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방희망: 안녕하세요. 이달 초 여러 언론과 〈춤웹진〉을 통해 김채현 교수님께서 국립중앙도서관에 그동안 춤현장을 찾아다니며 녹화하여 기록, 소장하신 동영상 500점과 팜플렛 5,000점, 모두 5,500여점의 방대한 자료를 기증하여 ‘김채현 문고’가 만들어질 예정이라는 보도가 나갔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이하 국립도서관)에서 개설한 개인문고로는 31번째이지만 동영상 자료 문고로는 첫 사례라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춤 쪽에 관심을 갖고 자료를 찾아보려고 해도 구할 길이 없던 안타까움을 이 길을 먼저 걸어오신 선배 연구자들은 물론이고, 저 말고도 많은 후학들이 경험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교수님의 이번 기증은 아주 반갑고 힘이 되는 소식이 아닐 수 없어 인터뷰를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예술적으로 전문화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자료원 같은 기관이나 학교도 있을 텐데 다름 아닌 국립도서관 쪽으로 기증하게 되신 사연이 궁금합니다.
김채현: 촬영한 지 25년 세월이 지났습니다. 제가 비평가 시각에서 촬영한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 되었더군요. 예술자료원도, 무용인들도 제가 현장을 찾아다니며 촬영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간 예술자료원으로부터는 이런 성격의 자료 기증이나 보존 그런 면에서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국립도서관의 경우 오래전에 그 같은 제안을 간접적으로나마 받은 적이 있습니다. 국립도서관 이전 관장님이 그런 제안을 한 바 있는데, 이 분은 우리학교(무용원) 창설 시기에 문화부에서 우리학교에 파견한 분으로 인연을 가졌습니다. 그러니까 이 분을 안 지 벌써 20년이 흘렀군요. 우리학교를 떠나 국립도서관장이 되신 후에도 간혹 공연장에서 만나곤 했는데, 4년 전 대화중에 국립도서관이 예술관련 자료도 수집해서 보존도 하고 일반인 열람도 가능하도록 하는 계획을 추진 중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 보수적 인상의 국립도서관이 이전과 달리 상당히 복합적 기능을 추구하는구나 하는 새 인상을 받았습니다. 물론 디지털 시대라 당연한 이야기일 테지만, 저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이 기대하는 기능의 다양성 측면에서 국립도서관이 다채로운 정보를 복합적으로 수집 운영하는 역할을 지향한다는 점이 아주 강렬하게 다가왔습니다. 물론 그 분이 제가 촬영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날도 보았던 터라 그날 저의 자료도 기증해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도 받았더랬습니다.
방: 국립도서관의 제안 경위가 상당히 특이했군요.
김: 동감입니다. 그날 제안을 신선하게 받아들이던 그 시기는 제가 확보한 춤영상 자료가 지나칠 정도로 많이 쌓여 개인적으로는 디지털화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강해졌을 때였습니다. 그간 디지털화를 시도했습니다만, 소프트웨어의 미비 등으로 시도하다가 중단한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가고 디지털 테이프 자료라 하더라도 시일이 지날수록 미묘하게나마 훼손될 가능성은 높아갔습니다. 특히 만에 하나 화재가 날 경우 더 큰 일이어서 2014년 하반기에 아무리 비용이 소요되더라도 제가 소장한 모든 자료를 필히 디지털화해두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 사이 디지털화 비용 절감에 도움될 외장하드도 지속적으로 개발되더군요. 이런 데 힘입은 작업 결과, 이제는 대부분 디지털화되어 있어 춤 자료를 즉각 편집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나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런 시스템을 구축하다보니 편집 활용 가능성이 더 가시적으로 다가왔고, 하나의 대안으로서 이전에 저에게 제안한 전임 국립도서관장과 상의를 진행했습니다. 이후 저의 희망을 국립도서관 측이 전폭적으로 수용해주었습니다.
