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비평시각 심층 공개 인터뷰: 제임스전
서울발레시어터 창설자 제임스전 심층 공개 인터뷰 제1편
  • 일    시
    2024. 08. 13.(화) 13:30 ~ 16:00
  • 장    소
    예술가의집(서울 대학로)

인터뷰이│ 제임스전       

인터뷰어│ 김채현·이지현·이​종호 

후   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춤비평가협회(춤비협)는 지난 8월 ‘원로·중견 춤작가 초빙 비평시각 심층 공개 인터뷰’의 첫 프로그램을 열고 발레 안무가 제임스전님을 초청하여 진행하였다.
인터뷰는 인터뷰이와 인터뷰어가 비공개로 진행하는 것이 통례이다. 이번 심층 공개 인터뷰는 공개된 자리에서 복수의 인터뷰어가 진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예술인 즉 춤작가에 대한 인터뷰이므로 비평시각이 중심이어야 한다. 이 프로그램은 춤비협에서 지난해 연말에 제안되어 올해 들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활성화지원사업으로 선정되었고, 이를 기준으로 춤비협 내에서는 지난 상반기에 춤작가 5인(배정혜·미나유·제임스전·안애순·김은희)을 선정한 바 있다. 이 프로그램은 올 연말까지 진행된다.
이 같은 유형의 심층 공개 인터뷰는 인터뷰의 일반적 관행과 형식을 탈피하므로 낯선 점이 있고 인터뷰이는 물론 인터뷰어에게도 사실상 선례가 없다시피 해서 그 형식을 모색하고 다듬어가야 할 것이다. 심층·공개·비평시각이라는 3요소를 춤작가와의 인터뷰에 녹여내어 춤작가의 면모를 가급적 충실히 드러내고 또한 공개 형식을 취함으로써 내용 면에서 객관성을 견지할 것이 요망된다. 앞으로 지속적으로 추진될 본 프로그램이 무용인들의 작업을 깊이 있게 재조망하고 비평의 토대를 다지는 데 이바지할 것을 기대하며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제임스전님 초빙 인터뷰를 위한 패널로 김채현(〈춤웹진〉 편집장)·이종호(시댄스 예술감독)·이지현(춤비평가), 3인이 정해졌다. 패널들은 제임스전이 제공한 공연 및 비평 자료들을 숙지하고 사전에 비대면 예비 모임을 가져 이번 인터뷰의 주제를 몇 가지로 정하는 작업을 진행한 바 있다.
8월 13일 행사는 춤비협 김혜라 회원의 첫머리 사회에 따라 이종호 춤비협회장의 인사말, 참석자 소개를 간략히 진행하고 모더레이터를 겸한 김채현 패널의 사회로 본론을 진행하였다. 패널로 참석이 예정된 이종호님은 심층 공개 인터뷰 당일 급작스런 개인 사정으로 인해 부득이 인터뷰에는 참석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공개 인터뷰 취지에 맞춰 참석자들이 의견을 표하는 기회도 제공되었다. 제임스전님 인터뷰는 분량을 고려하여 〈춤웹진〉에 2회로 나누어 게재한다. - 편집자

〈춤웹진〉 독자들을 위한 제임스전의 간략 참조 사항:
서울 출생 / 1972년 미국 이민(캘리포니아) / 1985년 뉴욕 줄리어드예술대학 졸업 / 모리스베자르 20세기발레단 단원 / 유니버설발레단 솔리스트 /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 1995년 서울발레시어터 창단 / 2003~2024 한체대 교수



 



김채현: 오늘 인터뷰를 갖기 위해서 사전에 제임스전님께 몇가지 질문을 드렸습니다. 제임스전님의 생각에 자신이 애지중지하거나 남에게 소개하고 싶은 작품이 많겠는데, 그 가운데 맨 먼저 세 가지를 좀 소개해달라고 요청을 드렸었지요. 비평시각에서 창작 당사자의 말문을 열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세 작품

제임스전: 제가 소개하고 싶은 첫 작품은 〈현존 1,2,3〉 시리즈입니다. 서울발레시어터(SBT)를 창단하면서 제가 〈현존 1〉을 95년도에 만들었습니다. 〈현존 2〉는 96년, 〈현존 3〉은 98년도에 만들었습니다. 〈현존 1, 2, 3〉을 필립모리스 회사와 예술의전당이 함께 공동 기획을 했고 그때 문호근 예술의전당 예술감독님이 많이 도와주셔서 가능했습니다. 그 시리즈 작품은 어떻게 보면 SBT를 상징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지요. 그다음 두 번째는 〈라이프 이즈〉, 인생이라는 게 뭔가? 이런 작품인데 그것이 대한민국발레축제 첫회에 저희가 선정된 작품이에요. 그때 라이브 오케스트라와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하게 됐고요. 참 영광스럽죠. 세 번째는 이제 우리 김인희 단장이 2000년도에 SBT 재정 상황이 너무 안 좋으니 어린이를 위한 작품을 만들자고 해서 싫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래도 김인희씨는 동의하지 않고 그러면 어떻게 할거냐고 되물었어요. 그러다가 마침 당시 문예회관(지금의 문화예술위)에 공동제작이라는 예산이 있어서 SBT하고 문예회관의 공동제작으로 제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만들자 했고 그 작품이 2000년에 탄생했습니다. 그런데 그 작품은 어떻게 보면 SBT의 큰 효도 작품이에요. 그 작품을 통해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이렇게 SBT에서 한 세 가지 작품입니다.







