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broad
파리에는 중요한 무용센터 두 곳이 있다. ‘국립무용센터’(CND, Centre National de Danse)와 ‘메나제리 드 베흐’(Ménagerie de Verre)가 바로 그곳이다.
쎄엔대(CND)라 불리는 국립무용센터는 한국의 무용가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만, <메나제리 드 베흐>는 이름조차 생소하지 않을까 싶다. 평소 좋아하는 센터이기도 하고, 얼마 전에는 무용 축제도 개최되었다.
메나제리 드 베흐는 파리 11구에 위치하고 있다. 11구는 관광객이 많지 않고 레스토랑, 카페, 바 등 흥미로운 공간이 많아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 좋은 동네다. 그러나 최근 11구를 “테러가 일어난 곳”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샤를리 앱도, 바타 클랑 극장 테러 모두 11구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바타 클랑 극장에서 메나제리 드 베흐까지는 걸어서 5분쯤 거리로 아주 가깝다. 지하철로는 빠멍티에(Parmentier)역에 내려 역시 약 5분 정도 걸으면 쉽게 찾을 수 있다.
메나제리 드 베흐가 문을 연 것은 1983년이었다. 지금의 건물은 그 당시 프린팅 공장이었고, 주변은 별 볼 것 없는 가난한 동네였다. 예술감독 마리 테레스 알리에(Marie-Thérèse Allier)는 이 공간을 발견하고는 무용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고자 결심했다. 예술가들은 이곳에서 레지던시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연구할 수 있고, 2층 스튜디오에서는 전문 무용수들을 위한 워크숍이 자주 열린다. 이곳은 “실험적인 공장”, “융복합 공간” 등 붙는 수식어도 다양하다. 안무가는 물론 퍼포머, 비디오 아티스트, 비주얼 아티스트 등 많은 예술가에게 중요한 공간이다.
제롬 벨(Jérôme Bel)의 초기 작품들이 이곳에서 만들어졌고, 알랑 뷔파(Alain Buffard), 헤이몬드 호게(Raimund Hoghe), 보리스 샤마츠(Boris Charmatz), 클라우디아 트리오찌(Claudia Triozzi) 등 많은 안무가들의 작품이 이곳에서 만들어지고 공연됐다.
메나제리 드 베흐에 공연을 보러 가면, 객석 가장 오른편에 따로 의자를 놓고 공연을 보는 마리 테레스 감독을 쉽게 볼 수 있다. 올해 여든 한 살로, 빨간 머리에 항상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그녀의 존재감은 상당하다. 메나제리 드 베흐에 가면 마리 테레스 예술감독의 독특한 캐릭터를 귀여운 인형으로 제작해 메나제리 드 베흐에서 제작한 책 표지, 포스터, 공연 프로그램, 에코 가방 등 다양하게 활용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참으로 흥미롭다.
이곳에는 공연 가능한 스튜디오(극장), 2개의 큰 스튜디오 (Wigman studio, studio Balanchine)와 3개의 작은 리허설 스튜디오, 그리고 로비에 카페테리아가 있다. 메나제리 드 베흐에는 매년 2개의 축제가 열린다. 바로 “페스티벌 레지나꾸뜨메(Festival Les Inaccoutumés, 1995년)”와 “에뜨랑쥐 카르고 (Etrange Cargo, 1997년)” 다.
“페스티벌 레지나꾸뜨메”는 매 가을마다 열리는 축제로 올해는 11월 17일 부터 12월 12일까지 열렸다. 초대된 안무가로는 Massimo Furlan & Christophe Fiat, Ola Maciejewska, Raimund Hoghe, Gaëlle Bourges, Volmir Cordeiro, Madeleine Fournier & Jonas, Chéreau, Kaori Ito가 있다.
이중 세 개의 작품을 골라 소개한다.
● 볼미르 코데로(Volmir Cordeiro)의 <거리(Rue)>
볼미르 코데르는 브라질 출신의 젊은 안무가다. 연극을 하다가 무용을 시작한 그는 브라질에서 안무가 리아 로드리게스(Lia Rodrigues)와 함께 작업했으며, 지금은 자신의 작품으로 활동 중에 있다.
