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번 2월 중순 ~ 3월 초순 스톡홀름 등 유럽 7개 도시에서 'Kore-A-Moves' 행사가 열렸다. 국제교류재단·국제공연예술프로젝트가 주최하고 한국춤비평가협회·독일 탄츠하우스·스톡홀름 단센스후스 등이 후원한 이번 행사는 덴마크 코펜하겐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한국춤의 미와 현황을 소개하는 국제 포럼을 아울러 가졌다. 이번 행사의 주목적이 한국춤의 해외 진출을 목표로 한국춤을 알리는 데 있으므로, 이번 기회에 유럽 현지에 진출한 한국 무용인을 직접 인터뷰하여 그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전달함으로써 한국 무용인의 유럽과 해외 진출을 진작하는 작업을 병행하기로 하였다. 본 인터뷰는 유럽의 세 지역에서 현지 무용인의 사정에 맞춰 기획 진행되었다. 인터뷰에 응해 주신 무용인들에게 재차 감사드린다. - 편집자
이상은씨는 지금 드레스덴국립발레단 세컨드 솔리스트(second solist)로 있다. 드레스덴에서 국립발레단의 역사는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길다. 그러나 1945년 이 지역은 동독으로 되었으며 1989년 독일 통일 후 쇄신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드레스덴은 독일의 피렌체(플로렌스)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도시이다.
자신의 입단 경위부터 소개해보자.
“선화예중과 선화예고 졸업 후 유니버설발레단에서 5년간 활동하였다. 여기에는 2010년 8월에 코르 드 발레로 입단하였고 1년 지나 코리페로 편성되고 다시 세컨드 솔리스트가 되었다. 유니버설발레단에 있을 때, ‘컨템퍼러리 발레의 밤’에서 윌리엄 포사이드 작 <인 더 미들> 등에 출연하였다. 그 당시 발레 매스터가 와서 포사이드 작품을 4주 동안 지도하였고 많이 배웠다. 이 발레 매스터가 지금 드레스덴국립발레단의 매스터로 있다. 그때 드레스덴국립발레단에도 관심이 있었고, 이것 저것 물어보며 자극도 받았다. 그래서 유럽에 오디션을 보러 와서 다른 두 발레단에서 오디션을 보고 세 번째 오디션을 드레스덴국립발레단에서 보았다. 여기서는 연초 특히 1월초부터 오디션 시즌이 진행되는데, 2010년 1월 드레스덴국립발레단에서 오디션을 봤고, 즉석에서 발탁되어 입단하게 되었다.”
혼자 발탁되었는가?
“여자 1명 그리고 다른 남자 1명이 발탁되었다.”
드레스덴과 한국 예술인은 인연이 있는가?
“오페라단과 합창단에 한국인이 더러 있다. 세계 4대 테너라는 김우경씨가 잘 알려져 있고, 정명훈씨도 객원 지휘자로 초빙받은 바 있다. 이전에는 다른 한국인이 발레단원으로 있었다.”
이상은씨는 첫눈에도 180센티미터가 넘는 장신으로 보인다.
“그렇다. 유니버설발레단에서 생활은 만족스러웠는데, 국내에서는 제 키가 커서 남성 상대역이 적다는 점이 애로였다. 키가 크고 잘 해내는 무용수는 흔치 않다. 그런데다가 컨템퍼러리 발레를 더 하고 싶었다. 유니버설발레단에서도 저의 희망을 가급적이면 수용하려고 애쓴 편이었다.”
컨템퍼러리 발레에 대한 개인적 느낌이 있을 텐데...
“국내에서 포사이드 작품이나 오하드 나하린 작품 <마이너스 7>에 출연하였고, 이번에 스티인 셀리스가 창작한 <로미오와 줄리엣>에도 출연한다. 고전발레는 틀에 묶이고 나름 정리된 편인데, 저는 컨템퍼러리에 더 재미를 느끼고, 자유스러움도 있고 또 자신에 적절한 신체 표현이 가능하다고 본다.”
