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인터뷰이│ 미나유
유럽, 피나 바우쉬 관찰
미나유: 아니요? 그때 마침 뮌헨 단체에서 오디션이 있었어요. 당시에는 오디션을 유럽에서 하지 않고 전부 뉴욕에 와서 해요. 유럽의 댄서들은 지금은 좋아요. 근데 그때는 솔직히 유럽의 컨템퍼러리는 많이 약했어요. 그러니까 좋은 댄서를 구하기 위해서 다 뉴욕으로 오거든요. 뉴욕에서 오디션을 할 때 제가 응한 거지요. 그들은 댄서 한 명을 찾으러 오디션을 열었거든요. 그 오디션에 굉장히 많이 참여했어요. 뉴욕 스텝스스튜디오를 렌트해서 오디션을 진행했는데 100-200명이 많이 왔죠. 딱 1명을 뽑는다는데 어떡하겠어요. 마크 데이비스라고 제가 아는 응시자가 있었어요. 흑인인데 키도 크고 피부색도 연한 갈색이고 멋있었어요. 마크가 나타나는 순간 한 여자심사위원 눈이 막 반짝반짝하는 거예요. 그런데 다른 한 여자 데니스 제퍼슨은 자꾸 저를 쳐다봤어요. 저를 데려가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런 중에 다른 심사위원이 마크가 오는 순간 마크만 보니까 나중에 살짝 제 귀에다 대고 “쟤가 이렇게 머리 탁 돌리는 이런 걸 되게 좋아하니까, 너도 하다가 한 번 싹 돌려보는 게 어때”라고 해요. 그래서 저는 너무 가고 싶어서 도중에 머리를 탁 들었더니 “I love her” 그러는 거에요. 근데 뽑을 인원은 한 명인데 이 사람은 또 나를 좋아하고... 그래서 ‘둘다 데려가자’고 하여 제가 운이 좋게 독일에 가게 된 거에요.
김채현: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두 사람이었군요.
김예림: 선생님이 미국 처음 가셨을 때, 테크닉 말고도 표현력 같은 것에서 한 번 큰 벽에 부딪히셨다고 하셨는데 그것을 극복하신 과정을 듣고 알고 싶어요.
미나유: 제가 뉴욕에 갔을 때 조프리스쿨로 갔어요. 근데 길거리에서 어떤 동양 남자를 만났어요. 근데 걔가 헨리 유, 그러니까 마사그레이엄무용단의 유일한 동양 남자였어요. 근데 이 사람은 스페인에서 한 8년 살았고, 대만 사람인데 지금은 자기나라에서 교수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때 이 사람을 길거리에서 만났는데 그때 동양인이 많지 않았고 못 보던 얼굴이 있으니까 인사하게 된 거에요. 그러더니 저한테 이름을 물었어요. 그래서 제가 미나유라고 했거요. 그랬더니 ‘유’가 어떤 ‘유’냐고 물어요. 그래서 ‘모금도 유’(劉)라 했는데, 사실 모금도 유는 흔하지 않아요. 그러자 ‘넌 마이카드이다’ 해가지고 자기가 어디서 리허설을 하는데 그때 와서 보라고 해요. 근데 그게 가까웠어요. 제가 맨해튼 남쪽 그리니치 빌리지에 살았고, 그곳은 두세 블락 위였죠. 그래서 조프리 스쿨에서 클래스 끝내고 거기를 갔는데 들어갈 때 조금 섬뜩했어요. 공장 같은 그런 분위기였어요. 엘리베이터를 무서운 기분으로 딱 탔는데 어떤 남자가 누구냐고 물어서 헨리 유를 만나러 왔다고 그랬더니 ‘헨리 유는 리허설 시간이 2시간 이후라 지금 없다, 만나려면 들어와 있어’라고 그랬는데 듀플렉스였어요. 경영 기획자였던 것 같아요. 근데 밑에 가서 문을 딱 열고 엘리오 포마레(Eleo Pomare)가 나를 보는 순간 그 눈이 확 빛나는 거 있죠. 그러더니 그 사람들 둘이서 소근소근 거리더라고요. 그러더니 클래스를 하라는 거예요. 지금 컴퍼니 클라래스 시작하니까.
근데 저는 한국에서 나가기 전에 엄청난 교육을 받았어요. 외국은 무조건 가면은 선불 내야 되고, 뭐 내야 되고, 공짜 없다 이걸 다 듣고 갔었어요. 거기서 “I don’t have money.” 했어요. 제가 당시에 핑크 타이즈 그냥 입은 채로 그냥 갔거든요. 바지만 입고. 그랬더니 돈 안 내도 괜찮다고 그래서 들어갔죠. 컴퍼니 클래스인데 완전히 개인 지도하듯이 저만 계속 지도해주는 거에요. 근데 제가 그때 현대무용 별로 하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뉴욕 간 지 며칠밖에 안 됐어요. 또 분명 영어를 배우고는 갔는데, 뉴욕 영어는요 엑센트가 없고, 흑인영어는 특히 더 어려운 게 이게 높낮이가 없어서 그러니까 못알아 듣겠는데 미치는 거잖아요.