아마 예술자료원에서 먼저 제안했다면 제가 그에 응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국립도서관 측과 먼저 말문을 튼 터라 응당 국립도서관과 먼저 상의해야 한다고 판단했던 거지요. 국립도서관이 자료를 관장하고, 또 디지털 시대니까 그에 상응해서 활용할 수 있는 길도 다양한 만큼 예술자료원도 협의에 따라 활용하는 방안이 있으리라 봅니다.
방: 얼마 전에 필요한 일이 있어 국립극장 홈페이지에 있는 공연예술 디지털아카이브에 들어갔는데 영상자료로 올라온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제가 과문한 탓이지만, 교수님께서 2005년도에 국립무용단과 국립발레단 공연영상자료 70여 편을 기증하셨다는 것도 이번에 기사를 보고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기증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요?
김: 국립극장에 기증한 자료는 92년부터 2005년까지 촬영한 것입니다. 당시 국립극장장이던 김명곤씨 임기 동안 저에게 여러 차례 부탁을 해오셨고, 때마침 국립극장이 자료수집 기능을 강화한다는 인상을 받아서 무상으로, 국립무용단과 국립발레단의 공연작의 복제 테이프 약 70여 편을 기증했습니다.
방: 그동안 교수님께서 공연장에 늘 무거운 장비를 손수 챙겨와 촬영하시는 모습을 뵐 수 있었고 무용가들 사이에서도 또 꾸준히 그런 작업을 하는 분으로 소문나 있었는데요. 힘들고 외로운 작업일 겁니다. 처음 동영상 촬영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여러 어려움에 관한 에피소드 등을 듣고 싶습니다.
김: 힘든 것부터 먼저 떠오르는군요. 우선 배낭 가방의 무게가 10킬로그램 정도 나가요. 카메라(캠코더)를 지지하는 삼발이, 카메라 두 대, 카메라와 두 대의 삼발이를 연결하는 헤드, 보조 장치들, 여기에 더해 책이라도 한두 권 넣고 다니거든요. 유격 훈련 배낭 같은 느낌입니다. 또 가방은 장비에 대한 안전성을 담보해야하기 때문에 가죽 가방 자체 무게도 상당합니다. 튼튼하고 적합한 배낭을 찾아 삼만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전세계 어딜 여행가도 적당한 배낭부터 찾는 게 일이었지요. 이제는 배낭이 적당해서 더 이상 넘보지는 않습니다. 저는 대학생 때부터 차를 갖지 않기로 결심해서 면허증도 없기 때문에 무거운 배낭과 장비를 짊어지고 다녔을 수밖에 없는데, 이런 배낭, 깜찍한 캠코더, 저중량 장비로 찍을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이 시대의 혜택을 받은 거지요. 아무튼 육체적으로 힘든 건 분명합니다. 자칫하면 허리 디스크 같은 질환에 걸리기도 쉬울 텐데 저는 그런 증세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피로를 풀어주는 운동이 필수입니다. 공연을 찍을 때 손목도 한두 시간 정도 쉼없이 장비를 다루다보면 피로감이 분명히 있어요.
아무튼 92년도부터 공연장에 갈 적마다 기왕이면 기록으로 남기자는 뜻으로 찍기 시작하였습니다. 공교롭게도, 80년대 말에 일본 소니사가 8mm 테이프로 찍을 수 있는 소형 캠코더를 획기적으로 개발하여 시판하기 시작했어요. 일반적으로 말하는 가정용 캠코더였습니다. 그런 세상 추이를 지켜보면서 나도 찍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부터 들었습니다. 춤 공연 볼 때마다 어둠 속에서 작품 흐름을 메모로 기록하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던 상황에서 소형 캠코더를 구입하여 무턱대고 찍기 시작했지요. 그렇게 5년 기록하며 비평하다보니까 사명감이 생기더라고요. 처음에는 개인 참조용으로 8mm 캠코더로 찍었고 97년부터 디지털 소형 테이프를 쓰는 이른바 6mm 캠코더로 바꿨어요(그렇다고 카메라가 작아진 건 아닙니다). 6mm는 8mm보다 화질이 훨씬 좋은 데다 보존하기가 더 수월하고, 마모성이 낮은 이점이 있었지요. 그러다 16mm VHS 테이프에 복사해서 달라고 부탁하는 무용가들에게 간혹 복사해 선물하기도 했어요. 그분들이 보고는, 다른 분이 찍은 일반 춤영상과 뭔가 좀 다르다는 이야기를 해요. 나는 그냥 과찬으로 넘겨버렸고, 또 나로서는 다른 분이 촬영한 것과 비교할 기회도 거의 없었죠. 내가 찍은 것은 화질도 떨어질 테고, 솜씨도 그럴 테고, 대개 두 대로 찍는데 나는 한 대로 찍으니까 어디 비교나 할 수 있겠나 그렇게 여기고 말았지요.
