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broad
7월 1일부터 24일까지 독일 함부르크에서는 ‘예술가들의, 예술가들을 위한, 예술가들에 의한’ 독특한 형식의 작업 ‘트레펜 토탈 2016 (Treffen Total 2016)’ 이 이루어졌다. 트레펜 토탈 2016은 예술가들이 모여 3주간 다채로운 방식으로 협동작업 및 교류를 나누는 레지던시 형식이다. 함부르크를 베이스로 활동하는 16명의 무용수와 안무가 외에도 연극, 음악 분야의 예술가들과 8명의 다국적 예술가들까지 총 24명의 예술가들이 모여 함께 작업을 진행했다.
트레펜 토탈은 그 모티브를 예술 작업 및 교류 프로젝트인 ‘스위트 앤 텐더 콜라보레이션(Sweet & Tender Collaboration, 이하 S&T)’ 에서 가져왔다. ‘S&T’ 역시 다국적의 예술가들이 모여 이루어진 그룹으로, 개인으로 활동하는 독립 예술가들이 혼자서는 구현해내기 어려운 작업물의 가능성과 예술가들의 네트워크를 확장시키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S&T’의 멤버로, 함부르크에서 트레펜 토탈을 시작하는데 큰 기여를 한 무용수이자 안무가인 예니 바이어(Jenny Beyer)는 “제가 속한 무용 그리고 공연 예술 현장에는 늘 수많은 경쟁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살아남는다는 것 역시 매우 힘든 일이죠. 그래서 저에게는 누군가와 믿음을 쌓으며 서로 돕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 그런 사람들을 만나고 교류할 수 있는 장소로서 ‘S&T’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포멧이 함부르크에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라고 말한 바 있다.
예니 바이어와 조지 홉마이어(Georg Hobmeier)를 주축으로 2010년 트레펜 토탈이 처음으로 시도되었고, 2014년에는 1.5회라고 볼 수 있는 소규모의 트레펜 토탈이 열렸다. 1회에는 해외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1.5회에는 함부르크지역 예술가들만이 모여 일주일 간 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더 긴 기간 동안 프로젝트를 진행하자는 데에 뜻을 모아 2016년 그 두 번째 문을 열게 된 것이다.
이상적 예술 작업 구조의 구축
트레펜 토탈에서 주목할 만 한 점은 ‘민주적’이고 ‘즉흥적’인 작업 구조이다. 트레펜 토탈에는 리더도, 감독도, 촘촘히 짜여 진 계획도 없다. 트레펜 토탈의 모든 구성원들은 동등한 위치에서 모든 일정을 ‘민주적’ 방식으로 결정한다. 또한 모든 일정은 하루 전 혹은 당일에 결정된다. 프로젝트의 일원이라면 누구든 아이디어를 제안할 수 있으며, 다양한 제안들은 모든 구성원의 동의를 거쳐 결정된다. 올해의 3주 간의 일정 역시 –아침마다 정기적으로 이루어졌던 트레이닝과 5번의 이벤트를 제외하고는– 모두 하루 전날 저녁 혹은 당일에 결정이 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구성원들에 의하면 트레펜 토탈의 목표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고 한다. 모든 일정이 끝나는 3주 후에 반드시 완성된 작품을 선보여야 하는 것도, 어떤 성과를 내보여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독립 예술가로서 어떻게 다른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고, 어떠한 작업을 하는지, 서로 어떤 교류를 할 수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함께 아이디어를 생산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지 등 ‘방법’ 자체에 몰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곳의 예술가들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그들의 관심사와 작업 방향을 보다 자유로운 방식으로 펼칠 수 있고, 마지막에 어떠한 결과물을 생산해내어야만 한다는 압박으로부터 해방된다. 기존 레지던시나 프로젝트들이 예술가들에게 프로젝트 계획서 -심지어는 정해진 테마에 맞는 작업에 대한- 를 요구하고 그에 걸 맞는 결과물을 기대하는 것과 차별되는 구조임이 틀림 없다.
