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표지인물 인터뷰_ 〈한량무〉공연 갖는 월륜 조흥동
남성적인 호방함, 기품이 스며든 선비춤
장광열_<춤웹진> 편집위원

 

 

 


 2000년대 중반 무용가 조흥동의 대표적인 작품들이 미국 4개 도시를 순회공연 한 적이 있다. 국제공연예술프로젝트(iPAP)가 미국 뉴욕에 있는 The Korea Society와 함께 매년 우리나라의 무용을 미국에 소개하는, 공연과 워크숍이 함께 편성된 해외 진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당시 순회공연에서 미국 관객들의 가장 많은 박수를 받은 작품이 <한량무>와 <진쇠춤>이었다. 전통춤을 추는 무용가의 경우 자신을 대표하는 춤이 있게 마련이다. 조흥동은 2007년에 처음으로 <한량무> 무보집을 발간했고, 이후 이 춤은 조흥동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장광열
선생님의 이름을 내건 무대로는 4년 만이네요. 어떻게 해서 이루어진 공연인가요?
조흥동 한성준 할아버지의 살아계신 유일한 제자인 강선영 선생님께서 저에게 <한량무>를 전수해 주셨고, 작년 5월에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 45호로 지정을 받았습니다. 문화재위원들이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았는데 공연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해서 준비를 하게 되었지요. 원래는 작년 12월에 하려 했으나 대관이 어려워 2월에 갖게 되었습니다.

이번 공연에서 선생님은 <한량무> 하나만 추시더군요. 제자들이 선생님의 다른 작품들을 춤추고, 찬조출연 하시는 예인들의 면면을 보니 놓치기 아까운 공연이 될 듯합니다.
춤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악가무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광수 선생이 비나리를, 안숙선 · 성찬숙 선생이 번갈아 판소리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채상묵 선생이 <승무>를 춥니다. <진쇠춤>과 <중부살풀이>는 제자들이, <신노심불로>는 수제자인 김정학 선생이 출연합니다. 이번 출연진들은 직계 제자들이지만 모두들 직업무용단 출신이거나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제자들입니다. 그러다보니 춤이 무겁고 깊이가 있습니다.

마지막 순서도 눈길이 가던데요. 제목이 <한량 젊은 그들>로 붙여져 있었습니다.
마지막 작품은 저에게 <한량무>를 전수받고 있는 남자 제자 13명이 함께 추도록 했습니다. <한량무>를 약간 현대적으로 변형해서 춥니다. 저는 원류 <한량무>를 추고 후배들은 창작적인 <한량무>를 추는 것이지요. 이러한 것들 또한 제가 많은 분들에게 <한량무>를 인식시켜드리기 위함입니다. 작년은 한성준 할아버님이 타계하신지 140주년 되는 해였습니다. 이 춤을 30대나 40대에 만드셨다고 해도 100년이 된 춤입니다. 그런 춤이 강선영 선생님을 통해 후학들에게 전수가 된 것이죠.

악가무가 어우러진 공연이라고 하면 생음악 연주가 곁들여진다는 의미인가요?
전체 작품의 반주를 위한 악사를 뽑아 보니 11명이나 됩니다. 구음도 들어가야 하고 <진쇠춤>은 타악기도 필요다보니 늘어났습니다.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제작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관객들로서는 재미있으실 겁니다.

 



<한량무>는 일명 ‘선비춤’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한량무>의 매력은 어디에 있나요?

남들이 평하기를 디딤새나 춤사위가 다분히 남성적이고 호탕하다고 합니다. 여성에게 <살풀이>가 정수라면, 남성이라면 <승무>도 있지만 <한량무>가 남자의 기개를 멋 내면서 출 수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좋아하게 된 춤입니다. 남성답고 정직하고 다시 말해 젠틀맨의 춤이 <한량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량무>는 처음에 어떻게 접하게 되었나요?
강선생님하고 인연을 맺은 것은 대학교 1학년 때로 당시에 각 연구소 무용수들을 모아서 3·1절 공연을 했었는데 그 때 처음 뵙게 되었고 저에게 왕을 맡으라고 주문한 것이 인연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때 강선영선생님 말씀이 할아버지 춤을 많이 전수하는 것이 할아버지께 보답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태평무>의 제1회 이수자가 되었지요.

