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너무 솔직하고 웃슬픈 작품이라 공연 내내 재미도 있었지만 춤으로서 실험적인 시도였다. 예측불허였고 변화무쌍했다. 김현진의 춤, 〈나의 이야기〉는 현대춤의 확장이 어디까지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다른 한편 ‘삶의 확장’이라는 것도 생각해보게 했다.
작품의 처음, 무대 배경에 영상으로 많은 글이 비춰지면서 안무자가 무용수로 나와 글 내용대로 독백을 해댔다. 의외였다. 요즘 어떤 연극을 보러 가면 과연 이것이 연극일까 싶을 정도로 대사가 지극히 적어 의아심이 들 때가 있다. 십수 년 전, 한 시간 반 동안, 대사 한마디 없는 유럽의 어느 연극이 서울에서 공연되었을 때 전석 매진으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런데 그와는 정반대로 춤 공연에서 처음 전반부를 엄청 긴 사설의 독백을 하고 있다니.
김현진 〈나의 이야기〉 ©김채현 |
자기는 ‘캣맘’이라고 했다. 듣는 순간 나는 ‘캣맘’이 뭔지 몰랐다. 알고 보니 고양이들을 돌본다 해서 캣맘(cat mom)이었다. 그녀는 고양이 세 마리와 강아지 두 마리를 키운다 했다. 문득 수십 년 전, 프랑스에 머물 때가 생각났다. 많은 사람이 자그만 개들을 데리고 다녔다. 그때 얘기가 서구인들이 그만큼 고독하기 때문이란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얘기는 “사람은 배반하지만 개는 배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야성으로 살아가야 할 개에게 극진한 배려로 옷을 입혀 이상타 생각했는데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그대로다. 똑같은 현상이 우리 사회에서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도 이제 고독해질 대로 고독해졌다는 얘기인가?
계속되는 독백 속에는 여자로서 결혼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한국적 사고가 깊게 담겨 있었다. 결혼 못한 것을 부모에 대한 불효로 생각하고, 나아가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 놀라웠다. 순간, “십대 때 부모들이 알아서 중매결혼시켜 주는 옛날 결혼제도가 훨씬 현명한 제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는 연애결혼의 시대이니 이것저것 생각하고 따지다가 결혼을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이제 어떡하겠는가? 반려동물의 습속만 서구를 따를 것이 아니라 사고의 전환으로 결혼제도, 남녀 간의 관계도 서구의 다양한 형태를 받아들일 수밖에.
김현진 〈나의 이야기〉 ©김채현 |
춤 〈나의 이야기〉는 긴 사설의 독백 끝에 평면적 흐름에서 입체적인 구성으로 바뀌어 나갔다. 밀도를 더해가기 시작하면서 점입가경으로 관객의 시선과 몰입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이것저것 자신의 춤 경험을 얘기하며 그에 해당하는 춤 동작을 실연해 보여주었다. 나이에 비해 그녀 자신의 기량이 녹슬지 않았다. 처음 발레를 하고, 현대무용을 하고, 또 가르치는 선생 노릇을 해서 그런지 동작 하나하나가 정확했다. 춤 동작 이외, 권투 동작, 활 쏘는 동작도 보여주었다.
중요 대목에선 그에 해당하는 출연자와 소도구를 등장시켜 연극적 연출을 시도했다. 가령 어머니가 뒤늦게 일본 유학 가는 것을 표현할 때는 어머니에 해당하는 여성 출연자를 등장시켜 여행용 트렁크를 끌게 했다. 유학 간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정경은 여자 어린이를 등장시켜 무대 왼쪽에 걸려 있는 어머니 코트 속에 들어가 어머니의 냄새를 맡으며 그리움을 달래는 모습을 춤으로 표현하게 했다.
