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broad

추운 나라의 뜨거운 춤들
폴란드 댄스 플랫폼(Polish Dance Platform)과 아이스 핫(ICE HOT)
이종호_춤비평

 2012년 12월 포즈난에서 열린 제3회 폴란드 댄스 플랫폼(Polish Dance Platform, 6-9일)과 헬싱키에서 개최된 제2회 아이스 핫(ICE HOT, 12-15일)에 연이어 다녀오면서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하필이면 이렇게 춥고 불편한 계절에 행사를 열까 하는 것이었다. 2년 전 스톡홀름의 제1회 아이스 핫 때에도 폭설로 인해 암스테르담에서 30여 시간을 고생스레 보낸 뒤 스톡홀름 공항엔 새벽 2시에나 도착했었는데, 이번에도 눈 때문에 인천공항 비행기 안에서 여섯 시간을 앉아서 기다린 끝에 또다시 자정 넘어 암스테르담에 도착, 예정보다 하루 늦게 바르샤바를 거쳐 포즈난에 닿을 수 있었다. 그뿐인가. 숙소와 행사장 사이를 오갈 때마다 미끄러운 눈길에 신경 써야 하고 흩날리는 눈발에는 시야가 위축된다. 두꺼운 겨울 옷가지들로 여행가방도 금세 차 버린다.
 나의 이 불평어린 궁금증에 대해 일부 주최자 및 참관자들이 부분적인 대답과 추측을 내놓았다. 아이스 핫 주최자들에게 그 상쾌한 북유럽의 여름철을 놔두고 하필...했더니 워낙 춥고 어둡고 우울한 곳이다보니 여름엔 다들 놀러다니기 바빠 행사장에 사람이 오지 않는다, 따라서 갈 곳 없는 겨울철이라야 공연장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으기가 편하다는 대답이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국인들을 염두에 둔 발상이었다. 한편 나와 같은 입장인 외국인들은 아마도 ‘비수기 마케팅’ 아니겠는가고 했다. 상호간에 과히 멀지 않은 유럽인들끼리는 별 문제 아니겠지만 내게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세련미 대신 정열- 폴란드의 춤들

 어쨌거나 멀리서 초대 받아 찾아간 이 ‘소수자’는 이런 몇 가지 불편에도 불구하고 그런대로 괜찮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것은 물론 평소 접하기 어려운 폴란드와 북유럽의 무용작품들을 단기간 집중 구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를 운영하면서 2011년 실레지아 댄스 시어터, 2012년 다다 댄스 시어터와 자비로바냐 댄스 시어터 등 3개 폴란드 단체를 소개한 바 있다. 그 외에도 헝가리, 체코, 루마니아, 슬로베니아 등 중유럽과 동유럽 무용단 몇몇을 무대에 올렸고 이런 경험과 접촉을 토대로 이 지역 무용에 대한 막연한 한두 가지 인상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연극적 전통이 강한 지역답게 다른 지역 무용에 비해 연극성이 두드러진다는 것(상당수 무용단들의 이름이 무슨무슨 ‘댄스 시어터’로 돼 있는 것도 이런 경향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완성도 수준에서는 전반적으로 서유럽이나 북미에 비해 아무래도 뒤진다는 것이다.

 

 

 

