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채현: 한국 영화비평계가 매우 심각하여 고사(枯死) 직전이라고 근자에 들은 바 있다. 영화계가 다른 문화계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커지고 활발해 보이던 터에, 저로서는 뜻밖의 소식이라 사실 충격적이었다. 아마 다른 비평가라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싶은 소식임이 분명하다. 국내에서 전반적으로 비평이 위축된다는 인상을 받고 있는데, 영화비평의 고사 현상은 영화계만의 일이 아니다. 그래서 오늘 이 ‘고사’ 현상 또는 진단에 초점을 맞춰서 한국 영화비평계의 현실이 어떻게 흐르는지 말씀을 들었으면 한다. 비평의 활성화를 염두에 두고, 영화평론가로서 오래 활동하시고 우리 예술계 전체를 통털어 소수의 원로 현역에 속하는 선생님의 말씀을 빌어 그런 충격을 재확인하려고 한다. 비평에 종사하는 많은 분들이 성찰할 바가 있기를 기대하면서, 우선 영화비평의 현실을 압축해서 소개하는 데서 인터뷰를 열었으면 한다.
□ 신문 · 주간지 영화비평의 고사 현상
김종원: 지금 영화 시장이 넓어진 데 반해서 영화비평의 입지는 굉장히 약화되고 있고, 이게 심각한 수준이다. 일단은 아날로그 시대에 신문 비평이 가졌던 기능이 완전히 포털 사이트로 이동하는 추세이다. 말하자면 비평이 속도전에서는 밀리고 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데, 예컨대 광고시장의 대다수를 점유하는 포털 사이트로 인한 문제가 심각하다. 포털 ‘네이버’는 국내 영화 홍보비의 약 50%를 차지한다.
김채현: 영화광고 시장의 50%를 차지한다는 것인가?
김종원: 그렇다. 그리고 ‘다음’이 18%이다. 그 다음에 ‘네이트’가 13% 정도. 그러면 나머지는 어떻겠는가?. 그런 것을 나타내는 한 가지 상징적인 예를 며칠 전 어느 신문을 보다가 발견했다. 정말 진기하다는 말이 어울릴 수밖에 없는 듯이 블록버스터에 해당하는 외국영화 광고 하나가 신문에 실렸다. 나는 그것을 굉장히 신비롭게 봤다.
김채현: 그러니까 일간지 신문에 실렸다는 것인가?
김종원: 그렇다. 영화의 신문 광고는 1980, 90년대에는 일반적인 현상이었지 않은가?
김채현: 그렇다. 당시 신문에 영화 광고가 얼마나 많았었던가? 해방 이후 근 반세기 그래 왔었다. 지금 젊은 세대는 아마 구경도 하지 못했을 거고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김종원: 당시 신문 광고 점유율이 큰 것으로는 제약 광고과 영화 광고 아니었던가. 그런데 2000년대 이후 그것이 빠르게 감소해왔다. 그런데, 2000년대 이전에 신문이 증면됐다. 기획면이 늘고. 또 16면 발행 체제에서 36면 그 이상 40면 체제로 바뀌었다. 그러니까 비평가들은 비평란이 확대되겠다고 기대했는데, 이제는 그 기대감도 깡그리 무너졌다. 기사들도 이른바 가십성 기사들이 점유한 상태다. 이처럼 이른바 디지털 시대에 오면서 속도전에 밀리는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일단 네티즌에 의해 형성되는 여론의 속도에서 밀린다면 속수무책이 되는 거다. 그러니까 이 경우 신문의 역할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겠다.
김채현: 그러니까 신문의 기능이 약화된 것인가?
김종원: 그렇다. 그러니까 신문 중심의 비평은 자연히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시장의 기능에 맡겨지다 보니 흥행이 되지 않는 영화는 1주일도 안가서 극장에서 사라진다. 그러면 이것을 대체할 수단은 기껏해야 주간지인데, 주간지도 이제 속도전에서 완전히 컴퓨터에 밀린다. 이런 사정 때문에 저널리즘 비평, 즉 리뷰는 사라졌다는 말이다. 이는 방계 예술장르인 연극, 무용과는 다른 현상이다. 이런 점에서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오늘날 일상적으로 접하는 주요 일간지에서 영화 리뷰는 한 군데도 없다.
김채현: 방계 예술 장르에서도 사정은 엇비슷해 보인다. 아무튼 영화계에서 이런 현상은 언제부터 비롯되었는가?
김종원: 제가 기억하기로는 한 5년 된다. 문화일보에서 마지막으로 영화 리뷰가 퇴조하면서 일간 신문지상에서 비평은 사실상 찾아볼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지금 일간지에 영화 리뷰들은 없고, 일반 기자들이 쓴 것마저 없다. 기자들이 쓴 거라면 예컨대 영화 <닥터>에서 김창완 가수가 주연으로 등장한 때문인지 그 영화를 화제성 기사로 크게 다룬 사례처럼 화제 중심으로 다루는 경우는 있다. 특별한 이슈가 없는 한 영화에 대한 신문 비평은 사라지고 없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 영화비평에 위기가 왔다.
김채현: 그럼 일단 신문 언론은 그렇다고 하고, 주간지가 유사한 영향을 받고 있는 원인을 조금 더 듣고 싶다.
김종원: 지금 주간지로 유일하게 생존하고 있는 것이 ‘씨네 21’이다. 1995년에 창간되었다. 이 당시 예를 들면 ‘프리미어’ ‘키노’, 그리고 84년에 창간된 ‘스크린’, 그리고 그로부터 3년 후에 등장한 ‘로드쇼’ 등의 잡지들이 있었다. 그래서 1990년대 말에는 한국에 5대 영화잡지가 경쟁하였다. 상당한 황금기였다. 이런 시대에 <쉬리> 같은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히트하게 되었다. 이것이 단지 우연이었을까? 나는 그렇게 안 본다. 당시 영화 잡지들이 독자들 시선을 모으면서 거기서 파급된 영향의 파고가 제작자에게도 미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1999년도 <쉬리>를 기점으로 해서 오늘날 천만 관객 시대가 도래하는 성과를 낳았을 것이다. 그 시대에는 스크린쿼터 제도 등 굉장히 쟁점이 많았다. 스크린쿼터만이 우리의 최후의 보루로 여겨졌고, UIP 직배 영화가 들어오면서 한국영화가 완전히 소멸할 것이라고들 여겼다. 대다수의 목소리 속에 소수의 목소리는 완전히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그런 현상 속에서 오히려 경쟁력 있는 국산 영화들이 등장했다. 임권택 감독이 만든 <서편제> 같은 영화, 그게 엄청난 관객을 동원했다. 어떤 평론가는 그랬다, 이 영화를 15만 이상 보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고. 그러나, 결과는 장을 두 번 지져도 남을 정도가 됐다.
김채현: 100만 명 정도로 기억한다.
