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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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시
- 2024. 09. 24.(화) 13:30 ~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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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소
- 예술가의집(서울 대학로)
인터뷰이│ 안애순
지난 9월 24일 오후에 있은 춤작가 안애순 초빙 비평시각 심층 공개 인터뷰, 예술가의집, 서울 대학로, 한국춤비평가협회 주최 ⓒ춤웹진 |
주요작 코멘트
김채현: 이제부터 영상을 보며 코멘트를 듣는 시간을 갖겠습니다.안애순: 먼저 보시고 제가 조금씩 설명을 붙이겠습니다. 지금 영상은 〈여백〉입니다.
이지현: 뒤에 있는 장치는 뭔가요?
안애순: 신선희 선생님이 만드신 조각보입니다. 이지현: 지금 음악은 불경 같은 건가요?
안애순: 네, 김영동 선생님 음악입니다.
장광열: 그 당시에 이 의상이 굉장히 파격적이었어요.
안애순: 완전 파격적이었죠.
이지현: 특별히 저런 파격적인 의상으로 구상을 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안애순: 지금 보시면 입에 하얀 종이를 물고 있는데 우리나라 장례 문화 중에 입에 종이를 물고 진행하는 의식이 있습니다.
안애순 〈여백〉, 1994 ⓒ안애순 |
이지현: 저 때 무용수들은 누구였나요?
안애순: 이윤경, 박소정, 최혜정, 김양선, 이연수, 장은정, 김희진, 최유정 등 너무 많죠. 이제는 〈11번째 그림자〉입니다. 저기 맨 처음에 할 때 하얀 저 부분에 저 당시에는 악기가 있었어요. 나중에 재공연했을 때는 이제 앞에 악기를 없앴습니다. 근데 육완순 선생님이 악기 없앴다고 너무 서운하셨어요.
장광열: 저 그림자가 무대 뒤에서 이제 플레이어들이 하는 거죠.
안애순: 제가 그때 당시에 저 뒤에 있는 우주를 만드는 저 목각인형의 힌트를 얻으면서 이런 움직임들이 만들어졌고 사실 그때부터 약간 허튼춤, 그러니까 꼭 춤의 어떤 선이나 모양을 만들지 않는 그런 거를 생각하면서 동작들을 많이 풀었죠.
이지현: 바닥에 뭘 깐 건가요?
안애순: 사각입니다. 저 뒤에 스크린에 있는 것들, 그 안에 이제 사람들이 있는 것이지만 같은 세상 안에 있는 겁니다.
안애순 〈11번째 그림자〉, 1998 ⓒ안애순 |
김채현: 다음은 〈불쌍〉입니다.
안애순: 이 영상은 국립현대무용단에 와서 다시 공연한 거고 이 작품 처음 제작은 LG아트센터에서 했습니다.
김채현: 지금도 최정화 씨가 바구니를 많이 쓰시나요? 저 당시에 비닐, 바구니를 많이 쓰면서 야하게 천박하게 그렇게 그 시절에 B급 문화를 도입했죠. 최정화 씨한테 먼저 연락하셨나요? 아니면 최정화 씨가 연락하셨나요?
안애순: 제가 연락했습니다.
이지현: 저 뒷벽의 재질은 어떤 건가요?
안애순: 저게 플라스틱입니다. 사실 플라스틱 자체로도 오목하게 이 불상이 그려졌고 지금은 노골적으로 이제 그 위에 영상이 바로 보입니다. 이제는 〈이미 아직〉으로 국립현대무용단에서 나온 거고 박민희의 정가가 나오는 거죠. 이것이 프랑스 국립무용극장 샤이오 극장에 초대돼서 공연됐던 작품이에요. 제일 어려운 장면이네요. 짧은 눈 깜빡할 사이에 우리에게 함께 공존한다라는 삶과 죽음의 그 경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했던 것이고 20여 분 동안 그 남자분들이 거의 광기에 어리게 소진되는 몸, 그러니까 마지막 몸을 버리고 떠나는 그 장면이 맨 처음에 나왔던 것 같아요. 그 부분에서 사실 마지막 20분에 춤을 추고 몸을 버리고 나가는 게 누드로 보였으면 했었는데 결국 한국에서는 못하고 샤이오극장에서는 성공적으로 전라의 몸으로 했습니다.
