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채현: 먼저 수상을 축하한다. 소감이 없을 수 없겠다.
김용걸: 12월 8일인가 한국춤비평가협회로부터 심야 메시지로 선정 결과를 통보받았는데,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상이라 사실은 너무 너무 놀랐다.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상을 바라고 만든 작품은 아니었어도, 대한민국발레축제에서 공연 기회를 얻은 것만 해도 감사했는데, 또 춤계에서 높이 평가하고 권위있다고들 하는 상까지 받게 되니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고 좀 난감하다.
김채현: 짐작컨대, 당사자뿐 아니라 춤계도 다소 의아스럽게 받아들였지 싶다. 그렇긴 해도, 이번 선정에 참석한 춤비협 회원들은 <Work 2>
김용걸: 음... 제가 가장 좋아했다.(웃음) 사실 기쁨은 훨씬 뒤에 찾아왔고, 솔직히 말해 우선 놀랬다. 이번 작품을 지난 여름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할 적에도 사람들이 좋아했지만, 개인적으로 발레가 대중들과 함께 하는 장르로서 자리를 굳혔으면 하는 마음이 있던 차에 수상하게 되어 발레가 더욱 그럴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얻게 되었다.
김채현: 그 꿈을 이루는 데 기여하기 바란다. 그리고 국고 예산이 투여되는 대한민국발레축제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이 미진한데, 이번 수상을 계기로 발레축제도 운영 면이나 이미지가 쇄신되고 힘을 받는다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럼, 김용걸댄스씨어터가 발표한 이번 수상작 제작 경위와 배경부터 소개해주기 바란다.
□ 고전적 틀의 현대적 확장 의도
김용걸: 2011년 6월 제1회 대한민국발레축제에서 <Work 1>
"오늘날 발레가 추구하는 양면성, 균형 있게 달성"
김채현: 한국춤비평가협회는 2012 작품상 선정 이유로 “발레의 엄정한 고적적인 틀의 수련과 아울러 고전적 틀의 현대적인 확장을 기해야 하는 현시점에서, 오늘날 발레가 추구하는 그러한 양면성을 발레 고유의 조화미와 발레 무용수의 주체적이면서도 생명력 충만한 춤 소화력을 균형 있게 달성하여 국내 발레 창작에서 쇄신된 계기를 제시하였다”고 밝혔다. 작품 <Work 1>
김용걸: 전자는 소극장에서 출연진 12명이 공연했고 후자는 25명이 출연했다. 발레 실기실 바를 천장에 달아올리는 점은 두 작품 모두 같았는데, 자유소극장에선 달아올리기가 더 좋았다. 바튼이 없는 극장이라 크레인으로 들어올리는 방법을 시도했다. 만약에 오페라극장에서 <Work 1>
김채현: 결과적으로 <Work 2>
김용걸: 전체적으로 보아, 여성들의 흡수력이 더 나았다. 두 작품이 클래식 발레를 축으로 하므로 클래식 발레 수련으로 무장되지 않은 사람일수록 소화해내기 힘들다. 동작을 포착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내는 데는 여성 출연진이 더 빠르다. 결과적으로 막상 무대에 서면 시각 면에서나 역동성에서 남성이 더 나았다. 그러나 제작 과정에서는 그런 차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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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레의 경계를 넘나들다
김채현: 역사 기록을 위해, 대한민국발레축제에서 지원받은 규모는 소개할 수 있겠는가?
김용걸: 각 1천만원이라는 적지 않은 금액을 지원받았다. 제 작품은 의상이나 장치 면에서 비용이 덜하였기에 좀 수월하였다. 다만 그 금액으로 오페라극장에서 올리기에는 다소 어려운 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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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발레 수련으로 무장되지 않은 사람은 소화하기 힘들다"
김채현: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건 바였다. <Work 2>
김용걸: 발레 무용수들이 바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는 뜻이 많이 개입하였다. 발레의 체계적 교육에서도 바는 정말 중요하다. 바는 매우 필요하지만 너무 의지해서도 곤란하다.
김채현: 바와 무용수의 관계를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김용걸: 그렇다. 바의 중요성을 환기해서 기본에 충실하자는 그런 뜻이 있었다. 그리고 천장에 매달았을 때 조성될 시각적 효과 자체가 궁금하였다. 지금 제 연구실에 있는 이 다섯 개 바가 장치로 쓰인 바였는데, 작품을 위해 오메가 모양으로 제작하였다.
