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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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시
- 2024. 08. 13.(화) 13:30 ~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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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소
- 예술가의집(서울 대학로)
인터뷰이│ 제임스전
지난 8월 13일 오후에 있은 춤작가 제임스전 초빙 비평시각 심층 공개 인터뷰, 예술가의집, 서울 대학로, 한국춤비평가협회 주최 |
김채현: 그렇군요. 국내 안무나 창작에 대해 느낀 점들은 뒤에서 잠시 듣도록 하겠습니다. 그보다 먼저 알고 싶은 것이 서울발레시어터 관련 사항입니다. SBT가 1995년에 창단됐죠. 그리고 제임스전님이 일선에서 물러나신 게 몇 해 되었지요?
서울발레시어터
제임스전: 2016년이 마지막이에요. 2017년부터 전 단원 나인호님이 맡았죠.
김채현: SBT를 만들어서 많은 단원들이 자신들의 재능을 안무자와 함께 나누며 단체를 정말 열혈 성심으로 키웠습니다고 봅니다. 그리고 봉급을 지급한 단원들도 상당수 될 것이고요. SBT를 거쳐간 단원들을 소개해 보는 것도 상당한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제임스전: SBT 창단 멤버로서 연은경, 문경환, 최광석, 최세영, 이인기, 나인호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다음에 창단 단원으로는 로돌프 파텔라, 전선영, 정운식, 곽규동, 조현경, 황정실, 윤미애가 있고, 그 후 단원으로 정경표, 김은정, 정해룡, 하준국 등이 있습니다. 지금 정해룡, 하준국은 세종에서 학원도 잘하고 조그만 단체도 운영하고, 이인기도 마찬가지로 대전에서 활동합니다.
김채현: 그 가운데 나이가 제일 많은 사람은 지금 몇 살인가요?
제임스전: 문경환님이 50을 훌쩍 넘고 가장 많을 겁니다. 이 무용수들이 저한테는 최고의 무용수였어요. 왜냐하면 저한테 영감을 많이 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다 나름대로 학원 하면서 활동하고 있고 전선영님은 SBT에 작년까지 있다가 그만뒀고 재작년 〈클라라 슈만〉할 때 조감독으로 저와 같이 일했습니다.
김채현: 그 가운데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분도 있을까요?제임스전: 곽규동님이 있습니다. 와이프와 함께 미국 네바다발레단 주역 무용수로 활동하다가 지금은 라스베가스에서 학원을 하면서 조그만 단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1년에 한 3~4번씩 공연합니다.
〈현존〉 ⓒ제임스전 |
김채현: SBT 운영이 잘 될 때도 있었겠지만 대체로 보면 아픈 일들도 더러 있기도 해서 운영 자체가 상당히 힘들었다는 걸 계속 느끼게 됩니다. 정규 급여를 지불한 단원 수가 언제 가장 많았고 몇 명쯤 되었습니까?
제임스전: 35명이었습니다. 급여 지급일인 매달 25일이면 김인희 단장이 힘들었어요. 우리 재정을 맡은 강 과장님이 계셨는데 그 일주일 전에 김인희 단장한테 돈이 모자라는 상황을 공유하고 어찌해야 할지 의논하고 김인희씨가 또 자금을 구하고 그랬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겨낼 수 있었던 건 로이 토비아스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옛날에 뉴욕시티발레단 출신이신데 포드재단이 나타나 돕기 전까지는 굉장히 힘드셨다고 그러십디다. 의상 할 돈도 없어서 리얼하게 입혀서 무대에 올리고, 또 하나 해주신 이야기는 제롬 로빈스한테 작품을 부탁했는데 안무비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힘들었다고 선생님이 말씀해주시면서 항상 우리한테 무용단이 있게끔만 유지하고 언젠가는 이렇게 힘든 순간에서 내려올 수 있으니 끝까지 버텨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조언으로 우리는 버텼고 안무 측면도 그렇고 토비아스 선생님은 참 저한테는 큰 힘이었습니다.
김채현: 토비아스 선생님을 언급하는 중에 뉴욕시티발레단 관련해서 미국 자동차 재벌 포드재단이 춤 분야에 거액을 쾌척한 사례가 소개되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이자면, 제가 알기로는 포드재단이 1963년부터 10년에 걸쳐 770만달러를 기부했습니다. 그 가운데 2백만 달러는 뉴욕시티발레단에, 400만달러는 그 발레 학교(스쿨오브아메리컨발레)에 기부되었습니다. 나머지 270만달러는 샌프란시스코발레단 등 지역의 레퍼토리가 준비된 발레단들에 배분되었습니다. 오늘의 환율로 환산하면 100억원쯤 되는데, 지금 물가 시세로는 최소 1000억원 쯤 될 겁니다. 아무튼 1948년 조지 발란신 주도로 창단된 뉴욕시티발레단은 그 엄청난 실력을 정말 활짝 피우는 계기를 맞이했지요.
제임스전: 토비아스 선생님은 그게 아니었으면 뉴욕시티발레단이 어찌 되었을지 몰랐을 거라고 그러셨습니다. 그리고 또 잘한 것이 그 돈을 쓴 게 아니라 발레단이 은행에 투자해서 이자를 엄청 모았다 합니다. 그리고 앨빈 에일리도 포드재단에서 도와준 거 아시죠? 지금 현대무용이 미국에서 쓰러지는 감이 있는데 앨빈 에일리는 아직도 세계적인 팀입니다.
김채현: 60년 전 일입니다.
제임스전: 그런 부분들에서 토비아스 선생님이 참 큰 힘이 됐어요.
로이 토비아스
김채현: 로이 선생님과의 인연이 돈독하고 중요해 보이는데, 더 소개해 주시죠.