 이번 폴란드 댄스 플랫폼에 올려진 12편은 그러한 나의 평소 느낌을 재확인해주었다. 96편의 응모작 가운데 평론가 등 3인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가 엄선했다는 이 작품들 가운데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없었다. 다른 나라에서 온 손님들도 대부분 비슷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폴란드 무용 전체의 수준이 떨어진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폴란드 댄스 시어터, 발트 댄스 시어터, 루블린 댄스 시어터 등 어느 정도 규모와 수준을 갖춘 단체들이 이번 플랫폼에 참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좀더 실험적이고 과감한 젊은 무용가들의 작품이 충분히 소개되지 못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행사 기간 만난 여러 무용가들과 각종 자료를 통해 이 나라에도 활발한 실험작업이 여기저기 펼쳐지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는데, 이번 플랫폼에서 그런 것들을 모두 보고 확인할 수는 없었으니까.
 전반적으로 폴란드 현대무용의 수준이 그다지 높은 편은 아니라 해도 향후 발전 가능성은 충분해 보였다. 안무는 물론 의상이나 조명 등 보완해야 할 부분이 많았지만 모든 출연자들이 진지했으며 관객 또한 매우 적극적이었다. 혹여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아(아니면 바쁜 일이 있어서?) 도중에 극장을 나가는 경우에도 공연의 80% 이상이 진행된 시점에서 자리를 뜨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함께 초대받아 참관했던 오선명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프로듀서의 표현대로 출연자들의 의상은 별다른 이유도 없이 그저 후줄근한 ‘헐벗은 패션’으로 일관했고 조명은 섬세하고 세련된 맛이 부족했으나 누군가 조금만 가르치고 이끌어주면 엄청난 보폭으로 치고나갈 듯 그들의 자세는 열성적이었다.
 폴란드 무용의 가능성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다양한 활동에서도 감지되었다. 아트 스테이션스 재단(Art Stations Foundation)과 자멕(Zamek)문화센터, 국립음악무용원(The Institute of Music and Dance), 아담 미츠키에비츠 문화원(Adam Mickiewicz Institute) 등이 공동 주관하는 폴란드 댄스 플랫폼 외에도 적잖은 수의 무용축제와 국내외 네트워크를 통한 공동작업, 레지던시 프로그램 등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한국 무용가들(안성수 박순호 이인수 이태상 이혜경 등)도 이미 초대받아 다녀온 실레지아 무용축제와 자비로바냐 무용축제, 포즈난 무용축제 등, 수도인 바르샤바는 물론 루블린과 그단스크 등 여러 도시에서 무용축제가 열리고 있고, 이번 댄스 플랫폼의 개최 장소이기도 했던 스타리 브로바르(Stary Browar, 옛 양조장)와 자멕문화센터 등 여러 공간과 기관이 제작이나 레지던시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 폴란드 문화예술의 대외 전파 기관인 아담 미츠키에비츠 문화원은 무용을 포함한 공연예술 분야에도 적극적이어서 가령 2012년에는 시댄스와 SPAF,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에 자국 공연단들을 세우기 위해 열성적으로 움직이기도 했다.
 자멕문화센터의 경우, 프랑스 발 드 마른 무용센터가 자리잡고 있는 라 브릭트리(La Briqueterie), 2007년부터 공연예술에 문호를 개방하고 있는 벨기에의 브리지띤 교회(Les Brigittines)와 함께 <변모(Métamorphoses)>라는 프로젝트를 유럽연합(EU)의 지원하에 수행중(2012-14년)이다. 노동과 산업의 힘을 함의(含意)하는 라 브릭트리(옛 벽돌공장), 종교권력의 요람인 브리지띤 교회, 정치권력의 상징인 자멕(과거 폴란드의 왕궁이자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히틀러의 집무실로 쓰였던)이라는 세 공간이 무용공연과 제작, 토론, 워크숍 등을 담아내고 보여주는 문화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오늘날 유럽이 겪고 있는 정치적, 이념적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폴란드인들은 설명했다.
 무용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스타리 브로바르가 훨씬 본격적이고 적극적이다. 지난 2004년 10월 폴란드 최초의 상설, 정규 무용공간으로 출범한 스타리 브로바르는 ‘옛 양조장에서 새로운 춤을(Old Brewery New Dance)!’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국내외 무용가들의 만남, 연구. 레지던시, 제작 등 전방위적으로 무용 분야를 지원하고 있다. 스타리 브로바르의 운영을 맡은 아트 스테이션스 재단은 2006년 초 폴란드 최초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인 <솔로 프로젝트>를 도입, 현대무용과 아방가르드 춤들의 발전을 자극하고 있다. 특히 젊은 무용가들이 완성된 작품의 제작에 집착하기보다는 창조의 과정에 천착하도록 독려하고 있으며 그 결과물들을 해마다 자체 공연장 무대에 올리고 있다. 2007년부터는 젊은 안무가들의 역량 강화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인 <대안무용 아카데미(Alternative Dance Academy)>를 만들어 정기적으로 폴란드 및 외국 무용가들을 불러모아 집중적인 훈련과 교류의 시간을 갖는다.