김채현: 일반 바처럼 보이는데, 만져보니 보기보다 훨씬 가볍다. 작품 관람 시에 무거운 바가 언제까지 천장에 매달려 있을까 가슴 조이며 계속 주시했는데, 일반 바보다 훨씬 가볍다.
김용걸: 그 실제 무게를 모르는 관람객들로서는 아슬아슬했을 것이다. 극장 측에서 허용하는 하중에 훨씬 못 미쳤고 안전 사고도 없었다. 바닥에 별 모양으로 배치했는데, 들어올렸을 때 형상은 어떻게 될지, 스테인레스 재질이 갖는 차가움은 어떤 구실을 할지 궁금증들이 떠나지 않았다. 스테인레스 재질 바가 들어올려질 때 서로 부딪치는 탱탱 하는 소리도 중시하였다.
김채현: 그렇다. 그 소리가 음향 효과로서 한 구실 하였다고 본다. 그런 방법은 관객에게 새로운 긴장감과 기대감도 유발하고 또 연습을 다하고선 이제 공연이 본격 시작된다는 의미도 전달하였다. 발레의 유약하거나 이쁜 이미지를 탈피하는 데서도 바의 역할이 컸다. 바의 강인함이나 차가움이 느껴졌는데...
김용걸: 이런 특성은 발레의 베이식과도 통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바 자체가 발레의 베이식이니까 그것을 공중에 매달아놓고 발레의 베이식을 잠시 미루어놓기를 의도했다. 클래식 발레를 하더라도 클래식 세계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험이나 순간을 중시하였다. 프랑크푸르트 발레단 예술감독이었던 윌리엄 포사이드는 항상 발레의 틀을 깰 것을 주문한다. 오해 없길 바라지만, 가출해본 사람이 삶을 더 풍부하게 영위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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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의 베이식을 잠시 미루어놓기를 의도했다"
김채현: 성공하려면, 가출해야 하는가?(웃음) 개인적으로 가출 경험이 있는가?
김용걸: 없다.
김채현: 그렇다면, 혹시 학교를 자퇴할 생각은 없었는가?
김용걸: 있었다. 대학 4년이 너무 긴 듯해서 그런 상상을 해본 적은 있다. 가출은 아니더라도 해외로 얼른 나가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김채현: 탈출구를 찾고 있은 것으로 들린다.
김용걸: 그런데, 탈출구는 없었다.
□ 남성과 여성의 차이, 어디서 기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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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현: 작품 진행에서 <Work 1>
김용걸: 원래 해보고 싶었던 것이 <Work 2>
김채현: 그럼, 더 구체적으로 <Work 2>
김용걸: 시각적으로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해 막 오르기 전부터 바를 배치 노출시켰다. 그런 다음 바를 올리고 제가 학생에게처럼 발레 테크닉을 전수 지도하는 장면을 설정하였다. 이 작품이 추후 이런 움직임과 개념으로 전개될 것이라는 것을 관객들에게 예고하는 부분이라 하겠다. 이런 점에 관객이 동화될 즈음에 군무로써 이런 분위기를 확장하였다. 음향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나의 경우 음악이 처음 10초 사이에 매력적이지 않으면 작품을 수용하는 데 맥이 빠진다. 악곡의 순차적 배치가 서로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점에서 수백번 반복해서 듣고 손질했다. 이 군무가 끝나면서 사람들이 편히 앉아 관람하는 게 아니라 목을 앞으로 죽 내밀어 주시하는 그런 상황을 유도하였다. 아라베스크 동작도 그게 과연 보일지 의구심이 들도록 평상시보다 다른 어두운 환경을 조성하였다. 출연진도 그렇게 의구심을 갖고 움직이도록 의도하였다. 그런 의구심도 교육의 한 방편이라 생각한다. 그 다음 부분은 남녀 2인무 부분인데, 피아노를 두들기는 즉흥곡이고 출연자도 음악에 얽매이지 않도록 하였다. 작품 제작 과정에서 음악 없이 먼저 움직임을 짜서 연습했고, 나중에 음악은 음악대로 흘러가게 하며 움직이도록 하였다. 그 다음 <4계> 음악이 흐르는 부분에서 남녀 리프팅, 음향과 라인 효과 등등 이 작품의 모든 것을 물이 끓어오르는 상황처럼 보여주길 의도하였다. 그 다음 마지막 부분에서
김채현: 바이올린 현장 연주 부분이 실행되진 않았지만, 관심을 끄는 대목이다.
