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broad
올해는 ‘포스트모던 댄스의 아버지’ 머스 커닝햄(1919~2009)의 탄생 100주년인 해다. 미국 출신의 커닝햄은 우연성과 즉흥성을 무용에 도입하고 표현매체로서 신체의 역할을 극대화함으로써 현대무용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했다. 특히 그는 존 케이지, 요셉 보이스, 백남준, 딕 히긴스 등 다양한 장르의 전위적인 예술가들과의 공동작업을 통해 ‘퍼포먼스’를 예술의 한 장르로 자리 잡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올해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전세계에서 기념 이벤트가 잇따라 펼쳐졌다. 미국 뉴욕시티발레단, 영국 램버트 무용단, 프랑스 리옹오페라발레 등 수많은 무용단에서 커닝햄의 작품을 공연했으며 커닝햄의 예술세계를 다룬 3D 다큐멘터리 영화 〈커닝햄〉도 개봉됐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여러 나라의 대학 무용과에서는 커닝햄 메소드와 관련된 워크숍이 잇따라 열렸다. 그리고 LA카운티 박물관(LACMA)에서는 커닝햄의 업적을 기리는 전시회 〈머스 커닝햄, 구름 그리고 스크린〉이 열리는 등 미술계에서도 커닝햄 관련 이벤트가 마련됐다.
특히 커닝햄의 생일인 4월 16일 런던 바비칸 센터, 뉴욕 브루클린 아카데미 오브 뮤직(BAM), LA의 UCLA 로이스홀이 동시에 펼친 〈100개 솔로춤의 밤〉은 큰 화제를 모았다. 〈100개 솔로춤의 밤〉은 커닝햄이 자신의 이름을 딴 ‘머스 커닝햄 댄스 컴퍼니(이하 MCDC)’을 설립한 1953년부터 타계한 2009년까지 발표한 솔로춤 100개를 세 극장에서 동시에 공연하는 이벤트였다. 세 도시에서 각각 25명이 100개의 프로그램을 공연했는데, 참가 무용수는 20대 전반부터 60대 후반까지 다양한 연령층을 망라했다.
LONDON - Night of 100 Solos: A Centennial Event from Merce Cunningham Trust on Vimeo
그런데, 올해 탄생 100주년이라는 특수성을 빼고도 커닝햄은 근래 미국 현대무용계를 다룬 기사에서 자주 소환된다. 안무가 타계 이후 그 유산(업적) 보전과 관련해 성공적인 사례로 꼽히기 때문이다.
무용계에서 1인 안무가 중심의 현대무용단은 해당 안무가의 사망 이후 오래지 않아 소멸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대무용 장르가 동시대성을 특징으로 하는 만큼 안무가 사후에는 작품의 의미가 퇴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무용단에는 무용수들도 모이지 않는다. 현대무용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로이 풀러, 이사도라 던컨, 루스 세이트 데니스, 테드 숀, 도리스 험프리 등 초창기 안무가들의 무용단은 안무가 타계와 함께 해체됐으며 작품 역시 대부분 사라졌다. 에릭 호킨스처럼 자신의 타계 이후 무용단이 유지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안무가들도 있다.
마사 그레이엄, 폴 테일러 등이 이끌던 단체는 안무가 사후에도 지속되고 있지만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때문에 트리샤 브라운은 무용단의 쇠락을 우려한 이사회의 반대로 은퇴를 미루기도 했다. 민간에 의존하는 미국과 달리 공공의 지원으로 현대무용이 발달한 유럽도 마찬가지여서 안무가 사후 무용단이 유지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다만 최근 유럽에서는 공공 지원으로 이들 안무가들의 작품을 아카이빙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머스 커닝햄 댄스 컴퍼니(MCDC)는 커닝햄 타계 이후 2년간 ‘마지막 투어’를 돈 뒤 해체됐는데, 왜 커닝햄이 현대무용 안무가들 가운데 성공 사례로 꼽히는 것일까. 바로 커닝햄이 생전에 차근차근 준비했던 ‘레거시 플랜’ 덕분이다.