김종원: 100만 가까이 되었다. 그후 기하급수적으로 경쟁력이 제고된 영화를 보면, 대개의 영화가 정부 정책에 의존했던 상황에 그래도 자립기반을 살리려는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한다. 그러니까 정책이 한국영화를 살린다는 것은 일종의 구실이었다. 오늘날 스크린쿼터도 무의미해졌고, 이제는 멀티플렉스의 시대로 오지 않았는가. 할리우드 영화는 우리 영화에 밀리고 있다. 한국영화 점유율은 지금 64%이다. 30%대를 넘어선 지 얼마 안됐는데 벌써 60%대가 되었다는 것은 굉장한 반전이다.
김채현: 60%대까지 올라선 데에는 영화 잡지들의 기여도가 매우 컸다는 지적으로 해석된다.
김종원: 컸다. 여기서 비평도 한 몫 하였다. 우리 스스로 문제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타개하려는 노력이 비평가든 영화제작자든 더 나아가서 기획자에게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매체가 완전히 혁명을 겪는 시대로, 즉 문자에서 전파로 바뀌었다. 그러니까 결국 속도전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지금 영화 주간지는 ‘씨네 21’ 하나밖에 안 남았는데 그나마도 문제가 없지 않다. 대제작자, CJ라든지 CGV, 롯데시네마 이런 데서 주도하므로 주간지가 그 위력에 밀리는 모양새이다. 그런데 그 대제작자의 자본이 이제는 어디로 가냐 하면 광고의 경우 이제는 포털 사이트로 간다. 오늘 시사회 했다 하면 저녁에 포털 사이트에 뜬다. 그게 여론이 돼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점은 주간지 같은 데에서 기사를 쓰고 있는 단계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형성된 여론이 주간지보다 빠르다. 5일, 정상적으로는 1주일 후에 잡지가 나오는데 거기서 여론이 형성되기는 거의 불가능한 듯하다. 그나마 그 기사마저도 영화 홍보를 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즉 한 마디로 말하자면 광고를 정보처럼 둔갑시킨다는 것이다. 왜 그러냐면 제작 자본의 영향권 내에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씨네 21’에서 기획기사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기획기사라는 것이 어떤 대의명제를 가지고 한국영화의 진로라든지 정책, 이런 것을 진단하는 것이고, 그 진단 속에 비평가들의 식견이 녹아 들어가는데, 이것이 무시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왜냐하면 표지부터가 광고이기 일쑤고, 그에 수반된 기사도 홍보 수단으로 걸러내어진 것이 되어 버린다. 여기서 담당 기자들의 고뇌도 따를 것이다. 그래서 ‘씨네 21’과 같은 잡지에서 스타 평론가를 양성하는 자립 기반이 차츰 약화되고 있지 않은가 싶다. 이게 문제다.
김채현: 잡지가 속도에서 밀리는 게 현실이라고 한다면, 지금 인터넷 시대이니까 잡지사에서 인터넷 사이트를 병행해서 영화 사이트를 운영할 수는 없는가?
김종원: 지금 같이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한계 있다. 왜냐하면 광고와 다 연결되니까. 사이트에는 잡지에 누락된 기사도 더러 있을 테지만 그 자체도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 예를 들면 광고주의 영화를 자유롭게 평가할 수 있을까?
김채현: 그러니까 주간지 역시 독립성 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씀으로 해석된다.
김종원: 그렇다, 그게 갈등일 것이다. 여기서 빠져나갈 길이라면 기자가 아니라 평론가에게 그 평가를 맡기는 일일 텐데, 그렇더라도 광고주의 압력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잡지는 지속적으로 나와야 하는데, 광고주는 큰 고객 아닌가?
김채현: 그러니까 광고주의 입김이 작용할 개연성이 크다면, 이를 타개할 방법은 무엇인가?
김종원: 문제점을 마저 제기해보자. 한국영화비평의 또 다른 문제점은 첫째는 현장비평이 소멸되고 있다는 것, 두 번째는 모든 비평이 논문화하고 있다는 점, 그래서 비평에 각주가 나온다는 것, 세 번째는 쟁점은 있어도 논쟁은 없다는 점이다. 하나하나 짚어보았자. 먼저, 현장비평이 없다는 것은 앞서 소개한 대로이다. 이런 속도전에 밀리는데 원고료를 지불하면서까지 지면을 할애할 신문이 있을 턱이 없다.
김채현: 주간지는 어떠한가?
김종원: 역시 마찬가지다. 예컨대 ‘씨네 21’은 창간 당시에만 하더라도 ‘한국 영화계를 움직이는 파워 엘리트들은 몇인가’라는 식의 기사라든가 특정작품에 대한 보다 심층 보도와 비평기사가 가능했다. 그런데 지금은 두 눈 씻고 봐도 없다. 또 하나 비평이 논문화하고 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보자. 평론은 리뷰가 아니라면 원고지로 약 20매 정도인데, 장문의 글을 쓴다 하면 그 필자들이 대개는 평론가를 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일단 학교에 내는 논문의 실적을 감안해서 비평도 논문처럼 각주를 달아 쓴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학계에서 나오는 학회지와 영화평론가협회에서 연감으로 발행하는 평론지 사이에 변별력이 없어져 버렸다.
김채현: 학회지와 영화비평 전문지 사이에 차별성이 없어졌다는 것인가?
김종원: 그렇다. 각주가 달린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김채현: 각주가 달린 것을 어떻게 평론 또는 비평이라 할 수 있겠는지 하는 뜻의 힐문(詰問)으로 들린다.
김종원: 논문이지 평론으로 보기 힘들다. 각주를 달기보다 비평 속에다 인용으로 녹여야 한다. 자기 것으로 육화된 것이 아니라 남의 생각을 날로 나열하는 것이 문제이다. 일부의 글을 보면 학회지에 발표해야 할 것들이 평론지에 실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평론지에서 이 글을 실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분량을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고료를 조금밖에 지급하지 못하는 여건 속에서 굳이 같은 노력을 들여 평론지에 쓰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김채현: 말하자면 평론지 기피 현상으로 해석된다. 그래도 평론지에 쓰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김종원: 학진에서 학회지의 논문은 100%로 인정하지만 평론지에 나오는 것은 50% 밖에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도 50%라도 인정받기 위해 쓰다 보니까 각주 비평이 나올 수밖에 없다. 세 번째는 쟁점은 있어도 논쟁이 없다는 점인데, 사람의 관계가 긴밀해지다 보니까 서로 논쟁을 피해간다. 그리고 논쟁을 만들어줄 존립 기반도 없어져 버린 거다. 1930년대만 하더라도 ‘카프’ 쪽에 참여했던 서광재, 임기정, 김유영 같은 사람들이 나운규의 <아리랑> 후편을 놓고 쟁점화시킨 적이 있다. 굉장한 논쟁이 있었다. 좌우익으로 갈린 논쟁이었다. 예를 들면 우파 쪽에는 안종화 감독과 이필우 같은 촬영기사가 참여하여 나운규의 <아리랑>을 옹호했고, 그밖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모두 다 카프 진영 사람들이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논쟁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1950년 6·25전쟁 이후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이 1955년도에 제작, 개봉되면서 반공영화냐 아니냐 여부를 둘러싼 논쟁이 신문지상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거기에 참가했던 필자들이 육군본부정훈감실에 있던 김문과 평론가 이청기, 그리고 시나리오 작가 오영진, 이런 분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현상을 찾아볼 수 없다.
