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제주특별자치도립무용단이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가졌다. 제주도 도제 실시 70주년, 특별자치도 10주년을 맞아 가진 이번 공연은 제주도에서 전해져 오는 향토적인 소재의 무용극 작품과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 그리고 도지사의 피날레 멘트까지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공공 무용단들의 역할에 대해 되짚어 볼 수 있었다. 공연의 배경과 무용단 운영에 대한 이모저모를 상임안무가로부터 들었다. (편집자 주)
장광열 5월 21일 토요일 저녁 국립극장 해오름 극장은 열기가 대단했다. 커튼콜 때 제주도지사의 문화예술에 대한 중요성을 담은 짧은 멘트도 인상적이었다. 제주특별자치도립무용단이 창단된 지 꽤 되었을 텐데 처음으로 서울 공연을 가졌다니 놀랐다. 이번 공연은 어떻게 해서 추진된 것인가?
배상복 올해가 제주도가 특별자치도가 된지 10년이 되는 해이다. 다행히 행운까지 따라주어 어려운 국립극장 대관심사에 통과되어 공연을 하게 된 것이다. 마음 한켠엔 제주의 독창적이고도 우수한 문화를 소개하면서, 제주도립무용단의 활동을, 배상복의 예술세계를 알리고 싶은 소박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는데, 저의 기획의도가 도의 정책적 차원으로 확산되고 도지사님께서도 애정과 관심을 주어 성과를 거두게 된 것 같다.
공연작품 〈춤, 홍랑〉은 무용극 스타일로 구성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국립극장 무대에서 무용극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언제 초연되었는가?
제주의 정체성을 구축하고 제주의 색깔을 담은 로컬리즘을 염두에 두고 제주의 소재를 찾았다. 2014년 제주문예회관에서 초연되었다.
지역의 공공무용단들이 해당 지역의 향토적인 소재를 찾아내어 작품화하는 것은 그만큼 경쟁력이 있는 작업이 될 수 있다. 주인공들은 실제로 현존했던 인물들인가?
조선 정조 5년 정조시해음모사건에 연루되어 1777년 제주에 유배온 조정철과 제주여인 홍윤애와의 처절하고도 애절한 감동의 실제 러브스토리이다. 1781년 노론파 조정철의 집안과 할아버지 때부터 원수지간인 소론파 인물이 제주목사로 부임하면서 이들의 사랑은 비극으로 치닫게 된다. 조정철의 죄상을 캐고자 했던 목사는 홍윤애를 문초했고, 잔인한 매질로 결국 홍윤애는 생을 마감했다. 순조 5년에 사면복권이 된 조정철은 30여년의 유배에서 풀려나 1811년 환갑의 나이에 제주목사로 부임해 홍윤애의 묘를 찾아 애절함을 담은 비문을 남긴다. 제주역사의 뒤안길에 쓸쓸히 전해오는 실제 이야기이다.
'Soul of Jaeju 시리즈 4'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기획 시리즈로 준비된 것인가?
그렇다. 〈춤, 홍랑〉은 초연, 재연을 통해서 여론과 관객들의 반응을 지켜보면서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또다시 수정하고 보완하면서 작품의 완성도에 더욱 정성을 쏟았다.
적지 않은 출연자들이 무대를 메웠다. 기존 단원들만으로는 부족했을 텐데...
그렇게 보였다니 다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출연한 무용수들은 31명이었다. 10여명의 객원 무용수들이 합류했다. 서사극 형식을 지니고 있어 많은 출연진이 요구되었으나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도내 여기저기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인력들을 어렵게 구해 캐릭터들을 주고 훈련시켜 그림을 만들었다.
현재 단원들은 몇 명인가? 제주도내에 무용과가 개설된 대학이 없는 상황이고 무용 인구도 적지 않은 상황에서 우수한 단원들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현재단원은 35명 정도이다. 이중 30프로 정도만이 이곳 출신들이다. 다양한 단원들이 많이 있다. 그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조련한다. 춤을 즐겁게 추게 하고, 진정한 춤의 재미를 느끼게 하면서, 한국춤의 정신과 혼을 강조하고 있다. 직접 같이 땀 흘리면서, 오로지 춤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임하다보니 단원들의 기량이 발전되었다는 소릴 자주 듣는다. 춤은 말이 필요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한 두 시간이면 단원들은 안무자를 다 파악하고 만다.
