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내가 사는 동경도 서쪽에 위치하는 타마시에 꽤 오랜기간 동안 공사를 해 왔던 도서관이 문을 연 지 1년이 되었다. 그전의 도서관은 근처 폐교를 활용하여 소박하고 빈티지한 멋이 있어 역시 일본이라고 감탄한 터라 좋아하는 중앙 공원과 연계해서 하는 이 대대적인 공사에 은근히 반발심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중앙공원은 호수주변에 잔디로만 이루어져서 탁 트이는 시야가 있는 아무것도 필요 없는 빈공간의 멋진 공간이었다. 한여름이면 재즈 음악회를 할 만큼 시크한 이 공원에도 손을 대다니…
ⓒ남정호 |
그동안 공사주변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드디어 완공한 새 도서관을 가니 혀를 내두루게 되는 세심한 시설과 편의성으로 어쩔 도리 없이 납득하게 된다. 개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칸막이 공간들이 전체 벽을 싸고 있는데 갈 때마다 누군가 이미 버티고 있어 웬만한 시간에는 자리 잡기가 힘들다. 거주공간이 좁은 일본이라 도서관이 개인연구실로도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는 모양. 한쪽 구석에는 소리도 냄새도 안 나는 카페가 있어 다른 이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만큼의 음료와 음식을 조용하게 팔고 있다. 일본국내의 일간지 신문들뿐만 아니라 각국의 신문들[한국은 조선일보]도 비치되어 있어 글로벌 시대를 살고 있다는 증명을 나름 하고 있는 것 같다.
춤코너를 찾다가 연극과 전통연희 사이에 끼어있는 몇개의 책을 발견했다. 발레사전, 발레뤼스, 니진스키, 부토, 컨템퍼라리 댄스, 그리고 두꺼운 최승희에 관한 책도 있는데 오호 통재라 무용은 애석하게도 이 도서관의 정식 분류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층에는 신간서적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잡지들, 그나마 일본에서 유일한 무용잡지 ‘댄스 매거진’이 포함되어 제때 교체되고 있다. 그런데 방금 나온 상큼한 새 커버로 된 잡지들을 보니 근처에 있는 서점들이 힘들겠다는 오지랍도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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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는 두 개의 큰 서점이 있다. 하나는 전철역과 연결되어 오가며 짜투리 시간을 해결하기에 안성마춤인 곳이고 또 하나는 동네에서 가장 크다고 하는 쇼핑센터가 있는 건물 맨 위층에 있어 가끔 아이쇼핑하다 지치면 서점에 들러 죽치면서 무용잡지를 위시하여 눈을 현혹시키는 패션 잡지등을 실컷보다가 제풀에 눈치가 보여 결국은 오래 간직할 수 있는 요리 잡지라도 구매하곤 하였지.
그러고 보니 이 책방들은 서서히 아니 급진적으로 문구류나 그외 일상에서 사용하는 잡화점 투로 변모하고 있다. 가엽다. 아직은 멋진 달력이나 만년필 잉크를 살 수 있는 장소로는 유효하다만 웬만한 물건들은 다들 100엔가게 같은 곳에서 구입하는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최근엔 영상매체로 문학을 대하는 사람도 꽤 있고 또 많은 이들이 알라딘으로 책 주문을 하니 책방이 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가 아닐까.