김채현: 그럼, 그 타개책을 어떻게 모색할 수 있는가?
□분석비평을 살릴 기회
김종원: 지금까지 인상비평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던 영화비평의 내용, 그리고 집필 분량, 이런 양적인 면과 질적인 면을 오히려 보완할 좋은 기회를 맞이했다고 본다. 예를 들면 영화평론지 같은 것은 연감이지만 분석적 비평이 가능해졌다. 속도전에 신경 쓸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비평대상이 넓어진 만큼 영화 역사에 남을 수 있는 평가가 진행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단순한 리뷰가 아니라. 200자 원고지 6, 70매 정도의 분석적 비평으로 타개해 나갈 길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현장비평 시대, 저널리즘 비평이 왕성했던 시대에도 리뷰는 비평가 몇 사람에 의해 좌우되었다. 많아야 4, 5명이었고 중복되었다. 지금은 평론가협회에 등록된 회원만 해도 80명에 가깝다. 그분들이 모두 평론가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고, 또 거기에 입회하지 않은 평론가도 20여명으로, 국내 영화평론가는 100명 선에 이른다. 일종의 타개책이기도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분석비평이 가능한 시대가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김채현: 전화위복(轉禍爲福)일 수 있겠다. 그러면 분석비평 지면을 열어갈 주체는 누구인가?
김종원: 만만치 않다. 현재로선 하나의 타개책으로 영화평론가협회에서 발간하는 350페이지 정도의 비평지를 계간화하는 방법을 제시할 수 있다.
김채현: 지금은 1년에 몇 번 내는가?
김종원: 한번이고, 이따금씩 두 번 나온 정도였는데, 올해부턴 두 번씩 낼 계획이라 한다. 제 생각으로는 계간화해야 한다. 그리하여 영화의 품질을 환기시키는 작업이 절실하다. 영화 제작사들도 길게 내다보고 작품을 만드는 안목이 필요하다. 영화를 만들어내는 감독의 역할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분석비평이 활성화된다면 역사에 남을 영화를 한 편 정도는 남겨야 하지 않겠냐는 의식이 싹틀 것으로 본다. 흥행영화도 있어야 하지만 장기적 안목으로 칸영화제 같은 국제영화제에서 작품성을 인정받는 영화 한 편을 남기고 싶다는 인식이 싹트도록 견인차 역할을 비평가들이 할 시점이 아닌가 한다.
김채현: 작가론을 통해 수준 높은 영화 제작을 자극하자는 지적에 공감한다.
김종원: 내가 만든 영화가 평론가들에 의해 리뷰가 아닌 분석비평을 통해 평가받았다는 경각심과 계기를 환기하는 기회가 조성될 것 같다. 그러다 보면 평론가들끼리 질의 경쟁을 할 것이고, 현장비평에서 찾아볼 수 없던 질의 두께가 살아나면서 이 자리에서 우려한 각주비평이 사라지지 않을까 한다. 원론이 아니고 작품 분석이므로 여기에 굳이 제3자의 의견이 각주로 개입될 필요는 없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영화미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 그리고 작가와 작품 연구이다. 본격적인 작가론이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 작가론이 언급될 수 있는 작품을 감독이라면 한 편 남겨야 되겠다는, 이런 것이 매우 중요한 이슈로서 제기될 것이다. 장래를 내다보는 똑똑한 평론가라면 스스로 깨우치는 점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어느 감독이 일생에 걸쳐 113편을 만들었는데 사후(死後) 과연 몇 편이나 남았느냐, 언급되는 영화가 몇 편이냐, 이게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런 분들도 살아있었을 때 왜 그런 생각을 안 했겠는가? 그런데 1989년 지방대학에서 미술을 강의하고 있던 배용균의 경우,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그 한 편을 갖고 뜨지 않았는가? 어쨌든 영화사에 남는 작품을 만든 사람이 드문 상황에서 그가 나왔다. 그의 경우 작가주의의 승리라고 할수 있다. 혼자 시나리오 쓰고 연출하고 미술을 담당하고 편집하고 촬영하였다. 이러한 승부욕을 자극시키는 역할을 비평가가 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지난 일을 되돌아 볼 수밖에 없는데 한국일보가 기여한 것이 1980년대에 문화비평을 신설한 일이다. 연극, 춤, 음악 등 공연예술 전반, 거기다 영화, 미술, 문학까지 포함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필진들을 강화하고 몇 개월 동안 맡기면서 필자들을 바꿔가며 발탁한 바 있다. 이런 시대에는 저널리즘비평이 상당히 풍성하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 그 현상들을 다른 대형 신문들도 따라줬더라면 문화계에 좋았을 텐데, 이게 단기적으로 끝나 버려 아쉽다.
김채현: 그때 한국일보가 전문가들에게 일임한 리뷰가 장르마다 좀 달랐지만 한 2년 정도 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김종원: 그때 영화가 제일 오래 갔다. 영화만 2년 동안 갔었던 이유는 당시 영화가 떠오르는 매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광고시장이 활발했으니까. 아무튼 한국일보가 시작한 문화비평란의 취지는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런 시대는 이제 사라졌다.
김채현: 그 조금 후에 창간된 문화일보가 그런 역할을 하리라 기대를 모았다.
김종원: 문화일보는 전혀 그 기능을 못했다. 그것이 유일한 석간지로 되면서 정치, 경제 등 종합지로 완전히 전환하였다.
김채현: 문화일보는 창간 후 오래 되지 않은 시기부터 신문 제호(題號)의 본래 의미를 느끼기 힘들었다.
김종원: 나의 경우 1980년대부터 1999년까지 종합 일간지에 조선일보만 빼고는 영화비평을 다 썼다. 나는 조선일보 해직기자였다. 아무튼 당시 영화비평이 그 정도로 활발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꿈결 같은 얘기다. 같은 영화를 놓고 A신문과 B신문에서 다 써달라고 해서 다른 필자에게 넘긴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는 평론가도 ‘연예가 중계’ 같은 프로에 나왔다. 비평의 한 부분을 예능화시키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 이 프로그램이었다. 이후 그 기능을 연예인들이 맡았다. 그러다가 변질되었다. 2000년대 초까지는 대중적으로 영화비평의 입지가 컸지 않았나 싶다. 활자매체에서 전파매체로 전환하는 시기에 TV 붐에 편승해서 예능 프로로서 좀 더 격을 따지기 위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이 KBS의 ‘연예가 중계’였다.