 

 

 재단은 또 폴란드 무용가들의 해외진출에도 많은 노력을 쏟고 있다. 2008년 에어로웨이브스(Aerowaves, 유럽 청년안무가 육성 네트워크)에 준회원으로, 유럽 무용의집 네트워크(European Dancehouse Network)에 창설 멤버로 가입한 이래 모듈댄스, 스파지오 등 각종 기구와 조직에 활발히 참여중이다. 재단을 이끌고 있는 요안나 레스니에로브스카(Joanna Lesnierowska) 여사는 무용평론가/큐레이터/코치, 드라마투르그로서 폴란드 현대무용의 발전을 위해 정력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인물이다. 국내는 물론 베를린, 프라하, 이스라엘에서 발간되는 정기간행물과 각종 책자에도 부지런히 폴란드 무용을 소개하고 있는 비중있는 기고가이며 때로는 무대에 직접 서기도 한단다. 매사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비쳤다. 아트 스테이션스 재단과 스타리 브로바르의 활동 초기부터 모든 일을 주도했으며 2008년, 2010년에 이어 이번까지 세 차례 폴란드 댄스 플랫폼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예술이건 사업이건 한 분야가 발전할 때는 반드시 어떤 주도적 인물이 있게 마련인데 여사가 바로 그런 경우라고 느껴졌다.



 ​중국정부와 핀란드 문화기업의 희한한 계약

 호텔과 공연장 사이만 오가느라 시내 구경조차 변변히 하지 못한 채 10일 새벽 포즈난 공항에서 비행기를 탔다. 바르샤바를 거쳐 아침 10시 반 쯤 헬싱키 공항에 도착하니 EARS(Europe-Asia Roundtable Sessions on Performing Arts)의 담당자인 야니(Jani Joenniemi)가 나와 있었다. EARS는 아시아와 유럽 양측 사람들이 모여 분야별 상호협력과 교류 방안을 논의하는 모임인데 이번에는 무용 플랫폼인 아이스 핫과 연계하다보니 공연예술을 주제로 삼게 된 모양이었다. 11-12일 이틀간 헬싱키 현대미술관(Kiasma) 세미나실과 스웨덴극장(Svenska Teatern, 스웨덴어로만 공연하는 극장)에서 열린 포럼에서는 나와 함께 도쿄 아오야마(靑山)극장의 오노 신지(小野), 광둥(廣東)무용축제의 카렌 청(鄭月娥), 독립기획자 겸 큐레이터인 싱가포르의 탕푸쿠엔(鄧富權)이 발제하고 토론했다. 오노 신지나 카렌 청은 종종 보는 터이지만 탕푸쿠엔과는 매우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지금은 주로 방콕에서 활동중이라고 했다.
 포럼은 우리가 차례로 발제하고 난 뒤 유럽측 인사들이 질문을 하고 이어 함께 토론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정작 놀라운 것은 의례적인 아시아-유럽 의견교환이 아니라 한 핀란드 기업이 중국측과 체결한 계약의 내용이었다. 바로 EARS를 주관하기도 한 문화/이벤트 기업인데 그들은 최근 중국 문화부 산하 중국대외문화집단(中國對外文化集團, China Art & Entertainment Group)과 계약을 맺어 산하 5개 직할극장 등 중국내 주요 공연장에 유럽 공연물을 공급하기로 했다는 얘기였다. 우선 상하이 소재 다닝극장(大寧劇院)을 시범 운영하면서 중국 전역에 있는 34개 극장에 유럽에서 제작된 음악, 연극, 무용, 서커스 등 각종 공연물을 공급하게 된다고 했다. 중국대외문화집단은 중국국가연출공사(中國國家演出公司, China Performing Arts Agency) 등 공연과 전시 분야 4개 기업의 모기업 격이다.
 한 마디로 국제 수준의 극장운영 소프트웨어와 프로그램을 갖추지 못한 중국을 상대로 유럽기업이 좋은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엄청난 경제발전과 국제적 지위 향상에도 불구하고 아직 여러 모로 글로벌 스탠다드와는 거리가 먼 중국으로서는 당분간 자국내 공연장들의 프로그램을 향상시키기 위한 좋은 방편일 수도 있다. 게다가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같은 강국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만만한(?) 핀란드 기업이기에 부담없이 일을 맡겼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업을 어떻게 시작하는 게 좋을 것같으냐는 이 프로젝트 담당자들에게 나는 처음에는 뮤지컬이나 서커스, 대중연예 등 규모가 크고 상업성과 대중성이 강한 프로그램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들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다. 아직 깊은 안목을 갖추지 못한 중국의 극장 운영자들과 관객들에게 지나치게 차원 높은(?) 작품은 사업적으로 실패할 우려가 있다고 믿는 듯했다.
 헬싱키 시내의 재래식 사우나에 앉아 그들과 함께 중국 이야기를 하다보니 홍콩의 중국 반환(1997년) 직전, 홍콩아트센터의 고위 책임자와 나눴던 대화가 생각났다. 나는 그에게 이제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고 나면 공연예술 분야에서도 중국 당국의 영향이나 압력을 받게 되는 것 아니냐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코웃음에 가까운 표정을 지으면서 “중국은 적어도 앞으로 20년 동안 우리의 놀이터(playground)일 걸!”이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그는 중국의 낙후한 시스템을 개선하고 공연분야 종사자들의 낮은 안목, 부족한 국제정보를 보충하는 일이 홍콩의 주요 사업이 될 수 있다고 내다보고 있었다. 그가 예측한 20년이 채 되지 않아서일까. 중국은 핀란드 기업에 유럽 공연물의 소개와 공급을 부탁하고 있다. 

