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미국에서 활동하는 이도희씨가 미국 동북부 보스턴 소재 뉴잉글랜드예술재단(NEFA)의 ‘전미 춤 프로젝트’(Nat'l Dance Project) 기금 수혜자로 선정되었다. 미국 전역의 예술인들을 지원하는 NEFA는 1976년 미국예술진흥기금(NEA)의 지원으로 설립된 공공 재단이다. 지난 7월 올해 전미 춤 프로젝트에 이도희씨는 앨빈 에일리 무용단, 할렘 댄스 시어터, 루신다 차일즈, 리즈 러맨 등 20개 단체(또는 개인)와 함께 선정되었다. 역사가 오랜 단체나 미국 춤계의 쟁쟁한 원로급 무용가들과 같은 명단에 올랐다는 자체가 특기할 일이다. 이씨는 2002년 미국 서부로 가서 푸리프로젝트를 결성하였고 2006년부터는 커뮤니티댄스 대가 안나 핼프린과 함께 하는 작업을 병행해왔다. 올해 제주문화재단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위해 제주에서 작업중인 이씨와 면담 인터뷰를 계획하였으나 제주에서의 예정된 작업 일정으로 인해 사정상 이메일과 전화로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김채현 NEFA의 전미 춤 프로젝트에 선정된 것을 축하드린다. 우선 NEFA의 NDP 춤 창작 기금 수혜자로 선정된 경위가 궁금하다.
이도희 New England Foundation for the Arts의 전미 춤 프로젝트는 미국 전역의 무용가들을 지원하는 기금사업으로서 지난 22년간 무용인들에게 새 작업을 돕고 순회공연을 보조한다. 이 기금은 3차례 심사를 통하여 진행된다. 1차 신청으로 편지를 통한 간단한 작업소개와 함께 신청서를 보낸 후 150단체(또는 개인)가 선정되면, 2차 서류를 접수하여 그 가운데 50여 단체를 추려낸 후, 3차에서는 최종 상세내용을 접수한다. 그 후 20팀을 최종 선정하는 과정을 밟는다. 몇 차례 진행되므로 긴장되고 기다림도 인내해야 한다.
이번 NDP 기금 수혜 규모는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결과물 제출은 어떻게 처리되는지 소개해달라.
작품 개발비 4만5천 달러, 운영비 1만 달러, 순회공연 소요금 3만5천 달러, 도합 9만 달러 규모이다. 이번 기금은 저의 〈무〉(巫) 작업의 일환으로 지원된다. 이번 7월에 지원 결정이 났고, 2020년에 첫 발표를 샌프란시스코 인근 오클랜드에서 가질 예정이다. 이후 2021년까지 LA, 시카고, 뉴욕, 포틀랜드 등지를 순회한다. 하와이에서도 할지 모르겠다. 순회 공연에서는 레지던시 형식으로 지역 예술인의 참여도 고려하고 있다.
순회 공연의 비용도 상당해 보인다. 여러 기금의 중복 수혜가 가능해서 이도회씨는 순회 공연을 위해 다른 재단의 지원도 추가로 확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번 NDP 선정 이전에 미국에서 여러 기금을 받은 것으로 전해 듣고 있다.
2013년에 받은 크리에이티브 캐피털 상을 계기로 제 작업이 미국 전역에 널리 알려진 것 같다. 신화를 통하여 역사와 현실의 이야기를 현대적이며 실험적인 제례형태로 작업을 꾸준히 해왔고 그런 작업의 중요성이 예술계에서 자리매김되고 또 장기간에 조금씩 실적을 쌓아온 게 결실을 맺은 듯하다. 이 기금으로 2014년에 〈마고〉를 발표하였다. 도리스 듀크 임팩트(2015년)는 누군가의 추천으로만 신청이 가능한 지원금으로 미국 전지역 예술인들이 대상이며 추천된 예술인은 2차례 심사를 거치며 무용, 음악, 연극 퍼포먼스 등의 분야에 각 3명의 최종 수상자가 선정된다. 저는 연극, 퍼포먼스부문 상을 받았다. 허브 앨버트 어워드(2016년)는 미국 전지역에서 작곡, 무용, 연극, 시각예술에 각 1명씩의 예술인을 선정하는 상으로 저는 작곡 부문에서 수상했다. 올 연초에 받은 구겐하임 펠로우십은 1925년에 만들어졌다. 학자와 예술인의 작업을 돕는 재단으로서 해마다 지원하는 3000여명의 학자와 예술인 가운데 175명을 선발하여 기금을 수여한다. 저는 극작가·퍼포먼스 아티스트로 선정되었다.