김채현: 그 이전에는 ‘문화가 산책’이 있었다.
김종원: 그렇다. 이런 시기에, 평론가에게도 사인을 요구하고 광고모델로도 나와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다. 장마 속의 햇빛처럼 이른바 대중친화적인 ‘영화비평가 전성시대’가 잠시 있었다.
김채현: 그럼 타개책으로서는 분석비평이 자리잡아야 되겠고, 분석비평이 자리 잡으면 평론가의 수준이 높아지고, 영화 제작사들이 영화에 대한 창작 의욕이 싹틀 것이라는 게 선생님의 진단이다.
김종원: 장사의 유혹 속에서도 소중한 자극을 줄 것이라는 거다. 예를 들면 CJ 같은 데서 멀티플렉스에 참여하는데, 이전처럼 필름 대여섯 벌 들고 전국을 도는 시대가 아니다. 흥행이됐으니까 우리 회사도 뭔가 예술적으로 기여하는 한 두 편 남겨야 하지 않겠냐는 인식을 갖기를 기대하고 싶은 것이다. 또한 영향력 있는 영화감독들이 그런 방향으로 이끈다면, 해외 권위 영화제들에 나가든지 해서, 작품성과 동시에 흥행성도 기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나올 만하다. 그래서 자극을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김채현: 선생님 전략대로 한다면 시간이 좀 걸리겠다. 그러나 영화는 아주 순발력 있는 장르라서 비평계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서는...
김종원: 글쎄, 제 생각으로는 영화비평계가 관심이나 있을지 의문이다. 오죽하면 ‘씨네 21’같은 지면에 나오는 제한된 비평조차 홍보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 나오게 될까. 요즘 포털사이트나 신문에 나오는 일부 영화 기사는 정보라기보다 광고에 더 가깝다. 리뷰가 사라져 가는 자리에 유일하게 존속하는 것이 별점비평 아닌가? 20자 코멘트를 하고… 이게 무슨 평이냐는 것이다. 다만, 그게 필요악, 아니 차선책일 수는 있다. 그렇지만 저널리즘 비평이 온전히 상존하는 풍토 속에서나 별점비평도 또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저널리즘 비평이 소멸되어가는 상태에서 별점비평만 우뚝 선다는 것은 기현상이다.
□분석비평을 위한 환경은 가능한가
김채현: 그러면 분석비평을 하려면 가령 필진이 중요할 것이다.
김종원: 필진이 강화되고 그들을 경쟁시켜야 한다.
김채현: 그리고 분석비평지를 발행할 만한 재원도 필요할 것이다.
김종원: 재원이 확보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비평가들이 신인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나치게 프로페셔널한 기능만 갖고 자만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선 궤도에 오르기 전까지는 원고료를 사양할 각오를 해야 한다. 문학청년들이 데뷔하기 전에 스스로 호흡이 맞는 사람끼리 모여 동인지를 만들어내듯이 그런 각오가 있어야 한다. 이래저래 깊이 있는 글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렇지 않고서는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 말하자면 이런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경고가 필요하다. 평론을 학문으로 여기거나 평론가라는 이름을 무슨 훈장처럼 여기는 사람들은 하나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소수정예로라도 십시일반 봉사하는 자세로 영화평단을 정화시키고 평론을 살려 나가야 한다. 그래서 지금은 비상체제 시와 같은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1997년 외환위기로 한국 경제가 어려웠을 때 일반 시민들이 집에서 금이고 은가락지고 꺼내들고 나와 살려놨지 않았던가. 이런 의식으로 임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다.
김채현: 영화평론가협회 기관지 ‘영화평론’은 발간주기가 어떻게 되는가?
김종원: 일 년에 한 두 번이다.
김채현: 일 년에 네 번 정도 내려고 한다면, 그 재원을 마련할 방도는 있는가?
김종원: 현재로선 없다. 그나마도 제작비 지원을 영화진흥위원회에서 한다. 일 년에 두 번까지는 어떻게 가능할 것 같다. 그래서 비상체제라는 말을 쓴 거다. 제작비를 최대한 끌어들이고 원고료는 받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영진위가 영화비평지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않는 것 같다. 대학 연구소나 단체의 기관지 같은 간행물과 차이를 두지 않은 걸 보면…
김채현: 그런데 책을 만들어 배포하면 사가는 사람이 있겠는가?
김종원: 그거는 별개의 문젠데, 비평지라고 해야 1000부도 안되고 500부 정도 아니겠는가. 대형 서점에다 꽂아 놓으면 꾸준히 나가기는 한다. 전반적으로 비평 관련 책은 안 팔리는 추세이다보니 한계가 있다.
김채현: 그럼 국내 영화비평계가 분석비평이 가능한 사이트를 병행하고 있는가?
김종원: 지금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인터넷 사이트에 있는 글들이 다 분석적인 것은 아니다. 분석적인 글은 한국에서 인기가 없고 안 본다. 빨리빨리 시대이니까 그런 인내를 갖고 보는 것 같진 않다. 그래서 속도전에서는 분석비평이 안 통한다는 생각이다.
김채현: 그럼 인터넷에서는 분석 비평이 힘들다는 것인가?
김종원: 사이트가 필요하긴 하다. 왜냐하면 리뷰라는 것은 포털로 하니까. 20자평 같은 것도 병행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인내가 요구되는 분석 비평은 인터넷 공간에서는 부적합하다는 생각이 든다.
김채현: 그럼, 한국영화비평가협회에서 비평을 다루는 인터넷 사이트를 해보는 것은 가능하지 않는가?
김종원: 몇 년 전부터 홈페이지를 만들어 가능한데도, 회원들이 활용하거나 글을 안 쓴다. 그게 문제다.
김채현: 왜 그럴까?
김종원: 일단 사람들이 커졌다. 노력에 따르는 부수 효과, 원고료라든지를 따지고, 아니면 대개 바쁜 교수들이 평론가를 겸하고 있으니까. 뿐만 아니라 인터넷에 익숙지 못한 나이 많은 평론가들이 적잖은데다가 인터넷에 대한 인식이 약한 측면도 있다고 본다.
김채현: 부수적인 효과가 미미하므로 글 쓰려는 욕구가 없다는 것인가?
김종원: 그렇다. 저는 시사회에서 하루에 영화를 세편 볼 때도 있다. 거기 가보면 부지런히 보는 사람들은 거의 일정하다. 그런데 시사회에 참석하거나 별도로 일반극장에서 영화를 본다고 여겨지는 평론가까지 합쳐도 절반가량은 보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리뷰가 되겠는가? 그런 가운데 일부 평론가들이 지면에 발표하는 글마저 학회지의 성격을 닮아간다.