안애순 〈불쌍〉, 2014 ⓒ안애순 |
김채현: 지금 이제 보고 있는 게 〈히어 데어〉입니다.
안애순: 이게 아마 거의 19명이었던 거 같은데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많은 여자들과 했고, 국악원에서 했던 강강술래의 패턴을 가지고 했던 작업에서 좀 더 발전시킨 작품입니다. 근데 작품은 많이 달라요. 여기에서도 무용수들이 스스로 장난을 치는 것이 나오는데 이거는 제가 안애순무용단에 있으면서 김기영 선생님이라는 분하고 작업할 때 무용수들이 퍼커션을 스스로 몸, 세트, 바닥에도 했던 그런 과정들이 있죠.
이건 〈척〉이라는 작품이고 처음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했던 작업인데 올해에 영국의 더 플레이스랑 맨체스터에 가서 공연했는데 무용수들이 대폭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뀐 상태로 했습니다. 이때는 아마 사람이 많았던 걸로 압니다.
김채현: 이 작품은 어디에 초점을 둔 거죠?
안애순: 척이라는 게 옛날 중국에서부터 단위가 없었을 때 하는 건데, 남들이 뭐라고 규정짓는 것이 아닌 것들을 몸에서 찾고자 해서 수량 혹은 교량이 되는 어떤 그 계산적인 단위가 아니고, 또 이성적인 몸으로 읽는 것과 다른 것을 몸에서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게 〈몸쓰다〉로 사실 이 작품은 토월극장의 무대 공간 이동을 굉장히 마음껏 플로우를 하면서 했던 작업이었습니다. 〈몸쓰다〉의 첫 버전이었던 것 같아요. 근데 이때가 코로나 시기여서 무용수들도 코로나에 많이 걸리고 공연 직전까지 아슬아슬했던 그런 상황에서 진행됐습니다.
안애순 〈행 +-〉, 2024 ⓒ국립무용단 |
안애순: 여러분들이 보신 〈행+-〉 작품이네요.
이지현: 기자들이 쓴 글에 보면 다 EDM이라고 쓰던데 EDM이라고 생각하시고 음악을 준비하셨나요?
안애순: 네, 그렇게 작곡가한테 요청했습니다.
장광열: 국립현대무용단의 고참 단원들은 저런 움직임이 안 될 거 같은데 어떻게 하세요?
안애순: 그래서 2장에는 고참 몇 분들은 좀 빠지신 분들이 있죠. 그리고 장현수 씨나 김미희 씨 이런 분들은 다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무용수분들이 짧은 순간에 굉장히 노력을 많이 해주셨고 심한 근육통과 부상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대에 잘 올라와 주셨습니다. 참고로 우리 박진영 씨가 지금 보시는 작품들 편집을 도와주셨고 감사합니다. 이번 작업에 어른들도 어른들의 몫을 해줬고 이 젊은 단원들, 신단원이라는 친구들이 워크숍부터 제일 많이 참여하면서 또 그들이 개인적인 자기 몸을 처음으로 주인공처럼 무대에 세우면서 구세대와 신세대들의 의미 있는 만남을 적절하게 배치하려고 했습니다. 이 음악을 하신 분이 무용 음악을 하시고 20년 동안 도망가셨다가 이번에 다시 오셨고 요즘은 영화 음악가로 유명하신 분이에요.
장광열: 객원 안무가를 쓰게 되면 사실 묻혀 있던 다른 무용수들의 개성이나 이런 것들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굉장히 긍정적인 면이 있죠.
안애순: 김종석이라는 분이 저랑 오랫동안 몇십 년 작업을 해온 세트 디자이너이고, 요즘 조명은 이제 후지모토 다카유리와 거의 한 10년 가까이 진행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채현: 선생님, 계속되는 이야기입니다만 〈11번째 그림자〉 〈불쌍〉 〈정한수〉 등등 한국의 민속이라든지 전통 그런 것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동기가 무엇인가요?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안애순: 아까 말씀드렸듯이 꼭 전통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종교 문화가 되었든, 제례 문화든 , 장례 문화 이런 것들이 다 형체성을 가진 하나의 문화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때문에 전통 현대라고 봤던 것 같습니다. 음악이나 움직임에서도 굉장히 미니멀하다고 제가 얘기를 했던 것 같아요. ‘왜 반야심경과 같은 음악을 쓰는가’에 대해서 그 모던한 것이 우리 전통 안에 있다고 봤습니다.
