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broad
재원은 그 힘이 가장 세련되게 숨어드는 장소다.
오울루의 밤은 끝내 어두워지지 않았다. 핀란드 북부의 6월, 자정이 지나도 하늘은 희멀건 빛을 거두지 않는다. 이 도시가 2026년 유럽 문화수도(European Capital of Culture)로 내걸고 있는 구호는 "Cultural Climate Change"였다. 문화와 기후를 교차시킨 이 표현은 지속가능성의 문제가 이번 IETM 플레너리 미팅의 핵심에 놓일 것임을 예고하는 듯했다. 그러나 막상 회의장에서 체감된 긴급함의 온도는 전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기후 위기보다 더 당장의 것들 — 예술에 대한 지원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 예술가들이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에 관한 압력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 — 이 회의장의 공기를 채웠다.
나는 이번 미팅에 IETM의 공식 지명을 받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델리게이트로 참석했다. 그러나 현장에서 요구된 역량은 안무 언어에 대한 감각이나 예술 형식의 전문성만은 아니었다. 변화하는 국제 문화 정책의 방향을 읽고, 재원 구조의 이동이 예술 생태계에 어떤 압력을 가하는지 분석하며, 유럽 정치의 흐름 속에서 예술이 어떤 기능을 부여받고 있는지를 해석하는 능력이었다. 선발 기준과 실제 역할 사이의 이 간극은, 이 미팅이 무엇을 다루는 자리인지 이미 말해주고 있었다.
드라마터그·연구자·퍼포머로서 무용과 철학, 문화이론의 경계를 오가며 작업해온 나에게 이러한 요구는 전혀 낯설지 않았다. 200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제출한 정책 제안서 「무용의 미래 2020」에서부터 최근 연재를 마친 「무용계 생명정치와 윤리」에 이르기까지, 재원 구조와 예술 지원 정책이 현장 생태계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추적하고 기록하는 일은 내 연구의 오래된 축이었다. 그런 점에서 오울루에서 요구된 것은 새삼스러운 역할이라기보다, 내가 오래 해온 작업이 국제 문화정책의 언어 안에서 다시 불려지는 경험에 가까웠다.
프리미팅: 에스포에서 시작된 질문
이번 여정은 오울루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헬싱키 인근 도시 에스포(Espoo)에서 먼저였다. 플레너리 본행사에 앞서 열린 프리미팅(pre-meeting)의 토크세션 제목은 단호했다: "WHY DO WE SHUT UP? — on self-censorship in the arts". 왜 우리는 침묵하는가. 예술에서의 자기검열에 관하여.
세르비아의 밀리차 페키치(Milica Pekić), 싱가포르와 핀란드를 오가며 활동하는 쫑 구아 키(Chong Gua Khee), 핀란드의 극작가이자 연출가 미카 뮐리아호(Mika Myllyaho) — 세 사람은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와 정치적 맥락에서 왔지만, 이들이 이야기한 침묵의 구조는 놀랍도록 공통된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검열이 국가 권력의 직접적인 금지 명령으로만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더 자주, 더 깊이 작동하는 검열은 내면에서 온다. 기관의 반응을 예상한 선제적 회피, 반복된 압력이 내면화되어 창작의 언어를 스스로 조율하게 되는 과정 — 그것이 자기검열의 본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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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포 프리미팅 토크세션 ‘왜 우리는 침묵하는가. 예술에서의 자기검열에 관하여’ ⓒ이진아 |
세르비아의 맥락은 특히 구체적이었다. 2024년 11월, 노비사드(Novi Sad) 기차역의 지붕이 붕괴했고, 최소 15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이 참사가 드러낸 부실 공사와 국가 부패에 대한 시민적 분노가 예술계로 번지면서, 예술가들은 질문 앞에 서야 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는 왜 하지 않았는가. 쫑 구아 키의 증언은 또 다른 차원을 열었다. 두 개의 공간 사이를 오가는 예술가에게 검열의 기준은 하나가 아니다. 어떤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말해지는 것이 다른 공간에서는 위험이 된다. 국제 활동을 하는 예술가는 어느 나라의 기준으로 자신의 언어를 검열해야 하는가. 뮐리아호가 이야기한 핀란드의 침묵은 더욱 역설적이었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환경에서조차 기관의 반응에 대한 예상이 창작의 방향을 서서히 조정하게 만든다면, 그 침묵은 금지가 아니라 학습된 것이다.
