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대한민국발레축제가 올해로 일곱 번째 축제마당을 준비하고 있다. 2011년 국립발레단을 주관기관으로 첫 걸음을 내디뎠던 축제는 예술의전당으로 주체가 변경되면서 공모전 성격이 보다 강화되었다가 지난해 처음 초청안무가 무대를 도입하면서 축제의 완성도나 지향점이 좀 더 뚜렷해진 모양새다.
올해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조주현 교수와 스페인국립무용단 수석무용수 김세연이 나란히 초청되었는데, 김세연의 경우 발레리나로 무대 위의 모습만을 기억하고 있던 관객들 앞에 안무작을 선보이게 되어 안무가로서의 변신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안무가를 길러내는 토양이 허약하고 발레리나들이 안무작업에 소극적인 풍토에서 그녀의 안무가 변신이 반갑다. 김세연은 ‘서울메이트’라는 프로젝트 단체를 조직해 축제에 참가하는데, 이는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프로젝트 발레단이자 김세연의 ‘서울 친구들’이란 의미를 담은 명칭이다.
김세연의 이번 공연을 위해 임혜경과 엄재용 등 유니버설발레단의 선배와 동료로 동고동락했던 최고의 무용수들이 의기투합해 기대를 모으는 한편 스페인국립무용단의 수석무용수들과 취리히에서부터 그녀와 좋은 인연을 이어온 무용수들이 함께 내한해 작품에 힘을 보탠다. 취리히발레단 출신으로. 안무가로, 조명디자이너로, 또 무대디자이너로 최근 유럽에서 각광받고 있는 킨선 찬(Kin-sun Chan)이 조명디자인을, 3호선 버터플라이 활동과 여러 영화음악 작업으로 음악팬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성기완이 음악감독을 맡은 것도 눈에 띈다.
필자는 김세연의 이 작품에 드라마트루기로 참여하는데, 무용수로 해외생활을 오래 해왔기 때문에 행여 국내관객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놓치고 가는 건 아닐까,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사용되고 안무 전환이 많은 이 작품에 스토리텔링을 잘 녹여낼 수 있을까 고민하던 그녀로부터 제안을 받고 작품에 한 발을 담그게 되었다. 작품의 내부자가 인터뷰어로 나서는 것이 모양새가 어떨지 고민이 되었으나, 오히려 그렇기에 더 깊은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인터뷰를 진행했다.
윤단우 작품의 주제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보자. 제목이 〈죽음과 여인〉인데, ‘죽음’이 전면에 드러나 있어 어둡고 무거운 작품이라는 인상을 준다. 발레 하면 남녀가 사랑의 감정을 교감하며 추는 파드되를 먼저 떠올릴 정도로 관객들은 발레와 ‘사랑’이란 주제를 연관지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신인 안무가인데,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선택하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김세연 평소에도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편이다.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떨어져 외국생활을 오래 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점인 것 같다. 외국에 혼자 나와 있기 때문에 외롭다는 감정을 특별히 더 느끼지는 않지만 가족들, 친구들, 은사님이나 선후배들과 떨어져 외국에서 살다 보면 생활이 단절되는 면이 생긴다. 그들에게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옆에서 지켜보지 못하고 긴급한 전화 한 통화로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하는 일들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 일들을 수차례 경험하면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무방비 상태로 기다려야 하는 인간의 삶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됐고 그렇다면 죽음 다음에 인간은 어디로 가는가 하는 것도 굉장히 많이 생각하는 부분이다. 모든 사람들이 언젠가는 맞이해야 하는 것인데 우리는 두려워하면서 생각하거나 이야기하는 것을 피한다. 하지만 피하려 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한번쯤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이번에 조명을 맡아주기로 한 킨선 찬은 내 공연이 있는 날 올라가는 두 개의 작품이 다 죽음을 주제로 한 작품이라는 걸 듣자 그렇게 어두운 분위기의 공연을 관객들이 좋아할까 하면서 걱정을 했다. 죽음을 작품의 주제로 다루기는 하지만 그리 어둡거나 무겁지 않게 접근하려 했다.
공연계에서 화제가 되고 호평받은 작품들을 보면 죽음이 주요 모티브가 되는 작품들도 꽤 많다. 일상 속에서는 기피하는 주제지만 관객들이 기피하는 주제는 아닌 것 같다. 작품 내적으로 주제의 무거움보다 다른 어려움, 안무를 처음 하면서 겪는 시행착오들이나 또 스페인에 있으면서 한국 무용수들과 커뮤니케이션하는 어려움도 적지 않을 듯하다. 작품을 만들면서 특히 어려운 점이 있나.