제임스전: 제가 1988년에 유니버설발레단에 정식 입단했고 그때 다니엘 레반스가 예술 감독이었는데 〈졸업 무도회〉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거기에 토비아스 선생님이 교장 선생님으로 역할을 하시고 다른 단원 지도도 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돼서 88년도부터 유니버설 예술감독님으로 모시게 된 거예요. 그리고 선생님은 피아니스트입니다. 음악에 대한 조예가 엄청 깊으십니다. 그분이 원래 중졸이신데 일본에 30년 사시고 일본어, 영어, 중국어, 한국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에스파냐어 그리고 역사를 그렇게 공부를 하신 분이에요. 그분은 굉장히 선비 같고 항상 클래스 할 때 넥타이를 매시고 부채 하나 드시고 하는데 저한테는 아버님 같았어요. 아버님이자 스승, 친구였습니다. 항상 제가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사업 운영할 때뿐 아니라 안무가 안 되거나 음악이 안 되거나 하면 제가 악보를 가져가서 여쭤봤어요. 그러면 답은 안 주시지만 제임스 이런 거 좀 보아보라고 말씀을 주시곤 했는데 그런 부분에서 저한테는 큰 힘이 되었죠.
김채현: 그분이 한국에 귀화하셨죠?
제임스전: 네, 2000년도에 하셨고 한국 성함은 이용재입니다.
이지현: 왜 귀화하셨죠?
제임스전: 한국이 너무 좋아서요. 선생님께서 본인이 일본에 30년을 살았지만, 한국 사람이 더 정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본에 가시게 된 이유가 뉴욕시티발레단 학교를 일본에서만들려고 가신 겁니다. 원래는 뉴욕시티발레단을 위해서 가셨는데 그게 좀 잘못되었습니다.
이지현: 귀화까지 하셨는데 우리나라에서 하신 작업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있는지 질문드립니다.
제임스전: 선생님이 유니버설발레단에 계실 때 작업을 많이 하셨죠. 그리고 서울발레시어터에 오셔서 예술감독을 하셨고 그때 1시간 10분 길이의 〈백조와 플레이보이〉라는 작품을 만드셨는데 내용은 골프를 치다가 공이 빠지면 백조가 나오는 코미디입니다. 거쉰의 음악으로 공연했는데, 아주 천재적이셨습니다.
김채현: 해외에서 발레 교육을 받고 단원 활동을 한 후에 국내에서 단원 생활과 안무 작업을 수십 년 동안 해온 입장에서 국내 동향에 대해 나름 느낀 바가 많을 텐데요. 혹시 어떤 의견이 있습니까?
〈창고〉 ⓒ제임스전 |
창작자의 소양
제임스전: 아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점들을 소개했습니다. 국내 춤계나 발레계가 발전하는 면들도 보입니다만, 제가 걱정하는 부분도 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작품을 자기가 하는 게 아니라 누구를 통해서 만들고서는 자기 이름을 집어넣는 것 같은 부분이 그렇습니다. 학교에서 배울 때 춤이라는 게 종합 예술이기 때문에 무대뿐만 아니라 미술, 음악, 문학, 건축 등 다 공부해야 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더 나아가서 저는 무용가는 연출가를 안 쓰는 걸로 배웠어요. 줄리아드 다닐 때 당신이 직접 연출을 못 하면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세계적으로 보면 안무가가 전부 다 해요. 근데 우리나라 와서 보니까 이상하게 연출가들이 많았습니다. 뮤지컬은 연극, 노래 모든 걸 하기 때문에 오페라와 같이 총책임자가 있을 것이고 이해가 갑니다. 춤은 안무가가 해야 됩니다. 안무가가 움직임과 음악만 선택한다고 해서 안무가가 아니라, 의상부터 무대 세트, 조명까지 전부 다 안무가 손에서 정리되어야 한다는 거죠. 그래야 안무 작업을 한다는 거고, 국내에서도 몇몇 선생님들이 기억나는데 대단하시더라고요. 이와는 다르게 좀 이상하게 돌아가는 부분도 봤지만, 더 깊은 이야기는 삼가려고 합니다.
김채현: 춤계를 위한 건설적 조언으로서, 좀 더 깊이 이야기해보시지요.
제임스전: 어떤 컴피티션에 갔는데 선생님이 안무를 다 해주는 겁니다. 일부 사례들이겠지만은 저는 그게 이해가 안 갑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어 보곤 하는데 우리 젊은 안무가들이 그런 거 배우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음악도 저작권이 있고 작품도 저작권이나 여러 가지가 있는데 정말 조심해야 됩니다. 외국 같으면 큰일 나고 심지어 패가망신 당합니다. 나아지는 점들이 없지 않겠지만은, 그런 부분들을 젊은 친구들이 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학교에서부터 이런 면의 교육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김채현: 그러니까 춤 창작의 대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생명도 짧고 이런 인터뷰의 어떤 대상자가 될 수가 없겠죠. 정말 인생을 길게 봐야 하고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긴 것이 아니라, 인생이 길어야 예술도 길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영상을 보며 인터뷰를 이어가도록 하지요. 지금부터 영상 〈현존〉을 보면서 코멘트를 육성으로 듣는 기회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현존 1,2,3〉 2012년도 공연 영상에서 제임스전님이 12부분을 가려 뽑은 그것을 제가 편집했습니다. 시작하시지요.