김채현: 이는 상당히 복합적인 문제로 보인다. 지금까지 길게 말씀하신 것을 요약해보자. 신문 비평은 사라졌고 주간지 비평도 퇴조하는 조짐이 뚜렷하며, 이를 타개하기 위해 요구되는 분석비평은 뜸한 반면에 이른바 논문 형태의 각주 비평이 현저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영화계를 제대로 견인할 비평이 요구되며, 이의 방안으로 비평지를 계간화할 필요가 크다는 것이다. 영화평론계에서 나름의 해결책을 찾을 것으로 기대되지만, 현재로선 한국에서 영화비평이 영화시장에서 별 기능을 하지 못한다고 정리해도 좋은가?
김종원: 못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영화마케팅 자체가 인터넷, 포털 사이트 중심으로 변하다 보니 비평이 설 자리가 없어졌다. 신문에서조차 리뷰가 사라진 마당에 비평가의 역할은 영화제의 심사 정도로 극한 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연말에 영화평론가협회에서 시상하는 영평상이라는 것이 있는데, 다음해 1월에 발간되는 회지에 수상작에 대한 리뷰들이 들어간다. 회원들이 수상작에 대해 코멘트하고 시상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그때 언급한 내용을 바탕으로 쓴 20매 정도의 글들이다. 물론 임의로 쓴 다른 영화평들도 있다. 이런 작품들은 이미 흥행이 끝난 뒤라 제작자나 수입업자들의 관심 밖이고 영향을 미칠 수도 없다.
김채현: 고료는 얼마쯤 되며 영화평론가에게는 어떤 관람 혜택이 있는가?
김종원: 평론가협회의 조그만 기금에서 조금씩 준다. 사실상 고료라 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또 속도전 시대이다 보니까 영화 관련 정보나 시사회 초대장이 이메일이나 스마트폰의 문자메시지로 전달된다. 팩스로 주고받던 시대만 해도 놀라웠는데 참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 과거에는 평론가나 기자들한테도 편리한 시간에 무료로 볼 수 있는 관람증이 발급되었다. 작년까지는 있다가 올해에는 그게 없어졌다. 하기야 시사회에 가서 보면 되니까.
김채현: 그러니까 프레스 입장권이 없다는 뜻인가?
김종원: 프레스 입장권은 없어졌다. 그리고 일부 잘 팔리는 평론가는 시사회에 가서 독자와의 대화시간에 동원된다. 영화를 보고나서 그것을 평가해 주고, 독자의 질문을 받고... 이런 형식으로 변질되고 있다. 그러면 독자와의 관계에서 안내역을 맡고 있는 그 평론가는 뭐겠는가? 영화수입회사 부탁을 받고 참여한 것 아닌가? 그럼 그 영화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나오겠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요즘 그런 현상이 많아졌다. 그런 식으로 평론가가 활용되고 있다.
김채현: 그것도 어떤 측면에선 평론가의 한 기능이라고 볼 수 있지 않는가?
김종원: 물론이다. 대중 친화적인 측면에서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부정적으로 볼 측면도 없지 않다. 평론가에게 가장 바람직한 것은 객관성인데, 그게 침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채현: 양면적이다.
김종원: 그렇다. 지금 말한 것처럼 순기능도 있지만 역기능도 있는 가운데, 그런 식으로 변질되고 있어 우려가 크다.
김채현: 그럼 영화비평계 내에서는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 이외에 다른 대안을 논의하는가?
□분석비평 잠식하는 각주비평
김종원: 지금 제가 얘기하는 것을 후배들한테도 자주 한다. 영화비평은 학문이 아니다, 이게 학문처럼 변질되고 있으니까 문제라고.
김채현: 각주비평을 하고, 그런 각주 비평이 준논문이 되는 그런 현상이 심하다는 지적인가?
김종원: 그렇다, 제가 비평을 쓸 때는 부득이 인용이 필요한 경우, 각주로 처리하지 않고 내용 속에 녹여낸다.
김채현: 이 지점에서 비평에 각주가 완전히 배제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어느 정도 용인되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나올 법하다. 이런 원론을 따지기보다 선생님 말씀 가운데 중요한 점으로 읽히는 것은 최소한의 각주를 허용할 경우에도 각주를 다는 동기 또는 목적이 비평다워야 한다는 점이 관심을 끈다. (준)논문으로 인정받기 위한 의도나 자기 목소리보다 나열에 치중하는 폐단을 극복해야 한다는 지적도 공감이 가는 대목이다. 그간 수십년 간 비평 활동에 전념해오신 원로의 충고로 받아들이고 싶다. 아무튼 간접 인용 방식을 활용하여 평론가 자신의 자기 목소리를 견지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김종원: 그렇다, 바로 남의 많은 이야기를 갖고 자기 이야기를 만들려는 것이 핵심 문제이다. 자기 이야기는 부분에 그친다. 한국 영화평론도 이제 90년이 된다. 1925년 1월 1일자 매일신보에 이구영이 쓴 ‘한국영화의 인상’이라는 제목 하에서 영화 4편을 골라서 평가했다. 1923년도 제작한 동아문화협회의 <춘향전>을 비롯한 부산 조선키네마사 제작 <해(海)의 비곡(秘曲)>과 단성사 촬영부에서 제작한 <장화홍련전>, 그리고 동아문화협회에서 제작한 일본인 하와카와 고슈 감독의 <비련의 곡>이 그것이다. 동양극장 시대에 활약했던 김춘광(본명 김조성)이 출연한 기생 이야기이다. 이 4편을 대상으로 쓴 것이 한국 영화평론의 출발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20년대에 이구영에 이어 심훈이 “문예영화의 문제점” 이라는 글을 썼었다. 그 다음이 윤기정의 “조선영화는 어디로 갈 것인가” 이다. 이런 사람들이 20년대에 활약했다면 30년대는 주로 카프 계열의 평론가들이 진출한 시기였다. 서광재를 비롯해서 임화, 김유영, 남궁옥, 그리고 40년대 해방 직전까지 김정혁과 극작가인 오영진, 이런 사람들이 주도했던 시기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영화평론의 뿌리가 어설프게나마 끈질기게 이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6·25 전쟁 때는 피난민이 중심이었던 부산에서 55년도에 영화평론가협회가 결성이 되고, 60년 4·19 이후에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는 평론가협회가 탄생했다. 해방이후에는 유두현, 허백년, 박인환, 이청기와 같은 사람들이 활동했다. 한국 영화평론에서 흥미로운 점은 문인들이 많이 참여했다는 것이다. 문인들이 왜 영화에 많이 참여했을까? 우선 문장력과 논리가 있지 않느냐, 거기다가 영화적 소양을 갖출 수만 있다면 가능했기 때문에 심훈은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로 유명하지만, <상록수>라는 소설을 쓰면서 영화평론도 시도했다. 이런 사람들이 영화평을 썼다. 해방 이후에 모더니즘 계열의 시인 박인환, 이봉래 같은 사람들이 영화평론을 쓴 것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50년대 후반부터 활약했던 이영일의 경우도 처음엔 시와 문학평론을 썼다. 춤비평의 경우에도 김상화, 김영태 같은 시인이 유사한 경로로 그 분야에 참여한 것으로 본다. 이런 토양 속에서 아날로그적 비평의 감성을 유지해왔던 영화평론가들이 위기를 맞고 있다.