이씨에게서 들은 수혜 기금(또는 상금)은 우리 돈으로 크리에이티브 캐피털이 5천만원, 도리스 듀크 임팩트가 7천5백만원, 허브 앨버트 어워드가 7천만원 정도다. 인터뷰 중에 이씨는 기금의 결과물들을 대개 2~3년 안에 낸다고 밝혔다. 언제나 문제로 제기되듯이 한국의 공공 기금 집행 기간들이 1년인 점과 또 다시 비교된다. 이씨 역시 한국에서 작업해보니 그런 한계가 느껴진다고 한다. ‘숙성’할 여유를 갖고 천천히 가도록 하는 국내 제도와 풍토가 요청된다 하겠다.
내후년에 안나 핼프린은 100살이 된다. 지금도 현역이고, 그래서 아마 세계 최고령 현장 무용가일 듯하다. 2013년 1월 샌프란시스코 지역 무용가 안나 핼프린을 만나러 갔을 때 이도희씨가 함께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다음날 핼프린의 1965년 문제작 〈Parades and Changes〉의 리바이벌 공연 직전 리허설 현장에서 우리는 만난 적이 있다. 그래서 이도희씨가 안나 핼프린과 인연이 있구나 생각했었고, 그때 얘기를 나누질 못해 못내 아쉬웠다. 안나 핼프린은 국내에서 포스트모던댄스 무용가로는 더러 알려졌으나 커뮤니티댄스 무용가인 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핼프린과는 어떤 계기로 인연을 맺었는가?
2006년 동료 무용수인 시니치 코가, 쉘우드 첸과 함께 우리의 작업을 선생님께 보여주러 처음 뵙게 된 게 계기였다. 그때 선생님께서 가까운 곳에 사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좀 창피스럽긴 하지만, 저는 안나 선생님을 처음엔 잘 몰랐다. 한국춤을 해온 저로서는 선생님에 대해 당시에는 그다지 알지 못했다, 지금은 무용교육과정이 달라졌겠지만. 여하튼 저는 그 만남 후로 선생님 업적과 그분의 성향, 삶, 예술 등등에 매료되었다. 제가 한국에서부터 찾던 스승이 계셨기에… 안나 선생님을 만나 뵌 후, 그것을 깨달았다. 아! 스승님을 만나기 위해 여기에 왔었구나… 그게 많은 이유들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선생님과 함께 2009년 〈Spirit of Place〉, 2013년 〈Parades and Changes〉(초연 1965)를 올렸으며 2015년에는 안나 할프린 선생님의 95세 생일을 위한 〈95 Rituals〉 공연을 했고, 〈Prophetess-1947〉을 리바이벌하여 공연하였다. 지금은 2018년 10월 안나 선생님과 함께 디영뮤지엄의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안나 핼프린과 함께 해온 작업 또는 배운 점 등을 알고 싶다. 그리고 안나 핼프린 타말파연구소 학교와는 어떤 관계인가?
