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동경서 무용 공연 보러 가는 것은 번거롭기 짝이 없지만 그런데도 20년간 계속해서 연말에 해온 케이 타케이(Kei Takei) 솔로공연은 외면하기 힘들다. 일단 나도 가끔 섰던 료고꾸(兩國)역에 있는 TheaterX에 도착하면 익숙한 얼굴들을 만나는 즐거움이 있다. 어쩌다가 나의 무대를 기억하는 이가 말을 걸어오면 꽤 우쭐해지기도 한다. 아무리 점잔을 빼도 알아주는 이가 있고 사랑받는다고 느낄 때 광대는 즐겁기 마련.
그다지 많지 않은 좌석이 적당히 차오르고 객석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지면서 차분하고 섬세하게 무대가 밝아 오니 그런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무대가 낯설게 드러난다. 천장에 달린 커다란 원형의 물체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오래된 몇 개의 나무 밑동들. 옆으로 선 자세가 반듯하게 앞 대각선으로 기울어 있다. 대단한 근력이 없으면 지탱하기 힘든 자세이다. 조명이 좀 더 밝아지고 동업자의 예리한 눈으로 불을 켜고 보니 바닥에 있는 나무 하나를 한발로 짚어서 그 자세가 가능해진 것을 알 수 있다. 케이의 몸이 급작스럽게 여위어져서 민망할 만큼 안쓰러운 마지막 무대의 기억을 가지고 객석에 앉았던 터라 이 발상에 손뼉 쳐준다.
케이가 정확하게 몇 살인지 아무도 모른다. 영문 소개 글에는 1946년에 태어났다고 적혀 있지만 사이타마 대학교가 발간한 에리코 호소가와 교수가 쓴 논문에는 1939년생이라 적혀 있다. 뉴욕에서 꽤 알고 지냈다는 홍신자씨도 그녀의 정확한 나이를 모른다 하고 캐나다 출신 미국인 남편 라즈(Laz Brezer)조차 어깨를 으쓱하며 그건 미스테리야라고 대답을 비켜 나갔는데 이시이 타츠로 평론가로부터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살아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라는 우문현답(愚問賢答)을 받았다. 그렇다. 더 이상 추적하지 말자. 아무렴 어때. 나보다 일찍 태어난 것은 분명하잖아.
John Vinton on Kei Takei ⓒMovement Research |
어릴 적 아버지에게는 그림을, 어머니에게는 야채 경작법을 배웠다는 케이는 1967년에 미국 무용가 안나 소콜로우(Anna Sokolow) 추천으로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고 미국으로 간다. 2년 만에 쥴리아드를 중퇴하고 70년대 포스트모던 댄스 주자들인 뉴욕의 저드슨 처치(Judson Church)의 무리들과 어깨를 맞대며 독특한 작업을 발표한다. 너도 나도 가고 싶어하는 쥴리아드를 왜 중퇴했냐는 질문에 영어로 수업듣는 것과 테크닉 위주의 학교 방침이 힘들었다는 솔직한 대답을 들었다. 그리고 공연을 보러온 안나 핼프린(Anna Halprin)의 눈에 띄어 그녀 수업에 무료로 초청되었다고. 케이의 작품세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각자의 몸 움직임이 가진 자연적 원리와 고유성, 창의성을 발생시키는 방향으로 춤을 전환한 핼프린의 춤 철학이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친 것이 유추된다.
포스트모던 댄스의 선구자들 중에서도 핼프린은 특별한 존재이다. 그녀의 대표적 작품 중 하나인 〈Set, Reset〉는 검정 양복을 입고 등장한 무용수들이 천천히 알몸이 될 때까지 옷을 하나씩 벗고 그러고 나서 다시 옷을 입는 행위를 보여 준 작품이다. 이 작품은 한국서도 꽤 오래전에 공연된 바 있다. 몸에 걸친 옷이 하나씩 벗겨지거나 입혀질 때의 메타포를 통하여 사회적 동물의 역할을 수행하는 인간을 드러낸다. 옷을 대하는 움직임이 자세하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행해지는지라 어느덧 알몸이 된 무용수를 어색하지 않게 대면할 수 있다. 나무의 잎들이 떨어져 나목이 되듯이 무용수들은 옷을 벗고 벌거숭이 몸이 되는 자연의 규칙을 따른다.
