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2016년 1월. 최승희의 춤들이 한국 춤계 구석구석 무용 연습실을 뜨겁게 달구었다. 의정부·군산·서울에서 연속된 최승희의 춤은 2월에는 부산으로까지 이어진다. 전 세계적으로 춤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전승하는데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지고 있고,재일 무용가 백홍천도 그 주인공 중 한명이다.
최승희의 춤 작품을 보급하기 위해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을 대한민국으로 바꾸었다. 도쿄에 거주하고 있는 백홍천은 일본과 한국을 중심으로 최승희의 춤을 보급하는 작업을 20여년 가까이 꾸준히 해오고 있다.
장광열 오랜만에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위해 서울시립무용단 연습실을 찾게 되었습니다. 서울시립무용단에서는 최승희의 어떤 춤들을 강습하고 있는가요?
백홍천 최승희가 만든 <장검무>를 이틀째 가르치고 있습니다. <장검무>는 1942년에 최승희가 만든 작품인데 1935년에 진주검무의 2배 긴 칼을 사용해 만든 <쌍검무>를 공연한 후 재창작하여 무대에 올렸습니다. 그의 딸 안성희가 1950년대에 이 작품을 개작했는데 영상의 일부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중국 경극의 영향을 많이 흡수하고 무용음악과 의상도 중국풍이어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1월에만도 군산과 의정부에서 최승희의 또 다른 춤 강습이 진행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군산무용협회에서 주관한 강습회에서는 <물동이춤>과 <샘물터에서>를 전수했고, 의정부시립무용단에서는 <부채춤>과 <목동과 처녀> <물동이춤> <칼춤> 등 수년째 최승희의 레퍼토리들을 배우고 있습니다. 개인 무용가들의 경우도 요청이 오면 별도로 춤을 지도하고 있는데 1월에도 그런 기회가 있었습니다.
1992년 탄생 90년 최승희국제무용축제가 한국에서 열렸었지요. 백선생님을 뵈오니 그때 '조선민족무용기본'(최승희무용기본) 강습회를 선생님과 연변대학교 장영순 교수님을 강사로 모시고 서울과 부산에서 개최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장광열 선생님께 직접 조직했고 예술감독을 맡았었지요. 당시 그것이 한국에서는 공식적으로 처음 열렸던 '최승희무용기본동작' 강습회였습니다.
작고한 무용가들이 남긴 춤 문화유산은 그것 자체로 소중한 유형·무형의 자산입니다. 이즈음 들어 세계 곳곳에서 유명 무용가들의 춤을 아카이빙 하는 노력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최승희의 춤은 세계를 무대로 활동한 무용가이고 동양무용론을 주창하며 일본과 중국, 그리고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 모두에 끼친 최승희의 영향 등을 생각하면 이제는 문화유산의 차원에서 제대로 관리되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그동안 강습하신 최승희의 작품들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최승희무용기본'과 <무녀춤> <쟁강춤> <손북춤> <평양검무> <산호춤><고구려무희><진주의 무희><물동이춤> <목동과 처녀> <장검무> 등이 있습니다. 그동안 중앙대 부산대 상명대 선화예고 서울예고 덕원예고 예원학교 등의 학교와 울산시립무용단 청주시립무용단 목포시립무용단 등 시립 무용단에서 최승희의 작품들을 지도했습니다.
국립무용단에서는 하지 않으셨나요?
아, 국수호 선생님께서 <가야>을 안무하실 때 했었습니다.
'조선민족무용기본'은 제가 1989년 모스크바에서 비디오를 입수해 우리나라의 지도급 무용가 몇 분에게 교육적으로 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며 전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1958년에 만들어진 기본이 당시 16미리 필름, 영상자료로 제작된 것을 처음 알고 감짝 놀랐었지요. 비디오는 그 영상을 복사한 것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북한의 자료를 갖고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에 공항 검색대를 통과할 때 가슴을 졸였던 기억이 나네요. '최승희무용기본'은 내용이 꽤 방대한 편이지요.