〈현존〉 ⓒ제임스전



김채현: 주요작을 소개하시고 대충 이유를 들었습니다. 소개하신 각 작품에 대해 조금 더 부연 설명을 부탁드리지요.

제임스전: 〈현존〉부터 말씀드릴까요? 제가 뉴욕에서 공부할 때 뮤지컬을 많이 접하게 됐어요. 왜냐면 제 친구도 뉴욕에서 〈캣츠〉에 출연했고 그래서 언젠가 무용으로 댄스 뮤지컬을 만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었요. 그래서 그런 이유 때문에 SBT 창단과 함께 〈현존〉 음악을 랩 음악으로 해서 작품을 만들었고, 〈현존〉은 어떻게 보면 제가 이민 가서 살았던 미국 생활이 많이 섞여 있어요. 미국에 살면서 경험했던 거, 느낀 거, 그리고 그때 한창 제가 고등학교 때 락 그룹 퀸에 미쳐서 모든 공연을 봤고 레드 제플린을 비롯해서 에디 마니, 스틱스, 엘튼 존... 진짜 모든 공연을 가서 봤죠, 저니 등등등 해서. 프랭크 시나트라, 마이클 잭슨 라이브 공연 티켓을 누나가 선사해서 보러갔습니다. 그런 문화적 충격의 백그라운드가 있었죠. 또 뉴욕에 살면서 그때 시대는 잘 아시겠지만 미국은 마약이 엄청 심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코카인뿐만 아니라 제가 뉴욕 생활하면서 거기에 빠지지 않고 살았던 것도 아마 어떻게 보면 종교적 영향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제가 믿음이 좀 있어서 뉴욕에서 항상 성당을 갔어요. 가서 기도드리고 거의 일주일에 한 3~4번 그런 데서 제가 잘 이겨냈고 그런 부분들이 또 〈현존 2〉에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현존 3〉는 그냥 미래를 생각해 봤어요. 이렇게 되면 구원받지 않을까? 라는... 제목이 구원이기에 ‘로드 투 셀베이션’이라는 부분에 플라잉도 나오고 다 나오는데, 이 세 작품은 처음부터 보셔야 합니다. 거기에 항상 여자, 남자 두 명의 무용수가 나와요. 제가 이전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소개한 적이 없는데, 오늘 처음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는 여성으로 마리아를 상징했고, 하나는 예수님을 상징했는데, 〈현존 2〉 〈현존 3〉에 그 두 분이 꼭 나옵니다. 왜냐면 제가 특히 미국에 살아가면서 아마 종교가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참 모르겠어요. 그런 유혹이 많았기 때문에, 〈현존〉에 항상 그 두 분이 꼭 나타납니다. 그리고 〈현존 3〉에서는 이제 천사가 나타나서 주인공 남자 무용수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그런 부분들을 만들게 됐습니다.
 〈라이프 이즈〉는 제가 50살 넘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인생에 대해 좀 생각할 수 있어서 거기에 죽음, 외로움, 사랑, 그다음에 볼레로는 탄생이라고 해서 인생은 끝이 없이 가는 것이라는 작품으로 네 가지 이슈를 엮어 만들었지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말씀드린 대로 솔직히 말해 우선 SBT의 재정적 책임감에서 만든 작품입니다.





〈라이프 이즈〉 ⓒ제임스전



김채현: 혹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수입이 얼마나 됐어요?

제임스전: 엄청났어요. SBT 역대 공연 중 제일 많은 매출이 났습니다. 그래서 작년에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재공연을 할 수 있도록 투자를 받아 작년 2023년도에 다시 이태섭님과 무대를 모두 새롭게 만들어서 올렸습니다. 엘리스는 어린이를 위해서 만든 것도 중요하지만 어른들이 와서도 좀 재미있게 볼 수 있게 연출했습니다. 거짓말 같겠지만 관객들이 어른들도 재미있다고 그러셨어요. 목표는 돈이에요. 단원들 월급을 줘야 하기 때문에요.

김채현: 제일 처음 소개하신 〈현존〉 작품에 대해 오늘 인터뷰 중간에 주요 장면을 보면서 작품에 얽힌 코멘트나 다른 해석을 유도할 수 있는 그런 말씀을 좀 듣는 기회를 한 20분 정도 가지려고 합니다. 이지현 선생님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지현: 준비 과정에서 자료를 보며 느낀 것은 엄청난 작품의 양에 놀랐구요, 그 다음에는 제작의 스케일에 깜짝 놀랐습니다. 출연자 규모도 규모려니와 장기공연이나 20년이 넘은 작품이 다시 재공연 된다든지 하는 흔치 않은 사례가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민간에서 발레 작품을 그렇게 하기 어렵습니다. 제 생각에는 거의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인데 그 시절 어떻게 그런 제작 규모가 가능했을까가 궁금했습니다. 발레 근현대사에 이런 경우가 있었을까를 떠올려 보게 될 정도였는데요, 작품을 할 수 있는 여건, 시스템을 만들어가면서 작업하셨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김채현: 잠시 말씀드리면 이번에 저희가 조사하며 자료를 요청했었지요. 전체 연보를 부탁해서 확인해 보니 공연 횟수가 아니고 작품 목록이 총 82편이 돼 있는데 아마 더 되겠죠? 빠진 것도 있겠죠?

