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비평시각 심층 공개 인터뷰: 김은희
우리춤움직임원리 연구자 김은희 심층 공개 인터뷰 제1편
  • 일    시
    2024. 09. 14.(토) 13:30 ~ 16:00
  • 장    소
    예술가의집(서울 대학로)

인터뷰이│ 김은희        

인터뷰어│ 채희완·김채현·김영희 

후   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춤비평가협회(춤비협)는 지난 9월 ‘원로·중견 춤작가 초빙 비평시각 심층 공개 인터뷰’로서 전통춤 안무가 김은희님을 초청하여 진행하였다.
인터뷰는 인터뷰이와 인터뷰어가 비공개로 진행하는 것이 통례이다. 이번 심층 공개 인터뷰는 공개된 자리에서 복수의 인터뷰어가 진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예술인 즉 춤작가에 대한 인터뷰이므로 비평시각이 중심이어야 한다. 이 프로그램은 춤비협에서 지난해 연말에 제안되어 올해 들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활성화지원사업으로 선정되었고, 이를 기준으로 춤비협 내에서는 지난 상반기에 춤작가 5인(배정혜·미나유·제임스전·안애순·김은희)을 선정한 바 있다. 이 프로그램은 올 연말까지 진행된다.
이 같은 유형의 심층 공개 인터뷰는 인터뷰의 일반적 관행과 형식을 탈피하므로 낯선 점이 있고 인터뷰이는 물론 인터뷰어에게도 사실상 선례가 없다시피 해서 그 형식을 모색하고 다듬어가야 할 것이다. 심층·공개·비평시각이라는 3요소를 춤작가와의 인터뷰에 녹여내어 춤작가의 면모를 가급적 충실히 드러내고 또한 공개 형식을 취함으로써 내용 면에서 객관성을 견지할 것이 요망된다. 앞으로 지속적으로 추진될 본 프로그램이 무용인들의 작업을 깊이 있게 재조망하고 비평의 토대를 다지는 데 이바지할 것을 기대하며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김은희님 초빙 인터뷰를 위한 패널로 채희완(민족미학연구소장)·김채현(〈춤웹진〉 편집장)·김영희(전통춤이론가), 3인이 정해졌다. 패널들은 김은희가 제공한 공연 및 비평 자료들을 숙지하고 사전에 비대면 예비 모임을 가져 이번 인터뷰의 주제를 몇 가지로 정하는 작업을 진행한 바 있다.
9월 14일 행사는 모더레이터를 겸한 김채현 패널의 사회로 참석자 소개를 간략히 진행한 후 본론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공개 인터뷰 취지에 맞춰 참석자들이 의견을 표하는 기회도 제공되었다. 김은희님 인터뷰는 분량을 고려하여 〈춤웹진〉에 나누어 게재된다. - 편집자

〈춤웹진〉 독자들을 위한 김은희 간략 참조 사항
경남 밀양 출생 / 경북예고 졸업 /
무용학박사(중앙대) / 박금슬·이매방 사사 / 김은희무용학원(밀양·서울) 대표 역임 / 밀양검무보존회 회장 / 우리춤움직임원리연구회 회장 / 유튜브 운영



지난 9월 14일 오후에 있은 춤작가 김은희 초빙 비평시각 심층 공개 인터뷰, 예술가의집, 서울 대학로, 한국춤비평가협회 주최



김채현: 저희가 기획한 춤작가 초빙 비평 시각 심층 공개 인터뷰 두 번째 시간입니다. 본론을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김은희님과 잠시 사전 면담 기회를 가졌는데, 그때 무슨 말씀을 하셨느냐면 오늘 인터뷰 마지막 순서에 결정적인 어떤 말씀을 하시겠다고 그러셨어요. “그게 뭡니까” 하니까 비밀이라며 간략히 밝히시겠다고 했습니다. 오늘 인터뷰가 마무리될 때까지 궁금하겠습니다. 오늘 그런 기대도 품으며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제가 먼저 질문을 드릴게요. 이 프로그램은 춤 작가의 심층 인터뷰 시간이니까 선생님이 그동안 춤생활을 해오시면서 아주 인상에 남거나 인상 깊었던 또는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고 싶은 작품을 포함해서 한 세 가지 정도를 짤막히 소개해주셨으면 합니다.


세 작품

김은희: 일단 편한 마음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서울올림픽 때 있은 ‘88 국제무용제인데, 그게 한국무용제전 제4회 때였어요. 제가 첫 작품 〈이 땅 저 하늘〉을 서울에서 내놓았죠. 제 나이 35살 때였죠. 정말 젊어선지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난 줄 알고 기가 넘칠 때였어요. 그때 작품 낸 게 가장 기억에 남아요. 당시 〈객석〉 잡지, KBS 〈문화가산책〉 프로그램의 엔딩 장면에서 첫 타이틀로 올라갈 정도로 좀 이슈가 됐었어요. 그다음에 1989년, 90년 계속해서 1년에 한 번씩 꼭 개인 발표를 했어요. 어디서 했냐면 문예회관(지금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했어요. 이 극장은 아무한테나 대관을 안 해주죠. 그 대극장에서 계속 개인 발표를 했었요. ’88 국제무용제에서 했던 걸 다시 했고, 그다음에 한 건 제 개인 공연인데 이건 뒤에 소개할게요. 그다음에 공식적으로 공연한 것은 〈질식〉이라는 작품이었어요. 지역간연합무용제가 4회째를 전북 전주에서 열었는데 제가 그때 서울 대표로 출품했던 작품 제목이 〈질식〉이었어요. 그 다음 93년에 제15회 서울무용제에 또 하나 출품했었어요. 이런 작품들을 내다 보니까 다 시대적인 얘기를 했고 그게 좀 제 성향인 것 같아요. 이쁜 춤 이런 춤을 춰야 한다는 당시 신무용이나 한국무용 계열 추세와는 달랐던 세 작품이 가장 중요하고 그리고 내가 제일 아끼는 것은 〈유관순〉이라는 작품인데, 그 원래 제목이 〈하늘 가까이 두 손 들어〉였어요. 그 작품은 91년, 92년, 93년 연속해서 서울 아르코대극장, 대구 문화예술관대극장, 그다음에 진주 문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올렸어요. 그 후 93년도 서울무용제까지 하고 ‘난 이제 창작은 끝이야. 난 이제 전통춤을 출 거야’하며 창작을 떠났었어요. 근데 박사학위를 작년에 받게 되어서 ‘반드시 창작을 해서 그 창작 과정을 연구 소개해야 된다’는 학사 규정에 따라 〈순환〉이라는 창작품을 내놨습니다.