몇 해 여기에 있으면서 가진 전체 소감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겠는가?
“일단은 잘 왔다고 본다. 출연 기회도 많고 작업 환경 면도 좋은 편이다. 스타 무용수가 아니더라도 출연 기회가 많다. 극장에 발레를 보러오는 경향이 일반인들 사이에 흔하다. 드레스덴국립발레단은 드레스덴 지역에서의 공연을 소화하기에 바빠 외부 순회 공연은 잘 하지 않는다. 그래서 새 관객 개발에 있어 작품 개발 전략이 중요해진다.”
출연 생활을 소개해달라.
“여기서 생활하면 안무가든 무용수든 모두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 저는 개인적으로 10살 때부터 발레 시작하여 유독 발레에 재미를 느끼고 지구력을 갖고 계속하였다. 빨리 프로 생활을 하고 싶었다. 여기서는 매일 10~18시에 근무한다. 대개 코르 드 발레는 주 36시간, 솔리스트는 주 40시간 근무한다. 연간 공연 회수는 비슷한데, 공연 작품 수는 다르다. 지금까지 프리미어 초연작 3~4작품, 정기공연작 8 작품, 여러 작품을 함께 올리는 믹스 빌 행사 3~4 건에 출연하였다. <에메랄즈> <다이아몬드> <호두까기 인형> 슈가 플룸, <라 바야데르> 등에서 파드되를 하였다. 작품 <다이아몬즈>에 출연하여 찬사를 받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파드되에 출연할 기회를 많이 갖게 되어 더욱 좋다.”
한국에서는 급여가 월급에 공연 수당이 추가되는 식으로 지급되는데, 여기서는 어떤가?
“여기서는 별도의 공연 수당이라는 것이 없고, 월급에 시간외 근무 수당이 주어진다.”
단원 구성은 어떠한가?
“전체 단원이 60명인데, 독일인 2명에 이탈리아, 스페인, 러시아, 일본, 미국 출신자들이 있고, 중국인도 1명 있다. 독일인은 베를린 출신이 1명, 그리고 드레스덴 팔루카학교 출신이 1명 있다.”
여러 안무가를 접촉한 소감은 어떤가?
“배울 게 많고, 특히 유명 안무가들에게서 많이 배운다. 윌리엄 포사이드, 오하드 나하린, 마츠 엑크 등이 그런 사람들이다. 윌리엄 포사이드는 음악성과 자기 표현을 중시하는데, 너 자신을 보러 관객이 온다고 강조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주목할 만한 이곳만의 특성이 있는가?
“드레스덴국립발레단은 부설 학교에의 의존도가 낮은 발레단이다. 그래서 인터내셔널한 발레단이라 할 수 있고, 여러 가지 발레 메소드를 배우게 되는 장점이 있다. 또 클래식과 컨템퍼러리를 겸비한 가운데 컨템퍼러리가 강하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 여기는 동독 지역이라 클래식에 관객이 많이 몰리는 편이지만, 그래도 컨템퍼러리에 대한 반응도 크다고 봐야 한다.”
국내에서 해외 진출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조언한다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하지만, 하고 싶은 것의 동기를 분명하게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왜 하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자신의 것으로 잘 소화한다면 춤에 대한 열정도 생산적일 수 있으리라 본다.”
김형민씨는 90년대 후반 무용원에 입학하여 현대무용을 수학하였다. 졸업후 1년간 LDP 무용단에서 활동하였고, 2004년부터 베를린에 거주하며 창작자와 무용수로 활동하고 있다.
베를린에 오게 된 경위를 소개해달라.
"지금도 국내에서 매년 열리는 Modafe 제전에서 그때 EDDC 학교 학생을 뽑는 오디션에 참가해 입학이 확정되었다. 2003년 입학을 준비하던 중 미나 유 선생님의 추천으로 인터쿨트 임민숙 선생 추천으로 뒤셀도르프 탄츠 메세에서 공연하였다. 탄츠메세에서 남북 분단을 소재로 한 솔로
베를린에 정착한 셈인데, 국내인들에게 많은 참고가 될 것 같다. 베를린에 온 이후 상황을 소개해달라.