선생님과의 작업은 2종류로 나누어진다. 공연 작업 그리고 교육 작업이다. 공연 작업으로는 공동작업 위주로 참여하는 모든 예술인들의 각자의 개성을 민주적으로 존중하고 토론과 회의를 통하여 스코어를 함께 형성하는 방법으로 진행하는 것도 있고, 기존에 존재한 스코어를 통하여 재현하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그 재현 방법 속에서도 스스로의 예술 성향을 반영하여 창조해낸다는 독특함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해진 동작을 하는 것이 아닌, 그 작품의 의도를 알고 이것을 나는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 식으로 작업해나간다. 그러기에 선생님의 고유한 작업 진행 방식인 RSVP(재료/스코어/평가/실행) 사이클과 스코어링 프로세스는 매우 중요한 형식으로 정리되어 있다. 작품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나도 그 작품 안에 존재함을 느낄 수 있는 작업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한 작업을 일찍부터 해오셨고, 그러한 것을 창작과정에 넣어 많은 사람들에게 활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은 대단한 업적인 듯하다. 그러한 과정에서 안나 선생님의 남편이신 건축가 로렌스 할프린의 공헌이 컸다.
또한 타말파학교는 안나 선생님이 딸 다리아 할프린과 함께 설립하신 학교이고, 저 또한 그곳의 핵심 교수로 교육한다. 예술을 통해 삶과 예술이 연결되고 그것을 통한 창작과 치유가 이런저런 과정을 통해 창작 결과가 나오며 또 다양한 예술매체를 기반으로 교육하는 곳이다. 저는 이곳에서 몸의 소리와 움직임에 대한 수업을 중심으로 교육하고 있고 “SingingBody” 워크숍은 타말파학교를 포함하여 타 예술단체, 교육단체와 국제적으로 교류 교육하는 프로그램이다.
안나 핼프린의 남편 로렌스 핼프린은 바우하우스 창시자 발터 그로피우스에게서 건축 디자인을 수학한 후 (결혼한 안나 핼프린과 함께) 샌프란시스코 지역으로 이주하여 한평생 공공 건축을 추구하고 실행한 건축가이다. 로렌스의 공공성 우선 마인드는 안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로렌스는 안나의 커뮤니티 작업들에도 동참하였다.
본인에게 안나 핼프린은 무엇이라고 생각 드는가?
“공연은 굿이다”가 맞다는 것을 재확인해준 분이다. 물론 선생님과 제가 풀어나가는 방식이야 다르겠다, 우리의 뿌리와 문화가 다르듯. 그런데 그것을 제대로 관통하는 선생님이 계셔서 참 다행이었다. 선생님께서 항상 저에게 내가 누구인지, 나의 문화가 무엇인지를 근원으로 삼아 새로움을 창작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해주었다. 그런 맥락에서 저는 선생님의 의도와 저의 의도가 닮았다고 생각한다. “보여지는 모습은 다르되 의도된 바는 같다.”
저에게 안나 할프린이란 나의 할머니, 조언가, 스승이자 인생과 예술의 벗인 듯하다. 연세가 드신 스승님을 대하는 것이 자칫 힘든데, 안나 선생님이 상대방을 정말 동등한 벗으로 바라봐주시는 점에 대해 참 놀랐다. 가끔은 저를 다른 분께 소개할 때에도 도희는 나의 동료 예술인이고, 벗이자 나의 손녀라고 말씀하실 땐 정말 나도 이러한 스승이 언젠가는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선생님은 저에게 그런 분이신 것 같다. 저마다 가진 본인의 보물을 찾게 해주는 분? 특정한 무엇을 주기보다는 스스로 본인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찾게 해주는 그러한 안내자? 조언자? 그런 분이다. 그래서 저도 선생님처럼, 이야기를 많이 들으려고 한다. 올바른 피드백을 줄 줄 아는 스승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이 궁금해 해야 하는 것 같다. 선생님은 아직도 참 많이 궁금해 하시고, 즐거워하시며 사람들 만나서 알아가는 것을 소홀하시지 않는다. 그런 것들의 소중함을 알고 많이 실천해야 할 듯싶다. 그래서 선생님은 저에겐 참 소중한 스승이다.
미국으로 간 이유는 무엇이었나?
