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비평시각 심층 공개 인터뷰: 안애순
현대춤 안무가 안애순 심층 공개 인터뷰 제1편
  • 일    시
    2024. 09. 24.(화) 13:30 ~ 16:00
  • 장    소
    예술가의집(서울 대학로)

인터뷰이│ 안애순        

인터뷰어│ 김채현·장광열·​이지현 

후   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춤비평가협회(춤비협)는 지난 9월 ‘원로·중견 춤작가 초빙 비평시각 심층 공개 인터뷰’로서 현대춤 안무가 안애순님을 초청하여 진행하였다.
인터뷰는 인터뷰이와 인터뷰어가 비공개로 진행하는 것이 통례이다. 이번 심층 공개 인터뷰는 공개된 자리에서 복수의 인터뷰어가 진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예술인 즉 춤작가에 대한 인터뷰이므로 비평시각이 중심이어야 한다. 이 프로그램은 춤비협에서 지난해 연말에 제안되어 올해 들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활성화지원사업으로 선정되었고, 이를 기준으로 춤비협 내에서는 지난 상반기에 춤작가 5인(배정혜·미나유·제임스전·안애순·김은희)을 선정한 바 있다. 이 프로그램은 올 연말까지 진행된다.
이 같은 유형의 심층 공개 인터뷰는 인터뷰의 일반적 관행과 형식을 탈피하므로 낯선 점이 있고 인터뷰이는 물론 인터뷰어에게도 사실상 선례가 없다시피 해서 그 형식을 모색하고 다듬어가야 할 것이다. 심층·공개·비평시각이라는 3요소를 춤작가와의 인터뷰에 녹여내어 춤작가의 면모를 가급적 충실히 드러내고 또한 공개 형식을 취함으로써 내용 면에서 객관성을 견지할 것이 요망된다. 앞으로 지속적으로 추진될 본 프로그램이 무용인들의 작업을 깊이 있게 재조망하고 비평의 토대를 다지는 데 이바지할 것을 기대하며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안애순님 초빙 인터뷰를 위한 패널로 김채현(〈춤웹진〉 편집장)·장광열(IPAP 대표)·이지현(춤비평가), 3인이 정해졌다. 패널들은 안애순이 제공한 공연 및 비평 자료들을 숙지하고 사전에 비대면 예비 모임을 가져 이번 인터뷰의 주제를 몇 가지로 정하는 작업을 진행한 바 있다.
9월 20일 행사는 모더레이터를 겸한 김채현 패널의 사회로 참석자 소개를 간략히 진행한 후 본론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공개 인터뷰 취지에 맞춰 참석자들이 의견을 표하는 기회도 제공되었다. 안애순님 인터뷰는 분량을 고려하여 〈춤웹진〉에 나누어 게재된다. - 편집자



〈춤웹진〉 독자들을 위한 안애순 간략 참조 사항:
이화여대 졸업 / 바뇰레안무대회 참가(1992, 1994, 1998; 최고무용수상 1994, 그랑프리 수상 1998) / 한국공연예술센터(한팩) 예술감독(2020~2012) /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2013~2016)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무용커뮤니티 예술감독(2013~ ) / 서울예대 교수



지난 9월 24일 오후에 있은 춤작가 안애순 초빙 비평시각 심층 공개 인터뷰, 예술가의집, 서울 대학로, 한국춤비평가협회 주최 ⓒ춤웹진



김채현: 이번 인터뷰를 위해서 지난 두어 달 준비했습니다. 먼저 부탁드린 자료를 받아서 우리 패널들과 제가 다시 살펴보면서 어디에 초점을 맞출지 협의하였습니다. 중요한 몇 가지에 대해 답을 듣기보다는 시간 절약을 위해 안 선생님께 미리 말씀을 드렸지요. 우선 안 선생님이 지금까지 해오신 많은 작품들 가운데 세 가지를 간략히 소개해 주시고, 그 세 가지를 소개하시는 이유도 곁들였으면 합니다.


세 작품
 

안애순: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시기별로 나눠 세 작품을 골라보았습니다. 먼저 〈11번째 그림자〉입니다. 이 작품은 90년대, 젊은 나이에 프랑스 바뇰레국제안무대회 출품작입니다. 해당 대회는 500명 넘는 안무가들이 영상을 제출하고 여러 심사를 거쳐서 마지막 파이널에 몇 작품이 올라갑니다. 거기서 제 작품이 세 번 올라갔습니다. 사실 세계 인명사전에 난 거보다도 바뇰레대회에 나갔다는 것이 저에게 국제적 안무가 반열에 들었다는 의의가 있었던 행사였습니다. 90년대는 98년도의 〈11번째 그림자〉 작품이 제 작업 형식과 스타일을 반영했던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는 〈불쌍〉입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나라 굿을 가지고 새 형식을 시도했었습니다. 굿에서 가져온 것은 상당한 논리성과 해체적이면서도 우연성을 품은 부분, 그리고, 놀이성이 재미있었습니다. 지나치게 짜인 형식적 춤을 거부하기 시작했던 그런 시기였던 것 같고 그때부터 안무자와 무용수의 만남 자체가 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관객들이 당혹스러워하기도 했습니다. 그전에는 제가 동작을 주면 무용수들이 그것을 습득하고 또 본인들이 해석하도록 만들었다면, 이제는 움직임도 완전히 리서치를 베이스로 해서 각자가 자기의 춤, 자기의 흥미 등을 리서치해서 그것을 자기 몸으로 변형해내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이에 따라 무용수의 몸을 관찰하기 시작하고 그것을 통해서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던 그런 시기여서 〈불쌍〉을 선정했습니다. 또 그때 한창 해체 작업을 하면서 시각적 무대 세트나 영상 분야, 그리고 설치 미술가들을 자주 만났는데 〈불쌍〉은 또 최정화 시각예술 작가의 작업과 만난 작품이라서 꼽아봤습니다.
 다음으로 최근 국립무용단과 만든 〈행 +-〉 작업을 뽑았습니다. 요즘 저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것을 찾고 그러면서 그 안에 있는 몸의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근래에 강강술래의 패턴을 갖고 여성의 춤을 만들었던 〈Here There〉, 또 재작년에 국립현대무용단 의뢰로 했던 〈몸쓰다〉 작업 등도 있는데, 그중에서도 최근에 여러분들이 보셨을 것 같아서 〈행 +-〉을 골라봤습니다.

