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정상(頂上)의 예술가? 별 차이 없습니다!
이만주_춤비평가

오스트리아에 서너 번 갔었던 것 같다. 물론 나만의 주관적인 생각이겠으나 오스트리아는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 기품이 있다. 요즘은 어떨지 몰라도 내가 오스트리아에 갔을 때는 어디서나 클래식 음악이 은은히 흘렀다. 수도 비엔나에는 겨울이면 검정색, 회색, 짙은 초록색 코트를 입은 사람들이 육중한 건물들과 어우러지면서 깊은 멋을 느끼게 했다. 어떤 면, 비엔나의 카페가 파리의 카페보다 더 고풍스럽고 매력적이었다.

비엔나도 그리 큰 편이 아니어도 그 외 중소도시들, 잘츠부르크, 클라겐푸르트, 할(Hall) 같은 도시들도 정감 있고, 호숫가 마을들은 아름답고 평화스럽기 그지없다. 특히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와 ‘잘츠부르크 국제음악제’, 그리고 줄리 앤드루스가 여주인공으로 나왔던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Sound of Music)의 주무대였다는 인연으로 일년 내내 활기가 넘친다.

오스트리아뿐 아니라 유럽 겨울 스포츠의 메카라 할 수 있는 인스부르크는 아기자기한 매력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두 번 갔었던 것 같다. 두 번째 방문은 의외로 인공수정(artificial crystal) 공예품을 만드는 ‘스와롭스키’(Swalovsky) 본사 초청으로 갔었다. 주로 여성들을 위한 장식품, 액세서리 등을 만들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와롭스키가 본사를 테마파크로 만들어 놓고, 한국에서는 ‘여행작가’로 필자를 단독 초청한 것이었다.

크고 기괴하게 생긴 큰 거인 모습의 인공폭포, 나무숲으로 이루어진 미로(迷路), 현대적인 동영상예술관, 진기한 보배와 예술작품들을 전시해 놓은 갤러리. 스와롭스키 본사와 자사 제품의 홍보를 위해 초청한 것이니 그것들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두어 차례 식사 대접에 응하는 것으로 나의 소임은 끝났다.

인스부르크에는 한때 우리나라 전국체전에서 100·200·400m를 석권한 3관왕 출신이자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에 출전해 100m 부문에서 금메달을 딴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육상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현역 은퇴 후, 스포츠 지도자의 길을 걷기 위해 유럽으로 유학가서 공부하던 중, 나중에는 변호사가 된 인스브루크 출신 법학자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그녀는 한국과 오스트리아 사이 가교 역할을 하기에 한국의 여행업 관계자들은 그녀를 ‘인스부르크의 한국 여인’, 또 시가집이 티롤에 있고 남편의 성이 핑크(Fink)이기에 ‘티롤의 핑크’라 불렀다. 그녀는 두 번 다 필자를 반가이 맞아주며 오스트리아 여행에 도움을 주었다.

두 번째 방문에서 L여사는 나에게 인스부르크 음대(대학 이름이 기억에 가물가물함)의 바이올린 전공 교수를 소개해 주었다. 그 교수는 한국에서 교환교수로 학생들을 지도했다고 하는데 처음 만나는 터인데도, 만나자마자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반겼다. 그는 놀랍게도 한국의 생활한복을 입고 나왔다. 그는 인스부르크 어떤 야산 기슭의 고급음식점으로 자기 차를 운전해 나를 데려간 후, 인스부르크식 점심을 대접했다.

나는 유럽을 다닐 동안 품게 된 긍금증이 있었다. 식사를 하며 대화 도중 그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보았다.

“유럽을 다니다 보면 거리에서 또 지하철역 안이나 앞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보기에 어떤 경우에는 상당한 수준의 연주인 것 같다. 도대체 길에서 연주하는 그들과 당신 같은 바이올린 교수와 또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사이에는 그 연주 수준에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 겁니까?”

“별 차이 없습니다!”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명료했다. 나는 놀라서 재차 물었다.

“그렇다면 어떤 예술가는 거리에서 동전 몇 닢을 구걸하며 연주를 하고, 왜 어떤 이는 세계적인 연주자가 되는 겁니까?”