“툴라 림나이오스 안무작 2편을 6개월간 함께 작업하였다. 그런데 저는 안무 작업을 염두에 두었던 편이었다. 그러던 차에 무용원 초빙 교수였던 루드거 오를록을 만나 베를린의 탄츠 파브릭(Tanzfabrik; 춤공방)에서 공연하였고, 지금 남편인 조명 디자이너도 탄츠 타게 페스티벌 행사에서 만났다. 저로서는 베를린에서 생활은 가능하였지만, 무용가로 활동하려면 비자 문제가 해결되었어야 하는데, 그러질 않아 조마조마하였다. 그렇게 불안정한 상황에서, 아르헨티나 안무가 콘스탄차 마크라스(C. Marcras)가 동양 안무가를 찾는다는 말을 듣고 함께 작업하게 되고 또 그 사람 작업에 출연하게 되었다. 이후 토마스 오스트마이어(샤를 뷔네 극장 소속)의 작품에 출연하고, 제가 할 수 있는 작업 기회를 계속 찾아 다녔고, 그러는 사이에 여러 곳에서 추천을 받아 여러 안무가의 작업에도 출연하였다. 이렇게 활동하다보니 안무가로서 활동할 여지가 적어진다 싶어 2010년도에 베를린 시정부 Senat(제나트)에 지원 신청을 하였다. 여기서 제가 지원받는 지원금은 베를린 시정부 예술작업 기금( Regierenden Bürgermeister von Berlin-Senatskanzlei - Kulturelle Angelegenheiten)으로 표기된다.”
베를린이 신진 예술가들에게 열려 있다는 말을 자주 듣는데, 베를린의 환경에 적응하려고 애쓴 흔적이 엿보인다. 지원금 신청은 현지에 어느 정도 자리잡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일 텐데 말이다.
“2010년도 제나트의 지원금을 받기 위해 석달 동암 밑그림을 그리고 1주일에 걸쳐 밤을 꼬박 세우며 서류를 작성해서 신청하였는데, 다행히 선정되었다. 올해로 4년째 지원 수혜를 받고 있다. 2010년에 2만5천 유로를 받았고, 2013년에는 2012년도보다 조금 적은 4만 유로를 받는다. 모두 작품 제작 지원금이다. 그리고 2011년도부터 독일 정부의 지원금 폰다쿠(FONDAKU; Fonds Darstellende Künste e.V)를 해마다 9천 유로씩 지원받았다. 지원금을 수혜하는 덕분에 2010년경부터 팀을 이루어 작업에 전념할 수 있어 좋은데, 아직 단체 이름은 정하지 않고 있다.”(참조: 1 유로 ≒ 1500원)
제나트는 연간 몇 사람 정도 지원받는가? 제나트는 우리로선 생소할 수밖에 없었는데, 소개해달라.
“춤 분야에서 매년 20단채가 지원받는다. 지원금의 액수가 커 보이지만 프로덕션 메니징에서 작품 제작, 공연진행 기술비, 언론 및 홍보를 위한 재원이며 작업이 시작되면 최소 3달간 10시부터 저녁 7시까지 온전히 작업에 투입되기 때문에 팀원들에게 작업 시간에 상응하는 작업비를 지급 하지 못할 때도 있다. 작업 이외의 생활은 다른 안무가와의 작업을 통해 수입을 충당하고 있습니다. 한편, 독일의 대표적 지원기관은 제나트, 폰다쿠, HKF (Hauptstadtkulturfonds)가 있다. 제나트는 독립 단체에 대해 지난해에 24개 단체에 12000 ~ 45000 유로의 지원금을, 2013년에는 28개 단체에 7800 ~ 45000 유로의 지원금을 지원한다. 국내에 잘 알려진 독일 단체 자샤 발츠(Sasha Waltz)는 제나트로부터 한 해에 약 97만5천 유로, HKF(Hauptstadtkulturfonds)로 부터 87만5천 유로를 받았으며 지금은 부족한 예산 때문에 베를린에 머물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컴퍼니를 이동할지 논의 중에 있다 한다. 어느 기사에서 자샤 발츠가 원하는 지원금은 약 두배의 금액인 4백만 유로라고 읽었다. 독립단체에게는 좀 꿈 같은 이야기 아니겠는가.”