안애순, 김채현, 장광열, 이지현 ⓒ춤웹진 |
김채현: 80년대 초 대학 졸업 이후 적극 활동을 시작합니다. 대학 시절에도 우리 한국적인 것에 관심이 있었나요?
안애순: 제가 원래 한국무용을 전공하려고 했습니다. 저희 때는 전공이 따로 없이 입학할 때 발레, 현대무용, 한국무용 세 가지를 다 해야 했고 2학년 이후에 자기 전공을 정했어요. 그때는 현대무용은 굉장히 크고 씩씩한 사람들이 해야 하는 걸로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냥 한국무용을 하려고 했는데 2학년 이후에 육완순 선생님께서 현대무용을 해보지 않겠냐고 권유하셔서 시작하게 된 거죠. 그리고 당시에 어른들의 작품도 그렇고 대다수 작품이 한국적인 것을 풀어낸 것이 많았습니다.
김채현: 이제 조금 다른 질문입니다. 협력 아티스트들이 좀 있었는데 그 부분에 대해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작업하다 보면 자연적으로 그분들하고 협력 관계가 되었을 텐데 기억할 만하고 인상에 남는 경우가 있을까요?
안애순: 제가 작품 형식을 좀 바꾸거나 고민하고 있을 때 새로운 사람이 제 작업에 많은 도움을 줬다고 생각합니다. 한번 생각을 해봤습니다. 아까 〈여백〉과 제가 상을 받았던 작품도 그렇고 신선희 선생님이라는 분이 공연계에서 저의 춤이 만나지는데 도움을 주셨고, 김종석 씨는 지금 50이 넘었는데 본인이 28살일 때부터 지금까지 쭉 하고 있고, 최정화 씨도 같이 했었고, 문훈 씨는 건축적으로 고정적인 건축을 안 하고 놀이로 생각하는 철학을 가지고 있는 건축가로 한 번 같이 했고, 근래에는 권오상 씨라는 미술을 하시는 분하고 했고, 또 의상 같은 경우는 선미수 씨, 그리고 임선옥 선생님이 많이 하셨고, 임선열 씨, 찰리킴 씨와도 했습니다. 다른 분들도 계시지만 그런 큰 어른들이 같이 참여해 주셨습니다. 또 춤을 좋아하는 오랜 파트너인 김지훈 감독이나 이지나 씨가 있고 박찬경 씨랑은 〈공일차원〉이라는 작품을 했고, 김상수 씨의 영화에서도 같이 한번 해본 적이 있고, 김명곤 씨, 김광모 연출가와도 작업을 했습니다. 윤호진 씨와는 소치 올림픽이었지만 함께 한 적이 있고, 그다음에 음악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김기영 선생, 장현규 선생, 피정훈 선생, 이태원 선생, 또 이시우 작곡가라는 분이 뮤지컬 할 때 있었습니다. 〈행+-〉에 작업한 김용진 씨도 있고, 해파리의 박민희 씨와도 작업했고, 또 중요한 중간에 달파란 고구마 권병준 씨하고 달파란 씨와도 함께 했습니다. 그래서 한 시대에 각 장르의 큰 분들과 작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김채현: 통상적으로 함께 작업을 하는데 다른 분들과는 좀 다른 게 필요했다든지 특별히 소개할 만한 작업 방식이 있으실까요?
안애순: 일단 아까 음악을 하시는 김기영 선생님이 6~7년 동안 공연 내내 무용수들에게 거의 모든 음악을 스스로 만들도록 하셨던 게 좀 강력합니다.
