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broad
한국에서는 다소 생소한 바티 페스티벌(La bâtie festival de Genève)은 39회째를 맞은 제네바의 가을 축제(9월 2~17일)로 음악, 연극, 춤 분야에서 개성 있는 예술가들이 참여했다. 한국에 잘 알려진 뮤제 드 라 당스(Musée de la danse)의 보리스 샤마즈(Boris Charmatz), 세 드 라베 발레단의 알란 플라텔(Alain Platel), 그리고 얀 파브르(Jan Fabre) 무용단의 리베스 그루에즈(Lisbeth Gruwez)를 비롯하여 개성 있는 아티스트들의 협업 작업들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인상적인 오프닝 공연으로 필립 글래스 뒤를 잇는 미국의 현대 음악 작곡가 존 아담스(John Adams)의 〈세헤라자데.2(Scheherazade.2)〉와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Orchestre de la Suisse Romande)와의 협연이 이 축제의 지향점을 잘 보여주었다. 고전의 가능성을 동시대적 이슈(난민 문제)와 연관시켜 음악과 사회와의 관계를 구축하고자한 존 아담스의 세헤라자데 해석이 1973년 부아 드 라 바티에 의해 시작된 ‘발견과 창조’라는 ‘라 바티(La bâtie)’의 의미와 일맥상통한 면도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보리스 샤마즈의 2016 신작 〈danse de nuit〉 (9월 2-3일, Sicli Pavilion)는 극장무대가 아닌 예외적인 공간에서 환각적인 춤을 만들고자 한 작업이다. 제목인 ‘danse de nuit’는 영어로 ‘night dance’라는 뜻이다. 공연은 늦은 밤 9시 어두운 야외(Sicli Pavilion) 광장에서 6명의 댄서들이 관객 사이를 가로지르며 시작한다.
칠흑같이 어두운 무법지대를 연상시키는 공공장소에서 댄서들은 마치 야간순찰을 도는 경관같은 느낌이었다. 필자의 실력으로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불어였지만, 정치적인 풍자, 유머, 상징적인 인물들을 빗대가며 정신없이 떠들어대는 댄서들은 몸을 사리지 않고 콘크리트 바닥에 비비고 상대와 밀착시키며 종횡무진하였다.
최소한의 불빛, 즉흥적인 비트와 융화된 몸, 열변을 토하는 연사(演士)같은 몸짓들이 인상적이라 할 것이다. 작품 〈danse de nuit〉는 국한되지 않은 실험적인 춤 공간에 도전하고자 한 보리스 샤마즈의 유목적인(nomadic)성향이 잘 묻어난 작품이다. 이 밤무대는 환각적인 상상력으로 완전히 이끌어졌다고는 할 수 없으나, 도심 밤거리의 소음과 풍광, 댄서들의 절규가 에코처럼 기억되는 작업이다.
얀 파브르 무용단의 뮤즈였던 리베스 그루에즈와 보트복(Voetvoil)의 2인무인 〈We're pretty fuckin' far from okay〉(9월 3~4일, Loup theater)는 인간의 본능인 ‘두려움’에 관한 춤이다. 작품에서 중년의 두 댄서는 각각 의자에 앉아 내면의 감정에 집중, 내밀한 불안감을 차분하게 끌어낸다. 점점 거칠어지는 숨소리, 땀으로 젖어가는 티셔츠, 적절한 타이밍에 무대 안쪽으로 조여 오는 세트 까지 무대는 온통 두려움이라는 이미지로 자욱하다.
두 댄서는 서로를 거칠게 밀어내려는 힘겨루기를 통해 더욱 견뎌낼 수 없는 무게를 표현한다. 시종일관 바닥으로 가라앉을 것 같은 차가운 분위기에 종소리처럼 들리는 아름다운 마지막 음악 한 소절이 긴장된 무대에서 위로의 메시지로 들린다. 이 작품은 두려움에 지배당한 내적 이미지를 풀어내는 댄서들의 내공이 훌륭했고, 언어가 움직임으로 어떻게 포착될 수 있는지 그리고 긴 시간 동안 긴장감의 완급을 어떻게 조절할 수 있는지의 모범을 보여준 작품이다.
스위스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는 토마스 훠(Thomas Hauert)의 〈inaudible〉 (9월7-8일,Salle des Eaux-Vives)은 거쉬인(Gershwin)의 〈Concerto F〉곡이 춤으로 환생한 듯한 작품이다. 거쉬인 풍의 자유롭고 유려한 선율과 섬세하면서도 대조적인 변주에 댄서들은 직관적으로 반응한다. 재즈적인 배경에 화성악의 형식을 구사한 콘체르토 F곡을 안무가는 어떤 개념이나 해석 따위는 거부한 채 시종일관 경쾌하지만 절제된 움직임으로 풀어내 보는 재미를 준다.
