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이번 가을에 가진 유럽 즉흥 투어는 나에게 많은 의미가 있는 프로젝트였다. 브뤼셀과 암스테르담 그리고 몽펠리에서 현지 예술가들과 만나 하는 즉흥 공연, 여태까지 있지 않은 형태의 해외 공연이다. 의상도, 음악도, 조명도 준비할 필요 없이 몸뚱이만 챙기면 되는 공연. 드디어 이 경지까지 온 것을 실감하면서 각각의 도시에서 가진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강렬한 자각과 그 공간에서의 만남에 대한 설렘을 안고 기다려왔다.
케이티 덕(Kaite Duck) ⓒ남정호 |
고백하자면 암스테르담에 거주하는 케이티 덕(Kaite Duck)은 나의 즉흥 춤에 큰 영향을 준 말하자면 즉흥에 대한 나의 이론이 또 다른 층(layer)을 갖게 해 준 사람이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20년 전, 2004년에 나는 암스테르담의 SNDD(School of New Dance Development)에서 공부하던 제자 백경선의 추천으로 그 학교에서 즉흥을 가르치는 케이티 덕에게 한예종 창작과 학생들을 위한 특강을 위촉하였다. 그녀의 수업을 학생들과 함께 참여하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안무 도구로 사용하는 즉흥을 공연 차원에서 하는 방법론에 전적으로 동의하였다고 할까. 팔뚝에 멋진 문신을 새긴, 나보다 한 살 많은 미국 여자에게 홀려 방학을 이용하여 암스테르담에 거처를 얻고 그녀가 현지에서 하는 집중 수업들을 본격 참여하였다. 흥미로운 보물을 캐기 위하여는 지구 끝까지라도 갈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던 시기였지.(웃음) 그녀는 자유롭고 지혜롭고 열정적이고 그리고 이 수많은 형용사를 동원해도 모자랄 것 같은 특별한 무용가였다.
그녀의 즉흥 이론은 명료하다.
1. 신경학적인 면에서 몸을 인지하여야 한다: 춤은 마음과 몸을 통합시키는 방법이다 - 뇌의 작용이 움직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 말하자면 생각하면서 움직이라는 것이다. 즉흥을 본능적으로 해내는 이들에게 하는 경고장!
2. 몸(뼈, 근육, 피부)에 대한 해부학적 지식: 당시 미국에서 공부한 이들은 Bonnie Bainbridge의 BMC(Body Mind Centering)의 흔적을 안고 있다. 이 체계를 바탕으로 신체를 훈련하면 그 덕분으로 즉흥 무용가는 움직임의 폭을 넓히고 부상의 위험에서 어느 정도 보호받게 된다.
3. 실시간 구성(Realtime Composition): 무대에서 안무적 자세를 가지고 구조적인 관점에서 접근 - 전체의 시간적 흐름과 공간을 감지하여 그때그때 실시간으로 필요한 선택을 한다.
4. 함께하는 이들과의 관계: 나의 움직임이 상대에게 어떤 작용을 하는지 - 경쟁이 아니라 서로에게 유익한 도움을 주는 것 - 상대의 동작을 복사하거나 공간에 접근하거나 등으로 상대를 지지해 준다.
5. 음악: 존 케이지(John cage)로부터 지미 핸드릭스(Jimmy Handriks)를 넘나드는 음악적 유연함 - 즉흥춤은 즉흥음악과 함께 해야 하며 즉흥춤은 음악과 몸의 선택에 따라 만들어지는 춤.
6. 관객과의 교류(Communication): 아는 만큼 보는 관객 - 신선한 발견을 유도, 참여!
그 후 케이티는 10여 년간 국내에 와서 꽤 여러 번(아마 10번 정도?) 자신의 예술적 자산을 여러 형태의 워크숍과 공연으로 전파해 왔으므로 나뿐만 아니라 국내의 많은 무용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한다. 시간은 빨리 흐른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나갔다. 이번 순회공연 기간 중 암스테르담의 케이티로부터 모든 멤버를 식사에 초대한다는 연락이 왔다고 전해 들었다. 십 년 만에 그녀를 다시 보게 되는 기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남정호 |
케이티가 준비한 식사는 아래층에 차려진 에피타이저인(haring: 소금물에 절인 청어)으로 시작되었다. 예전 방문 때 새벽 장에서 맛을 보고 잊지 못했던 비릿하면서 고소한 맛이다. 암스테르담에 도착하자마자 이 맛을 찾았는데 케이티의 집에서 소원을 풀었다. 잘게 썬 양파와 함께 한가득 펼쳐놓은 잘 염장되어 연분홍색을 띤 청어를 염치 불구하고 걸신들린 듯이 연달아 집어삼켰다. 생선을 좋아하는 나의 식성에 꼭 들어맞는 이 맛이란. 위층에 올라가니 무슬림 식으로 바닥에 커다란 식탁보를 깔아 상을 차려놓았다. 멋지다. 아래층의 식탁을 올리기는 힘들고. 열 명에 가까운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서 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아마 미술가인 까다로운 딸과 함께 차렸을 것이다. 결핍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제시한다지.