2002년에 미국에 갔다. 한국춤과 음악을 하던 제가 왜 미국을 택했는가는 당연한 물음이라 생각한다. 저는 전위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2000년(혹시 2001년)에 강태환님의 솔로 색소폰 공연을 본적이 있다. 대학로 소극장이었는데, 그때 그 선생님의 소리를 들으며 통제할 수 없었던 움직임들이 터져 나와 저도 모르게 콘서트에서 춤을 추어버렸다. 작은 에피소드이지만, 저에겐 그러한 자유가 필요했던 것 같다. 새로운 시도, 실험적인 소리와 움직임 이러한 것들이 아우성치는 내면을 계속 짓누르며 있던 것들이 서서히 꿈틀대며 나왔고 고민 끝에 다니던 대학원을 그만 두고 미국 서부지역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실험음악, 실험무용… 그것이 무엇인지 직접 체험하고 싶었다. 또한 그걸 계기로 나의 뿌리인 한국의 춤과 음악이 깊게 자리잡았고, 그것은 새로운 실험적인 작업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된 것 같다.
미국 이외 다른 외국에서 활동이나 작업을 한 경우가 있었는가?
춤 작업을 다양하게 했고 음악작업도 많이 했다. 2012~14 유럽 순회콘서트를 음악가들과 함께 하였으며, 제 개인 작업으로는 오스트리아 2018 우첸 아트 페스티벌에 초청되어 〈무/영매〉(巫/靈媒) 공연을 하였다. 2017년에는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안나 할프린 선생님의 작업 〈플라넷터리 댄스〉로 참가하였다. 2013, 14년에는 남미 페루에서 음악인 파우치 사사키와 〈무루〉 작업을 하였다. 현재는 2019년 3월 맥시코시티에서의 워크숍과 공연을 준비중이며, 6월에는 노르웨이와 이탈리아 베니스 투어 계획이 잡혀 있다.
미국이나 해외로 가기 전 한국에서 수학한 경력을 소개해 주기 바란다.
미국 가기 전에 저는 수원여대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하였다. 용인대학교에서 국악과 타악을 전공하였다. 그후 용인대에서 대학원을 다니다 자퇴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게 2002년이다.
미국에서 처음 시작한 Dohee Lee Puri Arts는 어떤 단체인가?
푸리프로젝트라고 2004년에 오클랜드에서 재즈, 타악하는 사람들과 함께 개인 작업을 시작하였다. 처음은 저를 위한 굿과 같은 형식의 작업을 올렸고, 그후 해마다 푸리의 의미에 맞게 풀어내야 할 이야기들의 주제로 작업을 올렸다. 한국전쟁 여성들의 이야기, 일제시대의 성노예 여성들의 이야기, 한국과 미국 역사의 관계성 이야기를 주역으로 풀어내는 작업, 바리데기의 삶, 이민자들의 이야기, 난민들의 이야기, 나의 고향과 조상의 이야기를 신화를 통해 풀어내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 여행이야기, 신화를 통한 이민자, 난민 삶의 이야기 등등의 작업을 매년 1~2회씩 공연한다.
제주 출신이라는데, 제주에서의 성장 시기나 춤을 접한 계기가 궁금하다.
