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broad

뮌헨 현지 인터뷰_ 국립공연네트워크(NPN) 설립자 Walter Heun
유럽 춤 생태계를 바꾼 주역, 연대가 중요하다
손인영_전 국립무용단 예술감독

월트 헌(Walter Heun)은 198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유럽의 전반적인 무용 생태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독일 바이에른주의 호프(Hof)에서 태어난 그는 뮌헨에서 연극을 공부하며 무용 수업을 들었고, 그 과정에서 무용수들이 겪는 어려움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무용의 사회적 역할과 무용이 문화·경제 시스템과 맺는 관계에 대한 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졸업 후 그는 문화정책에 관한 여러 아이디어에 이끌려 1984년 안무가들 몇 명과 함께 단체 “댄스 에너지(Dance Energy)”를 공동 설립하고 프로듀서로 활동을 시작했다.



  

월트 헌(Walter Heun), 월트 헌과 손인영



혁신적인 정책 비전을 갖고 있던 그는 24세라는 이례적으로 젊은 나이에 1986년과 1989년에 개최된 페스티벌 “뮌헨 댄스 데이즈(Munich Dance Days)”의 공동 창립자이자 이후 디렉터로 활동했다.

1987년에는 뮌헨 기반 무용수들을 위한 프로덕션 및 리허설 공간을 운영하는 단체 “뮌헨 탄댄츠(Tanztendenz Munchen e.V)”를 공동 설립했으며, 1993년까지 그 단체의 디렉터를 맡았다. 1990년에는 프로덕션 회사 “조인트 어드벤처러스(Joint Adventures)”를 설립하고 독일 15개 도시에서 약 120회의 공연을 올린 전국 규모 페스티벌 “BRDance”를 출범시켰다.

1991년부터는 매년 열리는 페스티벌 “탄츠 베르그 슈타트(Tanzwerkstatt) Europa”를 설립했으며, 이는 뮌헨과 전 세계에서 모인 전문가 및 아마추어들이 교류하는 국제적 컨템퍼러리 댄스 커뮤니티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는 지금까지도 이 페스티벌의 예술감독 및 총괄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1992년부터 1994년까지 그는 유럽연합(EU)의 지원을 받아 “유럽 댄스 네트워크(Dance Network Europe)”을 창립했으며, 1994년부터 2000년까지는 “유럽 현대무용 제작 연구 네트워크(European Network for the Research of Contemporary Dance Production)”을 설립하고 이끌었다. 또한 1994년에는 “독일 탄츠플랫폼(Tanzplattform Deutschland)”를 공동 설립했으며, 오늘날까지도 핵심 코디네이터로 깊이 관여하고 있다. 북유럽의 플랫폼인 “Ice Hot”과 함께 탄츠플랫폼은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컨템퍼러리 댄스 플랫폼 중 하나로 자리 잡았으며, 국제 무대에서 독일의 무용을 대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헌은 독일과 해외의 다양한 기관에서 큐레이터, 멤버, 예술감독으로 활동하며 현대무용과 퍼포먼스 아트 분야에 집중해왔다. 국제 무대에서의 활동을 통해 구축해온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독일 및 유럽 전반의 이 분야 발전을 촉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현대무용과 연극의 순환 및 교류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그는 1991년 디지털 이큅먼트사(Digital Equipment Corporation)의 지원으로 “국립공연네트워크(National Performance Network, NPN)”를 설립했다. NPN은 예술가와 공연장 간 협력을 촉진하고 현대무용 작품의 유통을 활성화하기 위해 고안된 독특한 모델로, 1999년부터는 연방정부 문화·미디어청(BKM)과 독일 연방주 문화부가 이를 지원하고 있다. 그의 프로덕션 회사인 Joint Adventures는 지금까지도 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1997년, 헌은 바이에른 현대무용 주 협회를 공동 설립했으며 현재까지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999년부터 2004년까지 그는 스위스의 안무센터 “루체른탄츠(Luzerntanz)”의 예술감독을 맡았으며, 이 기관 또한 그가 새로 설립한 것이다. 루체른탄츠는 프랑스의 리옹에 있는 “메종 드 라 당스(Maison de la Danse)” 및 프랑스의 “센트르 코레그라피크(Centres Chorégraphiques)”의 프로덕션 모델을 독일 시립극장의 연극 모델과 결합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활발한 프로덕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동시에 “슈바이처 탄츠타게 2000(Schweizer Tanztage 2000)”, “몸은 장소, 몸은 한 입(Body as Site – Body as Bite)”, “누벨 당스(Nouvel(le) danse)” 등 수많은 페스티벌과 담론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2009년부터 2017년까지 헌은 빈의 “탄츠콰르티어(Tanzquartier)” 예술감독으로 재직하면서 여러 무용 플랫폼, 페스티벌, 담론 프로그램, EU 프로젝트, 그리고 INTPA(International Network for the Transfer of Performing Arts)를 개발했다. INTPA는 연방 예술·문화·공공서비스·스포츠부 및 유럽·국제관계부와 협력하여 오스트리아에서 제작된 안무 작품의 국제 이동성을 촉진하기 위해 고안된 시스템이다. 그는 1986년 졸업 이후 수많은 조직을 설립해왔으며, 유럽 무용 생태계를 재편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월터 헌이 유럽 전역의 포괄적인 무용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었던 토대는 그의 독창적인 사고방식, 풍부한 현장 경험, 전략적 문화정책 접근 방식의 결합에 있다. 그는 주로 무용수로서의 커리어를 추구하기보다는 큐레이터, 인프라 설계자, 커뮤니케이터, 문화 외교관으로 활동해왔다. 프로듀서이자 큐레이터로 일하면서 그는 예술가들이 실제로 겪는 실질적 어려움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뮌헨은 무용가들이 좋은 환경에서 일하고 생활할 수 있는 도시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필자는 Joint Adventures(월터 헌이 이끄는 프로덕션 회사)가 하는 페스티벌 “탄츠 베르그슈타트 유로파(Tanzwerkstatt Europa)”를 보기 위해 뮌헨을 방문했고, 그곳에서 그를 인터뷰했다.

