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broad
무용을 소재로 한 영화라고 하면 어떤 작품들이 있을까? 무용과는 거리가 좀 있는 듯한 탄광촌이라는 환경에서 천부적 재능을 발견하고 이후 편견을 뛰어넘어 예술가로 성장하는 이야기의 <빌리 엘리어트>, 발레리나와 비보이의 사랑을 그린 <센터 스테이지>, 발레리나의 열정과 집착을 그린 <블랙 스완>, 시대의 무용가 바리시니코프가 출연한 <백야>까지.
이들 영화들은 모두 개봉 당시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작품들이므로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표적인 무용 소재 영화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주된 소재가 발레라는 점, 춤 자체보다는 ‘무용수’를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의 인생을 영화로 풀어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무용 영화 장르의 프레임을 상업영화가 아닌 ‘예술영화’, 발레가 아닌 ‘현대 무용 영화’로 좁혀보면 어떨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마 2011년 개봉된 빔 벤더스 감독의 <피나>가 아닐까 싶다. 감독은 희대의 안무가였던 피나 바우쉬의 공연 실황을 단순하게 기록하는 개념이 아니라, 공연 속의 부분들을 발췌한 후 무대가 아닌 또 다른 상징적인 장소에서 담아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안무가 피나 바우쉬가 일생 동안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들을 간결하면서 아름다운 영상미로 전달할 수 있었고, <피나>는 여전히 사랑 받는 무용 영화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피나> 이후 쉽사리 떠오르는 현대무용 영화가 없었던 것이 사실인데, 이런 목마름을 해소하기라도 하려는 듯 지난 5월 9일 새로운 영화 <미스터 가가 (Mr.GAGA)>가 선을 보였다. 필자는 들뜬 마음으로 감독 토머 헤이만과 관객과의 대화가 예정되어 있던 5월 11일 함부르크의 아반톤 극장을 찾았다.
바체바무용단과 오하드 나하린
<미스터 가가>는 이스라엘 바체바 무용단의 안무가 오하드 나하린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이다. 안무가로서 그의 명성은 이미 이스라엘을 넘어 유럽은 물론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2002년 첫 내한 공연 <데카당스>를 시작으로 유니버설발레단과의 협업을 진행하였고, 그 이후에도 몇몇 작품으로 내한한 바 있어 이미 한국 관객에게도 인기 있는 안무가이다.
특히 유럽에서는 그가 개발한 움직임 언어, 즉 ‘가가’ 테크닉의 인기가 사그라들 줄 모른 채 계속되고 있다. 벌써 몇 년째, 많은 무용수들은 오하드 나하린이 개발한 ‘가가’를 배우기 위해 이스라엘로 날아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있고, 무용 스튜디오 중 ‘가가’ 테크닉을 배울 수 있는 곳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무용수들은 물론 일반인들까지 열광하게 하는 ‘가가 테크닉’은 과연 무엇일까. 앞서 말한 것처럼 가가는 오하드 나하린에 의해 개발, 발전된 움직임 언어로, 몸의 감각과 자각을 일깨움과 동시에 몸에 대해 탐구하며, 움직임의 즐거움도 경험하게 하는 테크닉이라고 할 수 있다. 몸의 감각들을 깨우고 익숙한 형태를 벗어나 무한한 움직임의 가능성을 찾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무용수들을 위하여 개발된 테크닉이 아니라 일반인 또한 쉽게 참여할 수 있는 테크닉으로, ‘모든 사람이 춤을 추어야 한다’ 는 오하드 나하린의 모토와 직결된다.
<미스터 가가>의 시작
영화 감독 토머 헤이만(Tomer Heymann)과 그의 형제 바락 헤이만(Barak Heymann)이 이끄는 영화사 헤이만 브라더스(Heymann Brothers)가 바로 영화 <미스터 가가>를 만들어 낸 주인공들이다. 형인 토머 헤이만은 이스라엘에서 오하드 나하린의 <마이너스 16 (Minus 16)>을 보고 충격적인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지루하고 부유한 사람들의 전유물이라고 느끼던 무용 공연에서 받은 감동으로 그는 이후 매일매일 공연장을 찾아 똑같은 작품을 되풀이해 보아야만 했다고 회상한 바 있다.
토머 헤이만은 이를 계기로 오하드 나하린의 스튜디오는 물론 공연장과 집까지 찾아가기에 이르렀고,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그의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러나 오하드 나하린은 한 번 춤추고 나면 사라져버리는 춤의 특성을 떠나 영원히 기록으로 남게 되는 ‘영화’라는 형식으로는 만들고 싶지 않아 반대를 했다. 길고 긴 설득 끝에 그들은 영화 작업을 시작하는 데 합의하였고, 토머 헤이만은 8년간 오하드 나하린을 따라 이스라엘은 물론 뉴욕, 도쿄 등 그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함께하며 그의 모습을 담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토머 헤이만은 나하린에게 자신이 촬영한 일부분을 보여주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나하린의 뮤즈였던 전부인의 모습과 목소리가 담겨있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그녀의 목소리를 듣게 된 오하드 나하린은 “당신이 찍은 필름 덕분에 그녀가 다시 살아난 것 같다. 그녀의 육신은 여기에 남아있지 않지만 아직 저 필름 안에는 그녀가 살아있다”라며 기뻐했고, 토머 헤이만에게 자신의 유년기가 담긴 다량의 비디오를 넘겨주며 영화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고 한다.