이지현: 저는 개인적으로 김지운 감독님하고 작업하시면서 어떤 도움을 받거나 혹은 어떤 초점을 가지고 작업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안애순: 가끔 드라마트루기처럼 작업을 하면서 〈어린 왕자〉 같은 작품이 있고, 그리고 이번에 〈몸쓰다〉의 필름 작업을 영화적으로 풀기도 했습니다. 아직 그분이 무용을 굉장히 어려워함에도 불구하고 이번 〈행+-〉공연을 보시면서도 그렇고 무대와 몸에 관한 관심이 많습니다. 또 요즘 영화는 이 편집 기술이 가장 중대한 부분인데 2장에서의 영화적 기법의 편집 같은 부분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장광열: 국립현대무용단에서 예술감독으로 있을 때 안무 작업 외에 교육적 프로그램을 확장한 주역이 안애순 감독입니다. 그리고 또 예산도 많이 확충했었고 아까 〈S는 P다〉를 포함해서 인큐베이팅 랩을 해서 우리 무용 환경 안에서 젊은 안무가들한테 작업 기회를 마련해 준 그런 것들도 안애순 감독의 공으로 꼽고 싶습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안애순 감독이 국제공연예술제 예술감독을 맡고 아르코예술극장을 무용 전용 극장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했다는 거예요. 제가 서두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그래서 안애순을 안무가로서만 바라보는 시각은 좀 편협하다고 보는 겁니다. 우리 무용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제도적인 면에서 했던 노력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 함께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 더 질문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지금 국립현대무용단이 10년이 훨씬 넘었고 남정호 감독이 부임 후 첫 작품을 안애순 감독한테 맡겼습니다. 국립현대무용단이 지금의 프로젝트 무용단 체제로, 과연 국제무대에서 경쟁력 있는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용수로서 안애순을 본 지가 굉장히 오래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본인의 춤을 출 그런 기회는 없을까? 얼마전 국립무용단의 작품을 안무하고 마지막 커튼콜 때 보여준 건 본인의 춤이라고 보기 힘들잖아요. 국립무용단 단원들이 보면서 굉장히 즐거워했습니다. 옛날 〈뿌리〉에서 봤던 무용수 안애순의 강렬한 인상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혹시 무용수로서 무대에 서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는지요?
안애순: 무용수로서 마지막에 선 것은 제가 40대 때였던 거 같아요. 근데 저는 젊었을 때부터 작업하면서 안무자로 참여할 때는 절대 출연하지 않았어요. 무대에서는 무용수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옛날에는 무용가를 대표하는 말이 무용수였습니다. 안무가에 대한 조명이 좀 더 관리되기 시작한 건 제가 프랑스 바뇰레국제안무대회에 나가면서부터였고 그러면서 좀 흥분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어린 나이부터 저는 안무가일 때는 출연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서울예술단 작업의 무대에 제가 잠시 섰던 게 마지막이었던 것 같습니다. 더 늦기 전에 무대를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간혹 튀어나오는 것도 있지만 제가 약간 무대 공포증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가장 못하는 게 커튼콜이에요. 그래서 옛날에 어른들이 저한테 그렇게 인사하려면 나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도 〈행 +-〉할 때 나왔다가 들어가는데 제가 굽 있는 걸 신고 나갔더니 다른 무용수가 선생님 좀 천천히 나가달라고 넘어지실까 봐 아주 불안했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민망하고 막 부끄럽기도 하고 하여튼 제가 무대에 서는 체질은 좀 아닌 것 같아서 저도 그건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일단은 없습니다.
그리고 국립현대무용단은 저는 제작 프로덕션으로 가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이 들어요. 예술감독도 매번 바뀌고 다양한 프로젝트들을 많이 만드는데 사실 제가 할 때 제가 쓰고 싶은 무용수랑 다른 분이 쓰고 싶은 무용수들이 정말 다르거든요. 그랬을 때 다양한 사람과 만나야 하고 거꾸로 이제 단원이 있는 경우에는 안무가가 그 사람을 한정하게 되고 그 사람의 한계도 피로도도 굉장히 높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작품의 다양성이 필요하고 젊은 무용가들이 조금 더 다양한 다른 파트너들을 만나서 작업해 보는 그런 경험들, 그리고 열린 일자리 이런 것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다음에 아까 랩 사업을 말씀하셨는데 저는 사실 국립현대무용단은 전체 현장을 좀 진단하고 그 좋은 예술가들로 하여금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랬을 때 단발적으로 극장과 함께 예산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조금 더 연구하는 시간을 갖고 동시대에 좋은 파트너들, 자기들의 이야기들을 좀 더 나눌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엮어주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그래서 그런 랩 사업이 지금 사라진 것이 좀 아쉽군요. 그리고 우리가 공연을 반짝 한 두 달 무용수를 만나서 하는데, 이런 일들은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본인들도 안무가로서 굉장히 오래 생각하고 확신을 갖고, 또 무용수들과 오랜 기간에 걸쳐서 만나는 기회들이 있어서 작업이 돼야 맞다고 생각합니다. 거의 뭐 그냥 몸을 소진하려고 그러는지 요즘 알바처럼 하는 경우도 굉장히 많습니다. 그렇게 돈벌기 위해서, 또 작업하기 위해서 너무 그냥 가다 보면 연구하고 충분히 대화하는 시간을 갖지 못하고 그 작업에 대한 몰입도가 낮아집니다. 그런 부분들이 우려되는데 과연 좋은 제작 환경이라는 게 무엇일지 생각했을 때 그런 고민을 어디선가는 풀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랩 사업을 제가 한팩에서부터 했는데 거기에 황수현, 권령은, 나영욱, 김보라, 지경민, 금배섭, 김재승, 장혜림, 최종윤, 또 그 뒤에 다른 친구들이 이민경, 강진환, 김이슬, 송주원, 이은경 등 다 있지만 그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본인들의 작업이 된 게 아니고 오랫동안 시스템 안에서 연구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본인 작업으로 갈 수 있지 않았나 합니다.