춤추지 못할 만큼 나이들면 자그마한 예술분야 책방이라도 지키고 싶다는 막연한 환상은 나무아미타불.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고? 언젠가 내 책을 빌려간 사람도 돌려주지 않고 나도 남에게 빌린 책을 뻔뻔스럽게 나의 책꽂이에 꽂아놓고 돌려 줄 시간을 미룬다. 대학시절 학교도서실에서 책?을 하나 훔친 기억이 있다. 무용서적이 별로 없다고 투덜거리며 도서실을 서성거리다가 한 구석에 현대무용테크닉을 소개하는 스케치들로 편집된 인쇄본이 쌓여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가슴이 뛰었다. 장 발장은 은식기를 훔쳤지만 나는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그 인쇄본을 하나 슬쩍 챙겨 한 동안 책장에 꽂지도 못하고 침대구석에 말아서 숨겨놓았다. 마사 그레이엄 테크닉의 도판이었다. 전공을 현대무용으로 바꾸었지만 상당히 오랜 기간 발레의 고상한 미학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었던 터라 이 테크닉 수업을 잘 따라갈 수 없었지. 정면에서 다리를 벌리고 중심부를 수축하는 자세가 산부인과를 연상하여 감당하기가 힘들었던 것같다. 그런데 나에게 별 매력없던 그 책자를 왜 탐했을까. 내용보다는 춤에 관한 책이 고팠던 것이었나. 사연이 있는 이 책자를 차마 버릴 수 없어 제법 오래 계속 끼고 있다가 드디어 종이쓰레기로 정리를 할 수 있는 배포가 생긴 시기가 왔으니 다행스런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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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언어학자 친구가 추천해 준 체코 소설가 보후밀 흐라발(Bohumil Hrabal)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폐지를 압축하는 한 노인의 독백이다. 그는 재고 난 책 중에서 일부를 골라 읽으며 지식을 섭취했고 자신의 종속적인 삶을 주체적인 삶으로 바꾸려고 발버둥치다가 끝내는 자신의 몸도 책처럼 압축되는 것을 선택한다. 작가는 사랑하는 책과 함께 하는 이 결말을 죽음을 승천으로 수용하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으로 말하고 싶었나. 책을 사랑한다면 책이 되어야 하나. 같은 체코 작가인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의 냉소적 달콤함과는 대조적으로 진지하고 치열하여 쓰디 쓴 맛을 풍긴 이 조그만 책을 끝까지 놓을 수가 없었다.
책이란 어떤 존재일까. 책 한권 내려면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지. 확실한 것은 책 한 권에는 응축된 저자의 그간의 인생, 철학, 가치관이 압축되어 있는데 그에 비해 독자는 너무도 헐값으로 책을 손에 넣어 대수롭지 않게 뒤적거리다가 급기야는 쓰레기로 처분한다는 것이다. 복사된 명화를 깔고 앉아 화가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에 마음이 쓰이듯이 나는 여전히 인쇄된 글을 종이 쪼가리로 볼 수가 없고 그래서 그것들이 아무렇게나 취급당하는 것을 보는 것이 불편하다.
요즘 들어 더욱 빈번하게 옷정리, 책정리를 하는데 옷정리는 즐겁게 주위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는 데 반해 책 정리는 진도가 나가지 않는데, 다행스럽게도 운명은 아직 내편이다. 내가 사는 제주의 볍씨마을은 공동도서공간이 있어 내 책을 내어놓을 수가 있고 다른 이가 내 놓은 책을 읽을 수가 있으니. 책이 나를 따라다니는가 보다. 내킨 김에 또 하나 자랑하고 싶은 것은 마을의 비건 책방! 동백동산 한바퀴 돌고 들러서 훑어보다가 호기롭게 한 권 건진다. 요즘 세상을 따라잡기 위하여, 아니 내가 현재 어디에 있는지 아는데 무시할 수 없는 장소이다.
그래도 예전에 삼키면서 읽었던 책을 되새김하며 읽는 재미가 쫀쫀하다. 느리게 책장을 넘기게 되는 이 새로운 습관은 한국어로 쓰인 춤서적이 거의 없는 시기에 사전에 의지하며 외국 서적을 읽는데만 사용되었다. 그래서 발견한 정보를 우쭐거리며 써먹는 보람이 있는 시절이 었었는데. 지금은 인터넷 검색하면 다 나오는 자료들…
아주 오랫동안 나의 독서는 거의 번역본 문학서에 의지하였다고 할까. 지난 삼십년 간은 밀란 쿤데라를 위시하여 미셀 투르니에(Michel Tournier), 알랭 드 보통 (Allain de Boton), 무라카미 하루키 등 그러고 보니 외국 남자작가들의 책을 주로 읽었구나. 그래도 이들의 글을 읽으면서 가보지 않은 세상의 한 귀퉁이를 보고(voir) 가지고(avoir) 알게(savoir) 된 것은 확실해. 어린 시절에 읽은 소년소녀문학 전집의 책들도 서양의 대문호들의 번역판을 각색한 거였어. 대부분의 책이 일본어로 번역된 것을 다시 한국어로 바꾼 거라고 하던데…
그보다 더 전에는 집으로 오는 신문의 연재소설과 엄마의 여성 잡지를 읽었지. 여성잡지의 ‘어떻게 할까요’라는 상담코너를 꽤 좋아했어. 엄마는 결코 알려 주지 않는 감추어진 여자 어른들의 세계를 염탐하는 스릴이 있었어. 한동안 그 흉내를 내어 일기를 썼는데 초등학교 6학년 미남 담임선생이 길게 답을 써 주신 기억이 있어. 그 당시에는 일기를 검사받았잖아.