국내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는 것이 아니다 보니 아무래도 무용수를 섭외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프리랜서 무용수들이 많지 않기도 하고 축제 기간이 공연으로 바쁜 시기이기도 해서 작품에 대해 긍정적으로 의사를 밝혔다가도 다른 공연과 일정이 겹쳐 출연을 못하게 되기도 하는 등 캐스팅이 쉽지 않았다. 내가 이제 첫 안무작을 내놓는 신인 안무가 입장이니까 무용수들도 나를 전적으로 믿고 이 작품을 위해 스케줄을 다 비워놓기는 좀 어렵지 않겠나.
다행히 엄재용 씨와 임혜경 씨가 출연 결정을 해주어 큰 힘이 되고 있다. 엄재용 씨는 예술학교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이고 유니버설발레단에 입단해서도 파트너로 같이 춤을 춰온 사이라 내가 작품 이야기를 하자 선뜻 출연 승낙을 해주었다.
임혜경 씨의 출연에 대해서는 할 얘기가 많다. 세부적인 내용은 많이 바뀌었지만 이 작품을 오래전부터 구상하면서 선배인 김주원 씨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김주원 씨도 출연에 대해 긍정적인 의사를 밝힌 것은 물론 작업에 대해 여러 가지 필요한 조언들을 해주었다. 그런데 김주원 씨의 부상으로 출연이 불투명해졌다. 처음에는 공연까지 아직 시간이 있으니 부상에서 회복하기를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스케줄이 이것 하나만 있는 사람도 아니고 무용수는 언제 어디서든 부상이라는 변수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니 다른 대비책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혜경 씨는 김주원 씨의 출연을 생각하고 있던 시점에는 이렇게 존재감이 큰 두 무용수를 한 작품에 세우기보다는 두 분에게 맞는 각각의 다른 작품을 하고 싶어서 아껴놨던 카드였다. 그런데 캐스팅 이야기가 오갔던 무용수가 일정 문제로 함께할 수 없게 되고 출연진의 중심을 잡아줄 무게감 있는 무용수가 있었으면 하고 어렵사리 부탁을 드렸더니 흔쾌히 승낙을 해주셨다. 임혜경 씨의 출연만으로도 크게 힘이 되는데 김성민이란 좋은 무용수를 소개해주셔서 김주원 씨가 빠져나간 자리에 대한 고민도 쉽게 해결이 되었다. 김성민 씨 본인은 김주원이라는 큰 이름에 적잖은 부담을 느끼고 있는데 이런 보물이 어디에 숨어 있었나 싶게 너무나 잘하고 매력이 넘치는 무용수다. 작품의 캐릭터와도 잘 어울리고 무용수로 갖고 있는 성향도 내 안무 스타일과 잘 맞아 즐겁게 작업하고 있다.
무용수 섭외가 친분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나. 임혜경 씨나 엄재용 씨 모두 한국 발레계의 정점에 있는 무용수들이고 작품이나 무대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한데 김세연이라는 안무가와 그 작품에 대한 신뢰 없이 출연 결정을 하진 못했을 것 같다. 안무가 김세연에게 그들이 기대하는 바도 궁금하다.
큰 기대가 있다기보다는 두 분 다 나를 도와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큰 것 같다. (웃음) 엄재용 씨는 말로 표현하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작품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진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 워낙 잘 아는 사이이고 내가 그에 대해 제일 잘하는 부분과 제일 매력적인 부분을 잘 알고 있다는 신뢰가 있는 듯하다. 임혜경 씨는 나와 발레단 생활을 함께한 친분도 작용했을 것이고 또 지난 2011년 LIG문화재단의 후원으로 〈플라잉 레슨〉이라는 공연을 올렸을 때 내가 공연 프로듀싱을 하는 걸 보고 내가 만드는 공연에 대한 신뢰를 갖게 된 면도 있으신 것 같다. 두 분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도 정말 좋은 작품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김성민이란 무용수가 캐스팅되었다고 하셨는데, 보물이 숨어 있다고 하신 말씀처럼 아직 관객들이 많이 알지는 못하는 무용수다. 어떤 무용수인지 간단히 소개해 달라.