2012년에 첫 작품을 발표한 뒤, 2014년에 두 번째 작품(메나제리 드 베흐 지원) 그리고 2015년 세 번째 작품을 발표했다. 보미르 코데르는 패션모델이 연상될 만큼의 큰 키와 멋진 몸, 심플하지만 감각적인 의상과 메이크업이 눈에 띄었다.
이번 작품 <거리(Rue)>는 솔로 작품으로 거리에서 일어나는 여러 상황들을 대사와 춤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자신의 목소리와 몸만으로 무대를 가득 채우는 힘이 있는 예술가다. 볼미르 코데로는 현재 파리에서 주목하고 있는 젊은 안무가 중 한 명이다.
● 헤이몬드 호게(Raimund Hoghe)의 <타카시를 위한 노래(Songs for Takashi)>
헤이모드 호게는 이미 여러 차례 메나제리 드 베흐의 무대에 선 안무가다. 이번에 초대된 작품은 <주디와의 오후 (An Evening with Judy)>와 <타카시를 위한 노래 (Songs for Takashi)> 2개였다. 두 작품 모두 헤이몬드 호게(Raimund Hoghe)와 타카시 우에노(Takashi Ueno)가 함께한 듀엣 작품이다.
<주디와의 오후 (An Evening with Judy)>는 유명 가수 주디 갈랜드(Judy Garland)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이며, <타카시를 위한 노래 (Songs for Takashi)>작품은 오랫동안 함께 작업해온 일본 무용수 타카시 우에노에게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타카시를 위한 노래>는 제목만큼이나 타카시에게 시선이 가는 장면이 많다. 타카시는 주로 춤을 추고, 헤이몬드는 걷거나 소품을 이용한 행위, 재치 있는 포즈를 취한다. 오래된 옛 노래들이 많이 나오는데, 음악마다 한 가지 움직임 컨셉트를 정하고 그 느낌으로 한 곡을 채워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가사 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 타카시의 몸이 새처럼 가볍고 부드럽다. 두 남자의 섬세한 감성이 아름다운 작품이다. 헤이몬드의 작품은 작품 중간 중간에 의문이 드는 장면이 있었더라도, 공연이 끝나고 박수를 칠 때면 의문은 사라지고 묘하게도 아름다운 잔상만이 남는다. 아, 이런 힘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걸까?
● 가오리 이토(Kaori Ito)의 <나는 말을 믿지 않기 때문에 춤을 춘다 (JE DANSE PARCE QUE JE ME MÉFIE DES MOTS)>
가오리 이토는 일본에서 태어나 지금 프랑스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무용수다. 필립 드쿠플레, 앙쥴랭 프렐죠카쥬, 시디 라르비 세르카위 등 유명 안무가들과의 풍부한 작품 경험을 갖고 있으며, 2008년부터는 매년 자신의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이번 신작은 가오리 이토의 아버지가 직접 설치미술을 맡고 직접 출연도 하셨다. 이 작품은 아버지와 가오리 이토(딸)와의 관계, 일본과 프랑스의 관계에 관한 작품이다. 가오리 이토는 미리 녹음된 음성과 라이브 음성을 통해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왜 매일 밥을 먹어야 하지? 왜 나는 쇼핑을 좋아하지?” 등 “pourquoi(왜), pourquoi(왜), pourquoi(왜)?” 아주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질문들이다.
작품은 질문을 나열하기 위함인지, 대답을 찾기 위한 과정인지 알 수 없다. 너무 많은 질문 속에 정작 중요한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모를 만큼, 길을 잃은 듯한 느낌도 든다. 가오리 이토의 아버지 히로시 이토(Hiroshi Ito)는 일본에서 유명한 설치 미술가이다. 이번 작품에 출연한 히로시 이토는 딸과 함께 율동도 하고, 즉흥춤도 추고 노래도 부른다. 숨이 차오르지만 땀을 닦아내고 다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딸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작품에 대한 좋고 나쁨을 떠나 아버지와 한 작품을 만들고 무대 위에서 추억을 만들어나가는 그 자체가 소중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