한국도 그렇지만, 어디서나 지원금은 효과가 있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다만 지원금 집행이나 지원 단체 선정 과정이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할 것이다.
“언제나 적은 재정으로 작품을 구상하고 컴퍼니 리허설 후 시간을 쪼개어 연습하다가 2010년 정식으로 지원금을 받아 작업하게 되었을 때 그 기쁨은 어떻게 표현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지원금을 쓰는 것 자체가 제게는 너무나 큰 도전이었다. 언제나 감성적이면서 추상적인 관점에서 작업을 해왔고, 워낙 제 작업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훈련이 되지 않았었기에 명확한 작업의도와 계획을 문서화시켜야 하는 제나트 신청서 작성 자체가 큰 관문이었다. 신청서 작성 과정부터 많은 공부가 되었다. 정확한 재정 방안과 창조적 아이디어, 그리고 명확한 작업의도, 이것들을 지원서를 위해 정리 분석해 가면서 더욱 더 작업의 필요성, 그리고 이 작업의 중요성을 더 명확히 찾아 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또 지원금 수혜 이후 따르는 안무자의 책임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할 수 있었다. 많은 예술가들이 지원하는 지원금에 토미와 저의 작업이 지원받게 된 이유중의 하나가 아마도 우리가 다루는 이주민을 비롯 인간의 갈망에 대한 주제 때문이지 않을까 본다. 많은 이주민이 살아가는 베를린, 2차대전 이후 터카, 베트남 등 많은 이주민을 받아들여야 했던 독일의 역사나, 또 경제 불황으로 등한시되는 동시에 끊임 없이 떠오르는 북한 탈북자를 비롯 불법 이주민 및 제3세계의 인권에 대한 높은 목소리, 이 둘이 강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와 작업을 풀어나가는 표현적인 부분이 어쩌면 어필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2012년 공연한
아직 한국은 그렇지 못하지만, 몇 해 체류한 외국인들에게마저 지원하는 것이 유럽의 좀 오래된 관행처럼 보인다. 같은 유럽이라도 나라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그래도 열린 사회 속에서 창조적 문화를 가꿔가는 속마음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첫 프로젝트부터 지금까지 3부작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우리 팀을 믿고 꾸준히 지원해 주는 관계자들이 너무나 감사하다. 이 꾸준한 지원, 예술가의 실패도 과정으로 인정해 주며 충분한 기회를 주는 지원 방식에 따뜻함마저 느낀다. 또 관객들의 냉정하고 자유롭고 다양하면서도 클리어한 피드백 또한 제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까지 네 차례 지원금을 받아온 현시점에서 앞으로는 레지던시 등 네트워크 및 프로모션에 중점을 두고 작업할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를 위해 올해는 무용수로서의 작업은 잠시 쉬기로 결정했다. 무용수로 작업하면서 안무가 작업을 동시에 하는 것에는 많은 애로가 따른다. 두렵기도 하지만 이제까지처럼 내게 주어질 기회 그리고 실패, 그것들을 통해 성장해 나갈 나 자신의 미래를 꿈꿔본다.”
작품 활동을 조금 더 소개하면...
“베를린과 유럽에서 지금까지 10작품 가까이 발표하였다. 그리고 한국에선 스프링 페스티벌(2007, 참가작
독일 신문에 실린 북한 기사에서 작업을 시작하게 된 동기를 더 소개할 수 있겠는가?