김채현: 네, 세 작품을 고르신 연유를 곁들인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러면 패널들이 궁금한 점을 중심으로 해서 곧 바로 말씀들을 나누기로 하지요.


전통-한국적인 것
 

이지현: 안애순 안무가님은 대학원 시절에 〈뿌리〉라는 작품을 84년 공식적으로 발표하면서 관심을 받기 시작하신 줄로 압니다. 지금부터 40년 전일이고 40년 동안 꾸준히 작업을 지속한 안무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 인터넷과 데이터베이스 구축이 잘 돼 있지만 공식적으로 이름을 검색하면 우리 안무가에 대한 기록이 굉장히 부족합니다. 안 선생님의 경우 제가 구글링 해보니까 해외에 번역된 본인 소개라든지 데이터베이스가 오히려 더 좀 잘 돼 있는 편이고 국내 데이터베이스는 정말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심층 인터뷰가안무가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공식적인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바램도 있습니다. 특히나 공연 후 리뷰들이 나오지만 안무가에 대한 어떤 깊이 있고 집중적인 비평 토론이 이렇게 같이 한 자리에서 논의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 듯합니다.
 제 판단에는 84년작 〈뿌리〉는 제목부터 심상치 않았어요. 자기 작품들 가운데 첫 번째 제목에서 자신의 뿌리를 향해 나가려는 그런 것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녹아 있는 것 같아서 이번에 조사하면서 인상 깊게 봤습니다. 그리고 또 이런 식의 분석도 해봤습니다. 안애순 하면 한국 전통적인 소재에 천착하고 그것을 집요하게 풀어나가면서 현대춤 언어로 만들어가는 그런 춤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지난 40년 동안의 작품에서 한국적 소재인 작품이 어느 정도이고 그다음에 그런 것과는 별개인 현대적 감각으로 한 작품이 어느 정도인가를 제가 한번 쭉 훑어봤습니다.



안애순 〈씻김〉, 1992 ⓒ안애순



안애순 〈여백〉, 1994 ⓒ안애순



이지현: 역시 압도적으로 한국적 소재, 한국적인 음악, 한국적인 철학, 종교 이런 것들을 갖고 만든 작품이 많았습니다. 〈뿌리〉도 약간 그런 느낌이 들었는데, 89년 〈정한수〉, 90년 〈업〉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매우 토속적이고 민속적인 작업들이죠. 92년에 드디어는 〈씻김〉이라는 단어가 나오면서 굿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듯해요. 그다음에 〈여백〉 이것도 사실은 아주 동양적 감각입니다. 그다음 방금 말씀하신 〈11번째 그림자〉인데 이 작품이 92년부터 94년, 98년 이렇게 연달아 프랑스 바뇰레국제안무대회에서 우수한 상을 받으면서 안무가로서의 자기 방향성 내지는 그에 대한 대외적 인정 이런 것들이 함께 이뤄졌던 시절입니다. 다음에 95년도의 〈해, 숨, 달〉, 96년도의 〈명〉 이런 것도 한국적이죠. 2001년에 〈굿-Play〉라는 작품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굿을 직접적으로 명명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다음에 〈하얀나비의 비명... 아이고〉도 우리 시대에 어떤 의성어로 하면 아이고도 되고 영어로 중의적인 단어가 되기도 하고 그다음에 〈원〉 같은 것도 우리 알아야 하겠죠. 우리나라의 어떤 감성을 갖고 있는 거고 그다음에 2003년작 〈찰나〉라는 작품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흘러가서 2009년작 〈불쌍〉까지 거의 10년에 육박하는 시기 동안 그런 흐름이 아주 굵직하면서도 집요하게 흐르는 안무 경향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다가 무슨 연유였는지 2010년대가 되면 〈S는 P다〉가 나옵니다. 저희도 어려워할 어떤 현대적인 감각입니다. 우리가 알 길 없는 굉장히 현대 예술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고, 그다음에 〈From Science to Silence〉 같은 작품들, 그 후에 또 〈타임스퀘어〉 〈평행 교차〉 〈공일차원〉 〈어린왕자〉 〈11분〉 등 이런 작품들은 한국 전통적 소재라기보다는 아까 말했듯 현대적 언어, 현대적인 몸에 대한 여러 가지 관념들에 대한 실험작이라 생각됩니다. 2010년대에 이르러서 그렇게 뚜렷이 경향이 바뀐 그 지점에 대해서 안무자 본인의 내면 변화 혹은 생각 변화, 안무 방식의 변화 이런 게 있었다면 좀 소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안애순: 그러네요. 2010년에 이르러 더 관념적인 생각들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작업을 하면 할수록 인문학 내지는 춤이 어떤 발언을 해야 할지 같은 생각을 많이 했던 시기였던 것 같고 저 스스로도 쉽지 않은 작업이었던 느낌입니다. 그러나 그때 생각한 점으로서 전통 자체도 하나의 문화이고, 또 현대라는 어떤 문화에서 계속 그 문화와 문화가 충돌하는 그 연결 지점에 제가 있었다고 봅니다. 그 무렵에 〈평행 교차〉나 〈타임스퀘어〉 등 계속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곳을 어떻게 정의하고 이 현실적인 공간과 그 전 공간, 그 후 공간, 그리고 가끔씩 가상에 대한 이야기도 하게됩니다. 시간이 이렇게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 내가 생각하는 과거와 미래가 마구 교차한다고 봅니다. 그러한 점들이 지금까지 작품에 반영되고 공연 제목들도 그렇게 나왔지요.
 방금 〈뿌리〉를 말씀하셨는데요, 대학 졸업 후 제 첫 솔로 작업이었습니다. 사실 그 작품으로 특별하게 안무가로서 언급될 만한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지금 학생들은 잘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마사 그레이엄 테크닉이 우리나라 현대무용의 대표적이었어요. 모든 사람들이 그 몸짓으로 추어야 했습니다. 저도 사실은 이화여대에서 마사 그레이엄 테크닉을 배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솔로 작품에서 저는 바닥에서 일어나지 않았어요. 12~13분 정도 되는데 계속 바닥을 부비며 진행하는 춤입니다. 사람들은 주변에서 어떤 것을 춤이라 정의하면 영향받기 마련입니다. 안무가로서 어떻게 저렇게 상상할 수 있지, 그러시면서들 말씀을 나누시는 분들이 많이 주목해 주셨던 것 같습니다.
 서두에 소개했던 저의 제1기는 한국 전통과 관련하여 한국춤이 가진, 또 우리 몸이 가진 유니크한 것, 그것이 무엇인지 굉장히 탐색했던 그런 시기였던 것 같아요. 그 당시 많은 분들이 한국적 소재 및 주제를 갖고 작품을 많이 했었고 평론 쪽에서도 ‘한국적’ ‘한국 전통의’ 등 이런 언급을 할 적에 저로서는 그것이 미래적이며 새로운 느낌이 아니라 상당히 고루한 느낌이 들었고 다른 사람들도 더러 그랬을 듯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방식의 춤에서 스스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99년작 〈온 타임〉에서는 존 애덤스의 미니멀 음악을 가지고 아주 감각적인 현대적인 춤을 보여드렸고 그 당시에 춤평론가협회에서 상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부터 굿 이야기를 했는데요, 사실은 우리 전통 그리고 굿 안에 현대적이며 체계적인 다른 안무가들이 하던 것들이 이미 있습니다. 굿이라는 건 옛날에 공연이었습니다. 극장에서 이뤄진 건 아니었지만, 춤추고 노래하고 사람들과 소통하고 굉장히 인터렉티브한 여러 상황들도 있었고 그래서 우리 굿이라는 전통 안에 있는 철학을 갖고 작품화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시기였지요. 전통이 보여주는 어떤 몸짓의 것 혹은 철학이 제의 지금까지 춤 세계에 굉장히 영향을 많이 끼쳤다는 생각입니다.