김현진 〈나의 이야기〉 ©김채현 |
작품은 4장으로 구성되었다. 1장 ‘나’는 안무자 자신이 현재 처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관객과의 소통으로 자신의 문제를 관객과 공유했다. 글도 예술도 정직하고 진솔해야 감동을 줌을 보여주었다. 2장은 ‘어머니’였다. 김현진에게 있어 어머니란 존재는 과거에도 그렇고 현재에도 삶의 버팀목이자 등대이다. 딸, 아내, 어머니로 집약되는 여성의 삶이란 희생이 강요된 삶이다. 3장은 ‘김현진의 무용세계’였다. 그녀의 삶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무용예술, 춤이다. 하지만 공연을 하면 기껏 관객이라는 게 옛날 예중, 예고에서 가르쳤던 제자들이었다. 37살에 세계적 무용가를 꿈꾸며 영국 유학을 떠났었지만 지금은 멈추고 있다. 4장은 ‘아버지’였다. 이 4장은 딸을 극진히 사랑하셨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춤예술로 표현한 사부곡(思父曲)이었다.
김현진 〈나의 이야기〉 ©김채현 |
각 장이 특색을 가졌지만 이번 작품에 있어서 하이라이트는 4장이었다. 무용가인 딸을 자랑스러워하던 아버지는 딸의 큰 성공을 보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화가셨다. 김현진은 지하철역과 국회도서관에서 아버지의 그림들을 마주친다. 생전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 그의 고뇌와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 죄송한 마음은 더 큰 그리움이 되었다. 안무자는 이 장에서 많은 춤과 연출을 시도했다.
무대 뒤 벽면에 아버지의 회화 작품인 ‘가야금 산조 시리즈들’이 영상으로 비춰졌다. 그 아버지가 회화에서 다룬 ‘줄 튕김’의 이미지가 무대에선 하얀 밧줄이라는 오브제로 바뀌어 등장했다. 실제로 안무자는 무대에서 하얀 밧줄로 잠시 줄넘기놀이를 하며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무대 장면은 빠르게 바뀐다. 네 개의 긴 하얀 밧줄과 함께 여덟 명의 여인들이 등장한다. 순간 폴리네시안들의 대나무 춤이 연상되더니 밧줄은 방사형을 이루다가 격자를 이루면서 변형을 계속한다. 김현진은 그 줄 위에서 춤을 추었다. 바닥이지만 공중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 같았다. 우리 모두는 운명이라는 줄을 타는 피에로라는 듯이….
여덟 명의 여자 무용수는 여사제들처럼 보였다가 여성 유형지에 갇힌 수형자들처럼도 보여졌다. 주어지는 삶은 그만큼 무거운 걸까? 김현진이 눕고 여인들이 차례로 눕는다. 미리 해보는 장례식 같은 느낌도 들었다. 출연한 여자 어린이까지 모두가 나와서 마지막 군무로 끝을 맺었다.
김현진 〈나의 이야기〉 ©김채현 |
여덟 명의 여인들은 춤을 전공한 무용수가 아니다. 그러나 춤을 추는 안무자와 좋은 앙상블을 이루었다. 전문무용수 아닌 사람이 여러 명 출연하다 보니 약간의 갈등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몰입하고 있었고 공연이 끝난 후, 각자 성취감으로 만족스러워했다. 커뮤니티 댄스의 좋은 본보기였다.
이 작품의 경우, 전반부는 모노드라마 같기도 하고 또 어떤 부분은 연극 같다. 마지막은 성공적인 커뮤니티 댄스다. 오늘날 소위 컨템포러리 댄스에서는 어떤 것을 시도해도 된다. 그래서 크로스오버, 융합, 장르 파괴, 멀티 장르라는 용어들이 사용된다.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자유, 그 자유와 실험이 컨템퍼러리댄스의 매력이자 장점이다.
발레의 정형성에 반기를 들고 모던댄스(modern dance)가 태동하고, 다시 모던 댄스에 남아 있는 구속성을 거부하는 포스트모던댄스(postmodern dance) 운동이 일어나더니 요즘은 용어가 컨템퍼러리 댄스(contemporary dance)로 통합되는 것 같다. 모든 틀을 깨부수고 상상력과 창작을 중시하게 된 한국 창작춤도 이제는 컨템퍼러리 댄스라고 봐야 한다.