〈유관순〉 1991년 공연 및 〈밀양덧배기춤〉 복원 공연 팸플릿 (C) 김은희



김채현: 네, 이전 작품들을 단서로 오늘 말문을 열었습니다. 이 인터뷰 자리는 활동 명세를 확인하기보다는 한 개인이 일생에 걸쳐 춤과 작품을 어떻게 추구해왔는지 비평적 시각에서 대화를 나누는 자리입니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이제부터 선생님 활동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채희완: 이 행사 준비 과정에서 한국춤비평가협회에서는 여러 춤작가들 가운데 근현대 한국춤의 지나간 또는 다가올 시기에 비추어 춤비평가협회 단위에서 거론해 볼 한 분으로서 김은희 선생님을 선정하였지요. 김은희 선생님은 창작춤, 창작 한국춤, 현대춤의 새 창작 세계를 열어놓기보다는 전통춤 세계를 깊이 천착하고 그것을 본인의 중심 과제로 생각하고 앞으로도 그것과 함께 하겠다고 언급하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았습니다. 근현대 우리 춤의 역사를 더듬어 볼 때 전통춤과 겹치는 그런 얘기가 개인 단위로 중요한 한 분으로서 김은희 선생을 추천하고 정했던 것입니다. 오늘 비록 짧은 시간이나마 진행해보면, 개인적 삶의 여정일지라도 그의 생애가 바로 “전통춤의 시절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의 핵심적인 한 증표가 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그 개인의 삶과 연관해서 춤 얘기를 하는 것이 오늘 큰 주제가 될 것이지요. 이와 함께 제가 비평 시각으로 김은희 선생님을 바라보고 싶은 두 가지 점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보여주시고 있어 확인되는 한 가지는 어느 누구보다도 강인한 춤의 기질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살아나가는 것과 춤춘다고 하는 것”이 분리돼 있지 않고 실천해온 일목요연한 증표입니다. 이 두 가지를 오늘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특히 김은희님의 춤에는 우리 춤의 지역 문화적 특성이 스며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리는 전라도라고 하면 영남은 춤이다라고도 하는데, 지역문화적 특성이 섞인 그런 풍으로서 선생님이 가졌고 또 보여줘왔던 그 영남풍의 무엇이 춤의 배경으로 자리잡게 됐는지, 무대 체질적이고 마당 체질적인, 사랑방적이고도 프로시니엄 무대적인 두 가지를 아울러 표현해 오신 그 과정을 오늘 듣고 싶습니다.

김채현: 네, 그런 넓은 취지에서 선생님이 춤에 입문하실 때 큰 영향을 받은 일부터 말씀을 풀어내 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선생님이 그런 작품들을 만들 적에 한국무용 또는 한국춤의 원리 그것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는 말을 종종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춤에 관한 관점을 형성하는 데 있어 많은 요소가 작용했을 것입니다. 이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차곡차곡 구체적으로 소개해보았으면 합니다. 우선, 밀양에서 태어나셨고, 밀양에서 춤을 익히고 하는 과정에서 박금슬 선생님께 영향을 가장 깊이 받은 듯합니다. 선생님이 운영하는 유튜브에도 박금슬 선생님 춤 소개가 상당히 많이 나옵니다. 박금슬 선생님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그 점부터 소개해보시지요.


박금슬, 춤동작

김은희: 박금슬 선생님께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박금슬 선생님은 춤 이전에 그 인품과 정직성, 절약 정신 그런 점들에서 저에게 굉장히 감동을 주신 분이세요. 그리고 무대에서 춤을 절대로 이쁘게 추게 만들지 않았어요. “올바른 기둥을 세우고 뿌리가 천천히 해야 한다”. 중학생들이 얼마나 알았겠습니까. 그렇지만 그 영향이 지금까지 계속 지탱되는 것 같습니다.

김채현: 박금슬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가 중학교 시절로 알고 있습니다만...



밀양아리랑 공연 후 박금슬 선생님과 출연자 일동 ⓒ김은희



김은희: 1967년, 제가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당시 밀양여자중학교에서 3대 아리랑 중의 하나인 밀양아리랑 원형 발굴을 위해 서울에서 ‘우리 시대에 가장 유명한 선생님을 모시고 온다’고 했어요. 우리는 그런 줄 몰랐지요. 밀양에서 발행한 『향토지』나 『밀양지』 같은 자료들을 보면 1967년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춤꾼인 박금슬 선생님을 모셔서 밀양아리랑을 원형 발굴 무용극을 했다고 소개되었습니다. 옛날 밀양 부사의 딸로서 억울하게 죽은 아랑의 원혼을 달래는 데서 유래했다는 밀양아리랑은 지역 여성의 정절을 기리는 노래입니다. 그 노래로 박금슬 선생님이 춤을 만들었고 저는 동네 사람으로 출연했어요. 그때 남자 주인공은 지금은 원로이신 국수호 선생님이 맡았습니다.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경연 나갈 적에도 이 작품을 공연했었지요.


김채현: 박금슬 선생님께 춤을 몇 년 수련 받았던가요?

김은희: 선생님은 2년 동안 밀양에 계시다가 서울로 돌아가셨고, 안암동에서 무용학원을 하셨었어요. 그리고 저는 경북예술고등학교를 갔고 그래서 선생님을 뵈러 서울에 왔었고요. “선생님 저 졸업하면 꼭 오겠습니다”고 했는데 선생님은 외국을 떠나셨고 9년 만에 돌아오셨어요. 그후로 돌아가실 때까지 저는 끝까지 선생님께 공부를 했어요.

김채현: 그럼 박금슬 선생님께 배우거나 익힌 게 춤동작의 원리였습니까?

김은희: 이론적으로 많이 말씀하셨는데, 사실 그때는 제가 참 모를 때였어요. 선생님은 우주 원리라든지 춤을 분석하는 것 이런 식으로 많이 설명하신 것 같아요. 그리고 선생님께 배울 때는 어떤 기본을 집중적으로 배우지는 않았어요. 그냥 순서로 진행해서 수업을 쫓아갈 수 있을 정도였어요. 아주 깊이 있게 배울 나이가 아니었어요. 선생님께서는 의상 한 벌로 여러 장면을 소화할 수 있는 지혜도 알려주셨고 춤을 뿌리부터 단단하게 하는 방법으로 출 수 있도록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체를 바르게 쓰고 하체부터 축이 잘 만들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며 내몸을 먼저 알게 하는 방법이라는걸 나는 깨달았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 저한테 마지막으로 남겨 주신 작품이 〈호적살풀이〉였지요.

김채현: 〈호적살풀이〉는 어떤 춤인가요?

김은희: 호적으로 연주하는 시나위 음악에 맞춘 즉흥적인 춤이었습니다.



