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심층 공개 인터뷰: 미나유
현대무용가 미나유 심층 공개 인터뷰 1
  • 일    시
    2024. 11. 20.(수) 13:30 ~ 16:00
  • 장    소
    예술가의집(서울 대학로)

인터뷰이│ 미나유        

인터뷰어│ 김채현·이지현·김예림 

후   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춤비평가협회(춤비협)는 지난 11월 ‘원로·중견 춤작가 초빙 비평시각 심층 공개 인터뷰’로서 현대무용가 미나유님을 초청하여 진행하였다.

인터뷰는 인터뷰이와 인터뷰어가 비공개로 진행하는 것이 통례이다. 이번 심층 공개 인터뷰는 공개된 자리에서 복수의 인터뷰어가 진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예술인 즉 춤작가에 대한 인터뷰이므로 비평시각이 중심이어야 한다. 이 프로그램은 춤비협에서 지난해 연말에 제안되어 올해 들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활성화지원사업으로 선정되었고, 이를 기준으로 춤비협 내에서는 지난 상반기에 춤작가 5인(배정혜·미나유·제임스전·안애순·김은희)을 선정한 바 있다. 이 프로그램은 올 11월까지 진행된다.
이 같은 유형의 심층 공개 인터뷰는 인터뷰의 일반적 관행과 형식을 탈피하므로 낯선 점이 있고 인터뷰이는 물론 인터뷰어에게도 사실상 선례가 없다시피 해서 그 형식을 모색하고 다듬어가야 할 것이다. 심층·공개·비평시각이라는 3요소를 춤작가와의 인터뷰에 녹여내어 춤작가의 면모를 가급적 충실히 드러내고 또한 공개 형식을 취함으로써 내용 면에서 객관성을 견지할 것이 요망된다. 앞으로 지속적으로 추진될 본 프로그램이 무용인들의 작업을 깊이 있게 재조망하고 비평의 토대를 다지는 데 이바지할 것을 기대하며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미나유님 초빙 인터뷰를 위한 패널로 김채현(〈춤웹진〉 편집장)·이지현(춤비평가)·김예림(춤비평가), 3인이 정해졌다. 패널들은 미나유가 제공한 공연 및 비평 자료들을 숙지하고 사전에 비대면 예비 모임을 가져 이번 인터뷰의 주제를 몇 가지로 정하는 작업을 진행한 바 있다.
11월 20일 행사는 모더레이터를 겸한 김채현 패널의 사회로 참석자 소개를 간략히 진행한 후 본론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공개 인터뷰 취지에 맞춰 참석자들이 의견을 표하는 기회도 제공되었다. 미나유님 인터뷰는 분량을 고려하여 〈춤웹진〉에 나누어 게재된다. - 편집자



〈춤웹진〉 독자들을 위한 미나유 간략 참조 사항
부산 출생 / 부산여고 졸업 / 이화여대 무용과졸업(제1회) / 경희대 대학원 졸업(석사) / 마사그레이엄댄스스쿨 등 수학 /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실기과 교수 역임 / 미국 및 유럽 춤단체 단원 활동 및 국내외 다수 안무 작업



미나유 ⓒ춤웹진



김채현: 여러 사람이 함께 공개 인터뷰함으로써 이모저모 더 심층적으로 접근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고 오늘 인터뷰를 시작하겠습니다. 미나유 선생님의 경우 공객 석상에서 마이크로 발언하시는 경우가 드무신 줄로 알아 오늘 자리가 더 귀하게 와닿습니다. 선생님께서 카페에서 차 한 잔 하듯이 담백하며 진솔하게 내놓으시는 말씀들을 비평적 시각에서 다듬어가는 방향으로 진행하겠습니다.

미나유: 네, 마이크 잡는 건 나에겐 아주 낯선 경험입니다.

김채현: 그러시지요. 우선, 미나유 선생님의 경력이라 할까 지난 활동을 간략히 정리한 소개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화여대 무용과 제1회 졸업생이십니다. 1963년에 제1회로 입학하신 거죠? 선생님은 제1회나 처음과 인연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또 뭐냐 하면,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창설 교수이셨으니 그것도 어찌 보면 제1회에 해당합니다. 또 제1회가 있어요.

미나유: 뭐지요?
 

김채현: 엘빈에일리아메리칸댄스시어터(Alvin Ailey American Dance Theater)의 단원으로서 한국인으로서는 무용수는 처음이자 유일하셨죠. 그리고 서울탄츠스테이션(서울 신촌 소재 성인무용교육 민간 기관) 창설 멤버이십니다. 이상 4가지 사항은 비평 시각에서 착안해보면 좀 연결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 아시겠지만, 작품으로 〈구토〉를 2017년에 초연을 하셨지요. 이 작품을 올해도 재공연하셨지요. 해외 활동을 보면, 1972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셨고, 1979년 〈스톰〉부터 안무작을 하셨습니다. 이후 미국, 한국, 독일에서 작품을 하셨고, 간간히 국내에서도 활동을 하셨습니다. 1997년대 이후에는 주로 한국에서 활동하셨습니다. 크게 보면, 1979년부터 2024년까지의 활동이 오늘 비평 시각으로 인터뷰 재조명될 예정입니다. 이제 좀 궁금한 게 많을 겁니다. 그 궁금한 거는 나중에 질문하실 어떤 시간을 드릴 테니까 좀 정해놓고 또 준비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청중: 지금보니까 45년... 45년동안의 작품들이네요.

김채현: 그렇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45년 동안 25편 리바이벌 작품을 제외하고, 만드신 것 같습니다. 맞는지요?