그러니까 독서 시작은 한국어로 된 글이었구나! 근데 이상한 것은 번역본에 익숙해선지 작가가 쓴 우리말을 그대로 읽는 것이 어색했더랬어. 아니 신선한 재미가 없었다고 할까. 짠 된장국과 나물로 된 늘상 먹는 새로울 것이 없는 밥상을 받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한국 여자작가에의 흥미는 아마 박완서로 부터 시작된 것 같다. 배고플 때 먹는 친근한 엄마밥상을 받은 감동. 이 밥상은 익숙하지만 지루하지 않고 정겹고 맛나고 그리고 몸에 좋은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지. 무엇보다 그녀가 인터뷰 중에 했던 말은 나를 대변하는 듯한 말이다.
“나는 그냥 자유 민주주의자예요. 개인주의자구, 그냥 소박한 민주주의 개념 있잖습니까. 자기가 이 사회에 필요한 무슨 일을 하고 있으면 항상 떳떳할 필요가 있고 자기 일을 남에게 존중받고 싶고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만큼 남에게 대접하는 게 옳고, 남에게 당하기 싫으면 남에게 그러지 않는다든가 하는 아주 기본적인 개념 있잖아요. 평등개념이라고 할까. 우리 민족의 뿌리깊은 거지만. 어떻게 보면 난 좋은 의미의 개인주의자라고 생각해요. 내가 중하니까 남도 중한 거지, 전체를 위해서 나 개인을 희생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그런 소박한 민주주의 개념이 남자와 여자 사이라고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정도의 생각밖에 전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는 사회가 싫은 거죠.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억압하는 사회도 싫어요.”
다음으로 예사롭지 않은 김혜순, 고정희, 조혜정 그리고 최윤을 읽고 눈과 귀가 열리고 같은 시대에 이 땅에서 살고 있는 공감을 느끼며 동시에 열등감이 생겼어. 그녀들의 글을 읽으면서 내가 너무 오랫동안 안전한 성 안에서 한심한 생을 살았다고 자책도 했지. 부지런히 따라잡으려 하지만 글쎄~~~ 그러다가 애늙은이 같은 김애란, 한강을 읽었고 지금은 영화를 다시 보게 하는 정희진, 그림의 매력으로 유인하는 이현아의 글을 읽고 있지.
나는 한강의 노벨상 소식을 듣고는 마치 숨겨 둔 여동생을 세상에 내놓은 느낌이 들었다. 수상소식에 요란하게 수선떠는 주위에 합세하다가 돌아서서 혼자서 빙그레 웃기도 했다. 십여 년 전 채식주의자라는 타이틀이 좋아서 성큼 구입하여 그 자리서 꿀꺽 삼키며 믿을 수 있는 작가라는 확신으로 자연스레 그 다음 책들을 찾게 되었다. 수상 소식 후에 책꽂이에 있던 그 책들은 순식간에 누군가들에게 넘겨지고 아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괜찮고 말고. 핸드폰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으니. 나지막하게 소근대며 불러주는 이 노래들은 왜 이다지 위안을 주는지. 올해 받은 가장 멋진 선물이다.
이제는 불평할 수 없는 존재가 된 타마중앙도서관을 어슬렁거리면서 불편한 연말 시간을 보내는 맛을 그대는 아는가. 그래도 책이다. 책이 없었다면 내가 더 경솔하고 천박한 인생을 산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다.
남정호
전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