김용걸: 춤을 잘 알거나 익숙한 바이올리니스트와 협업 형태로 작업을 해보고 싶다. 일방적 연주가 아니라 출연진과 호흡을 맞추며 진행하는 그런 인터액티브 쌍방향 연주를 상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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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의 창조적 역동성 작동하다
김채현: 작품이 작품을 불러들이는, 작품에 작품이 꼬리를 무는, 작품이 작품을 낳는 그런 창작의 창조적 역동성이 계속 작동하기를 기대한다.
김용걸: <Work 2>
김채현: 이번 작품의 아쉬웠던 점을 얼마간 밝혔는데, 더 지적하고 싶은 점이 있는가.
김용걸: 남성 부분이 보강되어야 할 것이다. 여성들에 비해 남성 출연진들은 움직임이나 경계를 넘나드는 경험을 덜 한 듯하다. 남성들은 습득하는 데 시간이 더 오래 소요되었다. 여성들은 예정한 것보다 더 빠르게 소화해서 작품이 더 진전된 감도 있다. 또 하나 동작의 완성도나 숙지 면에서 보완했으면 한다. 삶의 연륜을 필요로 하기보다는, 동작이 힘들어 주저앉을 정도이고 또 폭발적 에너지를 요구하는 작품이므로 출연진들의 대개 20대 초반 나이는 적절하다고 본다. 다른 단체가 이 작품을 한다면 이번 같은 효과가 날지 의문이다. 이 작품은 표정이 아니라 온몸 전신으로 추어야 한다. 젊은 층의 도전적 의식이 힘든 동작과 에너지를 뒷받침하는 것 같다. 에너지 면에선 남성이 우월한데, 습득하는 데 시간이 걸려 애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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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이 작품을 불러들이는, 작품에 작품이 꼬리를 무는, 작품이 작품을 낳는..."
김채현: 말씀 듣고 보니 20대 남성 발레 무용수가 매우 중요하고 제대로 된 체계적 발레 교육도 중요하다는 지적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이 작품을 해외로 가져갈 의향은 없는가?
김용걸: 물론 있다. 해외에 아시아 쪽보다는 유럽 쪽에 가져 가고 싶다. 한국에서도 이런 유형의 발레를 소화하는 학생들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다. 이런 작품을 만들자면 포사이드 같은 안무자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언제까지 포사이드가 한국에 오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다. 이 작품을 두고 포사이드 스타일이라면 할 말은 없다. 왜냐하면 저 역시 그의 작품에 출연하면서 그에게서 많이 익히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김채현: 이 작품은 매우 현대적이다. 현대에 창작되었다 해서 현대적이라 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다. 현대성이 강하게 느껴진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현대춤(컨템퍼러리 댄스)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작품 전반에 깔려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 작품이나 이런 작업을 통해 발레의 지평을 넓히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다가온다. 이번 작품 같은 경향을 해낼 나라가 아시아권에선 있다고 보는가?
김용걸: 발레를 대하는 시선이 넓혀지면 좋겠고 이번 수상으로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아시아권에선 아마 중국은 시스템이 어느 정도 갖춰져서 좀 가능할 것으로 본다. 나로선 중국 사람들의 작품 스타일로서 <Work 2>
김채현: 클래식 발레를 잘 해내려면 이른바 현대 발레에 익숙해야 한다는 지적을 더 부연 설명해주었으면 한다.
김용걸: 우리가 사는 삶은 현대에 이뤄지는데, 일부 무용수는 이런 작품을 원치 않을지 몰라도 대다수는 공감한다고 본다. 비유컨대, 가출도 해보고 집으로 되돌아오면 집이 더 소중하게 느껴질 것이다. 발레 무용수들에게 많은 경험과 도전 의식이 요청되고 이를 위해 현대적 삶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김채현: 한국 학생들이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려 있는 것이 현상태라 이번 작품에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도 현대성을 더 호흡해야 할 것이다. 현대를 제대로 인식시키는 교육이 중요하다. 조금 말머리를 돌려, 이번 작품을 구상하게 된 애당초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창조적 카피로 연마하라
김용걸: 3년전 귀국한 이래 학생들 기량을 보고 이런 작품을 소화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량과 자기들이 하려는 욕구, 이 둘을 갖춘 무용수는 드문 편인데, 우리 학생들은 갖춘 것으로 보였다. 이전부터 이런 시스템을 일군 교수진에게 감사하는 마음이다. 저 말고 클래식 발레를 하는 분들이 있으니, 저는 조금 다른 각도로 하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스티브 잡스가 카피를 권장하였는데, 저는 잘 조합해서 적용해보는 작업이 가치가 있다고 보는 편이다. 우리 시대가 원하는 방식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제가 파리에서 접한 것을 모아 작업하는 것을 소중한 과정으로 생각하고 이번 작업에 임하였다.