미나유: 저는 그런 거를 기억하지 않고 사는데, 45년이군요.(웃음)


〈불르바드〉와 미국 경험

김채현: 그럼 영상을 보면서 인터뷰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영상이 흐르는 대로 코멘트를 하시면 되겠습니다. 우선 작품 〈불르바드〉(Boulevard) 영상입니다. 이 작품은 2006년 국내에서 LDP무용단 정기공연에서 초연되었고 그후 앨빈에일리댄스컴퍼니2에서 공연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저작권료를 받은 재안무작이겠습니다. 화면에서 리허설하는 모습들이 보이는데, 저 사람들이 모두 엘빈에일리댄스컴퍼니2 단원들입니까?

미나유: 그렇지요.

이지현: 지금 재공연 미국 리허설은 몇 년도에 했죠?

미나유: 2011년도입니다. 제가 방학 때 미국에 가서 틈틈이 작업을 지도했습니다.

김채현: 〈불르바드〉는 2010년 스위스에서도 초청 받아 공연되었습니다. 아무튼 이 작품을 미국에서는 어떤 연유로 하게 되셨죠?

미나유: 예. 엘빈에일리댄스컴퍼니 디렉터였던 실비아 워터는 제가 엘빈에일리댄스컴퍼니에 함께 있었던 분이에요. 그 무용단 단원 출신으로 안무 작업을 하는 사람이 있다 해서 실비아 워터에게 추천해줬습니다.

김채현: 그럼 2006년도에 작품을 하셨을 때 실비아 워터가 한국 와서 보셨어요? 아니면 선생님이 영상을 보내드렸습니까?

미나유: 아니요. 영상을 보내진 않았고요. 데니스 제퍼슨 및 관계자 분들이 서울국제콩쿨에 심사위원으로 왔을 때 한국에서 만났습니다.

김채현: 네, 알겠습니다. 그 당시 이 작품을 미국에서 몇 회 공연하셨어요?

미나유: 저는 안무만 해주었지요. 이 단체들은 몇 달씩 투어를 다니잖아요. 그 때는 제가 학교에 있어서 함께 할 수가 없었죠.

김채현: 여기에 얽힌 다른 에피소드가 좀 있지 싶은데 어떤 이야기거리가 있을까요?

미나유: 미국 댄서들에게 이런 경향이 있습니다. 정해진 동작들을 받아서 그 다음에 투어를 다니는 게 일반적인데, 배우는 데는 아주 숙달해서 동작을 받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그 순서를 외워버려요. 공연들이 너무 많다 보니 그런 데 익숙하다고 봅니다. 반면에 어떤 소스를 주고 거기서 뭔가 다른 것을 스스로 뽑아내는 그런 데는 좀 약하더라고요. 저로서는 그 점이 조금 힘들었어요.



미나유 〈불르바드〉 ⓒ앨빈에일리무용단



김예림: 그럼 선생님, 애당초 LDP 무용단하고 했을 때와 앨빈에일리댄스컴퍼니와 했을 때를 비교해보면, 어느 정도 동일하고, 또 어떤 차이가 있었습니까?

미나유: LDP와는 굉장히 오랫동안 작업을 했던 것 같아요. 설명하고 하고 하고... 앨빈에일리댄스컴퍼니와는 제가 방학 때 가서 해야 하고 시간이 부족하니까 빨리 해야 되잖아요. 좀 급한 그런 게 있었어요. 근데 그렇게 투어를 많이 다니는 무용단들에 저는 좀 흥미가 떨어졌어요. 몸을 정말 잘 쓰니까 모든 동작은 잘 되었어요.

이지현: 근데 선생님도 그러한 단원이셨을 거잖아요. 젊었을 때 단원으로 지내실 때는 뭐 특별한 어려움 같은 건 없으셨어요?

미나유: 저는 그저 좋은 평 받고 싶고, 잘해보고 싶었지요. 클래스를 좀 많이 미친 듯이 했는데, 하루에 5개를 했어요.

김채현: 그렇게 클래스 5개를 했다는 것은 한 공간에서 5개 한 것인지, 아니면 여기 저기 옮겨 다니며 하신 건가요?

미나유: 앨빈에일리학교 안에서 층 수만 옮겨다니며 클래스에 참가했어요. 그때 미국을 다녀간 우리 무용가들도 많이 만났어요.



미나유 〈불르바드〉 ⓒ앨빈에일리무용단



이지현: 〈불르바드〉는 미국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만드신 작품인 건가요?

미나유: 그렇죠. 뉴욕의 퀸스 지역에서 착상을 받았습니다. 공원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데, 공원보다 약간 큰 광장이라 할까 그런 데서 미국에 갓 이민 온 사람들은 자기네들끼리 놀잖아요. 자기네 식으로. 그런 데서 아이디어를 받았어요.

김채현: 퀸스의 이민 사회에서 아이디어를 받으셨다는데, 그럼 한국에서 초연할 적에도 미국에서 가졌던 그 생각을 적용해서 작품을 만드셨군요?

미나유: 어쩔 수 없어요. 오래 살다 보면 그냥 제 몸에 있는 거고 장소가 바뀌어도 잘 잊히지 않지요.

김채현: 공연 의상의 경우 국내에서 하셨을 때와 차이가 있습니까?

미나유: 똑같아요.

김채현: 〈불르바드〉에 대해서 또 기억난다 그럴까 소개해주고 싶으신 점이 있으실까요?

미나유: 〈불르바드〉를 갖고 2007년 베니스비엔날레에 간 기억이 남습니다.