손인영: 당신과의 인연은 작년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열린 독일 탄츠플렛폼에서 시작되었다. 그 이후 여기저기서 몇 번 더 만나게 되었고, 올해 봄에는 이탈리아 에어로웨이브스(Aerowaves)에서 다시 만났다. 이번에 당신의 페스티벌에 나를 초대해줘서 고맙다. 이 페스티벌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고,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이야기해 달라.
Walter Heun: 나는 무용을 처음 시작하고 주위에 힘들게 작업하는 무용가들을 보며 그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작업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아이디어가 있었다. 무용가들의 단체인 ‘댄스 에너지’와 공동으로 뮌헨 시에 지원을 신청하여 리허설 공간을 마련했고, 워크샵과 공연을 올렸다. 처음에는 작게 시작했다. 스튜디오가 2개였고, 8개의 워크숍과 3개의 공연을 했다. 첫 해에 프로젝트를 아주 잘 마무리했고 돈도 많이 벌었다. 그 돈은 시로 들어갔다. 다음 해에는 15개의 작품을 11일 동안 했다. 첫 해보다 더 크게 했는데, 같은 관객이 여러 번 못 오고해서 좌석이 비었고 돈을 잃었기에 시에 작년에 벌어서 보내 준 돈을 돌려 달라고 했더니 안 된다고 했다. 하하하....페스티벌은 잘되었으나 돈은 잃었다. 그러면서 배웠다.