'조선민족무용기본'은 제가 1989년 모스크바에서 비디오를 입수해 우리나라의 지도급 무용가 몇 분에게 교육적으로 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며 전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1958년에 만들어진 기본이 당시 16미리 필름, 영상자료로 제작된 것을 처음 알고 감짝 놀랐었지요. 비디오는 그 영상을 복사한 것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북한의 자료를 갖고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에 공항 검색대를 통과할 때 가슴을 졸였던 기억이 나네요. '최승희무용기본'은 내용이 꽤 방대한 편이지요.
1번부터 12번까지 기본 동작과 기술동작, 몸풀기 동작 등 모든 내용들을 강습하고 있습니다. <무녀춤>의 경우는 최승희가 1937년에 솔로로 만든 것 외에도 안성희가 1962년에 이를 군무로 만든 춤을 함께 지도했고, <쟁강춤>과 <손북춤>은 최승희의 제자인 김해춘이 각각 1983년과 1974년에 개작한 작품도 함께 강습하고 있습니다. 2월에는 부산대학교에서 최승희 춤 강습회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부산대학교 학생 50여명이 매년 참여하는데 강미리 교수님과 함께 벌써 7년째 하고 있습니다.
최승희는 안무가 무용수 뿐만 아니라 무용교육자로도 큰 업적을 남겼지요. '최승희무용기본'은 인쇄된 책자와 영상자료로 된 교재와 이를 가르칠 수 있는 교육되어진 강사들을 확보하는 보급 시스템이 1960년 전후에 이미 잘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놀랄만한 일이지요. 선생님의 경우도 '최승희무용기본'을 체계적으로 배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일본에서 북송이 시작된 것은 1950년대부터입니다. 북송 제1차 귀국선은 1959년 12월 일본 니가타항에서 청진항까지 운항했습니다. 저의 경우는 1964년에 일본과 북한을 오가던 러시아의 그리리옹호에서 최승희의 기본과 최승희의 작품 2개를 배웠습니다. 그 배가 니카타 항에 정박해 있는 2박 3일 동안 아침 8시부터 밤 12시까지 수차례에 걸쳐 배우고 연습했지요.
그 이후로는 최승희의 무용 작품은 어디서 배우셨나요?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만경봉호가 일본과 북한을 수시로 운행했지요. 1977년부터 2009년까지는 직접 북한으로 들어가서 춤을 배웠습니다. 북한은 국가적으로 예술을 장려한다는 입장에서 매해 북한 북한 국적을 가진 재일동포 조총련 무용가들을 평양으로 초청해 무용 강습화를 개최했습니다. 평양으로 건너가 주해덕 장추화 김해춘 홍정화 김락영 등 최승희의 직계 제자들로부터 직접 춤을 배웠습니다. 작품 강습은 물론이고 무용음악과 의상까지 모두 무료로 제공해 주더군요.
남쪽, 우리나라의 무용가들에게 '최승희무용기본'이 강습되어진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최승희는 무용기본을 만들 때 제자들로 하여금 한반도 곳곳을 다니면서 민속춤들을 연구하게하고 이를 토대로 발레 기본 동작처럼 과학적인 방법에 의해 기본을 체계화 했습니다. 따라서 한국 민속춤의 여러 요소들이 그 동작 속에 배어 있고 신체의 구석구석이 잘 발달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최승희 춤 작품의 경우는 당시 새로운 춤을 찾아야 한다는 일념에서 만들어졌으므로 각 작품 속에 그러한 새로운 시도들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며칠 동안의 짧은 기간 안에 이루어지는 강습회로 최승희의 작품이 가진 멋과 맛을 오롯이 표현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최승희의 작품 맛을 알려면 최승희의 무용 메소드를 알아야 합니다. <백조의 호수>를 공연하기 위해서는 발레 기본을 충실히 익힌 무용수들이 작품 연습과 리허설을 한 후에야 공연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작품 공연을 위해서는 ‘최승희무용기본‘에 대한 이해가 우선입니다. 기본은 안하고 작품만 하려고 하는 것은 그래서 문제가 있습니다. 실제로 모 시립무용단에서 3일 동안 작품 순서만 배우고 나서 3일 만에 공연한 사례도 있어서 제가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한 일도 있었습니다. 저는 '최승희무용기본'을 배운지 50년이 지난 지금도 훈련을 합니다.