〈라이프 이즈〉 ⓒ제임스전 |
〈현존〉 코멘트
제임스전: 원래 12개로 나뉘어 있는데 시간상 그냥 짧게 편집을 해서 이해 부탁드립니다. 이건 〈현존 1〉 오프닝입니다. 지금 보시는 신은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민갔을 때 내가 왜 여기 와서 힘들게 이러고 있다 보니 ‘내가 누구인가? 나는 뭔가?’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아마 이민 가신 분들이 많았을 겁니다. 어릴 때 가면 언어도 안 통하고 그래서 그러한 자존감 때문에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이 부분은 예수님이고 옥상에서 이어집니다. 그다음 이제 1분 30초, 이 장면 ‘Keep on going on!’하며 계속 가라는 것이 의미한 것은 제가 이민 생활할 때 뒤돌아볼 여유도 없고 계속 전진하라는 그런 느낌으로 제가 이 신을 만들었습니다. 제가 성장할 때는 랩 음악이 굉장히 유행했습니다. 그리고 뉴욕에 있을 때는 길거리에서 브레이크 댄스를 추고 흑인들이 돌아다니면서 춤추고 전철에서 막 랩하고 그런 것들이 저한테 이런 음악을 선택하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다음에 3분 40초, 여기가 피날레로 어깨춤을 많이 추는데 동료들과 함께 가자는 느낌으로 마지막 피날레를 한 겁니다. 음악은 미파이미라는 유명한 랩 그룹입니다. 〈현존 1〉은 이렇게 끝납니다. 2011년도에 강동아트센터 개막 공연으로 그때 다시 올렸고 장운규님이 주역을 했습니다. 원래는 1998년도의 로돌프 파텔라가 나왔어야 했는데 캐스팅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다음에 4분 54초, 여기는 〈현존 2〉인데 여기서 가수 사데의 음악이 나옵니다. 2011년 이때 브레이크댄스 팀을 처음으로 섭외를 해서 마이클 잭슨 음악으로 업그레이드하여 같이 작업했습니다. 96년도에 만들 때 저의 미국 생활에서 겪은 위태로운 주변 환경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김채현: 그러니까 〈현존1〉이 95년도에 공연되고 〈현존2〉가 96년, 〈현존3〉이 2008년도에 완결편이죠? 그리고 그 가운데 〈현존2〉의 장면이지요, 지금?
제임스전: 네. 이 다음 장면을 잘 보시면 좋겠는데 여기 노숙자 하나가 나옵니다. 제가 미국에서 항상 노숙자를 많이 봐왔고, 또 여기 큰 주사가 나옵니다. 당시 뉴욕에서 마약이 엄청 심각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이 정도일지 걱정입니다. 여기 보이는 사람이 노숙자고 나중에 이 옷 입은 사람이 천사 마리아입니다. 이 천사 때문에 구원을 받는 거죠. 여기도 엄청난 신이 많은데 짧게 보면 이 부분에서 다들 안 움직이고 주인공만 그려냈고 주역만 이게 가능한 거죠. 제가 참 운이 좋은 것 같아요. 저도 80년대 저 시대에 살 때 위험이 참 많았었는데 제가 이걸 이겨낼 수 있으니 말입니다. 당시 ABT 무용수 패트릭 비셀도 마약으로 감염돼서 죽지 않았습니까. 그다음 창고 안에서 젊은이들이 노는 신입니다. 여기 잠깐 보시면 창녀들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제가 포주로 나오게 됩니다. 지금 여기 무용수 조현경이 가수 사데의 곡을 노래하는데 관객들이 진짜 노래를 부르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이런 부분들이 제가 뉴욕에서 경험하고 보고 느낀 것들을 재현한 거죠. 미국 생활이 없었으면 저는 이거 못했을 겁니다.
9분 25초에 시작되는 이 장면을 만든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이클 잭슨 노래로 제목이 ‘그들은 우리에게 관심 없다’는 뜻인데 당시 뉴욕에서는 흑인들의 불만이 굉장히 많았고 이 노래를 들으면서 아무도 우리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그런 분위기의 작품을 만들게 된 거죠. 제가 마이클 잭슨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사회에 대한 불만을 다룬 가사가 너무 좋습니다. 이런 것들을 좀 삽입했습니다.
그다음에 제가 좋아하는 11분 10초 부분. 음악이 퀸의 ‘크레이지 리틀 싱 콜드 러브’인데 제가 이 노래를 너무 좋아해서 옛날에 고등학교 때 퀸의 티켓 사기 위해서 기다릴 때도 있었습니다. 많이 놓쳤죠.
그다음 나오는 게 제 상황입니다. 데이비드 보위하고 프레드 머큐리가 함께 한 ‘Under Pressure’라는 음악이 있어요. 제가 뉴욕에 살면서 압박이 좀 많았습니다. 웨이터 생활하면서 등록금 내기도 힘들었고 여러 가지로 압박이 있었고 그 경험 때문에 이 음악을 썼습니다.
14분 10초에 〈현존 2〉 피날레가 나오는데 지금 보시는 장면 뒤에 천사와 춤추는 신이 있습니다. 마지막 신에서 주인공이 악과 선 중에서 선택을 망설이다가 결국 선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이제 시리즈 3 구원의 길로 가는 겁니다. 〈현존 1,2,3〉은 총 2시간 20분짜리 작품입니다. 어떤 교수가 이건 지금도 대작이라 그러셨습니다. 다들 60명 정도 출연한 줄 아셨는데 여기 출연한 무용수는 35명밖에 안 됩니다. 다들 고생했죠.
