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을 베이스로 활동하는 무용가 김형민이 5월 26-27일 복합문화공간 플래툰 쿤스트할레에서 내한공연을 가졌다. 2012년 <한국을 빛내는 해외무용스타 초청 공연> 이후 2년 만에 가진 고국무대다. 작품은 <GUEST>. 연극을 전공한 스위스 출생의 행위예술가 토미 조이긴(Tommi Zeuggin)이 그와 함께 춤추었다. 공연의 이모저모를 곁들여 김형민과의 생생한 인터뷰를 담았다.(편집자 주)
김형민이 안무한 <GUEST>는 베를린에서 사는 그녀가 한국인으로서의 삶을 바라보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무대디자인 Anja Steglich, 사운드 Alessio Castallici, 조명디자인은 Benjamin Schälike가 참여했다. 공연이 끝난 후, 관객과의 대화 시간이 50분간에 걸쳐 있었다. 현대무용 작품을 처음 접한 김시은(공대생)씨는 "말이라는 것이 제한적 수단이다보니, 공연에서 말없이 소리와 움직임을 통해 새로운 느낌을 받을 수 있어서 신선했다"는 소감을, 최민선(국립현대무용단 무용수)씨는 "공연의 첫 장면부터 처절한 움직임을 보게되어 집중을 가지고 볼 수 있었다"며 "무대에 있는 세트를 변화없이 1시간 동안 한 호흡으로 그려낸 작업이 쉽지 않은데 재밌게 봤다"고 소감을 밝혔다 춤비평가 이만주는 “두 남녀 퍼포머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 다시 한 번 더 쫓겨난, 신으로부터 버려진 아담과 이브였다. 걷고 또 걷는다. 달리고 또 달린다. 지치고 넘어지고 처절하다. 탈북자들의 생존을 위한 걸음에서 모티브를 얻었다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아프리카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수많은 난민이 생존을 위해 탈출하여 끊임없이 걷고 있다. 돌이켜 생각하면, 질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중의 많은 무리들도 반복되는 단순노동에 혹사당하고, 좀 낫다는 사람들도 늘 반복되는 삶을 살고 맴돈다. 두 퍼포머의 처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었고 소외와 절대고독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공동 안무자이자 출연자인 김형민과 토미 조이긴은 보는 이들에게 많은 메시지를 던지는데 성공했다”고 촌평했다.
손혜정 2년 사이에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인가? 2012년 <한국을 빛내는 해외무용스타 초청공연>에 선보였던 <Blue Earth>와 2014년 <GUEST>를 비교하면 의상, 조명, 사운드 등 확연히 다르다. 김형민 2012년에 선보인 <Blue Earth>의 모토는 언제나 내 자신과 존재, 삶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때 당시 '무대는 어떤 것인가'라는 타이틀로 안무가로서 공연자로서 어떤 공연을 했었는지. 그리고 무대를 어떻게 대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고 싶었다. Blue Earth라는 가상공간에서 '이상의 존재'를 찾으려했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무용수의 첫 등장은 객석이다. 무대는 의식을 진행하는 곳이기에 무대를 진입하는 과정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러 과정과 경계를 뛰어넘고 무대로 진입하는 내 자신에 대한 독백이었다. 반면 <GUEST>는 베를린에서 사는 김형민이 한국인으로서의 삶을 바라보는데 있다. 독일 신문에 북한 탈북자들이 목숨을 건 탈출에 대한 기사를 접했다. 독일 사람들이 “(내게) 왜 그런 일이 생겨났느냐”라는 질문과 함께 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 계기가 생겼다. 감상적이지 않은 객관적인 보도시각을 갖춘 독일신문을 통해 내 자신도 (한국과) 거리를 두어서 이주민으로 살면서 제3국에 사는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구체적인 작업은 어떻게 실현되었나? 피아니스트 지인을 통해 연극을 전공한 스위스 출생의 행위예술가 토미 조이긴을 만나게 되면서 <GUEST>에 대한 작품 구상이 구체화되었다. 스위스 사람으로서 독일에서 이주민으로 살아가는 그를 통해 스위스 이민정책에 대해 알 수 있었다. 특히 '인간으로 어떻게 살아야하나' 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북한의 탈북자와 아프리카의 이주민 등 그들의 스토리를 통해 '나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관객들이 대답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작품 속에 담고자 했던 것은 어떤 것이었나? 현실에 살아가는 인간과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갈망에 대한 것이다. 우리 삶을 생각해보면 ‘땅, 하늘, 물, 사람’이다. 여러 가지 창조물이 있겠지만 그 네 가지 안에서 간단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요즘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혼재되고 있다. 인간의 욕망에 대해 생각해보면 이 4개를 제외하면 다른 것들은 필요없는 것이다. 작품의 영감을 얻었던 다큐멘터리에서 끊임없이 걸어가는 모습이 크게 다가왔다. 우리가 가진 모든 감각을 세워서 살아가기 위해 걸어간다는 것이다.