김채현: 일견 당연하되 흥미로운 발상이다. 인간이 문화를, 인공적인 것을 접하는 첫 단계가 모방 아닌가. 말 배우는 것처럼... 명작을 모방해서 그 비결을 숙지하는 것은 고수준의 창작의 효율성을 위해서도 중시된다. 선별 섭취해야 하는 모방 단계에서 선별 없이 아무 것이나 닥치는 대로 우격다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 창의적이기 어렵다고 본다. 좋은 본을 받는다는 것, 좋은 작품을 많이 접해야 한다는 것은 이런 말일 것이다. 섣부른 창작은 밑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 없다. 그래서 인문 교양 학습을 강조하게 된다. 숙성된 사람만이 고도의 창작을 수행할 수 있다. 연습실에 오래 있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스스로 깨우치는 자율의 시간이 절대 필요하다. 개인적으로들 그런 시기를 놓치면 정말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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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접한 것을 모아 작업하는 것을 소중히 생각하고 작업에 임하였다"
김용걸: 다시 말하지만, 이번 작품을 두고 좀 부정적으로 포사이드 식이라고 지적한다면 물론 할 말이 없다. 그럼 이런 작품을 만들지 않는 당신은 과연 무슨 대안을 내놓는지 반문하고 싶다. 어쩌면 저는 제가 배우고 알은 것을 전달해야 하는 책임 의식으로 작품에 임했다.
김채현: 윌리엄 포사이드를 자주 거론하는데, 이제 그 쪽으로 대화를 옮겨보자.
김용걸: 파리 오페라 발레단에서 포사이드 작업을 접했다. 파리 오페라 발레단에서 그의 작품을 올릴 대, 대개 처음 두어달 동안에는 포사이드의 어시스턴트가 와서 동작을 지도한다. 지루하고 막막한 과정이 그렇게 이어지다가 공연 열흘쯤 전에 포사이드가 와서 직접 다듬는데, 무용수들의 반응은 열광적일 정도고 때로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무용수나 안무가나 모두 대단하다. 다만 훌륭한 안무에 못지 않게 그 안무를 어떻게 주입시키는가도 매우 중요할 것이다. 포사이드에게는 그런 카리스마가 있었다. 포사이드가 떠나고 나면 모두들 멍해진다. 그런 작업이 참으로 의미심장하였다.
□ 클래식에 현대성을 접목한 학습 체험 의미심장하다
김채현: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포사이드와의 만남을 더 자세히 소개해 달라.
김용걸: 그와 2005년도에 처음 작업하였는데, 포사이드 작업은 카운트가 매우 복잡하다. 유명한 단원 실비 기양이 포사이드에게 대놓고 “그 컴퓨터 좀 집어치워!”라고 고함을 지른 적도 있는데, 그 컴퓨터는 포사이드의 두뇌 회전을 말한다. 포사이드가 컴퓨터처럼 복잡하게 소개하면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굉장히 복잡하게 계산된 안무를 언뜻 받아들이기는 참 힘들다. 기양이 출연하지 않은 ‘포사이드의 밤’ 행사 마지막 작품에 30명 정도 출연하였는데, 무용수마다 다른 동작이고 그렇게 복잡하다. 이것을 어시스턴트가 두어달 지도한 후 공연이 임박해서 포사이드가 처음 나타났다. 그냥 보고 대충 되었다 하는 그런 반응이 아니었다. 그는 연습실에 처음 들어서자마자 대뜸 자기에게 동작을 해보이도록 요구했다. 그렇게 한 30초 했을까, 그가 양손을 번쩍 올려 손뼉을 탁탁 치며 “그만, 그만!” 하더니, 자기가 무용수였기 때문에 그런지 이전 연습 부분을 싹 무시하고 처음부터 새로 하기 시작했다. 연습에 임하던 출연진 모두들 정말이지 멍한 상태에 빠졌다. 그러면서 하나 하나 세부까지 다 잡아주는데, 우리들은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완전히 새로 하듯이 하면서도 설명을 곁들이니까 충분히 납득이 갔다. 자기가 사지를 쫙 벌려서 커다란 4각형을 만들고 사지 끝 마디들을 최대한 늘여가며 동작을 응용 개발하니까 이해되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의 신축성을 강조하는 그 리허설 작업을 겪고 그 다음날 워밍업을 하는데, 나 스스로 몸의 변화를 실감하게 되었다. 파리 오페라 발레단이 왜 그렇게 유연할까 항상 궁금했었는데, 이 일을 겪고나서 이해되었다. 다시 말해 다른 다양한 기법 또는 포사이드나 다른 사람들의 현대적 기법을 접목해서 쓰기 때문인 것으로 납득하게 되었다. 클래식 발레에 갇히지도 안주하지도 않은 때문이었다. 제가 스스로 변화를 맛보았고 또 좋았으므로 그 다음부턴 그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었다.