선생님께서 추시는 <한량무>와 다른 선생님들이 추시는 <한량무>와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제가 비교를 하기는 그렇지만 부산 영남 문장원 선생님의 <한량무> 역시 남성적이고, 경상도 지역의 특성인 투박하게 툭툭 끊어지는 부분이 많은데 저 같은 경우에는 남성적이면서도 제 성격상 춤사위가 정확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단조롭다고 할 수도 있지만 저는 외향적인 춤사위보다 내향적인, 마음에 우러나오는 움직임을 더 강조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음악에 박자를 맞춰야 하지만 저는 음악을 끌고 다닌다고 해야 할까요. 그리고 디딤새만큼은 전혀 여성화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다들 발 디딤새는 일품이라고 말해 주십니다.

이제는 무형문화재 제도 자체가 유명무실하다며 이의 폐지를 주장하는 흐름도 만만치 않은 가운데 지방 문화재 지정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시각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한량무>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받기까지 어려움도 없지는 않았을 텐데요?
원형이냐 아니냐, 가치가 있냐 없냐라고 말이 많았지만 주모·각시·한량이 나오고 원형 그대로니까 가능했습니다. 또 한성준선생님의 직계 제자 강선영선생님께 이수를 받았으니 반박할 여지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번에 지정된<한량무>는 조흥동류로 지정 된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한량무> 자체가 지정된 것입니다.

 



예전에 선생님께서 미국 투어 가셨을 때 <한량무>도 굉장했지만 <진쇠춤>도 많은 호평을 받았습니다. 비평가의 입장에서 봤을 때 당시 김정학씨와 함께 꽹과리를 들고 추는 <진쇠춤>도 음악의 구성이나 소품의 활용, 발 놀림, 절제된 움직임 등 <한량무> 못지않게 전승할 가치가 높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진쇠춤>은 어떤 매력이 있는지요?

지금 <진쇠춤>은 윤미라 교수(경희대 무용과)와 저만이 추고 있습니다. 윤교수는 수원 재인청 이동안 선생님 가락이고 나는 이지산·박영호 선생님께 배운 것을 그대로 추는 것입니다. 엊그제 누가 쇠들고 추는 춤이 <진쇠춤>이라고 하던데 그런다고 <진쇠춤>은 아닙니다. <진쇠춤>은 그 가락이 다 있습니다. 음악이 절묘합니다. 터벌림하고 경기굿거리가 나오는데 굿거리는 흔하지만 경기조로 나오니까 춤사위가 전혀 다릅니다. 또 발 디딤새가 일품입니다. 남자들, 박수무당들이 많이 춥니다.

국립무용단장겸 예술감독(1994년), 지난해까지 14년 동안 경기도립무용단 예술감독을 역임하셨고,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많은 공연과 제자들을 배출하면서 한국 무용계를 대표하는 남성 무용가로 우뚝 서셨는데요. 이쯤이면 무용계의 원로로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의미가 남다를 듯합니다.
어려서부터 대한민국에서 유명하다는 선생님들의 춤은 다 섭렵을 했습니다. 현재 살아계신 분은 이매방선생님, 강선영선생님, 김철진선생님, 장홍심선생님, 그리고 김백봉선생님께는 대학시절 기본을 배웠고, 의식무용은 김준동, 박동아선생님께 배웠고, 설장고는 전사습선생님께도 배웠습니다. 김천흥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조흥동 춤은 안심하고 볼 수 있다고 하시면서 대한민국에서 춤사위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조흥동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제가 많은 사람에게 배우고, 영어 단어 외우 듯이 익혀왔기 때문입니다.
창작적인 춤은 다르지만 전통이나 민속춤으로 갔을 때는 춤사위가 다 다릅니다. 요즘에는 굿거리 4박자에 수건 들면 수건춤, 부채 들면 부채춤이라고 하는데 그건 아닙니다. 같은 4박자라도 춤사위가 다 다른데 같게 추면 안 되지요. 국립무용단, 서울예술단, 경기도립무용단은 등 여러 직업무용단에 있으면서 적지 않은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기라성 같은 무용수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고맙게 생각합니다.

