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심층 공개 인터뷰: 배정혜
한국무용가 배정혜 심층 공개 인터뷰 1
  • 일    시
    2024. 11. 26.(수) 13:30 ~ 16:00
  • 장    소
    예술가의집(서울 대학로)

 인터뷰이│ 배정혜        

인터뷰어│ 김채현·채희완·김영희 

후   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춤비평가협회(춤비협)는 지난 11월 ‘원로·중견 춤작가 초빙 비평시각 심층 공개 인터뷰’로서 현대무용가 배정혜님을 초청하여 진행하였다.
인터뷰는 인터뷰이와 인터뷰어가 비공개로 진행하는 것이 통례이다. 이번 심층 공개 인터뷰는 공개된 자리에서 복수의 인터뷰어가 진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예술인 즉 춤작가에 대한 인터뷰이므로 비평시각이 중심이어야 한다. 이 프로그램은 춤비협에서 지난해 연말에 제안되어 올해 들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활성화지원사업으로 선정되었고, 이를 기준으로 춤비협 내에서는 지난 상반기에 춤작가 5인(배정혜·미나유·제임스전·안애순·김은희)을 선정한 바 있다. 이 프로그램은 올 11월까지 진행되었다.
이 같은 유형의 심층 공개 인터뷰는 인터뷰의 일반적 관행과 형식을 탈피하므로 낯선 점이 있고 인터뷰이는 물론 인터뷰어에게도 사실상 선례가 없다시피 해서 그 형식을 모색하고 다듬어가야 할 것이다. 심층·공개·비평시각이라는 3요소를 춤작가와의 인터뷰에 녹여내어 춤작가의 면모를 가급적 충실히 드러내고 또한 공개 형식을 취함으로써 내용 면에서 객관성을 견지할 것이 요망된다. 앞으로 지속적으로 추진될 본 프로그램이 무용인들의 작업을 깊이 있게 재조망하고 비평의 토대를 다지는 데 이바지할 것을 기대하며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배정혜님 초빙 인터뷰를 위한 패널로 김채현(〈춤웹진〉 편집장)·채희완(민족미학연구소장)·김영희(전통춤이론가), 3인이 정해졌다. 패널들은 배정혜가 제공한 공연 및 비평 자료들을 숙지하고 사전에 비대면 예비 모임을 가져 이번 인터뷰의 주제를 몇 가지로 정하는 작업을 진행한 바 있다.
11월 26일 행사는 모더레이터를 겸한 김채현 패널의 사회로 참석자 소개를 간략히 가진 후 본론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공개 인터뷰 취지에 맞춰 참석자들이 의견을 표하는 기회도 제공되었다. 배정혜님 인터뷰는 분량을 고려하여 〈춤웹진〉에 나누어 게재된다. - 편집자
 

〈춤웹진〉 독자들을 위한 배정혜 간략 참조 사항
함남 출생 서울에서 성장 / 8세 때 첫 개인발표회 / 숙명여대 국문과 및 대학원 졸업 / 선화예술학교 무용부장 / 국립국악원 상임안무자 / 서울시립무용단 단장 / 국립무용단 예술감독 / 리틀앤젤스 상임안무가 역임



지난 11월 26일 오후에 있은 춤작가 배정혜 초빙 비평시각 심층 공개 인터뷰, 예술가의집, 서울 대학로, 한국춤비평가협회 주최 ⓒ춤웹진



 

김채현: 안녕하십니까, 한국춤비평가협회가 주최하는 춤작가 초빙 비평시각 심층 공개 인터뷰, 오늘 행사를 시작하겠습니다. 비평시각 심층 공개 인터뷰는 오늘로서 다섯번째입니다. 올해 예정된 행사로는 마지막이지요. 인터뷰는 대개 사적인 어느 공간에서 한 두어 분이 대면해서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저희가 진행하는 이런 형식의 공개 인터뷰는 한 분이 대화를 진행하는 것보다는 여러 명이 함께 진행함으로써 폭넓은 질문 사항도 마련할 수 있고, 또 객관적으로 검증할 기회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합니다. 그동안 네 번을 하는 가운데 참가하신 분들도 그렇고 청중도 상당히 호응이 높습니다. 오늘 날씨가 유달리 바람이 많이 불고 말하자면 일기가 불순한데요, 그럼에도 많이들 오셨군요. 선생님께서는 지난 여름 몸이 불편하셨다가 이제 아주 회복되셨다고 합니다. 선생님의 빠른 회복을 함께 기뻐하면서 오늘 참석하신 분들의 깊은 관심에 먼저 감사드립니다.
비평 시각에서 춤작가를 심층 인터뷰하는 취지에 맞춰 먼저 배정혜 선생님께 자료를 제공받고, 저희들이 공유해서 숙독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두어 시간의 공개 인터뷰로 정리하기에는 한 평생의 춤작업이 방대할 것입니다마는 그래도 인터뷰 시간을 절약하고 또 효율적으로 진행하는 방안으로서 한 2주 전에 진행자와 패널들은 궁금한 점, 질문 사항을 정리하여 선생님께 전해드렸습니다. 그에 준해 선생님께서 편안하게 많이 말씀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들을 진행하다 보면 추가로 소개될 내용도 많으리라 보입니다.
오늘 인터뷰를 청중들과 공유하기 위해 선생님의 약력을 간략히 정리해 보았습니다. 우선, 자료를 여기 대형 화면으로 보겠습니다. 다 아시는 내용들이겠지요. 그런데 오늘 여기 목록으로 떠오르는 주요 연도로서 맨 처음 명기된 것은 1977년입니다. 지금으로부터 근 50년 전이지요. 선생님의 주요작으로서 〈타고 남은 재〉가 발표된 해이지요. 자 그리고 선생님의 약력을 보시면, 숙명여대와 대학원을 졸업하시고, 국립국악원, 서울시립, 국립무용단, 배정혜춤아카데미, 그리고 리틀엔젤스 등의 기관에 몸담으신 사항들이 보입니다.
그러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선생님이 뽑으신 세 작품부터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유리도시〉, 〈춤 춘향〉 그리고 〈Soul 해바라기〉 3작품 각각에 대해, 선생님, 말씀해 주시지요.