채식주의자인 케이티가 차린 메인요리는 따뜻한 야채수프! 호박, 콩 그리고 샐러리도 들어갔나? 옆에는 커다란 사발에 가득 담긴 샐러드, 방금 빵집서 나온 듯한 빵이 먹기좋게 잘려서 바구니에 담겨있다. 시차와 피곤한 여정을 거친 우리들(김원, 박호빈, 김윤정, 장광열 포함)에게 안성맞춤인 음식이다. 이런 것을 소올푸드라 할 수 있지. 어느 고급 레스토랑서 먹는 음식보다 시각과 위장을 만족시켜 준다. 수프를 전날부터 준비했다는 말에 수긍한다. 나도 호박죽 끓이느라 하루를 다 바친 기억이 있다. 신선한 재료와 오랜 시간을 들인 정성으로 마련된 음식이 주는 위안은 밖에서 시달린 육체와 영혼을 보듬어 준다. 그 힘으로 다시 밖에 나가서 큰 소리 칠 수 있었지.(웃음) 스튜디오로 사용하는 공간 한구석의 난로에서 계속 데워지고 있는 이 수프를 두 그릇이나 가득 담아 먹었다. 최근 들어 집밥의 가치를 알아가는 나에게는 이보다 더한 대접은 없던 것 같다. 그동안 움켜잡고 있던 케이티에 대한 앙금은 어이없이 녹아버렸다.
ⓒ남정호 |
음악가 알프레드도 함께 있었는데 물불 가리지 않던 반항아 이미지가 부드러워졌네. 결혼을 하였다고.(웃음) 실토하자면 나는 10여 년 전에 이 음악가에게 화를 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을 내내 속에 담고 있었다. 서울 즉흥 공연하면서 부산 공연에 함께 하겠다는 약속 취소를 공연 바로 전에 통보한 것이다. 케이티가 화가 났다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기가 막혀서 화도 못 내고 돌아가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보조를 맞추는 우울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지.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얼떨결에 아무 준비 없이 무음으로 하게 된 그 짧은 공연의 찌꺼기가 아직도 불편하게 남아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 요즈음은 이런 걸 트라우마라 하더라. 무리하면서 관대한 선한 역할을 했었지. 그건 냉소적이거나 분노 조절을 못하는 순진하고 무능력하고 답답한 나를 포장하는 위선일 뿐이었어. 이번에 암스테르담에 가면 케이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 오래된 내용을 어설픈 영어로라도 자세하게 설명하고 해명을 듣고 싶었어. 사죄를 받고 싶었나? 그런데 두 번째 수프를 먹으면서 ‘내가 남의 죄를 용서하듯이 나의 죄를 용서하소서’란 주 기도문 구절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를 거쳐 간 많은 이들도 나에게 이런 앙금이 있었을 거란 생각을 왜 이제야 갖게 되었을까. 일흔이 넘어도 오류의 반복을 통하여야 겨우 알아채는 철부지.
ⓒ남정호 |
다음 날에 즉흥춤을 나누자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 장소를 다시 찾았다. 그러고 보니 주소는 같았지만, 예전에는 정원과 함께 아래층서 거주했었는데 3, 4층으로 옮겨졌다. 4층은 주로 스튜디오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는 모양인데 크지는 않지만 잘 정돈되어 움직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오랜만에 하는 그녀와의 즉흥춤 세션은 더 이상 흥미롭지도 흥분되지도 않았다. 예전에 가졌던 감동은 어느덧 낡아져 과거의 것들로 전락하고 관심 밖으로 밀려나지. 나는 그동안 또 다른 층들을 쌓았나 보다. 그래도 빚 청산이 된 것 같이 마음이 편해졌다. 담에 제주서 만나면 그대에게 어울리는 집 근처 채식주의 밥상으로 안내할게요.
이전에는 내게 가장 중요한 주제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짧고 덧없고 위협받는 삶의 한가운데서, 나를 춤추게 하는 어떤 소리, 어떤 색깔, 어떤 향기 아니 따뜻한 수프처럼 감각적 사건을 만나는 것이 더 감동적이랄까. 그러고 보니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다. 유쾌한 외로움을 가지고 뭉툭해지기 쉬운 세상에서 뾰쪽함을 지켜낼 거야. 걱정할 필요? 없다. 너는 항상 건너갈 준비가 되어 있잖니.
남정호
전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