이지현: 〈불르바드〉를 선생님이 대표작으로 꼽으신 이유는 뭘까요?

미나유: 그냥 즐거워요. 음악도 동작도 다양하게 나오고. 그래서 재밌게 볼 수 있고.


〈바디락〉, 속박의 해석

김채현: 이제 영상은 〈바디락〉(Body Rock)입니다. 소개 영상에 등장하는 출연진의 해설을 잠시 옮겨 보겠습니다. “바디 락 작업을 구상하실 때 안무자님은 미세먼지가 심각하게 대두되는 상황을 염두에 두셨다고 해요. ‘빠른 발전과 동시에 이제 낯설은 것들이 퍼지는 상황들 속에서 사람들은 이런 속도에 맞춰서 쫓겨가고 있지 않은지’ ‘내 삶이 지금의 이 흐름 속에서 과연 내가 가야 할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에 관해 질문한다는 생각에서 작업을 시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 작품을 착상하신 동기가 있으실 테지요?

미나유: 제가 아비뇽페스티벌의 그 아비뇽에서 아이스크림 사 먹으려고 서 있는데 어떤 거지가 개 목줄을 하고 있는 거예요. 개 목줄은 저기 누군가에 의해서 조절되는 거잖아요. 개 목줄은 쥔 사람은? 학교 같은 경우는 교수에 의해서 학생들이 그럴 수도 있고 직장에서도 그럴 것이고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나유 〈바디락〉 ⓒ미나유



김채현: 금방 아이스크림 사 먹으려고 하실 때 개 목줄을 목에 걸고 있었다고 하셨는데요, 목에다 걸친 게 개 목줄인지 그냥 목걸이인지 어떻게 식별이 돼요?

미나유: 길었어요. 목걸이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솔직히 말해 그 개 목줄이 “개 목줄”이 아니잖아요. 저를 보는 것 같았어요.

김채현: 개 목줄을 매단 그 사람은 혹시 선생님 앞에서 무슨 액션을 취했습니까?

미나유: 아니요. 그냥 서 있었어요. 바바리맨 같이. 그 속옷만 입고 딱 있는데 그게. 딱 그게 ‘와 저거...’ 뭔가가 저한테 왔어요. 우리 삶이 개 목줄 같은 거라는 생각 말이에요.

김채현: ‘저거’라는 건 말하자면 우리 삶에서 보여지는 예속? 그런 건가요?

미나유: 속박. 속박이 직장에서는 상사로부터. 여기서도 뭐 누구한테. 이런 것이 있잖아요. 학교에서는 교수한테서. 그런 거죠. 그걸 제가 느꼈어요. 아비뇽에서 그걸보고 한국에서 작업해보고 싶었어요.
 

김예림: 이 공연이 끝나고, 관객 평가단 반응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창 미투가 이슈였을 때여서 그런 반응이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용수의 성비라든지, 여성 무용수의 치마 밑으로 남성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왔다 갔다 하는 걸 보고 “이 안무자가 여성 혐오가 있는 분인가”라고 평가서에 썼더라고요. 무용을 처음 본 분 같았어요. 저는 그 질문이 오히려 더 인상적이었어요.

김채현: 그렇군요. 마지막 장면에 여성들이 머리에 쓰고 있는 건 히잡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미나유: 그렇죠. 히잡이죠.

김채현: 왜 히잡을 생각해서 하셨어요? 아니면 우리 보자기도 생각할 수 있겠지요?

미나유: 그냥 보자기에요. 제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해서 어디 가면 그냥 모자를 쓰든지 얼굴을 가리고 싶어요. 그래서 가능하면 지금도 좀 덜 나왔으면 하지요. 그리고 아랍 문화에 제가 좀 관심이 많아요.

김채현: 아랍 문화 어떤 측면에서 관심이 많으세요?

미나유: 저번에 두바이 항공기를 탔는데 아랍권에 잠시 들렀어요. 그러고 식당에 들어가서 먹는데 아랍 여자들이 이렇게 있잖아요. 긴 전통의상을 입고... 그게 전통 의상인데도 불구하고 밑으로 속에는 진을 입고 그 다음에 운동화를 딱 신고 선글라스 끼고 있는데 멋있더라고요. 그것도 그렇고 DJ들도 아랍 DJ들이 짱이에요.

김채현: 그러니까 선생님은 그걸 지금 억압으로 보신 게 아니고 멋으로 보신 건가요?

미나유: 아니요. 멋이 아니라 그냥 제 피부에 와 닿아요. 그리고 지금 제가 사는 곳에도 호텔이 붙어 있거든요. 그 호텔에 아랍 손님들이 많이 있어요. 근데 제가 그 호텔 4층에서 운동을 할 때 그 호텔에 손님 아랍인들이 계속 와서 운동을 같이 해요.

김채현: 네, 거기서 뭔가 긍정적인 경험을 하셨나 봅니다?

미나유: 긍정적이죠, 당연히. 멋있더라고요.


〈구토〉 창작 과정과 비결

김채현: 네, 알겠습니다. 이제 〈구토〉 영상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2017년도에 〈구토〉 작품을 초연하셨고 바로 그 직후 2018년도 1월에 한국춤비평가협회에서 한국춤비평가상 가운데 작품상 공연작으로 선정했습니다. 구토는 지금까지 몇 차례 공연을 하셨어요?
 