리허설 공간을 마련하고 워크샵과 공연을 함께 올린 것은 무용가들에게 필요한 단계적인 지원이란 점에서 아주 유용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EU 지원금은 언제부터 받기 시작했는가?
1989년에 영국의 유명 극장인 더 플레이스의 예술감독인 존 에쉬포드를 만나게 되었다. 처음 한 레스토랑에서 그를 만나 우리가 아는 10개의 작품에 대해 얘기했는데, 작품을 보는 관점이 비슷했다. ‘DVA 피지컬 씨어터’, ‘랄랄라 휴먼 스텝스’ 등 당시의 이런 컴퍼니들을 우리는 좋아했다. 그 자리에서 공동으로 뭔가를 하자고 해서 EU에 낼 지원서를 내가 쓰고 존이 정리했다. 우리는 EU로부터 10만 독일 마르크(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1억 8천 정도)를 당시 받았다. 이 돈을 받고 뮌헨 시에다 EU에서 지원을 했으니 뮌헨도 지원을 하라고 했다. 이게 나의 첫 지원 상황이었다. 뮌헨에서 6만 마르크(현재 가치로 1억 정도)를 지원해줬고 이후 16만 마르크까지 지원을 받았다. 이 프로젝트로 뮌헨시와 EU 지원까지 합해서 나중에는 26만 마르크까지 지원을 받았다.
초기에는 5개 작품을 올렸고, 2개의 스튜디오에서 워크숍을 운영했다. 그 후 우리는 꾸준히 발전했다. 나의 핵심 아이디어는 도시의 문화생활을 발전시키고, 뮌헨 기반 안무가들과 국제적 안무가들이 만나는 장을 만들기 위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사들을 초청하는 것이었다.

지역의 안무가들이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안무가들을 만날 수 있는, 네트워킹을 확장할 수 있는 프로그램인 만큼 이것 역시 큰 반향을 가져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 존 에쉬포드와 나는 EU 지원을 활용해 뮌헨, 프랑스, 포르투갈, 영국의 신진 안무가들을 영국·독일·프랑스의 극장들과 공동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관객 반응은 놀라웠다. 이것은 EU가 국경을 넘는 신진 안무가 공동제작에 자금을 지원한 최초의 사례였다. 당시 EU는 안나 케르스마커나(Anne Teresa De Keersmaeker)나 얀 파블로(Jan Fabre) 같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대형 단체들만 지원했었다. 초기 성공 이후 우리는 3년 동안 두 번의 추가 프로젝트를 개발했고, 총 7년간 계속되었다. 우리는 프로젝트 지원과 네트워크 지원을 모두 받았다.

두 명의 기획자가 유럽의 춤 지원 시스템을 바꾼 셈이다.
그렇다. 우리의 프로젝트는 EU의 지원 구조에도 영향을 미쳤다. EU는 새로 창설된 프로그램인 ‘칼레이도스코프(Kaleidoscope)’를 통해 네트워크 기반의 지원과 유럽 간 협력 프로젝트를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큰 성과였다.
그 이후로 내 회사 Joint Adventures는 EU 지원, 뮌헨시 및 바이에른주의 지원, 그리고 전 유럽의 문화원들의 후원을 받았다. 티켓 판매와 워크숍 수입도 상당했다. 팬데믹 기간 동안 우리는 유럽 11개 무용 아카데미와 함께 ‘Solid Ground – Challenging Space’라는 프로젝트를 만들었고, 매년 다섯 명의 학생을 파견받아 우수한 안무가와 강사들이 그들과 함께 작업하고 훈련하며 강의와 실험적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흥미로운 점은 5년이 지나자 참가 학생들 사이에 매우 강한 유대감이 생겼다는 것이다—서로의 프로젝트를 도와주고, 서로의 작품에 출연하기도 하며, 때로는 머물 곳을 제공하기도 했다. 한 학생은 베를린에서 오디션이 있었는데, 이 프로그램에서 만난 친구의 집에 머물렀다고 말했다.