제임스전: 빠진 것도 있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제임스전



해외 성장 체험 투영

이지현: 네, SBT 창단인 95년부터 따지자면 정말 쉬지 않고 30년인데 30년 동안 꾸준히 달려왔다는 거에 대해서도 놀랐습니다. 30여년 간 80편이 넘는 작품을 한 예술가에 대해 공인된 데이터베이스 자료가 없다는 것도 놀라웠습니다. 공식 자료는 2008년 이후에는 없더라구요. 그러니 예술가 스스로 작품세계에 대해 이야기 한 내용이 없는 건 당연하겠죠. 이런 심층 인터뷰를 하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마 저희가 이 작업을 하고 나면 그런 것에 대한 후속 작업도 따라올 것 같습니다. 오늘 인터뷰하고 끝나는 것이 아닌, 비평가가 한 예술가의 인터뷰 내용을 기반으로 다시 한번 비평적 관점으로 하는 작업이 이어질 것을 기대합니다.
 저는 그런 상황에서 제임스전님께서 어렵게 추려내신 세 작품을 중심으로 보면서 이 많은 작품을 그렇게 줄인 것에 아쉬움이 생겼습니다. 이종호, 김채현 선생님들과 같이 예비회의를 하면서 이렇게 세 작품으로만 좁혀서 보기에는 너무 좀 편협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에 모두 동감을 하셨구요, 그 다음으로는 제임스전님 활동을 작품 비평에만 초점을 맞추기에는 여타 다른 활동들도 많이 하셨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상주단체 활동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그런 사업이 생기기 전에 SBT와 과천이 이미 연습공간과 지역 공연 기획을 함께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재단의 상주단체 사업이 생기기 전에 그 사업에 아이디어를 준 케이스가 됩니다. 그리고 물론 지금까지도 SBT는 상주단체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아까도 말씀하셨지만 아르코나 예술의전당과의 공동제작 사례인데요, 아르코의 제작은 간혹 하다가 말다가 하는 귀한 사업이고, 예술의전당과의 제작은 더 어렵죠. 그런 연때가 잘 맞은 점도 있지만 공공극장이 선택할만한 파트너였다는 것을 살펴봐야 할 거 같습니다. 또 〈라이프 이즈〉라는 작업을 하실 때는 우리나라의 노숙자들이 출연하기도 했지요. 그러기 위해 서울역 노숙자들과의 워크숍도 발레의 사회 활동의 효시가 된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또 하나는 여러분들도 TV에서 제임스님을 많이 보셨을 거예요. 제 생각에는 다큐가 참 많았던 것 같아요. 몇 편 정도 찍으셨어요?

제임스전: GS칼텍스하고 찍은 것도 있고 KBS 〈인간극장〉과 찍은 것도 있고 EBS 등등 여러 가지 있습니다.

이지현: 저도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본 것도 많고 로이 토비아스 선생님과의 다큐도 있었죠?

제임스전: 네, 맞아요.

이지현: 오늘 다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로이 선생님과의 얘기도 궁금합니다. 어쨌든 여러 부분에서도 활동을 선구적으로 하셨기에 선생님의 행보를 보고 이후에 그런 사업들이 이제 많이 기획되지요. 여러 가지 시대에 따라서 창작, 기타 활동, 이런 흐름을 보면 그게 한 몇 년 뒤나 10년 뒤에 사업이 기획되어서 다른 많은 예술가가 거기에 참여하면서 진행하는 걸 보면서 선구적이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구나 싶습니다. 우리 사회가, 무용 현장이 너무 빠르게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저희가 사실은 그런 것들을 챙기거나 곱씹을 틈 없이 그냥 지나가 버리고 말다 보니 그게 자료화되거나 데이터화되는 과정을 소홀해서 굉장히 안타깝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시간은 매우 한정된 시간이라 저희가 얘기를 좁혀서 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게 이제 제임스전님의 예술 세계나 예술 작품의 리스트들에 누가 되지 않는 상황으로 읽혀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앞섭니다. 초반에 김채현님께서 말씀하셨지만, 오늘 이 자리에 제임스전님과 직접 인연이 닿은 분들이 많이 오셨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들도 좀 듣고 싶습니다. 왜냐면 그런 이야기들은 어떤 책에도 안 나오고 인터넷을 검색해도 안 나오고 오히려 이 자리를 통해서 좀 생생하게 제임스전님과 본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하실 수 있는 말씀들 또 에피소드들 이런 것들을 좀 꼼꼼히 꺼내주시면 저희가 그것들을 기록하고 녹취해서 또 하나의 생생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인터뷰 초반에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현존〉 영상을 보면서 제임스님이 출연하시는 부분을 봤던 것입니다. 그 얘기는 아마 작품 이야기를 하면 묻힐 것 같은데, 저는 그걸 너무 재밌게 봤습니다. 2012년도에 찍은 영상인데 37분 정도에 제임스님이 중년 여성 역할로 나오셔서 매우 과감한 연기와 매우 과감한 춤 장면을 이끌어가십니다.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지금 웃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 부분을 어떻게 본인이 하시게 됐는지, 그 장면을 어떻게 삽입하게 됐는지 혹은 좀 전에 종교와 연관해서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현존이라는 것에 대한 고민을 하시면서 미국 생활에서 본인의 종교와 관련된 그런 마음들을 말씀하셨는데 어쩌면 저도 그걸 통해서 깊은 종교성 같은 것들을 느꼈습니다. 특히 〈라이프 이즈〉 같은 작품도 그랬습니다. 그랬을 때 현존의 그 배역은 상당히 어쩌면 그런 종교적 마음과 모순된 역할이었을 텐데 저는 그 두 관계도 아주 궁금합니다. 선생님 분장도 너무 멋있었다는 말씀을 드리며 질문드립니다.