박금슬 지음, 『춤동작』 표지 ⓒ김은희



채희완: 81년도인가요? 박금슬 선생님의 『춤동작』이라는 책이 나올 때 저에게 충격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춤사위에 관한 의의는 진작 듣고 있었지만 1974년도에 김백봉 선생님이나 조동화 선생님, 몇 분이 춤 용어를 좀 정리하자는 그런 얘기 끝에 공식적으로 위원회가 구성돼서 『춤사위』라는 이름으로 책자까지 낸 적이 있습니다. 그 후 별다른 것이 없다가 박금슬 선생님의 『춤동작』 책이 나왔는데, 이전엔 볼 수 없었던 정말 새로운 면모였습니다. 그 면모라는 것은 박금슬 선생님의 춤의 세계관과 또 그가 익혔던 우리 춤 중에서도 궁중적인 것도 포함시키지만 불교춤이라든지 민속춤이라든지 탈춤이라든지 더 나아가서는 그분이 일제 때 잠시라도 일본 가서 배운 근대춤 그리고 발레 등등 그 기초에 해당되는 것들을 모두 종합해 용어를 정하면서 만든 책이지요. 저는 그 과정을 박금슬 선생님 말씀으로 직접 들은 바가 있습니다. 제가 한때 청주사범대학에 있었는데 2년 반 동안 박금슬 선생님과 함께 근무하였어요. 그래서 그분이 얘기하신 것 그리고 그분이 ‘앞으로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신 것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이와 연관해서 김은희님이 박금슬 선생님으로부터 ‘춤의 과학성’이라는 용어까지 말씀을 들으면서 수행해왔던 그것을 좀 구체적으로 듣고 싶습니다. 우리 춤사위, 우리 춤동작, 우리 춤 언어에 대해 박금슬 선생님과 함께 공부하고 배우시면서 얽힌 이야기와 함께 구체적인 어떤 사실들도 좀 소개해주셨으면 합니다.

김은희: 제가 박금슬 선생님께 공부할 때는 우선 중학생이었고 돌아가실 때는 20대였어요.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6개월 전 1982년 8월에 이 『춤동작』이라는 책이 나왔어요. 돌아가시기 전에 저희들이 다 있는 자리에서 민속춤 연구자 정병호 선생님께서 박금슬 선생님을 인터뷰해가시는 걸 보고 더 많은 공부를 했죠. 선생님 『춤동작』 책에서 우선 중요한 것은 춤 명칭이죠. 당시는 춤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을 때예요. 다들 무용이라는 단어를 썼고요. 이건 조금 사적인 얘기입니다만, 그때 춤 관련 잡지 발간에 관계하시던 조동화 선생님께서 “춤이 뭐냐고 촌스럽게”라고 말씀하셨대요. 그렇지만 그분이 1976년 잡지를 발행하기 시작하면서 『춤』이라고 이름을 붙여셨지요. 춤이 옳았죠. 박금슬 선생님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이시이 바쿠 제자였고, 최승희 선생님, 조택원 선생님도 다 제자들이셨죠. 『춤동작』 책을 보면, “50년대 이후 모두들 무용 용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책 제목을 『춤동작』으로 했다... 우리 고유의 춤을 정말 순수한 예술로 끌어올려 모든 사람에게 공감과 아름다움을 줄 수 있는 삶의 청량제 역할로 남기고 싶었다”고 합니다. 선생님의 정신을 제가 닮으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선생님이 춤동작 명칭을 붙이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궁중무용일 경우는 술어나 명칭이 한문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별문제가 없으나 민속무용의 경우는 대부분 구전된 명칭이기 때문에 그대로 한글을 사용하였고 다만 불교서적이나 불가에서 유래된 것은 또 그대로 한자말로 나타내었다.” 그러면서 선생님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몸 쓰는 방법을 여기서도 이미 소개하셨어요. 선생님 『춤동작』 44페이지를 보면 “하체동작에서 발을 들 때 반드시 발끝을 떨어뜨려서 들고, 발을 내리때는 발끝으로 뒤축을 밀면서 발가락을 위로 올리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지금도 제가 강의를 하고 사람들을 많이 가르쳐보면 ‘한국 무용은 무조건 구부려야 한다’ ‘무조건 발가락을 세워야 한다’ 이렇게 인식하는 것이 강하고 또 거의 그렇게 춤을 추고 있어요. “불편하지 않니?”라고 물으면 “불편해도 한국 무용은 이렇게 하는 겁니다”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러면 “너 점프 한번 뛰어봐라. 발가락 들고 뛰니? 발가락 내리고 뛰잖아. 그럼 착지해 봐. 발가락으로 내리니? 뒤꿈치로 내리잖아. 그거야.” 그래서 저는 춤을 추지 않고도 춤이 되게끔 지금 강의를 하는 중인데, 박금슬 선생님의 이 한마디에서 많은 것들을 터득하기 시작했죠. 그러다 보니까 자연히 저에게도 발레가 기본이 되더라고요.

채희완: 박선생님은 동작의 기본 자료를 일제강점기 때 1930년인지 40년대인지 “금강산 어디의 스님이 주신 자료를 받았다”고 얘기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일본 가서 발레 동작도 모던 댄스의 동작도 익히시고요. 제가 잠시 그 분에게서 춤동작을 익히긴 했는데, 굿거리 장단인데도 불구하고 그 춤명칭이 일반 사전의 올림말처럼 명확하게 정리되어서 많이 놀랐습니다. 궁중춤의 경우 ‘낙화유수’라든지 ‘화전태’라든지 상징적이면서도 고아한 어떤 풍정, 풍경을 얘기하는 식으로 춤이름을 붙이고 상징적 의미마저 부여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러한 명칭을 쓰지 않고 동작에 합당한, 말하자면 발레 동작의 명칭들처럼 과학적 정확성을 기초로 동작명을 부여한 점은 저에게 일종의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탈춤을 배우면서 탈춤의 여러 동작 이론들과 그것이 가진 명확성을 익히 이해합니다. 마는 『춤동작』 책이 보여주는 동작 명칭의 정확성은 새롭게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특히 김은희님이 2021년도에 하신 공연(〈김은희 춤인생 60년〉)에 맨첫 프로그램으로서 그분의 동작 이름을 내세우면서 여러 사람이 군무식으로 진행하였는데 그것을 보며 유심히 생각해봤습니다. 60년 춤인생을 정리하는 무대에서 춤사위 이름으로 진행한 레퍼토리에는 어떤 생각이 담겼을 것인가? 그것은 박금슬 선생님의 춤에 대한 생각과 김은희님의 춤에 대한 생각이 어떤 면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춤무대에서 춤사위 이름 나열의 공연을 한 15분간 군무로 진행해서 이게 무슨 작품인가 하는 그런 생각이 한순간 들면서, 그러나 한 편 그 작품 의도에 감동받았습니다.