 

 



아이스 핫에서 만난 사람들

 아이스 핫은 북유럽 5개국(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아이슬란드)이 격년제로 개최하는 무용 플랫폼이다. 2010년 12월 스톡홀름에서 첫 회가 열렸으며 이번 헬싱키에 이어 다음 번에는 오슬로에서 개최된다. 스칸디나비아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고 노딕(Nordic, 북유럽의) 댄스 플랫폼이라고 하는데 이는 스칸디나비아가 정확히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나는 이 ‘새로운’ 지식을 2010년 2월 호주공연예술마켓(APAM)에 갔다가 만난 비르베 수티넨(스톡홀름 댄스하우스 예술감독)에게서 배웠다. 흔히들 핀란드도 스칸디나비아에 속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지정학적, 문화적으로 달리 구분된다고 한다. 이들 5개국 무용계는 서로 긴밀한 협력관계를 다지면서 캐나다 공연예술마켓인 시나르(Cinars)나 뉴욕의 APAP같은 행사에서 언제나 노딕 코너를 공동운영하고 있으며 5개국간, 혹은 이들과 다른 외국 예술가들간의 교류에 기금을 지원하는 등 많은 공동 사업을 펼치고 있다.

 

 

 

 12일 저녁 알렉산드르 극장에서 열린 개막식에 이어 15일까지 계속된 이번 아이스 핫에는 국제 심사위원들이 선정한 5개국 무용작품 20여 편이 소개됐는데 역시 무용 분야가 상대적으로 활발한 핀란드의 작품이 가장 많았다. 개막식 사회자가 선정위원들을 소개할 때는 우리 안무가 안애순도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아울러 참관자들 가운데 한선숙 장광열 트러스트무용단원 등 한국인들이 제법 많아서 퀑와이랍(광둥무용제 당시 프로그래머)과 단 둘이 아시아 대표선수(?)로 참관했던 스톡홀름 행사 때에 비해 심리적으로 한결 편안했다. 시댄스에서 공연한 바 있는 중국 광둥의 롱윈나(龍雲娜)도 만났다. 윈나는 그 사이 자기 무용단을 차린 외에도 Breaking Arts Festival(發生藝術節)이라는 현대예술축제를 만들어 지난 11월 제4회를 치렀다고 했다. 어딜 가나 길눈이 어두운 나는 행사 기간 내내 또랑또랑하고 억척같은 윈나를 따라다니며 신세를 톡톡히 졌다.
 개막식 때 소개된 유르키 카르투넨(핀란드)의 신작 <예미나(Jemina-Act as you'd know her)를 비롯해 예프타 반 딘터(네덜란드)와 북유럽 파트너들이 함께 만든 , 헬싱키 시립무용단, 마이야 히르바넨, 에바 무일루(이상 핀란드), 까르뜨 블랑슈(노르웨이 국립현대무용단), 키트 존슨(덴마크), 구닐라 헤일보른(스웨덴) 등이 눈에 띄었거나 혹은 평소의 명성에 대한 어느 정도의 기대를 충족시켰고, 그밖의 작품들도 다행히 최소한의 수준은 갖추고 있었다.
 사실 축제나 마켓에서 뛰어난 작품을 발견하는 것은 결코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아비뇽처럼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행사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일까, 나의 경우, 작품보다는 차라리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더 즐겁고 흥미로울 때가 많다. 그들과 이야기하고 함께 어울리면서 단순한 정보교환이나 지식의 습득을 넘어 모종의 공감이나 흥분, 짜릿한 자각 따위를 얻게 되는 경우가 많다.