제임스전: 그 포주 역할을 제가 한 이유를 말씀드리지요. 뉴욕에서 생활하던 그때 맨해튼에 가면 진짜 창녀들이 많았어요. 42번가는 길이 바로 없고 거기 걸어가는 것도 위험하고 소호 쪽 빌리지도 안 좋았어요. 빌리지에서도 다 마약 팔았고 밤마다 보면 창녀들이 걸어 다닙니다. 이스트 빌리지는 너무 위험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 것들을 묘사한 겁니다. 포주는 아주 거칠고 우리가 영화에서도 보지만 포주가 아주 거칠어요. 남자 같은 분위기입니다. 그런 느낌을 보여주고 싶었죠. 그래서 이 역할은 아무도 안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제가 하게 됐습니다.

이지현: 분장은 어떻게 하셨나요?

제임스전: 분장은 김인희 단장님이 다 해줬습니다. 그리고 큰 브래지어가 필요했어요. 브래지어 속에 엄청난 휴지를 집어넣었고, 구두는 김인희 단장 구두입니다. 김 단장이 발이 큽니다. 그래서 그 하이힐을 신고 그다음에 쉐이빙을 다 했죠.

이지현: 잠깐 짧은 질문 하나 드릴게요. 어릴 때 연극을 하셨어요. 그래서 발레를 하게 된 계기가 연극배우를 하려면 발레를 배워야 된다고 해서 발레를 연습하다 보니까 너무 재밌어서 발레에 빠지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래는 회계학을 전공하려고 준비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다 줄리아드 스쿨을 가셨습니다. 그 히스토리도 좀 듣고 싶습니다.

제임스전: 제가 연극,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영화를 하루에 두세 편씩 봤습니다. 그래서 연극을 배우겠다고 하니 교수께서 너무 좋다고 그러시면서 움직임도 배워야 한다고 해서 배워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현대무용 수업을 가보니 막 바닥을 구르고 있는 겁니다. 바닥이 더러운데 이게 뭔가 했고, 재즈를 갔더니 힙을 돌리고 막 소리를 질러서 거칠어 보였습니다. 그다음은 발레였는데 조용한 음악에 아주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다른 건 동작들이 많아서 너무 어렵게 보이고 발레는 쉽게 보였어요. 그래서 이걸 해야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태권도 3단이기 때문에 좀 유연성이 있었어요. 수업을 하신 그 선생님이 아마 샌프란시스코 발레단 단원이었는데 그분의 거짓말에 내가 넘어간 것 같아요. 저한테 탤런트가 있다는 거예요. 좋은 몸과 좋은 유연성을 갖고 있다는 등의 여러 달콤한 말씀을 하시니까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다음에 배워야 하니까 멘로파크 거리 스탠포드대학 쪽에 유명한 학원이 하나 있어서 편지를 썼고 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때는 남자가 얼마 없으니까 남자가 참 필요했고 장학금을 줄 테니까 배우겠냐고 해서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발레에 미쳐서 공부하러 간다고 하니 어머니께서 당황하시고 우리 형님은 발레를 배우려면 최소한 초등학생부터 배워야 되는데 미쳤냐고 그러셨어요. 근데 제가 모은 돈 갖고 수트케이스를 끌고 떠나죠. 20살쯤 됐어요. 떠나고 그때부터 시작했던 거죠. 우리 형님이 어머니한테 분명히 두 달만에 돌아온다고, 안 된다고, 저 나이에 발레를 어떻게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다음에 이제 미국에서 웨이터 생활을 하면서 줄리아드 오디션에 또 붙게 됐어요. 근데 저는 이 말을 꼭 하고 싶어요, 제가 전에는 이 말을 못 해봤는데. 줄리아드스쿨을 제가 칭찬하는 게 아니라 줄리아드스쿨은 저 같은 또라이들을 뽑았어요. 테크닉이 좋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잘 아시겠지만 피나 바우쉬, 폴 테일러, 오하드 나하린 그들에게서 가능성을 봤습니다. 우리나라 같이 딱 발레만 잘해야 한다는 그런 게 줄리아드에는 없었어요. 발레는 그냥 기준이고 배워서 졸업한 다음에 발레를 할 건지 현대무용을 할 건지 뮤지컬을 할 건지 그건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들어가기 전부터 전공이 정해지지 않아요. 제가 만약에 한국에 있었더라면 전 죽어도 못 들어갔을 거예요. 그러니까 줄리아드스쿨을 제가 칭찬하는 것 중에 하나는 그거예요. 그게 바로 줄리아드의 모토인 것 같아요. 줄리아드스쿨은 항상 너는 다르고 특별하다고, 세계 베스트라고. 너는 항상 너와 하나가 된다고 그렇게 얘기했어요. 그러니까 누구를 모방하지 않아요.
 지금은 뉴욕시티발레단학교하고 줄리아드스쿨하고 건물이 따로 있는데, 그때는 같이 썼어요. 뉴욕시티발레단학교 학생들 지나가면 얼마나 예뻐요. 몸매가 장난 아니죠. 줄리아드스쿨 애들은 몸매가 그렇게 좋지 않아요. 그래도 줄리아드는 우리가 최고이며 우리가 리더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게 아마 저한테 큰 영향을 주었을 거로 생각합니다.

