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표지인물 인터뷰_ 창단 20주년 맞는 서울발레시어터 김인희 단장
받아온 것 이상으로 주고 싶다 10월에 새 단장 선임

 

 




이순열
서울발레시어터가 어느새 창단 20주년을 맡게 되었군요.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그동안 참으로 어려운 일들을 꿋꿋이 해쳐온 것을 보면서 ‘세상에는 기적이라는 것이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해왔어요. 그런데 기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 있었을 것입니다. 로마 속담에 “난관을 거쳐서 별에로“(Per aspera ad astra)라는 말이 있습니다. SBT는 별을 향한 그 기개로 모든 난관을 뛰어 넘었다고 생각되는데 그 기적의 서막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김인희 제가 현역 무용수로 다른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는 항상 해외에서 만들어진 작품을 공연 했습니다. 당시, 저와 남편 제임스 전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작품을 하는 것은 배우는 과정에서 중요하겠지만 이제는 ‘우리도 우리 것을 만들어서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듯한 느낌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발레단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 회의가 94년 11월 11일 이었는데 저희가 창단식을 95년 2월 19일에 했으니 얼마나 준비 없이 시작했는지 짐작하실 겁니다. 그런데 반대로 철저하게 생각하고 준비를 많이 했다면 시작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단원은 몇 명이었습니까?
당시 창단멤버 8명이 모여 시작했는데, 창단 공연 때의 인원(단원)은30명이었습니다. 국립발레단, 유니버설발레단에서 활동하던 무용수들이었습니다. 형, 누나하며 따르면 친한 후배들이 제임스 전의 새로운 도전에 뜻을 모아 만들어졌습니다. 지금은 무대에 서는 단원은 29명이고 사무실 직원은 10명입니다. 단원들의 결혼과 출산으로 인해 약간의 변동은 있었지만 항상 30명 정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계승적인 것,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맥이라는 것이 중요한데 발레는 이탈리아에서 생겨나서 프랑스로 넘어가 꽃피다가 그것이 시들어져갈 무렵에 다시 러시아라는 새로운 묘상을 찾았고, 그렇게 이어가다가 언젠가는 또 다시 옮길 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곳이 한국일 수밖에 없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렇다면 한국에서 누가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합니다. 그것은 어느 한 군데에서 한다는 것은 어렵고 서로 손을 잡고 상부상조 하면서 터전을 만들어가야 하는데 국공립이라든지 공식적인 재단도 중요하지만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곳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서울발레시어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서울발레시어터를 이끌어 오면서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중 한분이 로이 토비야스가 아닐까 합니다.

