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인아 〈허난설헌-수월경화〉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정윤민 지난 1월 말 즈음 국립발레단 측으로부터 새로운 작품에 대한 의상 디자인을 제안 받았어요. 안무가와 작품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전해 듣지 못한 채 미팅에 참석하게 됐는데, 알고 보니 강효형 안무가의 신작이고 55분 전막 창작발레라고 하더군요. 〈KNB 무브먼트 시리즈〉와 같은 발레 소품으로 1-2벌의 의상 제작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10개 정도의 주제 아래 40벌 이상을 제작해야 한다고 하니, 처음부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엔 중간에 수정되는 의상까지 처음 말씀보다 훨씬 많은 100여벌의 옷을 디자인하고 제작하게 됐지만요. (웃음)
그럼에도 이 작품에 참여하게 된 것은 작품에 주제가 된 허난설헌 인물에 대한 매력과 강효형 안무가가 풀어낼 작품에 대해 호기심이 컸기 때문이에요. 한 많은 삶을 살았어도 시를 쓰고, 스스로를 표현했던 아름다운 심미관을 가진 허난설헌을 어떻게 무대 위에 펼쳐낼까. 강효형 안무가의 작품이 정말 궁금했어요. 그리고 안무자는 허난설헌만 생각하고 명확한 컨셉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감사하게도 작품에 추구하는 이미지를 제대로 구현해줄 수 있는 의상 디자이너가 누굴까 고민 끝에 저에게 연락을 주셨다고 해요. 어느 누가 보아도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거나 혹은 제가 설명해드릴 수 있을 만큼 작품이 온전히 이해되지 않으면 맡기가 어려운데, 안무가의 구체적인 생각이 전해졌기에 작품에 참여할 수 있었죠.
이번 작품은 허난설헌의 시 두편 "감우"와 "몽유광상산"에서 모티브를 얻어 55분 전막발레로 창작되었는데요. 〈허난설헌〉에서 받은 영감을 의상 디자인으로 옮기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점은 무엇이었나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안무가의 의도입니다. 모든 작품은 중추적인 한 사람에 의해 일관성 있게 이끌어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는 안무가가 느끼는 허난설헌을 느끼려고 굉장히 노력했죠. 이 작품은 분명 안무가가 오롯이 처음부터 기획하고 생각한 것이니까요. 작업과정에서 안무가의 생각과 무관하게 디자이너가 주도권을 가지려 한다면 혹은 서로가 서로를 믿는 신뢰관계가 없다면 절대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해요.
강수진 예술감독님께서 창작 전에 이 작품에 대해 한국적일 것, 발레동작을 바탕으로 할 것 등 몇 가지 포인트를 안무가에게 제시하셨다고 해요. 그런 점들을 강효형 안무가는 집중적으로 연구해서 허난설헌의 수많은 시들 중에서 2개의 작품을 고르고 상상 이상의 고민과 노력 끝에 움직임과 동선을 짰을 거예요. 저는 안무가가 어떤 관점과 생각에서 이런 안무를 했을까를 염두에 둔 디자인, 안무가가 생각하는 이미지에 가장 근접한 디자인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했어요. 안무가가 허난설헌에 대해 명확한 컨셉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의상도 장면에 맞게 나올 수 있었어요. 어디까지나 저는 조력자에요.
그 다음에 제가 보는 허난설헌, 제가 느낀 시상을 옷에 담죠. 만약 디자이너의 감성이 필요치 않다면 주문-제작 시스템의 기술력 좋은 의상제작소에서도 충분히 만들어질 수 있어요. 디자이너의 감성을 더해 안무자가 원하는 이미지에 색깔을 입혀주고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소임이라고 생각해요.
무용수들의 움직임에 따라 율동감이 증폭되었던 너풀거리는 텍스타일, 장면에 어울리는 뛰어난 색감과 신선한 디자인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시각적인 풍성함을 안겨준 주요 의상 몇 가지를 소개해 주세요.