그러다 우연찮게 똑같은 공연을 대상으로 제가 찍은 것과 다른 분이 찍은 것을 비교해서 볼 기회가 있었어요. 그때, 무용가들이 한 얘기가 틀리지 않구나, 내가 촬영한 것에 나름의 특색이 있구나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90년대 말이 되니까 뉴밀레니엄 21세기, 디지털 같은 용어들이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했고 6mm로 찍은 것을 디지털화해서 활용할 가능성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유튜브 같은 게 있지도 않았지만, 테이프 수록 자료를 디지털 환경에서 엄청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겠다는 것을 직감했지요. 그래서 나름 우리춤의 현장 보존을 목표로 더 열의를 갖고 찍게 된 거지요. 공연 시작 한 시간 정도 전에 가서 무용가들의 동의를 얻는 한은 캠코더로 모두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일반 관객보다 공연장에 한 시간 정도 먼저 도착하고 15분 정도 뒤에 나오는 것이 저의 습관처럼 되었습니다.
방: 제가 서울대에서 교수님께 무용미학 강의를 들었던 게 99년인데 그때도 교수님께서는 다른 강의에 비해 풍부한 동영상 자료를 시간을 많이 할애해 보여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는 유명 발레단의 영상물조차 구하기 쉬운 때가 아니었거든요. 그러면서도 디지털라이징에 대해 무용계 안에서는 굉장히 앞서 나가면서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무용계가 이런 면에서는 보수적이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공연장에서 보는 것만이 진짜라는 시각도 많고, 요즘에야 작가들이 무대에 영상을 접목하는 것은 많이 합니다만, 정작 공연을 자료화한다는 측면에서는 둔감할 정도로 소극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십 년간 학생들을 가르치시다보니 자료가 얼마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하실 수밖에 없는 입장에 놓이셨을 것이고 또 한편으로 현장을 지키는 비평가이자 관객의 입장에서도 이런 자료들이 축적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으셨을 거라고 봅니다.
조심스러운 부분이지만, 사석에서 어떤 무용가가 교수님께서 촬영하시는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촬영한 것을 달라고 했더니 테이프를 사오라고 하셨다고, 작품은 내 것인데 그게 말이 되느냐 이런 불만이었거든요.
김: 우선 참고로 말씀드리면, 알다시피 현장 공연본과 영상 촬영본은 다르고, 구분됩니다. 영상 촬영자는 특히 대가를 전제로 하지 않는 한에서는 원저작자입니다. 이와 구분해서 안무가는 원창작자로 통칭됩니다. 두 입장이 어떤 권한을 갖는가에 대해 국제적으로 확정된 해석은 없으나, 일단은 원저작자의 권리를 우선시하는 것이 국제적 관행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마저도 절대시할 수는 없고, 다만 관행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해결해야 할 사안이어서, 무엇보다 쌍방의 합의에 기초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한쪽이 동의하지 않으면, 비즈니스 측면마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안무가로부터 촬영 동의를 얻은 것에 한해 안무가 본인이 원할 경우 제가 제공하는 복제본 VHS 테이프나 DVD와 ‘물물교환’을 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형편 되는 대로 소량의 6mm 테이프를 갖고 와서 물물교환하는 그런 식이었지요. 그런 물물교환이 귀찮은 분에게서는 답례금을 받은 경우도 있습니다. 테이프이든 답례금이든 그런 식의 물물교환이 많아야 일 년에 두세 번 정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우리 학생들에게도 똑같이 적용하는 교환 방식이었습니다. 다만 학생들의 어려운 입장을 고려해서 물물교환의 물량이 더 적어도 무방하다고 당부하곤 했습니다.