<타고 남은 재>를 만든 계기

배정혜: 이렇게 바쁘신데도 관심 갖고 와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오늘 날씨가 참 드문 날인 듯해요. 몇 분 사이에 바람이 불었다, 해가 났다, 비가 왔다, 우박이 왔다가, 오늘 같은 날은 근래 처음인 듯해요. 이런 날씨에 와주셔서 더욱 감사한 일입니다. 방금 첫 머리에 소개하신 대로 1977년 〈타고 남은 재〉를 하던 날도 날씨가 좀 그랬어요. 오늘 제 얘기가 여러분들한테 뜻을 가진 얘기로 남았으면 좋겠는데 모르겠어요. 그냥 얘기를 풀어볼게요.
제가 〈타고 남은 재〉를 한 1977년도에는 그때 당시에 모던춤, 말하자면 현대춤이 성행하지 않은 시대였었어요. 그때는 창작무용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지요. 지금 우리가 현대춤을 창작무용이라고 하는데, 창작무용이라는 말 자체는 잘못된 거라 생각해요. 그 명칭에 대해서는 있다 얘기하도록 하지요. 하여간 그때는 그 모던춤이 없었던 시대라 할 수 있죠. 그러니까 77년도는 전통을 가지고 새롭게 만드는 거를 창작무용이라고 말들을 한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타고 남은 재〉를 제가 만들 때, 삼촌이신 우리 배명균 선생님이 미리 보시고는 “너 이거 올리면 너는 망한다. 지금까지 천재 무용가라 했던 배숙자가 완전히 망하게 되니까, 너 이거 올리면 안 된다”고 그러시는 거에요. 그래서 거의 일주일 동안 싸웠어요. 나는 “그걸 올려야 된다” 이러고 삼촌은 “못 올린다” 이러시고… 그러다 제가 합의를 봤어요. “삼촌 안무로 〈심청의 노래〉를 올리고, 제가 하고 싶은 〈타고 남은 재〉도 올리겠다, 〈타고 남은 재〉가 실패를 하더라도 다른 하나는 성공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1977년 12월 1일 발표를 하게 됐어요.

김채현: 네, 그날 공연에서 배정혜 선생님과 배명균 선생님의 공연작이 나란히 올려지기까지 그런 우여곡절이 있었더군요. 춤에 관한 의견 차이로 많이 힘드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배정혜 〈타고 남은 재〉 ⓒ배정혜



배정혜: 근데 공연 후 뜻밖의 반응들이 나왔어요. 〈타고 남은 재〉는 지금 여러분들이 흔히 말하는 배정혜의 ‘바기본’을 중심으로 구성을 했어요. 상체 운동, 그 다음에 하체 운동, 허리 운동 이렇게 세 부분에 초점을 맞춰 공연을 진행했었지요. 〈타고 남은 재〉는 러닝 타임이 50분간이었어요. 여기서 제1장은 상체의 필링을 주로 하는 바기본, 그 다음에 제2장은 하체를 주로 하는 바기본, 마지막 제3장은 상하체와 허리 부위 운동을 다 합쳐 영혼의 세계를 그렸어요. 보러 오신 분들의 반응은 정말 뜻하지 않은 것이었어요. ‘한국 무용에 나가야 할 길을 열어주었다’ ‘새 지평을 열었다’ ‘한국무용을 어떻게 창작해야 되는지에 방향을 제시해줬다’는 식으로 엄청 획기적이라는 평을 받게 되죠. 그래서 삼촌하고 저하고 예술 세계가 그때서부터 갈라지기 시작했어요. 나는 나대로 배정혜의 세계를 찾게 됐고, 삼촌이 추구하는 신전통 그런 추구는 삼촌대로 활동하시게 돼요. 그때 당시 사진도 별로 없고 비디오는 더더군다나 없었고. 그래도 〈타고 남은 재〉를 보신 분들이 10년, 20년이 지나도록 계속 〈타고 남은 재〉를 거론하셨고, 그 사이에 〈동아일보〉 기획 기사에서 창작무용의 역사적인 수작을 고르는데 〈타고 남은 재〉가 1위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저의 창작 세계는 〈타고 남은 재〉로 그렇게 시작됐죠.

김채현: 채희완 선생님이 〈타고 남은 재〉에 대해서 조금 궁금하신 게 있으시다 하십니다.



 

채희완: 1977년이면 저는 기껏 대학 때 탈춤 정도 몸을 익히곤 했던 시절로서, 이른바 예술춤이라는 것에 접근하지 못했던 때였는데요. 다행히 국립극장에서 해마다 송범선생님의 무용극이 대작으로 공연되곤 했었습니다. 거기 공연 갔다가 저도 이 작품을 보게 됐습니다. 저는 보고서도 잘 받아들이지 못했고 무슨 내용인지도 잘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탈춤에서 접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었는데요. 그러다 월간지 〈춤〉 지상과 일간지에 당대의 평론가 선생님들의 평문이 실렸었어요. 방금 선생님도 말씀하셨듯이 “타락된 우리 춤, 재미, 흥미, 보기 좋은 것으로 치달았던 우리 춤에 경종을 울리면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것이 박용구 선생님의 표현이었습니다. “우리 춤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라고도 하셨고. 그리고 이순열 선생님은 〈타고 남은 재〉의 제목에 빚대어서 “쓰러져 가는 잿더미가 된 이 우리 춤에 그나마 마지막 불씨를 얘기하는 듯한데, 그 불씨가 바로 배정혜 선생의 이번 작품이다. 이로써 새로운 한국춤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이렇게 표현을 하셨습니다. 더욱 감동스러운 표현은 조동화 선생님이셨는데요. “이 무섭도록”으로 시작하는 그날 12월 1일은 눈이 많이 내렸던 모양이죠.

배정혜: 네, 맞습니다. 눈이 내리고 강산같이 쌓여서 우리 집에서 국립극장(서울 남산 중턱)까지 걸어갔어요. 그래서 리허설을 못한 채 공연을 했어요. 리허설 시간 지나서까지 출연자 단원들이 다 못 온 거예요. 나 자신도 그때 눈이 너무 와서 국립극장까지 걸어갔어요. 그렇게 획기적인(?) 날이었어요.

김채현: 어디서부터 남산의 국립극장까지 걸어가셨어요?

배정혜: 광진구였지요. 선화예술학교에서 걸어가서 국립극장에 3시 반인가 3시 50분에 도착했어요. 출연자들이 한 서너 명 오고 나머진 안 왔고 5시, 6시에나 모두 왔어요. 그래서 출연하는 통로만 확인하고 바로 공연으로 들어가니까 조명도 그냥 바로 비추었고… 제 역사에서 그런 공연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김채현: 참 역사적이었군요. 〈타고 남은 재〉 공연한 그날이나 심층 인터뷰하는 오늘이나 날씨까지 기억하는 인연이 있습니다.

