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1980년 〈춤〉잡지 근무 시절, 나의 계엄령 풍경
이연형

지난해 남편 김대식(1947~2024, 소설가, 사진가, 사진평론, 삼국유사 유적지 기행을 쓴 작가) 장례식장에 채희완씨와 같이 조문왔던 〈춤웹진〉 편집장 김채현씨에게서 최근에 원고 청탁을 받았다. 남편 사망한 지 1주년이 돼가고 있어 뭔가 추도해야 하는 시점에 그를 더욱 추모하게 되는 사건이 떠오른다.

나는 1980년 〈춤〉잡지에서 11개월 정도 편집기자로 일한 적이 있다. 춤평론가 채희완씨의 소개로 월간 〈춤〉 잡지에 취직했었다. 평생 가져본 유일한 직장이었다. 김채현씨는 그당시 〈춤〉 잡지 근무 시절 일화 같은 것을 소개해달라는 얘기인데, 근무 기간이 짧아서인지 춤 쪽에 관한 거는 별로 기억나는 게 없다. 하지만 생각은 해보겠다고 했다. 글쓰는 걸 좋아했으니까, 이 무료한 말년에 뭔가 돌파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 내심 반가웠다.

1980년은 내게 특별한 해였다. 1월에는 난생 처음 월급받는 직장에 취직이란 걸 했고 5월에는 결혼을 했다. 6월에는 남편이 형사들에게 잡혀갔고 1년 사이 두 번이나 자연유산을 했다. 80년 말 두 번째로 가진 아이도 유산되었다. 성균관대학 근처 대로변에 위치한 〈춤〉 잡지사 앞에는 육교가 있었는데(지금은 없어졌다) 임신한 몸으로 오르락내리락 하기가 힘든 육교였다. 〈춤〉 잡지사와 거래하던 서대문 쪽의 독립문 근처의 활판 인쇄소를 노상 다녀야 했다. 〈춤〉 발행인 조동화(1922~2014) 선생은 원고를 마지막 넘겨서 인쇄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아니 인쇄 도중이라도 멈추고 틀린 글자를 찾아 고쳐야 했다. 완벽주의자이셨다. 그해 말에 편안한 환경에서 아이를 갖기 위해 아무래도 〈춤〉 잡지를 그만두었어야 하였다.

〈춤〉 잡지 관련해서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그해 여름 남편이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갔다가 고문당했다는 끔찍한 기억뿐이다. 〈춤〉 대표였던 조동화 선생이나 무용가들, 그곳을 드나들었던 필자들 기억이 나로선 희미하다. 〈춤〉 잡지는 명륜동 성균관대 앞에 있는 빌딩 2층 한 켠의 조그만 사무실이었다. 운영자 조동화 선생은 당신의 사비로 잡지사를 운영한다고 했다. 직원도 3명뿐으로 조촐했다. 조동화 선생은 단팥빵을 좋아해서 그 사무실 방문하는 무용가들은 대부분 단팥빵을 사왔다. 〈춤〉은 당시 춤 관련 유일한 월간지였다.

〈춤〉지 필자들 중에서는 〈니진스키〉를 번역 연재했던 번역자 이덕희(1937~2016) 선생이 떠오른다. 얼굴이 하얗고 앞머리를 단발로 자른, 당신 말로는 영화 〈목로주점〉에 나왔던 배우 마리아 쉘을 닮았다고 스스로 얘기하셨다. 얼굴 생김새와는 다르게 목소리가 굵고 말을 총알같이 빠르게 했다. 원고 인쇄본 초고가 나오면 당신이 사무실에 찾아와서 교정을 꼼꼼히 봤다. 서울법대 출신의 카리스마있고 독립적인 여성이었다. 근처 학림다방에 같이 간 적도 있다. 음악과 발레를 사랑했고 독신으로 사는 게 멋있었다. 〈춤〉 지에 무용평론을 쓰던 시인 김영태(1936~2007) 선생도 생각난다. 내게 점심을 사주겠다고 해서 충무로 명동의 어느 식당엘 같이 갔는데 식사할 동안 한 말씀도 안 했다. 너무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다정함이 있는 분이었다.

당시 젊은 무용가들이 원서동 소극장 공간사랑(空間舍廊)에서 자주 공연을 했는데 김기인, 김명수 등의 젊은 춤꾼들이 생각난다. 김명수씨는 나중에 연희극 놀이패 한두레 송년회 자리에서 만난 적이 있다. 나는 연극과 마당극에 출연했던 연극배우 출신이다. 한두레에서는 1978년 김민기 노래, 채희완 연출의 노래극 〈공장의 불빛〉에 언니 역으로 출연한 적도 있다. 요즘 유튜브에 누군가 〈공장의 불빛〉을 올려놔서 본적이 있다. 김기인씨는 인터뷰를 하게 돼서 만났다. 사무실로 찾아왔었는데 책상 위에 놓인 내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손이 멋있어요” 했다. 내 손은 머슴 손 같은데 손이 멋있다니 처음 들어본 소리였다. 김기인은 키도 크고 춤추기에 좋은 체격으로 보였다. 춤도 시원시원했다. 하지만 그녀도 세상을 떠났다고... 주변에 죽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지난해에는 남편이 10여년 치매 투병 끝에 사망했고 김민기도 죽었다. 이제 나 또한 언제 죽어도 아깝잖은 나이가 되었나 보다.