김채현: 분석비평을 한다고 하면, 영화제작자라든지 감독에게 영향을 주는 것에 못지않게 영화를 수준 있게 수용하고 생각하는 독자층의 형성까지 가능할지 모르겠다.
김종원: 저는 이렇게 생각한다. 분석비평의 두께가 두꺼워지고 어느 정도 가면 분명히 일정한 수요가 있을 줄 안다. 소위 학자형 평론가의 역할이 그래서 중요하다. 국내에 영화학과가 얼마나 많은가? 거기 있는 사람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포털로 리뷰는 되겠지만. 이럴 땐 아날로그적 비평, 활자비평으로 갈 수밖에 없지 않으냐는 생각이다.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인내도 좀 따라야 하겠고. 필진도 정선되어야 한다. 저는 굳이 많은 비평가가 필요하다고 보지 않는다. 몇 사람이더라도 꾸준히 실적으로 성과를 낼 때 여기에 진정한 독자도 따르고 평가도 따르는 게 아닌가 한다. 미시적인 성과도 중요하지만, 영화사적 맥락에서 작품과 작가에 접근하는 거대 담론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임권택 감독이 이제 80세 바라보는데도 현장을 뛸 수 있다는 것, 여기에 답이 있지 않을까. 비평가도 마찬가지다. 나이가 들어도 현역이라는 비평가의식, 오만한 자긍심을 잃지 말아야한다. 임권택 감독이 그 연세에 뛸 수 있는 배경이 뭐겠는가? <만다라>, <서편제> 같은 작품을 내놓을 수 있었던 힘과 그 수준을 지키려는 의지와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론가 자신도 그때 당신은 뭘 했느냐고 물었을 때 이런 일을 했고 이 같은 글을 썼노라고 떳떳이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부끄럽다. 아울러 비평계 전반, 방계 예술장르와의 횡적인 연결도 필요하다. 그러면서 현대비평이 나가야 할 좌표를 설정해야 하는데 이런 점에서 영화비평이 가장 취약해지고 있지 않나 우려된다. 그런 점에서 다른 분야는 좀 여유롭지 않은가 한다.
김채현: 다른 분야에서도 큰 차이는 없다고 본다.
김종원: 아, 그런가.
김채현: 아까 말씀하셨던 속도, 자본에서 밀린다는 것에서 비평의 큰 위기를 찾았었는데, 그럼 해외 영화비평계는 어떠한가?
김종원: 해외에서도 큰 차이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한국영화처럼 이렇게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나 중국 제작진이 한국에 와서 놀란 것이 5천만 인구의 나라에서 7백만, 천만 관객이 동원되는 영화가 나온다는 것은 전혀 뜻밖이라는 거다. 미국도 한국만큼 환경의 변화가 급격하지는 않고, 지면도 과거만큼은 기능하지 못한다고 해도 아직까지는 지속적으로 이어져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굉장히 불안정하다.
김채현: 일본은 어떠한가?
김종원: 일본은 정기 간행물로 ‘키네준보’라는 것이 나오고 비슷한 환경이지만 한국만큼은 아니다. 그래도 일본과 한국은 여론 형성과정도 그렇고 비슷한 상황이라고 본다.
김채현: 그런데 제 개인적 느낌은 우리나라에서 예술영화 작업이 영화를 먼저 개척한 나라들에 비해서 상당히 떨어지는 것 같다. 실험영화, 예술영화가 적고, 두 번째는 영화미학이나 영상미학 측면의 비평이 활발치 않아 보이는데, 국내 영화비평이 현장 리뷰에 치우치고 분석비평이 미진한 큰 원인이 이런 현상에서 찾아질지 모르겠다.
□실험 · 예술영화 제작과 비평 활성화되어야
김종원: 한국에는 실험영화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흥행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단편영화에서 가끔 나타나긴 하지만 대개는 기성영화를 흉내 내거나, 제도권 영화로 진입하기 위한 수단쯤으로 여긴다. 실험적인 것이란 스타일, 표현기법 등에 있어 파격적인 것을 요구하는데, 그런 것들을 좀체로 찾아보기 어렵다.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는 학생들의 20분가량 되는 졸업 작품을 봐도 완전히 유형화되어 엇비슷해져버린다. 이런 이유 때문에 거기서는 실험영화를 할 여지가 없다. 우선 기초부터 다져야 한다. 기초를 단단히 다져야 앞으로 추상을 하든 구상을 하든 제대로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단편영화를 말하게 되면 독립영화로 직결되고, 그것이 마치 정치적인 이념 영화가 돼버리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독립영화는 소자본, 대자본에 대한 상대적인 박탈감이 있겠지만 집을 날리면서까지 영화 한 편을 만들어 승부를 보려는 그런 실험정신이 없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적자생존이 중요해져버린다. 가령 영화계에 데뷔하면 일단 승부를 봐야 한다, 흥행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상업적 영화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중압감이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예술성을 제고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도 출발부터 그런 여건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일단 흥행에 성공해놓고 꼭 예술영화를 한 편 만들어야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그 대부분이 몽상으로 끝나기 일쑤다. 데뷔작이 다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비록 성공시켰더라도 다음 이어지는 후속타들은 상업영화들이다. 예술영화를 만들 여건이 되려면 적어도 임권택 감독 같은 정도의 역량과 경험이 축적된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현실이이렇다 보니 상업 논리에 의한 결과물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가능했던 이유는 완전히 개인의 책임 아래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김채현: 그럼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예술영화로 분류된다는 것인가?
김종원: 물론이다. 실험적 요소도 찾아볼 수 있는 영화다. 그러나 제도권 영화와는 분명히 다른 미학이 보인다. 그러니까 내가 제작자에게 바라는 것이 영화를 만들다 보면 기대했던 만큼 흥행이 안 되는 경우도 있고, 소자본으로 흥행이 되는 경우가 있다면 저런 좋은 예술영화 한 편쯤 남겨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10편 만들면 1, 2편은 나오지 않겠느냐 하는 거다. 그런 작품들이 경쟁력을 인정받고 해외에서 수상하게 되면 후속타가 이어질 개연성은 충분하다.
김채현: 비평가들이 독립영화나 실험영화를 비평할 건수는 많은가?