그다음 16분쯤, 〈현존 3〉입니다. 첫 신으로 플라잉을 하는데 98년 당시 국내에는 플라잉을 하는 팀이 없었습니다. 라스베가스 태양의서커스단 스태프를 초빙해서 공연을 만들었지요. 밑에 그 주인공 무용수인 이대 출신 김은정 무용수가 앉아 있습니다. 연은경이 빠지고 김은정이 차세대로 출연했습니다. 이 부분이 첫 신으로 구원의 길을 갈 준비를 하고 있고, 어두워서 그렇지만 그다음을 보시면 무대에서 아마 국내 처음으로 인라인스케이트를 썼습니다. 이 부분이 뜻하는 바는 우리가 구원의 질주를 하자는 거예요. 처음에 제가 이걸 원하니까 무대장치가 이태섭 교수가 이 큰 걸 어떻게 올릴 건지 고민했습니다. 제가 해보자고 했고 관객들은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20분 25초부터 이제 구원의 길로 가는 도중에 나오는 마지막 대면으로 악마 역을 정운식님이 했습니다. ‘제노사이드’ 등 음악들이 여러 가지 많습니다. 지금 예를 들어 스웨덴의 알렉스 에크맨도 여러 음악을 쓰고 안무를 하고 있더군요. 팝도 쓰고 클래식 음악도 쓰고 여러 가지를 쓰는데, 지금은 흔하겠는데 아마 95년에 제가 앞서 시작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다음에 이제 21분 44초, 천사가 구원의 길로 가까이 인도합니다. 그러면서 마리아하고 예수님을 만나게 되죠. 오늘 처음 하는 말입니다. 계속 눈여겨 보실 부분으로 이 의상은 서지니님이 디자인했습니다. 신발은 그때 98년도에 카페지오에서 나온 유명했던 운동화입니다. 그때 극장에서 장치가 들어오고 나오고 하여 댄스플로어를 깔기 힘들다고 해서 제가 신발을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물을 비 오듯이 하려고 그랬는데, 예술의전당에서, 지금은 하는데, 그때는 못 하겠다고 했었습니다. 그때 물을 사용했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마리아이고 헨델 음악으로 〈울게하소서〉입니다. 이 부분이 좀 힘들었던 이유는 그냥 플라잉만 하는 게 아니라 안무를 해야 되기 때문에 자꾸 돌리고 넘어가고 하는 것들을 음악에 맞춰서 하는 게 상당히 힘들었죠. 아무튼 멀리서 보면 좀 환상적이죠. 이걸 EBS가 찍어줘서 가까이서도 멀리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근데 여기 잡아 당기는 사람이 힘이 들죠. 음악을 잘 모르니까 옆에서 또 음악을 카운트해줘야 되고 힘이 굉장히 강해야 합니다. 남자가 또 한 사람 나옵니다. 여기가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입니다. 제가 이 내용을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이 세 파트를 하기 좀 어려운데도 단원들이 불만 없이 육체적으로 그걸 다 이겨내 주었으니까 참 고맙죠. 지금 할 수는 있겠지만 쉽지는 않겠죠. 저렇게 넘어가는 게 쉽지 않죠. 어려운 연습을 좀 많이 해야 했습니다. 하나는 밑에, 하나는 위에 이렇게 대조를 이루며 해야 했기 때문에 참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다음에 27분 54초, 여기가 피날레인데 구원으로 가게 되는 거예요. 여기서 제가 비 오듯이 물을 뿌리려고 그랬는데 98년에는 공사를 해야 한다고 해서 못했습니다. 지금은 되지만 그때는 안 됐습니다. 이제 영상 마지막까지 보겠습니다.
누가 저한테 이걸 너무 일찍 터뜨렸다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보고 계신 신에서 전부 구원의 길을 가는 겁니다. 지금 계속 타고 있는데 이게 원래 3개입니다. 근데 강동아트센터가 좁아서 두 개밖에 못 만들었습니다. 플라잉하는 사람들이 목표대로 올라가는 게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원래 옛날에 눈(雪)까지 뿌리고 싶었는데 잘 아시겠지만, 모든 게 돈이에요. 눈까지 뿌리자니 그 기계가 비싸고 해서 그냥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한 거죠. 이 마지막 장면을 사람들이 하이라이트라고 하네요.
〈분노〉 ⓒ제임스전 |
특이 공간 구성
참석자(오한샘, EBS PD): 제가 추가해서 말씀드려도 될까요? 저는 저 영상을 담당했던 PD입니다. 저희는 제임스전 선생님 작품을 40편 정도 찍었을 겁니다. 근데 취재 차원이 아니고 처음 극장에 입장해서 커튼콜 할 때까지 보통 한 작품의 동선을 외워야 하니까 한 20번 정도 봅니다. 〈현존〉 같은 경우는 제가 한 15번씩 봤습니다. 제임스전님은 좀 다른데요, 예를 들어서 다른 무용하시는 분들이나 무대 하시는 분들과는 공간이 좀 다릅니다. 대개 스토리라인 정도만 다루었는데 선생님의 선율과 선생님의 빛이 무용수와 부딪쳐서 나오는 바이브는 대한민국 어디에도 없을 거예요. 선생님은 세트가 없습니다. 잘 보시면 빛으로 모든 공간을 구획하는데 관객들이 받아들입니다. 저런 조명 보신 적 있으신가요? 엄청나게 영화적입니다. 다 블루 톤인데 어떤 천상의 느낌을 냅니다. 그리고 제임스전님은 연출가한테 설명하거나 강조하지 않고 제시만 하는 거예요. 한 30년 정도 알아왔는데 선생님은 설명하거나 강조하지 않고 다만 제시만 할 뿐이라고 합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는 말로 옮겨질 수 없는 거는 절대로 말로 하지 않습니다. 팜플렛에 쓰지 않으세요. 몸으로 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처음에 〈현존〉을 봤었을 때 공간을 보고 굉장히 놀랐고 발레를 얘기하는 방식이 좋았습니다. 대개 발레 같은 춤 경우는 아름다운 장소에서 이루어졌지만, 〈현존〉을 봤을 때 창녀촌에서 춤을 추기 시작하는데 그 춤이 쉬운 춤이 아니고 난해하거나 야한 춤도 아닌 겁니다. 