김채현: 작업 과정이 ‘힘겨운 신명’ 그 자체였을 것으로 상상된다. 그 후에도 그의 작업에 출연하였는가.
김용걸: 그렇다. 포사이드 작업의 좋은 점은 그 결과를 다른 작업에도 적극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확장성이 강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클래식 발레는 틀에 갇혀 있는데, 포사이드 작업 같은 것은 그것을 탈피하도록 유도하고 그 능력을 고양시킨다. 포사이드 스타일은 그 두 가지를 적절하게 갖춘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그가 1983년 파리 오페라 발레단에서 지도한 것을 시작으로 그 단원들은 그에게 퍽 익숙해 있었다. 그래도 언제나 그들은 또 뽑혀서 포사이드 작업을 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다. 다시 도전해볼 시간이 온다는 기대감이 크므로 다른 안무가 작품에 임하는 것과는 태도와 분위기가 아주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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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오페라 발레단이 왜 그렇게 유연한지 궁금했었는데,
현대적 기법 접목과 클래식 발레에 갇히지도 안주하지도 않은 때문이다"
김채현: 국내에서 포사이드가 더러 회자되지만, 포사이드를 본격 접촉한 사람은 매우 드물어, 김용걸씨의 체험은 나름 소중해 보인다. 그것이 국내에서 잘 접목되어 우리 것으로 발현되기를 기대한다. 그러려면 주체적 의식도 따라주어야 할 것으로 본다. 그런데, 유럽에선 컨템퍼러리 계열 춤을 발레단이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호의적인 줄로 아는데...
김용걸: 물론이다. 관객도 좋아하고, 발레단 입장에서도 저비용 고효율 형의 양식으로 이런 현대적 발레를 선호한다. 무용수들도 적극적이다. 현대 발레 흐름이 그런 쪽을 향하고 있다.
김채현: 이런 지적은 비단 발레뿐만 아니라 한국무용이나 현대무용 계열 무용가들에게도 중요해 보인다. 편식을 지양하고 다양한 영양소 섭취나 균형식을 위해 귀담아들을 부분이다. 특히 국내 국시립 무용단들은 이런 점을 더욱 경청하고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한다.
김용걸: 잘된 발레단에서는 먼저 무용수가 행복해 한다. 무용수들로 하여금 다양한 자양분을 제공하고 안주하지 않도록 하기 때문이다. 예정된 여러 작품에 대한 기대감으로 언제나 설레인다. 무대에 그런 행복감이 묻어 나오면 관객도 좋아하기 마련이다. 판에 박힌 작품만 하면 긴장감부터 떨어지고 단체도 수준이 처질 것이다.
김채현: 이 작품을 현대 발레나 현대춤으로 분류하는 데 대해 본인 생각은 어떤가.
김용걸: 발레 무용수를 위한 에튀드로 생각하고 만들었는데, 관객도 좋아하니 만족스럽다.