영화 <미스터 가가>는 예술가 오하드 나하린의 세계가 아닌 인간 오하드 나하린의 일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영화는 오하드 나하린이 어떻게 춤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왜 미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하였는지, 더불어 뉴욕에서 유명 무용단에 발탁된 이야기 혹은 그의 춤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뮤즈를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등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오하드 나하린의 부모님 역시 짤막한 인터뷰를 통해 그가 어렸을 적 어떤 아이였는지에 대하여 설명하고, 그의 옛 무용수들은 그와 그의 뮤즈였던 연인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이스라엘의 작은 마을 키부츠에서 태어났을 때부터 춤추기를 즐기던 소년의 모습과 전쟁 통에 군인들을 위한 무용단에서 활동하던 모습. 그렇게 춤을 즐기던 젊은이가 뒤늦은 나이에 무용수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자신만의 안무작을 선보이는 모습 등이 펼쳐진다. 또한 단순한 공연 영상 외에 집에서 홀로 연습하는 모습이 담긴 어설프면서도 오래된, 시간의 무게가 느껴지는 영상들이 영화의 초반을 채워나간다.
전체 구조로 보면 다큐멘터리 영화로, 오하드 나하린의 삶을 연대기로 펼치면서 중간 중간 지인들의 인터뷰가 삽입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물론 예술가로서 오하드 나하린의 모습들도 속속들이 들어있다. 그의 집요함이 표출되는 리허설 장면들은 꽤나 인상적으로 그려진다. 무용수들에게 단호하게 ‘NO’ 를 외치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끊임없이 설명하고 요구하는 모습들, 그것을 군말 없이 다시, 또 다시 시도하는 무용수들의 모습들, 무용수들의 감정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모습들은 잔인하게까지 느껴지지만 긴장감 넘치던 리허설 장면이 하나의 완성된 작품과 포개어질 때는 은근한 성취감까지 전해진다.
더불어 오하드 나하린의 다양한 작품들을 아름다운 영상미로 전하는 장면들이야말로 이 영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호라(Hora)〉 〈3(Three)〉 〈마무토트(Mamootot)〉 〈하우스(House)〉 〈더 홀 (The Hole)〉 등 그의 다양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공간 전체를 한 눈에 담게 되는 무용 공연의 특성과 원하는 부분을 선택적으로 담을 수 있는 영화의 특성을 십분 이용한 장면들이 주목할 만 하다.
영화 초반에는 오직 작품의 한 구석 –예를 들면 바닥부터 바닥과 천장 사이의 중간까지-만을 프레임에 담아 독특한 효과를 만들어 내고, 영화 후반에 가서는 무대 전체의 그림을 보여줌으로써, 놀라우면서도 궁금증을 자아냈던 장면들에 대한 비밀과 갈증을 해소시켜주는 식이다.
그 중에서도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여겨지는 <마이너스 16> 스페셜 버전의 공연 장면은 그 스케일만으로도 압도되기 충분하다. 수트를 입은 무용수들이 반원 형태로 놓여진 의자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주술처럼 낮은 목소리로 반복되는 음악에 맞추어 몸을 던지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차례차례 일어나고, 도미노 같은 구성이 반복되면서 동작은 하나하나 더해지고 그때마다 무용수들은 옷을 한 겹씩 벗어 던진다. 심플한 구성에 역동성을 더하여 하나의 오차도 없이 맞아 떨어지는 군무의 강렬함이 인상적이다.
오리지널 작품에서는 16명의 무용수들이 출연하는 작품이지만, 영화에서는 100여명 이상의 무용수들이 함께 춤추는 스페셜 버전의 모습을 짧게나마 만날 수 있다. 이스라엘의 국가행사를 위해 만들어진 ‘마이너스 16’의 스페셜 버전은 공연 하루 전, 의상의 노출이 심하다는 이유로 의상 변경을 요구받았다. 하지만 오하드와 무용수들은 의상을 바꾸느니 무대에 서지 않겠다고 맞서 공연이 무산되었고, 이 사건을 통해 오하드 나하린은 이스라엘의 문화 영웅이 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의 한계
영화 <미스터 가가>의 장르를 구분하자면 무용 영화라기보다는 오하드 나하린이라는 인물에 포커스를 맞춘 다큐멘터리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초반부터 끝까지 그가 이미 유년기부터 눈에 띄는 재능을 지녔던 무용수임을 강조하고 있고, 그가 안무가로서 이제까지 이루어 낸 성과와 업적들을 재조명하며 그의 명성을 드높이는 데에 집중하였다.
그 결과 영화가 끝으로 치달을수록 이 천재 안무가의 이야기는 굴곡진 개인사와 더불어 더욱 드라마틱해진다. 이를테면 마침내 새로운 사랑을 만나 한 여인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빠가 된 예술가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은 의도와는 다르게 너무나 전형적인 클리셰 때문인지 불편함이 느껴지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 ‘누구나 춤을 추는 기쁨을 느껴야 하고, 누구나 춤을 출 수 있다’라는 오하드 나하린의 모토와는 거리가 느껴지는 ‘타고난 예술가’의 인생극장이라는 인상을 남기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물론 그의 천재성이나 작품성에는 두말할 여지가 없으며, 헤이만 브라더스는 나하린의 작품을 강렬한 색채와 영상미로 아름답게 풀어냈다고 평할 수 있다. 다만 어떤 관객에게는 예술가와 무용수들의 자연스러운 모습들이나 리허설 과정이 인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겠지만 오하드 나하린이 펼쳐내고 있는 에너제틱한 예술 세계를 더 깊이있게 들여다보길 기대했던 관객들에게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