원래 전공이 무용이었나? 어떻게 이러한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이 궁금하다.
나는 처음에는 영화를 정말 좋아해서, 영화 관련 강의가 있다는 이유로 연극학을 공부했다. 당시 무용과 관련된 세미나가 하나 있었고, 그때 처음으로 무용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결국 내 석사 논문도 무용을 주제로 쓰게 되었다.
이사도라 덩컨의 언니인 엘리자베스 덩컨이 베를린에 학교를 설립했다. 이사도라가 베를린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아 상황이 악화되었을 때, 엘리자베스가 베를린 그뤼네발트(Grunewald)에 있던 학교를 맡았고, 이후 독일, 오스트리아, 프라하, 모스크바 등 여러 도시로 학교를 확장했다. 뮌헨에도 이 학교 중 하나가 있었다. 이것이 독일 최초의 현대무용 학교였다. 나는 1986년에 이 학교에 대해 석사 논문을 썼다.
1987년, 나는 제작 센터인 ‘뮌헨 탄댄츠’를 공동 설립했다. 뮌헨의 지원을 받던 모든 단체들이 힘을 합치면서 약 27만 독일 마르크(DM)의 지원금을 받게 되었는데, 이는 이전보다 훨씬 많았지만 창고를 프로덕션 공간으로 전환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금액이었다. 그래서 형과 몇몇 친구들, 그리고 나까지 모두 직접 나서서 그 공간을 개조했다.
1987년부터 1992년까지 나는 뮌헨 안무가 협회와 스튜디오의 경영 책임자로 일했다. 당시 그곳은 뮌헨에서 무용수들이 무료로 리허설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나는 안무가들과 함께 정치적으로 활동하며 시(市)를 설득했고, 그 결과 시의 지원이 점진적으로 확대되었다. 지금은 무용 분야 보조금이 약 40억 원(KRW) 규모로 성장했다.
또한 우리는 현재 시나 국가의 지원과는 별도로 바이에른주로부터 약 85만 유로(약 14억 4천만원)의 지원금도 받고 있다.

지원 규모가 상당히 늘어났다. 그렇다면 현재 뮌헨에서 활동하는 무용수는 얼마나 되나?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요즘 무용수들은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절반은 뮌헨에서, 나머지는 다른 도시에서 활동한다. 이곳에서 지원을 받고, 창작하지만, 실제 거주지는 다른 곳일 수도 있다. 우리는 매년 30~40건의 지원 신청서를 받는다. 안무가들은 뮌헨시로부터 1 작품을 만들 때, 2만 유로(2천 8백만원)에서 10만유로(1억 3700만원) 사이의 지원금을 받을 수 있고, 바이에른주와 연방정부가 지원하는 바이에른 현대무용 협회(BLZT)에도 별도로 지원금을 신청할 수 있다. 뮌헨의 지원정책이 강력하기 때문에 많은 무용가들이 이곳에 지원한다. 국립 공연 네트워크(NPN)는 뮌헨 기반 예술가들만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의 성격에 따라 독일 전역의 무용가들이 지원한다.

뮌헨 시와 바이에른 주의 지원금이 겹치는데도 작품이 좋을 경우 둘 다 주기도 한다니, 한국은 시에서 받으면 도에서는 받지 못하게 되어있는데 정책이 다르다. 1990년에 조직한 대규모 투어에 대해 이야기 해 달라.
내가 Joint Adventures를 설립하자마자 BRDance 프로젝트를 바로 시작했다. 이것은 독일의 전국 규모 페스티벌이었다. 처음에는 40개의 공연장이 프랑크푸르트에 모였고, 그중 19곳이 공동 주최자로 참여하기로 했다. 우리는 독일 전역 15개 도시를 투어하며 5개월 동안 120회의 공연을 올렸다. 이것이 Joint Adventures로 진행한 첫 번째 대형 프로젝트였다. 이후에도 나는 많은 협력 프로젝트를 조직해 왔다. (월트 헌은 이어서 여러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했다.)



Jefta van Dinter의 공연



Wim Vandekeybus의 공연







당신은 바이에른 현대무용 협회(BLZT)의 회장으로도 오랜 기간 활동했다.
나는 1997년에 회장으로 선출되었는데, 그 이후로 이 일을 맡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아직까지 내가 하고 있다. (웃음) 처음에는 5만 유로만 받았지만, 지원금이 점차 늘어나 지금은 거의 86만 유로를 받고 있다. 바이에른주는 이 예산을 협회(BLZT)에 지원하고, 우리는 이를 신청자들에게 배분한다.