이지현: 조금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바뇰레국제안무대회에서 〈11번째 그림자〉로 안무력을 인정받고 그 작품으로 해외 공연 초청을 자주 받았어요. 미국 순회공연을 5개 도시에서 진행하게 되고 독일도 가고 여러 곳에서 2005년까지 〈11번째 그림자〉로 해외 공연을 다닙니다. 해외에서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그다음에 그 작품이 장수한 비결 혹은 이유가 있었다면 있었다면 무엇일까요.



안애순 〈11번째 그림자〉, 1998 ⓒ안애순



안애순: 〈11번째 그림자〉는 영상으로 투사되는 그림자 놀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게 우리 한국 전통의 만석중놀이라는 거였고 아주 단순한 것이었어요. 하얀 백지에 색색깔의 종이 그림의 해가 뜨고 십장생이 나오고 이 세계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표현합니다. 제목이 〈11번째 그림자〉였던 건 10개의 우주 만물을 창조한 후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과도한 욕망 내지는 놀이, 이런 것들을 갖고 우리 삶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또 아름답고 참 동양적인 만석중놀이는 아시아에서는 첫 영화적 기법이 아니었나 말하는 분도 있더군요. 그래서 공연 당시 90년대초에 영상이란 것이 한국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았을 때였는데 원본을 보듯이 아름다운 배경으로 펼쳐졌습니다. 또 하나는 지금의 아이솔레이션 움직임처럼 목각 인형이 마디가 절개된 것처럼 해서 호흡을 내려놓으면서 akel 마디 움직입니다. 서양에서는 그들이 보지 못했던 그런 움직임들에 대해서 유니크한 방식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이지현: 두 번째로 뽑으신 〈불쌍〉이라는 작품도 해외 공연을 자주 합니다. 이 작품은 2009년도에 LG아트센터랑 같이 제작하신거요? LG에서의 초연 후에 해외에서 콜이 있을 때마다 하셨고, 그다음에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이 되기 직전의 작품이라 부임하시고 재제작하면서 조금 더 확장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작품의 경우 이름도 너무나 뚜렷하잖아요. 부디스트 스태츄(Buddhist statue)라든지 그냥 불상이라고 용어를 써서 해외에 많이 알리고, 강력한 불상의 이미지, 최정화씨로부터 온 매우 시각적인 컬러풀함, 백스테이지의 어떤 강력한 영상, 그다음에 원형 플라스틱 소쿠리를 던지고 서로 뿌리고 이렇게 하는 것들이 두 번째 시기의 대표작이라고 꼽을 만큼 확연하게 어떤 변화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작품 역시 해외 공연을 많이 하셨고 주로 유럽에서 하셨던 것 같아요. 유럽을 다니시면서 어떠셨는지 반응은 또 어땠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안애순 〈불쌍〉, 2014 ⓒ안애순