김용걸: 그러면서 외국에 나가 도전하고 싶었다. 국제 콩쿨 현장에서 그들을 만나보니 국제적 분위기를 좀 익히게 되었다. 밀레니엄 분위기도 있고 해서, 나가고 싶었다.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에 당시 국립의 최태지 단장과도 상의하였다. 그래도 고민이 많이 되었다. 국립에서 키워놓으니 나간다는 반응이 나오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지금도 국립발레단에 대해 더 잘 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게 있다. 파리 오페라 발레단에는 2000년 9월에 입단하였다. 서미숙 선생이 그 전에 2000년 1월에 견습 단원 오디션이 있으니 응시해보라는 제안을 전하였다. 안 될 줄 알았고, 실은 미국으로 가고 싶었다. 아무튼 5명을 뽑는데, 3등으로 합격했다. 견습 기간 동안 발레단의 시스템이나 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다. 스튜디오 홀이 대중소로 12개 있었다. 매달 바꿀 만큼 레퍼토리는 엄청났고, 대단한 단원들이 2백명이나 되는 데다가 그들과 아침마다 연습하고 배우고 느낄 수 있었으며, 또 기본 클래스는 아침마다 90분간 5개 있어 골라서 들어갈 수 있고, 클래식 발레 스타일도 매력적이었고, 다양한 스타일을 흡수할 수 있고, 또 사회 보장 제도도 철저하였다. 상해에 대비한 재해 보장도 잘 되어 있었다. 일례로 부상으로 역을 맡지 못해도 다른 단원으로 충원이 되므로 부담 없이 치료에 전념할 수 있었다. 여유 있는 환경에서 춤출 수 있다. 남이 다치면 자기가 대신 할 수 있으니까, 항상 준비된 태세로 임한다. 5개월 지난 그해 7월 1명만 뽑는 줄도 모르고 정단원 오디션에 합격하여 저만 뽑힌 줄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때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 42세 정년 때까지 있을 수 있는데, 9년간 근무하였다.
"잘된 발레단에서는 먼저 무용수가 행복해 한다.
다양한 자양분으로 무용수들이 안주하지 않도록 하기 때문이다"
김채현: 그때 정단원 입단은 국내 언론에도 보도된 것 같다. 정단원이 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김용걸: 견습 단원에 비해 군무진은 월급이 적다. 그리고 승급될수록 역할과 대우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말하자면 위계질서가 분명하며, 등급에 따라 배역이 정해진다. 매년 12월에 승급 오디션이 있다. 정단원 시절 저는 2005년, 2008년 두 번 승급하였다. 해외 투어 때도 솔리스트는 독방을 쓴다. 그래서 해외 투어 때 어머니를 모신 적도 있었다. 제가 퇴단하기 1년 전에 제 아내가 임신중에 와서 그곳 사회보장 혜택을 많이 받았다.
김채현: 파리 오페라 발레단을 그만 두고 한국엘 간다 했을 때, 분위기는 어떠했는가?
김용걸: 누구는 언젠가 갈 줄 알았다고 하더라, 외국인이니까. 그래도 왜 가야 하는지 이유가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축하하며 용기를 많이 주더라. 환송회도 받았고, 알렉산더 블랜드가 지은 <누레예프 이미지>(1976년 간행)라는 헌책에 단원들이 사인들을 해서 선물로 주었다. 중년의 나이였던 예술감독 브리지트 르페브르는 자기가 5년후 퇴직하는데, 같이 하자고 하더라. 그 사람은 나에게 예술가 대우를 잘 해주었다.
김채현: 파리 오페라 발레단에 2000년부터 9년 동안 있었는데, 한국에 올 생각은 하였는가?
김용걸: 사실 생각을 못 했다. 그전에 다리를 다쳐 쉴 때가 있었는데, 발레단 정년이 42세이니까 장래를 생각해보기는 했다. 그런데 무용원으로부터 그런 제안을 받고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파리 오페라 발레단에 있었을 때를 생각하면, 제가 당시 마음을 열고 더 많은 것을 수용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든다. 제가 좋아하고 끌리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던 적이 많았다. 결국은 파리 오페라 발레단을 떠날 때까지 마음을 활짝 열지 못했는데, 한국에 와서 비로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포사이드도 제가 좋아서 했을 따름이다. 아무튼 그 시절을 생각하면 아쉽고,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나의 솔직한 심정이자 충고이다.
김채현: 무용원에서 제안을 받았을 때, 무엇을 가르치겠다는 생각을 하였는가?
김용걸: 무용원 학생들 소식은 들었고 2005년, 2006년 제가 잠시 귀국했을 때 김선희 교수 의뢰로 무용원에서 특강도 했었다. 제가 특강 지도한 학생들은 졸업했을 것이고 해서 별도의 준비는 하지 않고 가서 지도하며 생각해 보려고 하였다.
