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뉴욕을 잠시 벗어나 최근 다른 곳에서 느낀 인상이 희미해지기 전에 잠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헝가리의 Monotánc Festival(모노탄츠 페스티벌)과 인연이 시작된 것은 2018년이다. 필자는 2017년부터 (사)한국현대무용진흥회의 해외이사로 활동하고 있는데, 2017년 한국현대무용진흥회의 주요 사업인 SCF(Seoul International Choreography Festival)에 초청된 이인수, 정재우 두 안무가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개최하는 Monotánc Festival(모노탄츠 페스티벌)에 인솔해서 가게 된 것이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위치한 베슬렌 스퀘어 시어터(Bethlen Téri Színház)는 오래된 영화관을 소극장으로 탈바꿈시켜 만든 곳인데, 격년으로 솔로 무용가들만을 선보이는 Monotánc Fesztivál 을 개최한다. 연극의 monologue(독백)에서 영감을 받아 무용가들이 춤으로 하는 독백을 담는 솔로 페스티벌을 만들게 되었고 올해로 20년, 즉 10회를 맞았다.
모노탄츠 페스티벌 포스터 ⓒ코리아댄스어브로드 |
베슬렌 스퀘어 시어터 ⓒ코리아댄스어브로드 |
처음 모노탄츠 페스티벌을 방문하고 여러 날 작품들을 관람하며 ‘솔로’만 그리고 ‘독백으로 말하는 춤’이라는 콘셉트가 꽤 매력적으로 와닿았다. 공연이 끝나고 주최 측 관계자와 대화를 나누다 우연히 한국에서 이 컨셉의 페스티벌을 런칭하면 좋을 것 같다는 제안을 하게 됐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2019년 한국에서 ‘모노탄츠 서울’(Monotanz Seoul)을 시작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헝가리어인 ‘Monotánc’의 표기를 조금 더 익숙한 독일식 ‘Monotanz’로 표기하여 친밀감을 높이고자 했다. 물론 처음 ‘모노탄츠 서울’을 만들었을 때 지속적인 연계 사업이 될지 의문이었다. 한국 관객들의 반응도 미지수였고 또, 아무리 격년이라고는 하지만(헝가리의 페스티벌 개최되지 않는 해에 한국에서 격년으로 개최) 그 많은 솔로 작품들을 매번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앞섰다. 마침내 2019년! 보기 좋게 여러 지원사업에서 탈락한 후 사비를 털어 서강대학교 메리홀 소극장에서 3일간의 ‘모노탄츠’를 열었다. 다행히 결과는 성공적이었다고 본다. 3일 연이은 매진은 물론이고, 좌석이 부족해 참석하지 못한 많은 관객들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부족한 예산, 인력을 채우기 위해 정말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고, 그때 받았던 감사함을 절대 잊지 못한다. 다행히 어려운 상황에서 좋은 작품들을 무대 위에 선보일 수 있었다. 특히, 2019년에 소개된 작품 중에는 2020년 헝가리 현지로 초청된 김수정, 김주빈 두 안무가 이외에도 미국, 일본 등 타 국가에서 공연하는 기회 역시 연계되었다. 2020년 김수정과 김주빈은 아쉽게도 코로나19 펜데믹 상황을 고려하여 무관중 촬영본을 현지 극장에서 상영하는 식으로 대신했다. 또, 김수정의 작품 〈Querencia〉(케렌시아)는 비디오로 상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해의 그랑프리로 선정되기도 했다.
코로나19로 인한 긴 팬데믹이 가슴을 답답하게 조여오던 2년, 이대로 ‘모노탄츠’는 끝장날까 하는 의구심이 들 무렵. 우여곡절 끝에 2021년 모노탄츠 서울을 성사시켰다. 헝가리 아티스트들이 과연 한국으로 와서 공연할 수 있을지 큰 걱정을 안고서 노심초사하며 준비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방역 택시를 준비하고, 수도 셀 수 없는 PCR과 자가 키트 검사를 병행하며 그리고 무엇보다 ‘자가격리’라는 변수에 대응해 가면서 어렵게, 그래도 무사히 막을 내렸다.
헝가리 도착. 표상만, 김문희, 김선영의 모습 ⓒ코리아댄스어브로드 |
그렇게 올해는 김선영, 표상만 두 안무가가 헝가리 현지 공연을 다녀왔다. 2년간의 공백이 무색할 만큼 헝가리 현지는 활기로 가득했다. 어느새 벗어버린 마스크와 주요관광지에는 관광객들이 북적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공연장에도 많은 관객이 참석했다.