안애순: 〈불쌍〉은 제목에도 중의적인 게 있죠. 우선 최정화 씨의 불상들이 무대에 많이 나오고 발음은 나오는 대로 불상(불쌍)이라고 하죠. 그 당시 파리의 붓다 바에서 어마어마한 불상을 인테리어로 활용하고 거기서 새 음악을 사람들이 즐기는 것이 아주 유행했어요. 사실 그 당시에 저는 동양인이고 한국인으로서 우리의 종교적 상징인 불상을 그들이 또 다른 문화의 인테리어로 갖고 가는 것이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과 남들이 보고 있는 것 사이의 충돌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최정화 씨도 플라스틱 소쿠리 같은 것들을 굉장히 많이 활용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소품을 통해 계속 공간이 이동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소쿠리로 집을 짓기도 하고 공간 영역을 표시하기도 하고 그것들이 또 파괴되고 부서지고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노마드족 같은, 우리의 짧은 근대화를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러면서 그때 우리나라 DJ로는 솔스케일이 1세대 선두 주자였잖아요. 그래서 그 시대에 라이브로 디제잉을 직접 무대 위에서 작업했습니다. 하나 재밌는 거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제가 예술감독을 하면서 작품도 하고 랩 사업도 했지만, 그때 아시아 각국의 많은 분들이 오셨어요. 근데 아시아 대다수의 나라는 사실 컨템퍼러리가 있지 않고 전통이에요. 그리고 자국의 가장 중요한 메인 종교가 불교인 나라들이 다수잖아요. 그래서 그분들이 〈불쌍〉의 쇼케이스를 잠깐 보고 투서를 했습니다. 자기들 종교의 그 신성한 불상을 끌어안고 얼굴을 부비고 뽀뽀하고 이러는 건 그들에게는 정말 있을 수 없는 쇼킹한 장면이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가진 전통적인 어떤 생각, 또 남이 바깥에서 봤을 때 그것이 또 어떤 생각으로 보여질지, 또 이 시대에는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 생각하는 이런 것들이 참 저에게는 호기심을 끌었습니다.

김채현: 시기별 작품 경향을 짚었습니다. 장광열 선생님, 말씀해 주시지요.


국내외 작업
 

장광열: 안애순님은 안무가로서, 예술 행정가로서, 교수로서 1980년대부터 2020년대 중반을 넘어서는 지난 40년 동안 한국 춤 사회의 변동과 함께 춤 현장에서 어떤 흐름을 주도했던 무용가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주 중요한 연구 대상이에요. 오늘 이 자리는 두 가지 점에서 특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안애순 무용가에 대한 자료를 준비하다 보니 아카이빙 측면에서라도 제대로 밝혀지지 내용들이 꽤 눈에 띄었어요. 그런 점에서 오늘 이 자리는 한 무용가에 대한 여러 가지가 새롭게 밝혀지고 자료도 새롭게 정리되는 계기로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막연하게 그냥 안무가, 무용수, 관객이 바라보는 한 무용가 안애순에 대한 한정된 시각을 확장하는 자리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안애순 무용가가 〈뿌리〉를 처음 발표했던 1884년도는 제가 공연예술 전문지 〈객석〉 기자로서 첫 발걸음을 디딜 때였는데 소극장 춤 작품으로서 〈객석〉에 최초로 소개된 작품이 〈뿌리〉입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이른바 대학교수들이 춤계의 활동을 주도하고 있었는데 당시 신인 안무가로서, 예술가로 부각되는 계기가 된 작품이 바로 〈뿌리〉입니다. 대학교수와 같은 선상에서 신인이 작가로서 비평가들에 의해 논의된 첫 인물이 바로 안애순입니다. 이는 우리 한국 무용사에서 당시의 춤 흐름을 기술할 때 언급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얼마 전 당시 문예회관이었던 아르코예술극장의 개관 40주년이 되어 제가 무용 부문 자료를 정리하는 작업에 참여했었는데, 그때 지난 40년 동안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문예회관에서 많은 작품을 올리고 가장 주목 받은 작품을 한 무용가를 선정하다 보니 안애순님의 작품이 가장 많았어요. 그만큼 안무가로서 확실하게 자신의 작품세계를 구축한 작가로서 안애순의 존재는, 바로 지난 40년 동안 쉬지 않고 창작 춤 작업을 행했고, 또한 지금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게 평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안무가로서 안애순의 지속적인 작업과 안무력에 대한 평가는 공연장과 단체가 연계된 상주예술단체 육성지원에 안애순무용단이 연속으로 선정된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호암아트홀 상주단체 시절, 〈굿-Play〉 등이 만들어졌고 강동아트센터 상주단체로 활동할 때는 안애순의 안무작들이 후배 무용가들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는 기획 프로그램도 시행됐었습니다. 국공립 단체인 국립현대무용단, 국립무용단, 국립국악원 무용단, 국립아시아문화전당까지 이 모든 공공 극장과 무용단체를 통한 안무 작업에도 안애순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나라의 공공 예술 단체와 공공 지원 제도의 틀 속에서 현대무용가로서 가장 러브콜을 많이 받은 안무가가 안애순입니다.
 대한민국 춤 사회 속에서 안애순을 논할 때 신인 때부터 안무가로서 입지를 굳힌 무용가, 지원제도와 국공립 단체 등 공적 기관과 연계된 활동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는 무용가, 국제 무대에서 소위 대한민국의 안무가로서 오롯이 자신의 작품을 극장과 축제 등에 진출시킨 무용가이자 동아시아의 안무가를 논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한국의 대표적인 안무가란 점이 언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안무가 안애순과 작업한 무용수들 중에서 적지 않은 무용가들이 우리 춤계에서 안무가로서의 입지를 확보해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안애순 안무가의 작품에 출연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자신만의 안무 감각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면 이는 안애순 안무가가 우리 무용계에 끼친 또 다른 긍정적인 영향입니다. 황수현 씨, 송주원 씨, 임지혜 씨 등 남이 하지 않는 독특한 작업을 해나가고 있는 안무가들이 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1번째 그림자〉는 자료에는 안 밝혀져 있는데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1998년 바뇰레국제안무대회에서 그랑프리를 받았죠. 바뇰레 안무대회는 전 세계에서 신청된 무용 영상이나 실제 공연을 심사위원들이 보고 본선에 진출할 16개 작품을 선정합니다. 지금은 국제적으로 안무 콩쿠르가 많이 생겨났지만 그 당시에는 거의 없었어요. 바뇰레 안무대회는 그래서 아시아 쪽의 안무가들이 국제 춤 시장에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서는 아주 중요했지요. 이지현 선생께서 아까 전체적으로 안애순 안무가의 작품을 한번 훑었기 때문에 간략히 말하자면 〈씻김〉이 92년에 본선 진출했고, 〈여백〉은 94년에 최우수 무용수상도 받았었죠. 그 다음 〈11번째 그림자〉가 98년에 그랑프리를 수상했는데 이 작품은 다음해 1999년도에 미국에서 공연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기록에는 이 작품이 미국 순회공연을 했다고만 되어 있지 누가 했는지, 어디에서 초청을 받았는지 상세한 기록이 다 빠져 있더군요. 안애순 안무가님 1999년도의 일 기억나시죠?
 제가 1995년에 무용예술의 국제교류를 목적으로 설립한 국제공연예술프로젝트가 당시 뉴욕에 본부를 둔 The Korea Society와 협력해 이 작품을 미국에 진출시켰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이 과정에서 중요했던 것은 바뇰레국제안무대회에서 수상한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국제 춤 시장에서 대한민국 현대무용은 경쟁력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외국의 좋은 극장에서 공연할 기회를 갖는 것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바뇰레국제안무대회에서 그랑프리를 받은 한국의 안무가, 이런 점이 해외 무대에 진출하는 데 굉장히 큰 강점이 됐습니다. 35분 정도 길이의 〈11번째 그림자〉와 댄스 컴퍼니 조박의 박호빈 조성주 안무 〈녹색 전갈의 비밀〉, 손인영 씨의 작품을 같이 묶어 ‘Emerging Korean Choreographer’란 타이틀로 공연을 했었습니다.