김은희: 네, 감사합니다. 조금 더 진행할게요. 2021년 그 춤인생 60년 공연에 채희완 선생님께서 그날 오셨다는 걸 저는 이 자리에서 처음 알게 되었고, 그리고 직접 대화도 오늘 처음입니다. 박금슬 선생님 『춤동작』 용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합니다. 제가 지금 이매방 살풀이 우수 이수자로 선정돼서 무료 강습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매방 선생님 살풀이로 무보를 써야 하는데 이매방 선생님 용어와 설명이 얼마 없어요. 안가랑, 양우선, 잉어걸이, 좌우걸이 등... 몇 개 없거든요. 이걸 도대체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표현할 수 있어요? 그래서 ‘안가랑이 뭔데?’ 이매방 선생님 제자들에게 안가랑을 설명해보라고 그러면 어떤 사람은 “그거 한 다리를 딛고 한 다리 드는 거야.” 그리고 “손은 치마를 잡는 거야.”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있고요. 또 어떤 사람은 “아니야 한 손은 내려가고 한 손은 올라가야 돼”. 그래서 제가 간단히 “그러면 한 손은 치마를 잡으면 안가랑은 축이 있는 발에 축을 세우고 발이 들리면 발바치, 손은 인체(손을 허리에 감기)야.” 그래서 박금슬 선생님 용어로 “발바치, 인체라고 하면 돼.” 그러면 또 한 사람은 “안가랑은 그게 아니야. 한 손은 내려가고 한 손 올라가.” 그러면 “한 다리를 들었으니까 발바치이고 한 손 내려가는 건 수제하(手除下)야.” 한 손을 드는 중이면 홀거수, 한 팔을 드는 중에도 홀거수, 양팔을 벌려서 들면 팔(八)수, 양팔을 옆으로 뻗쳐 들면 사수이고, 양팔을 앞으로 나란히 뻗치면 서수... 이렇게 돼 있거든요. 너무 간단한데 우리가 모르는 거지요. 그래서 저의 컨설팅이 “선생님 그 짧은 기간에 어떻게 그 무보를 다 씁니까? 이매방 선생님 춤사위 중에서 중요한 핵심만 있는 거 몇 개만 하세요. 그렇게 보고서를 올릴게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없는 와중에 막상 이매방 선생님 것 몇 개를 써서 무보를 만들어 보려니까 할 방법이 없어요. 박금슬 선생님 용어가 안 들어가면 안 돼요. 다른 선생님도 용어를 많이 내놓지마는 박금슬 선생님처럼 이렇게 형체적인 것과 또 한문을 해석한 것과 또 지방의 사투리를 쓴 것, 이렇게 구체적으로 해놓으신 분은 없기에 이 『춤동작』의 용어들은 갈수록 더욱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채희완: 2021년의 60년 춤인생 기념공연 중에서 아까 말씀드린 그 첫 프로그램인데요. 오늘은 춤사위 용어 또는 춤사위라는 말이 춤동작과 어떻게 다른가 그런 얘기할 자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춤에 가장 원천적인 것은 누구나가 다 인정하듯이 호흡, 기호흡, 단전호흡 이렇게 얘기하는데 이게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저는 디딤새라고 봅니다. 근데 마침 그날 몇 가지 동작을 단출하게 분류하여 놓고 이렇게 이렇게 하면서 디딤새의 여러 가지 양태를 보여주시고 회전 하는 것, 깡충 뛰는 것, 여러 디딤새의 모양들을 프로그램에서 던져주셨습니다.그것은 제가 듣기로 궁중에서의 족도라든지, 또 불교 의식 중에서의 디딤새라든지, 무속춤에서의 여러 가지 형태의 걸음새들, 특히 탈춤에서는 5, 60가지나 되는 그 발걸음의 명칭들을 김세중(무세중) 선생님이 명명을 했지만, 참 다양합니다. 김은희 선생님은 그날 “박금슬 선생님과 더불어서 프로그램의 내용을 우리 춤기본을 가지고 문을 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디딤새에 갖가지로 펼쳐낸 그것이 그런데 저는 버선발 디딤새에 너무 한정된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짚신발로 걷는 길일 수도 있고, 궁중무처럼 장화 신고 디디는 것도 있고, 뭐 맨발로 디디는 것도 있겠고, 요즘 같으면 스타킹 신고 부츠도 신고 디디는 디딤새도 틀림없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다양한 형태의 디딤새 밑에 깔려 있는 공통적인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정말 궁금하고 알고 싶었던 것이죠. 이것은 어느 나라 춤에서나 다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체의 동작이 상체 온몸의 동작들을 좌지우지한다, 이렇게 되지 않습니까? 요즘 춤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춤 식으로 팔 움직임, 상체 동작을 중심으로 해서 그 움직임을 따라서 작품 발표가 있는데, 김은희님은 60년을 기념하는 데서 하체 중심에서 특히 디딤새에서부터 출발하는 근거를 박금슬 선생님 그리고 이매방 선생님의 원천 토대 위에서 시작했던지 것이지요. 그것을 저는 참 소중하다고 보고 정말 김은희 선생다운 남다른 경례(敬禮)라 생각했습니다. 김은희 선생에게 박금슬 선생님의 의미는 유별나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둘러보면 우리 근현대 전통춤 또는 근대춤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 박금슬 선생님의 의미가 아직까지도 제대로 잘 드러나 있지 않은 듯합니다.다행히 60년대, 70년대에 박금슬 선생님이 『춤동작』 책 말고 직접 발표하신 공연 종목 중에서 저는 〈번뇌〉라는 작품을 본 적이 있습니다. 70년대에 공연을 하셨지요. 거기에는 문둥춤이 있었는데요. 탈춤에서 보여주는 문둥춤하고는 그 의미, 배경에서 다른 점이 많습니다. 그야말로 근대춤이었습니다. 근데 우리는 그분의 춤을 아직도 전통춤이라는 시각으로 국한해서 보는 견해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제가 좀 길게 얘기한 것은 ‘전통춤과 근대춤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어떻게 다른가’ 그에 관한 얘기입니다. 오늘 이 자리는 마땅치 않지만 한성준 선생님의 수많은 춤들을 우리는 전통춤의 보고라 봅니다마는 저는 근대춤의 시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과 연관해서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것에 제가 덧붙여 보겠습니다. 신무용이라는 개념과 선생님이 죽을 때까지 여전히 견지해서 ‘나는 이렇게 이 길로 가겠다’라고 생각하시는 전통춤의 근현대성과 또 지금 현재 창작 현대춤의 여러 정황들과 생각이 좀 부딪히면서 선생님은 살고 계실 텐데요. 그것을 제 질문의 마지막으로 하겠습니다.

김채현: 그에 대해 지금 김은희 선생님이 1~2분 내로 답을 압축할 수는 없겠지만, 오늘 이 시간 내에 종종 이야기하기로 하고, 우선 간략히 말씀을 듣겠습니다.

김은희: 일단 그 〈번뇌〉 얘기를 하셨으니까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박금슬 선생님은 스님의 양녀였고 스님의 부인이었어요. 지방을 다니면서 많은 토속적인 춤들을 배웠잖아요. 고성오광대의 기본 춤을 보면 다 박금슬 선생님 동작이에요. 박금슬 선생님이 고성오광대에 가서 춤을 가르치시고 고성오광대의 문둥춤을 배우셨어요. 그리고 자은 스님과 인연이 있으셨지요. 자은 스님은 춤추기를 너무 좋아하셨고 마지막에 하와이로 가셨어요. 저는 1986년에 박금슬 선생님 작품에서 태초의 여자 주인공을 했고 자은 스님의 파트너를 했는데 그 스님 신체가 춤을 출 수 있는 몸이 아니었어요. 약간 뇌성 마비 같은… 그럼 이걸 어떻게 극복해서 작품을 줄 것이냐는 뜻에서 〈번뇌〉라는 작품이 만들어진 거예요. 인기 있은 작품인데, 이런 사실을 모르시는 분들이 아주 많죠. 그러면 ‘박금슬 선생님 춤은 전통춤이냐’ ‘박금슬 선생님은 전통 무용가냐, 신무용가냐, 근대 무용가냐’ 이런 말씀을 하시는데, 저도 사실은 신무용가도 아니고 창작무용가도 아니고 전통춤꾼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원리는 하나니까요. 근데 박금슬 선생님은 이시이 바쿠한테 최승희씨하고 현대무용을 했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 ‘이 현대무용을 가지고 어떻게 풀어내느냐’가 문제겠죠. 그런데 박금슬 선생님은 이시이 바쿠한테 현대무용을 하셨으면 발레도 분명히 했을 것이고 그러면서 현대무용을 했을 거고요. 그래서 한국에 와서 각 토속적인 춤과 또 무대예술가하고 작업을 많이 하다 보니까 박금슬 선생님을 그냥 전통춤꾼이라고 해도 안 되고 근현대 춤꾼이라고 해도 안 되고 모두를 다 아우를 수 있는… 그러니까 과거에 공연을 가면은 다른 분들이 “나는 대궐춤할 거야” “나는 살풀이를 할 거야” “나는 뭐 할 거야” 이러면서 다 차지해버려서 정작 박금슬 선생님은 6∙25 때 군인 위문 공연 가면 출 것이 없었대요. 그래서 항상 〈번뇌〉를 추셨대요. 그러다 보니 선생님 인격까지 모욕당하는 그런 일이 잦으셨대요. 말씀드리려면 더 있습니다만, 여기까지만 할게요.