채희완: 조동화 선생님의 표현으로 “무섭게 눈이 내리던 날, 컴컴하기만 한 참 고통스러운 역경에 해당되는 그곳의 극장 안에서 더할 수 없는 우리 춤으로서 예술적인 향훈을 처음 맡았다”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지금 내 심정은 너무나 감격스럽고, 행복감에 젖었다” 그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배정혜: 채희완 선생님이 소개하시는 그 말씀은 제가 처음 듣습니다.채희완: 조동화 선생님이 그때 쓰신 글을 제가 지금 요약해서 말씀드리는 건데요. “눈이 무섭게 오는 12월 1일 날 겨우 겨우 찾아가서 봤는데 그때 눈 내리고 그 길이 막히고 그것이 바로 한국춤의 상황과 같은 것이었다. 그 극장 안에서 나는 그 춤을 보면서 알 수 없는 우리 춤으로서 처음 예술적 향훈을 맡았다. 감격스럽다. 지금 너무나 행복하다.” 그러고서 “아직도 구체적으로 발끝에서부터 손끝까지 그 춤사위가 하나하나마다 의미가 있고 깊이 있고 생각을 하도록 한다. 구경하라고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생각에 잠기게 하고 있구나. 그래서 한국춤에 대해서 가졌던 당대의 기본적인 인상을 씻어낼 수 있었다. 그래서 고맙다.” 그런 표현을 하셨어요. 근데 무엇이 그렇게 그 평론가들께서 감격스럽게 받아들였는지 저는 그것이 참으로 궁금했었습니다. 그냥 어떤 느낌을 얘기하셔도 좋고 ‘어떤 것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왜 그 평론가분들이 그렇게 보셨을까’를 얘기하셔도 좋겠습니다. 그리고 전제가 있습니다. 타락한 한국춤, 그 시대의 한국춤을 타락한 것으로 보고, 구경거리로만 보고, 예술 이전의 것으로 치닫는 그것에 대해서도 아주 고통스럽게 생각하셨던 그분들의 얘기였거든요. 그러니까 더욱더 저희로서 궁금한 것은 ‘그 실제 내용이 어떠했길래 선생님들이 그런 감개무량한 표현을 하셨을까’하는 점입니다.

배정혜: 이제 거의 50년이 가까운 예전 얘기들입니다. 예술의 길은 어렵고 험난한데, 선생님들이 저에게 힘을 주신 것 같아요. 이순열 선생님, 조동화 선생님, 정병호 선생님, 박용구 선생님 또 이렇게 우리 채희완 선생님… 그때부터 저는 그 신체 훈련 메소드를 갈고 닦으면서 직업무용단에서도 계속 그걸 갖고 운용하게 됐죠. 지금까지도 그 메소드를 선화예술학교 학생들은 배우고 익히는 중이지요. 그래서 메소드를 앞으로도 발전시키는 데에 중점을 두고 앞으로 얼마큼 살는지 모르지마는 사는 데까지 거기에다 힘을 모을 생각입니다.

김채현: 채희완 선생님이 궁금해하시는 게 그 당시 평론가들이 타락한 어떤 춤들에 비해서 선생님 춤이 굉장히 참신하다고 하셨는데, 그러니까 배정혜 선생님 생각하시기에 그분들이 ‘어떤 점에서 참신하다고 느꼈을까요?’하는 점입니다.



배정혜 〈타고 남은 재〉 ⓒ배정혜



배정혜: 네. 지금 얘기하는 바기본에다 그 호흡이 몸에 알알이 들어간 동작을 관객이 함께 느꼈던 거예요. 그것은 바기본에 입각한 동작이었지 딴짓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그때 당시는 신전통 내지 전통이 유행했기 때문에 무용가 선생님들은 당황해하셨어요. 그래서 무용가 선생님들한테는 좋다는 얘기를 별로 못 들었어요. ‘배정혜가 그렇게 잘 추는 춤은 왜 안 추고, 그런 춤을 추느냐’는 얘기를 많이 들었지요. 근데 평론하시는 선생님들의 눈은 달랐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맨날 김치만 먹다가 버터를 먹으면, 그 맛을 아는 사람은 알지만 버터 맛을 잘 모르잖아요, 김치 맛만 알지. 그러니까 왜 김치를 안 하고 왜 버터를 하느냐는 식으로 인식하는 쪽이 절반이었죠. 그래서 그때부터 나는 신전통에서 전통을 생각 없이 전개하는 그런 양상이 너무도 싫었어요. 그래서 전통도 바기본에 의해서, 바기본을 응용해서 춤을 추면 전통에서도 굉장히 알알이 살아 올라와서 사람들 가슴에 박히도록 출 수 있는데도 그냥 눈으로 흘러가는 전통을 추는 전통이 많거든요. 5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걸 나는 주장하고 있어요.

채희완: 지금 이제 아주 겸손하게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바기본, 12가지 호흡법에 맞춘 바기본에 해당되는 것을 기초로 해서 그 움직임을 한 것일 따름인데, 그것을 평론가들은 두 가지 뜻으로 받아들이신 것 같아요. 하나는 ‘새로운 우리 춤 언어를 개척해내는 첫 걸음으로 보인다.’ 또 하나는 ‘흥과 멋으로만 얘기하는 우리 춤의 성격이 정밀하고 유현한 세계로 진입할 가능성을 열어줬다.’ 그러니까 새로운 춤 언어 개발 그 다음에 흥과 멋으로만 한정돼 왔던 우리 춤을 정밀하고도 유현한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 정신적인 깊이를 갖추게끔 이끌어냈다, 그 두 가지인데요.
그리고 또 자료를 보니까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그날 공연이 1부, 2부로 나뉘어서 1부에는 〈타고 남은 재〉 말고도 소품으로 〈풀잎〉 〈북춤〉이 있었고요. 2부에는 〈심청의 노래〉 배명균 선생님의 안무 외에 〈슬픔을 넘어 몸을 바쳐서〉라는 제목의 소품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제 눈길을 끈 것은 〈슬픔을 넘어〉라고 하는 소품의 제목 이름이었어요. 또 하나는 〈몸을 바쳐서〉라는 것이 춤 제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제목만 봐서도 울컥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리고 또 딴 자료를 보면 황병기 선생님이 작곡을 하시고 선생님의 발언을 인터뷰한 내용을 어디다 적어놓은 것인데요. “한영숙 선생님의 승무의 세계를 빌어와서…”

배정혜: 범패를 이용해서 작품을 하였지요.