안애순 〈11번째 그림자〉, 1998 ⓒ안애순



김채현: 이해를 돕기 위해서 좀 더 말씀드리면 1999년 11월이었습니다. 데이턴, 필라델피아, 워싱턴이었죠?

장광열: 네. 뉴욕과 뉴올리언즈에서도 했었습니다. 말씀 드린데로 당시에 뉴욕에 본부를 둔 The Korea Society와 함께 기획했었는데 그 기관이 교육 프로그램만 하다가 공연 프로그램을 처음 시도한 것이 이 공연이었습니다. 뉴욕에서는 심포니스페이스란 극장, 워싱턴에서는 케네디센터에서 공연했어요.
 〈11번째 그림자〉는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요소들이 녹여져 있습니다. 그전에도 우리나라 안무가들의 작업 중에는 한국적 소재의 작업이 꽤 있었지만 이 작품이 특별히 주목받은 원인을 비평적 시각에서 보면 저는 전통적인 놀이 요소를 차용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석중놀이는 일종의 그림자극으로 음력 4월 초파일, 개성 지방에서 공연되었던 인형극 놀이입니다.
 그림자와 인형을 춤 공연에 차용한 것은 비주얼적인 면에서 서양 관객들이 보면 독창적인 한국의 전통적인 특성을 엿볼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출연한 6명의 무용수가 만들어내는 움직임과의 매칭입니다. 이 작품에서 무용수의 몸을 분절시키는 안애순의 안무는 움직이는 인형과 맞물려 더욱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첫 번째 질문은 안애순 선생님은 나이에 비해서 만드신 작품도 많고 주목받은 작품도 많아서 안무가 스스로도 아마 아직 정리가 좀 덜 된 그런 면들이 있을 것 같은데, 혹시 안무가 안애순의 작품 세계에 대해 쓰인 논문이 있나요? 이제는 한국 춤 사회의 변동과 함께 한 예술가로서의 안애순에 대한 연구 논문이 나 올 때가 된 것도 같습니다.
 다음 질문으로, 강동아트센터 상주단체로 있을 때 〈쉼표〉라는 이름으로 안애순의 대표적인 4개 작품인 〈만석의 꿈〉 〈여백〉 〈11번째 그림자〉 〈굿-Play〉를 안애순의 후배 무용가들이 새롭게 해석한 그런 기획 공연이 있었죠. 마사 그레이엄, 엘빈 에일리, 피나 바우쉬 등 유명한 작품을 남긴 안무가들이 작고한 다음에 아카이빙 차원에서 그들의 대표작을 새롭게 해석하는 작업들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 경우는 살아있는 안애순 안무가의 작품을 새롭게 해석한 작업입니다. 당시 〈11번째 그림자〉는 류석훈씨가 새롭게 해석해서 〈굿-조용한 비명〉이라는 이름으로 재해석한 것 같아요. 지금 시점에서 안무가 안애순이 만들어놓은 작품 중에서 혹시 아카이빙의 일환으로 새로운 해석이 곁들여진 작품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작품을 선정하고 싶으신지요?