김채현: 시간 여유가 없어 유감스럽게도 오늘은 이 정도에서 멈춰야 하겠습니다. 김영희 선생님, 박금슬 선생님과 연관해서 질문이나 궁금하신 점 있으신가요?

김영희: 박금슬 선생님 얘기를 별도 자리에서 더 듣고 싶습니다. 지금은 김은희 선생님의 자리인데 박금슬 선생님을 지금 상당히 많이 한 것 같아서요. 2021년으로 건너가 보겠습니다. 그 공연에서 선생님이 만드신 〈김은희 즉흥무〉하고 〈운초 북놀음〉 있잖아요. 여기 청중 분들은 아마 다 보셨을 텐데, 그 작품의 모티브, 만든 계기가 우선 궁금합니다.

김은희: 박금슬 선생님한테는 남성 제자가 굉장히 많아요. 제자가 거의 다 남자들입니다. 그러니까 농악을 하시는 분들이 무용과를 가기 위해서 또 많이 다녔죠. 그래서 민속촌에서 농악을 하러 지방에서 고등학생이 오면 무용과에 보냈고 그래서 지금 무용가가 많이 되었어요. 박금슬 선생님 춤은 좀 그래요, 남성적이다. 아주 남성적이고 고성오광대에 가서 경상도 춤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박금슬 선생님 성품과 어쩌면 제가 좀 비슷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래서인지 내가 안무를 하면 사람들이 “남자들이 추기 좋은 춤이야”고 다들 그러거든요. 지금 말씀하신 즉흥무도 사실은 남성들이 추기 좋은 춤이거든요. 그 춤들에는 박금슬 선생님 춤사위와 이매방 선생님의 춤사위와 김은희의 성품이 그대로 묻어 있어요. 제가 그 작품을 하기 힘드는 게 그냥 즉흥무라서 할 때마다 틀리거든요. 그래서 그냥 김은희의 성격을 그대로 나타낸 그런 나만의 ‘내가 어디 가서 막춤을 쳐도 그렇게 추지 않았을까’하는 마음에서 제목을 〈김은희 즉흥무〉라고 한 겁니다. 다음에 또 이걸 어디 가서 공연하면 또 달라지겠죠.

김영희: 즉흥으로 춤추신다 하더라도 음악 구성을 기본 틀로 잡는다든가, 이제 선생님이 춤추고자 하는 즉흥무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즉흥으로서 이 장면 이러한 정조 이런 것들은 꼭 보여주고 싶다 이런 게 있으실까요?

김은희: 네, 그러면 음악을 왜 그렇게 썼냐면 우리나라 즉흥곡이 뭐예요? 승무는 경기대풍류잖아요. 악보가 엄연히 있어요. 그러면 살풀이는 시나위 즉흥곡이에요. 그때 악사가 누가 오느냐에 따라서… 그래서 이제 호적 살풀이 쪽으로 음악이 갔고요. 그러니까 나중에 자진굿거리도 그런 식으로 그냥 악보가 없는 즉흥적인 곡으로 연주할 수 있고 장구만 있어도 되는 것이고 아니면 악기가 한 개만 있어도 되고 그냥 입장단 해도 되고요. 음악을 그렇게 선정했어요. 너무 형식적인 것보다는 중간에 제가 발놀음을 조금 하고 싶다면 거기에 어울리는 엇모리 장단이라든지 그런 것을 조금 넣었었고요. 그것도 다음에 음악이 또 바뀔 수도 있어요.
 이제 〈운초 북놀음〉인데, 중요한 얘기에요. 이매방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의 좀 예민한 얘기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저작권 문제가 제기됐어요. 이매방 선생님의 삼고·오고무 저작권 문제이지요. 이매방 선생님의 99년도 고희 무대의 그 삼고무에서 제가 센터에 섰어요. 진유림 선생님하고요. 그래서 그 영상이 너무 자랑스럽잖아요. 저는 삼고무를 또 한 번밖에 한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그걸 유튜브에 올렸더니 삭제가 된 거예요, 사위 분에게 신고를 당했지요.

김채현: 김은희 선생님이 운영하는 유튜브에 올렸더니 신고당했다는 말씀이시죠?

김은희: 네. 그렇게 올렸더니 삭제를 당했어요. 삼고무와 오고무는 그때부터 돈 내고 춰야 되는 춤이 되었고, 제가 출연한 것도 허용이 안 되더라고요. 그럼 다른 선생님들인들 어떻게 하겠어요? “안 하면 그만이지” “그래? 그럼 나 더 멋진 것 만들어봐야지.” 하는 식이 되겠죠. 예술이라는 게 뭐예요? 언제든 공유할 수 있어야 예술인데 지금 우리 이매방 선생님같이 제일 훌륭한 분들이 이 저작권 때문에 자료가 사장돼 가고 있잖아요. 그래서 제 아들은 알지만 그날부로 북을 집으로 옮겨 1년 동안 구상하고 제 호인 운초를 넣어서 만들어낸 작품이에요.

김영희: 보통 다른 오북춤은 자진모리부터 하거나 그러는데, 선생님은 자진모리부터 하지 않았어요. 장단 구성을 왜 그렇게 했는지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김은희: 그건 왜 그렇게 했을까요? 무슨 뜻이 있은 것은 아니에요. ‘남들이 안 하는 짓을 하자’. 제가 터벌림 음악을 너무 좋아해요. 제가 그때 춤을 너무 못 춰서 영상에서 삭제했지만 유튜브에 있을 거예요. 서울무용제 할 때 제가 ‘욕망의 춤’을 터벌림 장단에 춤을 췄어요. 그다음에 사물놀이에서 제일 많이 쓰는 게 뭐예요? 별달거리. 아무도 안 하는 짓이잖아요. 그 이후에 삼고무가 많이 나왔어요. 그래도 제가 쓴 장단 구성은 아무도 안 쓰더라고요.

김영희: 알겠습니다. 이제 이매방 선생님에 대한 얘기를 좀 해보면 어떨까요.