에스포에서 제기된 이 질문들은 오울루 본행사 전체를 관통하는 기저음이 되었다. 헬싱키에서 기차를 탔다. 오울루까지 약 6시간. IETM은 이 이동 자체도 프로그램으로 만들었다 — 기차 상층 칸에서 환경 워킹그룹 세션을 진행한 것이다. 기후 위기를 논하면서 이동하는 역설적인 풍경, 그러나 동시에 비행기 대신 기차를 선택한 것 자체가 실천이기도 한 풍경. 플레너리 본행사는 6월 15일부터 18일까지 나흘간 오울루 극장(Oulu Theatre)과 문화센터 발브(Cultural Centre Valve)를 중심으로 이 도시의 여러 공간을 무대로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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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 회의장 오울루 시어터와 문화발브 ⓒ이진아 |
마켓에서 싱크탱크로
IETM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81년이다. 초창기 불어권의 주도 아래 형성된 이 네트워크는 국제 공동제작, 투어링, 프레젠테이션 기회의 매개 — 말하자면 공연예술계의 마켓적 기능을 포함한 국제 네트워크로서 정체성을 구축해왔다. 작품을 직접 거래하는 공간은 아니었지만, 어떤 작품이 어느 극장과 만나고, 어떤 파트너십이 맺어지는가가 실질적인 중심이었다.
2026년 오울루에서 만난 IETM은 달랐다. 현장의 공용어는 영어로 자리 잡아 있었고, 프로그램의 무게중심은 마켓적 기능에서 멀어져 있었다. 작품 피칭 세션인 '피치오라마(Pitchorama)'는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이번 미팅의 중심축은 작품 소개보다 구조적 의제에 더 가까워 보였다. 프로그램의 중심을 채운 것은 '나를 먹여 살리는 손을 물 수 있는가: 예술 재정의 권력과 책임', '국경 간 협력을 위한 공간의 축소', '갈등의 시대에 문화에 요청하는 것', '기계의 시대에서의 문화 노동' 같은 제목들이었다. "어떤 작품을 사고팔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구조 아래에서 예술이 가능한가"를 묻는 자리. 이제 IETM은 네트워크이자 정책적 싱크탱크에 가까운 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언어의 전환도 단순한 소통 방식의 변화가 아니다. 초기 불어권 중심의 네트워크가 영어 기반의 국제 정책 언어로 이동해왔다는 사실은, 이 네트워크가 누구를 향해 말하고 있으며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재조정을 의미한다. 유럽 공연예술의 언어가 국제적 정책 언어와 접합되는 과정이며, 동시에 그 논의가 유럽 내부를 넘어 더 넓은 세계를 향해 열리고 있다는 신호다. 이 전환기 위에서 오울루 미팅은 진행되었다.
연결된 위기: 돈과 검열, 그리고 침묵의 메커니즘
나흘간의 프로그램을 가로지르는 아젠다는 크게 세 축이었다. 환경, 돈, 그리고 검열. 그러나 이 셋은 동등하게 다루어지지 않았고, 이 불균형 자체가 이미 하나의 분석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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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울로 가는 기차안 환경 그룹 워크샾 ⓒ이진아 |
환경과 기후 문제는 프로그램 안에 분명히 있었다. 기차 안의 환경 워킹그룹, 본행사에서 줄리스 바이시클(Julie's Bicycle)과 함께 진행된 '지금 서 있는 곳에서: 문화와 기후 리더십' 세션, IETM 자체 교육 프로그램인 '그린 스쿨(Green School)'. 그러나 기후 담론은 공론의 중심으로 올라오지 못했다. Q&A에서 환경 질문이 제기되었을 때 돌아온 답변들은 솔직했다: 그린워싱이 일어났다, Creative Europe가 환경을 우선순위로 삼았지만 관심이 이미 기술적 측면으로 이동했다, 녹색 담론이 전문화되면서 일반적인 논의의 공간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기후 담론은 언제나 이런 방식으로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곤 했다. 시급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지만, 더 당장의 위기 앞에서 순위를 잃는다. 오울루에서 '더 당장'은 돈과 검열이었다. 그러나 환경이 뒷자리로 사라지는 이 반복 자체가 이미 경고다.