최승희의 춤이 보급되면서 강습을 받은 사람들이 이를 활용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부실함에 대한 우려가 생겨납니다. 외국의 경우 유명 안무가의 작품은 작고한 후에도 체계적으로 관리가 되지요. 조지 발란신의 작품을 공연하려면 발란신재단에서 파견하는 트레이너의 지도를 받은 후에야 공연할 수 있는 것이 그런 예입니다.
그렇습니다. 춤 문화유산의 경우 제대로 배우지 않은 상태에서 전승되는 일은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본질이 호도된 잘못된 것을 가르치게 되는 일이 생겨날 수도 있을 테니까요.
북한에서의 최승희 춤은 김대중 대통령이 방북시 환영만찬에서 공연되어진 작품 중에 최승희의 <쟁강춤> 등이 포함되어 있는 것 등에서 복원이 허용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이후 최승희의 묘가 애국지사의 묘역으로 이전되면서 완전히 복권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지난 2014년에 최승희 무용탄생 100주년 행사가 북한에서도 있었습니다. 김해춘이 최승희의 기본은 국보급의 가치가 있다고 말했고 그가 각색한 <사도성의 이야기>가 공연되었습니다. 홍종화는 북한무용이 지나치게 대규모로 관광상품화 되는 것과 관련해 “북한무용이 체조화되어 버렸다. 무용수들은 어느새 기계체조를 하는 것처럼 움직인다. 북한의 무용은 최승희 류로 돌아가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원래의 무용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일본에서는 최승희 춤들이 어떻게 보급되고 있나요?
금강산가극단이 중심이 되어 보급하고 있습니다. 금강산가극단은 기악 무용 성악 파트 60여명의 단원들이 있습니다. 이중 무용수들은 25명 정도 되지요. 일본 전역을 돌면서 일년에 200여 회의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무용수 중에는 54세 된 저의 제자도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최승의 춤들이 어떻게 공연되고 있나요?
피바다가극단과 만수대예술단에서 공연되고 모란봉예술단에서는 작품은 다르지만, <아박춤> <박편무><바라춤> 등은 최승희 스타일의 작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최승희 춤의 유산들을 남쪽의 무용가에게 보급하고 있는 선생님의 노력은 후일 더욱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같은 시도를 언제부터 시작하셨는지요?
1998년부터로 기억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은 것을 내가 하고 있기 때문에 인정을 해주는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 보람을 느낍니다.
2002년 '최승희무용기본' 강습 때 중앙정보부 요원이 강습회장에까지 왔던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께서 북한 국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랬었지요. 남쪽의 무용계에서 최승희 춤에 대한 강습 요청이 많아지면서 일일이 신고하는 것이 번거로워 대한민국 국적으로 바꾸었습니다.
2002년 '최승희무용기본' 강습 때 중앙정보부 요원이 강습회장에까지 왔던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께서 북한 국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랬었지요. 남쪽의 무용계에서 최승희 춤에 대한 강습 요청이 많아지면서 일일이 신고하는 것이 번거로워 대한민국 국적으로 바꾸었습니다.
최승희의 춤 유산은 작곡가 윤이상의 작품과 함께 향후 남북통일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란 점을 평소 늘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남북의 최승희 춤의 교류는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실현되어야 합니다. 선생님에 의해 시도되는 최승희 춤 메소드와 레퍼토리 보급은 그런 면에서 예술을 통한 남북교류의 의미도 담겨져 있습니다.
예술은 국가적인 지원이 있어야 성장합니다. 최승희의 직계 제자로 아직도 생존해 있는 홍종화 김해춘 등을 남쪽으로 초청해 최승희의 기본과 춤 작품들을 배우고 한국의 전통무용을 북한의 무용가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교류가 될 수 있습니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면에서 최승희의 춤을 통한 남북교류가 조금씩이라도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