저는 50대 이후로 제가 제 개인 무용단을 가지고 작업했던 데서 한팩에 오면서부터 내가 이 현장에서 어른으로 조금 더 무용계의 목소리와 또 젊은 세대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다른 것을 동원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게 저한테는 랩 사업이었던 것 같고, 또 그 랩 사업을 통해서 그들과 만나면서 저도 그들의 생각이나 예술 세계 이런 것들을 보게 되고 영향을 받으면서 같이 무엇인가 할 수 있을 때, 저도 젊어지고 제 작품도 달라지고 이런 현상들이 일어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국립현대무용단뿐만 아니라 많은 데서 조금 더 다양한 사람들한테 문이 열렸으면 좋겠고 서로 자유롭게 피드백할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이 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김채현: 두어 질문에 대해 간략히 답을 듣고 객석에도 기회를 드리려고 합니다. 이화여대 출신으로서 현대무용 선배들이 많단 말이죠. 한국현대무용진흥회로 대변되는 선후배와의 어떤 연계된 활동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죠. 과거에 국제현대무용제(모다페)에 몇 번 출연한 거 외에 또 어떤 게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생각 내지는 희망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안애순: 육완순 선생님이 한국현대무용진흥회를 하셔서 제가 제자로서 함께 기여하고자 한 멤버이기도 했는데 그 당시에 저는 독립무용가로 굉장히 힘들게 활동하고 있을 때라서 젊은 나이에 적극 함께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까 행정가를 말씀하셨지만, 행정적인 부분들은 50대 이후에 좀 관심이 있었고 그래서 육 선생님과 관련된 일을 어릴 때 조금 도모하거나 작업에 참여하거나 한 거 외에는 저는 독립무용가로 쭉 무용단 활동을 진행해 왔던 거 같아요.
그리고 앞으로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육 선생님이 하시던 한국현대무용진흥회를 양정수 선생님이 맡았고 SCF 서울국제안무페스티벌을 하고 있는데, 육 선생님이 마지막 돌아가시기 한 3주 전에 저랑 만나서 이런저런 말씀을 하시다가 SCF를 언급하시면서 너에게 정말 고맙다고 하셨어요. 그 의미는 바뇰레국제안무대회에 육 선생님께서 애플리케이션을 주셔서 처음 나가게 됐고 제가 나간 1992년 이후에 선생님이 SCF 플랫폼을 시작하셨습니다. 몇십 년 동안 바뇰레안무가대회의 한국 지부로 그 플랫폼을 오래 유지하셨는데 그곳의 예술감독이 바뀌면서 바뇰레라는 이름은 못 쓰게 해서 없애고 선생님이 바꾸신 게 SCF 서울국제안무페스티벌이 됐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육 선생님이 남겨놓으신 큰 좋은 사업인 게 해외에 있는 많은 디렉터나 극장 사람들을 불러서 젊은 사람들의 작품을 공모해서 해외로 진출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많습니다. 저는 그것을 잘 이어받고 싶고 그래서 부분적으로라도 조금 더 관심 있게 보려고 합니다.
김채현: 그럼 SICF에 어떻게 관계를 하고 있습니까?
안애순: 한국현대무용진흥회의 전체적인 다른 사업은 아니고 SICF만 예술감독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직접 관계하는 일은 없습니다.