김채현: 아까 말문을 열기 위해서 드렸던 질문에 〈현존〉 〈라이프 이즈〉, 그리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세 작품을 말씀하셨지요. 제가 조금 기억나는 것은 〈창고〉 〈분노〉 〈꼬뮤니께〉 〈시집가는 날〉 〈결혼〉, 그다음에 좀 더 특이한 거는 2010년 가을에 비 오는 그날인데 저도 참 어지간히 청승맞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그 공연을 운현궁에서 다 찍었습니다.

제임스전: EBS 다큐멘터리였던 거 같아요.

김채현: 9월달 저녁에 비가 오고 해서 굉장히 추웠고 오래 못했어요. 창작 편수가 82편이라고 이야기하셨지만, 먼저 소개한 세 작품 이외에 좀 더 몇 작품을 더 간략하게 소개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기억, 괴로움들

제임스전: 괴로운 작품도 하나가 있는데요, 〈창고〉입니다. 2001년 여름에 여훈 서울발레시어터 사무국장도 같이 무대 쪽에서 일했고 그때 ASN이라는 매니지먼트 벤처 회사가 있었는데 그쪽에서 투자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직전 6월에 예술의전당에서 안호상 부장님이랑 같이 공동기획을 해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거의 30회 이상 공연하고 한 1억 남짓 벌었어요. 그래서 이 ASN 투자 회사가 자신들이 투자할 테니 한국적 작품을 하기로 해서 제가 〈창고〉를 했어요. 〈창고〉는 어떤 나이 먹은 중년 남자가 창고에 들어가 찾다 보니까 앨범 하나를 발견하고 그 앨범을 열면서 고등학생 시절, 여자친구, 결혼 등 옛날 생각을 합니다. 작품이 그렇게 시작되는데 이 작품을 여름에 한 달 반 동안 열심히 준비했어요. 그래서 10월 서초동 한전아트센터에서 48회 공연을 하기로 정해놓고 8월 말에서 거의 9월 넘어갈 즈음에 AS 대표가 티켓을 60%를 팔았다고 연락이 왔어요. 그런데 웬걸 뉴욕에서 9·11 테러가 날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창고〉 ⓒ제임스전



김채현: 2001년입니다.

제임스전: 네, 2001년입니다. 큰일 났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티켓을 사주겠다는 사람들이 못 사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는 거에요. 10월에 첫 공연에 올라갔는데 1000석이 넘는 공연장에 한 800명이 왔고 날짜가 지나면서 계속 700, 600, 500, 300... 이렇게 줄고 나중에는 한 50명이 들어왔습니다. 사물놀이, 큰 북도 치고 여러 가지 다양한 시도를 했는데 처음 올렸을 때 우리 평론가님들께서 재밌다고 잘 써줬어요. 개막 직전에 KBS 〈인간극장〉에 다큐가 나가는 기회도 있었고 반응이 좋았는데, 안타깝게도 36회째에 접을 수밖에 없었어요. 왜냐면 스태프 비용이랑 무용수 출연료가 나가야 했고 그때 ASN 측에서 예산이 얼마 없는데 스태프 비용과 무용수 출연료 중 어떤 쪽에 지불할지 물어왔고 김인희 단장이 스태프 비용을 줘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 장모님이 적금을 선물하신 게 있어서 그것을 해지하고 무용수 출연료를 줬습니다. 그리고 그 계기로 SBT가 일단 독자 활동을 접고 2002년도에 과천에서 다시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저한테 〈창고〉는 처음에는 엄청난 꿈을 줬는데 9·11 테러 때문에 망한 작품이었습니다.

김채현: 그럼 그때 망한 규모는 어느 정도였습니까?

제임스전: 쫄딱 망하고 돈도 안 되는 일을 한다고 왜 이렇게 사느냐며 장모님한테 엄청 혼났어요.

김채현: 돈은 안 되었지만 기억에는 확실히 남아 있군요.

제임스전: 저는 그때 담배를 좀 피웠는데 하루에 3갑씩 피게 되는 거예요. 공연을 이제 접어야 하니까 마지막 날 공연에 화장실에 가서 피고 있는데 제 얼굴이 아주 악마 같아 보여 그날 끊었습니다. 그날 울었어요.