Merce Cunningham in Fabrication. Photo by A.X. Fraser 1987 ⓒmercecunningham.org |
커닝햄 생전에 그의 예술적 비전을 총괄하던 단체는 1964년 설립된 커닝햄 댄스 파운데이션(CDF)이다. CDF는 1953년 만들어진 MCDC를 시작으로 커닝햄 스튜디오 및 학교까지 거느렸다. 커닝햄이 나이를 먹으면서 CDF는 커닝햄 없는 미래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CDF에서 20년 넘게 사무총장을 역임한 아트 베콥스키와 변호사 출신으로 이사회 의장이었던 앨런 스펄링은 1990년 커닝햄과 함께 커닝햄 사후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커닝햄 사후 MCDC를 비롯해 CDF가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무용계에서 안무가 타계 이후에도 무용단이 지속되는 사례를 조사해 참고하기로 했다. 당시 조사 대상은 호세 리몽, 조지 발란신, 앨빈 에일리 그리고 마사 그레이엄이었다.
우선 호세 리몽(1908~1972)이 1946년 설립한 리몽 댄스 컴퍼니는 미국에서 안무가 사후에도 단체가 유지된 첫 번째 사례다. 리몽은 무용단 설립 이후 자신의 멘토였던 도리스 험프리를 예술감독으로 초빙했는데, 당시 현대무용계에서 설립자가 예술감독이 아닌 첫 번째 사례였다. 또한 리몽은 1968년 호세 리몽 재단을 설립해 자신의 작품에 대한 모든 권리를 위임하는 한편 무용단 운영을 총괄하게 했다.
리몽의 이런 조치는 1972년 그의 사후에도 리몽 댄스 컴퍼니가 존속할 수 있는 바탕이 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리몽 댄스 컴퍼니의 위상은 많이 떨어졌다. 아무래도 리몽의 작품만을 올리다보니 당대성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무용으로서 매력이 떨어져 ‘박물관’ 공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후원도 줄고 공연 횟수도 많지 않아서 재정적으로도 어려워졌다.
결국 리몽 무용단은 5번째 예술감독인 콜린 코너가 2016년 취임한 이후 리몽 외에 안나 소콜로우, 머레이 루이스, 더크 바론, 이리 킬리안, 메레디스 몽크 등 여러 현대무용 안무가의 작품을 레퍼토리에 포함시키는 것으로 운영 방향을 바꿨다.
두 번째, 조지 발란신(1904~1983)은 그의 후원자였던 링컨 커스타인과 함께 1934년 아메리칸 발레스쿨을 세운데 이어 1948년 뉴욕시티발레(NYCB)를 창단했다. NYCB는 발란신 생전부터 제롬 로빈스의 작품을 공연하는 등 레퍼토리 무용단으로 방향성을 잡았다. 발란신 사후엔 다른 안무가들과의 작업이 좀더 활발해져 트와일라 타프, 윌리엄 포사이드, 크리스토퍼 휠든, 알렉세이 라트만스키 등 당대 뛰어난 안무가들의 작품을 공연했다. 2014년부터는 NYCB 단원 출신인 저스틴 펙이 상주 안무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NYCB가 발란신의 작품을 주로 공연하지만 저작권을 소유한 것은 아니다. 발란신의 작품은 ‘발란신 트러스트’에서 모두 관리하고 있으며 NYCB 역시 공연 때마다 저작권료를 지불한다.
발란신은 타계할 때 14명에게 작품 저작권을 유산으로 남겼다. 발란신의 네 번째(마지막) 아내였던 발레리나 타나킬 르 클레르크, 발란신 메소드에 정통한 발레리나 카린 본 아롤딩겐 그리고 오랫동안 발란신의 비서였던 바바라 호건 등 3명이 대부분을 가졌다. 호건은 1987년 유산 상속자들을 설득해 발란신의 저작권을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발란신 트러스트’를 설립했다. 트러스트는 라이선싱에서 나오는 수익을 유산 상속자들에게 나눠준다. 그동안 시끄러운 소동 없이 운영돼 왔지만 올해 트러스트 운영과 재정 문제가 불투명하다며 소송이 제기됐다.
세 번째, 앨빈 에일리(1931~1989)가 1958년 설립한 앨빈 에일리 아메리칸 댄스 시어터(AAADT)는 에일리 사후 더욱 활발하게 운영되는 사례다. AAADT는 원래 흑백차별이 심하던 미국에서 흑인 문화를 알리고 흑인 무용수들에게 공연 기회를 주기 위해 설립됐다. 하지만 에일리는 1972년 AAADT가 뉴욕시티센터의 상주단체가 되는 등 자리를 잡자 다양한 민족·인종적 배경을 가진 무용수들과 안무가에게 문호를 열었다. 특히 재능있는 젊은 안무가들과의 협업은 AAADT의 오랜 전통이 됐다. AAADT는 현재 에일리가 만든 작품 79개 외에 200개가 넘는 다른 안무가들의 작품도 레퍼토리로 보유하고 있다.