미나유: 세 번했습니다, 올해까지요. 세 번 한 연유가 좀 있어요. 맨 처음에 구토를 하려고 지원 신청을 했는데 지원금이 적더라고요. 한 1500만 원인가? 새 작품을 그 금액으로는 도저히 할 수가 없어서 제가 주변에 좀 물었어요. 제가 이걸 못하겠으니 캔슬하겠다고 했더니 캔슬을 하면 3년간 지원 신청을 하지 못하는 벌칙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제 나이에 3년간은 좀 길잖아요. 그래서 어쨌든 해야 되기 때문에 제가 ‘혹시 초등학교 운동장이나 이런 데서라도 할 수 있는 데를 좀 알아봐 달라 그럼 거기서라도 그냥 하겠다’고 그랬어요. 옥외는 플로어도 너무 미약하고 조명이 없어서 그걸 다 달고 하려면 돈이 더 든다고 그래요. 그랬더니 겅경모 교수가 국민대 측에다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제가 한국 와서부터 지금까지 국민대에 강의를 나갔거든요. 그랬더니 국민대 예술극장을 쓰시라고 해서 제가 할 수 있었어요. 근데 국민대 극장 위치를 사람들이 잘 모르잖아요. 공연 보러 오다가 차가 막혀서 그냥 갔다든가 뭐 찾다가 헤맸다든가...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 공연이 끝나고 많은 연락을 받았어요, 못 봤다고. 그래서 제가 두 번째 지원 신청을 해서 2019년도에 했죠.

김채현: 올해는 10월 초에 국민대 예술극장에서 세번째 공연을 하셨지요.

김예림: 여기서 무용수들이 동작구를 계속 반복해서 차례대로 나오잖아요. 그런 구성을 선생님께서 생각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미나유: 한 사람은 기계적인 거 또 어떤 사람은 할 때마다 턴을 끝까지 돌고 가고 그리고 한 사람은 계속 미끄러지는 거 뭐 이런 식으로 컨셉을 해서 나왔다 들어왔다 하다가 해요. 그리고 이제 발전을 하잖아요. 그거를 30분하니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거나 다름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게 또 삶하고 만나게 되더라고요.

김예림: 네. 반복이어도 다른 속도감으로 보여주니까요.

미나유: 다른 속도라기보다는 한 번 들어가고 나왔을 때는 더 더 더. 라이프란 게 그런거 잖아요.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김채현: 초연하실 적에 출연자들 가운데 혹시 척추에 탈이 난 사람은 없었을까요?

미나유: 없어요. 없어요. 저는요, 작품을 만들 때 언제나 음악이 제일 중요해요. 그래서 음악 하는 데 한 두 달 걸려요. 음악이 만들어지는 그 기간 동안에 제가 분명하게 모든 걸 기록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음악이 딱 끝나면 작품이 조금 어처구니없게 다 짜지고 마무리돼요.

김채현: 평소에 저력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미나유: 아니 그렇지 않아요. 음악을 하면서 짜는 거지요. 그리고 이게 굉장히 힘들잖아요. 사람 몸으로 하는 거니까. 그래서 공연을 하듯이 일주일에 딱 두 번씩 하게 하고. 그리고 제가 스튜디오도 없고 그런 관계로 국민대에서 연습을 하다보니까 눈치가 보이잖아요. 눈치도 보이고 그러니까 밤에 살짝 들어가서 하고. 그래도 한 번은 토요일이고 한 번은 화요일이에요. 화요일날 제가 티칭이 끝나고 그렇게 두 번을 하고요. 그 다음에 이들이 프리랜서잖아요. 제가 월급을 주는 것도 아닌데 그들이 뭔가 다른 일을 하면서 먹고 살아야 하는데 제가 많은 시간을 뺏으면 그거 저는 죄악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연습을 하게 되면 1시간짜리 작품은 1시간 반이면 끝나요. 15분 웜업(warm up)하고 런쓰루(run through)를 하고 조금 피드백 주면... 그래도 1시간 반 이상은 안 잡아요. 그렇게 두 달간 하니까 공연을 20회, 30회를 하는 거잖아요. 공연같이 하니까요. 딱 가서 그 시간에 끝나고 그러니까 몸이 다치지는 않죠. 그것까지 저는 다 계획해서 스케줄을 잡습니다. 몸이 어떻게 되면, 그것까지 제가 염두에 두고 트레이닝을 시켜요.

이지현: 선생님, 아까 음악이 만들어지는 동안 안무적인 구상을 하신다고 하셨잖아요?

미나유: 그렇죠. 음악이 완료되는 순간 저는 작품이 끝나요. 프리랜서 안무가는 그렇게 해야 돼요. 왜냐면 많은 시간을 못 잡아요. 제가 월급을 줄 수 있으면 저도 한 5~6시간 잡고 싶어요. 그런데 월급을 안 주는데 그렇게 시간을 잡는단 거는 사악한 거죠.
 

이지현: 그래도 납득하기 어려운 건 한예종 초대 교수시고, 그 학교를 정년퇴임 하셨는데, 댄서들 대부분이 졸업생인데도 학교 연습실도 안 쓰시다니요. 학생들 페이 못 준다는 것 때문에 연습 시간도 최소로 제한하시고 지금 그렇게 연습하셨다는거 잖아요?

미나유: 그러니까 그런 스킬이 생기더라고요.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만약에 국현이나 그런 데 있었으면 이런 스킬이 안 생기겠죠. 그래서 단점이 결국은 장점일 수 있어요.

김채현: 그게 바로 궁하면 통한다는 거죠. 궁하다보면 새로운 어떤 아이디어가 오게 되고 어떤 대책이나 대안이 나온다는 거군요.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 세 번째 하셨을 적에는 그런 어려움이 훨씬 덜했어요?

