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지난 8월 초 전통춤 연구가 김영희씨와 소장(少壯)의 연구가 세 사람이 공저한 「전통과 모던의 만남 신무용」(보고사)에 대해 공저자인 김영희, 유화정씨와 이병옥 교수 그리고 필자가 책에 대해 일종의 품평회를 하는 가운데, 김영희씨는 이 책이 이종호 회장이 운영하는 온라인 저널 〈더 프리뷰〉에 네 사람이 돌아가면서 관련한 주제에 썼던 글을 묶은 것이고. 세 공저자는 자신이 진행한 일련의 전통춤 강의에서 만나서 스터디 그룹을 만들었던 관계라 했다.
이에 이 교수와 필자는 이 책이 이른바 '신무용'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신무용 춤들과 송범, 김진걸, 김백봉, 황무봉, 김문숙 등에 대해 간략하지만 잘 설명해 주고 있어서 퍽 가치 있는 책으로 평가했다. 김영희씨는 이 책이 신무용을 미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무용을 우리 무용사의 실재하고 있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어서 시작했고, 유화정씨는 학교에서 배우게 되는 창작춤과는 다른, 그러나 매우 친숙한 한국무용을 우리는 어떻게 불러야 하지라는 의문에서 연구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김백봉으로 대표되던 50-70년대의 신무용이 80년대 이후 창작춤과 이제는 전통무용으로부터도 그 존재성이 크게 잠식되었다고 말했고, 필자는 책 속에서 유화정씨가 쓴 송범에 대한 글, 황희정씨가 쓴 김진걸의 〈산조〉에 대한 글 흥미롭게 읽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짧은 지면에 비교적 상세하고 요령 있게 기술되었다고 했다. 그런 중 필자는 신무용과 관련하여 두 가지 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조동화 선생이 강하게 주장한 일본인 현대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1926년 3월 경성 공회당 내한 공연을 우리의 신무용사의 진정한 기점으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이고, 둘은 신무용의 한국식 표기 '노이에 탄츠(댄스)'가 문법상 맞는 발음 표기인가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필자는 우리의 '춤문화사적 관점'에서는 조 선생님의 견해가 옳지만, 우리의 '춤예술사적 관점'에서는 1927년 10월에 이시이 바쿠 무용단의 두 번째 내한 공연에서 그 무용단의 정식 단원으로 참가해 자신의 창작 안무작 〈세레나데〉(무소르그스키 곡)를 춤췄던 그때를 우리 신무용사의의 기점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이시이 바쿠는 예술에 있어서 국적을 따지는 좁은 식견의 소유자가 아니고 아시아를 넘어 세계 현대무용의 선구자이기 때문에 그의 춤예술의 세례를 받고 그와 함께함은 떳떳하고 대의명분에도 맞지만, 식민지 강점기에 그의 춤을 보고 큰 감흥을 받아 새로운 예술춤에 헌신한 17 혹은 18세의 어린 최승희의 '작지만 당찬 현대적 자각(自覺)'도 그만한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최승희의 〈세레나데〉가 우리 현대적 예술춤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어야 하고, 따라서 진정한 우리의 신무용사 100년은 2017년 10월이 아닐까?
한편 신무용의 독일식 표기 발음인 '노이에 탄츠(댄스)'는 신무용 관련한 논문마다 등장하는 자못 유명한 표현이다. 그러나 어떤 경로로 그 표현이 우리에게 이입되어 쓰였는지 알 수 없다. 일제 시대 일본에서 썼는지, 당시 우리 언론이 신무용을 독일어로 번역해 썼는지 알 수 없다. 그런 차에 나는 우연히 댄스의 독일어 단어 탄츠(tanz)가 여성 명사가 아닌 남성 명사인 것을 발견하고, 고교 시절 배웠던 독일어 문법 지식을 동원하여 보니까 새롭다는 뜻의 노이에(neue)가 아니고 노이어(neuer)가 될 수밖에 없어서 서울대에서 미학을 공부한 깐깐한 김채현 교수에게 탄츠가 독일어 남성 명사이니까 접미사가 무엇인가 물으니까 '노이어'가 맞다는 것이었다. 같은 미학을 공부한 선배 채희완 교수도 그것이 맞다고 했다.
그런 중 우연히 영국 옥스포드 춤사전을 밤에 보다가 작은 글씨로 쓰여진 'Neue kunstlerishe Tanz'라는 표기를 보았다. 어기서 kunst는 잘 알려진 독일어 예술이란 뜻이고 그 뒤로 잔뜩 붙는 표기는 명사에 붙는 독일어 특유의 형용사적 표현이기에 그 뜻은 '새로운 예술적 무용' 곧 '새로운 예술무용'이란 것을 알았다. 그런데 옥스포드 춤사전에는 그 표현에 대한 어떤 설명도 없었다. 하기야 피나 바우쉬가 유행시킨 20세기 후반의 중요한 극장춤 형태인 '탄츠테아터'에 대해서도 춤사전 집필자의 한 사람(춤평론가)은 단 몇 줄의 언급 밖에 안 하는 무례함을 범하기도 했다. 그것은 대체로 영국뿐만 아니라 자신이 지지하는 춤의 본질적인 형식적 미학 바깥의 일이란 투다. 그러려면 독일 표현주의 춤미학도 현대 춤예술사에서 다 지워야 한다. 여하튼 옥스포드 춤사전의 표기도 무시할 수 없어서 필자는 자신의 춤비평 용어 설명책인 「춤 전문어의 개념과 비평노트」 속에서 창작춤과 신무용을 비교하면서 옥스포드의 그 독일식 표기를 적어 넣었다.