채희완: “한영숙 선생님의 춤의 세계, 그 작품을 토대로 해서 처음에는 우리가 세계에 나오기 전에 명(冥)의 세계, 어둠의 세계, 그 다음에 색(色)의 세계, 그 다음에 멸(滅)의 세계로 진행되는 영혼의 유랑이랄까요, 유전이랄까요? 영혼의 세계를 얘기했다.” 이렇게 얘기를 하셨거든요. “한영숙 선생님의 춤의 세계, 춤사위를 바탕으로 해서 춤을 새로 마련했는데...”하고, 그렇게 선생님이 어느 인터뷰를 하셨어요. 기억나세요?

배정혜: 네.

채희완: 한영숙 선생님의 춤 세계와 어떻게 그렇게 연결하셨는지, 그것도 참으로 궁금한 바입니다.
 

김영희: 구체적으로 하나만 질문드리면 〈타고 남은 재〉의 대본을 누가 쓰신 건지 궁금합니다.

배정혜: 지
지금까지 서울시립, 국립무용단, 또 리을무용단에서 공연한 저의 작품들에서는요 대본가는 없었어요. 제가 대본을 썼는데, 이제는 국립이나 시립에서는 대본비가 나와요. 그래서 대본료 지불 항목은 설정되어야 하고 ‘대본비를 누구한테 드릴까’ 생각했을 때, 그 분의 명의로 대본비는 드리고 프로그램상에는 어느 분의 대본으로 돼 있는데, 사실은 제가 한 작품은 남의 대본으로는 공연을 안 했어요.. 〈춤 춘향〉도 그렇고 〈Soul 해바라기〉 〈타고 남은 재〉도 그렇고요.

그런데 황병기 선생님께서 저의 세계를 잘 이해해 주셨기 때문에 황병기 선생님하고 일을 하다가 황병기 선생님이 너무 바쁘시고 해서 다른 작곡가를 만나면 그 작곡가가 제 마음을 몰라줘요. 몰라줄 때 또 내가 엉엉 울며 황병기 선생님을 찾아가요. 그러다 보면 그 작곡가한테는 돈을 지불하면서도 황병기 선생님께 드릴 돈은 없게 돼요. 그러면 그냥 공짜로 또 음악을 받아요. 그래서 공연을 황병기 선생님 음악으로 많이 공연했죠.

김채현: 네, 계속 질문해 주시겠습니까?

김영희: 〈타고 남은 재〉 발표할 때, 선생님 나이가 35살이었어요. 그 연배에 명의 세계, 색의 세계, 멸의 세계, 이런 주제를 뽑아낸 것 자체가 저는 놀랍습니다.

배정혜: 1장이 명의 세계고, 또 2장은 색의 세계. 인간 세계에서 이런저런 사건이 많이 생기고 탐욕과 여러 가지 욕구가 행해지는 사건을 얘기했고, 3장은 우리 영혼의 세계가 어떨까, 우리 영혼의 세계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아무렇게 해도 답이 되는 거예요. 거기에는 가본 사람이 없으니까요.

채희완: 말씀에서, 바기본과 지금 1장 2장 3장으로 구체적으로 나누면서, 1장은 상체 움직임을, 2장은 하체 움직임을, 3장은 허리 움직임을 중심으로 합니다. 그 각각마다 하나는 명의 세계, 어둠의 세계, 세상에 나오기 전의 세계, 그다음에 현실 세계인 2장은 하체 중심의 움직임으로 현실 세계, 색의 세계, 그리고 허리 중심으로 한 3장은 멸의 세계에 있다는 그 연결이 독특합니다. 아주 의미 깊은 바의 어떤 운동의 성격과 그것이 지닌 표현에서 드러낼 수 있는 어떤 정신적인 세계, 어떤 의미의 세계, 이런 것과 어떻게 그렇게 연결을 시도했는지 궁금합니다.

배정혜: 상체의 세계는 혼의… 그러니까 하체가 없이 상체가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하체에서부터 발바닥에서부터 혼이 올라와서 숨이 올라가서 상체로 가서 머리에 세계까지 퍼져나가는 거니까 이 세상의 세계가 아닌 저 세상의 세계는 그럴 것이다. 그러니까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어요. 그냥 그런 느낌으로 하니까 사람들이 공감을 해준 거죠. 세상살이를 사는 얘기가 적당한 하체, 그다음에 이 머리에서 떠나 공중까지 혼이 떠도는 그런 필링의 깊은 세계는 상체로부터 나오고 또 상체는 하체에서부터 올라오는 거지 상체에서부터 상체가 나오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저 세상,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의 세상은 그럴 것이다…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 돼요.

김영희: 그 당시 공연에 참가했거나 아니면 관람을 했던 제자분이 있으시면 그 공연 상황에 대해 좀 설명을 보충해주시면 얘기가 좀 다양해질 것 같습니다.

김채현: 혹시 오늘 이 자리에 그 당시에 출연하신 분 계세요?김수현: 저는 출연은 하지 않았고 관람을 했었어요.

김채현: 네, 귀한 경험을 듣게 됩니다. 어땠는지 잠시 소개해 주시지요.

김수현: 김수현입니다. 77년도 그때 저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어요. 겨울이었고요. 그때 선생님은 광진구에서부터 걸어가셨다고 했는데, 저는 동대문에서 걸어갔던 기억이 있어요. 그때 내려서 국립극장 그 고개를 올라가다 보니 되돌아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는데도 네 발로 기어서 가다시피 하며 갔었어요. 언덕을 오르며 중간중간 벽을 잡아가면서 간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 레퍼토리를 얘기하시니까 그런데 〈타고 남은 재〉에 대해서는 제 기억이 또렷해요. 리허설도 못하셨다고 하는데 첫 무대가 열리면 큰 무대 끝에 남자가 이렇게 천 같은 거 두르고 있고 여자가 거기에 매달려서 추고 있는 그런 호흡들로 진행하는데 아까 채희완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작품이 어땠길래 그런 평들이 나왔느냐 그렇게 말씀을 하셨었거든요.
근데 앞의 1, 2부하고 다르게 3부에서는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춤이 네 박자라든가 두 박자별로 굴신이 있거나 동작에 변화가 있거나 너울너울이라는 어떤 움직임들이 있었다면, 〈타고남은 재〉에서는 그런 굽이 굽이가 생략된 한 호흡으로 공간 속으로 뻗쳐나갈 수 있는 호흡을 유지하기 위한 호흡의 움직임들이 주 포인트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한 호흡에서 수제천 음악과 그다음에 선생님은 범패 음악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음악의 호흡의 시작과 끝이 어딘지 잘 모르던 어린 마음에는 그냥 조금만 있는 느낌이었던 것 같은데 그 안에서 이렇게 쭉 뻗고 있는 느낌 그런데 그 호흡 하나만으로도 동작 없이 뻗고 있는 거 하나만으로도 공간을 다 채우는 그 무용수들의 노력이 보였다고 할까요? 그리고 푸르스름한 조명으로 대각선으로 이렇게 쭉 펴지는 공간 속에 ‘내가 이쁘다’라는 춤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의 존재로서의 움직임을 표현하려고 하는 그런 작품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 뻗는 그 자체가 우주로 향하는 느낌, 그다음에 이렇게 엎어져 있어도 고뇌하는 느낌… 그 당시 우리 춤에서는 고뇌라는 표현보다는 그냥 흥에 겨워 추는 춤이 많았다고 하면 그런 인간 내면의 심상을 표현하는 움직임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씀들을 하지 않으셨을까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배정혜: 지금 김수현 선생을 고1때 봤어요. 이제 이렇게 나이가 들었어요.(웃음)