당신은 유럽의 국제 댄스하우스 네트워크(EDN)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나는 초기 단계부터 참여했고, 이후 회장이 되었다. 내가 회장 때, 존과 나는 서로 경쟁하지 않도록 누가 어떤 EU 지원금을 신청할지 협상해야 했다. 그는 에어로웨이브즈의 플랫폼 자금을 확보했고, EDN은 네트워크 자금을 받았다. 우리는 결코 경쟁 관계가 아니었고, 두 자금 흐름은 잘 공존했다.
존은 에어로웨이브즈에서 강력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파트너들과 함께 매 회마다 약 600개의 비디오를 시청하며 후보 작품을 논의했다. 그는 무용에 대해 엄청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지금은 34명의 회원이 비디오를 보고 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실수가 발생하기도 한다—비디오에만 의존하기 때문이다. 에어로웨이브즈 심사위원들은 주로 강렬하고, 시끄럽고, 신체적인 작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작품들은 비디오로 볼 때 인상적이게 보이지만, 더 섬세하고 예술적인 작품들은 비디오로 잘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맞다. 존이 돌아간 이후, 그를 이어받은 사람이 있는가?
현재 에어로웨이브즈의 디렉터는 이탈리아의 로베르토 카자로토(Roberto Casarotto)와 엘리자베타 비사로(Elisabetta Bisaro)가 공동으로 하고 있다. 다만 이 결정은 그가 돌아가기 전에 이미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의 고별 파티에서 얼마나 행복해했는지 아직도 기억한다. 그의 죽음은 유럽 무용사에서 정말 큰 손실이다.

당신의 페스티벌 웹사이트에는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이 나와 있던데, 그것들에 대해 얘기 해 달라.
우리는 독일 연방과 주 정부로부터 자금을 받고 있으며, 여러 유형의 지원 시스템을 개발했다—국가 투어, 공동 제작, 국제 투어를 위한 자금 지원 등이 그것이다. 다양한 프로젝트에 대한 자금은 뮌헨 예술문화부, 바이에른주, 독일 연방문화재단, 연방 문화·미디어 담당관, 14개 주 문화부, 기타 공적 기금, 그리고 국제 문화 기관에서 나온다. 이러한 지원은 독일 무용계를 발전시키고, 독일에서 제작된 작품이 국내외 무대에 오를 수 있도록 돕는다.
독일에서는 세 개의 주요 기관—독일 국립 현대무용 협회(Dachverband Tanz Deutschland), 뷰로 리터(bureau ritter), Joint Adventures—이 연방정부로부터 약 7,500만 유로(약 1천 263억 원)를 지원받는다. DTD는 개별 안무가들의 생계와 무용 스튜디오를 지원하고, 독일 뷰로 리터(Tanzpakbureau ritter)는 구조와 구조적 협업을 지원하고 ‘탄츠팍트(Tanzpakt)’라는 프로그램을 하고 있다. 우리 회사는 팬데믹 기간 동안 공연 활동을 재활성화하고 아날로그 및 디지털 공공 공간에서 새로운 예술형식을 지원하기 위해 ‘NPN-Stepping Out’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총 7,500만 유로 중 약 1,900만 유로(약 320억 원)를 우리 회사가 받아 예술가들에게 배분하고 있다. 이 자금은 단순히 뮌헨에만 배분되는 것이 아니라, 신중한 평가를 거쳐 독일 전역에 걸쳐 지원되고 있다.

국가 지원금을 많이 받는다. NPN 지원금을 신청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 한국 무용가 진 리(Jin Lee)는 일을 위해 많이 이동하면서도 Joint Adventures로부터 지원을 받는다고 하던데, 그런 경우도 가능한가?
물론 가능하다. 만약 한국 예술가가 독일에서 작품을 제작하고, 국제 페스티벌에 초청된다면, 우리가 비용을 지원할 수 있다. 우리는 ‘독일인’ 예술가를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독일에서 제작된 ‘작품’을 지원한다. 독일은 국제적이다. 안무가는 직접 신청해야 하고, 심사위원단이 선정한다. 지원 금액은 국가에 따라 다르다.
공연이 유럽 내에서 열리면, 작품 제작비의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을 지원한다.
공연지가 조금 더 멀고 출연료가 적정 수준이라면, 출연료의 절반과 숙박을 지원한다.
공연지가 매우 멀고 출연료가 낮다면, 출연료 절반, 숙박, 항공료까지 지원한다.
우리는 예술가의 상황에 맞춰 세심하게 지원한다. 예를 들어 젊은 안무가가 임플스탄츠의 Young Choreographers 프로그램에 초청된다면, 이는 그들의 커리어에 매우 중요하므로 심사위원단은 대부분 지원한다. 반대로 이미 잘 알려진 예술가로, 관객이 충분히 올 것이고 상업적으로도 기능하는 경우라면 지원 가능성은 낮다. 하지만 항상 신청서에 따라 달라진다.