근데 그때 마침 그분이 블루포드 정글이라고 유명했어요. 그 작품이 이래요. 옷 딱 입고 춤을 추다가 “You Know? Jesus is not white. Jesus is Black Hallelujah!!!!” 막 이러니까 워싱턴 DC에서 화나죠. 예수가 블랙이라 그러고. 백인들이 일하는 그런 장소에서 막 그래 가지고 실력이 대단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랜트를 많이 못 받았어요. 그러다 그때 처음으로 굉장히 큰 그랜트를 받은 거예요. 〈레이디 맥베스〉를 하라고 받은 그랜트였는데 그 무용단에 레이디 맥베스를 할 사람이 없었나 봐요. 그러다 내가 문을 여는 순간에 ‘어?’ 이렇게 된 거에요. 그래서 클래스에 굉장히 집중했었고 다음에 계속 나오라 해서 “나는 못 나간다. 나는 학비만 갖고 왔기 때문에 더 이상의 엑스트라머니가 없어서 안되겠다”고 그랬더니 “3개월간 장학금을 줄 테니까 나와라”고 한 거죠. 그래서 3개월을 나가며 그 레이디 맥벡스를 준비하는 동안 뭐를 막 던져주는데 알아듣지도 못하고 그랬어요.
스튜디오 옆에 큰 주방이 있고, 엘리어는 거기서 살았어요. 엘리어는 뉴욕 예고 출신으로 아주 천재적인 사람이지 젊어도. 저보고 뭘 움직이라고 해놓고 안 되니까 팍팍 손을 빨리 털래요. “더 빨리 더 빨리 미친 듯이” 그렇게 떠니까 그 다음에 “멈춰.” 피가 내 몸으로 쫙 가는 게 느껴져요. “춤은 그런 거야. 너 뭐 하는 거니?” 그래서 이제 그걸 생각하는데 그 다음에 뭐 또 요구하는 게 안 되니까 냉장고에서 토마토를 갖다 탁 치니까 토마토가 탁 튀어 올라오잖아요. “That’s it.” 콩을 나한테 막 뿌리지 않나 달걀을 던지질 않나. 이렇게 하면서 배웠어요. 그러고서 레이디 맥베스를 한 거예요.
브로드웨이의 극장은 뮤지컬도 그렇고 뉴욕타임스 비평에 히트가 치면 극장 전체를 평문으로 도배를 하더라고요. 난 평이 난 것도 모르고 학교 갔다가 극장 공연할 때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같은 출연자 댄서들이 리허설을 하다가 막 와서 “미나!!” 하면서 막 이러는 거에요. 그래서 왜 그러는가 했더니 “너 밖에 안 봤냐?”해서 보니 평으로 도배가 된 거에요. 그래서 그 평으로 저는 시민권을 받았어요.
김채현: 빵 터졌군요.
김예림: 그렇게 선생님을 한번 흔들어서 이렇게 터지게 해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 안무자가 계속 그 노력을 했던 것 같네요. 선생님이 한 번 터지게 된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독일 가신 이야기를 마저 들어보고 싶습니다.
김채현: 혹시 피나 바우쉬를 만나셨던가요?
미나유: 제가 보러 갔죠.
김채현: 어떻게 만나셨나요?
미나유: 저는 부퍼탈에 2~3년 살았어요. ‘Mind Of Gap’이라고 탄츠테아터를 하는 젊은 단체가 있었는데, 그 단체에 들어갔어요. 그러니까 부퍼탈에서 살았죠. 제가 돈이 그렇게 많지도 않은 그 상황에서도 피나 선생님 거는 똑같은 작품을 티켓 3장을 사서 꼭 봤어요. 앉아서 보고. 그 다음에는 피나 선생님이 딱 앉아 있는 자리가 있더라고요. 거기만 쳐다보는데 나는 너무 좋았어요. 어느 날 보니까 선생님이 없어요, 갑자기. 그래서 물어봤어요. 제가 단원들도 다 알던 때였거든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보시다가 너무 화딱지 나게 무용수들이 못해서 집으로 갔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것까지 저는 다 관심을 갖고 봤어요. 세 번째는 저 꼭대기 층의 스탠딩 룸. 무릎에 티셔츠 말아가지고 끌고 앉아서 무릎이 아파도 끝까지 봤어요.
이지현: 그러면 혹시 부퍼탈무용단에 들어가셨나요?
미나유: 아니 들어가고 싶었는데요. 오디션도 없었어요. 그러다 3분 동안 선생님 눈 좀 빌려달라고 그랬어요. 그리고 제가 가졌던 솔로를 보여드렸어요. 좋아했던 거는 같은데 이틀 후에 뉴욕 브루클린의 페스티벌로 부퍼탈무용단이 떠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 달 후에 다시 오라 그랬어요. 그런데 제가 뮌헨 가서 좀 솔직히 말해 잘 나갔어요. 티칭도 많이 해서 돈도 많이 벌었고. 한 달 일을 안 하면 돈을 못 버니까 그런 계산도 좀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부퍼탈로 안 갔어요. 나중에 후회되긴 했지만 지금은 후회 안 해요. 내가 만약에 들어갔다면 어떻게 됐겠어요? 카피는 싫죠. 그리고 지금은 저도 변했어요. 그때 그렇게 그 작품이 좋았는데 지금은 저는 그렇게 흥미는 없어요. 이제 그래서 뭐 다 하느님이 알아서 하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죠.