채희완: 1장, 2장, 3장 표현의 내용을 얘기로 말씀하실 수 있지 않을까 싶군요.

배정혜: 설명은 좀 어렵지요. 춤은 보며 느껴야지 설명으로는 잘 안 된다고 봅니다.

채희완: 특히나 아까 언급하신 명(冥)의 세계라든지, 색(色)의 세계 같은 거는 오히려 ‘말보다 춤이 더 본연에 가깝게 근접해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아마 그 점에서 보는 사람들이 ‘정신적 깊이를 느꼈다’ 이렇게 반응하죠. 정신적인 깊이는 사유하는 것인데, 그것을 ‘느꼈다’고 표현하는 것으로 봐서는 이렇게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말하자면 이제 개념적 인식의 체계와 감성적인 인식의 어떤 체계와, 또 달리 이를 통합하는 인간 마음의 움직임을 한꺼번에 총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쓰지 않았나 싶습니다. ‘정신적 깊이를 느꼈다’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정신적 깊이란, 평론가분들은 ‘정밀하다. 심오하다, 아주 고요하고 단정하고 뭉쳐져 있는 그런 정적(靜寂)의 세계와 좀체로 알 수 없는 어둠의 그윽한 연속 같은 유현(幽玄)의 세계, 그 극한, 그것의 복합, 그 규모와 실체를 알 수 없는 그런 제약이 없음의 세계를 느꼈다’는 것이 아닐까요? 선생님의 〈타고남은 재〉의 그 표현은 단순히 생각의 내용을 전달했다기보다는 ‘몸의 언어로 표현된 것을 통해서 생각의 내용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고, 그것이 조금은 이성적으로 날카롭게 보려고 하는 비평가들에게 그런 감동스러운 소감을 말할 수 있게끔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김채현: 김수현 선생님, 혹시 그 당시 봤었던 〈타고 남은 재〉의 어떤 춤적 이미지를 기억나는 대로 오늘 실례가 안 된다면 한번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김수현: 제가요?

김채현: 네, 지금 기억하시는 거 보니까 춤적 이미지도 궁금한데 사진도 별로 안 남아 있어서 조금이나마 재현이라 할까요….



ⓒ춤웹진



김수현: 그럼 여기서 다른 사람을 상대로 한 동작만 소개해볼게요. 그냥 손 하나 이렇게 천천히 뻗었다 보는 걸로 하고…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해서 이걸 타고… 이렇게 가는 동작이 하나 있어요. 옆에서 이걸 미리 커버하고 그 남자는 저쪽으로 봐. 그렇지 이렇게 해서 이렇게….

배정혜: 돌려짚기로 들어가서… 돌려짚기는 회음을 얘기해요.

김채현: 보통 1대1 인터뷰하면 이렇게 확인하기는 어렵지요. 열성파가 계시니 도움을 받게 됩니다. 공개 인터뷰가 풍부한 자리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모두: (웃음과 박수 이어짐)

김영희: 배정혜 선생님, 방금 동작에 대해서 회음이라고 말씀하셨지요?
 

배정혜: 돌려짚기는요. 모든 움직임에서 근본이 되는 초점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러니까 얼굴의 눈동자가 우리 마음을 다 표현하듯이 몸의 눈동자가 돌려짚기에요. 몸의 눈동자. 다 말하듯이 심리의 변화, 표현의 변화, 또 상황의 변화를 그냥 눈으로 얘기하는 것은 쉽잖아요. 근데 돌려짚기 말하자면 쉽게 얘기해서 회음에 감각이 가는 거죠. 감각이 표현의 상세한 부분까지 다 회음으로 표현이 가능한 것이지, 눈으로 다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보통 그냥 눈으로 추면 춤은 굉장히 쉬워요. 나는 3살 때부터 춤을 췄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춤이 쉽고 어떻게 하면 어렵다는 걸 다 알죠. 근데 눈으로 추면 너무 쉬워요. 근데 회음이 몸의 눈동자예요. 그 눈동자가 모든 표현을 얘기하죠. 방금도 이렇게 뻗었는데 몸의 눈동자가 안 들어가고 뻗으면 그게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눈동자가 들어감으로써 이게 되는 겁니다. 이러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유행하는 팝, 이런 춤에도 다 눈동자가 들어가서 추면 그것이 일류가 될 수 있거든요. 쉽게 얘기해서 마이클 잭슨은 눈동자가 들어가요. 근데 마이클 잭슨 춤을 흉내내는 사람들은 눈뜬다고 모습만 흉내 내더라고요. 춤은 움직임의 언어인데, 근데 눈동자가 빠져버리면 그 언어력이 춤에 안 들어온다고요. 그래서 그걸 강조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바기본을 배정혜 것이라고 여길 게 아니고 우리 거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춤에 눈동자가 들어가야 되는 것이지요, 돌려짚기가. 근데 그것을 아웃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발레는 아웃을 해서 하니까 아웃이라 하면 되는데, 한국춤은 아웃을 하고 추는 춤이 없어요. 이것은 감각이 들어가는 걸 얘기하는 것이거든요. 감각이 들어가는 걸 얘기하기 때문에 그거를 회음이라고 말을 할 수도 없고, 그래서 그냥 제가 그냥 돌려짚기라고 오십 년 전에 말한 게 지금까지 돌려짚기에요.김수현: 말씀하신 눈동자하고 회음의 감각을 하다 보면 눈동자를 통해서 시선이 생기는 거잖아요. 감각이 들어왔느냐면 몸에 시선이 생기는 거잖아요.