에일리는 생전에 일찌감치 AAADT에 예술감독과 행정감독을 별도로 뒀다. 이는 AAADT가 성장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에일리가 안무에 몰두할 수 있도록 도왔다. 사실 대부분의 1인 안무가 중심 무용단은 안무가가 단체 운영 전반을 책임지다 보니 안무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후원금 모금, 티켓 판매 등 재정적인 문제에 신경쓰느라 막상 작품을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또 안무가의 독선이 운영에 장애가 되기도 한다.
트와일라 타프의 경우 무용단 운영 부담 때문에 23년간 이끌어온 무용단을 해체했다. 하지만 1988년 무용단 해체 이후 안무가로서 더욱 활발하게 작업했다. 에일리 역시 생전에 AAADT 외에 아메리칸발레씨어터 등 다양한 무용단에서도 작업했다. 대신 AAADT의 수완 좋은 감독들이 AAADT를 더욱 키워나갔다. 에일리 II를 비롯해 앨빈 에일리 댄스 파운데이션, 에일리 스쿨 등 여러 산하단체들이 만들어져 지금도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네 번째, 마사 그레이엄(1894~1991)이 1926년 설립한 마사 그레이엄 댄스 컴퍼니와 무용학교는 미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현대무용단과 무용학교다. 그레이엄은 두 단체를 운영하는 본부로 ‘마사 그레이엄 현대무용센터(이하 센터)’라는 이름의 비영리 재단을 뒀다.
그런데, 그레이엄 타계 이후 센터는 급격하게 흔들렸다. 가장 큰 이유는 그레이엄의 유산을 둘러싼 상속권 싸움 때문이다. 그레이엄은 타계 2년 전 프리랜서 사진작가 론 프로타스를 자신의 재산에 대한 유일한 상속자로 결정했다. 프로타스는 26살이던 1967년 70대의 그레이엄을 처음 알게 된 후 가까운 사이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레이엄의 타계 후 프로타스는 센터 예술감독이 됐으며, 마사 그레이엄 트러스트(이하 트러스트)를 만들어 작품 저작권 권리를 모두 일임했다. 프로타스가 1998년부터 트러스트를 통해 지나치게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가 하면 그 수혜를 독점하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그레이엄의 제자들이 중심인 센터 운영진은 후원자들과 함께 2000년 프로타스를 예술감독에서 몰아냈다. 그러자 프로타스는 센터와 무용단, 학교에 그레이엄의 이름을 쓰는 것부터 저작권을 내라고 요구하는 한편 무용단이 자신의 허락 없이 작품을 올리지 못하도록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미국 연방법원이 최종적으로 손을 들어준 것은 센터였다. 1956년 이전 작품의 경우 그레이엄이 저작권을 갖는 것으로 정리된 상태였지만 그 이후의 작품은 센터가 보유한다고 본 것이다. 이에 따라 사실상 공연되지 않는 초기작을 뺀 70편 가운데 센터는 54편, 프로타스는 1편을 인정받았다. 나머지는 누구나 공연할 수 있는 공공 영역에 속한다고 봤다.
센터는 소송 승리 후 활동을 재개했지만 이미 후원자와 팬의 상당수가 떠난 터였다. 게다가 점점 그레이엄의 작품만으로 생존하기 어려워진 센터는 2000년대 후반부터 루신다 차일즈, 라 루보비치, 시디 라르비 셰르카위, 토니 슈마허 등 당대 안무가들과 작업하고 있다.
ABT Studio Company in Duet. Photo by Mattew Murphy 2015 ⓒmercecunningham.org |
커닝햄 댄스 파운데이션(CDF)은 호세 리몽, 앨빈 에일리, 조지 발란신, 마사 그레이엄의 사후 이들이 설립한 단체가 겪은 시행착오를 조사한 끝에 1991년 레거시 플랜을 제시했다. 커닝햄 타계 후 2년간 MCDC의 월드 투어 공연을 가질 것, 커닝햄의 예술을 광범위하게 보존할 것, MCDC와 CDF의 문을 닫을 것, 무용수들과 스태프들이 새로운 일을 찾도록 지원할 것, 레거시 플랜을 위한 펀드레이징 캠페인을 할 것 등 5가지였다.
CDF는 앞선 안무가들의 사례들을 검토한 뒤 MCDC를 운영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무용단 유지 대신 더 많은 사람이 접근하게 만드는 확장적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커닝햄은 이후 외부 단체의 작품 요청에 자신의 무용수들을 보내 가르치게 했다. 그리고 2008년 무용단 출신의 패트리샤 렌트를 라이센싱 담당 임원으로 고용해 작품 확산을 맡겼다. 렌트는 대학을 비롯한 각종 댄스 커뮤니티에서 워크숍을 진행해 커닝햄 메소드가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지도록 만들었다.