본행사 첫날 오프닝 패널로 열린 세션은 이 불균형의 구조를 정면에서 다루었다. 제목은 ‘나를 먹여 살리는 손을 물 수 있는가: 예술 재정의 권력과 책임’. 연구자 베아타 호크(Beáta Hock)가 사회를 맡고, 세르비아 BITEF의 크세니야 주로비치(Ksenija Đurović), 네덜란드 Institute of Network Cultures의 셉 에켄하우센(Sepp Eckenhaussen), 핀란드 코네재단(Kone Foundation)의 마이야 카라스바라(Maija Karasvaara)가 패널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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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의 토크 ‘나를 먹여 살리는 손을 물 수 있는가’ ⓒ이진아 |
세션은 예술지원이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다루었다. 베아타 호크는 1989년 이후 포스트사회주의 동유럽에서 국가 보조 체계가 붕괴한 뒤 소로스재단(Soros Foundation)과 ERSTE Stiftung 같은 국제재단이 문화예술장을 재편한 역사를 설명했다. 그 지원은 예술가들에게 자유와 국제화의 문을 열어주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의존성과 권력관계를 만들었다. 크세니야 주로비치는 외부 지원이 한때 권위주의적 국가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숨구멍이었지만, 동시에 "외국의 영향력"이라는 정치적 공격의 언어로 되돌아오는 현실을 말했다. 세션장 한쪽 스크린에 등장한 "WASH YOUR DIRTY MONEY WITH MY ART"라는 문구는 이 모순을 선명하게 압축했다. 셉 에켄하우센은 네덜란드 예술계에서 부상하는 민간 후원과 자선이 어떻게 민주적 거버넌스와 예술계의 침묵을 위협하는지 질문했고, 마이야 카라스바라는 지원기관이 자신의 권력을 자각하고 접근성과 투명성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의 문제를 제기했다.
이 세션에서 검열은 노골적인 금지나 삭제가 아니라, 돈의 흐름, 기관의 위험 회피, 후원자의 이미지 관리, 예술가의 생존 감각 속에서 작동하는 힘으로 드러났다. 질문은 하나였다: 예술가는 자신을 먹여 살리는 손을 물 수 있는가.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 예술가가 그 손을 물어도 굶지 않을 수 있는 구조를 우리는 만들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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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의 토크 및 워크샾 ‘국경을 넘는 협업의 공간이 줄어들 때: 예술 생태계의 회복 전략’ ⓒ이진아 |
이러한 구조적 위기는 막연한 진단에 머물지 않고 수치로도 제시되었다. 독립 연구자 엘레나 폴리브체바(Elena Polivtseva)의 발표 '국경을 넘는 협업의 공간이 줄어들 때: 예술 생태계의 회복 전략'은 현재 유럽 공연예술 분야의 구조적 조건을 세 가지 트렌드로 짚었다. 정치 의제에서 예술의 가치가 하락하고 있다. 재원이 줄어들고 있다. 정치적 압력이 증가하고 있다. 이 세 트렌드에 대한 현재 분야의 대응은 각각 도구화(instrumentalisation), 단기 소규모 지원금을 둘러싼 경쟁, 그리고 자기검열이었다.