안무자는 난·새·잎·가을·몽유광상산(드림)·쉐도우·바다·부용꽃이라는 장면을 제시했어요. 허난설헌의 도입장면에는 등근육을 이용한 안무를 할 것이라고 해서 상반신이 누드처럼 보일 수 있도록 시스루의 앞면과 파인 뒷면으로 디자인했어요. 스커트는 안무자가 원하는 대로 언발란스한 느낌을 강조했고, 풍성하게 보이고 싶어서 각각 다른 크기의 원단 12폭을 연결했구요. 그리고 허난설헌이 강릉에서 태어나 자랐잖아요. 마치 강릉바다의 느낌처럼 여러 가지의 짙은 바다색이 떠올려지게끔 청록색 베이스의 시스루 원단을 사용했어요.
난 장면에서는 블랙레오타드가 선보여졌는데요. 처음에는 안무가의 전작들을 고려해서 세련되게 블랙으로 통일된 의상을 생각했어요. 무용수들의 춤이 허난설헌의 글씨가 되게끔, 몸의 라인이 모두 붓의 획으로만 보이고 싶었어요. 그러다 작품 연습하는 것을 보고 몸의 선을 살리는 방향으로 블랙 망사 레오타드 위에 디테일을 세심하게 덧대는 것으로 변경했지요. 이번 작품은 그동안의 안무와는 다르게 움직임이 부드러워졌기 때문에 의상에서 조금 더 화려하고 다채롭게 보일 필요가 있었어요. 검은 망사 같은 경우에도 신중을 기해 소재를 선택했는데요. 수많은 원단을 살펴보고 탄성이나 짜임의 크기 등을 고려해 만들었어요. 과정 중에 캐스팅이 변경되어 어떤 무용수가 이 의상을 입을지 알 수 없었지만, 만약 제가 캐스팅을 정확히 알았더라면 모든 무용수가 균일한 컬러를 낼 수 있도록 제각각 살빛까지 고려해 원단을 선택했을 거예요.
잎의 의상은 촘촘한 주름이나 구조적인 디자인이 오뜨꾸튀르 같지요. 안무자는 연한 녹색의 색감을 원했어요. 녹색에 한 방울 하얀 색을 떨어뜨린 것과 같은 민트 빛의 컬러로 의상을 만들었는데, 하얀 스튜디오 배경에서는 참 예뻤었거든요. 무대 위에 다섯 명이 섰을 때에는 민트 색감이 임팩트를 주지 못하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더군요. 그게 공연 일주일 전이었어요. 너무 고맙게도 안무자도 저와 똑같은 생각을 했었더라구요. 기존의 모든 잎 의상을 포기하고 다섯 벌을 다시 만들었어요. 마네킹 피팅과 실제 무용수가 입었을 때의 옷이 다르게 나오기 때문에 급한 대로 안무자에게 요청했고, 감사하게도 직접 4시간 동안 피팅을 봐주어 다섯 벌 의상을 무사히 완성했어요. 덧붙여 재제작 당시엔 이미 안무를 모두 봤을 때라 무용수의 스탠딩 방향을 고려해서 두 벌의 의상은 디자인을 역방향으로 바꾸기도 했지요. 아마 처음부터 안무를 봤다면 훨씬 수월했을 수도 있겠지만 작업 과정에서 이런 변수는 있기 마련이에요.
바다 장면의 의상은 처음부터 명확했어요. 안무자는 살짝 성이 난, 파도는 치되 거친 파도가 아닌 아침 바다의 이미지를 원했어요. 얕게 휘몰아치는 바다의 이미지였던 거죠. 구상은 쉬웠으나 실현은 제일 어려웠어요. 빛이 투과되었을 때 바다와 파도의 신비로움이 나타났으면 했죠. 푸른 빛, 청량한 청록 빛, 깊고 진한 남빛이 나는 다채로운 색감의 원단을 써서 끝단이 율동감이 느껴지도록 구불거리게끔 스커트를 만들었지요.