한국무용에서 현대무용으로
이지현: 선생님 한국에서 처음 무용 시작하셨을 때 그 당시 우리나라는 어르신들이 막 발레도 하고 한국무용하다가, 외국무용하다가, 인도 남방무용 추다가, 일본 이시이바쿠 현대무용하다가 장르의 경계가 없었잖아요. 선생님은 신흥무용도 하시고, 발레하시고, 현대무용하시고, 탄츠테아터 형식도 하시고 몸으로 다 겪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마음이 드셨는지, 방금 이것도 저것도 다 후회하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이제 컨템퍼러리 안무와 그런 흐름에 대한 의견도 듣고 싶습니다.
미나유: 그러니까 제가 한국무용 한 것이 지금의 제 창작에 어떤 영향을 줬느냐는 이런 물음 같습니다. 저는 그래요. 그때 당시는 정말 한국무용을 많이 했습니다. 매일 매일 똑 같은 걸 반복하는 이 움직임이 구속일까? 구원일까? 그것이 제 소재였어요. 그리고 행복하지 않았어요, 그 어릴 때 제 인생이 맨날 똑같은 걸 반복하니까. 그런데 지금 또 생각해 보니까 새로운 걸 많이 하려고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꾸준히 반복했을 때 나의 감각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경험하는 아주 중요한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제가 철이 없어서 불행했었어요.
솔직히 제가 유학하러 나갈 때 비자 받는 게 하늘의 별따기였어요. 주한 미국대사관에 흑인 여자가 한 분 있었어요. 그 사람한테 인터뷰 걸리면 비자를 받는 사람이 없다고 그렇게 소문났는데 제가 그분한테 해가지고 떨어졌잖아요. 그래서 제가 1월 2일 날 떠난 걸 지금도 기억하는 이유는 그다음에 비자를 받자말자 바로 나가고 싶었던 때문이에요. 1월 1일 날 가려고 했더니 설이나 새고 가라고 해서 1월 2일날 나갔습니다.
그래서 후학들한테 그 얘기를 해주고 싶어요. 그때는 정말 철이 없어서 제가 비자 발급에 떨어졌을 때 못 나가면 어떡하지 그냥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만큼 절실했어요. 사람들한테 물으니까 수면제 65알을 먹으면 죽는다고 해서 제가 모았어요. 근데 많이 안 팔더라고요. 몇 개씩만 구할 수 있어서 여기저기서 사고 해서 50 몇 개는 모았어요. 완전히 죽으려면 60개가 넘어야 되는데 그걸 못 모아 먹다가 죽지도 않고 살면 어떡하겠어요? 옛날에는 성냥이 많았어요. 이런 큰 성냥통 아시죠? 그래서 65알까지 못 모아 가지고 50 몇 알 됐을 때 황을 먹으면 죽는다는 말도 들었거든요. 그래서 성냥을 모아 갖고 황을 갈고 다녔어요. 그걸 끼고 다니다가 비자 두 번째 못 받으면 저는 그냥 가려고 그랬거든요. 더 이상 안 살고 싶었어요. 근데 비자가 나와서 나가게 된 거죠.
김예림: 나중에 선생님이 〈인삼여인〉(Ginseng Woman) 같은 작품을 했을 때 한국무용의 경험이 도움이 되셨을 것 같아요.
미나유: 제가 유럽으로 옮기기 직전에 뉴욕의 리버사이드 댄스 페스티벌에 당시 뉴욕대 교수 스튜어트 호드가 저를 추천했어요. 젊은 사람들이 하는 페스티벌로 유명했죠. 그레이엄학교 학생들이 만든 공연이었는데, 제가 한국의 산조 같은 그런 식으로 했는데 너무 좋아했어요. 제가 재즈를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프레드 벤자민이 그걸 만들어 주셨어요. 그때 헐리우드에서 중국인 스타가 한 사람 나왔어요. 지금 이름이 기억 안 나는데, 무슨무슨 여인이었어요. 그 영화를 보고 우리 한국은 진셍이지. 그러고 제가 작업해서 그걸 올렸어요.
이지현: 그걸 한국에 와서도 선생님 공연하셨어요?
미나유: 네, 국제현대무용제였어요.
김예림: 당시 국내에서 마사 그레이엄 테크닉을 많이들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 선생님의 공연을 본 국내 무용가들이 컨트랙션이란 저렇게 하는구나라고 이야기를 했던 그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이지현: 저도 그 공연을 봤습니다. 선생님이 상수의 단 위에서 드레스 같은 거 몸에 달라붙은 거 입으시고 혼자 솔로를 하시는데, 거기서 컨트랙션 한번 탁 하는데 그 왜소한 몸으로 큰 무대를 들어 올리는 느낌인 거예요. 그래서 저게 컨트랙션의 힘이구나 하면서 그때 저희 유행어가 ‘저게 컨트랙션이다’였어요.
