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broad
얼마 전 처음으로 아비뇽의 겨울 모습을 보고 왔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얼마나 매섭던지, 주변에 간판이 날리거나 하는 모습은 아비뇽 겨울의 일상인 듯 보였다. 사람들로 붐비는 아비뇽 여름 축제의 모습과는 달리 조용하고 차분한 모습이었다.
이번에 아비뇽을 다녀온 이유는 아비뇽 겨울무용축제 ‘레 지베르날(Les Hivernales)’을 참관하기 위해서였다. ‘레 지베르날’ 축제는 올해로 38주년을 맞이했다.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무용축제로 매년 2월(겨울축제)과 7월(여름축제)에 열린다. 1979년 아멜리 그랑(Amelie Grand)에 의해 설립되었고, 2009년부터 엠마뉴엘 세라피니(Emmanuel Serafini)가 예술감독을 맡아왔다.
엠마뉴엘 세라피니는 2012년(34회) 아시아 특집을 통해 3명의 한국 안무가를 초청한 적이 있다. 남정호(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창작과 교수)의 <빠 드 까트르(Pas de Quatre)>, 이현범 & 최진주의 <쉼의 철학>, 그리고 김희중 & 이수윤의 <밥짓는 냄새>다. 그 후에도 엠마뉴엘은 몇 차례 서울국제안무 페스티벌(SCF)의 국외 심사위원으로 참가하는 등 한국에 대한 관심을 보여 왔다.
그러나 아쉽게도 2016년 2월 겨울축제 프로그램이 엠마뉴엘이 ‘레 지베르날’과 함께하는 마지막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는 2015년 말 CDC 운영위원회와의 충돌로 인해 이미 예술감독 자리에서 물러난 상태다. 심지어 위원회에서는 이번에 열린 2월 축제에 엠마뉴엘 감독이 공연을 보기 위해 극장에 출입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엠마뉴엘은 자신의 돈과 명예를 위해 법정까지 갈 예정이라고 한다. 그 싸움이 얼마나 걸릴지 어떤 결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엠마뉴엘이 ‘레 지베르날’을 떠나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레 지베르날’은 지금 새로운 예술감독을 찾고 있다. 지금 상황으로는 2016년 여름 시즌은 물론 어쩌면 2017년 (2월)겨울 시즌까지 예술감독의 부재 상태가 계속될 수도 있는 등 축제의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상태다.
이번 겨울축제는 2월13-20일 사이에 열렸다. 올해 주제인 ”라 흘레브(La relève) : 계승하다”라는 의미처럼 약 20개 단체 가운데 유명 안무가 3-4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젊은 안무가들의 작품으로 구성됐다. 유명 안무가로는 죠셋 바이즈(Josette Baïz), 마리 슈이나르(Marie Chouinard), 갈로타 이케다(Carlotta Ikeda)가 있었다.
죠셋 바이즈, 마리 슈이나르, 루시 오제 & 다비드 제흐네의 작품들
죠셋 바이즈(Josette Baïz)의 2015년 발표작 <유령(Spectres)>은 하얀 의상을 입은 7명의 무용수, 11개의 하얀 의자 그리고 뮤지션 4명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공연 길이는 1시간이다. 공동작업으로 함께한 꾸와뜌어 벨라(Quatuor Bela)는 프랑스에서 유명한 클래식 연주단이다. 현악기의 떨리는 선율과 움직임의 조화가 아름다운 작품이다.
마리 슈이나르(Marie Chouinard)의 작품은 아비뇽 그랑 오페라(Opéra du Grand Avignon) 극장에서 2개의 작품으로 올려졌다. <짐노페디(Gymnopedies)>는 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Erik Satie)가 작곡한 음악이다. 공연이 진행되는 40분간 무용수들이 번갈아가며 짐노페디 1번을 피아노로 연주한다. 무용수들이 광대처럼 빨간 코를 하고 나오거나 음악이 주는 느낌 때문에 작품 이미지가 순수한 듯 느껴지지만, 작품 후반으로 갈수록 성적인 코드로 표현한 장면들이 많다.