마지막 부용꽃 장면. 부용꽃은 원래 붉은 빛을 띠는 진분홍의 색상을 갖고 있어요. 색감 그대로 직설적이거나 전형적으로 표현하고 싶지는 않더라고요. 몽유광상산 시에서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라는 표현은 허난설헌이 스물일곱에 자신의 생이 다함을 예견하고 썼다는 평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이 시대에 미처 다할 수 없었던 것들을 꽃에 빗대어 표현한, 시적인 마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안무자가 느끼는 부용꽃에서의 바람은 아빠, 오빠, 어릴 적 첫사랑, 죽은 아들, 자신을 바라보지 않은 남편일 수도 있는 남자 역할의 복합체구요. 짙은 붉은 빛의 꽃과 톤다운된 황금빛의 바람, 그 모든 것들이 저버렸을 때 홀로 남겨진 허난설헌의 감정을 순백의 의상으로도 표현하고 싶었어요.
클래식 음악가들에게 사랑받는 의상 디자이너로 알고 있습니다. 다른 기사에서 악기에 따라 드레스 제작에 주의할 점이 있다고 보았는데요. 같은 맥락에서 무용수들의 의상을 만들 때 유의사항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만큼 무용의상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조심스러운데요. 이번 경험을 통해 배운 점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무용수가 의상이 편할 수 있도록 하는 걸 주의했던 것 같아요. 레오타드는 하부의 1mm 근소한 파임만으로도 무용수가 불편해할 수도 있는 의상이에요. 움직이기에 편한 의상을 입었을 때 무대 위에서의 움직임이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을 확연하게 깨닫게 되었어요. 출연한 많은 무용수 분들께서 편하게 춤출 수 있었다며 고맙다고 해주시고, 처음 입어보는 스타일의 의상인데도 부담이 없었다, 가벼웠다는 말씀을 해주셨을 때에는 눈물이 왈칵 터져 나오더라고요. 이번 작업과정은 저에게 배움의 기회였죠. 배우고 알게 되는 것들이 저를 너무 성숙하게 만들어주어 과정 내내 신나게 작업할 수 있었어요.
덧붙여 저는 원래 클래식 연주자들과 작업을 많이 하는 편이라 조명이나 무대 공부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이번 작품에서도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이라는 무대, 객석과의 거리선상에서 어떤 조명으로 의상이 어떻게 표현되어야 할지 고민했어요.
군무가 많고 움직임이 큰 발레작품의 의상을 맡는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작업 과정에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더블 캐스팅된 두 주역의 의상을 각각 만들었던 이유가 있었어요. 신체의 중심점이 달라서 박슬기씨 의상을 신승원씨가 입었을 때에는 축 가라앉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허리선 1mm 차이로 느낌이 달라지기 때문에 발레리나의 신체에 따라 다르게 제작하는 의상이 여럿 있었던 거죠. 이렇게 완벽을 기하다보니 총 의상 수는 66벌인데, 세컨드 캐스팅까지 85벌, 마지막에 디자인을 변경한 것까지 세어보면 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100벌 넘게 제작했더라구요. 그런데, 즐거웠어요. (웃음) 하루에 두 시간 이상 자지 않으면서 깨어있는 모든 시간을 〈허난설헌〉의 의상을 생각하며 두 달 동안 몰입해 있었어요. 그렇게 즐겁지 않았더라면 행복하지 않았다면 해낼 수 없었을 거예요.
〈허난설헌〉에서 특히 애착을 갖는 의상, 디자이너에게 의미가 있었던 의상을 손꼽는다면 무엇일까요?
