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broad
“축제를 위해 그럴싸한 건물부터 짓겠다고 덤빌 필요는 없습니다. 모두가 나눌 수 있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오래 전 아비뇽 뒷골목의 어느 낡은 교회에 들어갔다. 바닥에 늘어놓은 조명기 4대. 언뜻 저 낡은 천정에 뭘 매달기도 녹록치 않겠다 싶었는데, 칙칙한 벽과 대조적으로 매우 상큼한 춤을 만났다. 테로 사리넨은 쀼하야르비 실내 체육관에서 <페트루슈카>를 초연했다. 올드 아바나 거리를 요란한 북과 피리소리에 맞춰 행진하는 삐에로를 따라가면 분수대와 광장에서 다양한 세계 춤을 만날 수 있다.
66개 장소에서 열흘간 편쳐진 360개 공연
무대에서 광기 어렸던 로댕이 파스텔 톤 노란 바지에 체크무늬 셔츠를 걸치고 불뚝한 배만큼이나 큰 소리로 요란스레 너스레를 떠는 아저씨가 되어 옆자리에 앉는다. 시비우 국제연극제(Sibiu International Theatre Festival)의 콘스탄틴 키리악(Constantin Chiriac, 56세). 배우와 극장장에 교수도 모자라 문화원 이사를 겸하고 “세계 3위” 축제를 창설해 장기 집권하는 예술감독이다. 몰도바 공화국 출신인 키리악은 부크레슈티 소재 예술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한 후 스크린과 무대를 넘나들며 시비우 라두 스탕카 극단에서 배우로 활동했다. 차우세스쿠 이후 전국의 공연예술이 고사위기에 처했지만 라두 스탕카 만은 연극을 놓지 않았고 젊던 그는 꿈을 키우고 있었다. “유럽 문화수도가 되어 과거의 영광을 되찾자.” 그래서 시작한 것이 연극축제. 영국, 미국과 루마니아 문화예술계 지인을 총 동원해 2년을 준비하며 집은 저당 잡혔고 주머니 속 먼지까지 탈탈 털어냈다. 그리고 1993년 루마니아와 몰도바공화국만 참가해 시작한 축제 첫해, 트란실바니아의 주도였으니 오죽했으랴. 손님들은 호주머니에 마늘을 넣고 다녔다.
하지만 루마니아 연극의 내공은 손님들을 감동시켰고 국제무대가 라두 스탕카 극단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2회째에는 8개국 공연단과 25개국 프리젠터들이 시비우를 찾았고 2007년 드디어 시비우는 유럽 문화수도가 되었다. 그리고 70개국 2,500명이 축제를 방문하기에 이르렀다.
다이어로그(Dialog)를 주제로 내세웠던 2013년, “에든버러와 아비뇽에 이어 세계 3위”라 주장하는 키리악이 무엇을 근거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냉큼 초대에 응했는데…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 시비우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시 예산의 20%는 문화에 배정됩니다.” 축제 기간 도시 인구의 60%는 타지인이고 30km이상 가야 허름한 호텔 하나 간신히 찾을 수 있던 도시, 한 두 시간이면 명소 대부분을 눈으로 훑을 수 있을 만큼 자그마한 이 도시에 지금은 힐튼, 라마다, 이비스와 같은 글로벌 체인을 비롯해 단기임대용 빌라, 축제 초기에 생겼던 낡은 지역호텔들과 여행사가 즐비하다. 이쯤 되면 조금 시끄러워도 그의 자랑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아니 오히려 그의 추진력과 열정에 박수가 절로 나온다.
사람이 자산이다
1700년대에 세워진 성당에 가스펠이 울려 퍼진다. 충만한 복음으로 찬양하는 그들이 들어 줄만하게 노래하는 가수들은 아니다. 그러나 신앙심으로 간절하게 두 손 모으고 앉은 아주머니는 눈시울을 붉힌다. 아트센터 극장은 수퍼맨이 등장해 좌충우돌하는 슬랩스틱에 기립박수 치며 열광하는 시민들로 후끈 달아오른다. 광장에 이르는 거리에서는 스코틀랜드 아저씨들의 백파이프 연주에 맞춰 집시여인이 춤을 춘다. 골목 어디에서도 일본과 한국에서 온 친구들을 포함해 200명이라는 자원봉사자를 비껴갈 수 없다.
“감동, 재미… 그 무엇으로건 관객과 소통할 수 없는 공연예술은 무대에 오를 이유가 없다”고 주장해왔지만 특정취향에 길들어 공연을 재단하고 있던 내게 노엘 윗츠(Noel Witts) 교수가 한마디 한다. “이 나라에 피나 바우슈가 온 적이 없다. 하지만 봐라. 충분히 행복해 하는 저 사람들을...” 그는 몽포드 대학에 재직할 때부터 축제 창설에 힘을 보탰고 은퇴 후 예술경영 컨설턴트로 활동하는 지금까지 축제의 각종 토론을 진행하며 축제역사를 증언한다. “20년 전 키리악은 영어도 잘 못하는 젊은이였다.”