미나유: 컨트랙션이라는 건 대단한 거에요. 제가 뉴욕이 아니라 유럽에 있을 때 소련 쪽 동유럽의 국립무용단에서 그레이엄 테크닉을 가르치는 게 있어서 갔어요. 다들 프로패셔널 발레리나들이었고 굉장히 큰 무용단이었어요. 클래스 도중에 딱 한 명이 손을 들어요. “What is contraction?” 이러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보세요, 니네 어머니가 컨트랙션 안 했으면 니가 나왔겠냐?” 알려줬어요. “그래서 컨트택션은 정말 대단한 거야. 그 파워로 세상이 굴러가고 있어.” 그랬더니 “오케이.” 그러고 끝냈던 기억이 나요.
김채현: 단칼에 해결해 주셨구먼요. 빵 터지게요. 방금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피나 바우시의 매력을 느끼신 점, 〈구토〉를 하면서 출연자의 생각이 터트려진 점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춤에서 어떤 정해진 틀을 갖고 안무에 접근하기보다는 출연진들이 뭔가를 느끼고 뭔가를 판단하면서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표출해 보도록 계속 유도하는 그런 안무법을 쓰는 것 같아요.
깊이 파기
미나유: 그건 뭐냐 하면요. 뭐든지 깊이 파야 되잖아요. 어떤 소재를 무조건 깊이 판다고 깊이 파지겠어요? 우선은 넓혀야 됩니다. 깊이 파려면 장소가 넓어야 하는 거예요. 근데 넓히기라는 게 뭐겠어요? 그 속에 뮤직, 인문학, 에브리띵이 다 들어오도록 하는 그런 사람이 하는 거죠. 그래서 그렇게 해주고 싶어요. 넓히지 않은 댄서하고는 작업을 못하겠어요.
김채현: 그러면, 넓힌다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자기 것이 나올 수 있도록 그 여지를 최대한 확장시킨다 이 말이죠. 익스텐션이라고 할 수 있겠죠.
미나유: 그것도 그렇고 또 노력을 해서 무용 외의 다른 것도 많이 알아야 하고.
김채현: 네 그렇죠. 어찌 보면 춤보다 더 중요하다고 그렇게 느끼시는 점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주 중요한 지점이죠.
미나유: 그러니까 제가 드럼을 시작해서 이제 17년이 돼가고 있는데 이제야 제 것을 찾은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 스튜디오 오는 사람들도 그렇고 너무 편하고 너무 좋아요. 그러니까 무용계 속에서 힘든 게 공연 끝나고 뒤풀이할 때, 학교에서 교수 회의할 때 이거 힘들잖아요.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느낌의 그런 분위기라든가 뭐 이런 거. 그런데 드럼 치는 언더그라운드는 너무 편하고 좋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생각을 했어요. ‘에이, 내 인생은 망했다.’ 제가 지금은 시작할 수 없잖아요. 너무 늦게 알은 거잖아요. 내가 어릴 때 만났으면, 저는 무용보다는 그쪽으로 가고 싶어요.
김예림: 아니면 선생님 DJ가 되셨을 수도 있잖아요.
미나유: 아 네, DJ가 제 꿈이에요.
김예림: 선생님이 디제잉을 좋아하시게 된 계기가 있으세요?
미나유: 예전에 아비뇽이었나? 그때부터 DJ 페스티벌이 있었어요. 큰 공원 같은 데 막 슬슬 디제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는 거에요. 근데 정말 프랑스의 흑인들이 기가 막히고 정말 장난이 아니에요. 그 2시간이 다 끝나고 마지막에 딱 수학 천재 같이 생긴 얼굴의 하얀 남자가 딱 나타나 걔가 치는 순간 또 벼락을 맞았죠. 그 이렇게 힘없어 보이는 이 지금 한강도 좀 그렇게 생겼잖아요. 저 그래서 한강을 좋아하고. 잘난 척 하자고 어깨 힘 안 주는 그 한강. 그렇죠. 글에는 힘을 줘도. 평소엔 안 하죠. 근데 그것보다 더한 완전 수학 천재같이 생겼거든. 그 사람이 트는 순간 앞에 그 스타들은 다 없어지고 개만. 막 그 순간에 일어나는거 잖아요 음악이. 저건 너무 하고 싶다. 그게 꿈이었지만 지금 시작 못하죠. 그래서 그게 이제 무용으로 들어와서 무용을 도우면 될 것 같아.
이지현: 음악을 엄청 들으시는가요?
미나유: 우리 집은 CD하고 책밖에, 제 재산이 그것밖에 없어요.
김예림: 선생님 부엌에 싱크대 문짝을 다 뜯고 CD장이랑 책꽂이로 쓰시는 거 제가 아는데 집에 와인잔 하나 딱 있고 부엌은 그냥 그걸로 끝이더라고요. CD 전시장처럼 되어 있는데 선생님 음악을 들으실 때 어떤 기준이 있으세요? 아니면 가리지 않고 다 들으세요? 어떤 쪽을 좋아하십니까?