무시할 수 없는 기교와 창녀촌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그들의 사랑이 이렇게 숭고할 수가 있고 그들의 열정이 이렇게 대단할 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술의전당에서 창녀촌을 무대에 올린 첫 공연입니다. 그 부분을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이제 담당 PD로서 봤는데 깜짝 놀란 부분으로 찢어진 거대한 세트에서 을씨년스러운 빛 하나가 나오잖아요. 그리고 선곡에서 아까 선생님은 대단히 편하게 말씀하셨는데 저는 제임스전님 선곡이 대단히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 나온 쉬운 곡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볼 때는 쉽게 나오는 거로 보이거든요. 그래서 공간 자체가 다르고, 빛 자체가 다르고, 이미지 자체가 다릅니다. 그래서 제임스전님 공연을 찍으면 카메라 감독들이 엄청 긴장합니다. 왜냐하면 보통 찍으면 누가 주인지 아는데 제임스 선생님은 보통 5개 장면이 나와요. 이 사람의 떨리는 손을 잡을지, 얼굴 클로즈업을 잡을지, 발레리노를 잡을지, 조명과 이미지가 혼합하는 전체적인 바이브를 잡을지, 아니면 뒤에 있는 무용수를 잡을지 고민합니다. 그래서 제임스전님은 군무진들에서 뽑아서 중앙으로 가거나 또 중앙으로만 가지 않습니다. 왜냐면 디테일이 다 다릅니다. 근데 이야기를 안 하세요. 그래서 그런 거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실은 보통 이렇게 대한민국 안무가 중에서 무대 쪽 조명 감독이나 제작 감독이나 음향 감독이랑 이렇게 퍼펙트하게 호흡이 맞춰지는 것으로 보아 저는 그냥 발레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통틀은 무대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저는 한 20~30편을 끝까지 봤지만, 제가 관심 있어 하는 새로운 시도를 하신 것은 〈Love, 볼레로〉와 〈흑과 백〉이라 생각합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겁니다. 〈피가로의 결혼〉에서도 새로운 시도를 하셨는데 늘 안주하지 않으시고 계속 새로운 시도를 합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이 아이디어에 돈만 들어가면 이게 바뀌겠다는 생각했습니다. 실은 가끔 왜 제임스전 선생님 거를 계속 쓰냐고 물으면 중요한 기초 논문이 되는 기록 같은 것이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이 공연하는 걸 기록하겠다는 생각을 PD 같은 사람들이 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막 농담으로 디아길레프가 임프레사리오 역할을 한 것처럼 제임스전 선생님도 그렇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존〉 같은 경우도 제임스전 선생님과 공연을 하면 기본적으로 소방법부터 어겨야 되고 미리 얘기하고 뿌리라고 그래도 갑자기 뿌리면 저희는 화면에 나와야 하고 불을 다 끄는데 하늘에 매달려 있는 걸 우리는 보여줘야 하니까 막 싸우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항상 모든 걸 파괴하고 우리나라 영화에서도 봉준호 감독이 실은 〈살인의 추억〉 할 때 외국에서 깜짝 놀란 게 공간에 대한 주목입니다. 왜냐면 추리영화의 경우 공간들이 막 바뀌고 굉장히 화려합니다. 근데 봉준호 감독은 그 당시에 알려지지 않은 대한민국의 화성시라는 조그마한 곳에서 이야기의 95%를 풀어가면서도 공간을 무시하지 않고 그 중요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제임스전 선생님도 공간에 대한 작업을 하실 때 보면 세트나 뭐 걸리적거리는 거 없이 세트를 관객들 마음에 세워 놓으시는 것 같아요. 본인이 자신이 있지 않으면 힘듭니다. 그리고 자꾸 부연 설명 같은 걸 안 하세요. 그래서 제임스전 선생님이 한 거를 전부 보여주고 싶은데 분명히 분량을 맞춰야 되니까 편집하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제임스 선생님 작품을 보고 PD로서 이야기를 하자면 제임스 선생님에게 안무가 있고 베토벤에게 악보가 있어요. 제임스전 선생님이라는 무대가 있고 근데 이 사람을 어떻게 내가 연주를 할까? 베토벤 연주를 조성진처럼 할까? 아니면 임윤찬처럼 할까? 그런 겁니다. 근데 아무 연주나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없으니까 악보가 굉장히 중요해지죠. 근데 갈 때마다 저렇게 하려면 무대, 조명, 음악이랑 그다음에 기본적으로 이걸 찍는 카메라나 이런 것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뤄야 되거든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 본인이 얘기를 하나도 안 하기 때문에 지금 말씀드리면서 너무 독보적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래서 자본만 투입되면 아이디어가 구애를 받지 않고 완전히 달라질 부분이 있을 거라 봅니다.
간단하게 얘기하면 제임스 선생님 공연은 중계 녹화 스태프들이 다 들어옵니다. 차량 기사까지 공연 보려고 들어 오세요. 이게 그 공연을 재미있어 하는지 않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재미없으면 다 들어가서 쉬지요. 그리고 이미지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카메라 감독들이 제일 싸웁니다. 저희는 발레리나가 연주한다고 보는데 카메라로 그냥 멀리서 잡거나 클로즈업을 잡아도 끝까지 감정 몰입을 시키도록 하는 분이어서 아마 무대를 영화처럼 만드는 분이라고 저희는 생각합니다.
