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이번 달 부터 2회로 나누어 내가 프랑스 몽펠리에 에서 하고 있는 코레디시(Corée d’Ici, 여기 한국이 있다) 페스티벌(2015~)을 소개하려고 한다. 코레디시 페스티벌의 구체적 내용을 소개하기 전에 먼저, 그 시기(2013~14년) 나의 상황에 대해 먼저 얘기해야 할 것 같다. 코레디시 페스티벌을 만든 것만큼 나로서는 그 동기와 배경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번 호에는 그 상황과 배경이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한다.
당시 나는 몽펠리에에서 코레그라피(Coréegraphie, 한국을 그리다)무용단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몇 가지 난관에 빠져 있었다. 2000년부터 나오던 프랑스에서의 지원금이 점점 낮아지고 있었고, 어렵게 만든 작품들은 좋다는 평판은 받은 반면에 투어는 잘 안 되고 있었다. 투어를 하자면 투어를 담당하는 유통직원이 있어야 하는 데, 거기에는 많은 예산이 필요했다. 어떤 무용단은 무용 작품 예산보다 유통에 더 많은 예산을 쓰는 곳도 있었다. 나는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있는 여건도 안 되었다. 나에게는 좋은 작품 만드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그래서 항상 홍보와 유통은 그 다음이었다.
몽펠리에 무용페스티벌에 오른 한-불 120주년 기념작 〈벽을 넘어서〉 ⓒ남영호 |
2006년. 한-불 수교 120주년 때, 나는 운좋게도 몽펠리에 무용축제에 한국인 최초 로 무용제작 지원을 받으면서 초청되었었다, 연습실 2달에다 극장 레지던트 일주일, 거기에 작품 제작비 약 2500만원까지 아주 좋은 초청 조건이었다. 난 페스티벌 측에서 제공하는 2달 간의 연습장 외에 한달 더 연습장을 따로 준비해서 공연 제작 을 했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시댄스 페스티벌에서 도와주었고, 지원의 도움과 공연 도 하게 해주었다. 아직도 시댄스의 이종호 선생님께 그때의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때 여러가지 예산 중에 처음에는 홍보와 유통에도 예산이 좀 잡혀 있었다, 그런데, 제작비에 문제가 생겼다. 그럴 경우 공연 제작기간을 줄여서 그 예산들을 확보해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로서는 처음으로 유럽에서 중요한 무용페스티벌에 초청되는 작품이라 일단 좋은 작품을 만드는 데 모든 것을 투자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천재도 아니고, 빠른 시일 안에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무용수들의 몸 언어가 연결되고 순환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3개월의 제작 기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예산은 음악 작곡 외 거의 다 무용수 월급 에 다 들어갔었던 걸로 기억한다. 춤작품에 제일 중요한 것은 무용수이기 때문이다. 어느 춤작품을 보면 그 작품에 무용수들이 얼마나 참여하고,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를 느낄 수 있다, 나는 관객들이 내 작품을 보면서 작품이 좋다 안 좋다 라고 하는 것보다 내 작업에 대해 같이 공감하고, 즐길 수 있기를 더 바란다. 나는 항상 과정 중이니까!
“좋은 작품을 만들어도 유통이 안 되면 아무 소용도 없다”는 말들을 하지만, 그 반대로 좋은 작품도 아닌데 유통을 한다는 것을 나는 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때도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내가 만든 나의 모든 작품들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긴다. 그때그때마다 난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가지며 최선을 다했다 고 말하고 싶다. 난 작품을 만들 때 다른 일은 전혀 안 한다. 무용수들도 최선을 다 해 주었다. 사실 2006년 작품 공연 후에 몇 번 이곳 프랑스 프로 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 분들 대다수가 내 작품이 나쁘지 않았다, 좋았다고들 말했다. 결국 문제는 유통을 담당할 직원을 위해 예산이 있어야 하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제일 어려운 것이 예산을 찾고, 파트너 만나서 후원을 요청하는 것이 제일 어렵다. 지금은 코레디시가 내 개인이 아닌 한 나라의 문화예술을 알리는 페스티벌이니 훨씬 얘기하기가 수월하다. 하지만 그 당시는 내 개인 무용단에 지원해 달라고 말하는 그 자체가 참 부끄럽고 어색하고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프랑스건 한국이건 기회가 되면 지원해서 선정되면 그저 감사히 받고 최선을 다한다. 훗날, 내가 보답할 날이 올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그로부터 10년 후, 나에게 50살의 나이도 다가오고 있었다. 만 24살의 나이에 프랑스로 가서 산 생활, 이제 프랑스에서의 생활이 더 길어지고 있었다, 정신이 산란했다. 온통 물음뿐이었다. “나는 누구인가?”에서부터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난생 처음으로 온통 나 자체에 대해 묻고 있었다. 나라는 사람의 본질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성공보다는 행복함을 추구하는, 나와 남들에게 부끄러운 사람이 아닌, 정직한 사람이고 싶었다. 나는 고집쟁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내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지 못 하는 답답한 존재이며, 그렇다고 획기적으로 이벤트를 만들어서 하는 존재 도 아니다. 그렇지만 남은 없고 나만 있다고 생각하는 이기심의 소유자도 아니다. 나는 무엇보다 쓸모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에 행복하고, 보람된 삶을 살고 싶었다. 그렇다면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는 감당해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내가 내 무용단의 난관과 한계에서 고민한 것은 바로 나라는 존재가 점차 쓸모없어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프랑스에 온 이후로 2013년도까지 프랑스에서의 나의 인생에 대해 처음으로 하나씩 하나씩 훑고 기억하기 시작했다.
