수 없는 일. 이숙재 교수의 에이징(aging), 역시 김태원의 에이징과 척추 투병, 온갖 일을 다하던 이해준이 한양대 교수로 감으로써 M극장은 당시의 추동력을 많이 잃었다. M극장에서 젊은 춤꾼으로 안무와 춤 실력을 선보이던 서연수도 올해 한양대 무용과 교수가 되었다. 세월이 가고 있는 것이다.

M극장과 더불어 내 인생도 바뀌었고 내 생의 중요한 한 시대가 흘러갔다. 이제 나도 늙었으니 매주 가던 정열을 다시 복원시킬 수는 없다. M극장을 생각하면 아름다운 여인들, 젊은 춤꾼들이 발산하던 엄청난 에너지, 그 열기와 땀이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지고 양재동 고개를 넘던 일이 추억이다. M극장을 생각하면 옛 고향에 대한 노스탈쟈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춤 중에서도 현대춤과 한국창작춤을 위한 전용소극장이 생긴 것은 우리 무용사에 있어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M극장의 존재는 한국무용사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역사의 한 페이지이다. M극장은 춤전용극장으로 한국 기준으로는 뉴욕의 DTW, 런던의 The Place, 뒤셀도르프의 Tanzhaus에 못지않은 공헌을 했다. 다음 젊은 세대들에 의해 M극장의 정열이 다시 활활 타오르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이만주

춤비평가. 시인. 사진작가. 무역업, 건설업 등 여러 직업에 종사했고 ‘터키국영항공 한국 CEO’를 지냈다. 여행작가로 많은 나라를 여행하며 글을 썼고, 사진을 찍었다. 사회성 짙고 문명비평적인 시집 「다시 맺어야 할 사회계약」과 「삼겹살 애가」를 출간했다.​​​

2022. 9.
사진제공_이만주, 김채현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