임혜경 씨에게 작품의 캐릭터가 어떤지 설명을 드렸을 때 느낌이 잘 어울릴 것 같다며 추천을 해주셨다. 이 무용수와 작업을 하면서 매일 놀라고 있다. 나는 내가 스텝이나 동작을 다 만들어와서 무용수들에게 따라하라고 하지 않고 움직임의 자유를 많이 주는 편이다. 장면을 설명하고 이런 구도에서 무용수들 누가누가 있을 거라든지 음악이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이런 느낌으로 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묻는다든지, 상황을 주고 되도록 무용수들에게 맡기려고 한다.
김성민 씨는 그런 안무 스타일을 굉장히 잘 받아들이는 무용수다. 여기서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하고 리허설을 주도할 줄도 알고 무엇보다 연습을 즐기면서 한다. 음악이나 스토리, 분위기 같은 걸 많은 표현을 하지 않고도 몸으로 한 번에 다 드러내는 무용수다. 연습을 진행하면 할수록 새로운 매력을 보여주는 무용수라 그 매력을 찾아가는 즐거움이 있다. 객석에 있는 관객들에게까지 이러한 매력이 다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번 작업에서 내가 해야 할 숙제인 것 같다.
첫 질문으로 죽음 모티브의 작품이라는 이야기를 하다 무용수 이야기로 넘어갔는데, 그러면 본격적으로 작품 이야기를 들어보자. 어떤 내용인지, 또 무용수들은 어떤 캐릭터를 맡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달라.
제목이 〈죽음과 여인〉인데, 죽음을 가운데 두고 대립하는 두 여인의 이야기다. 두 여인이 대결을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한 여인은 삶을 끔찍해하며 죽음을 향해 도망치려 하는 반면 또 다른 여인은 죽음의 세계에서 살며 죽음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죽음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반대의 것을 원하는 두 여인이 동질감을 느끼며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이다. 무용수 생활을 하면서 무용수가 어려운 역할에 도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과 잘 어울리는 역할을 만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는데, 그래서 이 작품에서도 무용수들에게 잘 어울리는 캐릭터를 만들어주는 것을 가장 신경 쓰고 있다.
임혜경 씨는 무대를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대단한 무용수다. 그녀가 맡은 배역은 ‘Women in Black’, 우리말로 하면 ‘검은 차림의 여인’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공간이 아니라 천국이라고 해도 좋고 저승이라고 해도 좋을, 삶을 떠난 다른 세계에서 죽음을 주관하는 여왕 같은 존재다. 죽음을 주관하지만 본인은 그 죽음을 진저리내며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녀가 어떠한 죽음을 관장할 때 네 명의 천사, 블랙 엔젤들이 이를 수행하고, 죽음의 현장에는 항상 여덟 명의 님프들이 함께한다. 임혜경 씨와 함께하는 천사들은 스페인에서 네 명의 남자 무용수들이 와주기로 했다. 한국 관객들과 처음 만나는 무용수들이라 관객들이 어떻게 봐주실지 나도 무척 궁금하다. 여덟 명의 님프들은 성신여대 무용과 학생들이 맡기로 했는데 아직 연습을 많이 하지도 않았는데 호흡이 좋아서 실제 무대가 기대된다.
김성민 씨는 임혜경 씨와 반대지점에 있는 인물, 삶 속에 있지만 죽음을 동경하는 인물이다. 앞서의 질문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많은 움직임 없이도 분위기나 감정을 잘 표현하는 무용수라 임혜경 씨와 좋은 대비를 이룰 것 같다. 그리고 엄재용 씨는 아시는 것처럼 부드럽고 다정한 성격이고 또 그런 캐릭터에 잘 어울리는 무용수 아닌가. 극중에서는 죽고 싶어 하는 김성민 씨 주변을 맴돌며 그녀를 지켜주려 하는 수호천사 같은 인물이다. 파트너링이 워낙 좋은 무용수이다 보니 김성민 씨와의 호흡도 잘 만들어가고 있어서 무척 만족스럽다.
이번 공연을 위해 스페인에서 먼 걸음을 오는 무용수들도 소개해 달라. 프로젝트 공연을 함께하는 것이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수도 있는데….