처음은 표상만의 〈살펴주소서〉를 공연하게 되었는데 우크라이나와 근접한 헝가리의 상황을 생각해 우크라이나 국기 색으로 의상을 바꿔 입고 온 표상만의 재치가 현지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공연이 끝나고 극장 로비에서 아티스트와 관객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친구가 우크라이나에 있는데 빠져나오고 있지 못한다’는 안타까운 이야기, ‘기차역에 가면 우크라이나에서 아이들을 들쳐 없고 국경을 넘어온 여성 난민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기 위한 민간인들의 캠페인이 이어지고 있다’라는 이야기 등등 다양한 사연들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었다. 팬데믹이 채 가시기도 전, 참 가슴 아픈, 그리고 내겐 먼 일처럼만 느껴지던 전쟁이 바로 코앞의 하늘 아래에서 고스란히 현실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였는지 표상만이 작품 〈살펴주소서〉를 통해 던진 삶과 죽음, 극복과 성장에 대한 메세지는 많은 관객의 마음을 울린 듯했다.
다음 공연은 김선영의 〈보따리〉였다. 버선에 먹을 묻혀 천 위에다 춤으로 그림을 그려내는 이 작품은 헝가리 로컬 관객들에게 꽤 인상적으로 남은 듯했다. 극장관계자에 따르면 한국적 소재를 컨템퍼러리하게 풀어낸 이 작품은 오랫동안 자신들의 마음속에 남을 것 같다고, 그리고 한국문화에 대한 기대감을 고취한 작품이라고 했다. 또, 한국으로 돌아와 몇 주가 지나고 난 뒤에도 작품이 마음속에 남는다는 메시지를 따로 보내오기도 했다. 이 공연과 관련하여 기억에 남을 사연으로는 공연이 끝나고 어느 관객이 무대 위에 남은 그림을 사고 싶다는 제안을 했는데, 안무가의 친필 사인이 담긴 이 작품의 판매금을 김선영의 넓은 아량으로 비영리로 운영되는 베슬렌 스퀘어 시어터에 기부하는 영광스러움도 남기고 왔다.
헝가리 모노탄츠 스탭과 함께 ⓒ코리아댄스어브로드 |
로비에서 표상만과 스탭들 ⓒ코리아댄스어브로드 |
돌이켜보면 그들은 우리를 참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개중에는 얼굴조차 처음 보는 스탭들도 많았는데, 마치 우리를 코로나19로 몇 년간 만나지 못한 친지를 다시 만나기나 한 듯이 대해주었다. 절대 잊지 못할 에피소드 중 하나는 단연 리허설이 끝나고 무대감독이 들고나온 홈메이드 발링카(러시아 전통주의 일종, 보드카와 비슷한 느낌의 과일향이 나는 50도이상의 독주)! 고된 리허설을 마치고 극장 뒷마당 야외에서 스탭들과 마신 발링카는 다시 열린 국제교류의 물결처럼 참으로 기분이 좋았다.
‘날 먹어’ 파이 ⓒ코리아댄스어브로드 |
‘날 먹어’ 파이 증정식 ⓒ코리아댄스어브로드 |
또, 하루는 한국에서 온 아티스트를 위해 서프라이즈를 준비했다며 스탭들이 모여 작은 상자 하나를 들고 나왔다. 상자 위에는 ‘날 먹어’라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당황스러운 문법의 한글이 똑똑히 적혀져 있었고, 그들은 김선영 작품 〈보따리〉에 등장하는 천의 레이어드가 이 파이를 연상시켰다는 말과 함께 놀랍게도 그들의 전통음식인 파이가 그 안에 잔뜩 들어있었다! 긴 여정 중 이 대목에서 가장 울컥함을 느꼈는데 그들이 우리와 또 작품과 깊이 소통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깊은 마음이 담긴 선물. 더 바랄 것이 없었다.
행복한 마음으로 다시 2023년 ‘모노탄츠 서울’을 준비한다. 헝가리 현지에서 그들이 전해준 진심 어린 환대, 잊을 수 없는 감성들을 되새기며, 더 깊은 마음으로, 더 신중히 그리고 정성 들여 프로젝트를 준비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면서 말이다. 비록 부족할 수도, 소박할 수도 있는 이 행사를 통해 새롭게 열린 국제교류의 물결 속, 우리 아티스트들이 더 많은 행복한 소통을 경험할 수 있길 꿈꿔본다.
민간무용단체의 해외진출을 돕는 비영리기관인 코리아댄스어브로드의 박신애 대표는 무용 국제교류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국제프로듀서이다. 2014년부터 2020년까지 뉴욕92Y 하크니스 댄스센터에서 아시아/코리아 릴레이티드 프로그램의 게스트 큐레이터로 활동하였으며 현재 국제 솔로 댄스페스티벌인 ‘모노탄츠서울’의 예술감독, 프랑스 파리 ‘S.O.U.M(Spectacle Of Unlimited Movements) 페스티벌’의 큐레이터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