 런던의 더 플레이스 극장장을 지낸 존 애쉬포드. 2000년 3월 홍콩에서 열렸던 아시아-유럽 댄스 네트워킹 포럼에서 처음 만난 이래 여기저기서 종종 부딪혔지만 별다른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던 그였는데, 이번 폴란드 댄스 플랫폼과 아이스 핫에서는 먼저 다가와 이야기를 건네면서 자신이 주도하는 유럽 청년안무가 육성 네트워크 에어로웨이브스(Aerowaves)의 대아시아 교류를 위한 창구 역할을 해달라고 했다. 유럽인들끼리는 워낙 가깝고 상대방의 사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교류하기가 쉬운데 아시아인들끼리는 그렇지 않은 것같다며, 따라서 자신의 입장에서 아시아와 교류하려면 아시아 각국 무용계 인사들을 따로따로 다 알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토로했다. 맞는 말이다. 언어, 문화, 지리적 거리, 역사적 배경 등 모든 면에서 아시아는 유럽연합(EU)처럼 되기 어렵다. 어쨌든 5월 초 취리히에서 열리는 에어로웨이브스 축제(Spring Forward)에 가서 유럽 각국의 파트너들을 만나보고 향후 상호 협력방안을 의논해 보자고 했다.
 가는 데마다 만나는 바르셀로나의 프란세스끄 까사데수스(메르깟 데 레스 플로르스 무용극장 예술감독)는 2013년 시댄스에서 계획중인 까딸루냐 무용특집 준비에 적극 협력하기로 하는 한편 아예 본인이 서울에 와서 까딸루냐 무용계 현황을 설명하는 자리를 갖기로 합의했다. 빠리 샤이오 국립극장의 무용 프로그램 자문역인 야르모 펜틸라와는 지난해 3월 브레멘 무용축제 이후 두 번째 만남이었는데, 이번엔 행사장을 오가는 버스에서 이야기할 시간이 충분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기획중인 한국무용(혹은 아시아 무용) 특집에 적극 조력해주기로 약속했다. 지난해 서울공연예술마켓(PAMS)에 오기로 하고 왜 오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출장예산을 삭감 당했다고 했다. 금융위기로 허덕이는 스페인이나 그리스 말고도 유럽이 전반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언제나 내 이름을 독일어식으로 용호(Jong-Ho)라고 부르는 올덴부르크 무용축제 감독 호네 도르만은 딱 하루 일정으로 헬싱키에 들렀다며 4월에 열릴 자신의 축제 프로그램을 주고 갔다. 포즈난과 헬싱키에서 연달아 만나며 부쩍 친해진 헝가리 무용가 라잔스키 마르타는 한국에서 6개월간 문화동반자 사업에 참가했던 동국인 무용가 버더 리더의 소식을 물으며 반가워했다. 2년 전 스톡홀름 아이스핫에 이어 두 번째 만남이었는데 행동거지가 반듯하고 작품을 보는 안목이나 여러 상황에 대한 주관이 뚜렷하고 활동적인 성격이어서 앞으로 꾸준히 교류할만한 사람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남미무용네트워크에서 온 여성 4인방(멕시코 칠레 우루과이 브라질 사람들)과 스위스 무용가 질 조뱅의 매니저인 남미 혈통의 뻬드로 히메네스 마라스는 중남미와의 교류에 관한 일이라면 무조건 도와주겠노라고 나섰다.

 매일 밤 행사가 끝날 때마다 식당과 술집에 모여 웃고 떠들고 토론하는 사람들. 목도리를 겹으로 둘러쓰고 미끄러운 눈길을 조심조심 걸으면서도 열심히 자기 작품이나 행사를 설명하는 사람들. 춤도 뜨거웠지만 사람들도 뜨거웠던 한겨울의 만남이었다. 그래서 아이스 핫(ICE HOT)이었는지. 그것이 하필 이 혹독한 추위 속에 만남의 장을 만든 주최측의 역설적인 속마음이었는지.

2013. 02.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