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옥 늘 선생님을 뵈면 항상 제가 하는 이야기가 무용계에 2대 불가사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이제 미수(米壽)시잖아요. 80대 후반에서 90대 초반의 선생님들 중에서도 가장 젊음을 유지하고 계신분이 딱 두 분 계신데 바로 김문숙 선생님과 전황 선생님이십니다. 여전히 선생님은 곱고 아름다우시고, 멋있는 인생을 살아오신 모습이 역력히 보이십니다. 아주 오랜 만에 선생님의 이름을 내건 공연 무대를 갖게 된 것 같습니다. 4월 2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갖는 공연의 타이틀이 ‘조택원 김문숙의 춤‘입니다. ’근 현대 춤 문화유산의 보고‘란 부제가 붙어 있더군요. 이번 공연은 어떻게 준비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김문숙 말씀하신대로 제가 올해 미수(米壽)를 맞았습니다. 조택원 선생은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흥’의 정서를 작품에 담고자 노력했고, 한국 민속춤을 예술로 승화시켜 오늘날 한국춤의 근간을 이루어 놓으신 분이십니다. 그 분의 춤을 후대에 널리 전하고자 이번 공연을 생각하게 되었고, 국수호 선생에게 도움을 요청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조택원 선생은 우리나라와 일본을 오가는 공연에 만족하지 않고 유럽으로 진출해 <가사호접(袈裟胡蝶)><만종(晩鐘)> 등의 작품으로 무용가로서의 이름을 떨쳤고, 미국으로 활동의 영역을 넓혀 한국춤의 고유한 예술세계를 담은 <신노심불로(身老心不老)><소고(小鼓)춤><농악무(農樂舞)> 등을 창작한 예인(藝人)입니다. 이번 공연은 그런 춤 문화유산들을 무대에 올린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무대는 한국 근대문화로의 개화를 이끌어 낸 춤 유산들의 발자취를 찾고, 우리의 근현대춤 유산이 사장되지 않도록 마련한 마지막 무대가 될 것입니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과연 어떤 작품들이 공연될 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이번에 <춘향전>을 무용조곡으로 합니다. 1장 방자표표, 2장 춘향난만, 3장 몽룡춘흥, 4장 광한정연, 5장 옥중춘향, 6장 재회장한 등 6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원래는 ‘사랑가’만 했었는데 이번에 이렇게 장을 나눠서 안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1부에서는 <춘향전>과 함께 조택원 선생의 대표작인 <만종(晩鐘)>, <가사호접(袈裟胡蝶)>이, 2부에서는 저의 작품인 <대궐(大闕)>, <수평선(水平線)>, <살풀이>, <모란등기(牧丹燈記)>가 공연될 예정입니다. <춘향전>과 <모란등기>는 국수호 선생의 재현안무로 무대에 올려 집니다.
<만종>은 조택원 선생님 돌아가시기 전에 제가 받아서 젊은 세대로 전달이 됐고 이번에는 김형남과 김호은이 출연을 합니다. <대궐>은 화관무입니다. 제가 화관무를 보면서 느꼈던 것이 이것을 더 현대화해서 세련되게 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동작만 있어서는 안되겠다 내용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제가 내용을 넣었습니다. 삼천 궁녀가 한 임금만 바라보고 평생을 받쳤잖아요. 그 희노애락을 담아야겠다고 해서 타이틀을 대궐이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처음 공연을 할 때 의상도 제가 만들었습니다. 옷감 사다가 바느질 하고 수도 넣어서 만들었습니다. 그 때 윤경모가 와서 같이 도와줬습니다.
<수평선>은 산조입니다. 여기에도 내용을 넣었는데 그것이 애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입니다. 의상도 제가 만들었습니다. 목깃은 자주색으로 해서 스팽글을 달고, 손 깃에도 스팽글을 달고 했었습니다.
<수평선>과 <모란등기>는 자주 공연되지 않았던 작품이지요?
<모란등기>는 제가 중국 야화를 보고 모란등기 소재가 너무 좋아서 춤으로 만든 것입니다. 한 마을 단오절 축제 때 남녀가 눈이 맞아 연애를 하는데 알고 보니 여자가 귀신이었고, 결국 남자는 죽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최초의 한국 무용극인 조택원 선생의 <춘향전>과 선생님의 1958년 초연작인 무용극 <모란등기>가 다시 재현된다는 것은 역사적 가치와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이번에 국수호 선생이 하는 재현안무는 1944년 3월23-24일 부민관에서 공연된 조택원 무용단의 공연 프로그램에 나와 있는 무용조곡 <춘향전>의 내용과 조택원의 신문연재 기사, 각종 사진자료, 저의 증언 등을 토대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춤 인생은 다른 원로 무용가선생님들과는 또 다르게 국내외를 누빈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지요?