이지현: 실패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또 기억나는 다른 실패 건이 있습니까?

제임스전: 아주 큰 것도 있죠. 세월이 흘러 이제는 말할 수 있네요. 1998년도에 〈현존〉이 올라갔을 때 예술의전당 사장님이 보러 오셨는데 끝나고 백스테이지에 오시더니 이런 공연을 미국에서도 못 봤고 처음 보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사장님이 제더러 예술의전당 안으로 들어와서 공동제작할 것을 제안하셨고 〈호두까기 인형〉 같은 작품들, 그리고 발레 학교까지 등 여러 가지를 해보자고 하셨지요. 그때 우리가 돈도 없지만 돈을 빌려서 계약금을 넣고 다 했어요. 그리고 공사까지 들어갔습니다. 별안간 그때 문체부장관 장관이 국립발레단을 예술의전당에 입주시키겠다는 계획을 밝혔던 모양이에요. 정부도 국립극장 운영과 관련해서 계획이 있었겠죠. 그러면서 문체부 과장이 오고 우리 SBT 사람들은 출입이 통제되고 그때 조선일보에서 기자회견을 제안했는데 제가 안 했습니다. 당시 우리 로이 토비아스 선생님이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가 맞냐며 놀라셨어요. 공사를 하고 있는데 문체부에서 나와서 문을 다 잠가버린 거예요. 저희는 공모 절차를 거쳐 깨끗했는데 만약에 우리가 기자회견을 하고 하면 예술의전당 사장님도 곤란해지실까봐 걱정이었습니다. 그때 집도 신사동에서 예술의전당 쪽으로 옮긴 후였어요. 모든 게 중지된 겁니다. 그러다가 사장님이 예술의전당에 공간을 준다고 하셨어요. 주변에서 참으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꾹 참고 예술의전당에 들어가서 2년을 했더니 세가 엄청나서 다 까먹었어요. 〈호두까기 인형〉도 못하고 또 국립발레단이 있으니까 반대도 못하고 다 스톱시켜서 뭘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2년 동안 다 까먹고 가처분에 들어가게 된 거죠. 이런 에피소드가 있어요. 뉴욕시티발레단이 포드재단 때문에 전기를 마련했어요. 저희는 그런 식의 꿈을 꾼 거예요, 우리는 할 게 너무 많다. 그러나 마음이 아픕니다.

김채현: 국립발레단과 SBT가 상호 윈윈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지 못했는데, 왜 일을 그런 식으로 진행했는지, 그렇게밖에 진행할 수 없었는지, 참 연구 대상입니다. 말씀을 들어보면 예술의전당이나 문체부나 어떤 딜레마나 곤경을 긍정적 계기로 만들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듯합니다. 유감입니다. 밝히지 않은 사연들이 더 있습니까?

제임스전: 더 슬픈 일 하나는 1998년도에 삼성영상사업단에서 넌버벌 뮤지컬을 하나 만들자는 제안을 했고 그래서 제가 다 준비했어요. 그러던 중에 이 사업단에서 기획한 배우 전옥의 사연을 주제로 한 〈눈물의 여왕〉이라는 대중 가극이 실적이 안 좋았는지 망했다는 소문을 들었고, 안 한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아이엠에프 사태 직후의 일이서 공연 제목을 IMF로 할까 뭐로 할까 구상을 하고 6개월 동안 준비한 것이 그 여파로 무산되어버렸어요. 그다음에 또 하나는 1997년에 MBC 프로덕션하고 EMI 레코드사가 〈로미오와 줄리엣〉에 서로 공동 투자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박용재 기자님이 그때 작가였고 대본을 썼어요. 연출가, 작곡가는 미국에 있는 한국 사람을 초빙하는 등 섭외를 하고 1년을 준비했는데 결국 안 되었어요. 안 된 이유는 그때 EMI 레코드사에서 MBC 프로덕션에서 MBC 연속극 노래를 삽입하는 조건으로 10억을 투자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연속극이 일본 것을 카피했다고 논란이 일어나서 EMI 레코드사가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여러 차례 수포로 돌아갔고, 이런 것들이 정말 SBT의 문제인가 싶었습니다. 저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뉴욕에서부터 뮤지컬에 미쳐서 진짜 뮤지컬 하나 만들고 싶었어요. 근데 그게 안 되었습니다. 그런 아픈 기억들이 많죠.

김채현: 그렇군요.