운현궁 같은 경우도 실은 제임스 선생님이랑 저랑 처음에 계획했을 때 춤 때문에 태도 변화가 일어나는지 찍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마 노숙인들 프로그램이 그 시초였습니다. 처음에는 다문화 가정 아이들이었습니다. 운현궁 공연에서 같이 추게 했는데 아이가 못 추면 같이 추는 팀들이 다 망했으면 좋겠다, 그냥 배경으로 지나가는 춤이나 이런 거 말고 그 아이 때문에 그 공연 한 섹터 자체가 같이 움직이면 그래서 아이가 어떻게 춤으로 태도 변화에 이를 수 있는지 다큐멘터리랑 공연으로 찍기로 했는데 그날 비가 엄청나게 왔죠. 그래서 저희가 그때 공연을 다큐멘터리로 변경했죠. 이거는 공연을 못하니까 갖고 있는 VJ들 다 올라가라고 해서 카메라 다 망가지고 했습니다.
그때 제가 공개 인터뷰를 했는데, 왜 춤을 추는지 딱 하나 물었어요. 그때 아마 울면서 대답하신 게 기억에 남습니다. 제가 알게 된 건 대한민국에 목숨 걸고 춤추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춤을 추기 위해서 절망하는 것을 저희가 옆에서 기록하면서 느꼈어요. 다큐멘터리 했다가 막 무너지고, 세트 무너지고, 근데 관객이 안 가니까 절망하는 걸 기록하는데 한 명의 관객이라도 있으면 춤을 춘다고 해서 그때 정운식 선생님이랑 아마 조현경 선생님이 미끄러져 발목을 삘 위험을 무릅쓰고 강행했어요. 저희는 카메라가 춤을 잡지 말고 저기 비 오는 속에서 맨발로 미끌미끌하며 목숨 걸고 추는 장면은 흔하지가 않으니까 집중적으로 잡으라고 했었습니다.
또 하나는 가끔 외국 친구들이랑 외국 PD들이 들어왔을 때 SBT 공연 있으면 무조건 거기로 들어갑니다. 그때 그들이 말한 것은 한 나라가 문화적인 집단인지 아닌지는 한 민간 발레단이 20년 동안 살아남는지 안 살아남는지를 보면 판단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제임스 선생님의 가치는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다음에 품바타령도 하셨잖아요. 품바타령을 발레로 하시면서 기존 상식을 파기해버리고 그리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도 제임스전 선생이 공간을 어떻게 보는지가 나온다고 봅니다. 아무 설명 없이 이 공간에서 저 공간으로 가잖아요. 객석의 5살, 6살 아이가 그 부분을 수긍합니다. 아이들은 수긍하면 조용합니다. 수긍하지 않으면 번개맨 할 때 번개맨이 악당 물리친 거 수긍하지 않으면 난리납니다. 저희가 가장 중요하게 본 거는 이 사람이 어린이 프로그램에 도전하는데 꼬마 애들이 수긍할까였는데 거기서 공간 이동이라든지 어떤 선악 부분이라든지 이런 걸 할 때 애들이 다 움직이지 않게 가는 걸 봤어요. 그래서 나중에 보실 때 춤 외에 다른 쪽도 보시면 또 다른 면모도 발견하시리라 믿습니다.
제임스전: 너무 극찬입니다. 감사합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제임스전 |
김채현: 방금 중한 말씀을 길게 하셨는데 아마 더 하고 싶으신 말씀을 제약상 일단 참으신 것 아닌가 합니다. 그 의견을 더 찬찬히 살피고 참조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지금 선생님 말씀에 대해서 제임스전님은 혹시 어떤 생각이 듭니까?
제임스전: 제가 어렸을 때 영화를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초등학교 때 동네 극장이 하나 있었는데 못 들어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학교 땡땡이치고 거기 서서 왔다 갔다 하다가 안에 아저씨한테 저 좀 데려가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작은 형도 영화를 좋아해서 그 영향이 컸습니다. 지금도 숀 코너리, 톰 행크스, 오드리 햅번 영화 좋아합니다. 제가 공간을 알고 모르고 그걸 떠나서 아마 여러 영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도 안 잊어먹는데 퀸(Queen) 노래 아시죠?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 와서 보러 갔는데 크라운과 엄청 큰 플랫폼이 이렇게 미끄럼틀처럼 있었습니다. 거기서 바로 〈현존〉의 아이디어가 나오는데 직접 연관은 없습니다. 주로 이제 제 몸에 남아 있는 겁니다. 앞에 공연이 끝나도 몸이 밖으로 안 나와졌습니다. 다양한 스테이지 라이트들이 크레딧 모니터 앞에 계속 바뀌면서 빠르게 미끄럼틀을 쫙 타고 내려왔습니다. 그다음에 크라운이 확 올라가면서 뒤에서 드러머랑 베이스가 막 나오는 겁니다. 그런 부분들을 제가 무대화시켰지요. 지금도 안 잊혀지는데 오클랜드 스타디움에 한 8만 명 정도 들어가는데 레드 제플린 메인 연주자들이 아직 오질 않는 겁니다. 사람들이 한참을 기다리다 우~ 하는 소리를 내자 갑자기 헬리콥터 한 대가 두두두 하며 날아오는 거예요. 1976년의 일입니다. 연주자들이 내려 그 즉시 첫 곡을 스트레이트로 해버리자 모든 게 다 용서가 됐습니다. 그래서 〈현존〉의 이 첫 장면을 어떻게 잡을 것이며 사람을 어떻게 잡을 것인지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 락의 그런 영향이 있었습니다. 락에서 대부분 첫 부분과 엔딩이 죽이는데 이런 점들이 저한테 끼친 영향이 크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대화시킬 때는 좀 공간을 잘 활용해서 재미있는 요소들을 많이 집어넣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봤고 그런 영화적인 생각도 하고 여러 가지로 아마 그래서인 것 같아요. 잘 모르겠습니다.