방: 이번에 기증하셨기 때문에, 이 자료가 공적인 목적으로 쓰일 수도 있는 굉장히 중요한 자산이 될 거라는 인식이 무용계에도 비로소 확산될 것이라 봅니다. 이전에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기엔 어려운 상황이었을 겁니다.
김: 무용가 입장에서는 생각지도 않고 있는데 제가 공연 촬영 승낙을 요청했을 때 곤란함을 느낀 경우가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공연장에 온 관객들에게만 보여주겠다는 사고가 중심이라면 공연작이 다른 방식으로 촬영되는 것에 대해 다소 거북스런 기분이 들었을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춤계에서는 촬영을 한다면 아마도 개인 소장이나, 지원금에 따른 공연증빙용 제출 용도가 대종을 이루었을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덧붙여 제가 촬영하는 작업의 필요성을 그다지 못 느꼈을 것으로 봅니다. 게다가 제가 촬영한 자료를 접한 분이 극소수여서 그럴 필요성을 못 느꼈을 가능성은 더욱 큽니다. 이 모두 충분히 이해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방금 말씀하신 대로 이번 기증 건을 계기로 자료로 활용되고 영구보존 측면의 방안이 대두하고 있어서 그간 있었음직한 오해, 유감 등이 해소되기를 기대합니다.
방: 그런 사실로 미루어, 무용가들이 자체적으로 의뢰한 촬영본 쪽에 의존하는 정도가 크다는 이야기인가요?
김: 그렇지요. 그런데, 제가 촬영하러 가면 저 이외에 아무도 촬영하지 않는 공연도 더러 있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무용가 본인이 사전에 촬영 의뢰를 아예 안한 경우지요. 그러던 차에 우연히 제가 가서 촬영을 한 것이죠. 아마 그 무용가 본인은 제가 촬영한 것이 소중한 자원이 된다는 것을 감지하였을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저에게 연락이 온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공연 촬영을 예정한 촬영진이 교통이 막혔는지 촬영 작업을 놓쳐서 제가 촬영한 것을 제공해달라고 요청한 경우마저 있었습니다. 또 연구 자료로 필요해서 어느 무용가의 자료를 요청하는 경우들에 대해서는 원창작자의 동의서를 갖고 올 것을 전제로 합니다. 지금껏 한 번도 원창작자의 자료를 무단 유출한 적이 없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방: 말씀을 듣고 보니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어렵게 무대에 올리고도 정작 당사자들도 그것을 자료로 남기지 않아 챙겨가지 못하는 상황이 안타깝기도 합니다. 안무도 그동안 여러 기록법이 연구되어왔지만 딱히 이거다 하는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영상기록이야말로 안무를 복원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도 자료화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저도 비평가 입장에서, 공연을 딱 한 번 보고 글을 쓴다는 것은 내가 기억하는 것이 과연 맞는가 의심스러운 상황이 없지 않습니다. 또 요즘 춤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이 자연스럽게 유입되려면 자꾸 반복해 보며 감상할 수 있는 자료가 필요합니다. 영화는 사람들이 자꾸 돌려보면서 장면마다 숨어있는 묘미를 찾아내며 마니아층이 형성되기도 하니까요. 예전에 김연아 선수가 한참 경기할 때도 피겨에 관심 있는 일반인들도 세계 각국의 여러 방송사마다의 버전을 비교 감상하면서 방송사별 앵글에 대해 논할 정도로 관심이 많습니다.