ⓒ춤웹진



협업과 육성 랩

안애순: 잘 모르겠어요. 다른 안무가들도 본인 작업의 컨셉이 있을 것이고 저의 작업 중에서도 사람마다 관심 있는 것들이 다를 거라고 생각이 들어서 거꾸로 그들에게 물어보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방금 말씀하신 강동아트센터 작업의 경우는 제가 상주단체로 있으면서 아르코예술극장의 한팩 무용 예술감독으로 부임할 때였습니다. 무용수로 함께했던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 본인의 어떤 다른 해석을 붙일 수 있을까 한번 생각해 보자고 해서 했던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제가 저의 무용 작품 활동 말고도 랩(LAB) 사업을 한팩에서부터 국립현대무용단, 국립아시아문화전당까지 계속 해왔습니다. 그런데 사실 제가 무용 단체를 가지고 있을 때 이미 스몰 시어터라는 걸 만들었어요. 재미나게도, 무용수는 그저 몸 망가지고 춤추는 사람이 아니고, 그 사람 스스로의 몸은 이미 엄청난 리서치와 생각을 하고 있고 자기 몸을 갖고 무엇인가 표현해내야 한다는 것을 저희는 연구원 방식으로 했습니다. 저희 스튜디오에 와인, 고구마 같은 걸 쪄서 안주로도 놓고 주변의 음악가, 영상하는 친구들, 젊은 사람들, 이와 더불어 본인이 안무가가 될 어떤 능력이나 작품을 해본 경험 이런 것들을 나누었습니다. 이 현장 씬에 함께할 네트워크가 굉장히 중요했고 그런 사람들과 같이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걸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때부터 랩 사업처럼 무용수들에게 그런 기회를 줬던 것 같아요. 거기서 방금 말씀하신 황수현이나 독일에서 활동하는 임지애 씨 같은 친구들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젊은 사람들의 랩 사업을 만들면서 그들끼리 또 뭔가 시대를 진단하거나, 자기 형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거나, 아니면 다른 장르의 사람들을 만나는 그런 여건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이미 안애순 무용단 때부터 있었고 아까 얘기한 제 작업을 갖고 다시 무용수가 나름대로 해석하고 자기식의 안무를 해내는 것들을 제안했습니다.

장광열: 인큐베이팅 작업이나 이런 것들은 아마 나중에 다른 측면에서 좀 더 조망하려고 합니다. 하나만 더 질문 드릴께요. 아까 대표적 작품으로 〈11번째 그림자〉 〈불쌍〉 〈행 +-〉, 이렇게 3개를 짚었는데 만약 저한테 비평가로서 당신은 안애순 대표 작품 3개를 어떤 걸 뽑겠느냐 역으로 질문하면 저는 다릅니다. 그중의 하나는 〈11번째 그림자〉로 의견이 같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우리 안무가들이 전통을 해체하는 방식은 굉장히 다양한데 안무가 안애순은 그걸 다 해본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첫 번째는 전통음악을 해체해서 썼고, 전통 음악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음악가를 활용하는 것도 다 달라요. 예를 들면 〈하얀 나비의 비명... 아이고〉에서 썼던 음악이 다르고, 또 〈온타임〉에서는 느리고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정가를 작품에 잘 끄집어내어 접목했습니다. 또 얼마 전 국립무용단이 공연한 〈행 +-〉처럼 우리나라의 궁중무용을 해체했죠. 말씀드린 대로 〈11번째 그림자〉는 놀이적인 것을 해체했다는 것 때문에 저는 특히 높이 평가하는 겁니다. 남사당놀이, 부포놀음 등 한국의 안무가들이 전통적인 것들을 차용한 안무 작업을 할 때 놀이적 요소를 살리는 작업을 앞으로도 더 확장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2002년에 호암아트홀 상주단체로 만든 작품 중에 〈굿-Play〉라는 작품이 있지요. 이 작품은 음악의 즉흥성을 무용과 결합시켜서 객석을 난장판으로 만든 작품입니다. 한마디로 그 당시에 소위 유럽이라든지 미국 쪽에서 말하는 컨템퍼러리댄스의 어떤 영역에서 우리 현대무용을 바라보는 시각의 단초가 됐던 작품을 저는 이 작품으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전통 굿거리장단 같은 것을 해체하는 방식이 그냥 음악적으로 해체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철판을 막 두드리거나 마이크를 두들기고, 그다음에는 달파란 작곡가, 김기영 작곡가들의 작품과 같이 엮이게 하면서 기존 무용가들이 음악을 사용하는 방식과 음악적으로 완전히 달랐고, 굿 해체 방식도 굉장히 달랐습니다. 우리 무용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임프로비제이션을 음악·춤·움직임을 엮어서 같이 했기 때문에 당시 우리 춤계에서 보면 무용이 가진 극장 예술의 영역을 굉장히 확장시킨 작업으로 보기 때문에 저는 이 작품을 안애순의 작품 중 주목할 만한 작업으로 뽑고 싶습니다.
 다시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몬트리올댄스컴퍼니하고 같이 작업하신 적이 있죠? 당시에 우리나라 안무가들이 해외에 진출한 적이 있지만, 안애순 무용가가 국제 무대로 진출할 때 다른 안무가들하고 다른 점이 두 가지가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외국에서 현대무용을 공연했다는 것이 굉장히 화제가 되는 그런 시대였는데 중요한 건 어디서 했느냐인 거죠. 예를 들어 외국 무용단들이 한국에 와서 공연을 하는데 아르코예술극장이냐, 예술의전당이냐, 아니면 문래동의 소극장이냐 등 어느 극장에서 했느냐에 따라 다르잖아요. 무용가 안애순이 공연했던 외국의 극장 중에는 일급 공연장들이 여럿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점은 아카이빙 차원에서 차후에 연구할 때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지금은 우리에게서도 사례가 더 많이 늘었지만, 외국 안무가, 외국 컴퍼니와 같이 작업을 한 사례가 많지 않습니다. 그 당시 몬트리올댄스컴퍼니는 캐나다를 대표하는 1급 단체인데 공동 작업을 하면서 당시 같이 예술감독을 했던 캐시 케이시(Kathy Casey)가 작업이 끝난 다음에 안무가 안애순님에 대해 코멘트를 한 게 있어요. 외국에 있는 무용 전문가들이 대한민국 안무가들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했고 비평가들이 어떤 리뷰를 남겼는지는 해당 안무가를 연구할 때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그 당시 캐시 케이스가 안애순씨의 특징으로 꼽은 게 강렬한 표현력, 세련된 리듬감인데 이때 말하는 리듬감이 음악적인 면인지 아니면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부분인지 궁금합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가 공간 활용 능력을 주목했는데 비평가로서 제가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제가 안애순의 안무적 특징에 추가하고 싶은 것은 피나 바우쉬 안무 스타일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무용수한테서 끄집어내는, 무용수 스스로가 갖고 있는 어떤 개성적인 부분을 터치한 움직임과 함께 즉흥성과 유희성 관점입니다.
 이제 이 질문 하나를 드리고 싶은데 〈굿-Play〉를 했을 때 도대체 그런 발상을 어떻게 하신 건가요? 뛰어난 아티스트들과의 협업을 중요시하는 것도 안무가 안애순의 특징 중의 하나인데 〈굿-Play〉의 아이디어는 사실 극장예술로서의 무용공연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사례라고 보기 때문에 그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왔는지 궁금합니다. 몬트리올 댄스 컴퍼니 예술감독 케이시가 얘기한 이 리듬감이 어느 면에서 평가되었다고 생각되는지도 함께 말씀해 주시지요.