“2009년 베를린 중심가의 어느 카페에서 신문에 실린 북한에 대한 기사 및 사진을 보고서 아마도 저의 국가적 정체성이 되살아났던 것 같다. 한국인 무용가 김형민이 아닌 김형민으로 살아가기 바빴던 그 시간들 속에서 갑작스럽게 북한, 한반도 문제가 크게 대두된 기사를 보고, 나와 내 주위에 앉아 있는 독일인들, 그들이 바라보는 이 문제와 내가 바라보는 이 현실에 대한 시각, 그 안에서 느낄 이질감, 내게 언제나 당연하기만 했던 북한의 문제가 그렇게 강하게 제 마음속에 인식되기는 처음이었던 것 같았다. 결국 스위스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우연히 그리고 매우 당연하게 북한 탈북자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 밖에 3세계에 살고 있으나 약속의 땅을 꿈꾸며 탈출을 시도하는 불법 이주민에 대한 소재로 이야기가 흘러갔고, 스위스의 철저한 불법 이주민 정책을 이야기하면서 결국 인간의 자유를 향한, 보다 나은 환경을 향한 끊임없는 도전에 대해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저 구차하고 식상하게 들리는 ‘북한 동포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라기보다 그들의 갈망을 통해 오히려 간절히 무언가를 갈망하는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그들의 갈구를 통해 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고 상황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 모두에게 존재하는 변화하고자 하는, 자유를 향한 인간의 소망에 대해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이주민으로 살아가는 저 자신과 스위스인 친구의 삶, 우리의 삶을 생각해 보면서 안정과 정착보다는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또 다시 낯선 곳을 행해 떠나기를 망설이지 않는 끊임없는 우리 인간의 욕구, 그리고 끊임없는 여정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하였다. 더 나아가 관객에게 끊임없이 도전하고 갈망하는 그들의 모습 그리고 관객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하고 싶었다. 이런 생각이 어쩌면 이기적일는지 모른다. 죽음 속에서 사투하는 그들의 삶과 나의 삶을 비교하다니...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제 모습인 것 같다. 그만큼 제게 있어 인간의 존재감에 대한 질문이 가장 큰 숙제이자 소재가 되었다. 이 시대에 존재하는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며칠 후 탈북자들의 경로를 담은 다큐에서 영하 몇십도의 두만강을 맨몸으로 건너와 사시나무 떨듯 떠는 몸으로 그 다음 경로를 향해 비닐봉지에 있는 옷을 서둘러 추슬러 입는 탈북자의 떨림을 보며 그들을 그 상황까지 내몰아 버린 인간의 잔혹함, 동시에 자유를 향한 인간의 갈망이 얼마나 대단하고 경이로운 것인지 느꼈고 그 몸부림이 계속될 것이라는 강한 감동도 받았다. 이것을 어떻게 하면 신체적 공연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작품
베를린 생활은 어떤가?
“베를린이란 도시는 다양한 작업으로 접촉이 가능한 곳이다. 그래서 자극이 많다. 베를린 문화를 자주 접하려고 한다. 다른 문화 속에서 다른 생각으로 자란 많은 사람들과 스쳐 지나가고 각자의 삶과 가치관을 나눌 수 있는 이곳은 다양한 거울이 존재하며, 뭔가 가능한 도시라는 것, 그리고 개인의 희망을 이룰 수 있는 도시라는 느낌도 있다. 5년간 납세하면 영구 비자를 취득할 수 있다. 2011년 결혼하였는데, 남편에게서 현장 작업에 도움을 많이 받는다. 나의 작업을 이루기 위해 레지던시나 공연장 등의 면에서 나만의 네트워크를 확보하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이곳에 가족과 함께 있다면, 부족할 것이 없는 도시라고 표현해도 좋을 듯하다. 동시에 한국에 대한 그리움은 언제나 마음 깊은곳에 자리 하는 것 같다...사실 한국이 많이 그리울 때가 있다.”
남편은 어떤 사람인가?
“남편(B. Schäilke)은 한국 소설가 김영하씨 작품 <검은 꽃> 등을 인상깊게 읽는 등 한국 소설에 참 관심이 많다. 한국을 참 좋아한다. 남편을 통해 한국의 또 다른 면을 다시 보게 된다. 2008년 베를린 춤의 날(탄츠 타게) 페스티벌에서
한국에서 해외 진출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충고한다면...