중앙과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공연 소식을 접하기가 쉽지 않았다. 연간 몇 차례의 공연을 하고 있는가? 어떤 내용의 활동들을 하는지 궁금하다.
생각처럼 그리 많지는 않은 편이다. 이곳의 특성상 국제 세미나와 회의 등이 있기에 그에 따른 초청공연 , 도내∙외 공연, 연간 한두 번의 해외공연이 있는 정도이다.
예술적인 작품은 정기공연 무대를 통해서 선보이고 대부분은 민속춤들을 공연한다.
언제 상임안무가로 부임했는가? 부임 후 어떤 작품들을 새로 제작했는가?
2010년 4월로 기억한다. 로컬리즘을 표방하였기에 꾸준히 지역적 소재를 담은 작품들을 내놓았다.
<춤웹진> 독자들을 위해 본인 소개를 부탁한다.
최현, 배정혜 선생님 두 분이 나의 스승이시다. 완벽하시기로 유명하신 故 최현 선생님께 춤의 첫발을 떼었다. 철저한 도제식교육을 받으며 선생님과 함께 생활하였고, 그런 삶 속에서 춤뿐만이 아니라 예와 도를, 예술가로서의 기본소양, 덕목까지도 모두 느끼고 깨우치라고 하셨다. 그런 춤 공부를 하던 중 서울시립무용단에 입단, 두 번째 스승이신 배정혜 선생님을 만났다. 최현 선생님과는 다른 춤의 기법과 예술적 사상을 배우면서 또 다른 춤의 세계를 느낄 수 있었다. 주변에서는 스승 복이 많다고 몹시 부러워들 한다. 그러면서 수석단원, 지도위원, 단장대행의 일까지 경험하면서 자연스레 프로무용수들을 조련하고 또 안무도 하게 되는 기회도 가지게 되었다.
고 최현 선생님의 추모 공연 무대도 개최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최현춤보존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최현 선생님 추모공연을 매년 진행하고 있고, 나의 아내인 여미도씨와 함께 배상복·여미도 BnS chum company 예술감독으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지역에서 공공 직업무용단을 운영하기가 쉽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제주도는 섬 지역이라 또 다른 난관이 있을 것이다.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
어려운 점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하지만 나의 소신은 한결같다. 춤 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을 두려고 하지 않는 편이다. 직업무용단의 본질이 무엇인가? 춤을 추는 곳이고 작품으로 말해야하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단체장의 업무 중 하나가 행정과의 관계도 원활하게 유지하고 배제할 수 없는 입장에 있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단원들에게 가장 중요한 춤으로 다가서며 그들을 이해하려고 애쓴다. 단원들을 이해하다보니 소통과 공감은 저절로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는 어려운 듯 하지만 보편적 진리라는 생각과 함께 16년의 직업무용단시절 단원의 입장에서 느끼고 경험했던 단순한 소망을 실현하고 있다.
상임안무가로서 단체를 어떻게 운영해가고 싶은지, 생각하고 있는 앞으로의 활동방향이 궁금하다.
제주는 콘텐츠가 많다. 제주의 지역적 소재를 끊임없이 연구하고 발굴하여 춤으로 부활시키는 일이다. 동시에 중앙과의 교류활성화에도 눈을 돌리고, 제주문화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 고취, 아울러 도립무용단의 위상을 높이는 역할을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국의 무용계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25세의 비교적 늦은 시기에 춤을 시작하여 그 흔한 학연, 지연, 혈연 아무것도 없다. 그런 이유들이 나를 늘 정신 차리며 긴장하고 살게 했다. 그러면서 성실함은 기본이요, 그 성실함을 넘어 치열하게 살아온 것 같다. 춤의 길은 너무 힘들고 외롭다.
나는 늘 혼자라는 생각을 한다. 나의 스승 최현 선생님께서 말씀 하셨다. “왕따를 두려워마라, 백수의 사자 호랑이가 무리지어 다니느냐“ 라고... 지금 생각해보니 선생님도 늘 외로움 속에서 춤을 추시고 삶을 사셨던 것 같다. 요즘은 그 말씀이 더욱 생생하게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