모두가 가진 몸이지만 무대 위의 나체는 여전히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사도라 던컨은 이 문제를 정면 돌파하여 이름을 얻는데 성공하였지. 80년대부터 급부상한 현대무용 축제를 통하여 국내에 온 해외무용가들의 공연 중에서 가끔 나체로 춤을 추는 경우가 있었다. 약속한 대로 리허설에서는 옷을 입는 척했지만, 실제 공연에서는 원본 그대로인 나체 공연을 하고 다음 날 출국한 해외무용가들이 꽤 있어 주최 측을 난처하게도 하였다. 아마 다시 오지 않을 나라의 무대라고 생각했을까. 그런데 이후의 판도는 한국을 세계 현대무용 시장 중의 하나로 성장시켰단다.
모두 세 작품이다. 첫째 작품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고목들과 함께 한다. 웬만한 목재로도 쓸 수 없을 정도로 낡아 보이는 오래되고 죽은 나무 둥지들. 조금 세게 힘을 가하면 부러질지도 모른다. 여러 크기와 길이가 있지만 2미터가 넘는 것도 서너 개 될 것 같다. 과거엔 멋진 가지를 만들어 잎새가 무성하고 아름다운 꽃도 피었을 거야. 아마 열매도 맺었겠지. 다른 나무들은 추운 겨울을 잘 지나고 다시 싹을 피우는데 어쩌다 아마 누군가의 손에 의해 벌목되어, 아니 생존경쟁서 도태하여 햇빛을 못 받고 쓰러져서 벌레들의 먹이가 되었구나.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 10여 개의 고목 둥지를 다 세우는 것으로 작품은 마무리된다.
건축가와 함께 한 작업이니만큼 이런 나무들로 된 기둥을 가진 과거에 존재하였던 건축물을 상상하게도 되는 이 작품은 내가 좋아했던 케이의 〈Light, part8〉과 맥락을 같이 한다. 유학 시절 파리의 시민회관 Theatre de la ville에서 본 무대 한가득 쌓여있는 넝마들을 하나씩 자기 몸에 부착하는 것으로 전개되는 이 작품을 잊을 수 없다. 조그만 몸에 하나씩 첨가되는 옷들로 인해 몸은 둔해지고 흉해지지만 끝나지 않은 욕심을 채우면서 마침내 몸이 부풀어 올라 움직일 수 없게 된다. 그래도 끝까지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애쓰는 풍뎅이를 보면서 인간의 욕심에 관한 경고를 읽었다. 다음 작품으로 전환하기 위하여 보여 준 이행(transition)에서 드러난 멋진 연출 감각이란. 검은 차림의 무표정 인물들이 와서 조용히 나무를 치운다. 전통연희 분라꾸(文樂)에서의 구로꼬(黑子) 이미지를 잘 활용하였다고 볼 수밖에.
두 번째 작품은 밧줄처럼 보이는 뿌리를 가지고 춤을 춘다. 어느 부분에 와서 마사 그레이엄 (Martha Graham)의 〈마음의 동굴〉을 떠 올리게 되었다. 자신의 젊은 남편이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오카스테는 조그만 밧줄을 가지고 춤을 춘다. 그 밧줄은 탯줄이 되기도 하고 뱀처럼 흔들거리며 남근을 상징하기도 한다. 바로 옆에서 하는 생명 운동가인 나카무라 케이코의 낭독이 구체적인 데도 불구하고 상징적인 케이의 행위와 함께 어울린다. 아마 다른 무용가가 했다면 비판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나는 이 무용가에게 왜 이리 관대한가.