재원 축소의 현실은 숫자로도 나타난다. 한 EU 공동 창작 지원 프로그램에서는 435건의 신청서 중 42건만이 선정되었고, 187개 파트너 기관이 그 안에 나뉘어 참여했다. 이 수치가 의미하는 것은 단지 경쟁이 치열해졌다는 사실이 아니다. 지원금 경쟁이 심화될수록 예술가와 단체들은 더 작고, 더 짧고, 더 ‘안전한’ 프로젝트를 선택하게 된다. 논란의 소지가 있는 주제, 실험적인 형식, 비주류 파트너와의 협력은 선정 가능성을 낮춘다. 이것이 재원의 축소와 지원금 경쟁의 심화가 자기검열로 이어지는 구조다. 돈의 문제와 검열의 문제는 별개의 아젠다가 아니라 하나의 메커니즘 안에서 서로를 강화한다.
PAC(Performing Arts Coalition)의 설문조사 데이터는 이 구조를 수치로 보여준다. 응답자의 33%가 공공 기관 또는 후원자에 의한 직접적인 검열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37%는 최근 자기검열을 했다고 고백했다. 47%는 예술 표현의 자유가 위협받고 있다고 느꼈고, 발표 자료에 따르면 55.8%는 사람들이 공연예술에 자유롭게 참여할 권리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고 응답했다. 숫자만으로도 충분히 무겁지만, 이것이 통계로 수집되고 정책 언어로 제출된다는 사실이 더 무겁다. 유럽은 지금 예술적 자율성이 제도적으로 보호받는다는 믿음이 흔들리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그것은 동유럽과 발칸 지역만의 오래된 문제가 아니라, 북유럽과 서유럽 일부가 자신들의 문제로 다시 받아들이기 시작한 두려움처럼 보였다.
EU 문화 정책의 방향도 이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EU는 문화를 점점 더 '보호'의 언어로 다룬다 — 유산, 정체성, 가치관의 보호, AI로부터의 문화 보호. 동시에 문화를 소프트파워와 글로벌 창의성 리더십의 도구로 호명한다. 엘레나는 이 두 방향 사이의 혼선이 정책 현장에 실질적인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진단했다. '연대(solidarity)'의 언어로 돌아가자는 입장과 전략적 소프트파워 담론 사이에서, 현장 예술가와 단체들은 어느 언어로 자신의 프로젝트를 정당화해야 하는지 점점 불분명해지고 있다. 2027년 발표를 목표로 준비 중인 유럽 예술가 헌장(European Artists' Charter)은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예술가의 노동권과 사회적 지위에 관한 약속들을 명문화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부드러운 선언에서 실질적 재원으로의 전환이 얼마나 더디고 불균등한지는 이미 이 분야가 오래 알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이번 미팅에서 충분히 발화되지 않은 질문이 하나 있었다. 교류 자체에 내재한 권력 구조에 관한 것이다. 소프트파워는 EU의 대외 정책 언어에서만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유럽 내 교류 프로그램들 사이에서도, 그리고 유럽과 비유럽 국가들 사이의 문화 협력 안에서도 이미 작동하고 있다. 레지던시, 공동제작 지원, 네트워크 멤버십 — 이 구조들은 중립적으로 보이지만, 의제를 누가 설정하는지, 어떤 예술이 '국제적'으로 가시화되는지, 비유럽 예술가가 유럽 네트워크에 진입하기 위해 무엇에 맞추어야 하는지를 조용히 규정한다. 연대와 수평적 교류의 언어가 실제로는 특정 미학적 기준과 담론 문법을 전파하는 구조일 수 있다는 것 — 이것은 IETM 같은 네트워크 자체에 대해서도 던져야 할 질문이다. 비유럽 예술가가 이 네트워크 안에서 '참여자'인가 아니면 '초대된 타자'인가는, 프로그램의 언어가 아니라 누가 어떤 조건에서 무엇을 발언할 수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독일의 상황은 이 질문을 더욱 날카롭게 만든다. 회의장 밖 비공식 대화에서 들은 독일의 사례들은, 극우 정당의 약진과 함께 공공 문화 지원의 논리 안으로 '애국 예술가'라는 범주가 스며들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특정 입장의 예술가와 기관에 대한 제도적 배제가 '가치 수호'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지원의 조건으로 정치적 서약이 요구되는 사례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검열이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얼마나 세련된 외양을 취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불편한 징후다.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는 유럽이라는 서사와, 지원 조건으로 표현을 통제하는 현실 사이의 균열. 이번 미팅의 공식 프로그램은 이 균열을 정면으로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회의장 밖 대화 속에서, 그리고 참가자들의 발언 사이 어딘가에서, 그 균열은 분명히 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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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울루 엠피 시어터에서 페어웰 브런치 ⓒ이진아 |
한국의 자리: 기시감과 과제
이 모든 논의를 들으면서 내내 나를 따라다닌 감각은 낯섦이 아니었다. 기시감이었다.