미나유: 저는 가리지 않고 다 들어요. 제가 아는 그 작곡가의 20년 전 것까지 찾아가면서 그리고 내년에는 또 이렇게 변해가는 거 있잖아요. 그거를 듣는 게 또 너무 좋아요.
김예림: 선생님 작품에 보면 가끔 뜻밖의 선곡이 들릴 때가 있어요. 아주 대중적인 팝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어느 순간 장식처럼 들어가는 걸 저는 느끼거든요. 그래서 ‘음악을 듣는 폭이 크구나’ 느낍니다.
미나유: 다양하게 들어야죠. 그러니까 어느 날 딱 일어나면 이태리는 가고 싶은데 이태리에는 갈 수 없잖아요.
가식의 허울벗기
김채현: 네, 제가 또 눈여겨보는 점은 〈구토〉도 그렇고 〈블루바드〉든지 〈바디록〉도 그렇고, 공연작들에서 공통점이라고 할까 엇비슷한 점으로서 ‘사회 소외’ 또는 ‘살아가는 인간’ 그런 어떤 측면의 터치가 많거든요. 좀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사회적 인간’이라 그럴까 어떤 ‘사회적 삶’을 작품에서 문제로 제시한다 그럴까? 그런 식으로 구성을 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선생님 의견은 어떻습니까?
미나유 〈구토〉 ⓒ미나유 |
미나유: 제가 생각했어요. 우리는 혼자 완벽한 하루를 살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들의 원동력은 ‘저항’이 아니고 ‘흥미’라고 저는 생각해요. 근데 남을 기쁘게 하려고 자기 목소리를 바꿀 필요도 없고 남들과 차별화되고자 자기 목소리를 더더욱 바꿀 필요도 없는데 대가 있는 일은 전혀 하지도 않으면서 남들과 다른 의견을 가짐으로써 더 똑똑해 보이려고 하는 그런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그런 모습 있죠. 저는 그게 큰 병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제 나름대로 그렇게 외치는 거예요. 그게 너무 싫었고, ‘가식’ 안 해도 다 보이잖아요 외모에서.
근데 요즘에는 이빨 몇 개와 혓바닥만 있으면 말을 어떻게 그렇게 잘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저는 말은 안 듣기로 했어요. 얼굴이나 어깨나 어디에서 대화가 풍기는 거에요. 저는 그걸 믿고 싶어요. 그런데 그게 먹히는 게 또 저는 미치겠는 거 있죠. 잘 나가요. 어느 정도까지 올라가요. 그래서 제가 안 맺힐 수가 없어요.
이지현: 선생님 2023년 연말에 하신 〈Self Portrait: In Public Corner〉 작품이 좀 그런 내용인가요?
미나유: 제가 맨 처음에 미국 뉴욕에 갔을 때 길거리에서 우연하게 포스터 한 장을 봤어요. 그게 그레이스 존스(Grace Jones) 흑인 여자, 한번 찾아보세요. 흑인 여성이 담배 딱 물고 있는 그림이에요. 그 사진을 보고 소름이 끼치면서 그 사진이 지금까지 나를 살리고 있어요. 우와 대단해. 그래서 거기서 아이디어를 받고 영감을 받아서 꼭 작품 하나를 하고 싶었어요. 그 작품이 그레이스 존스 포스터에서 시작되었고, 그레이스 존스 나이도 저랑 비슷하더라고요. 007에도 나왔잖아요. 본드걸로도 나오고. 근데 다른 거 다 필요 없이 딱 그 사진. 사진작가들도 대단한 것 같아요. 그렇게 사람을 살리고 저는 정말 힘들었을 때 그 사진 생각하면 저 그때 완전 벼락 맞은 기분, 그거였어요.
이지현: 사진이 던진 느낌이 뭐였을까요? 어떤 저항?
미나유: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하여튼 그냥 그 말할 수 없는 게 있어요. 때로는 말하면 안 돼요. 말하는 순간 트루 스토리가 깨져요.
김채현: 혹시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말해야 될 게 너무 많으므로 하나로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식으로 제가 받아들이면 되겠습니까?
미나유: 말로 하기보다 더 기가 막힌 건데 말로 하는 순간 그러니까 그건 끝나는 거죠.
미나유 〈불르바드〉 ⓒ앨빈에일리무용단 |
김채현: 그래도 조금 무릅쓰고 제가 하나만 거기에서 질문하자면, 조금 제 견지에서 이해한 한 가지 요소로서 뭔가 ‘자의식’, 바로 ‘나 자신’ 그걸 이렇게 드러내는 인간에 대해서 선생님이 빵 터젺던 거 아니에요?
미나유: 보통은 그래요. 나중에 보면은 어떤 그림인데 결국은 그게 나이지 그래서 감동이 오는 거잖아요.
김채현: 듣다 보니 길거리에서 빵 터지고 아비뇽 가서 빵 터지고.
미나유: 더 빵 터진 거 또 있어요.
김채현: 빵 터진 게 또 있어요.?