이지현: 제가 마지막 질문 아껴둔 게 있습니다. 오늘 이렇게 이야기를 들으니 저희가 자료를 찾아서 보는 것에서 느낄 수 없는 좀 전체적인 그림이 조금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건 한국 사회에서 온몸으로 부딪치면서 민간 발레단이라는 선례가 없던 곳에서 족적을 만들어온 것입니다. 그렇게 한 30년을 넘게 활동하시면서 이제 뒤따라서 그 길을 가려는 후배들에게 혹은 한국 발레계에, 한국 무용계에 어떤 얘기를 해주고 싶으신지 혹은 어떤 전망을 보시는지 듣고 싶었습니다. 아픈 이야기를 해도 되고, 좀 희망적인 이야기라도 좋고 생생한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지난 8월 13일 오후에 있은 춤작가 제임스전 초빙 비평시각 심층 공개 인터뷰, 예술가의집, 서울 대학로, 한국춤비평가협회 주최 |
포부, 전망
제임스전: 나름 걱정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프로와 아마추어 중에서 프로가 무엇인가? 프로페셔널이 무엇인가? 돈을 받고 자기 직업을 갖고 하는 것이 프로페셔널인데 지금 그렇게 자처하는 단체가 많습니다. 실제로는 거의 모두 학원 운영하면서 공연하는 줄로 압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진짜 프로 발레단이 최소한 갖춰야 하는 기본적인 요소로서 단원들의 월급 지급, 최소한의 사무실에 3~4명의 직원 확보, 4대보험료 납부, 정기 시즌 공연을 목표로 하고 단체를 만드는 것들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냥 공연 수당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안 하고 하는 그런 게 저는 걱정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정말 무용단을 만들고 싶다면 최소한 이러한 것들을 기본적으로 갖춰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1년의 계획과 어떻게 돈을 벌어서 운영할 것인가가 있어야 합니다. 나라의 지원도 있겠지만 교육 사업을 통한 것도 있습니다. 로이 토비아스 선생님도 항상 이야기한 것이 프로 무용단이 되려면 좋은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건 첫째 임무고, 두 번째는 지역사회에 어떤 봉사활동을 할 것이고, 그다음에 무용을 통해서 어떤 교육을 시킬 것이며, 주변 학교를 어떻게 할지 그러한 기본적인 계획을 갖추지 않으면 하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현실이 어려운 줄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래도 그냥 막 하는 것이 걱정스럽습니다. 발레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는 공립 단체들이 많습니다. 시티발레단도 있어야 하고, 많은 건 좋은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전문적으로 갖춰나가는 노력일 것입니다. 좋은 사무실에다 기획자, 홍보 마케팅, 세무 그리고 변호사도 필요합니다. 옛날에는 그렇게 심하지 않았었는데 지금 와서는 많이들 아니면 모두가 프로발레단이라 자처합니다. 그러다 필요하면 국립발레단이나 유니버설발레단의 무용수를 초빙해서 공연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보는 사람들한테는 그들이 전부 그 발레 단원들입니다. 그런 점을 감독기관 관계자들이나 의원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런 점들이 걱정스럽습니다. 작품 메들리라던지 그런 부분들을 참 모르겠습니다. 걱정입니다.
김채현: 제가 간단히 질문하겠습니다. 방금 프로 단체에 대한 소견이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현존〉 작품을 만들었을 적에, SBT를 처음 결성하기 전부터 그런 프로 단체에 대한 소견을 품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다음에 하다 보니까 그런 소견이 이렇게 굳어진 건지 궁금합니다.
제임스전: 김인희 씨와 SBT를 처음 만들 때 저는 국립발레단보다, 유니버설발레단보다 더 많은 봉급을 주겠다고 결심했어요.
김채현: 2002년도 작품 〈Inner Moves〉라고 해외에 수출한 작품이 있습니다. 국내에서 공연할 때 제가 찍어놓은 걸 이번에 다시 쭉 보게 되었는데 춤에 대한 본인의 신념이 엿보였습니다. 춤으로서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신념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억나시지요? 그런 신념이 작품에 깔려 있기에 지금까지 여러 어려움을 무릅쓰고 견뎌왔고 앞으로도 한 20~30년 더 팽팽하게 활동할 수 있지 않을까 제 나름 상상해보기도 하지요. 마지막으로 제가 정말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SBT와 앞으로는 어떤 관계를 유지하시려고 합니까?
제임스전: 저는 이제 관계를 좀 접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SBT를 제가 운영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자꾸만 오해를 합니다. 제임스와 김민희는 SBT를 다 장가, 시집 보냈습니다.
김채현: 시간이 한 10분 정도 여유가 있어서 간략한 의견이나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참석자(장승헌, 춤기획자): 저는 제임스과 동시대에 같이 뭔가 바꿔보고자 했던 현장 공연 기획자로서 제 시선에서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국립극장 기획홍보위원으로 근무하면서 김인희-제임스전 발레를 1993년 국립극장 문화광장에서 〈도시의 불빛〉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때 이 사람들은 유니버설발레단에서 국립발레단으로 이직하고 국립발레단은 김혜식 단장으로 교체되던 시기였습니다. 서울발레시어터는 1995년 2월 19일에 창단합니다. 당시에 SBT가 국립극장에서 근무하던 장승헌까지 데리고 나가서 한다는 소문도 떠돌았는데, 사실무근임을 이 자리에서 비로소 말하게 되는군요. 그리고 제임스전의 작품 중 〈현존〉은 당연하고 〈도시의 불빛〉도 거론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또 LG아트센터에서 했던 〈사계〉 중 저는 봄, 가을이 아주 좋았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효자 공연이라 하는데, 서울발레시어터의 〈호두까기 인형〉은 따로 한국적 해석이 들어간 유일한 작품이고 디베르티스망 장면에서는 한국 춤이 등장합니다. 〈호두까기 인형〉 한국적 버전을 갖고 있다는 것과 여전히 그 작품도 순회를 많이 다녔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연전의 창작산실에서 〈클라라 슈만〉이 선정되고 또 이 공연은 이데일리 문화대상 무용을 수상하였지요. 저는 제임스전의 베스트 5를 이렇게 제안합니다. 서울시무용단과 했던 〈카르멘〉도 기억납니다.