김채현: 귀국한 이후 지금까지 3년 정도이니까 발표한 작품이 많지는 않다. 춘천아트페스티벌과 아르코예술극장 솔로이스트 이벤트 그리고 이번 작품과 지난 여름 발표한 <비애(愛)모> 등이 기억난다. 2011년 솔로이스트 공연에서는 007 숀 코너리 같은 차림으로 선글래스를 끼고 15분 정도 추었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을 액션 발레 그리고 발레 누아르라 칭한 바 있다. 2008년작이지 싶은데, 파리 오페라 발레단에서 제작한 피나 바우쉬 안무작 <오르페우스와 유리디체> DVD를 김용걸씨 출연작이라 여러 번 반복해서 보았다. 피나 바우쉬와 얽힌 인연도 있는가?
□ 너 자신을 추어내라
김용걸: 그 작품에 출연했을 때 바우쉬는 저에게 “케르베루스(저승 입구를 지키는 무서운 개)를 추지 말고 너를 추어라, 너를 추어낼 것으로 믿고 캐스팅했다”고 충고하였다. 그 말에 아차 싶었다. 다른 말은 필요 없다는 듯이 그 충고가 가장 인상적이었고 도움이 되었다. 그때 작품에 출연한 소프라노 성악가 쥴리아 클라이터가 커텐콜 때마다 나를 껴안아줄 정도로 연기가 확연히 달라졌다고 해서 바우쉬의 충고를 더 실감하게 되었다.
김채현: 바우쉬의 <오르페우스와 유리디체>는 역시 탄츠테아터를 발레에 적용하는 양식으로 펼쳐졌다. 여기에 성악가가 두 사람 출연했다. 한 사람은 한국인 임선애씨였다. 너를 표현하라는 말은 그 진폭이 매우 넓다. 그래서 같은 작품이라도, 같은 공연이라도 공연일이 다르거나 배역 출연이 다르면 보러가는 이유 또는 묘미가 될 것이다. 파리 오페라 발레단에서 접촉한 다른 대가(大家) 무용가들이 더 있었을 것 같다.
김용걸: 제가 출연한 것은 아니나 안무 과정을 옆에서 지켜볼 기회가 많았다. 마츠 에크, 트리샤 브라운, 이리 킬리안이 생각난다. 마츠 에크는 몸 언어가 일상 언어와 매우 유사했는데 굉장히 직접적인 묘사의 안무를 하더라. 트리샤 브라운은 실험 정신이 두드러졌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자기 길로 가는 정신이 뚜렷했고 음악도 프로코피에프 것을 쓰지 않았다. 줄리엣 무덤도 자갈로 몸을 덮고 얼굴만 나오게 하였다. 이리 킬리안은 에투왈, 1급에서 선호하는 무용수가 있다. 꽉 차 있는 사람으로서, 그 사람 자체가 한 권의 철학책으로 느껴졌다. 그가 선정하는 음악, 동작, 조명 등 이미지는 그만의 것인데, 나에겐 일종의 충격이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의 작품을 보며 클래식 발레를 한 나 자신의 한계를 느껴 나는 그동안 무엇을 했었는지 자탄(自嘆)에 빠졌다. 푸에테를 더 돌며 그토록 자만에 빠진 나를 완전히 되돌아보게 한 분이 그 사람이었다. 나 스스로 너무 속이 상했다. 끊은 담배를 나도 모르게 다시 물어본 것도 그 순간이었다. 그 후로 파리 오페라 발레단 단원들이 솔직히 말해 더 대단하고 위대해 보였다. 나도 저들처럼 되려면 참으로 갈고 닦아야 한다고 스스로 또 자극을 많이 주었다. 그러면서 또 누레예프의 많은 안무작에서 안무에 대해 경험과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 발레단은 매일 매일 나에게 자극을 주는 곳이었다. 과장되게 들릴지 몰라도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 날마다 깨우치고 놀래고... 그랬다.
김채현: 지금 어머니는 어떤 소감이신가? 형제들은 발레에 대해 관심이 어느 정도인가?
김용걸: 형제들은 발레를 성원한다. 막내동생은 발레를 좀 하다가 그만두었다. 어머니는 비교적 잘 따라주어 고맙다고 하신다. 되돌아보면, 어머니 나름 욕심도 상당했던 것 같다. 중학교 체육 시간에 많은 학생들 앞에서 발레를 해보라든지 친한 아이들마저 발레 한다고 놀릴 때 상처도 더러 받았다. 이제는 다 추억이다. 그런데 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보며 나 자신을 다시 보게 되었다. 빌리처럼 나는 발레를 순수한 마음으로 하고 있는가, 빌리가 오디션장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로서 춤을 추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나르는 느낌이라 했는데, 나는 과연 저런가 하는 것이다. 남들이 박수 치니까 좋고 잘 보이기 위해 춤추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빌리가 크게 들어왔다.