모든 의상에 정성을 쏟았기 때문에 모두 애정을 갖는데요. 하나만 꼽으라면 난새의 의상을 말씀드리고 싶네요. 허난설헌은 비극적인 삶 속에서도 아름다운 시를 쓴 사람이잖아요. 작업할 당시 우리나라에 희망이 있을까 좌절할 만큼 시국이 어지러웠었죠. 저는 이런 시국 속에서 어떤 아름다운 의상을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됐어요. 마침 ‘난새’의 의미를 찾아보니, 난새가 나타나면 세상이 평안해진다는 구절이 있더라구요. 이 어지러운 세상에 새가 나타나 춤을 추고 훌쩍 뛰어올랐을 때, 관객들이 어떤 희망을 발견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푸른빛을 띤 넓은 폭의 치마. 무용수들이 이를 입고 날아오르는 순간 세상의 행복을 포착해주었으면 했죠. 마치 어느 순간 나타난 파랑새처럼요. 난새는 의미를 담은 의상이라 조금 더 애착이 가네요.
춤을 위한 의상과 일상을 위한 의상은 그 존재의 이유가 전혀 다른데요.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무대 의상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아티스트들을 위한 의상이잖아요. 무용으로 국한하자면, 무용인들은 춤만 생각하고 외길을 걸어온 분들이세요. 자신을 갈고 닦는 수많은 훈련과 수련이 있었을 거라고 감히 생각해요. 무대의상 디자이너는 그들이 서는 무대를 받쳐주는 사람이어야 해요. 의상이 돋보이려면 패션쇼를 해야죠. 최고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아티스트들을 위해 의상을 만들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 또한 최선을 다할 뿐이에요. 그 생각이 없었다면 무대의상을 시작하지 않았을 거예요.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허난설헌〉이 콜롬비아 무대에도 오르는데요. 앞으로 의상에서 조금씩 더 보완할 점을 찾아 업그레이드하고 싶어요. 유럽에서는 약간 어두운 조명이 무대를 더 멋있게 만들어주는데, 그런 점에서 안무가는 공연할 나라에 대해, 무대의 컨디션에 대해 공부할 필요가 있겠죠. 마찬가지로 같은 빨강색이라도 한국에서, 중국에서, 유럽에서 색감이 미세하게 달라 보이거든요. 제가 만든 의상이 다른 나라 무대, 그 조명 아래에서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조율하고 싶어요.
한편으로, 작품 이외에도 예술과 아티스트들이 잘 알려질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우리나라의 뛰어난 아티스트들을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하는 일을 돕고 싶은데요. 대중에게 노출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에 영상과 사진이 좋은 매체가 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수많은 아티스트들을 시각 작품으로 남겨놓는다면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이런 작업에 문화예술의 지원과 뜻이 있는 사람들의 적극적인 후원이 뒷받침되었으면 해요.
아티스트와 작품의 가치를 높이는 정윤민 디자이너의 행보에 기대가 큽니다. 바쁘신 가운데 오랜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정윤민 디자이너 주요활동 ……
런던로열페스티벌 독주회 등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무대·방송·사진·촬영 의상
〈뮤직프롬평창(2017) 전국투어〉 〈인천아시아게임(2014)〉 등 바이올리니스트 신지아 무대 의상
〈대관령음악회(2016)〉 바이올리니스트 임지영 무대 의상
국립극장 〈여우락페스티벌: 놀이의 품격(2015)〉 무용수 김주원, 이영철 무대 의상
KBS 〈열린음악회〉 〈더콘서트(2015)〉 소프라노 강혜정 무대 의상
2015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솔로이스트 김설진 안무작 〈지젤〉 발레리나 김주원 의상
Mnet 〈Mnet Asian Music Awards(2016)〉 오프닝 무대 한국무용가 박혜지 무대 의상
〈월간 객석〉 2017년 3월호 발레리나 황혜민 의상
〈월간 객석〉 2016년 8월호 발레리나 서희 의상
한국춤비평가협회가 발행하는 월간 〈춤웹진〉에서 무용 전문기자로 활동 중이다. 창작과 수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가치에 주목하여 무용인 인터뷰를 포함해 춤 현장을 취재한 글을 쓴다. 현재 한예종에서 무용이론 강의를 병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