CDF의 레거시 플랜은 계획에 따라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무엇보다 안무가 생전에 여유있게 단체 운영방향이나 저작권 문제 등을 정리했던 CDF의 결정은 각종 리스크를 예방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실제로 안무가가 생전에 준비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는 큰 차이가 있다. 피나 바우쉬가 2009년 갑자기 타계한 뒤 탄츠테아터 부퍼탈이 아직도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라(춤웹진 9월호 ‘피나 바우쉬 타계 10주기… 탄츠테아터 부퍼탈의 현재모습은?’ 기사 참조).
커닝햄 사후 MCDC와 CDF는 문을 닫았지만 2011년 머스 커닝햄 트러스트(MCT)가 출범했다. 커닝햄 작품에 대한 모든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는 MCT는 MCDC 출신 무용수들을 활용해 커닝햄 메소드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젊은 무용가들을 대상으로 펠로우십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MCT는 또 커닝햄과 관련한 자료들을 뉴욕 공공도서관에 기부해 학자나 학생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자료들은 디지털화되어 온라인으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Merce Cunningham in How to Pass, Kick, Fall & Run. Photo by James Klosty 1966 ⓒmercecunningham.org |
미국에서 안무가 사후 해당 무용단이 존속하려면 결국은 다른 안무가들의 작품도 공연하는 레퍼토리 컴퍼니로 바뀌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다. 트리샤 브라운 무용단의 경우 2017년 브라운 타계 이후 다른 안무가와 협업하는 대신 공연 규모를 축소하는 방식을 택했다. 브라운이 전성기에 만들었던 대규모 극장용 작품 대신 극장 외 공간에서 실험적으로 만든 소품을 공연하는 형태다. 하지만 브라운이 직접 출연했던 초기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도 아닌데다 극장의 초청을 받지 못하게 만든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 타계한 폴 테일러도 2015년부터 무용단에 외부 안무가를 초청했다. 당시 테일러는 제작비 마련을 위해 자신이 소유한 그림들을 팔기도 했다. 그리고 타계 몇 달 전 무용단 등을 총괄하는 폴 테일러 댄스 파운데이션의 예술감독으로 단원 마이클 노박을 지명했다. 노박이 이끄는 폴 테일러 무용단은 테일러 생전과 다른 무용단이 될 것으로 보인다.
마크 모리스의 경우 2018년 레거시 플랜의 하나로 사후에 공연할 작품을 미리 준비하는 계획을 발표해 충격을 줬다. ‘사후 초연’ 아이디어는 행정감독 낸시 우마노프가 스코틀랜드 예술가 케이티 페터슨의 ‘미래 도서관 프로젝트’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미래 도서관 프로젝트는 2014년도부터 매년 한명의 작가를 초청해 새로운 글을 커미션하고 그 글을 특별히 제작된 도서관에 보관해 정확히 백년 뒤인 2114년에 개봉되도록 하는 프로젝트다. 올해 63세인 모리스가 갑자기 건강이 나빠지거나 타계할 경우에 대비해 마크 모리스 댄스 그룹에 신작을 미리 만들어 놓겠다는 것이다. 모리스 사후 적어도 2~3년간 무용단이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2020년 무용단 40주년을 맞아 펀드레이징과 아카이빙 등이 활발하지만 모리스 사후 장기적 계획은 여전히 고민 중이다.
커닝햄이 타계한지 아직 10년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유산 보전에 대한 평가는 이르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다른 무용단이 안무가 사후 혼란과 어려움을 겪는 것과 달리 MCDC와 CDF는 MCT로 매끄럽게 옮겨갔으며 커닝햄과 관련된 작품 제작 역시 세계 곳곳에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특히 커닝햄의 경우 젊은 시절 음악계 및 미술계와 협업을 많이 했기 때문에 관련 아티스트들의 전시가 열릴 때마다 함께 소환되고 있다. 즉 과거 이들 아티스트와 함께 했던 커닝햄의 퍼포먼스가 박물관에서 펼쳐진다. 아예 박물관에서 커닝햄의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전시가 열리는 경우도 있다. 커닝햄의 레거시 플랜은 자신의 작품의 특성을 고려하면서도 안무철학 및 메소드를 후세에 남긴다는 차원에서 탁월한 결정으로 받아들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