김: 방송사별 앵글이 다른 버전을 비교 감상하는 그런 대목을 특히 주목해야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이 한국사 연구와 수용에 어떤 역할을 해왔고 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루 말할 수 없듯이, 일단 어떤 앵글이든 영상 자료는 모두 중요합니다. 로이터 통신이 소장한 사진 자료가 1300만점이라 하지요? 유사한 소재의 자료들이라도 앵글의 개성과 우열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정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자료가 없으면, 기억이 없으면 해석은 정지합니다. 여기서 해석은 단순한 해설로부터 의미 포착, 평가, 역사 기술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범주의 언어화 작업을 통칭합니다. 자료와 기억은 역사의 원재료이자 보완재이기도 합니다. 일례로, 만에 하나 〈알타미라 동굴 벽화〉 같은 구석기 시대 동굴벽화 자료들이 남아 있지 않았더라면 구석기 시대에 관한 해석과 역사 서술은 그만큼 부실했거나 빗나갔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자료가 수반되는 기억은 해석을 재촉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해석을 해내는 안목에 못지않게 우수한 자료도 중요합니다.
과거의 미술품, 문학작품이 물론 재조명되어왔지만, 근래 들어 한 예로 미술품들을 재해석하는 교양서, 연구서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원동력은 원자료 미술품들이 다양하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첫째 춤공연을 자료화하는 작업, 둘째 자료와 기억을 해석해내는 식견을 함양하는 작업이 춤계에서 병행되어야 합니다. 또 이 두 가지는 어느 학술·예술 분야에서나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사항이기도 합니다. 자료가 있어도 해석이 굼뜨면 자료의 가치도 낮아지기 마련이지요. 인문학을 강조하는 한 가지 이유도 우수한 해석 작업이 그야말로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술계에서 해석이 의무이기도 하지만, 자료가 해석의 흥미를 촉발할 수 있으면 더욱 바람직스럽겠지요. 다시 말해, 자료가 해석을, 해석이 관심을, 관심이 참여를 촉발하는 이 순환 고리에서 첫 단서는 우수한 자료입니다.
방: 영국 국립극장의 연극이나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등은 공연 실황을 촬영하여 전 세계에 보급하고 있거든요. 우리나라에서도 예술의 전당 등에서 공연을 촬영하여 지방 극장에 보급하는 이런 시도를 시작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영상물이 보급이 되면 서울과 지방과의 격차를 줄이는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김: 동감입니다. 굳이 안무의 복원 측면이 아니더라도, 춤과 공연에 관한 일반인들의 접근 정도에 초점을 맞춰 얘기하자면 공연을 접해서 갖는 정보의 양 측면에서 서울과 수도권, 그리고 서울 아닌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차이가 확 날 것입니다. 그것을 극복할 방법으로서 첫째는 서울만큼 많은 공연을 하는 것, 환경이 그렇게 되도록 하는 일입니다. 이 방안은 지금껏 추진되어왔으며, 재원이 많이 소요되는 일입니다. 전국이 서울만큼 춤공연 정보를 소유하도록 물리적인 하드웨어를 구축하려면 정책적으로 많은 예산과 노력이 필요할 거란 말이지요. 두 번째는 아무래도 영상을 통한 전파를 들게 됩니다. 영상이 효율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데 왜 어렵고 힘든 하드웨어 확충에만 맴도는지 다시 검토해볼 문제입니다. 나는 영상으로 그 같은 불균형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다고 보고 있어요.