개성 있는 댄서들의 표현력은 안단테-알레그로-안단테의 악곡 변화를 시각적으로 환기시켜 입체적인 이미지를 관객에게 불러일으킨다. 랩소디인 블루곡을 들으며 몇 년 전 김연아가 밴쿠버 올림픽에서 요염함과 당당함으로 아이스링크를 누볐던 모습도 생각났다. 느린 음악에서는 응축된 한 덩어리로 모였다가 빠른 부분에서는 말초적인 신경이 반응하듯 자발적으로 리듬에 몸을 실어 각 댄서들이 무대를 누빈다. 악상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반복적인 리듬을 변주해 가는 댄서들의 몸짓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춤으로 완성된 거쉬인의 콘체르토 F 곡이라 할 것이다. 이 작품의 미덕은 관객에게 사변적인 접근이 아니라 미적 감수성을 음악과 춤으로 풍성하게 불러일으켜준 부분이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 그로노불 국립안무센터 라쉬드(Rachid Ouramdane)의 〈Tordre〉 (9월 10, Espace Vélodrome)는 댄서들의 자전적인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로라와 애니(Lora Juodkaite and Annie Hanauer) 두 댄서는 섬세한 움직임으로 자기고백을 한다. 한 댄서는 공연시간 동안 쉬지 않고 턴을 반복한다. 가속도가 붙은 턴 동작은 소용돌이치듯 물리적으로 제어 불가능할 정도의 경지까지 다다른다.
직각으로 휘어진 허리, 두 주먹을 쥔 채로 자기 몸을 감싸며 시종일관 턴을 돌며 “자신은 왜 이렇게 턴을 도는지, 멈출 수는 없는지...”. 어릴 적부터 무의미하게 반복해 온 자신의 일상을 얘기하면서도 멈출 수 없는 댄서의 모습. 다른 댄서가 턴을 도는 댄서를 안아주고 멈추게 도와줘도 여전히 턴을 도는 댄서의 모습에서 처연함이 느껴진다. 또 다른 댄서는 인공 팔을 장착한 채로 발레동작을 보이며 또 다른 단면의 일상을 표현한다. 기본기가 탄탄한 이 댄서는 점차적으로 자기안의 맺힌 무언가를 털어내며 자유로워진 모습을 갖추게 된다.
두 댄서는 얽힌 실타래가 풀리듯 가벼워진 몸짓으로 밝게 ‘feeling’곡에 맞춰 춤춘다. 이 모습은 마치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자신들의 춤에 대한 다짐 같은 진솔한 고백처럼 객석에 전달된다. 〈Tordre〉은 춤으로 대화하며 공감할 수 있음을 잘 보여준 작품이라 할 것이다.
페스티벌 마지막 작품인 알란 플라텔의 〈nicht schlafen〉(9월 16-17,Bâtiment des forces motrices)은 죽음을 폭로하듯 불안한 시대적 사회상을 표방한 무대이다. 무대 정중앙에 설치된 말 사체 더미는 벨기에 작가 베를린 더 브라위케어(berlinde de bruyckere)의 작업으로 죽임당한 살덩어리, 즉 폭력적인 인간성을 은유하고 있다. 알란 플라텔은 20세기 초 구스타프 말러가 살았던 세계 1차 대전 1년 전 사회적 긴장과 정치적 맥락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말러의 가곡에 콩고출신 가수의 폴리파니(polyphony) 결합은 비극적인 선율에 민속적이며 영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흑인, 백인, 여자, 남자, 무슬림, 각양각생의 인종, 성별과 종교까지 은유하는 댄서들은 서로 옷을 찢고 싸우며 공격적인 욕망을 표현한다. 제물을 신께 드리는 제례의식의 선도자와 희생자가 존재하는 힘의 세계,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군상들의 모습에서 살이 찢기는 고통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알란 플라텔은 전쟁에 대한 공동체의 불안과 공포를 희생양이 된 사체더미로 그 주변에 머무르는 댄서들의 모습으로 대변한다.
후반부는 반복적인 패턴이 지속되어 초반의 긴장감이 해체된 듯 하였으나 댄서들의 절정의 기량으로 흐트러진 맥락은 이내 추슬러지고 육체의 해방을 희망하는 마지막 댄서들의 춤을 통해 평화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었다.
바티 페스티벌에서 만난 작품들은 기존의 레퍼토리를 재현하기보다는 신작이 많았고 다각도로 춤에 접근하는 안무가들의 방식도 다채로웠다. 무엇보다 주변 유럽 국가들에서 개최되는 축제에 비해 덜 주목받은 스위스의 페스티벌에서 기대 이상으로 알찬 작품들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