S&T의 일원이자 올해 트레펜 토탈에 참여한 퍼포먼스 아티스트인 리타 나탈리오(Rita Natalio) 는 참가 동기에 대하여 “제 작업을 환기 시킬만한 새로운 계기가 필요했는데 트레펜 토탈이 지금의 저에게 가장 필요한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명확한 아이디어나 계획이 없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활발하게 교류를 나누는 동시에 새로운 영감과 아이디어가 발생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정형화 되어있는 저만의 패턴을 재설정하고 창의적인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이 마련되죠.” 라고 말하였다.
트레펜 토탈의 다른 주목할 만한 점은 3주간 참여하는 예술가들 모두 작업 기간에 해당하는 급여를 받는다는 것이다. 결과물 없이 과정에 집중하는 레지던시 성격의 트레펜 토탈은 한국은 물론 유럽에서도 일반적으로 지원을 받기 쉽지 않은 성격을 띠고 있다. 예술가들의 작업이 아닌 협업 방식 자체를 연구•발전시켜야 하는 당위성이란 그 자체로 매우 추상적이다. 때문에 이것을 행정부에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도전이다. 하지만 트레펜 토탈은 성과 위주나 일부 증명된 예술가들 위주로 책정되는 지원금 구조를 뛰어넘어 함부르크시 문화부와 함부르크 문화재단, 루돌프 아우그스타인 재단을 통해 그 비용을 충당하고 있다. 예니 바이어는 이에 대해 “트레펜 토탈은 하나의 예술 프로젝트로, 모든 참여 예술가들이 주급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하고자 하는 작업이 단순한 자기 투자가 아니라 예술 프로젝트나 일로 여겨진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죠.” 라며 뿌듯함을 표했다.
이상이 실제에서 구현될 때
3주간 함부르크와 세계 각지에서 모인 예술가들에게는 ‘화이트 월(White Wall)’과 K3 무용 센터에서 제공한 여러 개의 연습실들이 주어졌다. 화이트 월이라 불리는 커다란 벽면에는 구성원 누구라도 다음날 자신이 작업하고자 하는 아이디어와 시간 등을 포스트잇으로 붙여 넣을 수 있고, 관심이 있는 구성원은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다. 아이디어를 제안한 이와 참여하기로 한 이들이 모여 여러 가지 방식으로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실험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자유로운 작업 방식과 협업에 장점만 있는 것 일까. 누군가 에게는 흥미로운 아이디어가 모두에게 같은 크기와 의미로 다가갈 수는 없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이를테면 어떤 아이디어들은 시작조차 못하거나 제안자 혼자서 진행하는 경우도 발생하며, 함께 작업을 진행하다가 중간에 무산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함부르크를 베이스로 활동하는 안무가 울시나 토시는 “트레펜 토탈에서 우리는 너무 빨리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법도 배우게 됩니다. 예를 들면 여러 사람들이 함께 작업하길 약속했지만 정작 당일에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실망하기도 했지만 지금의 우리는 그들이 같은 주제를 다른 방식으로 풀어나갈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의 의견과 결정을 존중합니다. 동시에 긍정적인 작업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죠. 이런 것들 역시 공동 작업을 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이며 트레펜 토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트레펜 토탈에서 유일하게 계획이 되어있었던 것은 트레이닝과 5번의 쇼잉이었다.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 아침마다 진행된 2시간의 트레이닝과 다섯 번의 쇼잉에는 트레펜 토탈의 멤버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무료로 참여할 수 있었다. 물론 계획된 것은 시간과 장소일 뿐 트레이닝 내용과 쇼잉의 형식과 프로그램은 하루 전에 결정되곤 했다. 특히 쇼잉은 매번 다른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그 첫 날에는 모든 참여 예술가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5분 간의 쇼잉을 준비해 서로를 소개하고 알아가는 시간이 마련되었다. 이후에는 피크닉이나 오픈 스튜디오 형식으로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이벤트들도 마련되었다.
7월 22일 진행된 트레펜 토탈의 마지막 쇼잉에서는 어느 정도 발전된 작업 형태를 엿볼 수 있었다. 쇼잉은 4곳의 스튜디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어 작업에 관한 짧은 설명 이후 관객들이 개인의 흥미를 따라 선택적으로 스튜디오를 방문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방식으로 약 4번의 로테이션이 이루어졌는데, 소리와 고요함, 만남의 연극, 누디티, 흔들리는 마이크, 혀, 소개팅, 즉흥 등의 그 제목만으로도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작업들 중 오직 3-4개의 작업만 직접 확인 할 수 있었던 것은 관객으로서 아쉬움이 남는 점이었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단순히 작업을 선보이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에게 질문과 아이디어를 묻거나 함께 시도하기를 요구하면서 작업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했다. 특히 파블로스 콘토리오티스와 토비아스 그로나우가 공연한 〈2명의 밥과 1명의 스티브 (2Bobs & 1Steve)〉는 관객들로부터 작업 과정에 대한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작업이었다.