미나유: 세 번째는 창작산실에 신청했어요. 첫 번째는 사람들이 너무 전화가 와서 가다가 길이 막히고 극장을 못 찾았다 해서 두 번째는 했지만 제가 했던 거는 사실은 또 안 하고 싶어었요. 그런데 제가 창작 지원금을 우연치않게 두 번인가 연속으로 받았어요. 근데 창작산실 지원금을 받으면 새 작품을 할 수가 있더라고요. 근데 제가 이미 두 번을 받았는데, 또 받을 수 있을까? 지원을 갖고 남한테 들러러 서기 싫다는 느낌에서 안 내고 있다가 신청 마감 시간이 다가오니까 뭔가를 1년에 한 번씩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나는 거에요. 새 작품은 못한다 하더라도 마감날 마감 1시간 전에 이미 작성된 것으로 신청했어요. 그래서 했어요.

김채현: 그래서 재정적으로 어떻게 나은 상태가 됐습니까?

미나유: 네, 그래도 이미 있던 작품이니까.

김채현: 이제 궁금한 거는 반복이 처음에 집중적으로 일어나거든요. 무슨 동기를 가지고 저렇게 할까요?

미나유: 30분 동안?

김채현: 네. 30분 동안 끊임없이 반복하잖아요.

미나유: 솔직히 반복은 절대 반복이 아니죠. 똑같을 수가 없죠. 오늘은 내가 이랬는데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내가 머리카락이라도 하나 더 빠지고 눈썹이라도 하나 더 없어지지 않겠어요? 완전히 똑같을 수 없죠.

김채현: 네 그렇습니다. 완전히 똑 같을 수 없죠. 그러니까 엇비슷함들이 계속 연결되거든요. 연속이 된다고 하나요? 그 생각을 하게 된 동기라 그럴까, 그런 게 뭐죠?

미나유: 동기는 없고 저는 뭐 그렇게 동기 갖고 막 심하게 따지지는 않지만 요즘 뭔가가 새로운 거 자꾸 나오면서 어저께 했던 거 하면은 ‘이거 뭐 어떻다’ 자꾸 그러잖아요. 패션도 그렇고, 춤도 막 그러대요. 근데 우리는 반복을 사랑해야죠. 저 나무가 계속 있는데 10년 100년 돼도 그대로 있을 거잖아요. 그 얼마나 가치 있는 겁니까? 새로운 나무가 있다고 저거 잘라서 죽일 건 아니지요. 지금 영상에서 계속 반복하면서 흔드는 출연자가 보이지요.

김채현: 네.

미나유: 저 출연자가 저거를 계속하면서 어느 날 터졌어요. 반복을 하면서 터지고 깨닫고, 그러지요.



지난 11월 20일 오후에 있은 춤작가 미나유 초빙 비평시각 심층 공개 인터뷰, 예술가의집, 서울 대학로, 한국춤비평가협회 주최 ⓒ춤웹진




반복의 힘과 탐색

김채현: 터졌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미나유: 반복하는 동안에 터지고 깨닫고, 새로운 모습이 계속 나타난다고 할까요. 지금의 출연자는 어제의 출연자가 아니지요. 누구나 그럴 듯한데, 그래서 반복은 정말 멋있는 거에요.

김채현: 그러니까, 바로 엇비슷함을 연속하다보니 출연자가 빵 터졌다는 거지요?

이지현: 저는 어떻게 이해가 되냐면요, 무당춤이 생각나는데 계속 반복적으로 뛰면 신이 오르잖아요. 그 반복의 힘으로 똑같은 반복은 아닐지라도 같은 리듬으로 계속 지속해서 몸을 쓰거나 집중하다 보면 고양이 돼서 트랜스(trance) 상태로 넘어가거든요.

미나유: 그렇죠. 저도 옛날 동아 콩쿠르(1966년)에서 무당춤으로 금상 받았어요. 근데 1년 내내 그때는 김백봉 선생님이 거기 교수니까 경희대에서 연습을 했어요, 밤에. 또 낮에는 제가 학생이 아니니까 못 들어가잖아요. 그러니까 밤에 경비실 수위 아저씨한테 양해를 구하고 밤새 연습하고 새벽에 나왔거든요. 똑같은 걸 반복했는데 저는 무당춤으로 정말 상을 받고 싶었거든요. 1년 내내 그걸 연습했어요. 누가 코치하는 것도 아니고 밤이니까 아무도 없잖아요. 학교에서 새벽에 나왔으니까 그 문 닫아놓고 어떤 날은 립스틱만 빨갛게 바르고 무당춤을 해요. 그럼 또 달라요. 그리고 어떤 날은 선글라스를 딱 끼고 무당춤을 해보고. 솔직히 어떤 날은 제가 벌거벗고 연습을 했었어요. 거기 아무도 없으니까. 그런 식으로 1년을 하면서 제가 찾아냈어요. 그래서 암튼 금상을 받았어요. 그게 또 우리 어머니의 소원이었고 제가 소원을 풀어드렸죠.

이지현: 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그랬던 건 구체적으로 어떤 무엇 때문에 그러셨어요?

미나유: 왜냐면 순서는 정해져 있고 음악도 똑같은데 누군가가 코치를 안 하잖아요.근데 저는 새롭게 하고 싶고 찾아내고 싶은 거예요. 근데 누구한테 묻겠어요? 그러니까 제가 그렇게 벌거벗기도 하고 선글라스 껴보기도 하면서 느껴지는 걸 자꾸 찾았어요.