정말 세심한 지원 시스템이다.
그렇다. 우리 심사위원단은 무용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고, 나는 국제 무용계 상황도 잘 안다. 우리는 무용가들의 상황을 깊이 이해하고, 필요에 맞춰 지원을 조정한다. 유럽 전역의 많은 페스티벌 현실을 알기 때문에 적절한 지원 수준을 결정할 수 있다. 나는 이 분야에서 오래 일했기 때문에 유럽 무용계를 잘 안다.

페스티벌이 너무 많다. 재정 문제로 사라지는 곳도 있고, 새로운 페스티벌이 생기기도 한다. 이런 정보를 어떻게 다 아는가?
나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지난 5년은 특히 어려웠다. 팬데믹 이후, 내 또래에 시작했던 많은 동료들이 돌아가시거나 은퇴했다. 나는 24살, 아주 어릴 때 이 일을 시작했다. 당시 활발히 활동하던 존은 나보다 15~20살 더 많았다.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잘 협력했다. 이후 나는 뒤셀도르프 탄츠하우스의 영향력 있는 디렉터인 베트람 뮬러(Bertram Müller)를 만났다. 그는 이미 자리 잡은 프로듀서이자 공연 기획자였고, 나는 여전히 젊은 신인이었다.
이제 존는 세상을 떠났고, 베트람도 더 이상 이 분야에서 활동하지 않는다. 이제 젊은 프로듀서들과 나는 만나고 함께 일하고 있다. 나는 페스티벌, 플랫폼, 극장의 대부분 예술감독들을 알고 있다—현재와 이전, 그 전 세대까지 포함해서. 새로운 예술감독을 만날 때면, 가끔 내가 마치 공룡이 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웃음) 너무 일찍 시작해서, 또래 사람들과 있어도 내가 더 나이든 느낌이다. 하지만 젊은 동료들이 성장해 중요한 역할을 맡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기쁘다.
예를 들어, 리투아니아 출신 잉그리다 게르부타비치우테(Ingrida Gerbutavičiūtė)는 이전에 정보 센터에서 일하다가 프랑크푸르트로 이동해 프로덕션 매니저가 되었다. 나는 그녀를 독일 탄츠플렛폼의 심사위원으로 참여시켰다. 당시 다른 심사위원인 혼네 도르만(Honne Dohrmann)이 그녀를 독일 댄스 콩그레스의 수석 드라마투르그로 초청했고, 이후 그녀는 뒤셀도르프 탄츠하우스의 디렉터가 되었고, 베트람의 뒤를 이어 현재 유럽 주요 댄스하우스 중 하나인 독일 탄츠하우스를 이끌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은 놀랍고, 감탄스럽고, 매우 보람 있다.

당신과 존 그리고 베트람 뮬러 같은 인물들이 1980~2000년대 유럽 무용계의 방향을 이끌었는데, 현재 유럽 무용 분야의 방향은 누가 결정하는가? 당신과 존이 젊은 안무가를 위한 EU 지원을 처음 시작했을 때처럼.
중요한 결정이 단 한 사람에 의해 내려진 적은 없다. 모든 일은 연합을 통해 이루어진다. 유럽 무용계에는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많다. 프랑스의 아니타 마티유(Anita Mathieu)도 매우 중요한 인물이고, 항상 협력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독일 댄스 플랫폼은 1994년에 나, 넬레 허틀링(Nele Hertling), 디터 뷔로흐(Dieter Büroch)가 공동으로 설립했다. 이 플랫폼은 2년마다 다른 도시로 순회하며, 2020년에는 뮌헨에서 열렸다. 500명 이상의 기획자들이 모였는데, 이게 세계에서 가장 큰 플랫폼이었다. 독일 탄츠 플렛폼은 약 10~12개 도시가 돌아가면서 개최한다. 각 회차의 조직이나 운영은 해당 도시의 주최 측이 맡지만, 다음 회차가 어디에서 열릴지, 누가 플랫폼의 방향을 맡을지는 라운드테이블에서 공동으로 결정한다.