실은 오늘 아침에야 최종 결정이 났다. 한국에서 남자 무용수들을 섭외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두 명은 스페인국립무용단의 수석무용수들이다. 춤을 잘 추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재능이 많아 작품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에스테반은 출연만이 아니라 조안무도 하게 된다. 작품 중에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 음악이 쓰이는데 스페인에서 춤을 추다 보니 이 음악이 스페니시 스타일이 잘 어울릴 요소가 많은 음악이란 걸 발견했다. 에스테반이 이 부분 안무를 맡아 스페인 춤의 매력을 보여줄 것이다.
안토니는 미국 출신인데 스윙이나 재즈, 폴카 같은 미국 스타일 춤에 매우 능하다. 작품에 30년대 한국 대중가요가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는 장면이 나올 텐데 그 부분에서 안토니가 추게 될 멋진 춤을 기대하셔도 좋다. 작품 의상 중에서 여덟 명 님프들이 입을 의상은 안토니가 직접 제작을 해주기로 했다. 손재주가 좋은 친구라 나는 컨셉만 제안하고 나머지는 믿고 맡길 생각이다.
다른 두 명, 이케르와 비탈리는 취리히발레단에서 나와 무용수로 함께 생활했고 베자르발레단에도 있다가 지금은 스페인에서 둘이 무용단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안무도 하고 프로젝트로 공연한 경험이 많은 친구들이라 같이 작업하기가 너무 수월하다. 추구하는 춤 스타일도 네오클래식 쪽이라 나와 의견이 잘 맞는다. 바쁜 일정 때문에 시간을 내기 어려웠는데 함께할 수 있게 되어 너무 기쁘다.
조명과 음악도 기대할 만하다고 들었다.
이번 공연에서 조명과 세트 디자인을 맡아주기로 한 킨선 찬은 취리히의 인연으로 함께하게 되었다. 취리히와 바젤에서 활동했고 요즘 스위스와 독일 등지에서 안무가로 매우 주목을 받고 있다. 안무만이 아니라 비주얼 디자인을 따로 공부해 무대세트와 조명디자인까지 직접 하는 분이다. 예산 범위 안에서 작업을 하다 보니 대형 세트를 제작할 여력은 없어서 가장 신경 쓰고 있는 것이 조명인데 내가 원하는 바를 잘 이해하고 작업을 도와주고 있다.
음악감독은 3호선 버터플라이로 유명한 성기완 씨다. 작품에 30년대 한국 대중가요가 사용되는데 좋은 음질의 파일을 구하기가 어려워 고민이었다. 그런데 찾아보니 이분이 음악을 맡으셨던 〈라듸오 데이즈〉라는 영화에 ‘청춘계급’이란 곡을 사용하셨더라. 반갑기도 하고 더 알아보니 사운드 이펙트 작업도 하셨길래 아예 음악 편집을 다 부탁드렸는데 흔쾌히 승낙해주셨다. 그동안 안애순 선생님이나 예효승 씨나 박나훈 씨 같은 현대무용가와 작업을 많이 하셨는데 발레는 처음이어서 고민이 되셨다고 하는데 함께해주신다고 해 너무 든든하다. 아직 만들어가는 과정이라 작품이 잘 나올지 걱정이 되긴 하지만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서 작업이 훨씬 수월해졌다.
말씀을 듣다 보니 해외 여러 컴퍼니를 거친 경험이 이번 작업의 뼈와 살이 되고 있는 것 같다. 그동안 여러 발레단에서 활동하셨는데 그 경험들이 이 작품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나. 또 그동안 몸담았던 발레단의 특색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신다면.
발레단을 옮기는 이유는 가고자 하는 발레단에서 다른 요구를 만족시켜줄 수 있다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처음에 취리히발레단으로 옮긴 이유는 예술감독이었던 하인츠 슈푀를리의 작품을 하고 싶어서였고 그 다음에 네덜란드국립발레단에 갔을 때는 그곳의 다양한 레퍼토리들에 욕심이 났다. 그리고 지금 있는 스페인국립무용단에 온 것은 컨템포러리발레 성향이 강한 단체에서 클래식발레의 전통을 세우는 데 내가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이렇게 여러 단체를 경험하다 보니 단체 각각의 장점들을 취하면서 작품을 만들어가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을 돌아보면 무용수를 선택하는 방법이라거나 스케줄을 어떻게 짜느냐 같은 부분에서 취리히발레단의 슈푀를리 예술감독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그리고 네덜란드국립발레단에서 무용수로 조안무로 발레 미스트리스로 작업에 참여했던 경험들이 지금의 프로덕션 작업에서 무대 뒤의 일들을 프로듀싱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된다. 무용수를 구하는 데 도움을 받은 스페인 생활은 말할 것도 없고.