“먼저 글로벌 시대라는 것을 잊지 말고 의사소통을 위한 언어 학습을 철저히 하는 것은 필수 중에 필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스스로의 자존감과 강한 의지,실패 속애서도 거뜬히 일어서겠다는 긍정적 마인드를 가지고 나온다면 누구에게든지 기회는 열려 있다. 고생길은 각오해야 할 것이고, 긍정적 마인드를 갖는 사람이 결실을 먼저 거둘 것이다.”
남민지씨는 스웨덴왕립발레단에 7년째 근무하는 세컨드 솔로이스트이다. 이번 3월 나탈리아 마카로바가 재안무하는 <지젤>에 출연하기 위해 연습에 여념이 없었다. 토요일 연습이 끝난 직후 인터뷰가 진행되었는데, 그날 인터뷰 직전에 발레단에서 이번 <지젤> 타이틀 주역으로 남민지씨가 선정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스웨덴왕립발레단은 단원 구성이 어떤가?
“전체 70명이다. 스웨덴인이 20% 남짓 되고, 한국, 중국, 일본 등 아시아권이 5명이고, 나머지는 유럽과 미국인들이다. 한국인인 전은선씨는 지금 휴직하고 있다.”
사실 이번에 전은선씨와 함께 두 사람을 함께 인터뷰할 예정이었는데, 휴직해서 아쉽다. 스웨덴왕립발레단 입단 경위를 소개해달라.
“예원학교 입학한 1학년 때 러시아 페름으로 가서 4년간 유학하고 막시모바에게서 배웠다. 이후 프리 드 로잔 콩쿨에 출전하고 뮌헨의 하인츠 보즐 발레 아카데미에 진학하여 3년간 공부하였다. 아카데미를 마치고 에센의 알토 테아터, 드레스덴국립발레단에서 단원으로 있다가 스웨덴왕립발레단에 입단하였다. 유럽 발레단에 관심이 많았었고, 오스트리아 비엔나와 스웨덴 중에서 선택해야 했을 때 이곳을 택하여 입단하였다.”
입단 후 어떤 과정을 거쳤는가?
“코르 드 발레로 입단하여 2, 3년마다 승급하였다. 출연작은 고전으로 <호두까기 인형>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오네긴>(올가역) 그리고 <라 바야데르> 등 일반적으로 알려진 거의 모든 작품에 출연하였다. 현대 발레로는 마츠 에크를 비롯하여 프리랜서 안무가인 사브리나 매튜스, 취리히 발레단의 크리스찬 슈포크, 그리고 닐스 크리스티 등등의 안무가들 작품에 출연하였다. 곧 있을 마츠 에크의 신작 <로미오와 줄리엣> 초연에도 출연할 예정이다.”
그런데 오늘 방금 <지젤> 주역으로 배정되었다는 통보를 받았지 않는가.
“그렇다. 3월말부터 1개월간 공연되는 <지젤>은 나탈리아 마카로바가 재안무한 작품이다.”
나탈리아 마카로바는 영국으로 망명한 러시아 발레리나로서 특히 50대 이상 무용인들에게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치 않는 국제적인 발레 안무가이기도 하다. <라 바야데르>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등 그녀의 안무작들은 충실한 버전으로도 이름이 높고 객원 안무가로도 유럽에서 매우 활발하게 활동해왔다. 마카로바는 아직 70대 초반이라 앞으로 활동할 여지가 많다. 마카로바를 발레 솜씨의 기준 잣대라 부르는 데는 그 만한 근거가 있다. 다시 말해 마카로바는 20세기 최고 앗솔루타 발레리나의 한사람으로 손꼽혀온 대단한 인물이다. 그런데 마카로바의 <지젤> 버전에 주역으로 발탁되었다니 축하할 일이다. 이번 출연이 주목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개인적으로 큰 성과를 내기 바란다. 그간에 스웨덴왕립발레단에 소속한 단원으로서 소감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전 발레를 새롭게 번안해내는 작업들에서 신선한 느낌을 받는다. 여기서는 아주 클래식한 것과 아주 모던한 것이 조화를 이룬다. 현대 발레 계통에서 유명한 마츠 에크, 스테인 셀리에스, 에마누엘 가츠, 마르코 격게 등 현대 안무가들과 작업을 수시로 한다. 그리고 전세계의 유명한 발레 마스터들로부터 클래스를 받으므로 만족스럽다.”