역시나 ‘돈’이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라 예상하며 “축제 창설자이며 예술감독인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당신 옆에 앉아있는 라비니아(Lavinia Alexe, 실무 총 책임자)와 사무실 밖의 스태프들 그리고 거리에서 마주치는 자원봉사자들, 내게 자산은 ‘사람’이다.”
백작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루마니아어, 불어 그리고 일어연극을 보며 졸고 앉았다가 영어 대사를 들으니 마치 모국어를 만난 것과도 같은 반가움에 배우들이 이끄는 대로 속절없이 빠져든다. 느닷없이 쏟아지는 소나기가 한낮 더위를 한풀 꺾어놓으면 차로 2~30분 정도 이동해 절벽을 타고 한참 올라 오래된 망루에 이른다. 겉만 봐서는 LED와 조명에 음향까지 뭐하나 부족할 것 없는 극장으로 탈바꿈 했으리라 짐작하기 어렵다.
이렇게 열흘, 아침부터 밤까지 극장과 거리는 공연으로 북적대고 축제클럽에서는 매일 밤 파티가 열린다. 예술가와의 대화는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진행하고 각종 세미나와 교육프로그램 그리고 프리마켓(SPAOM, Sibiu Performing Arts Open Market)이 종일 사람들을 불러모은다. 가장무도회 의상을 골라야 한다며 흥분해 잡아 끄는 스태프도, 소금호수 수영을 제안 받고 따라가는 게스트들을 위해 도시락을 나눠주는 진행요원도 모두 “내가 즐거운 축제”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섬세한 배려에는 빈틈도 참 많다. 드라큘라가 태어난 마을에 데려가 주겠다던 것은 그저 말일 뿐이다. 팁을 주건 말건 방 청소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반면 9시 30분이 넘으면 데스크 직원이 사라진 호텔 식당에 아무나 들락거릴 수 있으니 허술함을 애교라 불러야 할까?
자정을 막 넘겨 부크레슈티 공항에 도착했다. 사방에 전화를 해대며 메일에 문자까지 보내고 기사를 만난 것은 새벽 3시. 우여곡절을 도로에 남기며 버스가 호텔에 도착한 것이 아침 9시 20분. 이정도 시간이면 남미 어느 나라에라도 닿을 수 있었을 터. 그런데 한 술 더 떠 예술경영지원센터 팀은 출발 전 골백번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방이 없어 불과 닷새 사이 호텔을 3번이나 옮겨야 했다.
그리고 귀국 길, 간신히 비행기에 몸을 싣고 나니 탐승 마감 2분 전, 결국 유종의 미를 거둔 셈이다. 덕분에 피가 말랐으니 어쩌면 백작이 시키지 않았을까?
3~4백년 전 세워진 건물에서는 오늘도 아기가 첫 울음을 터뜨린다
1989년 20세기 최악의 독재자였던 차우세스크는 자신이 키워낸 어린 병사들의 손에 숙청되었다. 그의 그림자가 낙인처럼 남아서였을까? 그리 밝지 않은 어른들의 표정, 사회적 약자 보호차원에서 일을 분배 받은 것이 아닐까 싶게 만드는 운전기사들의 어눌함이 루마니아의 첫인상이었다. 그리고 광장을 걷다가 “한국인이냐” 물으며 반가워하는 소녀를 만났다. 드라마를 너무 좋아해 인터넷으로 한국어를 공부한다며 해맑게 웃는 소녀는 “차우세스크가 누구냐”고 반문한다.
라두 상카라 극단의 <파우스트>가 축제를 열었고 또 닫았다. 낡은 섬유공장을 개조해 만든 극장. 두메산골에나 있을법한 재래식 화장실을 보면 딱히 작정하고 극장으로 개조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하나씩 둘씩 속살을 벗겨내며 인간의 나약하고 처참한 모습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악의 극단으로 몰아 혼을 속 빼놓는 루마니아 버전 <파우스트>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과거체재와 미래비전의 절묘한 조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출연자 120명을 동원했고 어마어마한 물량을 투자해 서커스와 연극, 신체극을 제대로 버무려 놓았다. 이들의 저력에 경외감을 느낀 사람에게 시비우 국제연극제는 분명 언젠가 다시 찾고 싶은 매력적인 축제임이 분명하다.
김신아
서울세계무용축제, 다수의 국제교류 프로젝트 및 공동제작, 디지털 댄스 페스티벌, 공연저널리즘 서울포럼을 비롯해 아프리카•아랍문화축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2011년까지 서울세계무용축제 사무국장으로 재직했으며 현재 프리랜서 아트 프로듀서로 무용 및 음악 파견 프로젝트를 기획 및 운영하며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등에서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