<GUEST>를 보며 우리 삶 안에 내재된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살면서 도전을 하고 의도치 않게 실패하기도 한다. 북한 탈북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그들의 모습 안에 우리의 모습, 나의 모습도 보였다. 굳이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지 않아도 어느 소재와 이슈를 작품 안에서 28일 관객들과의 대화를 통해 안무가가 말한 ‘인간의 본질’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바로 그것이다. 직접 안무를 짜고 무대 위에 있는 모델이지만 누구나의 모습이다.
<GUEST>가 초연된 것은 언제였나? 2010년이다. 이후 2011~2012년 2년간 <GUEST>, <GHOST>, <DUST> 등 3부작으로 그와 구상했다. <GUEST>가 사람들이 갈망하는 세계에 탐구하는 인간상을 표현했다면, <GHOST>는 그곳에 도착한 삶에 대해 그렸다. 세 번째 작품인 <DUST>는 앞서 작품보다 추상적인 시선으로 사람들이 도착한 지점 대한 의미를 질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난해 토미 조이긴과 <Everything Else>를 통해 '순간' 에 집중하는 세계에 대해 구상해보았다. 이 작품은 오는 10월 SIDance 에서 선보일 예정이다. 2015년에는 <노란 풍경>(Gelbe Landschaft)이라는 작품을 준비 중이다.
사실 국내 관객들에게 김형민은 안무가보다는 뛰어난 무용수로서 더욱 각인되어 있다. 매년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그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가? 한국에서 작업하게 되면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안무 작업을 했을텐데, 독일에서는 오로지 공연에 대한 간절함으로 무용수 작업 외에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다. 지난 4년 동안 베를린시에서 지원받고 있던 것도 한 몫하리라 본다. 지금은 무용수로 일하는 것을 내려놓고 지난해 8월부터 작품에 집중하고자 안무가로 활동하려고 한다. 작품만 고민했을 때 관객과 보다 진실된 얘기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공연 후 관객들과의 대화 시간도 유익했다. 독일에서는 관객과의 대화가 빈번한 편인가? 독일에서는 공연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관객들과의 대화로 이어져 공연의 끝을 마무리한다. 일반 관객과의 대화 자리를 임의로 만들지 않더라도 가능한데 비해 한국은 그러하지 못한 편이다. 독일 관객 한 분이 편지를 직접 가져다주거나 이메일을 통해 물어보고 공연에 대한 소감을 보내준 적도 있었다. 이처럼 관객들과 소통하는 시간은 아티스트에게는 다시 공연을 뒤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에 비해 무용전공자들의 피드백은 어느 정도 한정적인 면이 있다.
안무가로 활동하려면 적지 않은 제작비가 필요할 것이다. 독일에서는 매해 지원금을 신청하도록 되어 있는가? 이번 내한공연에서도 독일 정부의 지원이 있었는가? 이번 공연의 경우 독일에서 항공비만 지원받았다. 일반적으로 베를린시에서 주는 지원금과 독일 전체에서 주는 지원금이 있다. 현재 드레스덴시와 작센주에 신청한 지원금에 대한 피드백을 기다리고 있다. 외국에서 작업을 할 경우 작업 지원비가 없으면 너무나 힘들다. 개인으로 활동하기에 어떤 지원금이 있고 공모기간의 마감일이 언제인지 꼼꼼히 살피고 있다. 독일에서는 프로덕션 매니저가 도와주고 있고, 한국에서는 스스로 하는 편이다. 지원금을 받는 절차가 진행되면 나는 온전히 작품을 만들고, 공연에 대한 PR과 행정 등은 매니저가 도맡고 있다.
컴퍼니 이름을 지어놓지 않고 본인 이름으로 작업 중인가? 프리랜서로 작업하고 있기 때문에 컴퍼니 이름을 정하지 않았다. 컴퍼니 이름을 만드는 것이 작품을 홍보하거나 안무 작업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겠으나, 내가 무용단을 꾸리고 사람들을 고용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간혹 한국 공연관계자들이 "컴퍼니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경우가 있었는데 같이 작업한 아티스트들의 이름을 모두 얘기한다.
<GUEST>에서는 남녀 듀오 안무를 선보였다. 기존 작품에서는 독무를 주로 선보였는데 어떤 스타일인가? 2007년에는 트리오 작품이었고, 2008년에는 독무, 2009년에는 듀오 안무를, 2011년 솔로 안무를, 이번 작품에서는 듀오 안무를 기획했다. 이제껏 한 사람의 기본적인 배경을 통해 작품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른 고민으로 안무를 구성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군무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은 간절하다.