이지현: 그때 연습 영상이 있었으면 그 자체가 굉장한 작품이었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드네요. 그리고 방금 어머님 소원이었다고 하셨는데 그 얘기 잠깐 해주실 수 있으세요? 왜 어머니에게는 무당춤이 소원이셨을까요?

미나유: 그거는 이래요. 김백봉 선생님의 수제자 허경자 언니가 있었어요. 허경자 언니는 제 영웅이었죠. 제 무용학원에서 선배였고요. 근데 그 언니가 〈광란의 제단〉이라고 명동 국립극장(서울)에서 춤을 췄거든요. 어머니가 부산에서 서울로 와서 보시고는 내 딸이 저거 한 번만 하는 걸 보고 죽으면 소원이 없겠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에요. 그 〈광란의 제단〉 작품, 정말 그 시절에 그 제단에다가 돼지고기 삶아서 진설하고 향을 피워서 향 냄새가 명동 국립극장에서 다 퍼지고... 그때는 냄새 풍기고 그런 건 없었는데, 언니는 그렇게 했어요. 지금도 제 눈에 선해요.

이지현: 그럼 그 작품에서 어떤 인스피레이션도 받으시고 해서 이제 무당춤으로 콩쿠르를 나가셨군요. 두 작품은 어떻게 다를까요? 허경자 선생님 무당춤과 선생님 버전의 무당춤은 어떻게 다를까요?

미나유: 저는 제목을 〈굿〉이라고 했어요. 제가 어디 감히 허경자 언니의 제목을 갖고 옵니까. 제가 너무 존경하니까요.

김채현: 저는 개인적으로 허경자 선생님에 대해서 간혹 이름을 들었어요. 그 분하고 선생님하고 연배 차이가 얼마나 나십니까?

미나유: 그 언니가 저보다 3년 위지요. 왜냐하면 언니가 말띠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그 언니 장례식에 제가 참석하러 미국 간 거예요. 우연찮게 그 형부가 오셔가지고 언니가 생전에 들었던 가방이며 그런 걸 줘서 저는 그걸 계속 들고 다녔었어요.

김채현: 말하자면 그분은 선생님한테 일종의 우상이었다 그럴까요?

미나유: 우상이죠. 그리고 그 어머니가 정선 선생님이라고 의상 하시는 분이었고. 조선호텔 반도 아케이드에서 의상실을 갖고 계셨지요.

김채현: 네. 정선 선생님은 한국무용 분야 창작춤 계통 의상들을 많이 하셨어요. 1980년대에도 의상을 굉장히 활발하게 만드셨고 세련미가 넘쳤지요.

미나유: 근데 그분이 제 무당춤 의상도 하시고 또 김백봉 선생님하고 함께 하셨지요. 나는 그것도 잊을 수가 없는 게, 뉴똥(유똥이라고도 불린 견직물)이라는 것입니다. 저고리에 치마를 입어야 되는데 치마가 노란색이어야 했거든요. 근데 그 노란색이 시장에서 잘 없었어요. 그래서 김백봉 선생님하고 정선 선생님이 직접 동대문에 가서 하얀 걸 사가지고 물을 들여서 제가 콩쿠르 나갔고, 그 두 달 동안 김백봉 선생님은 손이 노랬어요. 그렇게 정성을 들여서 그렇게 해 주셨어요.

김채현: 조금만 이야기를 되돌아가볼까 합니다. 방금 엇비슷함 또는 반복의 중요성을 말씀하셨지요. 그러니까 반복을 잘 받아들이면 효과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굿춤을 출 때 이렇게도 입어보고서 하고 또 옷을 벗고서 해보고 이런 탐색들을 했다는 것은 스스로 자각하면서 춤을 췄다는 거거든요. 그 자각이라는 게 무슨 말로서 개념으로서 문장화될 수 있는, 딱 부러지는 거라기보다는 자기가 느낌으로 계속 점검을 해 나간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어떤 가능성을 두고 그 가능성들 중에서 내가 조금 혹할 수 있는 걸 발견해내는 거죠. 그건 춤추는 사람한테는 실질적이면서도 중요하다고 생각되고 자기가 인식을 한다는 어떤 자각이 강조되는 느낌입니다.

김예림: 〈구토〉는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도 무용수 개개인의 존재감이 아주 크게 드러나는 작업인 것 같아요. 〈구토〉를 다시 공연하실 때 출연자들 중에 누가 빠지거나 바뀌면 이 작품이 그대로 갈 수 있을지 그것도 좀 궁금하네요.

미나유: 이번에 세 번째 할 때는 조금 문제가 생겨 마지막에 일부 출연자가 바뀌었어요. 그런데 대한민국 댄서는 세계에서 짱이에요. 왜냐하면, 몸이 틀리니까 달라지겠지만, 그 짧은 시간에 기가 막히게 해내더라고요. 예 아무 문제 없었고 저는 놀랐어요. 케이팝만 세계에서 그런 게 아니라 현대무용도 세계에서... 아니 정말 좋아요. 속에 무지막지하게 품고 있어요. 그거를 끄집어 내줘야 돼요. 때로는 내가 가진 걸 내가 모를 때가 있어요.

김채현: 내가 몰랐던 나...