제주도 모슬포 동일리에서 태어났다. 7살에 뭍으로 올라왔다. 그후 줄곧 육지에서 살았다. 춤은 고등학교 때부터 했다. 사실은 7살에 춤이 너무 추고 싶어 부모님께 사정을 하였으나 가정형편상 춤출 수 없었고,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꾸준히 조금씩 모은 용돈과, 우유, 신문 배달을 하며 벌은 돈을 모아 무용학원을 몰래 다니기 시작하게 된 것이 제가 예술세계에 발을 디딜 발판이 되었다. 너무나 행복했다. 저의 연습실은 주로 길바닥이었으니까. 학원을 오가는 그 길이 참 행복했던 것 같다. 학원에서 배운 스텝이나 책에서 보았던 춤사위를 복습하며 연습할 수 있었던 길바닥이 저의 유일한 자유의 스튜디오였다. 그러다 보니, 부모님도 도리 없이 저를 도와주셨던 것 같다. 그렇게 저는 춤과 국악을 배웠다. 부모님의 반대에 항상 저항하듯 그것들을 해내던 그러한 순간들이 있었던 것 같다. 후에 좀 더 깊게 나는 누구인가, 정체성과 고유성에 의문을 던지는 순간, 그걸 알려면 나라는 몸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고 싶었다. 태어난 곳 그리고 그곳에 있는 삶, 역사, 문화, 신화 그리고 영성 즉 굿 등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네! 저는 제주의 딸입니다.” 그것을 제대로 알 때 내가 왜 이리 생겼으며, 어떠한 동작이나 행동을 할 때 이해가 되고, 특정한 생각을 할 때 소름이 끼칠 정도로 오싹해지는 그런 점이 있는 것 같다.
제주와 이도희와 춤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제주의 신화나 굿을 보면 아주 정교하며 잘 짜여 있다. 그러나 그 안에서 풀어내는 기량은 이해와 폭넓은 즉흥성과 풍만함에 때론 정말로 익지 않은 날 것 같은 음식처럼, 자연 그대로인 언제 어디서 불어올지 모르는 제주 바람 같은 기운, 거친 화산으로 형성된 돌들 위에 서 있어야 하는 거친 발처럼… 때론 더 내부적으로 해체되어 표현되는 그런 면이 있다. 제가 표현하는 예술이 좀 그런 듯하다. 자연스럽고, 솔직하고 싶다.
이번에 제주로 오도록 한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어떤 프로그램인가?
제주예술재단에서 지원하는 ‘상주예술인 프로그램’에 제주 현지예술가와 무속을 연구하는 극작가인 한진오 작가의 제안으로 이 프로그램(3~8월)에 〈설문대할망 사남굿〉에 참여하게 되었다. 결과물 발표는 올 12월 제주 예술공간 이아에서 전시되고, 제주W스테이지에서 따로 전시,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사남굿-설문대〉는 설문대설화지를 바탕으로 순례하며 제주에서 육지까지 다리를 놓지 않고 물장오리에 빠져 사라진 그 분을 다시 살려오는 간절한 맘을 담아내는 작업이다. 이 작업을 통해 순례지에서 보이는 현실 또한 파헤치는 기회를 가지려 한다. 제주의 난개발, 무수히 파괴되는 곳, 물질적 이익을 위해서만 제주를 바라보는 시선, 평화의 섬이라는 곳에 지어진 해군기지, 신산리 신공항 건설 추진 등, 현재 제주의 땅은 많은 파괴에 놓여 있으며 이러한 것들로 사라져가는 것들을 조금이라도 살려볼까 하는 의도에서 공동작업을 하게 되었다.
인터뷰에서 드러나듯이 이도희씨의 작업은 굿(巫)과 한 뿌리를 이루고 있다. 실험춤을 찾아 미국에 건너갔는데, 그것은 자신의 뿌리를 찾는 작업으로 확장되고 굿과 연결되기에 이른다. 이씨의 이런 작업들은 지금까지 〈마고〉와 〈아라〉로 이어졌다. 2005년경부터 이도희 자신의 역사와 조상을 배경으로 정체성을 찾아가며 마고 신화를 풀이한 작업이 〈마고〉이다. 아라는 바다와 눈(眼)을 뜻하는 토속어로서 이씨는 아라를 우주(창조)의 여신과 동일시한다. 〈아라〉 작업은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역사와 현실을 생각하고 치유하기를 모색하는 작업이다.