여유 있는 휴식 시간 후에 있은 마지막 작품은 무대 중앙에 수직으로 길이 나 있다. 그 길은 작은 돌멩이 길인데 한 발은 아직 그 길에 머물러 있고 다른 한발은 거기서 나왔고 케이는 그 자세에서 버틴다. 가부키(歌舞技)나 노(能)에서 사용되는 손동작이 케이 식으로 전개된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어깨 소매 속에 강박적으로 손을 집어넣어 헐렁하게 만들어 앙상한 어깨를 드러내는 것이다. 지나치게 마른 케이는 아마 일상에서는 옷으로 몸을 덮으려 했던 그 움직임을 무대에서 적극적으로 보상하려는 듯. 대부분 무용가는 무대 위에서 자신의 취약함을 감추려 하는데 포스터모든 댄스 선구자 중의 한 사람인 케이 타케이는 보다 진실에 접근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볼모로 잡는다. 일상보다 무대에서 더 자유로운 솔직한 자신을 확인하고 싶은 지도. 왕년에는 야성적이고 격렬한 움직임을 한 몸인데 현재에는 단순하고 정적인 이미지를 제시하는 몸이 되었다! 자신의 신체가 할 수 있는 한도에서 움직이는 케이의 춤에서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의 조각을 보는 듯한 낯설고 야릇하면서 시적인 아름다움과 동시에 아픔이 느껴진다.
나는 아시아서 온 조그만 몸짓의 케이가 반전데모와 더불어 흑인 인권 운동, 여성해방운동, 히피와 성소수자가 소리를 내는 당시의 뉴욕 한가운데에서 국립예술기금(NEA)을 비롯하여 뉴욕주예술위원회와 구겐하임 펠로우쉽 등을 받으면서 그 중심에서 활약하였던 사실이 자랑스럽다. 이미 작고한 이치가와 미야비는 부토를 세계에 알린 평론가인데 부토와는 정 반대의 입장을 고수하는 케이의 작품세계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고 Tobi Tobias, Marcia Siegel, Jack Anderson, Moira Hodgson, Robb Baker, Deborah Jowitt, Noel Carroll, Joan Pikula, Tom Borek, Elizabeth Kendall, Merry Suzanne, Smith Amanda, Jean Nuchtern 등의 세계적 평론가들도 케이의 작품세계에 주목하였다.
납득할 수 있다! 배냇저고리를 걸치고 시간과 타이밍에 대한 새로운 감각으로 바닥과 무용수 사이의 새로운 중력 관계에 뿌리를 두고 동요나 염불을 반주로 하는 춤을 추고 만드는 케이는 당시 ‘주류를 넘어서’라는 타이틀로 트리샤 브라운(Trisha Brown), 로라 딘(Laura Dean), 데이비드 고든(David Gordon) 등과 함께 1979년 Dance in America의 시리즈에 소개된 무용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1991년 케이는 오랜 뉴욕 생활을 접고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온다. 아이의 교육을 위해서라고. 동경에 가면 가끔 들르는 케이의 스튜디오는 세타가야구에 있다. 고도쿠지(高德寺)역에서 내려 스튜디오로 이동하는 길에는 오래된 상점이 꽤 있어 갈 때마다 흥미롭다. 이따금 개인 연습을 위하여 빌려 사용하면서 장소가 주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느낀다. 동경 한가운데서 이만한 크기와 시설이 갖춰진 자기 스튜디오를 가진 케이가 부럽다!
이곳에서 1월 말에 열린 케이 타케이의 Moving Earth Orientsphia 무용단 단원들의 창작 습작전을 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2시간에 걸쳐서 솔로와 즉흥을 연결한 8개의 짧은 작업들을 보았는데 지루하지 않고 상쾌하였다. 세상이 엉망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모든 것이 너무 빨리 변하여 뒤따르지 못하거나 거부하고 있는데 그래도 인간의 몸으로 수행되고 있는 춤, 가짜 장식을 붙이지 않은 정직한 춤이 남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그것을 볼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케이는 만날 수 없었다. 팔을 다쳤다고. 제발 쾌차하길. 작업에서는 엄격하고 일상에서는 검소하여 싸고 맛있는 곳을 잘 아는 케이와 다음번에도 함께 식사를 하면서 엉터리 영어와 일본어로 무용사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시간을 되짚어보는 기회를 다시 가지고 싶을 뿐이다.
남정호
전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