김채현: 방금 서울시무용단 〈카르멘〉 이야기가 나왔는데, 한국무용 계열 단체와 협연한 공연이지요. 그 부분 짤막히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임스전: 처음에 제가 초빙받았을 때 서울시무용단의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이 작품은 2018년 5월에 초연됐는데, 제가 안무에 들어갔을 때 놀란 게 음악 분석부터 박자를 다 해서 움직임을 보여주었는데 발레 움직임이 아니라 창작 움직임이라 무용수들이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고민 끝에 제가 한 프레이즈씩 진행했더니 금방 바로 수용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서울시무용단에서 작업할 때 일주일 근무 스케줄의 명단을 만들었습니다. 제가 국립발레단에 입단을 때는 스케줄이 없었습니다. 그런 부분에서 제가 서울시무용단과 좋은 관계를 가진 겁니다. 아주 영광이었고, 한국춤은 진짜 멋있습니다. 저는 많이 배웠습니다.
김채현: 많이 배웠다는 점 중에서 한 가지만 소개하실 수 있을까요?
제임스전: 한국무용의 음악과 끼입니다. 그리고 음악성이 압도적입니다. 그분들은 음악을 딱 하면 분석하는 게 대단합니다. 그래서 김인희 단장도 춤을 잘 추는 겁니다.
김채현: 심층 인터뷰를 추가해야 할 만큼 내년에 한 번 더 해야 할 만큼 되겠습니다.
참석자(여훈, 전 SBT 사무국장): 오늘 참 좋은 자리인 것 같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개인적으로는 가슴이 벅찹니다. 저는 20년 동안 서울발레시어터에서 무대 감독, 기술 감독, 제작 감독, 마지막에 사무국장까지 했습니다. 〈라이프 이즈〉는 제1회 대한민국발레축제 때, 유니버설발레단의 〈지젤〉, 국립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광주시립발레단의 〈명성왕후〉와 함께 예술의전당 오페라 극장에서 올려졌습니다. 그때 대한민국발레축제 사무국에서 지원금을 한 2500만원 정도 주면서 오페라 극장에서 라이브 전막 공연을 올려야 한다는 주문을 받았습니다. 사실 SBT는 오케스트라랑 한 작품도 없는데 우리는 무엇을 올려야 할지 제임스전 선생님과 고민했습니다. 오케스트라를 구하는 것도 힘들었고 2500만 원이라는 돈으로 저희가 전막 공연을 할 만한 세트도 없었어요. 그래서 한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나머지 세 발레단과 SBT는 분명히 다른 지점을 보여주는 거죠. 그렇게 하기 위해서 고안한 게 우선 오케스트라를 절대 피트에 배치하지 말고 무대 위로 올리기로 했습니다. 두 번째로 저희는 제작비가 부족해서 예술의전당에 있는 무대 기계들을 작품에 모두 쓰기로 했습니다. 리어 스테이지의 외관이 앞으로 나오게 만들고 옆무대가 본무대로 들어오게 만들고 숨겨진 지하 외관이 위로 올라오도록 무대 시스템을 완전히 다 활용해서 우리만의 독특한 발레를 만들어보는 게 그때 목표였던 것 같습니다. 정말 없는 제작비에서 십자가 하나 커다랗게 만든 거 말고는 세트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말씀드리려는 것은 SBT가 25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가장 포인트로 삼아야 했던 것은 적은 예산이지만 남들과 다른 발레를 만들고자 노력했던 점입니다. 개런티가 부족하더라도 제임스전 선생님 작품에 참여하고 싶은 제작진이 많다는 것도 저는 느꼈습니다. 좋은 작품을 만들 때 좋은 사람들과 좋은 기운들이 모아져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저희한테 그만큼의 신뢰를 주셨기 때문에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나 에너지들이 상당히 좋은 쪽으로 계속 진행됐던 것 같습니다. 사소하게 들릴지 몰라도, 공연 후 뒷풀이에서 스탭진까지 모두 챙기시는 정성과 환대가 특히 저를 SBT와 제임스전 선생님과 20년 넘게 관계를 지속하도록 하였습니다. 선생님의 작품을 계속 기다리겠습니다.
김채현: 아쉽지만 이 정도 선에서 마칠까 합니다. 수십 년간에 걸친 작업을 어찌 두어 시간으로 압축할 수 있겠습니까. 이 프로그램이 춤작가의 장구한 작업과 혼신의 열정을 단시간 내에서나마 비평시각을 중심으로 조명함으로써 또 다른 의미의 자료로서 역할을 할 것은 물론 개별 작가에 대해 향후에 있음직한 보다 심층적인 인터뷰를 추진할 든든한 계기로 작용하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오늘 처음 시도하는 프로그램이라 미흡한 점이 많을 겁니다. 인터뷰의 주역으로 초빙에 응하신 제임스전 선생님 그리고 깊은 관심으로 참석하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