분노, 배려

제임스전: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나이 먹는 게 슬픈 일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 일반적인 것 말고 기억나는 아픔이 있습니다. 〈분노〉가 그런 작품입니다. 그리고 〈분노〉는 창작산실 작품인데 그 전에 2013년도에 세종문화회관하고 ‘천원의 행복’이라 기획한 게 있어서 공연했는데 〈분노〉의 하이라이트 부분입니다. 제가 그때 분노가 좀 많았어요. 왜냐하면 SBT를 이렇게 운영하면서 작품만 열심히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정권이 바뀌면 공공기관 담당이 바뀌면 만나러 가야 하는데, 저는 누구한테 줄 서는 걸 안 했어요. 어느 국회의원이 저희 후원회 회장님이었는데 절대 정치에는 관여하지 말라는 말씀을 해 주셔서 그런 기회가 생겨도 우리는 좀 안 했습니다. 우리가 민간단체를 운영하면서 단원도 30명에 직원까지 다 40명씩 월급 지불하고 4대보험을 보장하는데 이게 벅찼습니다. 근데 답이 안 나와서 계속 분노가 쌓이는 겁니다.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분노〉 작품을 한 15분짜리로 만들었습니다. 그랬더니 보는 사람들에게서 반응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이거 계속해 봐야 되겠다고 했는데 또 SBT에 재정이 없었습니다.
 근데 분노가 생기면서 재정이 어려우니까 이제 받아들이고 창작산실에 응모했는데, 그게 된 겁니다. 2014년 12월 아르코 극장에서 초연했고 그다음 해에 LG에서 공연했죠. 무용수가 가장 싫어하는 작품이에요. 그 작품을 하면서 제 욕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무용수가 무대 나오면서 힘들었다고 해요. 그냥 여러분께서 말씀하세요. 뒤에 계셨으니까 알고 계시잖아요.

참석자(노민혁 전 단원): 무대에서 춤추고 나오면서 비속어가 나올 정도로 너무 힘들어했고 실제로 객석 관객들도 보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너무 힘든 무용수들의 모습이 관객들한테 그렇게 고스란히 느껴져서 그랬습니다.





〈분노〉 ⓒ제임스전



제임스전: 잘 된 거죠. 제 분노가 잘 된 거죠. 재정 문제와 관련해서 김인희 단장이 못 지킨 약속이 있습니다. 제가 죽기 전에 〈심포니 9〉를 오케스트라와 합창단과 함께 라인업을 하고 싶었습니다. 이걸 하고 싶다고 밝히자 김 단장이 해주겠다고 해놓고도 아직 안 해줍니다.

이지현: 〈분노〉를 보는 사람은 통쾌했겠죠. 그렇게 직접적으로 다뤄준 것이 통쾌했습니다. 그 배경을 지금 설명하셨지만 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아요.

제임스전: 어느 분이 가장 싫어하는 작품으로 〈시집가는 날〉이 있습니다. 그 작품은 지금도 생각해보면 조금 짧은 시간에 만들어서 문제였습니다. 저는 항상 전막은 한 2~3년 걸리는데 이거는 시간이 좀 짧았습니다. 국악 작곡가를 초빙했는데 한 1년을 더 작업을 했더라면 좋은 음악이 나왔을 거예요. 참 괜찮은 분인데 짧은 시간에 음악을 만들려고 하다 보니 이분도 힘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분이 춤을 잘 아시는 분이 아니였습니다. 제가 박자, 리듬, 움직임 이런 것들을 전부 이야기해주면서 음악이 오고 가는 과정이 있었는데 한 6개월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진짜 좋은 음악이 나왔을 것 같은데 그때는 시간이 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때는 좀 마음이 혼란스러웠던 것이 2016년에 〈시집가는 날〉을 했는데, 이제 김인희 단장하고 SBT 발레단을 그만두고 마지막으로 제가 하는 거다 보니 좀 정신적으로 혼란이 있어요. 제가 떠나면서 이 〈시집가는 날〉을 마지막으로 선물로 주고 싶었고 잘 되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이것도 창작산실에 선정돼서 20분 분량은 사람들이 색다르고 국악하고 하는 것이 재밌다면서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근데 제가 봐도 가장 큰 문제가 음악이었습니다. 김인희 단장과도 음악만 좀 잘 됐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을 이야기했고 그때 제가 좀 급했던 것 같습니다.

김채현: 다음 작품으로 〈꼬뮤니께〉 작품에는 노숙인들이 나오죠? 그리고 제가 기억하기로는 연은경씨가 한복을 입고 나왔고 그 작품이 인상 깊었습니다. 〈꼬뮤니께〉 작품이 제목도 좀 특이한데 한 번 소개하시지요.

제임스전: 그 작품을 하게 된 동기로, 문화예술교육으로 콜롬비아에 간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몸이 아프신 분들도 계시는데 제가 노숙인들 교육을 하는 것도 알고서 교육도 요청하고 초청해서 2012년도에 가게 됐습니다. 그래서 〈꼬뮤니께〉 작품을 만들게 됐는데 그 제목을 처음에 어떻게 할지 고민이 됐습니다. 그때 오한샘 PD하고 둘이서 맥주집에 있었는데 ‘꼬뮤니께’를 추천했습니다. 김인희씨도 좋다 하고 소통하고 싶어 하느냐는 느낌으로 제목을 〈꼬뮤니께〉, 이렇게 정했습니다. 그 작품은 저한테 좀 의미가 있어요. 그 작품은 그냥 작품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사회 소통 그리고 힘든 사람들과 같이 하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제가 콜롬비아 깔리에 국가에서 운영하는 발레학교가 하나가 있어요. 그 학교는 8년 동안 발레를 가르쳐 세계적인 발레단에 보냅니다. 쉽게 말하면 어려운 아이들, 예를 들어서 마약, 빈곤층, 창녀의 아이들이 입학할 수 있는 학교입니다. 절대 돈만으로 못 들어갑니다. 8년 동안 숙식을 해결해 줍니다. 학교 스튜디오도 그렇게 화려하지 않아요. 그래도 거기 있는 아이들이 ABT와 같은 세계적 발레단에 다 입단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춤추는 걸 봤는데 춤이 기가 막힙니다. 그래서 제 맘속으로 기회가 되면 우리나라도 이런 학교가 있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빈곤층 아이들한테 기회를 주는 일이 참 부러웠습니다. 그렇게 만든 작품입니다. 누가 이 작품을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제 마음으로 그냥 같이 하고 싶은 작품이었죠.