김종원: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영화가 없기 때문에 쓰려들지 않을 테고, 게다가 거기에 관심을 가질 만큼의 여력도 없다. 일단은 시장이 있어야 하는데 실험영화, 독립영화 시장이 제한적지 않은가? 예를 들면 옛 할리우드극장이나 광화문에 있는 씨네 큐브, 기타 몇 군데가 있긴 하다. 그런데 씨네 큐브도 이제 예술성이 있는 영화 위주이지, 실험영화는 아니다. 독립영화는 극장을 얻기가 힘들다. 일단 관객이 들어와야 하니까. 일부 단편영화, 독립영화들은 기성 영화계에 진출하기 위한 하나의 교두보로 활용하려는 경향이 있다. 문학청년들이 문단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길이 있지 않은가? 하나는 신춘문예 당선이고, 다른 하나는 추천받는 길, 극소수의 경우에는 자비로 책을 내서 인정받는 것이다. 그리고 동인지를 낸다. 끼리끼리 모여서 인정받기 위해서이다. 그런 과정이 영화계에 필요하다. 그런데 아마추어 단계에서 프로로 진입하기 위한 과정에 영화진흥위원회와 같은 정부 기관의 돈을 요구하는 경우가 흔하다. 제 판단으로는, 어차피 영화계에 나오려면 영화를 만들어서 승부를 보아야 하는데 그 이전까지는 당신네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그것을 어떻게 정부 돈을 받아 하려고 하느냐 하는 것이다.
김채현: 한국의 인디 문화가 얼마 만큼 인디적인가 하는 것에 대해 늘 의문을 갖게 된다. 현장에선 정부 내지는 국가가 지원해줘야 한다, 아니면 지원해 줄 필요 없다는 식으로 논리가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김종원: 저는 정말 인디 영화가 영화의 본령에 충실한 예술성과 실험적인 것이 있다면 인정해줘야 한다고 본다. 그게 없기 때문에 이런 지적이 나온다. 그러니까 고영남 감독 같은 사람은 평생 영화를 111편 만들었지만, 역사적으로 남을 영화는 사실상 없다는 게 중론이다. 대조적으로, 배용균 감독은 한 편 가지고 뜨지 않았는가? 이걸 음미할 필요가 있다. 김수용 감독이나 임권택 감독이 다작주의에도 불구하고 거론되는 것은 그래도 몇 편 있기 때문이다. 임권택 감독이 60년대에는 정말 언급을 꺼릴 정도의 다작들을 쏟아내지 않았는가? 액션, 코미디, 사극 등 별 걸 다 했다. 그런데도 그 가운데 걸러낼 것이 있지 않은가? 김수용 감독도 마찬가지다. 그중에 <혈맥>, <갯마을>, <안개>, <산불> 과 같은 좋은 작품을 남겼다. 중요한 것은 평론가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간다면 그런 분석적인 글, 예를 들면 작품, 작가론 같은 본격적인 글을 쓰라는 거다. 그러니까 작가론, 배우론 이런 것들이 100매 이상 나오는 경우가 있게 된다면 양이 아니라 질로 승부하는 것이 된다.
김채현: 오늘 영화비평의 현안을 들어 보면, 비단 영화계만의 일이 아니라는 느낌이 절실하다. 잠시 몇 가지 근본 원인을 생각해보고 싶다. 오프라인 신문과 주간지가 포털과 인터넷에 밀림으로써 고조되는 비평 일반의 위기는 사실 그간의 매체 혁명에 뿌리를 두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날로그적 내용일 수밖에 없는 콘텐츠를 디지털로 소통·유통해야 하는데, 제대로 된 비평이 여기에 적응하는 데 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포털과 인터넷의 자본력·속도전·감성을 비평이 자기 것으로 하는 차원에서 뭔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e북을 보더라도 컴퓨터·인터넷·태블릿에서 긴 글, 일테면 분석비평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망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비평계는 새로운 환경을 선용할 역량을 길러 대처해야 할 것으로 본다. 오늘 선생님의 고견에 감사드리면서, 독자들의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이참에 선생님이 드문 현역 원로 평론가로서 일찍이 영화평론에 입문한 계기나 걸어오신 길을 잠시 듣고 싶다. 대학에선 뭘 전공하셨는가?
□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창설 주역
김종원: 저는 서라벌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2년제를 졸업하고 동국대에 가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그 시절에는 영화과가 없었다. 제가 졸업한 후에 영화과가 생겼다.
김채현: 대학 시절은 어떠하셨는가.
김종원: 그때 동국대 교수진 중에 서정주 선생이 계셨는데, 서라벌예술대학교 스승이기도 했다. 제가 제주 출신인데, 제주중학교 2학년 때부터 시를 썼다. <학원> 잡지가 1952년 11월호 창간되고. 거기서 학생문단 원고를 모집했다. 그래서 제주도에 중학 2학년 꼬맹이가 응모하고, 학원 잡지 제2호에 <국화는 피어도>라는 시가 조지훈 선생님에 의해 뽑혔다. 그게 학원잡지 문단사상 제1호였다. 그때 나를 포함해 3명이 뽑혔는데, 그렇게 3명이 학원 1세대였다. 창간호 스타트는 내가 했고. ‘학원’에서 스타트 하면서 시인이 되려고 했다. 저하고 같은 학원 세대인 정규남, 유경환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로 학생시집을 출간했다. 발간 비용은 정규남이 이승만 대통령 탄생 기념으로 연 학생 글 현상모집에 당선하여 그때 돈으로 7만원을 받은 것으로 했다. 당시 7만원은 굉장히 큰 돈이었다. 그런데 이 셋이 건방지게 서문을 ‘청록파’ 시인이신 조지훈 선생께 부탁하였다. 서울에 있는 유경환이 찾아가 부탁했고, 야단맞고 돌아왔다, 건방지게 학생들이 무슨 시집이냐고. 그래서 포기하고 시집을 냈다. 시집을 내고 몇 달 후 정초에, 고등학교 3학년 때였는데, 유경환이 조지훈 선생님께 세배를 하러 가 이야기 하던 끝에 서랍에서 꾸깃꾸깃 종이를 꺼내더니 자기가 부탁을 받아썼다면서, 이미 시집이 나온 마당에 뒤늦게 서문을 주신 거다. 그래서 그 서문은 나중에 따로 유경환이 ‘한국문학’이라는 잡지에 조지훈 선생 이야기를 하면서 그걸 한 번 써먹었다. 그렇게 문학을 시작하였다. 저는 애초부터 시인이 될 마음으로 서라벌예술대학교에 진학했다. 1959년 대학교 4학년 때 ‘사상계’를 통해 데뷔했고, 후일 무용평론가로 활동한 김영태 시인이 저보다 몇 개월 뒤에 데뷔했다.
김채현: 지금 세대는 ‘학원’과 ‘사상계’ 잡지를 잘 모를 텐데, ‘학원’은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한국 중고교 청소년들에게 문예와 문화를 제공하고 그 방면 꿈을 키워준 잡지로 거의 독보적이었다. 지금 중·장·노년층들에게 ‘학원’은 꿈이자 무의식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창간된 ‘사상계’는 1970년까지 당시 지성 평론지로서 역시 독보적이었고 강렬한 논조로 시국(時局)과 정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월간지였다. 영화평론은 어떻게 해서 하시게 된 건가?