유럽 공연예술 분야가 새롭게 공통의 위기로 말하기 시작한 것들 — 공공 기관에 의한 지원 차단, 특정 작품과 예술가에 대한 정치적 압력, 그 결과로서의 자기검열의 일상화 — 을 한국은 이미 경험했다. 2016년에서 2017년 사이에 드러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은 약 9,473명의 예술가가 정치적 성향을 이유로 공공 지원에서 체계적으로 배제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영화, 문학, 시각예술, 공연예술 전반에 걸친 이 사건은 한국 예술계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이후 제도적 복구가 이루어졌지만, 그 경험이 예술가 개인의 내면과 기관 문화에 어떤 방식으로 잔류하는지는 여전히 완전히 해명되지 않았다.
더욱이 2024년 12월, 대한민국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민주주의의 취약성과 다시 마주했다. 대통령에 의한 비상계엄 선포, 그것을 수 시간 안에 무력화한 국회, 그리고 이어진 탄핵과 헌법재판소의 인용까지. 이 사건은 EIU 민주주의 지수가 20년에 걸쳐 측정해온 전 지구적 민주주의 후퇴의 흐름과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동시에, 그 위기의 시간 동안 예술가들이 광장에서 어떤 방식으로 존재했는지, 저항의 문화가 어떤 형태를 취했는지는 한국이 국제 공론장에서 더 적극적으로 설명해야 할 중요한 사례다.
지정학적 조건도 있다. 한국은 분단된 나라다. '국경 간 협력을 위한 공간의 축소' — 오울루에서 이것은 정책 분석의 언어였지만, 한국에게 이것은 물리적 현실이다. 그러나 '북쪽으로의 이동이 막혀 있다'는 단순한 진술 뒤에는 훨씬 더 복잡한 층위들이 있다. 분단은 한국의 검열 역사와 분리되지 않는다. 반공 이데올로기는 수십 년 동안 예술 현장을 규율하는 언어로 작동했고, 국가보안법의 테두리 안에서 특정 표현은 법적 위험이 되었다. 블랙리스트 사건의 역사적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자리에 분단이 있다. 더 불편한 것은 이것이다. 한국의 국제 교류는 분단, 안보, 외교 관계라는 거대한 그림자를 배경으로 하며, 예술적 맥락보다 ‘자유 민주주의 한국’이라는 지정학적 프레임 안에서 먼저 해석되곤 한다. 이 역시 문화가 소프트파워로 작동하는 방식이며, 한국 예술의 국제 교류가 순수한 연대인지 아니면 특정 지정학적 프레임 안에서 기능하는 것인지를 묻는 일은 한국 예술계가 아직 충분히 직면하지 않은 자기 질문이다. 이러한 정치적 그림자 위에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장벽이 겹쳐진다. 바로 K-컬처와 K-pop으로 대표되는 대중문화의 전 지구적 성공이다. 이 성공은 한국 예술의 가시성을 높이는 중요한 조건이 되었지만, 동시에 한국의 예술가들에게 역동적이고 성공적이며 세련된 문화산업의 이미지를 기대하게 만든다. 이러한 브랜드화된 기대는 그 이면에 존재하는 한국 사회의 긴장, 검열의 역사, 분단의 비극 같은 불편한 서사들이 들어설 자리를 좁힌다. 또한 ‘K-’라는 수식어를 달지 않은 실험적이고 비판적인 예술적 시도들을 쉽게 설명되지 않는 것으로 밀어낼 위험도 있다. 결국 한국의 예술가는 자신의 작업을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 대중문화가 만들어놓은 ‘K-’라는 환상적 이미지를 먼저 걷어내야 하는 이중의 노동을 수행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멈추면 안 된다. 한국이 유럽보다 앞서 겪었다는 것은 우리가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이번 미팅이 드러낸 것은, 우리가 경험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것을 국제 공론장에서 작동하는 언어로 번역하는 데 실패해왔다는 점이다. 유럽은 검열과 재원의 문제를 데이터로 수집하고, 정책 권고사항으로 제출하며, 집단적 요구로 체계화한다. 한국은 그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국제 네트워크 안에서 공유 가능한 형태로 제출된 적이 없다. 우리의 과제는 이제 '경험의 공유'이다.