김채현: 이지현님, 추가 의견 궁금하신 점 있으신가요?

이지현: 저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효자이긴 하지만, 대표작 하면 다들 〈현존〉 이야기를 엄청 많이 하고 현실적으로도 대표작이라고 하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현존〉을 말씀하셨듯이 미국 생활, 미국에 대한 인상, 경험, 밑바닥, 뒷골목, 청춘의 어떤 힘 이런 것들을 함께 대비시키면서 이렇게 파워풀하게 락뮤직하고 같이 풀어내신 것 같습니다. 제가 볼 때는 지금까지 말씀하신 뮤지컬 같은 것들이 몇 번 좌절 되고 그래서인지 작품이 가다가 불과 몇 년 안 지나서 그런 분위기가 좀 많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라이프 이즈〉 같은 심도 있는 작품들도 나오기 시작하고 지금 말씀처럼 그런 외부적 여건에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닌, 즉 흥행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한국에 정착해서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렇게 고안된 작품들이 있는 것 같은데 미국에서 받았던 어떤 강렬한 인상을 담는 것이나 대중적인 작품을 만들려고 했던 그런 흐름에서 변화가 온 게 언제쯤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제임스전: 나이를 먹어서 그래요. 제 나이가 50이 넘어가니까 작품 만들 기회가 있으면 60대 넘은 나이를 생각하고 만들고 싶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그냥 막 점프 뛰고 도는 게 아니라 한 동작을 통해서 전달할 수 있는 움직임, 그리고 이제는 막 시끄러운 음악도 싫고 아름다운 음악 이런 것들을 원하게 됐어요. 솔직히 말해서 저도 이제 노년이랄 수 있잖아요. 지금 그런 작품들이 없어요. 제가 미국을 선호하는 게 아니라 미국에는 예술가들이 나이가 들어도 활동을 지속합니다, 쉽게 말해 제가 좋아하는 롤링스톤, 비틀즈, 거의 80대죠. 지금도 춤 엄청 잘 춥니다. 우리나라는 나이가 들면 잘 안 보이고 춤 공연 가면 다 젊은 친구들입니다. 우리들의 옛날 카펜터스, 사이먼앤가펑클, 핑크플로이드, 제임스, 로보 등등등 음악 같은 거 좋잖아요. 그런 음악으로 작품을 내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도 가면 정신이 없어요. 그냥 우리 나이에 맞게 좀 편하게 보시면서 옛날 생각도 하는 그런 작품들 말입니다.



 



이지현: 아주 간단한 질문입니다. 혹시 좋아하는 발레 안무가 내지는 눈여겨보고 있는 안무가가 있을까요? 돌아가신 분이나 현재 동시대에 같은 안무가,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는 안무가여도 상관없습니다. 안무적으로 고민을 많이 하시니 창작 고민을 하시는 와중에 혹시 오마쥬할 어떤 안무가나 또 눈여겨볼 안무가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제임스전: 저한테 영향 주는 사람 많죠. 조지 발란신을 비롯해서 로이 선생님, 피나 바우쉬 등등요. 저는 원래 피나 바우쉬 단체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제가 94년도에 국립발레단을 그만두면서 일부 오디션을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SBT만 아니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네요. 정신없이 했는데... 저 진짜 피나 바우쉬 단체에 가고 싶었어요. 저는 그런 작품을 좋아했습니다.

김채현: 좋아하는 안무가를 한 번 들어봅시다.

제임스전: 좋아하는 안무가 많습니다. 조지 발란신, 앨빈 에일리, 안나 소콜로우, 이리 킬리안, 피나 바우쉬, 마츠 에크, 요한 잉거, 크리스털 파이트 등등 그리고 모리스 베자르도 제가 있었던 단체니까요. 또 피나 바우쉬, 안토니 튜더 등 많죠.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요새 잘하는 김용걸님, 저하고는 좀 다르지만 안은미님도 좋아합니다. 안성수님도 나름대로 음악성이 돋보입니다.

이지현: 국내 작품도 자주 보시네요.

제임스전: 우리나라 안무가들에게서 좋은 점을 많이 봅니다.

김채현: 그렇군요. 국내 안무나 창작에 대해 느낀 점들은 뒤에서 잠시 듣도록 하겠습니다. 그보다 먼저 알고 싶은 것이 서울발레시어터 관련 사항입니다. SBT가 1995년에 창단됐죠. 그리고 제임스전님이 일선에서 물러나신 게 몇 해 되었지요?

 

- 이하 제임스전 심층 공개 인터뷰 제2편(춤웹진 10월호)으로 이어짐

 

2024. 9.
사진제공_제임스전, 춤웹진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