이제껏 조명을 중시한 작품을 만들어왔다. 조명디자이너인 남편(Benjamin Schälike)의 영향도 있었겠지만,<GUEST>에서는 음악에 집중하여 작품을 구상하지 않았나 싶다. 공연이 시작된 30분 후에 희망적인 메시지의 가사 노랫말이 나오는 음악에서 움직임은 굉장히 처절하게 느껴졌다. 클라이맥스로 꼽아도 되겠는가? 조명에 대한 움직임(Physical light)에 관심이 있고 조명작업에 흥미가 많다는 점은동의한다. 이번 작품에서는 드라마투르크가 없이 작업했기에 어떤 재료를 가지고 안무를 리드해야할 지 고민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내 자신과 우리의 모습을 담았고 60분 안무 중 클라이맥스 부분은 없다. 아마 공연에서 음악이 중요하게 느껴졌을 거라는 이유를 짐작해본다면, 기존 공연에서는 라이브로 연주하는데 비해 이번 작품은 음악을 CD로 틀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은 순수하고 진실되기에 관객을 속일 수 없다
안무가는 몸으로 철학하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여러 분야의 공부와 깊은 탐구를 필요로 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안무가가 앞장서서 사회적 이슈를 살펴봐야 하는데 역으로 사회적 이슈를 읽어내기에 급급한 작품들도 있지 않은가? 전세계적으로 이슈가 되어야할 부분을 꼽자면, 예술가로서 공연자로서 '어떤 질문을 할 수 있냐'는 것이다. 예술가로 살아가면서 자신만의 주관이 필요한데 쉽지 않다.
최근 한국에서는 세월호 참사뿐만 아니라 재난사건도 많이 일어나고 있다. 지금 시대에서 예술인들은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할까. 이 시대에서는 예술이 하나의 무기라고 생각한다. 예술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정치,사회 등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존엄성을 가지고 태어났음에도 그 존엄성을 인식하지 못했기에 일련의 사고와 재난들이 생겨났다. 안타까운 일이다.
안무가와 무용수를 병행하며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중학교 2학년 때 무용을 시작했다. 서울예고를 졸업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3기)에서 실기과 현대무용을 전공한 후 LDP에서 잠시 몸담은 후 한국을 떠났다. 고등학교 때부터 작품 작업을 시작하면서 언제나 안무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지배적이었다. 대학교에서 실기과로 진학했는데 그 이유는 무용가로 활동하면서 최대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학습을 받고 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한예종은 무용가로 최대한 훈련받을 수 있는 커리큘럼이 다양하게 갖춰져 있어 다채로운 춤에 대해 배울 수 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시도할 수 있었던 창작수업과 많은 선후배들이 있다 보니 서로 격의없이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는 환경으로 지금의 작품을 할 수 있었던 동력이었다.
해외 무대로의 진출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한예종 졸업 후, 모다페(MODAFE)를 통해 네덜란드 EDDC(European Dance Development Center)를 알게 되었고 오디션을 통과하여 본격적으로 안무가 수업을 받게 되었다. 석사에 진학하는 것보단 해외에서 활동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춤 교육체재 안에 있다는 것에 너무나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EDDC에서 안무를 공부하며 학교 수업에 매우 만족하였고, 아티스트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학교라는 시스템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고 무대에서 프로페셔널하게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소망이 배가되어 베를린에서 오디션을 보았다.
현대무용계에서는 네덜란드나 벨기에 안무가들의 작품들이 대두되고 있는데, 베를린에서 활동하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처음 오디션을 본 곳은 벨기에였다. 댄서에 따라 상황이 다르겠지만, 당시 벨기에 지역의 무용단에 빠르게 합류해야만 했는데 비자문제 때문에 불가능했다. 그 후 베를린에서 오디션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역시 비자문제로 베를린에서 활동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앞섰다. 다행히 비자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었고 2005년에 베를린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처음 베를린에서 작업할 때는 아티스트들이 많지 않았는데, 2005~2007년 2년간 많은 아티스트들이 베를린으로 모여들고 있어서 공연들이 많아짐에 따라, 다른 컴퍼니에서 활동하지만 솔로 작품을 안무할 수 있는 소규모 프레젠테이션 형태의 공연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도키팍 콘스탄자 마크라스 컴퍼니(Constanza Macras/Dorky Park company)에서 7년간 몸담았다. 지금도 함께 작업하고 있나? 이 컴퍼니는 고정 멤버없이 무용수들이 프로젝트에 따라 함께하기에 프리랜서 무용수로 함께 작업했다. 콘스탄자는 개인 안무 작업활동을 인정하고 지지해주었기에 안무할 기회도 주었다.