스웨덴왕립발레단은 1770년대에 창설되어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발레단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발레단의 재정이 좋은 편이어서 단원 생활도 만족스럽다. 그리고 단원을 배려하는 마음도 큰 편이다. 단원과의 평등한 관계를 구현하려고 노력하며 사소하게는 연습 토슈즈를 넉넉히 제공한다거나 출연 의상도 개성을 존중해 단원이 만족하도록 만든다. 복지 국가이니까 일반 복지에 따른 사회 보장도 좋은 편이다. 임신 출산 휴가도 그러하다. 다만 스웨덴 물가가 비싸다는 점은 발레단원뿐 아니라 예술인이라면 겪는 공통점이다. 어쩐 일인지 다른 분야 단원에 비해 발레단원의 임금이 약간 낮은 데 대해 불만이 있고, 노동조합에서 형평성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줄로 알고 있다. 단원 정년은 42살이고, 입단 후에는 3년에 걸쳐 1년씩 계약하다가 재계약 통보를 않거나 아니면 정년 종신 계약을 체결한다. 정년 후에는 물론 연금을 수령하고 발레 매스터로 활동할 수 있다.”
해외 진출을 예정하는 후배들에게 들려줄 말이 있다면
“한국 무용수들은 기량도 뛰어나고 용모도 그렇다. 유럽에서 수차례 오디션을 시도할 것, 그리고 어디서나 자기 의사를 적극 표명할 것을 권하고 싶다. 물론 언어 소통에서 원활해야 하는 것은 필수이므로, 어학 공부도 잘 하기 바란다.”
■ 인터뷰 휴기
이번 코리아 무브스의 스톡홀름 국제 포럼 행사에서 2월 20일 필자는 ‘Dance in Korea, Now and New Phases’를 주제로 발제할 예정이었다. 개인 사정상 2월 초순에 미리 출국하여 드레스덴과 베를린을 거쳐 스톡홀름으로 갔다. 그래서 이번 포럼 전에 드레스덴과 베를린에서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스톡홀름에서는 남민지씨의 연습 일정이 매우 빠듯하여 인터뷰 일정을 몇 차례 조정하였으나 사정이 어려워지다가 결국 필자가 스톡홀름 공항으로 떠나기 직전에 이뤄졌다.
이번 인터뷰에서도 나타나듯 한국 무용인의 해외 진출은 이미 기정사실화된 편이고 국내에서도 이에 대해 다각도의 대책을 세워야 할 때가 되었다. 단기 대책들도 필요한 한편, 장기적으로는 진출 가능성이 높은 유럽 지역을 염두에 두고 유럽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는 학습을 대학 시절부터, 심지어는 중고교 시절부터 제공해야 한다는 점이 피부로 느껴졌다. 그리고 당사자들이 한국 문화에 대한 식견을 갖추고 또한 유럽 현지에서 예술 측면에서 훨씬 능동적으로 대처할 능력을 기르는 작업을 기반으로 하여 유럽에서 단순한 기능인을 넘어 예술인으로서 입신하도록 비전을 세워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 개인의 해외 진출도 바람직한 일이지만, 이것이 한국(적인 것)의 해외 진출을 수반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이번 인터뷰 진행은 먼저 이메일을 수십 차례 주고 받으며 일정을 조정하였고, 이를 비디오 영상으로 녹취하고 셀프 카메라로 사진을 채집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노트북, 캠코더, 와이파이의 위력을 실감하는 시대이다.- 김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