미나유: 그거는 이제 할 거예요. 앞으로. 하고 싶은 게 있어요. 창작산실에서 떨어지더라도 내년에는 내겠어요. 10명을 데리고 하려는데, 만약에 떨어진다 그러면 재수하고, 삼수는 못하겠어요. 왜냐하면 기억의 힘이 떨어지니까. 그 재수까지는 하려고 합니다. 제가 어느 날 옷을 봤더니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 이런 게 씌어 있어요. 그래서 ‘오케이 메이드 인 타임’(Made in Time). 그 제목을 가지고 제가 하고 싶어요.
근데 그거는 어디서 왔냐면 제가 저도 처음이에요. 맨 처음에 미국을 갔을 때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의 티켓 값이 장난이 아니잖아요. 근데 그때 마야 플리세츠카야(Maya Plisetskaya) 그분의 공연이었어요. 그 공연비가 너무 비싸서 제가 살 수가 없었어요. 내가 일주일을 굶어서라도 죽어도 그걸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걸 봤어요. 〈빈사의 백조〉. 그 메트로폴리탄은 그 무대가 굉장히 길잖아요. 근데 저 끝에서 저 끝으로 퇴장하는 거에요. 그게 마지막인데, 마야가 춤을 추잖아. 빈사의 백조를. 그렇게 가는데 반이 딱 지나갔을 때 백조로 변하는 그 팔을 저는 잊을 수가 없었어요. 소름이 끼치고 경악스러웠어요. 정말 지금도 난 눈물이 나려 그래요. 사람이었는데 무대 반을 지나면서 빈사의 백조가 되는 모습이. 근데 그분이 팔이 길잖아요. 그래서 이 영감을 제가 〈메이드 인 타임〉(Made in Time)이란 작품을 통해 해보고 창작 산실이 떨어지면 재수까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김채현: 마야 플리세츠카야 공연을 몇 년도에 보셨나요?
미나유: 30대 초반요.
김채현: 참고로 말씀드리면, 플리세츠카야는 1925년생인데 선생님이 가셨을 때는 1970년대 중반이니까 그때 마야 나이가 한 50이 됐는데, 그 전에는 소련에서 시기 질투를 해가지고 이 사람 아예 미국 못 가게하고 혹시 망명할까 겁이 나서 제대로 출국도 못한 발레리나였지요. 그런 처지에서 어쨌든 당시 뉴욕이라든지 미국과 유럽에서 간혹 순회공연을 했었는데, 그걸 보셨군요.
미나유 〈바디락〉 ⓒ미나유 |
일상으로부터의 자각, 안무
미나유: 네. 제가 이름을 아니까요. 내가 여기 왔는데 아무리 비싸도 내가 일주일 굶어도 난 보겠어.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하니 당시 너무 잘 봤죠. 그래서 돈이고 뭐고 다 떠나서 하고 싶은 건 반드시 해야 된다는 거. 그거 안 했으면 지금 어떡할 뻔했어요? 안 봤으면.
김예림: 선생님 그 공연에서 영감을 얻으신 것도 있고 포스터도 그렇고 창작 산실을 처음 하셨을 때의 공연작 〈2015〉에서도 선생님의 병원에서의 경험이나 뉴스에서 난민에 대해 보셨던 것들처럼 일상에서 만나는 경험들이 결국 선생님 작업으로 연결되는 것 같아요.
미나유: 사실 일상이에요. 저는 그 클래스나 티칭할 때도 그냥 애들 보고 15분 동안 밖에 나가서 풀어놓고 그 다음에 뭐가 보이니?하고 물어요. 그저께도 제가 학교에서 했던 클래스가 그거에요. “본 것에 대해서 5개 제스처를 주세요.” 춤이 멀리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오만하고 그런 대단한 데서 받으려고 하지만 사람이 겸손해야 되고 정말 좋은 거는 공짜에요. 새가 날아가는 뭐 이런 거, 돈 내라고 안 하잖아요. 괜히 막 비싼 돈 내고 워크샵 받는 것보다는 그런 데서 더 배울 게 많아요.단순한 것에서 우리가 찾아내야 하는 거죠. 그래서 인격 공부를 그렇게 시켜야 한다는 거에요. 인격이 문제잖아요, 그죠?
김예림: 저는 선생님이 직접 경험하신 것들이 작업으로 나오고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어느 날 〈로미와 줄리엣〉 작품 제목을 보고 ‘이건 아닌가?’ 했는데 역시 그것도 선생님 여행 중에 만났던 장소에 대한 것이었죠?
미나유: 이태리 제 친구가 별장이 있었어요. 그래서 놀러 오라고 해서 갔는데 그 근방에 로미오와 줄리엣 발코니가 있더라고. 난 로미오와 줄리엣 발코니가 대단한 건 줄 알았더니 정원에 있어. 조그마하죠. 그걸 본 거예요. 로미오와 줄리엣이지만 결국 영희와 철수잖아요. 괜히 외국 이름이 이렇게 멋있는 것 같지만. 이제 그런 이야기. 그리고 열심히 일하는데 수입은 적고 뭐 이런 것들 있잖아요. 그런 걸 쏟아낸 거지요.