1980년 6월 말 어느 일요일, 신혼 살림집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형사 둘이 불쑥 찾아왔다. 남편은 그길로 붙잡혀 나가서 일주일 넘게 소식이 없었다. 잡혀간 이유를 모르겠기에 남편 친한 친구들과 만나 의논하였다. 하지만 그들도 이유를 모르고, 뭔가 꼬투리 잡힐 건덕지가 있는 사람들은 각자 알아서 피신해서 도망다니던 그런 시절이었다. 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총에 맞아 목숨을 잃고 혼미한 정국에서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이 내란을 일으켜 80년 5월 중순에는 전국으로 계엄령을 확대했고 이미 광주에서는 수많은 시민들이 무참하게 희생당했던 아주 엄혹한 상황이었다.

남편 소식이 캄캄하던 7월인가보다. 형사 둘이 명륜동 〈춤〉 잡지사에 찾아온 건 선명하게 기억한다. 2층 적막한 복도에 어떤 남자들이 서 있었다. 복도 끝 화장실 갔다 나오는데 〈춤〉 사무실 앞에 남자들이 있었다. 직감으로 형사들인 줄 알았다. 〈춤〉 사무실 바깥 도로에 검은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나를 뒷자리에 태우더니 대뜸 우리가 살고 있는 우이동 집으로 가자고 했다.

우이동 우리 집 방에까지 가서 남편 김대식이 지목한 금서를 몇 권 확인해달라는 거였다. 그들이 내민 쪽지를 보니 책꽂이의 어느 부분에 칼 맑스의 〈자본론〉 원서가 있다는, 김대식이 쓴 걸로 보이는 메모가 있었다. 틀림없이 내 남편의 필체였다. 나는 확인해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내게 김태홍씨가 우리 집에 찾아왔던 날의 기억을 세세하게 대라고 다그쳤다.

남편의 서울 문리대 선배로 그 당시 기자협회(당시 민주화운동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던 단체다) 회장이었던 김태홍(1942~2011)씨에게는 시국 관련 수배령이 떨어져서 도망다니던 중에 우이동 우리 집에 와서 당신 양복을 벗고 남편의 청자켓으로 바꿔입고 갔었다. 김태홍씨가 두고 간 옷은 서울 정릉, 마당이 있는 시숙 집에 가져가서 태웠다. 나는 창문 쪽으로 몸을 돌리고 형사들에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머릿속에선 그날의 기억이 선명했다. 어설프게 부인했기에 그들은 내가 거짓말한다는 것쯤은 알아챘을 것이다. 하지만 금서 몇 권 있는 게 남영동에 끌려가서 고문받을 죄인가, 그리고 도망다니는 선배에게 옷 하나 바꿔주었다고 고문받을 죄인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신부는 너무 무섭고도 외로웠다.

7월 들어 끌려가서 2주쯤 지났을 때 남편이 집에 돌아왔다.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이근안(그 몇 년 사이 그는 민주화운동 인사들 사이에서는 고문기술자로 악명이 높았다)에게 고문을 당했다고 했다. 두 눈을 손가락으로 찌르고 칠성판 위에 발가벗겨져 누운 남편 발바닥을 몽둥이로 쳤다고 했다. 김대식은 보름 정도 남영동에 있었는데 고문에 못 이겨 그들이 원하는 대로 답했다고 했다. 김태홍씨는 그후 어떤 화실에 숨어 있다가 잡혔다. 김태홍씨를 숨겨주거나 관련돼서 많은 지인들이 끌려가서 고문당했다. 나중에 한예종 영상원 원장을 맡았던 미술평론가 최민(1944~2018) 선생도 그중에 한 분이었는데, 그는 전기고문이 통하지 않는 체질이어서 고문기술자를 애먹였다는 후일담도 있다.



1980년 당시의 남편 김대식 ⓒ이연형



남영동 대공분실 ⓒ2025 김채현



남영동 대공분실 특수조사실(고문실) ⓒ2025 김채현



그때의 사건은 우리 부부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남아서 나는 처음 가진 아이를 유산하게 되었다. 남편은 그때 고문 충격이 머리로 가서인지 60대 들어 기억상실이 심해졌고 결국 세상을 뜨기 10여년 전에는 알츠하이머 치매로 진단받아 고생하다 2024년 9월에 사망했다. 김대식을 추모하며 좋은 곳에 가셨기를.

수많은 사람들에게 악몽을 안긴 남영동 대공분실이 이제는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재탄생해서 민주화운동 주제 춤 공연도 한다고 듣는다. 민주화를 웬만큼 이룬 것인가. 하지만 아직은 그 공간에 가볼 용기는 생기지 않는다.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했다는, 당시 권력과 밀착해서 계약을 따냈다는 그 건물, 남편이 고문당했던 그 건물에 가볼 용기가 아직은 없는 것이다. 80년대 그 시절로부터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그런 일이 다시 있을 것은 생각조차 못했는데, 2024년 겨울 갑자기 계엄령이라 해서 얼마나 소스라쳤던가. 악몽의 그 계엄령이 또 다시라니.

1980년 〈춤〉 잡지 근무 시절 나의 뼈저린 추억담이다.

이연형

1952년 서울 출생. 연극계 동랑레퍼터리극단 〈리어왕〉 〈태〉, 극단 작업 〈왕은 죽어가다〉 〈 전하〉 출연, 문화운동단체 놀이패 한두레에서 〈공장의 불빛〉 〈칼노래 칼춤〉 출연했던 전직 배우. 1980년 〈춤〉 잡지 근무, 이후 주부로서 살았다.​

2025. 9.
사진제공_이연형, 김채현 *춤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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