네. 맞습니다. 발레단을 창단하고 우리 것을 만들어야겠다는 창작 열정을 갖게 해주신 분이 로이 토비아스 선생님이셨습니다. 또한 저희 발레단에 전통을 물려주신 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로이 토비아스 선생님은 조지 발란신의 제자이면서, 뉴욕시티발레단의 최연소 단원이었고, 조지 발란신은 발레 뤼스에서 활동했던 최연소 안무가였습니다. 그렇기에 저뿐만 아니라 저희 단원들은 작은 민간예술단체라는 생각을 넘어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의 맥을 이어간다는 사명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 구성원들이 발레단 월급만으로는 어려워 대부분 2개 이상 일을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년을 꾸준히 같은 곳을 바라 보고 함께한 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원들과 사무실 직원들에게 모두 감사하고, 그 분들 덕분에 저와 제임스가 박수를 받고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발레협동조합도 하고 계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발레협동조합에 대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4년 전부터 민간발레단 다섯 단체(유니버설발레단, 와이즈발레단, 이원국발레단, SEO발레단, 서울발레시어터)가 모여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7~8년 전부터 국공립 단체 지원이 늘어나면서 상대적으로 민간단체들이 박탈감을 느꼈습니다. 저희보다는 단원들이 더 그랬을 겁니다. 국립단체에 친구나 동기들이 있었을 테니 상황을 모를 수가 없었던 거죠. 그래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얘기만 하지 말고 해결방법을 찾아보자는 의견이 나와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회의를 하면서 힘을 합쳐 좋은 공연을 만들어 발레시장을 키우는데 조금이라도 노력을 해보자는데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2013년 강동아트센터 300석 규모의 소극장에서 3월, 5월, 8월에 시범공연을 처음 했었는데 정말 반응이 좋았습니다. 공연을 보고 나가면서 다음 공연을 예매하는 관객도 있었습니다. 다섯 단체의 공연을 한 공연장에서 볼 수 있고, 단장들의 작품해설이 타 공연과 다르다는 소문이 나면서 일반 관객들도 굉장히 많이 늘었습니다.
작년에는 800석 규모의 대극장에서 공연을 했고, 올해는 3월과 5월 강동아트센터 대극장, 8월에는 수원시 제1야외음악당에서 “제1회 수원 발레페스티벌”로 찾아뵐 예정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발레를 보여주자’는 취지로 다들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가끔 오페라나 현대무용을 하시는 분들이 협동조합을 만들면 국가에서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많이 합니다. 지원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협동조합을 만들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저희는 지원을 받으려고 협동조합을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하면 자생력을 키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다가 시작한 것입니다. 운영은 회의를 통해 만장일치제로 운영되고 있고, 지난 회의부터는 부산에서 활동하는 김옥련발레단이 새로운 회원으로 들어왔습니다. 저희는 회원 수를 많이 늘리기보다는 정말 프로페셔널리즘을 지향하는 단체를 회원으로 하고자 합니다.
지금은 저희와 유니버설발레단이 전 단원과 직원에게 4대 보험을 보장해 주고 있는데, 최근 이원국 발레단도 많은 노력을 통해 단원들에게 4대 보험을 적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향후에는 협동조합의 모든 단체가 전 단원과 직원에게 4대 보험을 보장해주는 단체가 되는 것이 저희의 목표입니다. 지금도 매 달 한 번씩 모여 회의를 하고 있습니다. 작은 활동이라도 해서 수익이 생기면 조금이라도 단원들 복지를 좋게 해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떤 객체나 단체든지 그 나름대로의 존재 이유라는 것이 있어야 됐는데, 존재 이유가 없다면 찾아야 할 것입니다. 서울발레시어터의 경우 다른 발레단과 다른 점은 어린이를 위한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미래는 어린이들의 어깨에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것인데 그런 점에서 SBT는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외도 서울발레시어터가 다른 단체하고 차별된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나요?


저와 제임스전은 발레를 배울 수 있는 환경이 아닌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주변의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단 전부터 ‘사회에서 받은 혜택을 우리가 가진 재능을 통해서 돌려주자’ 라는 생각을 해왔고, 실현하기까지 10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발레단을 운영한지 16년 정도 되니 크고 작은 사업별 지원금을 받고, 경영환경이 안정되며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조금씩 생겼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빅이슈 아저씨들을 대상으로 하는 홈리스 교육, 부부가 함께하는 부부 발레교실, 시민 발레교실 등 실제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일반인이나 비전공자들이 발레를 통해 얻는 기쁨이 크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변에서는 발레단을 꾸려나가기도 힘든데, 사회활동을 왜하느냐고 많이 물어보십니다. 하지만 저희는 그분들과의 프로그램을 통해 얻는 것이 더 많습니다. 제임스 전이 최근 안무한 많은 작품들도 그분들과 함께하면서 얻은 느낌이나 영감이 자연스럽게 표현된 경우도 많습니다.
저와 제임스는 앞으로도 은퇴 후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문화, 예술 힐링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운영해 나갈 계획입니다. 점점 기계화 되어가는 현실 속에서 우리 어린이들이 가족은 물론 친구와 함께 어울리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사람을 배려하고, 인내하거나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방법도 모른 채 휴대폰, 컴퓨터와 같은 기계 속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저는 발레를 하면서 친구와 교류하고 사람냄새, 땀 냄새도 맡으며 함께 어울리고 서로를 느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가 건강하고 행복해져야 예술의 가치가 더욱 빛나고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받아 온 것 이상으로 주고 싶다고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모든 사람이 받는 것만큼 주고 싶다는 생각을 갖는다면 이 세상은 정말 아름다운 세상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부정부패니 횡령이니 하는 모든 것이 줄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받으려고 하는 것, 뺏으려고 하는 것에서 온갖 비극이 생깁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누군가에게 주려고 하는 그 마음가짐 하나만으로도 서울발레시어터가 우리 사회에 있어야 할 존재가치는 충분하다고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예산이 필요할 것입니다. 디아길레프 조차도 끊임없이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파산 직전까지 가기도 했는데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해오셨나요?