저는 어렸을 적에 지금 말하면 유치원 같은 곳에 다녔습니다. 그때 음악만 나오면 몸짓을 했었나봐요. 그래서 어머니께서 예는 연예계로 가야겠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그때는 무용을 하면 촌스럽다 할 때에요. 그래도 어머니, 아버지께서 연극을 좋아하셔서 그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철이 들면서 공연 보러 따라 다녔던 것이 기억이 나니까요.
어쨌든 초등학교 6학년 때 제가 안무를 해서 6~7명을 데리고 춤을 췄어요. 잘하고 못 추고를 떠나서 창작을 했던 거죠. 지금 보면 유치하고 그렇지만 그 때는 책에도 없는 춤을 총 동원해서 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초립동도 모니터를 보고 췄었습니다. 그 때는 초립을 쓰지 않고 <흥>이라고 해서 바구니를 들고 췄었습니다. 그 때 저는 연극도 하고 음악도 하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이렇게 무용만 전공할지 몰랐습니다. 그 때는 다방면으로 다 좋아하고 특히 연극을 좋아했었으니까요.
당시 대학교 입학은 아주 드문 일이었지요. 대학에는 어떻게 진학하게 되었나요?
원래는 이화여자대학교를 가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중앙대학교 이명신 박사 행사가 있었는데 어떻게 하다가 제가 거기서 <흥>을 추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곤 중앙대학교에 오면 장학금을 주고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배워 와서 이 학교에서 봉사를 하라고 하셔서 중앙대학교로 가게 된 것입니다. 학교 행사 때 춤을 추게 됐는데 그 때 저를 보고 나이는 저보다 많은데 학년은 낮았던 하급생이 좋다고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때가 첫 연애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겨서 3학년 때 퇴학을 당했습니다. 그 뒤로 밀선을 타려고 기차타고 부산엘 갔습니다. 그 땐 여권이 없어서 어선을 타고 그 남학생이랑 일본에 갔었습니다. 그 옛날에 라이터돌을 사가지고 가면 10배 가격으로 팔 수 있다고 해서 사서 어선을 타고 갔죠. 그 때 어선을 타고 일본에 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공부를 하러 가거나 부산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배를 잘 못 내려서 기차도 없는 곳에 내렸습니다. 거기가 야마구치였습니다. 어딘지도 모르고 헤매고 다니는데 목이 너무 말랐습니다. 그러다 무를 발견해서 뽑아서 먹었는데 그 때 그 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것이 귤이었습니다. 그래서 같이 간 사람들과 귤을 사먹었는데 그 때 우리가 만 원짜리 신권을 내니까 수상하게 여긴 사람이 신고를 했습니다. 그래서 붙잡혀 왔지요. 그 때 오무라 수용소로 끌려가서 한국으로 들어가는 배를 기다렸다가 타고 부산으로 들어왔습니다. 그길로 다시 선주한테 가서 따졌습니다. 야마구치에 내려주면 어떡하냐 시무라세키로 데려다 달라고 했죠. 그래서 며칠 있다가 배를 타고 다시 갔습니다. 거기서 기차를 타고 다카라즈카를 보러 오사카로 갔습니다.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170cm 정도 되는 키 큰 여자들이 머리를 올리고 남자 옷을 입고 춤을 추는데 괜히 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시스템도 없는 우리나라에서 무슨 춤을 추겠다고 여기까지 왔을까 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죠.
일본으로 가게 된 경위도 그렇고 귀국하게 된 경위도 그렇고, 그리고 다시 일본으로 가게 된 것도 그렇고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네요. 일본행을 결심한 것은 무용 때문이었군요?
다시 동경으로 왔는데 그 때 친절하게 해주던 남자 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자분이 오해를 해서 신고를 했습니다. 그렇게 또 붙잡혀 동경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어떤 교포분이 보증을 서주셔서 집행유예 3년을 받고 그 분 집에 가서 신세를 졌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분이 운동권이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그 집을 나와 다시 그 남학생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일본에서 자기가 아는 분을 소개시켜주겠다고 해서 갔더니 아이리스 카메라 사장님이셨습니다. 그 분이 너는 집행유예를 3년을 받아서 3년 동안 일본에 있어도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그 때부터 무용을 배우러 여기저기 다녔습니다.