김채현: 그 전에 잠시 아주 간략히 소개드릴게요. 박금슬 선생님 『춤동작』 책을 제가 그 즈음에 구입했었는데, 초판이 양장본이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만, 어쩌다 분실했어요. 아무튼 그 책을 보는 순간 상당히 분석적이다, 그리고 개념화 작업을 할 줄 아는 무용가구나 하는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거기에다 『춤동작』이라는 제목 자체도 얼마나 선명합니까? 아주 간단명료하고, 또 이분이 뭔가 한국말을 기반으로 기본을 세우는 그런 분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낀 점을 오늘 소개할 수 있겠습니다. 박금슬 선생님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고 이제 이매방 선생님으로 넘어갈까요?

김은희: 저도 잠깐 소개할게요. 박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우리가 금슬회라는 단체를 결성을 해서 추모 공연을 한 3주기까지 했죠. 3년상을 치른 거죠. 그때 이 책을 제가 한 30권을 사서 나눠줬고, 또 인터넷에서 중고로 구해서 100권을 제본하여 제 제자들한테 주고 있어요.


강석 선생에 대한 기억


김채현: 이매방 선생님으로 넘어가기 전에 김은희의 외삼촌이셨던 강석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도 했을 텐데요. 채희완 선생님 궁금하신 게 있으시지요?

채희완: 우선 강석 선생님에 대한 어릴 때 옛 추억부터 얘기하셔도 좋겠습니다.

김은희: 사실은 저는 강석이라는 발레리노가 제 외삼촌인 줄을 어릴 때는 몰랐어요. 왜냐면 저하고 17살 차이가 나는데 제가 태어나서 아장아장거릴 때 외삼촌은 고려대 국문학과 학생이셨죠. 외갓집은 제 기억으로는 할아버지부터 전부 다 교장 선생님이셨거든요. 그 강석 외삼촌은 막내 외삼촌인데 강한석, 기석, 광석이에요. 광자 빼고 강석으로 예명을 썼고, 저는 몰랐죠. 그때는 밀양에서 아랑제 행사 때 연극도 하고 그러면서 삼촌이 한 번씩 왔다 갔다 한 정도였어요. 제가 경북예고에 입학할 때 유학가셨으니까 제가 언제 뵈었겠어요.
 근데 하루는 제 오빠가 동아일보 신문을 들고 와서 우리 엄마한테 “엄마, 강석아재(삼촌)가 신문에 크게 났어. 발레리노 강광석 귀국”이라 했어요. 제가 경북예고를 막 졸업하고 이제 대구 백년욱 선생님 밑에서 춤 공부를 더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서울의 시민회관 지금 세종문화회관에서 콩쿠르에 참가하려고 서울에 갈 때 큰 형인 강한석 외삼촌이 편지를 하나 써주셨어요. “강석이가 서울에 있으니까 너가 만나봐라.” 구구절절이 “우리 은희를 잘 키워라” 어쩌고저쩌고 이렇게 써주셨죠. 당시 예그린악단 안무자로 계셨어요. 또 TV 방송 안무자로 우리나라에서 재즈 발레를 최초로 갖고 들어오신 겁니다. 그러니까 뮤지컬 쪽을 주로 많이 하신 거죠. 엄청 바쁘신 시간에 저를 찾아오셨어요. 그래서 제가 콩쿨에서 추었던 춤도 보셨어요. 그러다 하시는 말씀이 “은희야, 너는 춤을 이렇게 잘 추는데 왜 이런 시시한 콩쿨엘 나왔어?” 웬만하면 상타는 그런 콩쿨이었던 거예요. 제가 뭘 알았겠습니까.
 그럼 저는 어떻게 해요? 그때 예고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야 되는데, 서울 이남에 무용과는 하나도 없었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고향에 주저앉은 겁니다.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제 춤을 한 번도 안 보셨습니다. 강석 외삼촌이 경희대에 그때 강사로 계셨어요. 외삼촌이 미국에 유학을 하고 있는데경희대 안재승 선생님이 “경희대학교 발레 교수 자리가 비었으니까 너 돌아와”라고 하셔서 돌아오신 줄로 압니다. 안재승-김백봉 선생님 집에서 기거를 하시면서 지내던 시절이었죠. 당시 제가 “예고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지금 미루고 있다. 지금 아직 2월 말이고 3월이니까 000예대라도 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그랬더니 외삼촌이 말렸어요. “아니야 거길 가면 에샤페부터 다시 배워야 하니까, 내가 내년에 경희대 교수로 가게 되면 그때 경희대를 생각해봐.” 그래놓았는데, 그해 7월에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김은희는 어쩔 수 없이 외삼촌이 받아준 김백봉 선생님의 추천서를 갖고 무용학원 인가를 받았어요. 당시에는 무용학원 인가나 무용협회 회원 가입에 추천서가 있어야 됐어요. 박금슬 선생님 돌아가시고 추모 공연하고 박 선생님 제자이자 양아들이던 한보성 선생님이 추천서를 써주셔서 무용협회 회원이 되었지요. 한보성 선생님은 박금슬 선생님 제자들 모임인 금슬회 회장도 맡으셨어요. 아무튼 강석 외삼촌이 받아주신 그 추천서로 밀양시 교육청에 신고를 하고 무용학원을 하게 되었죠. 외삼촌 돌아가신 후 김은희가 홀로서기로 해왔는데, 한편으로 만약에 삼촌이 살아 계셨으면 나 지금 뭐 하고 있을까? 발레를? 재즈댄스를 하고 있을까? 생각나곤 합니다.

김채현: 그렇죠. 저도 그 생각이 드는 게 강석 선생님이 안 돌아가시고 김은희님이 계속 사숙하면서 대학에서 춤 공부를 했다면 오늘까지 한국 무용 계열 이런 춤을 했을까? 그렇지 않으면 발레에 어떤 신기원을 내는 그런 활동을 했을까?하는 가상적인 연상이 들어요.