일단 저와 제임스는 현재 두, 세 가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20년 전 한 가지 약속을 했습니다. ‘아이를 낳을 것인가?’ 아니면 ‘발레단을 만들 것이냐’ 라는 문제에서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아이 대신 발레단을 자녀삼아 살아가자고 약속 한 것이지요. 제임스는 7남매 중 막내, 저는 5남매 중 막내기 때문에 대를 이어야 한다는 부담은 없었습니다. 만약 제 친자식이 대학에 진학하고 직장을 구해야 했다면 아마 지금처럼 열정적으로 모든 것을 발레단에 쏟진 못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발레단을 위해 사용하는 돈이 우리 자식들에게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한 푼도 아깝지 않습니다. 사실 작년 같은 경우 적자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올 1월에서 3월 발레단 운영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런 것들이 괴롭거나 힘들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열심히 해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고자 노력하고 있고, 노력해 왔습니다.
공연은 공연대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고, 재능기부 교육프로그램도 있지만, 강사비를 받고 진행하는 교육프로그램도 있습니다. 작은 금액이지만 알뜰하게 모아서 발레단 운영하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년 전 부터는 연수단원 지원, 인턴 지원 등 민간단체를 위한 국고 지원이 조금씩 늘어가면서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틈나는 대로 개인이나 기업을 찾아다니면서 파트너십 구축을 위한 사업제안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1963년 경영난을 겪고 있던 뉴욕시티발레단이 포드자동차의 후원으로 미국 대표 창작 발레단으로 성장했던 것처럼, 우리발레단의 창작활동과 사회적 활동 등 이런 모든 가치를 인하는 파트너를 만나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또한 매 월 만원으로 저희 발레단을 후원하는 프로그램인 ‘I Love SBT' 캠페인도 작년부터 진행하고 있습니다. 스페인의 프로 축구팀인 FC바르셀로나는 구단주가 아닌 조합원들의 회비를 통해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울발레시어터도 무용계의 FC바르셀로나가 되길 바라며 노력하고 있습니다.

발레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에 걸쳐서 언제든지 생각나는 것이 메디치가(家)입니다. 메디치 가문을 처음으로 불붙게 한 것은 꼬지모인데, 그가 후손에게 “돈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없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돈이 없어지지 않게 영속할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이 예술 속에 돈을 묻는 것이다”라고 했답니다. 그것을 가업의 유산으로 삼아 가장 융성했던 로렌조 일 만이피코 때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예술에 정말 막대한 돈을 투자 했습니다. 우리나라 재벌들도 많이 하고 있지만 메디치 가문과 비교해 보면 상대적으로 인색하다는 생각입니다.
메디치가의 350년 동안의 흥망성쇠를 보면 메디치가가 사회에 좀 더 많은 돈을 쏟아 부으면서 낮아지고 겸손할 때는 융성합니다. 그런데 조금 융성해져서 오만해지면 메디치가가 기울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다시 정신을 차려 겸손해 지면 다시 올라갑니다. 그것을 몇 번이나 되풀이 합니다.
탐욕과 오만이 생기면 몰락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게 주려고 할 때 융성할 수 있다는 이런 기본적인 원리를 우리 사회가 깨달아 준다면 사회가 좀 더 밝아지고 서울발레시어터도 더불어 함께 날아오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날이 하루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이제 20주년을 맞아 하고 싶은 일이 많을 텐데 어떤 계획을 하고 계신가요?