발레단의 특색이라고 한다면 취리히는 시 산하단체였고 네덜란드와 스페인은 국립단체인데 단체가 운영되는 맥락은 동일한 것 같다. 가장 큰 공통점이라면 그 나라의 관객들이 마치 자기 피부라도 된 듯이 가까이 느끼고 사랑하는 단체라는 점이다. 취리히발레단의 경우 스위스 오페라하우스 안에 들어가 있는데 취리히 사람들의 오페라하우스 사랑은 대단하다. ‘나의 오페라하우스’로 느낀다고 해야 할까. 네덜란드국립발레단은 단체가 크기 때문에 공연 횟수도 굉장히 많고 레퍼토리도 다양한데, 취리히에서는 예술감독이 안무한 작품 위주로 올리기 때문에 작품 스타일도 예술감독 성향에 맞춰진다면 네덜란드에서는 좀 더 다양한 안무가들과 다양한 작품들을 했다. 그래서인지 내 춤 스타일도 취리히에 있을 때는 좀 더 섬세한 춤을, 네덜란드에서는 동작을 크고 시원하게 뻗으면서 능동적인 춤을 추었던 것 같다.
단체 내의 대우를 비교하자면 세 곳 모두 무용수에 대한 지원이나 복지가 잘되어 있는 편인데, 성격이 조금씩 다르다. 취리히에서는 개개인에 대한 지원이 많았던 반면 네덜란드에서는 시설이나 무용단 시스템에 좀 더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다는 인상이다. 네덜란드에서는 무용수의 발언권도 강한 편이다. 단체에 소속되어 있긴 하지만 단체와 무용수가 동등한 입장이라고 할까.
스페인은 스위스나 네덜란드에 비해 예술활동이 그리 활발한 나라는 아니다. 그래서 예술인의 특수성이 제도에 섬세하게 반영되지는 않는 것 같다. 예를 들면 무용수 복지 같은 문제다. 무용수에게 휴식이 좋은 것만은 아닌데 스페인 국가공무원이 주 5일 근무를 하기 때문에 우리 같은 무용수들 역시 그러한 규칙에 따라야 한다. 무용수 입장에서는 차라리 매일 훈련을 하고 초과근무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이 나은데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생각해보니 취리히에서는 시의 정책이 예술인들에게 맞춰진 느낌이었다면 네덜란드에서는 동등한 입장이었고, 스페인에서는 정책이 위에 있는 것 같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무용수들의 숫자가 이제는 다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아졌다. 수가 많아져서인지 국내 무용계와의 교류가 점점 소원해진다는 인상도 받는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무용수들이 국내 무용계와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그러려면 정부나 무용계 차원에서 어떤 지원을 해주어야 할까?
어려운 이야기다. 가장 큰 안타까움은 국내 관객들이 해외에서 정상에 오른 무용수들의 전성기를 눈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번 공연에도 실은 네덜란드국립발레단에 있는 최영규 씨를 섭외하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워낙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는 무용수이다 보니 함께하기가 어렵더라. 소통이나 교류라는 게 특별한 방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해외에 나가 있는 무용수들이 국내 무대에 자주 설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된다면 좋겠다. 국내에 있는 발레단에서 그들을 객원으로 초청한다거나 아니면 정부에서 지원금 사업 같은 것으로 갈라 공연이라도 개최하는 방법 같은 걸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무용수는 전성기가 짧은 직업이고 또 지금 잘나가고 있는 무용수라 해도 항상 부상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무대를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기약하기 어렵다. 아메리칸발레시어터의 서희 씨나 마린스키발레단의 김기민 씨 등과 같이 세계 정상급 발레단에서 주역으로 활동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우리가 이런 무용수들을 앞으로도 계속 배출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나. 그들이 전성기에 있을 때 국내 관객들과 자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진다면 좋겠다. 아마 그들에게도 매우 큰 동기부여가 될 것이다.
윤단우
작가. 무용칼럼니스트. 무용전문지 <몸>에서 기자로 일했다. 발레에세이 「열아홉번의 사랑」 외에 「사랑을 읽다」 「꽃이 아니다, 우리는 목소리다」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