김채현: 자, 마지막 질문입니다. 80년대 초부터 뮤지컬 안무를 많이 하셨습니다. 어떤 해는 보니까 두세 편에서 서너 편 하셨고 2010년 이전까지 근 20여 년간 뮤지컬 안무 경험이 굉장히 많은데 그게 본인의 작품 내지는 작업과 연계해서 영향이 있었을까요?
안애순: 제가 대학교 4학년 졸업할 때쯤 우연히 안신희 선생님의 작업에 조안무로 갔다가 너무 바쁘셨을 때니까 어린 나이에 대타를 하면서 시작했고 근데 그분들도 재능을 인정해 주면서 계속 뮤지컬을 하게 됐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다른 장르의 분들이 작업하는 방식을 접하고 그분들과 또 좋은 네트워크를 맺는 것 자체가 좀 즐거움이었고 약간의 휴식이기도 했고 또 무용하는 사람으로서의 부업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뮤지컬 어워드를 세 번 받았습니다. 우리나라 뮤지컬 처음 시작할 때 저의 기여도라 그럴까요? 하여튼 뮤지컬보다는 창작 쪽의 예술단, 창작가무단 작업을 많이 했던 것 같은데 어쩌면 제가 좀 다양한 분들과 계속 작업할 수 있는 호기심이랄까, 예술가로서 다른 장르에 대한 호기심 이런 것들이 거기에서 많이 나왔던 것 같습니다. 사실 뮤지컬을 한다고 하니까 많은 분이 안애순은 결혼식의 작품을 할 것이야, 영향받을 거이야라고들 했는데 사실은 그걸 하면서도 한 번도 영향받은 적은 거꾸로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장르로의 재밌는 방문, 반전의 방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김채현: 근데 지금 뮤지컬 붐을 생각하면 오히려 뮤지컬 쪽에 계속 계셨으면 많은 돈을 벌지 않으셨을까요?
안애순: 그랬을까요? 근데 초반에도 그렇지만 점점 더 큰 브로드웨이의 뮤지컬들이 많이 들어왔는데 결국은 훈련장 비슷하게 이미 안무가 되어 있어서 제가 창작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었어요. 근데 제가 갈구하는 것은 시립극단 같은 곳에서 창작 뮤지컬이라는 형태로 하고 있을 때 창작이라는 말은 우리의 작업으로 된 걸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뮤지컬에서 저는 무형의 안무가로서 작가로서의 어떤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에서 계속 저를 끌어내리고 몸을 쓰는 것에서 아주 최소한의 일부분의 역할로서만 안무했어야 하기 때문에 제가 작가로서 연출하고 안무할 수 있는 그런 무대가 저한테 더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뮤지컬 무대를 떠났습니다.
ⓒ춤웹진 |
아카이빙의 절대 중요성
김채현: 이제 잠시 객석으로 마이크를 돌려보겠습니다. 혹시 안 선생님께 궁금한 점, 다른 의견, 확인 사항이 있으면 간략한 질문을 부탁드립니다.
안애순: 오늘 사실 피나 바우쉬처럼 인터뷰하고 싶다고 그랬습니다. 피나 바우쉬는 말 한마디도 안 했어요. 옆에 다른 사람들이 다 이야기해 주고 뭐라고 해 주는 게 맞는 거지 제가 저에 대해서 뭐 이렇게 이야기하는 걸 원치 않았는데 본의 아니게 이렇게 됐습니다. 다른 분들께서 증언 겸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청중1: 저는 무용하는 사람이 아니고 소설을 씁니다. 소설가는 보통 작품 제목을 먼저 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생님은 작품 구상을 하면서 제목을 처음부터 정하시든지 아니면 작품을 구상하는 중에 혹은 다 완성했을 때 정하는지요?
안애순: 일단 먼저 정하는 게 제 순서인 것 같습니다. 어떤 작품을 어떤 레퍼런스를 들고 와서 어떻게 할까에 대한 것들을 많이 고민하면서 요즘은 기획적으로 무조건 제목이 먼저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제목이 정해지고 나면 저의 어떤 방향이 더 확실하게 정해질 때가 많습니다.