네. 많은 공연과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데요. 먼저 6월 5일과 6일 LG 아트센터에서 〈Rage〉공연을 합니다. 작년 창작산실지원금을 받아서 만들었지만 완성하지 못했고, 1회 공연으로 끝난 것이 너무 아쉬워 공연이 끝나자마자 대관을 했습니다.
제임스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분노의 질주였습니다. 작년, 재작년 사회적으로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한 마음을 담아내고자 했던 작품입니다. 그리고 10월에는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 공연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1부에서는 그 동안 해왔던 작품들 중 하이라이트만 묶어서 진행하고, 2부에는 저희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BEING〉을 2막으로 압축해 공연을 합니다. 그리고 그 무대에서 저와 제임스는 은퇴선언을 하고자 합니다. 무대 위에서 그동안에 대한 감사인사를 드리고, 저희는 일선에서 물러날 준비를 하려고 합니다. 창단 15주년 때 후배들에게 새로운 단장, 새로운 안무가를 통한 서울발레시어터의 세대교체를 준비하겠다고 발표했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두고 가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임무들은 이제 후배들에게 물려주고자 합니다.
9월 말과 10월 초에는 스위스 바젤발레단과 서울발레시어터의 문화교류를 통해 창작된 〈SHI & SHOUT〉를 공연합니다. 국립극장과 과천시민회관에서 이틀 동안 공연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이런 큰 공연 사이사이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코펠리아>등 지방공연도 예정되어 있습니다. 시민발레단, 부부발레, 더불어 행복한 발레단, 홈리스 발레 등 교육 프로그램도 지속적으로 열심히 운영할 생각입니다.

 



지난 20년 동안에 서울발레시어터에서는 모든 안무가 지나칠 만큼 제임스 전에게만 편중되어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지금 계획하고 있는 것들을 들어보니까 그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된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 긴 세월 어려움도 많았을 것이고, 그 어려움을 극복했을 때 즐거움도 있었을 텐데 가장 고통스러웠던 일, 가장 즐거웠던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저희가 창단한지 5년 정도 됐을 때 예술의전당 음악당이 새로운 건물을 짓고 이전하게 됐습니다. 그 당시 예술의 전당 최종률 사장님이 서울발레시어터의 〈BEING〉을 보고 ‘우리나라에도 창작활동을 하는 발레단이 있구나’라고 하시면서, 음악당이 나가는 건물에 저희가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1년 동안 모든 절차를 밟고 2000년 12월 24일에 입주를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이삿짐까지 다 옮긴 상황에서 갑자기 국립발레단이 예술의전당에 입주할 것으로 결정됐고, 같은 분야 예술단체가 한 기관에 동시 상주할 수 없어 저희의 계약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임시로 얻은 공간에 2년 동안 있으면서 예술의 전당과 함께 진행하기로 한 공연은 물론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임대료로 모든 돈을 날리고 오갈 곳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6개월 동안 연습장소를 헤매다가 찾은 곳이 바로 지금 있는 과천 시민회관이었습니다. 그게 벌써 13년 전 일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 중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습니다. 지난 20년 중 당시 6개월이 단원, 직원들이 월급을 받지 못했던 시기였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 많이 속상합니다.
가장 기뻤던 순간은 2002년 〈BEING〉 공연이 끝나고 대부분의 관객들이 빠져 나갔을 때 로비에 휠체어 타신 분이 저와 제임스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저희에게 오셔서 자신이 정말 힘들어 자살 충동까지 느꼈었는데 오늘 이 작품을 보고 다시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때 마음이 너무 찡했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정말 슬픈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발레단 작품이 그런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희망을 줄 수 있었다는 게 너무 기뻤습니다. 이 때 우리가 이 일을 꾸준히 더 열심히 해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인터뷰를 "Per aspera ad astra"로 시작을 했는데, STB의 난관, 내리막길은 모두 상승의 길로 이어져왔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역사상 가장 눈부신 문화를 꽃피웠던 시대가 로마시대라고 흔히들 말하는데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영광으로만 가득찬 것도 아닙니다. 로마의 문화가 꽃피고 있었을 때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그들이 끊임없이 별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무렵에는 “별을 향해서”(ad astra) 라는 주제로 수많은 배리에이션이 생겨났죠. 그 가운데 또 하나가 “Per ardua ad astra"입니다. 험난한 가시밭길에 고난의 길로 통해서라야만 별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SBT는 지금까지 고난의 길을 걸어왔지만 앞으로의 길은 별이 되는 영광의 순간이 곧 눈앞에 닥칠 것이라고 생각해서 “Per ardua ad astra"로 이 대담을 마치겠습니다.

2015. 04.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