미나유: 코인 셀라라고 뉴욕커인데 제 친구였습니다. 작업을 하는 사람인데 주말마다 뮌헨에 와서 클래스를 들으면서 ‘자기는 피나 바우쉬가 너무 싫다’는 거예요. 제가 ‘왜’ 그랬더니 ‘세상에 내 속에 있는 거를 그렇게 빼낼 수가 있어? 뱀파이어!’ 이러 는거에요. 근데 저는 그 당시 그 애 코인 셀라가 너무 부러웠어요. 제 소원이 뱀파이어를 만나는 것이었어요. 그렇게 해서 내 것을 뽑아내줬으면 좋겠는데... 근데 그 애는 뉴욕에 빚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빚만 갚고 자기는 간다고 해서 3년 있다가 나갔어요. 그때 그 애가 매우 부러웠던 기억이 있어요. 그런데 피나 바우쉬 선생님이 그렇더라고요. 속에 있는 거를 끄집어내시더라고요.

김채현: 피나 바우쉬를 향한 마음이 이해됩니다. 자 그럼 영상을 계속 보시며 멘트를 주시지요.

미나유: 영상에서 지금 보는 저 출연자는 대학 역사과를 나왔는데, 무용을 늦게 시작했어요.

김채현: 오늘 여기 왔습니까?

미나유: 안 왔어요. 지금 춘천에서 살아요. 제가 서울탄츠스테이션에서 가르치던 중에 만난 출연자에요. 무용을 늦게 시작했는데, 그런데 어떻게 먹고 사냐고 제가 물었어요. 아무래도 돈이 없을 거 아니에요, 제 짐작이지만. 나이도 좀 됐는데, 새벽 4시에서 7시 사이에 병원에서 일을 한데요. 밤중에 모인 주사기구들을 청소하는 그런 작업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아침형이 아니라 정말 7시에 일어나는 것도 힘든데 그 출연자는 4시까지 가려면 2시에는 일어나야 하잖아요. ‘그렇게 일찍 간다고?’ 저도 서울탄츠에서 오전 11시 발레를 하러 가고 싶은데 9시에는 일어나야 하잖아요. 그렇지만 일어나기 싫은 거예요. 제가 그렇게 유혹을 받아요. ‘내가 무슨 학생도 아닌데’ 이러면서도 그 출연자를 생각하면 ‘세상에 1년 내내 새벽 2시에 일어나는 사람도 있는데 내가 11시를 갖고 고민하나, 나 미친 거 아니야?’ 그러면서 그 출연자 생각하면서 벌떡벌떡 일어났었어요. 그러다 어느 날 수업을 가르치는데 스승의 날이었나 봐요. 수강자들이 스승의 뭐라 하면서 저한테 박수를 쳐요. 제가 딱 그랬어요. “스승? 나한테는 스승이 저기 있어. 저 사람이 스승이었어.” 수강자들이 저한테 무슨 선물을 갖고 왔어요. “나는 스승의 선물을 받을 수 없어.” 그래서 제가 없는 돈을 500만 원을 만들어서 비엔나 임풀스탄츠페스티벌에 가라고 그 출연자한테 보냈어요. 스승이에요 그게. 다른 거 없고.

김예림: 선생님, 이 작품〈구토〉에서 두 영화의 장면이 나오잖아요. 〈피아니스트〉하고 〈타이타닉〉하고. 그 두 영화의 장면을 꼽으신 이유가 있어요?

미나유: 〈타이타닉〉은 제가 우연히 그때 조카가 유학하고 있던 런던에 갔는데 그 차이나타운 옆에 영화관이 있었어요. 근데 그날 프르미어 개봉일이었어요. 그러니까 영화 프르미어로 그렇게 세계적인 감독이나 예술가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우연히 그 영화를 봤어요. 정말 벼락 맞은 기분이 이런 걸까 벼락이 제 머리에 떨어지는 것 같았어요.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었지요. 영화 〈피아니스트〉, 아니 전쟁 중에 그 대단한 총까지 내려놓게 할 수 있는 그 저력은 예술가만이 갖는 거잖아요. 그거를 보면서 이야 예술하기를 잘했다. 때로 힘들 때 어떤 유혹을 받지마는, 그런 힘으로 계속하게 돼요. 예술가가 대단한 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자부심을 갖고 해야됩니다. 배가고파도...

김채현: 그렇게 치열한 전쟁 중에 총을 내려놓도록 하는 인간이 있었는데, 그 인간을 포착해서 그 인간과 만인이 공유하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 예술가이겠지요. 그래서 예술의 힘은 대단하다는 말씀이시군요.

김예림: 이렇게 반복되는 중에 조명들이 미세하게 바뀌잖아요. 그런 조명의 변화도 선생님 머릿속에 다 계산되어있으셨던 건가요?

미나유: 조명 감독이 굉장히 스마트해요. 감각 있고 그래서 이야기하면 금세 금세 다 아십니다.

김예림: 움직임들이 계속 점층적으로 변화되는 것을 조명으로도 알려주더라고요. 선생님께서 순례길 얘기를 하시니까 바로 이해가 됐어요. 이게 결국은 사람이 계속 걷는 삶의 길이자 순례길이라는 것...

미나유: 〈구토〉 할 적에 제가 아이디어를 받은 영화가 또 있어요. 〈피아니스트의 전설〉이라고. 그 배 속에 꼬마가 있고 그 배 안에서는 기계 만지고 뭐 고치는 그런 사람들이 거기서 계속 평생을 사는데 거기서 아기를 낳은 거예요. 근데 그 꼬마가 거기서 자라서 세상을 몰라요. 나가 본 적이 없으니까. 거기 피아노가 있었어요. 그 안에 클럽이 있으니까. 유명한 재즈 피아니스트들이 다 와서 피아노 치고 그런 데서 그걸 보고 걔가 그냥 놀이삼아 친 거잖아요. 근데 그랜드 피아노가 두 대가 있는데 어느 날 예고 없이 폭풍이 왔어요. 근데 피아노 바퀴를 잠그지 않았어요. 폭풍이 오는지 몰랐으니까. 그런 중에 꼬마는 막 다녀요. 그 장면을 보고 저는 ‘와’ 했어요. 폭풍 속의 그랜드 피아노, 그렇게 살아야 돼.