자료는 인식의 공유, 현재의 역사화 같은 두 측면에서 재인식되어야 합니다. 먼저 인식의 공유는 그 공연을 다수가, 만인이 함께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혹자는 그것을 보고 연구도 진행하겠지요. 공연의 물리적 제약을 넘어 불특정 다수가 그 공연을 보고 소유하는 수단은 재현 영상밖에 없습니다. 둘째로, 현재의 역사화도 그에 못지않은 중요성을 갖습니다. 그 무엇을 자료화하는 작업은 미래를 염두에 두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 점을 강조하고 싶군요. 지금 이 순간도 곧 과거로 흘러갈 것이고, 지금 이 순간은 지금까지의 과거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 시기에 하는 춤과 공연도 언젠가는 과거가 됩니다. 과거는 근본적으로 낡아빠진 것이 아니라 엄밀히 말해 미래의 원천입니다. 우리 모두 언젠가 과거가 되어 사라질 운명입니다만, 우리는 어떤 미래의 씨앗이기도 합니다. 예술의 역사성에 비추어 자료의 중요성은 절대적입니다. 오늘 우리의 춤을 후대에 제대로 전달하고 고전처럼 그들을 자극하며 또 정당한 평가를 받기 위해서라도 우수한 자료를 생산하고 보존해야 합니다. 20세기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마르셀 뒤샹의 〈샘〉은 뒤샹의 발상에선 평범하고 만족스럽지 않았을 당시 직전까지의 과거 미술사·문명사에서 촉발되었습니다. 과거는 창조적 미래의 지렛대이며, 평범한 과거라도 지나칠 일이 아니라 봅니다. 그래서 자료의 가치는 존중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박물관이라든지 문화센터, 자료관 등이 늘어가는 추세입니다. 모두 콘텐츠를 기본 수단으로 운영되어야 하는 곳들이지요. 그런 곳에서 이 방면에 바짝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봅니다. 게다가, 유튜브의 추세에서 보더라도 저는 춤영상 아키비스트, 춤영상 큐레이터가 머잖아 신종 직업으로 부각될 날이 올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방: 특히 서울에서 한참 벌어지는 공연의 트렌드는 지방의 학생들이 감지하기 쉽지 않은 부분인데 영상자료가 보급되면 많이 도움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동안 촬영하셨던 영상들이 교육현장에서 어떤 방식으로 활용되었는지도 알고 싶습니다.
김: 영상 자료 보급이 도움이 될 것은 당연히 예상됩니다. 아직은 교육현장에서 우리 춤의 흐름이랄까 최근의 흐름 등을 예시할 때 보여주는 정도입니다. 지금까지는 많이 보여주기가 힘들었습니다. 테이프로 찍은 것이 디지털화되지 않은 사정도 컸던 때문인데, 이제는 여러 경우의 수를 편집해서 복합적 지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도 부쩍 높아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해서 곧바로 디지털화할 수 있기 때문에 자료의 비중이 더더욱 높아지고 있습니다.
방: 아까도 잠깐 얘기가 나왔습니다만, 교수님께서 촬영하신 것은 뭔가 다르다는 의견, 과연 어떤 측면에서 다른지 궁금합니다.
김: 제가 처음 사용한 기기는 가정용 8mm 캠코더였는데, 다른 분은 방송용 카메라로 찍으니 장비 자체로는 비교도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저로서는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세밀하고 선명하게’ 찍어야겠다는 마음은 있었습니다. 제가 카메라를 구입하기 훨씬 전에 다른 분들이 찍은 춤 테이프를 자료로 접한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무대가 생생하게 재현되는 정도가 덜 하다든가 무용수의 움직임이나 몸 상태가 잘 식별되지 않고, 또 무대 위 흐름 가운데 무용수들의 이동 경로 같은 것이 잘 보이지 않거나 끊기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그런 것들이 잘 보여야 작품도 잘 판별할 수 있을 텐데요. 춤영상은 춤 자체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춤영상이 과연 춤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는지 저로서는 당시에 큰 의문이었습니다. 무용가들이 공연하고 나면 자신을 알리는 수단으로 춤 동영상이 최우선일 겁니다. 이런저런 안타까움을 절감하던 차에 카메라를 구입하게 된 거지요. 그래서 ‘무대의 전모를 가급적 선명히 보여주는 식으로 찍어야 한다’는 것을 모토로 삼았습니다. 부족한 장비를 갖고서나마 우리가 공연장에서 작품 앞에 임석해 있는 듯한 느낌을 카메라로 담아야 한다는 것이 저의 포인트였습니다.