채희완: 김은희님의 특별한 과거인데요. 강석 선생의 삶의 흔적, 그분의 더할 나위 없이 열정 어린 춤에 대한 생각을 한번 되새겨 보자는 것이 오늘 심층 인터뷰에 제가 나온 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제가 중3인가 고1 때 강석 선생을 직접 만났는데 말하자면 무용가라는 분을 처음으로 가장 가까이에서 본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미국에서 2년인가 무슨 공부를 하셨는지 몰라도 여러 공연물을 보고 깨알같이 써놓은 수많은 팸플릿들을 저한테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두 가지를 할 것이다. 하나는 한국에서의 현대춤을 하겠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밀양춤을 하겠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그 당시 저는 밀양춤이 어떤 내용인지, 그리고 현대춤이 무엇인지 생각을 못했습니다.
 당시 1960년대 후반에 여러 발레 영화가 한국의 영화관에서 많이 상영됐을 때인데, 특히 칼멘이라든지 칼송의 신작 안무들이 영화화되어 더러 보았을 때였는데, 그런 인상들과 그 강석 분의 인상이 겹쳐졌습니다. 열정적인 그런 것이었는데요. 그분이 두 가지를 하겠다고 하는 것 가운데 첫 번째 것은 그 당시에 텔레비전에 나오는 백댄싱 안무자로서, 이화여대 무용과의 초창기에 현대를 가르친 “한익평 선생의 뒤를 따라 내가 하겠고, 또 학교에 들어가서 내가 생각하는 현대춤을 하겠다. 그 토대는 현대발레이다”고 제가 들었습니다. 현대발레의 선구작인 〈녹색의 테이블〉 안무자 쿠르트 요스의 얘기를 처음 듣고 저는 ‘그런 분도 계시구나’만 들었지 잘 몰랐었지요. 이 현대적인 과제를 몸으로 그대로 얘기해 주는 그것을 작업하겠다는 것이었지요. 또 조금 나이 들면 밀양춤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와서 ‘ 강석 이분이 하고 싶었던 것이 어쩌면 한 절반은 김은희 선생님이 하고 계시는 게 아닌가’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석 선생은 잊힌 인물입니다. 37살 아까운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 근데 그분이 밀양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대 국문과 들어가서 대학 2학년 때 국문학과 후원으로 강석 현대무용 발표회를 했습니다. 교정에서 하고 교내의 어느 무대에서도 하고 바깥에서도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분한테 들은 얘기인데, “나는 그것을 데뷔 무대로 생각하고 이제는 학교에서만이 아니라 바깥에서 정식으로 할 때를 눈여겨 봐왔다. 잠시 외국 갔다 왔지만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이 몇 가지 나타나고 있다.” 그러면서 그분이 깊이 얘기한 한 가지는 “밀양 또는 영남 지역은 춤이 굉장히 센 동네다. 우리 집안에서는 춤을 너무 안 좋게 생각을 해서 고등학교 때부터 집안 몰래 개인 교습을 받고 대학 들어가자마자 발표를 하려고 했었다. 제대로 무대에 서지 못했지만 앞으로 나 같은 사람들이 밀양에서 계속 나올 것이다.” 그 분의 표정, 그분의 몸짓, 여름에도 두꺼운 가죽 장갑을 두겹 끼고서 나타난 그분의 전체적인 인상 그리고 그분이 열정적으로 얘기하는 것에서 아주 우리 말다운 그 엣지 있는 표현 그것이 그분의 춤의 앞날을 얘기하는 것이구나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한 면모를 저는 김은희 선생한테서 얼핏 느끼고 있어서 오늘 만나면 그 얘기부터 해야지하고 다짐하고 나왔었습니다.

김채현: 예, 다짐하신 바가 오늘 참고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김은희님은 강석 선생님한테서 직접 배우신 적이 있습니까?

김은희: 없었죠. 제가 20살쯤이었을 때, 큰 외삼촌이 저한테 팸플릿 한 장을 주셨어요. 강석의 춤추는 자료도 많았는데, 그걸 못 받은 게 지금 너무 한스럽습니다. 이건 강석 선생님 묘비 제막식 팸플릿입니다. 묘비에 이렇게 적혀 있어요. “여기에 무용가 강석 본명 강광석 잠들다. 무용에의 활활한 정열과 푸른 꿈에 살은 준재여 우리들의 크낙한 희망을 저버리고 속절 없이 비천했고녀” 박용구 선생님이 쓰셨고요. 팸플릿 내용을 좀 더 소개해볼게요. 1935년 10월 11일 생, 1972년 8월 13일 졸 향년 37세. 1954년 밀양 농잠고등학교 졸업, 1958년 9월 고려대 국문과 졸업, 배숙자, 진수방, 조광 등의 공연 출연, 1964년 육군 만기 제대, 1968~72년 2월 미국 뉴욕에서 발레, 재즈발레 연수, 1972년 3월 이후 경희대 무용과 강사, 예그린악단 무용부장, KBS TV 무용합창단 안무지도교사, 1972년 6월 예그린악단 〈종이여 울려라〉 특별 출연(‘종의 정’).



  

강석 선생 묘비, 강석 선생 묘비 제막식(1972년) 안내문 표지 ⓒ김은희



김채현: 묘비에 적힌 건립위원 성함들을 참고로 일부 소개해보겠습니다. 박용구, 조동화, 최창봉, 진수방, 안제승, 김백봉, 김창구, 송범님들입니다.

김은희: 제가 지금 밀양춤을 추고 있잖아요. 우리 외삼촌이 이 자리를 만들어주신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조금 합니다.

채희완: 강석 선생은 키가 작았어요. 그분 스스로 “니진스키는 나보다 1cm밖에 크지 않았어. 그러나 나는 니진스키가 표현하지 못한 것을 내가 맡아서 한다. 그것을 넓혀 우리 밀양춤의 핵심으로 고려하겠다.” 그렇게 얘기하신 게 아직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이런 면에서 더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저는 김은희 선생님의 신작 작품을 제가 관람한 것이 별로 없어 잘 모르겠으나, 이 〈밀양검무〉 춤을 보면서 아직도 밀양검무는 생성 과정 중이다고 봅니다. 그것은 김은희의 밀양이 아닌 김은희의 현대 칼춤으로 정착되는 날 그 춤은 밀양검무를 넘어서는 경지의 춤이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 바탕의 하나로서 없는 사람들이 어렵게 지금 펼치고 있는 이런 장면에서 앞으로 김은희 선생한테 제가 기대하는 것은 그냥 검무가 아니라 김은희의 검무, 그것은 오늘날 이땅의 현대춤이고자 기대하는 것입니다.

김채현: 네, 김은희 선생님께 바라는 바를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강석 선생님과의 인연은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이제 김은희님이 준비하신 영상을 한 20분 정도 볼 차례입니다. 그러기 전에 김은희님의 춤, 춤 세계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끼친 이매방 선생님과의 인연을 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영희 선생님이 말씀해주시지요.


박금슬과 이매방

김영희: 이매방 선생님에 대해서 어떤 부분이 선생님의 몸속으로 들어왔는지는 후반에 우리 춤 원리에 대해 얘기할 때 소개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가 우선 궁금한 거는 이매방 선생님과 박금슬 선생님 사이에서 느끼셨을 예술적 차별점입니다.

김은희: 박금슬 선생님이 저한테 뼈를 주셨다면 이매방 선생님은 저한테 살을 주셨죠. 그래서 과학적인 뼈 바탕 위에서 이매방 선생님의 그 자연… 이매방 선생님은 몸 자체가 자연이에요. 저는 이매방 선생님 춤을 보면 사람을 보는 게 아니고 자연을 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 정도거든요. 그래서 선생님이 살풀이춤 같은 데서 자진굿거리로 이렇게 막 걸어가시면 내 귀에는 갈대 소리가 사사 하고 들릴 정도예요. 이매방 선생님 말씀은 승무를 잘 추면 모든 춤을 다 잘 출 수 가 있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승무가 어느정도 익숙해지면 살풀이춤을 가르치십니다. 한국 전통 춤사위의 집대성인 승무에서 대삼소삼 호흡과 발디딤, 정중동의 곡선미를 깨우쳐야 살풀이춤의 섬세함을 표현할 수 있으니 그만큼 살풀이춤을 제대로 추려면 어렵다는 것입니다. "살풀이춤을 잘 추려면 승무를 잘 추어야 하니 승무가 가본이라 할 수 있다. 승무가 숫컷이라면 살풀이춤은 암컷이기에 항상 셋트로 함께 추게 된다."
 저는 그 두 분 선생님 걸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제가 분석하고 연구하고 있는데 아마 제 춤이 두 분을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서도 그 연구 자료를 많이 남기려고 애쓰는 중이에요. 제 춤의 완성도는 거기에 달려 있지 않나 생각하지요.