그런데 제가 무용 할 팔자가 아니었나봐요. 제가 알만한 선생님을 다 찾아갔었는데 외국에 나가고 안계셨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작은 음악학교에 이야기를 해서 무료로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병이 나서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그때 결핵인가 그랬던 것 같아요. 임상실험 대상자로 해서 치료를 받았었습니다. 그 때 먹었던 약이 스트렙트마이신이었는데 제가 1호 완치환자였습니다. 더 이상 이렇게는 안되겠다 해서 제 발로 오무라 수용소로 가서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들어오자마자 6.25사변이 터졌습니다. 그 때 관사에 있었는데 인민군 장교가 저를 눈여겨 봤었나봐요. 그래서 고모가 저만이라도 나가라고 해서 저와 저희 가족만 남고 다 이북으로 끌려가셨어요. 그러다 1.4 후퇴가 나서 친척집에 전전하면서 지냈습니다. 그 때 군예대를 꾸려서 대구로 갔습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정말 많은 일들을 겪으셨군요. 당시 군예대에서 함께 활동했던 분들은 누가 있습니까?
그 때 같이 간 사람들이 송범, 김진걸, 옥구연, 김근희 등이었는데 진짜 고생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 영양실조로 병이 나서 친척이 있던 부산으로 갔고 그 뒤 박성옥씨를 만났습니다. 저를 보시더니 한국무용 할 생각이 있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러면서 한국무용을 배우려면 장단 먼저 배워야 한다고 하시면서 두꺼운 잡지 두들기면서 북장단을 배우고, 무릎장단으로 춤 장단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몇 달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승무><검무><화관무> 등을 배웠습니다. 알고 봤더니 최희선씨하고 박성옥씨하고 알던 사이였습니다. 최희선씨의 제안으로 김미화, 조연자, 이인희 등과 함께 원주에 있는 곳에서 공연을 했었습니다. 조연자씨가 정말 잘생겼습니다. 절세 미녀였습니다. 그 분이 <화랑무>를 추는데 정말 멋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무대 무용은 저렇게 해야 하는 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감명을 줄 수 있는 춤, 매력이 있는 춤을 춰야겠다고 그 때 느꼈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부산으로 갔다가 저는 다시 환도를 했습니다.
함귀봉연구소에서 공부하게 된 때가 이 시기이지요?
그렇지요. 집도 절도 없는 시절에 함귀봉 교육무용연구소를 갔습니다. 그 때 동기들이 장추화씨에게 갔습니다. 조광, 김진걸 등이 거기 가서 배웠습니다. 그 춤도 남방춤이라 재미있었는데 제가 생각하는 이성적인 춤은 아니었습니다. 외형적으로 새롭고 재미있고 했지만 제가 추구하는 춤은 예술성이 있고 내면을 표현하는 춤을 추고 싶었기 때문에 함귀봉 무용연구소하고 더 맞았습니다. 거기선 이론도 많이 배웠었는데 문철민 평론가도 서양사를 가르쳤습니다. 그 때 공부가 많이 됐습니다.
그러다 충무로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집 없는 설움도 겪고 그랬습니다. 제가 9남매에 장손에 장녀여서 어려움 없이 자랐었는데 그 때 정말 힘들었습니다. 겨우 돈을 장만해서 전세인지 월세인지 작은 집을 구했습니다. 그 때는 유치원이 없었으니 애들을 다 무용연구소로 보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돈을 벌 수 있었죠. 그 뒤로 조금씩 늘려가서 첫 발표를 했던 것이 1958년도 명동 시공간에서였습니다. 지금 말하면 국립극장 전신이죠. 그렇게 첫 공연을 무사히 마쳤었습니다.
지금까지 선생님께서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잘 들었습니다. 이제 숨 좀 돌리시고 선생님과 조택원 선생님과의 만남을 이야기 해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조택원씨와 만난 것은 1959년이었습니다. 그 때 미국 공연을 마치고 일본 동경의 풍도에서 공연을 하기로 되어있었습니다. 그 때 최경애와 같이 갔었는데 공연 전 밥을 먹고 2층에서 내려가는데 조택원씨는 올라가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공연 전에 식당에 조택원씨 전화번호를 물어서 전화를 했습니다. 아까 식당에서 만난 사람인데 사실 전 예전에 대학생 때 함귀봉 무용교육소에서 선생님을 뵌 적이 있고 말씀드리면서 지금 이런 공연을 하는데 와서 봐 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제 공연을 보러 오셨죠. 뒤에 전화하셔서 공연 잘 봤다고 하면서 테크닉적으로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의도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몸을 이용해서 표현하려고 한 것은 대단하게 생각한다고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동경에 다시 오게 되면 연락하라고 하시면서 그렇게 헤어졌었습니다.