김채현: 부인도 무용가이신데, 어떤 조화나 갈등이 있을 듯하다.
김용걸: 같은 무용가이니까 무용가의 심리와 특성을 너무 잘 알아서 오히려 곤란하다고 할까 그런 점이 없지 않다. 몰랐으면 하는데 상대방이 알아차릴 때 당혹스러워지는 그런 면도 있다. 반면에 너무 잘 아니까 오히려 빨리 이해하고 수용하며 소화하는 장점도 대단하다. 지난 여름 <비애모>에서 그런 점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새벽에 벌떡 일어나서 옆에 자는 사람을 깨워 안무를 해보는데, 부부 사이가 아니라면 상상도 못할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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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색깔과 정체성 찾기
김채현: 앞으로 꼭 해보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김용걸: 송구스런 말이지만, 내가 속한 곳만의 것을 하고 싶다. 단체의 정체성을 담은 작품이었으면 한다. 누레예프가 안무한 <호두까기 인형>과 <라 바야데르>는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정체성을 대변한다. 저는 로열티를 지불하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것을 하고 싶다. 지난 여름의 <비애모>는 파리 오페라 발레단 시절 출연한 <오르페우스와 유리디체>의 한국 버전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 예전에 파리 한국문화원에서 연 원일 교수 팀 연주회엘 갔었는데, 그때 한국 구음과 악기 소리가 그렇게 멋진 줄을 처음 알았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비애모>를 만들었는데, 우리가 준비한 만큼 충분히 투여되지 않아 아쉽다. 다음에 다시 기회를 가지려고 한다. 아무튼 저의 정체성, 단체의 정체성을 완성도 높게 드러낸다면 재해석이라도 얼마든지 좋다고 본다. 아마 고생도 많이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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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에 새 지평이 열리는 이 시대를 호흡하는 사람은 많을수록 좋다"
김채현: 2011년 솔로이스트 이벤트에 출품한 작품으로 제가 액션 발레, 발레누아르로 지칭한 <그 무엇을 위하여...>는 김용걸의 지금 정체성을 짐작케 하고 또 돋보이는 발레였다.
김용걸: 안무를 맡은 김보람씨와 많이 구상하였다. 일단 새로운 것을 공연하기로 하고 제작을 진행했는데, 15분 공연을 위해 4개월이 소요되었다. 특히 클래식 발레를 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2011년에 처음 했을 때는, 멋있게 하려고 했다. 2012년 재공연 때는 몸이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파리에서의 생활이 기억났다. 선글래스를 착용하고 한 공연이라 무대가 잘 보이지 않는다. 비상구의 불빛 하나가 아련히 들어와 그것을 주시하며 빠른 움직임들을 연속시켰다. 파리 생활이 연상되면서 뭔가 도전하는 마음으로 저의 삶을 빠르게 반추하는 그런 순간이었다. 15분 공연이 끝났으나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계속 누워 있고 싶었다.
김채현: 해외에서 뚜렷하고 국내에서도 그런 기운이 감도는데, 근원적으로 발레에 새 지평이 열리고 있는 시대이다. 이 시대를 잘 호흡하는 사람은 많을수록 좋다. 김용걸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리고 말을 다양하게 할 수 있는, 뭔가 깊이 논할 수 있는 작품을 제대로 만나는 것은 비평가의 기쁨 가운데서도 매우 크다. 작품이 논할 거리가 되면 그 창작자의 신변 잡사도 작품과 작가의 세계를 상당히 뒷받침하는 참고 소재가 된다. 더욱 정진해서 비평가와 관객에게 기쁨을 꾸준히 선사하기를 기대하겠다. 물론 자신이 가진 것을 한국 토양에서 적절히 구현하는 것도 해낼 것으로 믿는다. 오늘 인터뷰 감사드리고,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린다.
김용걸: 남자가 클래식 발레를 한다면 동키호테나 왕자부터 연상하는 게 세태인데, 그 통념을 바꾸는 역할을 하고 싶다. 저는 아직 젊고 도전적이다. 나 혼자만 그런 생각을 하는가 했는데, 이번에 <Work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