김예림: 결코 먼 데서 찾아온 이야기가 아니더라고요. 다 선생님이 경험한 이야기들.
김채현: 제가 자료를 쭉 보니까 선생님의 어머니께서 굉장히 용기를 주신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춤추시는 데 대해서 말입니다.
미나유: 제 어머니가 무용을 엄청 좋아하셨어요. 엄마에 대한 기억은 밤새도록 소설책 읽고 그 다음에 주말 되면은 영화관 가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임춘앵 김경애 여성 국극단, 그거잖아요. 근데 저만 자꾸 빼고 가려고 해서 ‘어떻게 하면 여기를 따라갈 수 있을까?’ 그게 일주일 동안 저의 제일 큰 고민이었어요. 저를 자꾸 빼놓고서 안 데리고 가더라고요. 제 어머니에 대한 추억은 극장이고 저도 극장과 살다시피했어요. 지금도 제가 아비뇽엘 가면 하루에 5~6개씩 공연을 봐요. 근데 누가 어떻게 그렇게 볼 수 있냐 그러는데 저는 그냥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그게 저한테는 그 대단한 게 아니더라고요. 제 피에 묻어 있어요.
엄마가 무남독녀 외동에다 무용을 하고 싶어 했는데 그 시절에는 안 시키잖아요. 게다가 한국무용이니까 왜 옛날에 기생을 연상하고 그랬겠죠, 그게 아닌데. 그러니까 한 번 더 그런 소리를 들은 것 같아요. 이북이니까 최승희무용연구소가 있는데 거기를 가고 싶어서 놀러 갔다가 그 다음 날 장작을 패듯이 해서 못 가게 했다. 너무 무용을 하고 싶은데 못하고 결혼했으니까 딸을 낳으면 제일 이쁜 딸을 그 이쁜 딸이 저는 아니지만 시키겠다고 한 게 우리 언니였지요. 언니가 자꾸 꾀를 부렸어요. 그리고 좀 앞에서 했으면 좋겠는데 뒤로 가고 그러니까 엄마가 365일 학원에 안 간 날이 없었어요. 저는 따라갔는데 그러다 못 가는 날이 있잖아요. 그럴 때 저를 보내면서 “언니 뒤로 가면 너가 앞으로 끄집어내라”. 제가 언니를 끄집어내고 그럴 때 훗날의 김현자, 김매자씨도 있었어요.
김채현: 방금 극장과 살았다고 하셨는데 극장에 자주 갔다는 뜻 아니겠어요? 지금 기억하시기에 한 일주일에 몇 번 정도 갔을까요?
미나유: 일주일에 세 번은 갔죠. 영화도 보고, 국극도 보고.
김채현: 선생님은 아동기 청소년기를 부산에서 보내셨는데, 부산 어디에서 극장에 그렇게 자주 갔습니까?
미나유: 토성동, 부민동 쪽이었죠.
김채현: 그곳은 1950년대~1960년대에 부산의 극장 메카 지역이었죠.
이지현: 제가 알기로는 언니의 딸도 무용을 전공한 것으로 알고 2대에 걸쳐 춤을 하신 셈이지요?
미나유: 근데 저는 식구가 무용하는 건 싫어요. 그리고 제가 자식을 낳는다면 무용한다고 그러는 건 절대 반대하는데 어느 정도 반대하고 싶으냐? 정말 자기가 좋다면 시켜야 되잖아요. 근데 죽여서라도 멈추게 하고 싶다... 그러니까 제가 즐겁게 했다고 했지만 그 속에 많은 힘든 게 있었나 봐요. 그러니까 제가 그런 생각까지 했나봐요.
김채현: 그러면 이제 말이 나온 김에 그중 가장 힘들었던 점이 뭡니까? 춤 안무나 춤 생활에 있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아마 먼저 말하고 싶은 점들이 많겠지만 말입니다.
미나유: 1968년 멕시코올림픽이 있었어요. 한국민속무용단이 멕시코로 간다고 명동극장에서 오디션을 했었어요. 그때 제가 막 동아콩쿨에서 상을 받아서 신인 데뷔를 하는 그 차원인데 오디션에 갔었어요. 한 명 한 명 들어가는데 뭐 애들 다 오디션 했는데 저는 그때부터 떨어졌어요. 키에서도 제가 질 리가 없거든요. 근데 다 큰 애들 데리고 가려하고 애들을 자로 재는데 키에서도 지지 않았는데 미웠다는 거겠지요. 그러니까 이뻐야 되는데 ‘쟤 목소리도 남자 같고 사내처럼 걷네. 왜 저래.’ 이래가지고 저 떨어졌어요.