막달리나 라이너 〈콰르텟〉



모리츠 오스트루슈나크 안무 작품



젊은 안무가들의 공연. 가운데 반바지를 입고 있는 안무가가 한국의 이진.





유럽에는 플랫폼이 많고, 각 플랫폼이 원하는 작품을 상연하지만, 흥미롭게도 서로 겹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혁신적인 그룹들이 더 많은 곳에서 공연하며 더 많은 관객들에게 예술적 경험을 선사하면 좋겠는데, 실제로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많은 극장이나 페스티벌은 자신들이 초청한 단체가 다른 곳에서 먼저 공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독점성을 원한다—자신들의 공연장에서 한두 번만 공연하고, 같은 단체가 다른 장소로 투어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일부 계약에는 인근 지역에서 무용가가 공연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항까지 포함되어 있기도 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것이 불합리하다고 느꼈고, 그래서 1990년에 협력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인터넷도 없었고, 다른 도시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도 몰랐다. 교류 프로그램도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미 극장과 도시를 연결하여 공동 프로젝트를 실현하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한 이유는 모든 안무가와 극장이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상황을 개선하고, ‘연대’를 통해 문제를 극복할 방법을 찾고 싶었다. 이렇게 해서 “BRDance” 프로젝트가 탄생했다.
몽펠리에 댄스 페스티벌(Montpellier Dance Festival) 디렉터 장 폴 몬타나리(Jean-Paul Montanari)는 내가 독일에서 BRDance 페스티벌을 시작한 것을 보고, 1990년 국제 프리젠터 회의에 초청했다. 나는 이 분야에서 어린 신인이었지만, 당시 200명이 참석한 회의에서 BRDance 페스티벌과 독립 무용 커뮤니티에 대해 발표했다. 독일에서는 당시 아무도 몰랐던 내용이었다.
이러한 형태의 협력 프로젝트는 비용을 절감해 주고, 무용가들에게 꼭 필요하며, 관객 개발과 사회적·정치적 인식을 높이는 데 매우 중요하다.

한국에서도 이런 시도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낀다. 안무가에게 극장 단위로 공연장을 찾는 일은 어렵고 지치게 만든다. 정말 대단하다. 1990년대에 이런 아이디어를 내고 실행까지 하다니 놀랍다. 한국도 세계 무용계와 더 자주, 더 강하게 연대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작년부터 리스본의 칼루스테 굴벤키안(Calouste Gulbenkian) 재단에서 살라비사 유럽 무용인상(Salavisa European Dance Award(SEDA))를 수여하고 있다. 이 상은 무용 분야에서 가장 큰 상으로, 상금은 15만유로(약 2억 5,260만 원)며, 2년마다 한 번 수여 된다.
이 상을 수상하면, 파트너 기관들이 재단과 협력하여 해당 무용가의 작품을 제작할 수 있다. 파트너 기관에는 저희 Joint Adventures, ImPulsTanz, Sadler’s Wells 등 5개의 기관이 포함된다. 이러한 형태의 ‘연대’는 안무가를 국제적으로 높은 수준의 인지도에 올릴 수 있는 환상적인 기회다. 상을 단순히 수여하는 것만으로는 글로벌한 영향력을 갖기 어렵지만, 영향력 있는 파트너 기관들이 참여하기 때문에 상의 권위가 크게 높아진다. 이런 의미에서 연대는 매우 중요하다.

오늘의 키워드는 ‘연대’다. 연대는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구조다. 당신은 거의 모두 ‘공동’ 또는 ‘협업’을 해서 시너지 효과를 낸 것 같다. 당신은 그 동안 수많은 방식으로 네트워크와 연합을 구축해 왔고, 그 덕분에 유럽무용계는 개방적이고 유연하게 발전할 수 있었다. 아시아에서도 이런 강력한 협력적 움직임이 발전하기를 바란다. 인터뷰에 응해 주어 감사하다. 이 내용이 한국 무용가들에게 큰 도움이 되길 바란다.

2025. 12.
사진제공_손인영 *춤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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