김은희 ⓒ춤웹진



김영희: 뼈를 주시고 또 살을 붙여서 됐다는 얘기에서 뼈 얘기는 앞에서 박금슬 선생님 이야기를 많이 하셨기 때문에 대략 알겠습니다. ‘살을 붙일 수 있게 해주셨다’는 데서 살이 어떤 의미인지 좀 더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김은희: 이매방 선생님은 보통 설명이 별로 없으시지만 그냥 자연 그 자체로… 그러니까 우리한테 많이 하신 말씀은 “춤을 무겁게 춰라” “관객 의식하지 마라” “변덕이 죽 끓듯이 하여라”예요. 변덕이 죽 끓듯이 한다는 게 뭐예요? 사물놀이를 하면 자연의 바람 이런 걸 표현하잖아요. 그래서 그 말씀은 성격이 죽 끓듯이 하는 그런 게 아니고 몸에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을 그렇게 표현하게끔 말씀하신 건데, 선생님은 그런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아요. 변덕이 죽끓는다는 말을 잘 해석해보면 사계절과 자연의 변동 등 모든 것들을 움직임으로, 춤 정신으로 가능하게 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제가 쭉 연구해서 알아차리기로는, 이매방 선생님 춤에서는 점, 선, 원의 원리가 완전히 돼 있어요.
 카오스에서 우주가 탄생할 때 아무것도 없는 그래서 일단 하나의 점이, 그 점이 선으로 나누어지면서 그게 회전으로 돌면 태극이 되는 거잖아요. 우리 몸에서 점, 선, 원을 본다면 저는 이 단전을 점으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제 유튜브를 보시면 알겠지만 “내 몸에다 전화를 걸어라” 이런 말을 하고 있어요. “발바닥에 전화를 걸면 단전이 전화를 받는다. 발바닥에 여보세요? 하면 땅의 중력을 이용해서 밀어내는 힘으로 이제 받는다. 그러면 이 다리는 전기줄이 되겠지.” 이런 설명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매방 선생님 춤 자체가 전부 점, 선, 원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제가 무보를 쓰려고 하면서 춤길, 몸길을 쓰려고 합니다. 춤길이라는 게 뭐냐 하면 내가 서 있던 무대를 원형으로 한 바퀴를 돌면 그게 한 길이 되는 거고, 내가 한 바퀴 몸을 회전하면서 밀어내는 팔이 등 뒤로 가고 축의 중심이 되는 단전을 통과하여 다른 팔이 음으로 당겨지는 이런 것도 말로 가르치기 굉장히 쉽거든요. 춤으로 가르치면 못 가르쳐요. 그러면 막 형태밖에 안 되니까. “야 쌍둥이를 놓고 있다 그러면 하나는 업고 하나는 안아봐” 그러면 업는 애를 갖다가 등을 내줘야 되거든 양으로요. 그러면 걔를 업고 나면 내가 “몸을 똑바
잘 축세워서돌아서 면 앞의 것은 안게 되지요. 그래서 이매방 선생님 동영상을 보시면 항상 뒷 공간, 뒤 원, 그런데 이 앞 공간이나 앞에 안는 것도 저절로 되는 거거든요. 그런 것들을 이제 선생님 춤에서 터득한 거죠. 그래서 그런 영향을 받아서 ‘이매방의 춤은 자연이다. 그리고 점, 선, 원의 원리 구조가 확실하게 돼 있다. 그러면 한 획에 딱 찍는 점을 박금슬 선생님이 먼저 찍어주시면 이매방 선생님은 원으로 마무리하신다.’ 이런 영향을 받았습니다.


김영희: 박금슬 선생님의 점으로 찍고 이매방 선생님의 원리로 한다는 부분을 더 소개해주시면 좋겠어요.

김은희: 그러려면 호흡 이야기로 들어가야 되는데요. 어느 선생님은 “우리 춤은 손가락 춤이다.” 그때 그 선생님이 인도춤을 연구하실 때인가 봐요. 어느 선생님은 탈춤을 추시니까 “우리 춤은 탈춤이다.” 그런 데 비하여 박금슬 선생님은 “우리 춤은 오장육부춤이다.” 오장육부는 우리 몸통 안에 있어요. 팔, 다리 이런 것이 잘려도 생명은 있게 되지만 몸통의 어떤 장기 하나가 건드려지면 우리 생명을 유지하기 어렵죠. 이 오장육부의 가운데 핵으로서 생명이 잉태되는 곳이 곧 단전이지 않겠어요? 호흡은 반드시 기경결해(起景結解)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호흡에도 장단처럼 내고 달고 맺고 풀고가 있기 때문이지요. 땅과 중력의 힘으로 호흡을 내고 하체에서 달고 단전에서 맺고 상체로 풀어냅니다. 단전이라는 것은 신체의 장기 이름이 아니라서 우리 몸에 그 형체는 없지요. 가상세계인 것입니다. 때문에 단전에서 맺는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을 수 있으나 춤추는 몸을 쓸 때는 일반이 말하는 복식호흡이 아니고 역(逆)복식호흡을 사용하기 때문에 단전에서 맺은 것으로 느껴지지요. 그래서 박금슬 선생님이 주신 오장육부 춤이라는 그걸 하나로 뭉쳐서 저는 점으로 인식하는 거지요. 그래서 제가 지금 무보로 만들려고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축이 있는 다리가 1번이면 그다음에 밀어내는 쪽은 3번이에요. 이거는 양이잖아요. 그러면 축이 없는 다리가 2, 4번이면 딸려 오는 손은 4번이에요. 1, 3은 양이고, 2, 4는 음이지요. 그러면 몸통은 제로이고 그래서 점이다. 지금 무보 작업을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김채현: 우리 전통 예술을 구성하는 단위로 마루라는 말이 있지요? 그와 연관해서 좀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김은희: 음악의 흐름이 마루마다 구분되듯 춤길 역시 마루가 있습니다. 춤이 흐르는 길에서 원이 하나가 이루어지면 춤길로 한마루이고 몸이 움직이는 길에서 점, 선, 원의 움직임으로 태극이 하나 형성되면 몸길의 한 마루라고 저는 설명합니다.

김채현: 이 추가 설명은 찬찬히 제시될 부분이 아닌가 합니다. 이제 김은희님이 자신의 영상 자료를 편집한 것을 보면서 코멘트를 듣는 시간을 15분 내지 20분 정도 갖기로 하겠습니다.

- 이하 김은희 심층 공개 인터뷰 제2편(춤웹진 11월호)으로 이어짐

2024. 10.
사진제공_김은희, 춤웹진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