본인이 소개하는 〈아라〉 시리즈 2015~18년의 작업들은 이민자들, 특히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역사와 현실의 삶을 개인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풀어나가며, 그리고 난민, 부탄에서 추방당한 네팔 이주민들의 일반적 이야기를 표현해왔다. 이씨는 말한다. “그들의 조상들이 이주한 땅, 본인의 고향이라 느끼는 그 땅에서 추방당해야 하고, 되돌아온 조상의 고향에서조차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들은 난민 수용소라는 곳에서 지내야 한다. 운이 좋다면 제3의 나라를 본인의 집이 될 것이라는 희망의 선택으로 떠나는 이도 있고, 어떤 이들은 평생을 수용소에서 살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저와 함께 작업하는 청소년들 대다수가 수용소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다.” 이씨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그들의 목소리를 통하여 메시지가 전달될 때 보다 진솔한 이야기가 예술을 통하여 치유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믿음으로 꾸준히 작업한다고 소개한다. “저 또한 이민자로서 이민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역사적 경위와 실상을 파악하고 미국과 한국의 역사적 관계부터 현재 처한 상황을 현대의 시각에서 굿으로 진행하는 작업을 올린다.”
이씨는 굿을 이렇게 설명한다. “굿이란, 목적과 의도가 있으며 굿은 하는 자가 아닌 굿을 원하는 자에 의해 굿을 하는 자가 움직여지듯, 공연 작업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공연해야 할 이유를 가진 자들이 모여서 그들의 이야기를 메시지로 전하는 공연을 창조해 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공연을 통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더 널리 알리며 비슷한 사연을 가진 난민들이 공감하도록 나비효과 같은 현상으로 메시지를 증폭시키고 싶었다. 예술이야말로 그들의 삶과 이야기를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표현할 최상의 도구라고 생각하였다.”
이씨는 우리 민족의 신화와 무속을 근원으로 해서 새로운 이야기, 즉 우리들의 이야기가 공존한다는 차원에서 새로운 신화와 무속의 형태로 새로운 굿이 형성된다고 말한다. 이씨의 굿에서는 춤, 음악, 연극, 시각, 영상, 설치, 의상 등등의 예술매체가 함께 동원된다. “제가 생각하는 이야기들을 신화를 기반으로 굿의 구도로 표현해 내는 것을 기본 틀처럼 갖고 가며, 이것이 저의 소신이며 작업이다.” 본인은 자신의 작업을 ‘마술적 리얼리즘’(magical realism, 마법적 리얼리즘)이라 부른다 한다. 건네받은 사진 자료에 현실 속에서 초자연적인 것을 매개로 현실을 다르게 꿈꾸는 듯한 분위기가 강한 느낌으로 보아서도 수긍이 가며, 이는 굿과 원초적으로 일맥상통하는 점이다.
혹시 국내 무용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겠는가. 그저 춤출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그것이 좋은 곳에 잘 쓰이기만 바랄 뿐이다.
수차례의 메일과 통화에 감사드린다. 이도희씨가 21세기 시대 정신을 살려 세상과 함께 하는 작업이 결실을 맺으며 이어나가기를 많은 사람들과 함께 기원하겠다.
이도희씨는 앞으로 계획으로서 우선 자기가 거주하는 오클랜드로 돌아가 커뮤니티 작업을 지속할 것임을 밝혔다. 2015년부터 현재까지 함께 작업하는 난민 청소년 그룹과 아시안 이민, 이민2세 여성위주로 그룹을 꾸리며 미국의 이민 역사와 난민들의 이야기들을 제례공연 형식으로 했던 〈아라〉 작업이다. “이번에는 남미에서 이주해 와서 노동자로 살아가는 분들과 함께 이주민들의 삶을 작업으로 표현하며, 또한 한국 교포 2세와 한국의 타악기를 이용하여 한국과 미국의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음악으로 풀어낼 것”이라 한다. 그리고 이들 모두의 이야기들을 모아, 이번에 기금을 받은 작업의 창작물인 〈무-영매(靈媒): 9여신〉를 2020년에 샌프란시스코 예르바부에나 예술센터에서 올린다. 이후 2020~21년에 미국내 순회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김채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를 비롯 다수의 논문,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