배정혜: 몸의 표현과 표정이 있어서 움직이는 거잖아요. 그래서 표정이 있으면 어느 움직임이든 좋아지는데 표정을 빼고 이렇게 잡아오면 보는 사람에게 어필이 안 됩니다. 〈타고 남은 재〉는 그걸 사용을 해서 여러 가지 호흡을 사용한 춤이었어요.


세 작품: 〈유리도시〉

김채현: 자, 〈타고 넘은 재〉 소개는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이 준비하신 세 작품의 영상을 보며 인터뷰를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영상을 보시면서 멈추시고 말씀하셔도 됩니다. 먼저 〈유리도시〉 영상이 나옵니다. 편안히 말씀하시지요.

배정혜: 이거 지금 그 하체가 덜 들어갔습니다. 하체가 덜 들어가면 이렇게 허우적대는 춤이 돼버려요. 이거 춤이 덜 됐어요.

김채현: 말하자면 밥으로 치면 좀 설익었다, 양념에 간이 좀 덜 됐다? 그렇게 비유할 수 있는지요.

배정혜: 이것도 약간 덜 들어갔어.



배정혜 〈유리도시〉 ⓒ배정혜



김영희: 〈유리도시〉 하실 때 어려운 점은 없으셨어요?

배정혜: 네, 작품할 때는 항상 어렵죠. 그래서 〈유리도시〉는 솔직히 그때 옷을 벗고 추고 싶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비치는 비닐을 의상으로 입었는데, 의상 디자이너가 잘못 하여 막 찢어져서 공연 3일 전에 의상을 못 입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틀 사이에 또 천을 마련해서 밤새워서 딴 의상을 해서 입힌 작품이 〈유리도시〉예요. 그러니까 원래 옷 벗고 추고 싶었는데 벗을 수는 없고 비닐로 했었는데 비닐이 잘못 되어 결국 의상이 이렇게 됐어.

김채현: 그럼 그 비닐 의상이라는 게 주역이신 선생님이 입으실 의상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배정혜: 전체 다이지요.

김채현: 그럼 다른 출연진이나 선생님이 착용한 그 천의 질감은 어떤 겁니까?

배정혜: 재질이 똑같았어요. 조세또였어요.

배정혜: 급히 조달한 의상이지 제대로 창작된 의상이 아니었어요.

김채현: 방금 말씀하신 덜 들어갔다는 그 부분들이 지금도 마음에 안 드십니까?

배정혜: 몸이 들어갔다 빠졌다 합니다. 지금 내가 코치하면 저렇게 안 추는데 내 코치 없이 춰서 그래. 그러니까 저 당시만 하더라도 내가 돌려짚기가 그렇게 중요하다는 걸 덜 인식했던 것 같아요.

김채현: 〈유리도시〉는 1987년 11월 초연의 공연작이죠. 87년 초연 공연 현장을 찍은 거죠? 〈타고 남은 재〉 이후 꼭 10년 만에 이 작품을 하신 거예요.

배정혜: 지금 영상은 그후 되게 늙어서 췄나 봐. 언제 춘 건지 기억이…, 음.

관객: 시댄스 행사에서 배정혜 선생님 초청 공연으로 할 때 하신 것 아닐까요?

배정혜: 김수현 선생이 군무 중에서 주인공으로 추었어요. 내가 20명을 다 코치하고 내가 솔로를 하다 보니까 내 몸에서 진이 좀 빠진 것 같아.

김채현: 〈유리도시〉를 제가 좀 정리해봤습니다. 여러 자료 그리고 춤 공연. 그전에 제가 한 가지만 질문할게요. 토월극장에서 1997년인가 〈유리도시〉 재공연을 했어요. 87년에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했고, 토월극장에서 할 그때가 1997년…

배정혜: 내가 서울시립에 가 있을 동안 〈유리도시〉를 한 그때를 말씀…

김채현: 네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1997년에 찍어뒀어요. 지금 여쭙고 싶은 것은 이 〈유리도시〉의 내용 그러니까 산업사회 또는 억압 사회 그런 것에 대해 춤을 추신 거죠. 그런 것을 염두에 두시면서 춤을 추신 것 아닙니까? 산업사회에서의 억압이나 인간성 상실, 그런 점 말입니다.

채희완: 리을무용단의 〈유리도시〉 얘기가 진행되고 있는데요. 리을무용단과 선생님의 관계도 알고 싶은 바인데요. 공연 작품 목록에도 나와 있듯이 그 맨 처음이 리을무용단 오은희 선생의 〈대화〉였었죠.

김채현: 리을무용단 창단 공연이 1984년이었고, 창단 공연 때 공연 제목이 〈오은희의 대화〉였지요.

채희완: 그 내용도 저는 한국춤에서 기피해왔던 시대의 삶과 또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과의 얘기를 나누고자 하는 그런 주제의식이 처음부터 비춰져 있었다고 이제 보는 겁니다. 그 다음 작품도 1985년 황희연의 〈들꽃으로 살아〉였지요.배정혜: 저기 〈대화〉가 84년이고, 〈들꽃으로 살아〉가 85년, 〈유리도시〉가 87년이지요.



배정혜 〈유리도시〉 ⓒ배정혜



채희완: 그 일련의 작업을 보면 이런 판단이 듭니다. 이른바 한국춤에서 소재, 내용, 주제로서는 기피해왔던 시대의 삶과 시대성 또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자 하는 그 주제 의식이 창작 욕구로 비춰져 있어서 저로서는 동지감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저의 춤비평에서 생각의 첫 실마리가 리을무용단 오은희 안무의 〈대화〉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유리도시〉는 리을무용단의 성향과 여러 면에서 관통하는 무엇이 있는 듯하였습니다. 〈유리도시〉를 보고 저는 충격적인 것을 느꼈습니다. 그 다음 날에 또 다시 봤어요. 왜, 무엇 때문에 이렇게 충격적인가? 내가 감회어린 기분을 왜 이렇게 갖게 되는가, 그래서 단순 감상자가 아니라 관찰자 입장에서 두 번째 볼 때는 분석적 시각으로 봤었는데요. 거기서 여러 가지 선생님이 추구하는 주제의식과 그것의 한 매체인 춤 언어 표현에서의 어떤 의미 체계를 어떻게 연결시키고 있는가, 그것이 굉장히 궁금하기도 하고 핵심적인 것이 아니었겠는가, 그렇게 따져보았습니다. 그 이후에도 선생님이 서울시립이나 국립이나 여러 단체들과 작업할 때에도 그런 흐름이 이어지는 것을 느꼈는데요. 물론 그 단체의 성격에 따라서 조금씩 다릅니다마는 그것을 맨 처음에 확실하게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저는 〈유리도시〉를 본 거죠. 〈유리도시〉는 삶의 평화스럽거나 자연스러운 그런 모습을 기하지 못하게 하는 어떤 억압적인 상황과 더불어서 도시적 상황, 도시적인 어떤 풍경을 얘기하면서 거기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사연을 담고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노동자 대투쟁이라는 87년도여서 그런 느낌이 더욱 강했었는데요. 저는 저의 편중된 시각으로 봐서 그런지 혹시 저거는 광주 사태를 얘기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까지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닙니다. 그런데 보는 사람에 따라서 어떤 도시의 시대 상황이 던져주는 위기를 대결 국면으로서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 해서 선생님의 작품의 속 의도를 정말 알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 인상을 주는 것이 여기저기 상징적으로, 은유적으로 보여졌어요. 콘크리트가 깨지고 철근만 남은 앙상한 그리고 아주 위협적인 그런 대소도구 물체, 철과 대결하고 있는 힘을 잃은 여인들의 모습, 그것이 또 특히 허물어진 콘크리트 철근 뼈대를 들고 있는 사람이 그 카키색 복에 군복 같은 인상을 주고 있어서 더욱 그러했습니다. 장대를 들고 홀로 싸우는 여인, 또 항거하는 광주시민들의 그런 이미지하고 적극 연결해서 본다면 또 그렇게도 볼 수도 있겠구나 싶었던 거죠.