컴퍼니에 소속된 댄서 개인에게 새로운 작품을 안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 경우도 있지 않나? 안무가에 따라 다른 것 같다. 그래서인지 자신이 원하는 안무가를 만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무용수와 안무가는 이해관계가 생길 수 밖에 없다. 댄서들의 급여에 대해서도 유럽에서는 화두가 되고 있다. 그로인해 베를린에서는 아티스트들의 군중시위도 있었다. 벨기에의 경우 아티스트들에게 지원금을 주는 이상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베를린은 다른 유럽지역보다 집값이나 물가가 싸지만, 아티스트들에 대한 지원정책은 미비한 상태이다.
한국에서 예술인복지재단이 생기면서 예술인들에 대한 지원금과 예술인노동법에 대한 정책이 화두가 되고 있다. 정말 중요한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이 안무가와 무용수의 관계가 더 개선하기 위해서는 시스템이 있어야하는데 무용수라는 입장은 유럽에서도 한국과 비슷한 상황이다. '왜 무용수들은 적당한 급여를 요구할 수 없는가'라는 질문이 늘 있는데, 그들에 대한 적정 수준의 계약은 있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무용수로서의 삶과 안무가로서의 삶을 선택하는 것은 무용 댄서들의 공통적인 고민일거라 생각한다. 무용수는 안무가의 이상을 표현하고 구상하는 도구이자 퍼포머다. 그래서 무용수들은 프로페셔널 해야 한다. 무용수가 안무가적인 성향이 있으면 본인과 안무가 서로에게 힘들다. 안무가의 세계를 동경하다면 모르지만, 환경 때문에 안무가의 길을 걷는다면 안무가의 테크닉을 변형해서 작업을 하게되지 않을까? 모방을 통해 창조가 있겠지만 안무가, 무용수, 예술감독은 주어진 환경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아닌 것 같다. 그 직업은 스스로 동기를 찾아야만 하고, 예술은 순수하며 진실되기에 관객을 속일 수 없다.
이번 작품에서 두 무용수들이 가장 많이 반복하는 행위는 뛰는 것과 걷는 것이다. 전문 공연장이 아닌 곳에서의 작업이란 점에서 힘든 점도 있었을텐데… 사실 60분간 작품에 집중하여 춤을 추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그러나 다른 극장에서 한 것보다 더 큰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 공연 장소였고, 일반 관객들과 나눌 수 있는 것이 많았다.
앞으로도 공연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작업할 계획인가? 여러 가지를 시도해보고 싶은데 공공장소에서 작업해보고 싶다. 신기하게 9년간 독일에서 살았지만, 안무 주제가 떠오를 때 한국의 무대가 떠오른다. 그 주제를 한국의 관객과 공유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낀다. 재작년에 국립중앙극장에서 워크숍을 하면서 서울역을 오고갔던 적이 있었다. 그 때문인지 독일에서 매번 서울역이 떠올랐다.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 앞에서 공연을 해보고 싶다.
무용을 처음 접하는 관객이 쉽게 이 장르에 접근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있는가? 안무가와 대화하는 시간이 많이 갖는게 우선이다. 관객에게 무용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는 것을 떠나 아티스트 자신에게도 굉장히 도움이 되는 시간이다. 무용과 공연은 쇼가 아니다. 작업하는 이들끼리 ‘when is show?'라고 질문하지만, 관객에게 어떤 쇼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공유할 수 있는 차원까지 갈 수 있어야만 한다. 가끔은 몸으로 느끼는 것이 충만할 수 있겠지만 교감이 안 된 상태에서는 관객과의 대화시간은 필요하다. 이번 한국 공연을 앞두고 독일의 많은 관객들과 새벽까지 끊임없이 대화했다. 안무가의 작업세계를 나누는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자극이 된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을 떠나 내가 생각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것을 찾는 것이 크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가장 부러운 것이 안무가, 무용수와 관객이 자유롭게 얘기를 나누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처음 무용을 접하는 이들의 일상에 무용이 그들의 삶 옆에 서있게 된다. 좋아하는 배우와 감독을 보러 영화관에 가듯이 어느 안무가의 작품을 보러 공연장에 가게 되는 것처럼… (웃음)
끝으로 유럽에서 활동하는 무용가로서 후배들에게 조언을 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 우선 외국어에 대해 끊임없이 공부해야한다. 몸으로 얘기를 할 수 있겠지만 나의 아이디어와 생각을 나누고 말을 할 수 있어야지 또 다른 공감을 할 수 있다. 아티스트들이 작품세계를 공유할 때 언어는 중요하다. 한국 사람들은 주입식교육을 통해 자기생각을 얘기하는 것이 익숙치 않다. 이제는 주입식 교육 시스템에서 벗어나야한다. 계속 질문하고 누군가에게 물어보는 것이 어렵다면 스스로에게 질문하라. 무언가를 입히는 자세가 아닌 탐구하는 자세를 통해 소극적인 아티스트가 아니라 주체적인 아티스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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