청중2: 이제는 국내에서 무용가들에 대한 이런 심층 인터뷰가 필요한 시기라 생각해요. 현대무용이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한 60년이 지나가는 이런 시기에서 오늘 시간은 굉장히 의미사 깊은 것 같습니다. 이 자리에서 특히 아카이빙을 말씀하셨는데, 그에 대한 관심 혹은 도움 측면에서 생각을 좀 나누고 싶습니다. 박물관에 박제된 것이 아닌 그야말로 오늘 인터뷰는 라이브 공연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때문에 글, 이미지 혹은 어떤 영상 등 다른 매체에 힘입어 그 아카이빙 과정에서 아주 의미 있는 것들이 소개된다는 강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자리에서 거론된 역사를 들으면서 매우 많은 협업 그리고 안무자와 무용수와의 관계에서의 변화 이런 것들이 저한테는 아주 의미 있게 들렸습니다. 또 그러한 내용이 어떤 자료를 증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어떤 질문이 생성되거나 어떠한 영감을 얻는 그런 식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그런 기대감도 큽니다. 안애순님은 참 많은 일을 하신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러실 수 있는 시대였던 것 같기도 합니다. 특히나 큰 규모의 공연을 만드셨는데, 사실 앞으로 저희 세대들에는 굉장히 어려운 일인 듯합니다. 몇십 명이 그런 대형 무대에 서는 작업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상상이 잘 되질 않아요. 그런 규모의 작업은 이젠 역사로 남겨지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 시점에서 이렇게 함께 있는 저 같은 작가의 입장에서는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 큰 의미가 있기도 한 것 같아요. 또 오늘 흥미롭게 들렸던 점이 한국의 전통 해체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어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상당히 개념적인 측면을 보시고 3시기에 걸쳐서 이렇게 춤작가의 예술적 관점이 변화되어온 점입니다. 춤 작품에서 보이는 무용수의 주체성에 대한 자극이 발현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제 저로서는 선생님에게서 체화된 것은 과연 무엇일까? 자부심이라면 자부심일 것이고, 작업들을 많이 해오시면서 자기 안에서 어떤 것이 가장 강하게 작동을 하고 있을까? 저는 그것이 좀 궁금합니다.
안애순: 사실 전통을 건드리면서 죽음에 관한 것을 제일 많이 생각했고 요즘 근래에 시공간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약간 나이 든 죽음의 어떤 시간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아카이빙에 대해 말하면서 지나간 같이 작업한 무용수들을 비롯해서 여러 이야기를 했는데 정말 작품과 함께 한 저의 시간이었잖아요. 그 속에서 다가오는 시간, 뭔가 회복해야 하는 다른 것들, 이런 것들이 계속 제 삶과 연결되어 있고 작품에서 계속 이야기되면서도 제 실제 상태하고도 함께 놓여 있는 것 같습니다.
김채현: 질문은 아닙니다만, 죽음이라는 소재는 춤의 운명이라면 운명입니다. 춤현장에서 수십 년 동안 보면서 느낀 게 그걸 빈번하게 춤화하는 장르로는 현대무용, 현대춤이 뚜렷하고요. 한국무용 부문에서는 어떨지 추후에도 생각해볼 점입니다.
청중3: 선생님이 국립현대무용단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현재 프로젝트식으로 작품을 해오고 있고 단원들은 계속 바뀌고 제가 보기엔 아주 불안정한 느낌으로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안애순 감독님께서 계셨을 때 대표 무용수들이 있고, 안성수 감독님이 계실 때 떠오르는 무용수들이 있고 했지만, 지금은 안무가들이 계속 바뀌고 무용수들도 바뀌는 상황인데 감독님이 보시기에는 어떻게 하면 국립현대무용단이 안정성을 갖고 국립현대무용단으로서 우뚝 설 수 있을거라고 보시나요?
안애순: 일단 예술감독이 있을 때 그 감독이 같이 작업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그런 사람들마다 계약 조건이 굉장히 다릅니다. 11개월 내지는 프로젝트별로, 혹은 쉬는 기간이 있다면 4~5개월 이런 식으로 계약을 끊어서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듀싱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양한 레파토리는 계속 제작되어야 하는 건데, 특정 예술감독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안무가들을 초대하고 출연자들도 오디션으로 뽑아 염두에 둔 작품을 해야 합니다. 또 관객의 피드백을 받고 생존을 지속할 수 있는 레파토리들이 있을 텐데 그런 경우도 유지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창작은 지속되어야 하지요. 국립현대무용단에서 좀 아쉬웠던 점은, 국립현대무용단이 학술팀이 있긴 했었는데 안무가를 조명하거나 작품화 작업 전후의 기록을 남기거나 또 어떤 예술가는 어떤 비전을 가지고 왔는지 등등 행정이나 예술감독의 작품, 작품 활동 이런 것들을 제시해야 한다고 봅니다. 제 경험상 그렇습니다. 그런 기록이 충실하지 않는 부분을 과연 누가 할 수 있을까?라는 우려도 들지요. 아무튼 아쉬운 점이 많지만 어쨌거나 레파토리는 계속 유통은 이루어져야 하고 또 새 창작은 계속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도 제작되어야 합니다.