배정혜: 제 의도랑 거의 비슷하게 보시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남자 군복을 입히고 철창 같은 걸 들게 한 거는 사회의 억압적인 제도 또 잘못되어가는 정치 제도나 이런 것이, 어느 대통령이 특별히 잘하고 못하고 그걸 지적하는 게 아니라, 그런 사건이 우리 사회에서는 도시에서는 특히 그 흙 냄새를 못 맡는 콘크리트 속에서 그 사회 제도까지도 인간의 마음을 억압하는 그런 것으로 느꼈거든요. 그래서 제목으로 유리도시가 나오기까지는 엄청 고민했었어요. ‘무슨 도시로 할까? 도시는 도시인데 무슨 도시로 할까’ 굉장히 고민하다가 유리도시가 나왔지요. 근데 지금 채 선생님이 보신 대로 저도 그런 걸 느끼고 안무를 한 것 같아요.

김채현: 채희완 선생님과 배 선생님의 의견을 합쳐 보면 〈유리도시〉에서 그 당시 군부 독재라든지 그리고 더 심하게는 1980년에 있었던 광주민주화운동 그런 것까지 포함해서 함께 연상할 수 있다는 그런 뜻입니까?

배정혜: 예, 그렇습니다. 저는 예술이라는 것을 이렇게 생각해요. 그 빨간 것을 던지는 예술가가 어떤 생각을 하고 빨간 칠을 해놓으면 느끼는 사람이 여러 색깔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예술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채희완: 그래서 여기서도 나옵니다마는 살풀이는 살풀이인데, 붉은 색깔의 살풀이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배정혜: 그 붉은 색깔을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지만, 가슴 속에서 피가 터지는 걸 염두에 두었어요.

채희완: 살풀이의 붉은 천이 나오는 대목에서 콘크리트 철근을 옆에 두고서 말하자면 가슴에서 심장에서…

배정혜: 심장에서 빼내는 걸로 했지요.

채희완: 핏줄기 같은 수건이 계속 뿜어져 나오거든요. 거기서 추는 춤은, 그렇게 추게끔 만든, 붉은 피가 흐르게 만든 철근 콘크리트와의 대결 국면이 아닐 수가 없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습니다. ‘붉은 천이 나오는 그 가슴 심장의 한가운데서부터 이 춤은 출발한다’ 이런 뜻으로 보게끔요.

배정혜: 근데 이 비디오에서 나오는 춤은 그 표현이 좀 덜하였지요. 지금 내가 이렇게 코치한다면 야단 맞을 사람이야. 그러니까 몸에서 피가 더 튀겨야 되는데, 여러 무용수들 다 가르치고 내가 추려니깐 지쳐가지고, 이 자료는 내가 조금 못 출 때 찍었던 거 같아요.


세 작품: 〈춤 춘향〉

김채현: 혹시 후년에 한 번 더 할 수도 있을지도 모르지요. 자, 이제는 〈춤 춘향〉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때는 이제 국립무용단 예술감독 하실 적에 2002년도에 만드신 것이지요?

배정혜: 이 〈춤 춘향〉은 2001년도에 원래는 〈춘당춘색고금동〉이 첫 시초였어요. 그래서 봄의 춘향, 가을의 춘향, 겨울의 춘향 이렇게 춘향을 셋으로 했다가 나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1년 동안 다시 생각하고 좋은 장면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걸 살려서 다시 춘향 하나로 만들어가지고 2002년에 국가 브랜드로 상승하게끔 〈춤 춘향〉으로 만들었죠. 그래서 제목도 〈춤 춘향〉으로 바꾸고, 지금 여기서는 연출 국수호씨인데 연출이 몇 번 바뀌어서 네 번째에 국수호님 연출로 했어요. 내 안무는 안 바뀌는데 연출만 조금씩 바뀌시면서 또 보완하고 해서 국가 브랜드로 만들어 놓았죠. 그 당시 춘향전은 스토리상 춤으로나 영화, 창극, 연극으로나 성공이 불가능한 작품이었었어요. 저는 이순신 장군을 안무하기를 원했는데 8분인가 있었던 자문위원회에서 이순신은 왜 하냐고 막 난리였어요. 여자가 무슨 이순신을 안무하느냐고. 나는 이순신에 대한 안무 착상이 다 떠오르고 있었는데도 춘향전을 하라는 거에요. 자문위원회가 막강하니까 내가 반대는 못하고, ‘춘향전 안무는 실패다, 내가 했다 하면 실패니까 사표를 쓰고, 사표를 오늘 내나 내일 내나’하던 참이었어요. 저는 사표를 잘 쓰는 스타일이에요. 착상이 안 떠오르면 실패잖아요. 춘향전을 자꾸 안무하라고 그러는데 춘향전은 자신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진짜 사표 던지고 나 춘향전 안무 안 하고 국립무용단 단장 안 한다고 나가려고 그러는데 어느 저녁에 특이한 몇 장면이 생각나는 거야. 제일 하기 싫었던 장면이 이도령이가 그 담 넘어서 춘향이 방으로 찾아가는 장면인데, 그걸 무용으로 어떻게 해요? 근데 그 장면이 딱 생각난 거예요. 그 다음에 또 이도령이 암행어사로 출두하면 이관들이 막 겁을 내고 막 술 먹다가 다 달아나잖아요. 그런 장면을 무용으로 어떻게 하냐고 그래서 정말 사표 쓰고 다녔는데, 그 장면들이 생각나는 거야. 그래서 사표를 찢고 춘향전 안무를 시작했어요. 춘향전 대본도 말하자면 다 내 대본이죠. 국가 브랜드로 이렇게 자리잡게끔 돼서 뉴욕에 가서도 그 스토리를 외국 사람들이 다 알아요. 그래서 한국에서보다 외국에 가서 〈춤 춘향〉은 인기를 더 많이 끌었어요. 그래서 〈춤 춘향〉을 좀 자랑한다고 하면 ‘내가 춤으로 환원시킨 그 장면, 장면은 배정혜 아니면 안 된다’ 그렇게 생각을 해요.