그런데 이번 봄 조동화 선생의 평론집이 사후 발간되면서 관련한 문제점을 다시 되짚어 볼 수밖에 없어서 '노이에 탄츠'라는 그 표기의 진위여부가 되살아 났다. 그래서 오래 동안 독일어 교사를 역임했고 영화평론가이면서 현재는 춤평론도 열정적으로 하고 있는 장석용씨가 생각이 났다. 나는 옥스포드의 표기를 그에게 알려 주면서 독일어의 바른 문법적 표기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그로부터 금방 답이 왔다. 의미는 새로운 예술무용이란 것으로 '노이에'의 어감을 살려서 독일어로 표기하면 복수로 Neue kunstlerishe Tanze로 써야 하고, 단수로는 Neuer kunstlerisher Tanz라고 표기해야 한다고 했다. 단, 복수일 때 탄츠의 발음은 '텐체(텐쩨)'가 되어야 하고, 문법적으로는 그것들은 맞는 표기이지만 외래어는 원어민이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1920년대 초반 독일의 마리 뷔그만을 찾아 방문했던 이시이 바쿠가 어려운 독일어 복수 표현에서 노이에를 듣고 춤이란 뜻의 단수 표기를 거기에 붙여서 썼는지, 그것을 받아 적었던 일본 매스컴 또한 독일어 단수, 복수 표기를 무시하고 썼는지, 아니면 독일인들도 복수형 '텐체' 발음이 외국인들에게는 힘들다 싶어서 독일 무용계도 노이에 탄츠로 그렇게 통용화 시켰는지, 또한 축구를 포함해서 모든 면에서 독일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옥스포드 춤사전 집필자와 영국 춤지식인들도 그렇게 알고 있는지(얼마 전 타계한 엘레자베스 여왕의 혈통이 독일계인 것을 아는지) 그 모두를 알 수 없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여하튼 이 지점에서 우리식의 결론을 내자. 만일 틀리면 그때 수정하면 된다. 결론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신무용 곧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노이에 탄츠'는 '새로운 예술무용'이란 뜻이며, 독일어의 중간 형용사 부분인 '예술적인'을 생략한 요약형 표기라는 것.
2. 신무용이라는 뜻은 독일어 단수, 복수 명사형으로 다 표기할 수 있는데, 복수형 표기일 경우 춤이란 뜻의 탄츠가 발음상 '텐체'가 되어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있어서 오히려 단수형 표기의 발음 곧 '노이어 탄츠'로 부르고 표기해 보자는 것
이 글의 제목에 필자는 '백년만에'란 표현을 썼다. 신무용에 대한 나름대로의 조사를 했던 조동화 선생은 그의 비평에서 신무용은 극히 짧은 시기에만 신문 지상에만 오르내렸을 뿐 그 이후에는 사라진 춤 형태로 보았다. 그러나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경희대 한국무용과를 터전으로 신무용가 김백봉과 그녀의 〈부채춤〉을 중심으로 한 춤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던 신무용 교육자 안제승 교수의 활동이 있었고. 조동화 선생의 춤동지이기도 했던 김진걸 선생은 신무용의 대표작 중 하나로 평가할 수 있는 산조 〈내 마음의 흐름〉 을 선생 자신이 추었다. 그런 가하면 신무용으로도, 요즈음의 신전통춤으로도 볼 수 있는 조흥동의 〈회상〉(일명 〈한량무〉)는 어느 때보다 자주 무대에 오르고 있고, 또한 신무용의 마지막 수작으로 작고한 황무봉의 춤미학을 승화시킨 김현자의 〈매화를 바라보다〉도 얼마 전 국립극장에 무대에 리바이벌되어 올라왔다. 그렇게 본다면 신무용은 김영희씨가 주장하는 '실재하는' 역사적 사실이자 유화정씨가 느꼈던 '친근하면서도 그간 잊힌' 춤의 존재였는지 모른다.
따라서 어쩌면 내년이 우리의 신무용과 조동화 선생이 관련한 글 속에서 늘 제기한 '한국 근대무용의 완성'에 대해서 더 확실히 답해야 할 때일지 모르겠다.
+ 독일어 kunst와 tanze에는 독일어 특유의 발음 표기인 우무라우트(..)라는 것이 붙는다.그에 따라 발음이 달라지지만, 인쇄 매체에서는 표기가 어려워 자주 생략한다.
김태원
춤평론, 「공연과 리뷰」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