촬영 초기부터 제 카메라의 배율이나 선명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연히 줌인이나 줌아웃 기법을 많이 활용하게 되었습니다. 일반 촬영 영상들은 줌인이나 줌아웃을 그렇게 자주 쓰지 않지요. 대체로 앵글을 고정시킨 영상들은 지겨움을 유발하고 생동감이 좀 떨어지는 한계가 있습니다. 지금은 4K 규격의 최신 카메라를 사용해서 소형 카메라의 한계를 상당히 극복한 편이지만 그래도 줌인과 줌아웃을 지금까지 해왔던 식으로 반복합니다. 쉽게 말해 히트 앤 러닝 스타일의 촬영 방식을 활용하는 편이지요. 어떨 때는 무대가 굉장히 급박하게 변하기 때문에 전체를 보여주려면 줌인과 줌아웃도 급속하게 사용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때로는 제가 찍은 장면이 상당히 불안정해 보일 수 있습니다. 반면에 그만큼의 생동감은 있으리라 봅니다. 생동감을 위해서는 불안정함이라는 맹점을 종종 감수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 가지 대안으로 2007년경부터 두 대로 찍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최소형 디지털 캠코더가 나오기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중형 카메라와 최소형 카메라 각각 한 대씩 설치해서 단점을 어느 정도 해소한 것이지요. 아무튼 이른바 카메라 워크가 부지런하니까(웃음) 생동감을 갖추게 된 거죠. 촬영장비의 미흡함이 작품의 생동감을 찾는 방법을 모색하는데 자극이 되었던 식으로 전화위복이 되었다 할까, 그렇게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방: 〈춤웹진〉 춤계 소식 기사에서 원창작자와 협의를 거쳐 도서관 안팎의 서비스에 들어간다고 되어있는데 그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겁니까?
김: 보도 이후에 구두로 언약을 하신 무용가는 몇 분 있습니다. 추후 국립도서관에 제 영상 자료가 가고, 그것을 국립도서관이 편집하기 이전 단계에서 원창작자와 합의가 있어야지요. 동의를 구하는 협의과정은 제가 진행하게 됩니다. 국립도서관에서는 춤계를 잘 모르시고 원저작자가 저이기 때문에, 제가 진행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사전에 그 말씀을 하시더군요. 저도 그렇게 하는 것이 적절하겠다고 생각하고요. 원창작자와의 협의는 이제부터 추진될 것입니다. 이미 보도된 대로, 개인문고로 설정되어 이름이 ‘김채현 문고’로 됩니다. 이전의 문고는 서책(書冊)이고 이제 영상자료로 구성될 개인문고는 국립도서관 사상 처음이기 때문에, 국립도서관이 서책의 시대에서 디지털 파일까지 포함하는 시대로 기능을 확대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지금도 국립도서관에 가면 디지털도서관이 있어요. 저의 기증과는 무관하게 지금이라도 한번 방문하시기를 권합니다. 대체로 책을 스캔한 것, pdf 파일 등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규모가 생각보다 크고, 변화하는 시대상이 국립도서관에서도 재확인될 겁니다.
방: 사소한 얘기일 수 있습니다만, 개인적으로 헌신하고 기여하신 부분이 사람들에게는 잘 와 닿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쉬운 사례로, 테이프를 디지털화하는데 상당한 비용이 들었다 하셨는데 약 5천개의 테이프를 변환하는데 얼마나 들까요? 거기에 8mm, 6mm 테이프 구입비용, 장비에 대한 감가상각 등은 제외하고서라도 말이지요.