오울루 미팅에서 한국을 명시한 프로그램은 단 한 줄도 없었다. 비유럽 지역은 인도의 연구자들, 르완다의 예술가, 대만의 작품 등을 통해 간헐적으로 등장했지만, 한국은 없었다. 이것이 현재의 위치다.
그러나 나는 이 자리에서 듣기만 하지 않았다. 프리미팅과 본행사 두 자리에서 한국 예술계의 검열 경험을 직접 발언했고, 토크 퍼실리테이터이자 IETM 사무총장인 아사 리차즈도티르(Ása Richardsdóttir)로부터 비공식적으로 한국의 경험을 IETM 회원들과 나누는 글을 써줄 수 있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한국의 경험이 유럽 공연예술 네트워크 안에서 참조 가능한 사례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공유의 순간이 일방적 수용이 아닌 대화의 형태를 취할 수 있다는 것 — 이것이 이번 미팅에서 내가 직접 확인한 가능성이었다. 그 위치를 바꾸는 것은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가져갈 언어를 갖추는 것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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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본회의장 모습과 회의에서 거수로 투표하는 장면 ⓒ이진아 |
춤, 위기의 중심에서 다시 묻는 것
무용이론을 공부하고 드라마투르기를 실천해온 사람으로서, 나는 이번 미팅 전체에서 '무용'이 명시적으로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직시한다. 다루어지는 것은 '공연예술'이라는 더 넓은 범주였고, 무용이 가지는 특수한 조건은 그 안에 용해된 채 따로 분리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미팅이 다룬 위기들은 무용에게 다른 형식보다 더 날카롭게 적용된다. 재원이 줄어들 때 가장 먼저 삭감되는 것이 신체 훈련의 공간과 리허설 시간이라는 것을 한국 무용 현장은 이미 알고 있다. 무용은 악기도, 텍스트도, 재현 가능한 무대 장치도 아닌 '몸'에 의존한다. 몸을 유지하는 비용은 지속적이고 대체 불가능하다. 온라인으로 넘어갈 수 없고, 단기 프로젝트에 맞춰 압축될 수 없다. 단기 산출물 중심의 기금 구조는 춤이 요구하는 몸의 시간을 본질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검열의 문제에서 무용이 갖는 위치는 역설적이다. 팔레스타인 공연예술가 리함 이삭(Riham Isaac)이 이끈 세션 ‘아카이브에서 행동주의로: 집단적 저항으로서의 신체화된 실천’은 이 역설을 정면으로 다루었다. 텍스트는 삭제될 수 있고, 이미지는 차단될 수 있지만, 신체의 움직임이 품고 있는 기억과 저항은 그것을 수행하는 몸 자체를 금지하지 않는 한 완전히 지워지기 어렵다. 몸이 금지되는 공간에서 춤은 존재 자체가 저항이 된다. 그렇기에 춤이 침묵할 때, 그 침묵은 단지 한 장르의 후퇴가 아니라 몸이 공적 공간에서 발화할 가능성의 축소를 의미한다.