김예림: 아주 위태롭게 미끄러지면서 중심을 잡으려고 하는 그 모습이요?

미나유: 그렇기도 하지만 제가 집이 신촌인데도 불구하고 국민대까지 자전거를 타고 맨날 다녔어요. 다리 힘 키운다고. 그리고 이번 여름이 얼마나 더웠어요? 그러니까 다른 남자 댄서들이 그걸 보고 나면 힘들다 뭐다 말은 못하죠. 여성인 내가 그러는데. 나이가 몇이에요? 그러니까 30대 초반 남자가 어떻게 얘기하겠어요? 그래서 리허설할 때 분위기가 너무 좋아요. 전 올 여름 정말 행복했어요. 그런 속에서 그들하고 호흡한다는 자체가...

김채현: 먼저 영상을 보고 진행하기를 잘한 듯한데, 그렇죠 아마? 빵 터졌겠죠. 자 이제 영상을 보면 진행하는 코멘트 순서를 끝내고, 패널들이 또 준비하신 질문들로 궁금증을 한번 풀어가보죠.



미나유 〈자화상〉 ⓒ미나유




유럽으로 가다


이지현: 선생님, 엘빈에일리무용단에서 제일 첫 번째 한국 무용수로서 활동하셨고, 그래서 미국에서 오래 계시다가 유럽으로 가서 또 활동하셨잖아요? 유럽으로 가신이유라든지 혹은 미국과 유럽의 어떤 무용의 차이점이라든지 느끼신 게 있으면 듣고 싶습니다.

미나유: 저에게 1972년부터 10년 동안은 정말 뉴욕이 너무 좋았어요. 제가 앙드올을 두 번만 도는 것도 너무 힘든데 7번을 쓱 돌고 딱 내려오고 이런 댄서들이 너무 많은 거에요. 그것도 너무 깔끔하게. 데이비드하워드스튜디오 갔더니 그런 댄서들이 수도 없이 많은 거에요. 그래서 제가 미친 듯이 10년 동안 다섯 클래스를 일주일 내내 주말도 없이 그렇게 하다 보니까 저도 되더라고요. 시간이 가니까 테크닉은. 그런데 그렇게 살다가 거기 카네기홀 속에 발레 스튜디오가 하나 있었어요. 두쿠도선생님이 운영하시는 거예요. 그 선생님은 러시아에서 최고의 댄서였죠. 전설이었죠. 제가 그 클라스를 하고 나면 굉장히 힘이 생겼어요. 그러니까 그분은 앙드올을 딱 한바퀴 돌면 더 이상 못 돌게 해요. 플리에하고 딱 서게 해요. 그럼 콩콩 뛰더라도 서야 돼요. 더 이상 못 돌게요. 근데 콩콩 뛰고 있다가 보니까 결국은 돈다는 게 도는 게 아니라 밸런스이구나 하는 것을 느껴요. 그러니까 내가 세븐 카운트 밸런스 할 수 있으면 세븐이 돌아지는 거예요.그런 거를 배우는 과정에서 스튜디오 클래스에 옛날 잡지에 나온 발레리나 할머니들이 오는 것을 많이 봐요. 그 클래스들에서 60대 70대 발레리나가 그렇게 하는데, 제가 그런 모습을 10년 넘게 바라보고 있으니까 이런 생각이 좀 들었죠. ‘공주 ’, 자기가 70대고 늙은 할머니라는 것을 모르고 머리에 꽃핀 꼽고 이렇게 핑크색 타이츠를 입고 이렇게 하는데 그게 아름다운 게 아니라 너무 무서웠어요. 왜냐하면 나도 계속 여기서 살다 보면 그 나이가 되어 저렇게 되는 것 아닐까? 그게 너무 싫어서 전 탈출하고 싶었어요. 탈출하고 싶고 그 다음에 도는 것도 돌다 보니까는 7바퀴 돌아지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그냥 세멘트에다 내 머리를 7번 박고 ‘그래 나는 7번 8번 할 거야’. 그렇게 경쟁해서 해봤자 머리에 피밖에 더 나겠어요. 그거를 깨닫는 순간 ‘여기 무섭다, 여기 정글이다, 이 정글을 빨리 떠나자’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14년째 떠났지만 10년째부터 그 생각을 했어요.

김채현: 그러면 그 대안으로 왜 유럽을 택했어요?

미나유: 어느 날 어떤 친구 집에서 케이블 TV를 보게 됐어요. 거기서 피나 바우쉬 선생님 작품을 본 건데 제가 그때 피나 이름도 몰랐고 부퍼탈이라는 것도 몰랐어요. 보니까 부퍼탈이 나와요. 근데 내가 베를린 뮌헨은 알아도 부퍼탈은 처음 들어본 도시였어요. 미국에서 공연을 하도 봐서 보통 한 1분, 2분 지나면 댄서들을 다 알거든요. 피나 선생님 작품에서 ‘누구 누구’ 하는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런 댄서들이 있는 거에요. 그게 나중에 알고 보니 〈봄의 제전〉이었더라고요. 그래서 거기 가고 싶었어요.

이지현: 그럼 부퍼탈로 가신거에요?



- 이하 미나유 심층 공개 인터뷰 제2편(춤웹진 1월호)으로 이어짐

2024. 12.
사진제공_미나유, 춤웹진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