“우선 재능을 타고나야 한다. 그리고 열심히 연습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든 주위 사람이든 홍보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물론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부모를 잘 만나야 되고, 경제적으로 풍족하다면 더욱 좋다. 마지막으로 운도 따라야 한다.”

세상에는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가 없는 건 아니다. 샹송의 여왕으로 프랑스의 국민가수였던 에디트 피아프(Édith Piaf, 1915~1963)는 빈민가에서 태어나 할머니가 경영하는 매춘업소에서 성장했다. 열다섯 살 때 아버지와 불화로 결별한 후, 스무 살 무렵까지 혼자서 이 거리 저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간신히 생계를 꾸려나갔다. 20세기 전세계인들에게 영감을 주고 많은 메시지를 전해준 찰리 채플린(Charles Spencer Chaplin, 1889~1977)은 아홉 살이 되기 전까지 보육원에 두 차례 보내졌다. 다섯 살 때 처음 무대에 선 후, 학교 교육이라곤 거의 받지 못했다. 그런데 둘 다 어느 한 순간, 그들의 재능을 알아본 귀인에 의해 발탁되는 기회를 맞는다. 그러한 기회는 탁월한 재능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신이 허용한 특별한 행운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많은 부모들이 자기 자식들을 발레리나로 피아니스트로 축구, 야구, 골프 선수로, 또 바둑의 제1인자로 출세시키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지극정성을 다한다. 그런데 극히 소수만이 박세은, 손흥민, 박찬호, 이세돌이 되는 것이다. 무수한 지망생들이 도중에 이름도 없이 중도탈락한다.

흔히 얘기하기를, 인생의 성공은 기칠운삼(技七運三)이라고 한다. 기량이나 실력이 70%를 좌우하고 운이 30%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더 나아가 기삼운칠(技三運七)이라고 한다. 70%가 운에 달렸다는 것이다. 기(技)란 타고난 재능과 무수한 연습의 합(合)일 것이다.

‘티롤의 핑크’인 L여사는 육상인으로서는 키가 작으나 금메달리스트였다. 나는 한 번 물어본 적이 있다.

“어찌 작은 키로 육상의 금메달리스트가 될 수 있으셨습니까?”

“키가 작은 대신, 부단한 연습으로 같은 시간 안에 다른 선수들보다 뛰는 걸음의 수를 늘렸던 겁니다.”

예술계나 스포츠계에는 남들보다 신체적으로 결함이 있고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음에도 최고가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고, 결국 정상에 오른 이들의 일화가 회자된다. 그러니 운이야 하늘에 맡기고 적어도 ‘기삼’을 꽃피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Artur Rubinstein, 1887~1982)의 말년에 인터뷰하던 이가 “사람들이 당신을 세기적인 위대한 피아니스트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노쇠한 루빈스타인은 더듬거리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예술에서 누가 더 위대하고, 누가 더 낫다고 어찌 얘기할 수 있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모네, 피카소 중에서 누가 더 위대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말할 수 있다면 단지 다르다(only, different)는 것이지요.”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피카소야 역사상의 거장들로 선택된 이들이니 보통의 예술가 수준에서 새삼 거론할 필요가 있겠는가?

운동경기에선 명백하게 승부가 갈린다. 하지만 음악, 미술, 춤 예술에선 어느 수준 이상이라면 누가 낫다고 판정하기가 어렵고 심지어는 불가능해지지 않는가. “단지 다름이 있을 뿐이다.”

그래도 예술에도 언제나 경쟁과 경연이 있다. 또 정상에는 한 두 명만이 오르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그러니 어찌하랴. 승부와 판정에 연연하기보다 노력 그 자체를 즐기는 마음을 오늘도 내일도 다지는 수밖에...

이만주

춤비평가. 시인. 사진작가. 무역업, 건설업 등 여러 직업에 종사했고 ‘터키국영항공 한국 CEO’를 지냈다. 여행작가로 많은 나라를 여행하며 글을 썼고, 사진을 찍었다. 사회성 짙고 문명비평적인 시집 「다시 맺어야 할 사회계약」과 「삼겹살 애가」를 출간했다.

2022. 4.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