김채현: 우리 공공무용단의 문제는 상당히 복잡한 측면에 걸쳐 있기 때문에 이런 자리에서 쉽게 단안을 내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때문에 오히려 아이디어 내지는 의견 교환은 많아야 하겠죠. 춤현장을 수십 년 돈 본 사람의 입장에서 제가 한 가지만 꼽으면 이렇습니다. 공공무용단의 모든 것은 다 공개되어야 합니다. 작품 공연 종료 일주일 내로 유튜브나 홈페이지에 해당 공연 동영상부터 모두 다 업로드해서 공개해야 돼요. 지금 절대 올리고 있지 않습니다. 왜 올리지 않을까요? 그 속내를 뻔히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공연 동영상이 업로드되지 않는 것, 그것부터 잘못된 거예요. 더욱이 디지털 시대에 밀착해 들어가야 합니다. 심지어 숏폼 시대 아닙니까. 그 동영상들을 보고 다음 공연을 봐야지 하게끔 유도하는 홍보가 어마어마합니다. 관객이 없다 할 게 아니라 실제로 이렇게 해보세요. 일차적으로 그것뿐만 아니라 모든 행정 영역도 다 공개되어야 하고 저는 그렇게 모든 게 공개되면 우리나라 공공무용단체는 질적으로 몇 년 내로 재빠르게 상승할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건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다음 질문 받겠습니다.
이지현: 이전부터 최근의 〈행 +-〉까지 무용수이자 안 선생님 곁에서 조안무로, 연습 감독으로 오랜 시간 같이 작업을 해오신 한상률 선생님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한상률: 안애순 선생님과 저는 2001년부터 함께 작업했습니다. 선생님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었고 지금 평론가 선생님들이 나펼쳐놓으신 그 세월에 저는 거의 함께 있었습니다. 밖에서 보는 시각으로 또 다른 시각이 또 건드려지는 게 저는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그리고 예전 전통부터 현재 2000년대까지 오면서 안 선생님의 개념이 바뀌어 온 춤의 역사에 제가 함께했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선생님도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안애순 선생님은 예전에 비하여 지금 주제나 개념에서 포커스가 달라진 건 맞습니다. 작품적으로는 무용수들로부터 끄집어내는 그 놓치지 않는 집념은 지금 20 수년이 지나도 여전하신 것 같아요. 주제가 바뀌고 언어가 바뀌어도 무용수들하고 같이 가는 그 지점이 가장 훌륭하게 느껴집니다. 〈행 +-〉할 때 조안무로, 연습 감독도 하면서 특히 다른 춤 전공자분들이 힘들어하신 부분이 자기 몸에서 무엇을 꺼내라고 하는 거였습니다. 현대 무용수들도 진짜 힘들어하셨는데 저희가 시간이 물리적으로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안 선생님께 조금 더 손쉬운 안무를 제시도 해보고 했는데 선생님은 그걸 절대 놓치지 않으셨어요. 이번에 작업하면서 저는 안무자로, 작가로서 몰고 나가야 하는 그 집념과 고집에서 많이 배웠어요. 근데 그 짧은 시간 안에 43명을 다 좋은 퀄리티로 만들어야 하니까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힘들었죠. 5명, 10명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43명이었기 때문에 저 또한 고민이 많았고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힘듦이 지나고 나면 또 미래가 보장되는 날을 선물 받게 되어 감사했습니다. 여전히 흥미롭고 힘들고 재밌습니다.
안애순: 감사합니다.
김채현: 오늘 소중한 인터뷰 잘 들었습니다. 이전 인터뷰도 그랬는데, 아쉽지만 이 정도에서 일단 마치려 합니다. 인터뷰 시리즈에 성심껏 참여 말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한국 전통을 춤화하는 현대무용의 시각을 견지하는 동시에 국내외의 활발한 작업으로 새 문을 열어온 노고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인터뷰에 참석하시어 진지하게 경청해주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