이즈음 무용계를 보면 전승되는 지도급 무용가들의 춤이 가족들하고 지나치게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형문화재 지정 종목의 경우도 그렇고… 혈연에 의한 전승과정에서 파생되는, 춤의 질서를 파괴하는 부정적인 기류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작지 않습니다.
문화재도 일거수일투족을 꾸준히 섭렵한 사람이 자연히 후계자가 되는 것인데 요즘에는 인위적으로 배우고, 1, 2, 3, 4등이 있다면 1, 2등은 못 받고 3, 4등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받기도 합니다. 이러면 예술이 올바르게 전수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문화재청에서도 제도를 개선하려고 여러 노력들을 하고는 있지만 아직도 문제점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원로 남성 무용가들이 우리 무용계에 공헌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남성 무용수들을 많이 길러낸다는 것이지요. 예전의 무용계와 비교해 보면 남성 무용수들이 주도해도 된다고 할 정도로 수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우리춤은 대부분 여성화 되어있고 가르치는 선생도 90%가 여자인데 저 나름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배우고 좋은 춤사위를 정리하면서 발전해 왔습니다. 직계 제자 5명이 동아무용콩쿨에서 금상을 받았습니다. 자랑이라면 큰 자랑이지요. 돈을 받고 가르친 것은 아니지만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수업을 나가면서 될 만한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목수가 아무리 좋아도 재목이 안 좋으면 튼튼한 집을 지을 수 없듯이 재목이 좋아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국립무용단의 경우 안무하는 사람이 50%의 능력만 발휘할 수 있어도 무용수들이 좋아서 좋은 공연이 가능합니다. 생각만큼 좋은 작품이 안 나와서 탈이지요.

후학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젊은 친구들 생각이나 창작능력은 뛰어납니다. 무용수들도 너무 좋고. 제 욕심으로는 창작도 좋은데 전통춤을 알고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아쉬운 점이라면 공부를 좀 더 했으면 합니다. 한 2-3년만 열심히 하면 기본은 다져집니다. 진학하기 위해서 춤을 시작했기 때문에 기초가 안 되어 있습니다. 기초부터 다시 잡아주려면 애를 먹습니다. 그 학생들이 창작을 하면 또 잘하는데 전통 기본은 많이 부족합니다. 그 중에 열심히 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안타깝지만 그런 친구들은 체격조건이 안 좋습니다. 키 작은 친구들이 재주는 더 있는데 이 사회가 콩쿨에 나가도 키가 큰 아이들이 점수가 더 잘나오고 하니까 그런 제자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공공 직업무용단에 오래 계셨는데 혹시 국 공립무용단에서 고쳐져야 할 부분이 있다면 어떤 점이 있을까요?

개성이 없습니다. 국립무용단의 경우에는 국립무용단이 가져야할 사명감이 있고, 서울시립무용단은 서울 시민을 위한 작품이 있고, 국립국악원은 그야말로 우리나라의 정수를 잊는 춤들, 살풀이 하면 국악원에 누구, 승무하면 국악원에 누구 할 수 있게끔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습니다. 사실 국립무용단은 선배님들이 피나는 노력을 갖고 만든 단체입니다. 그랬으면 후배들이 계승 발전시키면서 자신들의 예술혼을 불어 넣으면 되는데 왜 유사한 현대무용을 그대로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다 한번 하는 것은 괜찮지만 계속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또 왜 의상 디자이너가 연출도 하고 무대디자인까지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창작도 필요하고 전통의 것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구성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매번 현대무용만을 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국립무용단이나 서울시립무용단이나 그 좋은 환경 속에서 쭉쭉 나아가 줘야 지역 무용단도 따라가는데 그렇게 안 되니까 안타깝습니다.

우리나라 무용계를 향해서도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질서도 없고, 예도도 없고, 엉망진창입니다. 우리 선생님들은 안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순서도 없고, 자기하고 같이 작업하게 되면 동창생 대하듯이 하기도 합니다. 앞에서는 잘한다고 하면서 뒤에서는 다른 얘기를 하는 풍토도 고쳐져야 합니다.

오랜 만에 악가무가 함께 있는 진솔한 우리 전통춤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2015. 02.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