김종원: 제가 일곱살 때 제주도에서 처음 영화를 봤다. <말레이의 하리마오>(말레이지아의 호랑이)라는 일본 군국주의 영화였다. 43년도에 제작된 영화인데 지금도 그 주제가를 읊조릴 정도로 인상이 남아 있다. 그 7살 때 극장 입장을 안 시켜주니까 어른들 몸 사이로 끼어서 들어갔다. 어릴 적부터 영화에 대한 관심이 상당했다. 대학교 입학하고, 서울 명동의 유명한 음악 감상실 ‘돌체’에서 공초 오상순 선생 같은 분을 알게 되고, 그 분을 통해서 담배도 배웠다. 그런데 그 근처에 영화인들이 많이 나오는 다방이 있었다. ‘나일구’라고 전창근, 김지미, 유두현, 허백년, 이런 배우, 감독, 평론가들이 다 모이는 다방이어서 영화에 대해 관심이 있던 터에 영화평론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대학교 4학년때인 1959년에 시인이 되고서, 격월간으로 나왔던 ‘시나리오 문예’ 잡지에 글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건 작품비교론이었다. 르네 클레망의 <금지된 장난>, 김기영 감독의 <십대의 반항>을 비교한 원고 ‘현실과 앙가즈망의 계곡’을 시작으로 비슷한 유형의 작품을 묶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 영화평론과 관계하기 시작한 거다. 그러다보니 나보다 여섯 살 위인 이영일씨를 알게 됐다. 그 분이 시도 썼고 문학평론도 했는데, 다방에서도 자주 만나고. 그 분이 얼마 후 ‘영화예술’이라는 잡지를 낸다. 내가 미술을 좋아하고 그림을 좀 그렸기 때문에 광고도안도 해주고, 원고도 써주면서 한국영화평론가협회를 같이 만들어 지금에 이르렀다.
김채현: 그 협회는 언제 결성하셨는가?
김종원: 1960년 7월, 4·19 직후였다. 그 다음해 5.16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기존의 문화단체가 해산되고, 그래서 영화평론가협회도 없어진다. 그러다가 65년 11월 15일 재발족하였다. 멤버들은 그대로 이영일 회장에 김종원 총무간사, 이런 식의 체제로 이어졌다. 그러니까 ‘영평’의 역사는 4·19 이후에 만들어진 영화평론가협회로 시작하였다.
김채현: 언론사 생활은 언제부터 하셨는가?
김종원: 저는 원래 잡지 편집에 관심이 많았고, 학원사에 공채로 입사했다. 시험을 봐서 65년도에 들어가서 같은 학원 계열의 ‘농원’이라는 농촌잡지에 참여했다. 학원 계열인 ‘주부생활’ 편집 차장 지내고, 그러면서 제가 ‘좋은 영화 보기’ 운동을 시작하였다. 회사에 얘기해서 우수영화로 뽑은 영화를 잡지에 화보로 소개하고, 그 대신 우리가 100명을 단성사로 초대하여 시사회를 열었다. 화보에 응모권을 붙여 초대하였다. 그때 빼놓을 수 없는 영화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영화 이만희 감독의 <만추>였는데, 지금은 필름이 없다. 김수용 감독의 <갯마을>, 김강윤 감독의 <역마>, 이런 영화들도 그때 소개하였다. 제공한 화보를 굳이 광고료로 치자면 꽤 많은 액수가 될 거다.
김채현: ‘좋은 영화 보기’ 운동은 언제 시작되었는가?
김종원: 66년부터이고, 그렇게 해서 제가 계속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 거기서 68년도에 나오고, 69년도에 조선일보에 ‘주간 조선’이 창간되면서 문화담당 기자로 들어갔다. 그러다 75년도 유신 때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가 중심이 된 언론자유실천운동이 일어났는데, 그때 조선일보에서 31명이 쫓겨나는데, 나 역시 그때 해직됐다.
김채현: 그럼 75년 이후 딴 직장으로 옮겼는가?
김종원: 조금 파란이 있었다. 그때는 다른 곳에서 정치적 이유로 받아주질 않았다. 그래서 약업(藥業)신문이라고 정치색이 없는 곳에 입사하고, 한 3년 후에 태창영화사에 들어가 영화기획에도 참여했다.
김채현: 태창영화사에서는 뭘 하셨는가?
김종원: 방계회사인 태창문화사 주간 겸 영화사 기획실장이었다.
김채현: 반민주적인 시대에 언론 자유 수호에 앞장서며 개인적 풍파를 많이 겪으신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도 시를 1년에 한 두 편 발표하시는 줄로 안다. 그동안 영화비평 내지 평론은 어느 정도 쓰셨는가?
김종원: 꽤 많이 쓴 편이다. 85년도에 영화평론집 ‘영상시대의 우화’를 출간하고, 한국일보 문화비평을 오래 하고, 동아일보, 중앙일보, 일간스포츠를 거의 맡아 썼으니까 영화편수로 한 400여편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2007년도에 현대미학사에서 나온 ‘한국영화사와 비평의 접점’이 있다. 그게 2권으로 나왔는데, 고희를 기념하기 위해 냈다.
김채현: 그런데 혹시 지금 ‘씨네 21’ 같은 잡지 말고 다른 주간지나 월간지 형태로 잡지가 나올 가능성은 없는가?
김종원: 없다. 다만 대제작사가 홍보차원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올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과거에 영화사가 그런 형태로 낸 경우가 있었는데, 대한극장에서 ‘스크린’이라는 잡지를 한 12권 냈다. 극장이 자기 PR을 하기 위해서 냈는데, 그래도 외피는 완전 영화잡지였다. 자기네 광고 다 하면서 갖출 건 다 갖췄다. 비슷한 예로, 제약회사 유한양행에서 ‘가정생활’이라는 잡지를 냈었는데, 그것도 전반적으로는 의약품을 다루는 것 같지만 실은 그런 형태였다.
김채현: 오늘 영화비평의 위기를 화두로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비평의 요건까지 몇 가지 큰 대목이 짚어졌다. 영화비평의 위기는 영화계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일 텐데, 방계 예술 분야에서 참고해야 할 지적 사항도 적지 않았다. 소위 급변하는 매체 혁명 속에서 비평이 심한 변화를 겪는 가운데 아마도 영화 분야의 비평이 가장 센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다는 판단을 오늘 말씀을 통해 짐작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춤을 비롯 다른 분야에 재연될 가능성이 매우 큰 현상에 대해 미리 경보를 울려주신 듯해서 긴장되는 한편으로 오늘 장시간에 걸쳐 솔직한 지적을 밝혀주신 데 대해 재삼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