안애순: 이미 말씀드렸듯이 굿에 대한 철학을 즉흥성, 놀이성, 해체성, 우연성 이런 면에서 이야기하게 되면서 뭔가 형식적으로 짜여진 음악에 맞추고 나의 동작을 무용수가 복사해서 연기하고 이런 것에서 벗어나자는 마음이 컸습니다. 그 첫 작품이 〈하얀나비의 비명... 아이고〉라는 작업이었고 그 작품은 미쳤다고 할 정도로 무대에서 정말 완전히 놀이를 했습니다. 뭐 이게 작품이냐, 이제 안애순은 죽었다 등 관객들과 평론가들로부터 굉장히 비난받았을 때가 딱 그때입니다. 그런데 지금 지나고 나니까 그때 작업이 사실 가장 빛나고 지금까지 작업하는 데 큰 기반이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굿에 대한 작업을 많이 했기 때문에 〈굿-Play〉라는 작업이 있었습니다. 제가 작곡가 김기영 선생님과 작업을 6~7년 했을 거예요. 그때는 무용수들이 노래도 하고 대사도 하고 더군다나 음악을 직접 만들어야지 말하자면 그분은 음악을 미리 안 만들어줬습니다. 그분은 가장 진정한 음악은 무용수들의 호흡과 무용수들이 부르는 자기 음악이어야 한다는 걸 고집하고 정말 최소한의 음악만 만들어주고 라이브로 했습니다. 나중에 제가 김기영 선생님 탓으로 돌렸죠. 무용수들은 무용수대로 너무 지치고 힘들고 음악을 라이브로 한다는 것 자체가 보는 관객에게도 몹시 힘든 과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음악 좀 만들어달라 그랬는데 굽히지 않았고, 우리가 이별을 맞이해야 하는 그런 과정도 있었죠. 그럼에도 그분이 결국 무용수 스스로 만들어내는 음악, 몸에서 나오는 그 음악, 그것이 무대 내내 살아 있어야 한다고 한 것이 6~7년 동안에 중요한 어떤 스타일을 만들어냈던 듯합니다. 그래서 감사해하고 있고 그건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행 +-〉에서도 무용수들에게 정가 음악이나 좀 더 자유롭게 라이브로 그들의 몸에서 나오는 소리 움직임을 하면서 그런 것들을 더 생생하게 하는 장치가 있었으면 했는데 거기까지는 못했으나 지금까지도 저는 그것이 정말 살아있는 음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케이시 예술감독이 말했던 리듬감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찰나〉는 제가 바닷속에 빠져 죽으려고 그러는데 진짜 파노라마처럼 뭐가 이렇게 머릿속에 지나가는 그런 순간을 생각하면서 만들었습니다. 무용수의 몸 자체가 일단 마사 그레이엄 쪽으로 몹시 딱딱하고 정형화돼 있는 어떤 것이 있었어요. 근데 그때 이미 〈11번째 그림자〉나 한국춤처럼 릴랙스하는 것들을 계속 주입하면서, 또 그들 몸 속 그들의 믿음과 잘 만나면서 신선한 움직임이 나왔던 것 같고 그래서 그런 리듬감을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리고 제가 작품 활동 뒷 시기에 시간과 공간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는데 제가 작품할 때 공간을 자주 활용한다는 이야기는 안무적인 어떤 패턴을 그리거나 또 다른 미장센과 극장에 있는 것들을 활용하는 이런 부분에서 공간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찰나〉는 사실 계약은 분명히 했는데 뒤에 이 사람들이 굉장히 오래 공연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번은 미국에 있던 교민이 저한테 전화를 걸어 안애순이 공연 온다고 했다고 그러면서 미국을 오느냐고 물었는데 저는 그런 일정이 없고 안 간다고 답했죠. 저도 모르게 몇 년 뒤에 몬트리올댄스컴퍼니에서 공연하고 그게 신문에 나서 그 기사를 읽고 제가 미국에 가는 줄 알고 거꾸로 저한테 연락이 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저의 레퍼토리가 다른 외국 무용단의 레퍼토리가 돼서 수년간 투어해 왔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습니다.

김채현: 아까 우리 장광열 선생님이 아카이빙하고 싶은 작품이 있느냐 질문한 거에 대해서 답이 안 나왔습니다. 사실 답이 안 나왔다기보다 본인이 처음에 소개한 세 개를 아마 다 아카이빙하고 싶은 것 아닙니까?