마리 슈이나르의 또다른 작품 <앙리 미쇼(Henri Michaux) : 무브먼트(Movements)>에서는 하얀 스크린 위에 굵은 붓으로 거칠게 그려진 듯한 그림 또는 문자 같기도 (또는 사람이나 동물 같기도) 한 형태가 보이면, 무용수가 뛰어나와 그 모양을 최대한 몸으로 똑같이 표현한다. 무용수 한 명이 여러 가지 형태를 만들고 들어가면, 바통 터치라도 하듯 다음 무용수가 뛰어나와 그다음 형태를 곧바로 이어나간다.
무용수들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몸에 밀착된 검은색 의상을 입고 있다. 조명에 따라 하얀 스크린 앞의 무용수들의 모습이 붓으로 그려진 또 하나의 형태처럼 보인다.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넘어가는 움직임의 속도감이 신속하고 정확하다. 때로는 같은 동작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동물처럼 춤을 추기도 한다. 무용수가 어떤 희한한 동작을 한 채로 입을 크게 벌리면 늑대가 우는 듯한 동물 효과음이 나는데, 기묘한 느낌이다. 공연 전 귀마개를 나눠줄 만큼 음악이 주는 긴장감과 볼륨감이 상당하다. 그러나 실제로 귀를 막아야 할 정도는 아니다. 마리 슈이나르의 작품이 주는 색깔이 굉장히 뚜렷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호불호가 많이 갈릴 것 같다는 느낌 또한 받았다. 개인적으로 정말 인상적이었던 건 무용수들의 신체조건과 기량이었다.
루시 오제(Lucie Augeai)는 정치, 과학, 법 공부를 하다가 춤을, 다비드 제흐네(David Gernez)는 컴퓨터 관련 공부를 하다가 춤을 선택한 안무가다. 루시와 다비드는 2010년부터 ‘아데꾸아트(Cie Adéquate)’라는 단체를 만들어 함께 활동 중이다.
작품 제목 <일(Job)>은 무용에 대한 일을 말한다. “무용수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대한 질문을 갖고 풀어나간 작업이다. 이 작업은 무용수이면서 작가인 피에르 엠마뉴엘 소리니예(Pierre-Emmanuel Sorignet)와 협업을 가졌다. 피에르 엠마뉴엘은 약 10년간 수많은 무용수들을 만나면서 무용수들의 삶에 관한 인터뷰를 가진 후, 그 내용을 2010년 「danser」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이번 작품 <일(Job)>은, 무용수들 7명이 입으로 다양한 소리를 내면서 멜로디가 되고 어느새 노래처럼 들리면서 시작된다. 무용수들은 입고 있는 옷을 한 겹씩 한 겹씩 벗으며 춤을 추는데, 도대체 몇 겹이나 입은 건지 벗어도 벗어도 계속 새로운 옷이 나온다. 어느새 무대 위에는 옷이 쌓이고, 무용수들은 원을 그리며 달린다. 가장 앞에서 뛰는 사람을 향해 뒤에 있는 사람들이 쌓인 옷을 마구 던진다. 달려가는 무용수들과 계속해서 던져지는 옷들이 어떤 아름다운 형태를 만들어나간다. 옷을 벗고, 쌓고, 던지고 등 옷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많은 표현을 찾아낸 것이 흥미로웠다. 이 작품에 있어서 옷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로 무용수들의 옷에 관한 이야기다. 한번, 공연이 있는 무용수의 하루를 생각해 보자.
“일상복 골라 입고, 연습복 골라 가방에 담고, 일상복에서 연습복 갈아입고, 의상 갈아입고, 다시 일상복, 그리고 집에 와서 편한 옷으로” 산더미처럼 쌓인 옷이 다소 과장된 표현이긴 하나, 사실 공연이 있는 날을 떠올려 보니 과장도 아닌 듯하다. 작품 안에는 무용수들이 서로 마사지를 해주는 모습 등 무용수의 여러 일상이 재치 있게 담겨 있으며, 무용수에 관한 작품인 만큼 춤도 많다. 기분 좋은 에너지가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작품이다.
프랑스 무용평론가 필립 베리엘(Philippe Verrièle)은 “에너지, 그리고 지적인 즐거움”이라 평했다. 루시와 다비드는 아직 프랑스에서 잘 알려진 단체는 아니지만,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되는 젊은 단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