김: 시중에서 한 개당 변환 비용으로 약 만 원씩 받는데, 제가 디지털화 작업을 추진하며 들인 비용은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개인적으로 한 것도 있고, 협조를 받아 한 것도 있지만 어쨌든 근 5천개를 디지털화하는 규모라면 개인이 부담하기에는 상당한 액수인 것은 사실입니다. 테이프야 20여 년간 구입해왔으니 그렇다 치고, 카메라도 최신 장비로 교체되는 주기가 자꾸만 짧아지고 있습니다. 기능이 향상된 카메라가 출시되면 저 자신은 어느덧 이른바 지름신 앞에 놓이고 맙니다. 신형 카메라를 구입할 적에는 비용 절감 차원에서라도 교환 방식으로 구입을 많이 하죠. 구형 카메라를 들고 상점에 가면 무슨 장물을 갖고 온 것처럼 신분증을 보자 하고, 건전한 상거래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일이겠지만, 참으로 내키지 않는 기분들을 감내해야 합니다. 배낭도 향상된 기능을 찾기 위해 열 번쯤 갈았을 거에요. 습도나 온도를 유의해야 하는 테이프의 보존함을 구하는데도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 결국 기업체의 공구나 부속 분류함을 다량 구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까지 들인 직접 비용은 얼추 1억을 훌쩍 상회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요즘은 디지털로 저장하다보니 외장하드 필요량도 만만찮은데 근래 값이 많이 내려 거기에 고무되어 더욱 디지털화에 박차를 가한 점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디지털 시대를 더욱 실감합니다.
방: 이번에 1차로 500편을 기증한다고 들었는데, 그럼 앞으로 계속 기증하실 의사가 있는지요?
김: 네, 그렇습니다. 이번의 500편 이외에도 수천 편이 있는데다가 제가 춤 작품을 계속 비평 촬영할 것이기 때문에 국립도서관에서도 그렇게 희망하고 있습니다. 이후 2차, 3차식으로 기증하는 건에 대해 국립도서관과는 내적으로 약속되어 있습니다. 디지털 시대답게 춤영상 문고도 앞으로 지속적으로 보충되는 확장성을 안에 품고 있습니다. 마치 어떤 생물체가 성장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어, 제 개인적으로도 상당히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방: 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씀이 있으신가요?
김: 미비한 장비, 서툰 솜씨로 춤계 발전에 동참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무엇보다 촬영에 협조해주신 무용인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재삼 감사의 말씀부터 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비로소 이런 마음을 전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알려진 대로 리우카니발, 뮌헨 옥토버페스트, 삿포로 눈축제, 강릉 단오제, 영산 줄다리기, 2002 월드컵 등 국내외 축제 현장과 여행 현장을 제 시각으로 촬영한 것이 300시간 분량을 넘을 겁니다. 참고로 겨울철 노르웨이 혹한 속에서 제가 부족하나마 촬영해서 편집한 소품(https://www.youtube.com/watch?v=4zRvEURVBtg)을 〈춤웹진〉 독자들께 드리고 싶습니다. 또 우리 아이들 성장기를 중심으로 우리 가정사를 촬영한 것도 100시간 정도 되는데, 우리 가정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범위 내에서 이 시대 일반인들의 생활사(生活史) 관련 자료로도 혹시나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료를 끌어안고 묵혀두기보다 공유해서 선용하는 것이 중요해 보여 이제는 이런 사실을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아무튼 국립도서관 춤영상 문고가 춤을 향한 담론을 왕성하게 일으키는 데 일조하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무용인들뿐 아니라 모두에게 소중한 춤이 속속들이 전파되려면 담론이 늘어나야 하고, 이를 위한 선행 작업으로 춤영상 문고처럼 전파 경로부터 다변화되어야 할 겁니다.
방: 제가 요즘 하위징아의 〈중세의 가을〉을 읽고 있는데 거기서 ‘파리 시민의 일기’라는 자료를 자주 언급합니다. 평범한 사람의 기록이 후세 사람들에게 당시의 생활과 풍속을 전해주는 귀한 눈이 되어준다는 것이지요. 가정사 촬영분량에 대한 말씀을 들으니 그게 생각납니다. 오늘 하신 말씀 중에, “아무리 평범한 자료라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낫다”는 말씀이 자료의 필요성을 가장 압축적으로 설명해주시는 말씀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먼저 생각이 열린 분이 수고롭더라도 개척해놓으신 길이 있으면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보게 되지요. 이번 기증을 계기로 무용계 전체적으로도 자료화에 긍정적인 태도가 확산되고, 국립도서관의 웹서비스를 보다 많은 사람이 활용하여 춤인구의 저변도 넓어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