우리말로는 ‘현대무용’ ‘후기현대무용’ ‘현대춤’이라고 번역하는 이 단어들, 이 용어들이라는 것이 참 애매하다. 본래 서양에서 ‘modern’이란 단어는 ‘예수님 전과 비교하여 예수님 나신 이후’ 또는 ‘예수님의 존재를 받아들인 이후’를 지칭하는 데서 처음 생겨났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 나신 지도 어언 2천 년이 넘었다. contemporary나 modern이 둘 다 ‘현대’라는 뜻이나, 전자의 경우 ‘동(同)시대’라는 뜻이 강하다 한다. 그런데 더 헷갈리는 것은 마사 그레이엄은 그 당시 비평가들이 ‘모던댄스’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그녀 자신은 심심치 않게 자신의 춤을 ‘컨템퍼러리댄스’라고 불렀다는 점이다.
아무튼 컨템퍼러리댄스는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완전종합예술이 되었고 따라서 현대인들 상상력의 싸움터가 되었다. 각국의 전통무용, 발레 등 모든 춤이 ‘현대 창작춤’이라 할 컨템퍼러리댄스(contemporary dance)로 수렴되는 시대에 세계 각국은 춤예술 발전에 각축을 벌이고 있다. 19~20세기 유럽에선 ‘오페라 하우스’(opera house)가 그 도시의 얼굴이었으나 이제는 각국의 도시들이 앞다투어 ‘댄스 하우스’(Dance House, Tanzhaus)를 건립하는 것이 현금의 추세이다. 뮤지컬도 노래와 더불어 그 기저에는 현대춤이 큰 몫을 하고 있으며, 오늘날 한류인 K-Pop이 세계적으로 각광 받는 이유도 노래와 함께 춤을 추는 댄스 뮤직이기 때문이다.
김현진은 크게 성공한 무용가를 꿈꾸다 좌절하고 이제 춤예술을 더 해야 될지 아니면 포기해야 될지 하는 짙은 고민도 내비쳤다. 젊음의 한창 시기를 넘긴 모든 무용가의 문제이고 더 나아가서는 세상의 예술가들이 부닥치는 문제이다. 나는 어느 해인가 우연히 보스턴마라톤대회 결승 라인에서 들어오는 선수들을 지켜본 경험이 있다. 그때 1등으로 아프리카 선수가 들어오고, 2등으로 한국 선수가 들어왔다. 나는 현장에서 한국인으로서 긍지를 느끼며 환호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모든 매스컴과 사람들이 1등에 주목할 뿐 2등은 곧 묻히고 말았다. 1등과 2등은 간발의 차이이건만 세상은 그렇게 가혹하다. 종이 한 장 차이로 운명이 갈리는 것이다.
성공한 이들은 목표를 성취하지 못한 인생은 의미가 없다고 의기양양하게 여긴다. 그러나 누구나 생의 목표를 이룰 수는 없다. “인생은 과정이다. 우리는 과정을 사랑해야 한다.” 아마도 ‘시지프의 신화’(the myth of Sisyphus)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산정을 위한) 투쟁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지프의 행복을 상상해 보아야 한다”(The Struggle itself is enough to fill a man’s heart. One must imagine Sisyphus happy) -알베르 카뮈.
현대춤 〈나의 이야기〉에서 김현진이 던지는 질문들은 그녀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여성, 예술가, 나아가 모든 인간이 갖는 근원적인 문제들이다. 이제 삶도 예전처럼 정해진 틀 안에서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삶도 현대춤처럼 사고의 지평을 넓혀 다양한 형태와 영역으로 확장시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 공연은 2022년 3월 31일 이화여대 ECC 삼성홀에서 있었다.
이만주
춤비평가. 시인. 사진작가. 무역업, 건설업 등 여러 직업에 종사했고 ‘터키국영항공 한국 CEO’를 지냈다. 여행작가로 많은 나라를 여행하며 글을 썼고, 사진을 찍었다. 사회성 짙고 문명비평적인 시집 「다시 맺어야 할 사회계약」과 「삼겹살 애가」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