환경의 문제 역시 무용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제기된다. 국제 투어링이 창작 과정 자체에 내재된 예술 형식에서, 탄소 발자국을 줄이기 위한 이동 제한은 단순한 불편이 아니라 예술적 생존의 조건에 관한 질문이 된다. 무용수의 몸은 디지털화되기 어렵다고 알려져있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는 한국 무용계가 인지하고는 있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파고들지 않은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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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파티에서 핀란드의 하지 축제의 일환으로 7개의 꽃으로 화관을 만들어 쓰고 노는 모습 ⓒ이진아 |
나가며: 자유 인프라를 위한 발명
엘레나 폴리브체바가 제시한 '자유 인프라(freedom infrastructures)'라는 개념이 이번 미팅에서 내게 가장 오래 남는다. 이것은 특정 단체의 프로그램이나 개인의 용기에 관한 말이 아니다. 연대와 실질적 상호 지원을 통해, 증가하는 압력에 맞설 수 있는 구조적 기반을 집단적으로 구축하는 것. 정책 입안자에 대한 영향력 행사, 커뮤니티의 구축과 강화, 타 섹터와의 협력, 대안적 재원 조성 모델의 탐색, 자원 재분배의 대안적 모델을 통한 집단적 회복력. 이 목록이 유럽에서도 여전히 이상에 가깝다는 사실은,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말한다. 동시에 그것이 공론장에서 집단적 요구로 제출된다는 사실은, 얼마나 절박한 일인지를 말한다.
한국 공연예술계가 이러한 자유 인프라를 체계적으로 구축하고 있는가. 블랙리스트 이후 제도적 복구는 이루어졌지만, 예술계 내부의 연대 구조, 상호 지원 네트워크, 집단적 옹호 역량은 여전히 취약하다. 경험은 있지만 그것이 언어화되지 못하고, 개별 예술가와 단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압력과 마주한다.
오울루의 6월 밤은 어두워지지 않는다. 끝과 시작의 경계가 흐릿한 긴 황혼의 시간, 그것이 지금 유럽 공연예술이 발을 딛고 있는 지점이다. 무엇이 끝나고 무엇이 시작되고 있는지 아직 분명하지 않은 과도기. 그 안에서 한국이 할 수 있는 것은 구경이 아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언어화하고, 우리가 아직 모르는 것을 배우고, 그 두 가지를 국제 공론장에 함께 가져가는 것. 협업의 공간이 줄어들고 있다면, 그 공간을 단순한 교환의 장이 아니라 서로의 조건을 이해하고 예술의 공공성을 함께 재정의하는 장으로 다시 발명하는 것. 돈 없이는 유지될 수 없고, 자유 없이는 의미가 없으며, 기후를 외면하고는 지속될 수 없는 예술의 조건을 만들기 위해, 지금 필요한 것은 각자의 경험을 고립시키지 않고 서로 연결하는 언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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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지 않는 오울루 ⓒ이진아 |
IETM Oulu Plenary Meeting 2026
https://www.ietm.org/en/meetings/ietm-oulu-plenary-meeting-2026
에스포 IETM사전 미팅 행사
https://emmamuseum.fi/en/event/an-open-panel-discussion-why-do-we-shut-up-on-self-censorship-in-the-arts-and-the-mechanisms-of-keeping-quiet/
IETM 토크세션 〈나를 먹여 살리는 손을 물 수 있는가: 예술 재정의 권력과 책임〉
https://www.ietm.org/en/meetings/ietm-oulu-plenary-meeting-2026/sessions/can-i-bite-the-hand-that-feeds-me-power-and
IETM 토크세션 〈국경을 넘는 협업의 공간이 줄어들 때: 예술 생태계의 회복 전략〉
https://www.ietm.org/en/meetings/ietm-oulu-plenary-meeting-2026/sessions/shrinking-space-for-cross-border-collaboration
이진아
공연예술 연구자이자 무용 드라마투르그로서 동시대 공연예술을 미학적 차원에 한정하지 않고 사회적·제도적·국제적 맥락 속에서 탐구해 왔다. 2004년부터 현장 실천을 통해 한국 무용의 드라마투르기를 정립해 왔다. 영국과 독일 등지에서의 수학을 바탕으로 (런던 골드스미스 칼리지, 로햄튼 대학교, 바우하우스 데사우 등) 움직임이 어떻게 사고를 확장하고 사회적·철학적 상상력을 촉진하는지를 연구와 수행을 병행하며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