안애순: 맞습니다. 참여한 무용수로 우리 한상률 선생도 있고 다른 분들도 계시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서 흥미로운 게 다르고, 또 〈이미 아직〉이나 〈공일차원〉도 저는 개인적으로 아쉽고 〈하얀나비의 비명... 아이고〉도 해체적으로 재밌게 했던 작업이었습니다. 한두 개가 아니라 아쉬움이 있는 것들이 있는데 근데 뭐부터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김채현: 그럼 좀 더 과장되게 이야기하면 다 아카이빙하고 싶다는 말인가요?

안애순: 그러네요. 저에 의해서도 남에 의해서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김채현: 꿈을 꾸세요.

안애순: 네.
 

김채현: 그다음에 간단하게 질문을 드리겠는데 〈11번째 그림자〉에서 옛날 만석중놀이를 응용해서 현대무용에 착안하자는 그 아이디어는 어떻게 나오게 된 거예요?

안애순: 일단 영상의 세계가 우리 공연예술에 들어오기 전이었고 그런 효과애 대해 생각하던 와중에 만석중놀이를 실제로 보게 되었습니다. 민속연구가 심우성 선생님과의 만남에서 실제로 라이브로 플레이하는 것이 이야기가 돼서 하셨었고, 바뇰레국제안무대회에 갔을 때도 중대 교수로 뮤지컬 연출가인 이지나 이런 사람들도 그렇고 다 뒤에서 플레이를 했어요. 그러니까 뒤에서 플레이하다가 마지막 커튼콜 인사에 나왔는데 그 많은 뒤에서 사람들이 플레이했다는 사실에 굉장히 놀라워했습니다. 그래서 저한테는 전통에서 맛볼 수 있는 인간 이 만들어내는 영상이고 거기에 작은 실수도 있고 플레이 자체가 인간들이 하는 플레이라서 그걸 살아있다고 할지 완벽하지 않다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으나, 매번의 공연이 또 다르고 그런 데에서 아주 또 다른 아름다움을 느꼈습니다.

김채현: 〈11번째 그림자〉뿐만 아니고 〈정한수〉나 〈씻김〉이라든지 등등 한국의 어떤 민속 신앙 또는 한국의 어떤 문물 그것이 이제 현대무용과 결합한 부분은 우리가 영상을 보고 나서 조금 더 이야기를 정리했으면 좋겠습니다. 우선 영상을 보기 전에 특히 〈행 +-〉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를 진행해야 영상 보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행이 중의적 의미로 움직이는, 무브(move) 그리고 행렬이라는 행 그 둘을 다 의미한다 그러셨습니다. 또 강강술래뿐 아니라 춘앵전의 도형 내지는 대형 도안을 좀 응용하셨는데 그 계기 혹은 동기를 조금 더 소개해 주세요.





안애순 〈행 +-〉, 2024 ⓒ국립무용단



안애순: 일단 제가 춘앵전을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근래에 공간 이야기를 하면서 사각(형)에 대해 많이 고민하는데, 춘앵전에 나오는 조그마한 화문석 돗자리는 본인들이 상상하고 자신들이 있었던 어떤 공간이면서 조금은 박물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궁중무용이기 때문에 굉장히 절제 및 정제되어 있고, 또 지금의 우리 입장에서 볼 때 굉장히 미니멀한 춤이라 생각했어요. 개인의 표현이 없는 그런 최소한의 팔 동작을 가지고 어떤 자연이란 것을 노래하는 그 춤에 대해서 궁금했고, 사실 우리는 잘 알 수 없는 단순한 동작들에 동작의 이름과 엄청난 의미들이 있어요.
 그중에 재미있었던 게 탑탑고(塔塔高)로 탑에 오르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초반에는 제목을 탑탑고로 하려고 하기도 했습니다. 한국 춤, 동양의 춤이 발동작이 별로 없는데, 그러나 상체는 또 어디에서 왔을까 싶었습니다. 그 방향의 틀어짐과 선 하나가 들어 올려질 때 밑에 숨겨져 있는 수많은 발동작, 특히 탑을 계속 올라가고 있는, 진행하고 있는 그 몸과 발동작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어요.
 그리고 전통춤에는 많은 사람이 나와 있어도 개인이 잘 드러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같은 하얀 색깔로 묶으면서도 그들의 계속되는 시간 아니면 그들의 이야기들을 연대적으로 묶여서 진행하는 것을 1장에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중간에 정가에서 판소리로 변하는데 앞에 정가는 궁중의 작은 공간이라면 뒤로 2장으로 넘어가면서 민요가 나오죠. 좀 더 확장되는 공간으로 세상의 많은 고통, 더 넓고 큰 곳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람들의 노래, 노동력, 어떤 추임새 이런 것에 사용했습니다. 중간에 노래하시는 분은 정가에서 민요 쪽으로 넘어가는 노래의 브릿지를 잘 하면서 시간과 공간이 넘어가는 매개체로 쓰게 된 거죠. 그래서 개인이 더 확장되고 더 즉흥적이고 놀이적입니다.
 사실 한국춤은 매번의 공연이 똑같지 않습니다. 무용수의 컨디션, 대상, 음악에 따라서 다르게 춤춰야 그게 살아있는 춤이지 똑같은 춤이 추어질 수 없잖아요? 그래서 무용수들에게도 그런 것들을 많이 요구했고 그런 춤을 추게 했습니다. 또 무용수들이 자기가 무엇을 췄는지, 이게 맞나요? 저게 맞나요? 했는데 사실 맞는 건 없는 거죠. 그런 춤이 살아있는 춤이라 생각했고 그걸 무대에 올리기 위한 많은 과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춤웹진



- 이하 안애순 심층 공개 인터뷰 제2편(춤웹진 12월호)으로 이어짐

2024. 11.
사진제공_안애순, 춤웹진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