배정혜 〈춤 춘향〉 ⓒ배정혜



김채현: 네, 국가브랜드로 하기까지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감사합니다. 지금 저는 두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먼저 국립무용단 내지는 국립극장에서 “춘향을 해보세요”라고 권유한 게 〈춘당춘색고금동〉하기 전입니까?

배정혜: 네

김채현: 2000년도쯤이겠네요?

배정혜: 2001년

김채현: 2001년에 국립극장에서 제안을 해가지고

배정혜: 2001년에 〈춘당춘색고금동〉을 하고 2002년에 〈춤춘향〉을 했지요.

김채현: 네. 두 번째 궁금증입니다. 〈춤 춘향〉을 국립무용단 예술감독으로서 하셨단 말이죠. 이때 국립무용단 그런 단원들이 다 출연하신 겁니다. 그렇죠? 그럼 당시에 춤을 충실하게 만들려고 하는 선생님 기준에서는 바기본이라든지 그것을 단원들이 충실하게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했습니까?

배정혜: 바기본을 국립무용단에서 철저하게 시켰어요. 서울시립무용단에서보다도 더 철저하게 시켰어요. 세계적 군무진이라는 평을 받은 것은 바기본의 덕분이라 생각해요.

김채현: 그럼 어느 정도로 철저하게 시켰는지 그것도 이제 궁금해집니다. 국립무용단의 단원들이 선생님과 더불어서 집단적으로 바기본 수련을 했겠죠. 그러면 예술감독으로 부임하시고 나서 국립무용단 내에서 바기본을 일주일에 몇 회를 하셨는지 안 그럼 매일매일 하루에 몇 시간씩 하셨는지?

배정혜: 바기본만 따로 충분히 할 시간은 직업 무용단에서 없었어요. 매일 공연 나가야 되고 자리 잡아야 되고 안무해야 되고, 그래서 하루에 30분 아니면 20분 그렇게 짧게 하지만 엑기스(알맹이)를 가르치니까 또 국립무용단 단원들이 우수하기 때문에 빨리 알아들었지요.

김채현: 그럼 하루에 30분이다 20분이다 그렇게 하는 기간은 6개월이냐 1년이냐, 아니면…

배정혜: 계속 해야죠.

김채현: 예술감독으로 계실 때 할 수 있으면 하셨다는 말씀이군요. 그러면 〈춤 춘향〉을 하실 적에 선생님 기준에서 단원들의 춤에서 좀 알찬 느낌이 났습니까?

배정혜: 솔직히 무척 바쁘니까 그렇게 마음에 들게까지 전 단원을 가리킬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잘 따라오는 단원 비율이 30%, 중간 비율이 50%, 이런 정도였고 전체를 다 상승시키는 훈련 시간은 없었습니다. 단장으로서 또 예술감독으로서 안무해야지, 또 공연 나가는 안무 따로 해야지, 이러다 보면 무대 위치 설정하고 순서 나가고 하다 보면, 그 기본 가르칠 시간은 직업무용단에서 흔치 않았어요.

김채현: 네, 잘 알겠습니다. 그러면 공공 무용 단체 관련하여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국립무용단 예술감독으로 부임하시기 전에 서울시립무용단 예술감독으로 쭉 계셨잖아요. 서울시립무용단에 계실 적에 선생님의 바기본을 국립무용단에 계실 때처럼 그런 빈도로 단원들한테 쭉 수련을 시키셨던가요?

배정혜: 서울시립무용단에서도 물론 그걸 강조했는데 그때만 해도 저는 국립에 갈 나이가 덜 됐잖아요. 그러니까 새 작품을 하는 데 더 신경을 썼지, 기본기를 가르치는 데 신경 쓸 시간이 좀 없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국립에서보다는 조금 덜 가르쳤다고 해야 할까.

김채현: 시간이 좀 적었다 이렇게 볼 수도 있겠죠.

배정혜: 하여간, 국립에서보다는 바기본을 가르칠 시간적인 여건이 좀 덜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새롭게 기본을 가르치고 새롭게 민속 무용 작품을 만들고 또 창작무용 만들고 했는데 너무 시간이 촉박했고요. 또 20회, 30회 있던 공연을 100회로 늘리려고 혼자 공연을 잡으러 다니고, 예산이 부족하여 재원을 구하러 다니고 하다 보니까, 시립에서 정열은 더 많았는데 가르칠 시간은 조금 부족했었어요.



ⓒ춤웹진



김영희: 네, 작품 얘기가 아니고 좀 다른 얘기인데요. 배명균 선생님이 선생님의 스승이시기도 하고 또 안무자이시기도 하고 그랬잖아요. 근데 이제 국립 단체로 가시고 그러면서 작품의 질이라든가 그런 것들이 달라졌을 텐데 배명균 선생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예술적으로 선생님 본인의 스타일을 내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시점이 어디쯤이었을지 궁금합니다. 배명균 선생님이 선생님의 작업을 많이 후원했다고 들었거든요. 선생님의 독자적인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한 작품 내지는 그 시기가 언제쯤인지 궁금합니다.

배정혜: 말씀드린 대로 1977년 〈타고 남은 재〉부터죠. 〈타고 남은 재〉로 싸우고 나서부터 서로 분리되었어요. 삼촌은 삼촌의 세계대로 활동하시고, 나는 나대로 창작무용에 필이 꽂혀서 하기 시작을 했죠.

김채현: 그럼 계속 〈춤 춘향〉 영상을 보시면서 좀 빨리 넘어가겠습니다.



- 이하 배정혜 심층 공개 인터뷰 제2편(춤웹진 2월호)으로 이어짐

2025. 1.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