운이 좋았다. 프랑스에 온 지 2년 만에 프랑스 무용단에 입단하게 되어 프로 무용수로서 원 없이 프랑스를 비롯 전 유럽에서 춤 췄다. 무용단을 만들어 외국인이면서 프랑스 지원을 받으며 큰 작품은 못했지만 작업도 오랫동안 했다. 크게 유명 해 지진 않았지만 해보고 싶은 작업들도 했었다. 그 어려운 몽펠리에 무용축제에 제작 지원까지 받으며 초청되었었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춤과 테크놀로지 작업도 했다. 이것을 더 연구하고 싶었지만 언젠가 기회가 오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면서, 내 스스로를 위안했다.
처음으로 테크놀로지와 작업했던 작품이 La Gazette에 보도되었다. |
같은 그 시기에 우연히 한-불 수교 130주년 때 한국과 프랑스 간의 많은 교류 가 있을 거라는, 2015~2017년 3년간 교류가 활발할 거라는 정보를 들었다. 한-불 120주년 때가 생각났다. 한-불 120주년과는 또 다른 무엇인가를 하고 싶었다. 한-불 120주년 때 내 개인 무용작품을 했었다면, 130주년 때는 내 개인이 아닌 한국의 문화 예술작품을 하자는 생각이 났다, 한국 춤 페스티벌이 아닌 한국의 모든 문화 예술, 철학, 미학, 역사, 관광까지 아우르는…. 당분간 춤 만드는 작업은 연구 기간 으로 돌려놓았다. 춤 아닌 다른 경험들이 필요했다. 내 춤을 더 풍부하게 해 줄 수 있는 그런 경험들….
나는 춤 만드는 작업을 하면서 문득 폐쇄된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내 작품 과 관계되는 사람들하고만 만나서 얘기하고 지냈다. 그만큼 내 작품에만 집중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 갑갑하고 답답할 때도 있었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오픈된 마음으로 즐기면서 공부도 할 수 있는 계기, 여기서 한국 페스티벌을 하자! 다른 나라들의 도시에서 하는 한국 페스티벌과는 좀 다른 프랑스 남부 지중해 도시 몽펠리에에서 하는 새로운 역동적인 한-불페스티벌! 일회성 페스티벌이 아닌 지속가능한 페스티벌, 이벤트성 행사가 아닌 적어도 10일 이상 하는 페스티벌!난 이 생각을 아는 프랑스 친구에게 얘기했다. 그 친구는 너무 좋은 프로젝트라며 본인도 참여하겠다고 하고, 기획하는 친구도 소개해 주었다.
먼저 페스티벌 이름이 필요했다. 내 무용단 이름이 코레그라피(Coréegraphie, 한국을 그리다) 인데, 갑자기 생각난 단어 코레디시(Corée d’Ici, 여기 한국이 있다)가 생각났다. 간단하면서도 밀도 있는!!! 그래픽하는 프랑스 친구가 그 로고와 페스티벌 포스터, 프로그램 구성을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또 다른 친구가 사이트를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한 친구는 몽펠리에 시민 중 한국을 다녀온 사람들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내 무용단 비디오 찍어주는 비디오 감독은 페스티벌 행사 비디오를 찍겠다고 하면서, 그 동안 내 공연으로 한국에 갔을 때 공연 작품 비디오 외 한국의 풍경, 도시 들을 찍은 것 들이 있다고 보여주었다. 몽펠리에의 어느 갤러리 대표가 미술 전시 쪽은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제안했다. 본인이 알고 있는 한국 예술가들도 있고, 잘 꾸며 보자고 했다.
코레디시(Corée d’Ici) 로고 |
나는 한국에 있는 철학하는 친구에게도 이 생각을 얘기했다. 내가 춤 작품 하는 것에 관심과 응원을 해주는 친구였다. 친구가 아는 사람을 통해서 미술가를 소개 시켜주었다. 그분이 전통예술 기획하는 분을 소개시켜 주었다. 그분은 전통 풍물놀이 팀과 전통음악 팀을 섭외해 주었다. 거기에 내 작품 달 항아리 퍼포먼스 등등 프로그램들이 점점 만들어지고 있었다. 기획서가 만들어지고 나서 나는 몽펠리에 시청 문화부와 미팅을 신청했다. 한-불 130주년 프로젝트는 나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 해주는 기회였다. 춤을 내려놓으니 보이는 게 훨씬 많아졌다. 그리고 프랑스 외무성에서도 한-불 프로젝트 공모가 났고 신청했다. 거기서 답변이 왔는데 아주 좋은 프로젝트라 격려해 주었고, 마침내 코레디시 페스티벌은 프랑스 외무성에 의해서 한-불 130 주년 프로젝트로 선정되었다.
남영호
현대무용가. 1991년 프랑스에 간 이래 남쪽의 몽펠리에 지역을 중심으로 현대춤 활동을 해왔다. 2015년부터는 한국문화를 프랑스에 소개하는 축제인 '꼬레디시'를 매년 가을 주최하는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