천장으로부터 길게 떨어진 줄의 끝에는 간신히 바닥에 닿지 않을 만큼의 높이로 두 개의 마이크가 매달려 있다. 이 마이크는 두 명의 공연자에 의해 마치 그네와 같은 모습으로 가벼운 포물선을 그리며 운동을 한다. 두 마이크는 서로 옆에 놓이거나 스쳐지나 갈 때 만 웅웅 거리는 소리를 내뿜게 된다. 평행선상에서 반복해 왔다 갔다 하는 단순한 움직임이지만 그것은 결코 단조롭지 않다. 안무가는 마이크의 운동에 숫자 법칙 –예를 들면 3-2-1-2-3 같은– 을 적용해 그 움직임과 소리를 다양화했고, 쉽게 읽히는 기초적인 법칙에서 시작해 점점 복잡해지는 법칙은 이내 관객을 혼란에 빠트리면서도 몰입도를 끌어올렸다. 음악과 수학, 물리학이 적용되어 철저하게 계산되고 계획된 소리, 그리고 움직임은 흥미로운 움직임의 이미지로 구현되었고, 공연 이후 공개된 그의 안무 스코어 노트는 웬만한 수학 공식보다 더 완벽한 법칙을 보여주며 감탄을 자아내었다. 이 테마로 다년간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파블로스는 관객들에게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는지 적극적으로 질문을 던졌고 관객들은 무게, 시간, 공간 등을 이용한 스코어의 변형, 계산과 인간의 관계 등에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하지만 모든 쇼잉이 흥미롭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결과물에 중점을 두지 않더라도 3주라는 리서치 기간을 고려했을 때 고민과 연구의 깊이가 그닥 깊어 보이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고 트레펜 토탈의 구조에 관한 여러 가지 질문들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상과 실제의 간극
트레펜 토탈은 꽤나 이상적인 작업 환경을 구축해냈다. 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서로 돕고, 도울 수 있어 영감과 아이디어, 에너지는 배가 된다. 단체의 모든 것은 민주적으로 결정되며 오더를 내리는 사람도, 거기에 따라야 할 사람도 없다. 모두를 위한 작업 공간은 충분하고 작품을 당장 생산해내야 하는 것이 아니므로 가해지는 압박 또한 사라진다. 거기에 더해 작업을 하는 동안 경제적인 지원도 받을 수 있다. 예술가에게 이보다 더 나은 작업 환경이 있을까.
하지만 트레펜 토탈에는 ‘선택과 집중’이 결여되어 보인다. 다수의 트레펜 토탈 참가자들은 민주적 결정을 내리기 위해 소요되는 시간이 너무 많고, 동시에 셀 수 없이 많은 아이디어들이 떠돌기 때문에 가끔씩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고 다양한 의견을 수용하는 열린 자세도 중요하지만, 한정된 시간 안에서 너무 많은 곳에 도달하려고 하면 그 깊이가 얕아진다는 것, 혹은 그 어디도 도달하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또한 이 모든 것의 목적이 독립 혹은 공동 작업에서 나타나는 방법론을 발전시키는 데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트레펜 토탈의 경우에 관객들은 이런 환경이 그들의 작업 과정에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또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한 관심을 자연스레 갖게 된다. 왜 혼자서는 안 되는 것인지, 셋이라면, 24명이라면 어떤 변화와 발전의 가능성이 발생되는지 그리고 왜 그것이 중요한지가 궁금한 것이다.
만일 트레펜 토탈이 지금처럼 이미 우리가 그 동안 수없이 보고 경험해온 협업의 형태를 답습하며 단편적이고 평면적인 작업물들만을 보여 준다면 트레펜 토탈은 그 존재의 이유를 곧 잃게 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