저는 한국으로 돌아와서 열심히 했고, 60년대 유럽 공연을 많이 다녔습니다.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의 이미지를 좋게 하기 위해 이러한 예술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었고 그래서 저희가 대접을 받으면서 공연을 많이 다녔었습니다. 그 때 한영숙씨가 저에게 살풀이를 추라고 해서 추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엔 감히 살풀이 출 생각을 안했었죠. 자신 없어서 안춘다고 했었는데 배운 그대로만 추면된다고 하셔서 그대로 췄었죠. 근데 조택원씨가 나중에 보고 너는 니 춤을 춰야한다고 하면서 아무리 똑같이 추려고 해도 함귀봉선생님처럼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만의 춤으로 만든 것이 살풀이 중 엎드려 하는 동작이 있는데 저는 그 부분을 빼고 무대를 사선으로 가로질러 가면서 무대 중간에 수건을 떨어트리고 다시 살짝 뒤돌아보는 동작으로 바꾸었습니다. 그 때 저는 수건을 애인이라고 생각하고 췄었습니다. 그것을 보고는 조택원씨가 이제 너의 춤을 찾았다고 했었죠.
선생님께서 조택원 선생님과 만나서 함께 활동했던 때의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저는 조택원 선생님 같은 사람을 다시는 못 만날 것입니다. 보통 남자가 아니셨습니다. 결혼을 했는데 생활비를 준적이 없습니다. 경제관념이 없으셨습니다. 그 당시 정치가들이 조택원 선생님을 존경하고 후원을 많이 해줬었습니다. 조택원씨 선생과는 결혼했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애인이었습니다. 제가 굶는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 오페라를 보러 갈 때 제가 아무렇게나 입고 가면 그 사람이 평생 노력해서 공연을 하는데 “너 그렇게 아무렇게나 입고가면 안된다. 존경을 해야한다”라고 하면서 네가 가진 것 중 최고 좋은 것을 입고 가야한다고 하고 그랬습니다.
또 저랑 4개월 동안 여행을 다녔었습니다. 그 당시 김중권 재정위원장을 포함해서 유명한 사람들이 돈을 모아서 환갑 때 여행을 가라고 10만불을 줬었습니다. 그 때 10만불은 정말 큰 돈이었습니다. 그 때 제가 하와이에서 5만불이면 별장 하나 살 수 있다고 하나 사자고 이야기를 했었는데 화를 내면서 이 돈은 우리보고 많은 것을 보면서 견문을 쌓으라고 준 돈이기 때문에 그 용도로만 써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조택원씨 만나서 루브르 박물관도 가고 견식을 많이 넓혔죠.
근데 그 때 재벌들이 정말 멋쟁이였던 것이 아낌없이 후원을 해줬습니다. 후원 받아서 한국민속무용단을 만들 수 있었던 거죠. 그것이 나중에 국립무용단이 되었습니다. 그 때 제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서 극장을 지어야 하니 남산을 내어달라고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그랬더니 봉이 김선달이 보다 더 하다고 이야기 하면서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남산은 건드릴 수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그 때는 국립극장을 못 지었었는데 그래도 이것이 씨앗이 돼서 그 뒤에 국립극장을 짓고 무용단도 만들 수 있었던 거죠.
마지막으로 후학들에게 춤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추어야 하는지 선생님의 춤 사상, 춤에 대한 생각을 들려주세요.
저는 처음부터 무용은 남의 것을 모방하기 보다는 잘하든 못하든 일단 자신의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화관무>를 김천흥 선생님께 배웠는데 그 춤을 보고 느낀 것이 이대로는 무대 작품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외국에서 다른 무용도 많이 보고 했었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내용을 넣고 다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춤에 내용이 있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해석을 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1940년대에는 무용가가 많았습니다. 그 때는 전통춤을 추는 사람은 무용가가 아니었습니다. 다 창작을 하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전부 자기 표현하는 작품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6.25사변을 겪으면서 많은 무용수들이 사라졌습니다. 무용은 남의 것만 모방하면 발전이 없고 못해도 좋으니까 자기가 아는 것을 총 동원해서 만들어보고 계속 수정하면서 좋은 것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다이아몬드도 다듬어야 아름다워지듯이 말이죠.
문화재로 지정되기 전에는 전부 창작이었습니다. 또 무용수는 다 개인 발표를 해야 했고요. 언제부터 전통이 중요하다고 해서 전통만 추고 있습니다. 전통을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서는 안 되고 그것을 토대로 자기 생각을 표출하는 것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무용계가 더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럴 것이라고 희망적으로 생각합니다.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의미 있는 이번 공연이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되길 기대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