저에게 그거 엄청난 충격이었어요. 왜냐하면 제가 김백봉 선생님께 어릴 때부터 배우고 동아콩쿨에서 금상도 받고 그랬어요. 금상 받으면요, 그때는 동아일보의 지면 반 페이지에 실렸어요. 그 멕시코올림픽 오디션에 통과한 사람들 말고 나는 왜 떨어졌나? 그게 너무 억울했어요. 그래서 제가 다시는 ‘이 속에서는 춤 안 추고 싶다’고 했기 때문에 비자 떨어졌을 때 제가 죽어서라도 스톱하려고 약을 모았어요. 그때 외국을 그렇게 떠나는 사람이 아주 드물었잖아요. 그래서 무용계 관계자들이 거의 다 나왔어요. 공항에 김백봉 선생님 나오시고 공항에서까지 저 힘들었어요. 눈치 보느라고 무용계, 무용협회가 다 나왔는데 그때 제가 비행기 딱 타면서 가래침 한 번 뱉고 “다시는 이 땅 안 와.” 그냥 침이 아니라 가래침을 뱉었어요. 너무 억울했어요.
김채현: 요즘말로 하면 공정과 상식이 통하지 않은 데서 오는 절망감과 그 심정, 공감합니다.
미나유: 또 있어요.
김채현: 또 있으세요?
미나유: 엘빈에일리무용단이 흑인 무용단이잖아요. 근데 그 중에서도 몇 작품은 제가 하고 싶은 게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 무용단의 대표작 〈레블레이션〉(계시) 중에서도 〈픽스 미 지저스〉(Fix me Jesus)를 저한테는 줬지만, 〈웨딩 인 더 워터〉(Wedding in the water)라고 물에서 하는 대목은 흑인 출연자들이 하는데, 저는 그게 너무 하고 싶었거든요. 그것을 제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그 대목은 절대로 오리엔탈에게는 안 시키잖아요. 거기도 그런 점이 있어요. 그러니까 뉴욕에서는 중요한 역은 절대로 안 주고 투어를 가서 조그만한 미션을 줘요. 〈픽스 미 지저스〉는 그게 메인 부분이기 때문에 저한테 주지 않았는데 다른 지방에 갔을 때 제가 그거 하고 거기서 대박을 터뜨렸거든요. 듀엣을 했는데, 그 듀엣으로 완전히 터뜨렸어요. 평을 많이 받으니까 그 다음에 뉴욕에서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어요. 그때 안 했으면 못 했을 거에요. “공정하다, 평등하다, 편애가 없다”하지만, 그 속에 은근히 있어요.
김채현: 제 개인적 소감은 공연장에서 선생님을 굉장히 자주 뵙는 편인데요. 아마 50대 이상 연령층의 무용가로서는 제가 공연 현장에서 선생님을 가장 많이 만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제 제가 학교에서 미나유 선생님과 직장 동료로 함께 근무한 지가 영광스럽게도 한 13~4년 되는데 그때 학교에서 뵙던 것보다는 지금 공연장에서 더 자주 뵙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마 아까도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은퇴도, 정년퇴임도 없다. 우리는 영원히 쭉 어떤 미팅이 계속되고 그러다 보니까 오늘 인터뷰도 하게 된다는 그런 해석도 좀 가능하지 싶습니다.
미나유 ⓒ춤웹진 |
이지현: 마지막 질문입니다. 선생님 그렇게 평생 무용가로 사시고 몸 관리 그렇게 잘하시는데 현재 춤을 추시고자 하는 욕구 같은 거는 없으세요?
미나유: 저는 누군가가 저를 쳐다보는 게 이 세상에 저의 악몽이에요. 정말 싫어해요.
김채현: 선생님 춤을 보고 싶어하는 분들을 위한 기회도 한번 만들어 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그러면 이 즈음에서 객석 청중에게 마이크를 넘겨보겠습니다.
청중(정건): 네, 저는 미나 선생님 작품에 네번 참여하였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제가 빵 터질 수 있었던 제일 큰 원동력”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저는 선생님에 대해 ‘조금 무섭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대단하시다’는 그 이미지가 크다 보니까 좀 딱딱해지는 그런 마음도 있었습니다. 〈구토〉 작업을 하면서 사실 선생님께서 편하게 해주시고 저를 이렇게 편하게 춤출 수 있도록 이렇게 이끌어주신 부분이 일단 제일 큰 원동력이 되고 빵 터졌던 것 같습니다. 제가 많이 느린데도 불구하고 그거를 기다려주시면서 이렇게 제가 좋은 춤이 나올 수 있도록 이렇게 이끌어주시고 기다려주신 그런 부분들이 사실 저한테는 뭔가 제일 큰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었었고요. 제가 최근에 미국을 다녀왔었는데 얼떨결에 휘트니미술관 전시를 보면서, 현대무용 이라는 장르 안에서 대가나 미나유 교수님 이런 분들이 제 삶에 많은 영향을 주고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구나라는 걸 인지하면서 공감을 갖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청중(김성훈): 제자로서 말씀드리면, 저한테 주신 솔로도 그렇고 다 동작을 주셨습니다. 사실은 ‘내 나이엔 저렇게 못 할 것 같은데?’ 이렇게 할 정도로 동작을 다 주십니다. 그게 화려한 테크닉이라기보다는 그냥 저한테 맞는 몸의 언어라 생각합니다. 동작은 이미 저희가 학교 때 이미 다 배웠고 뭔가 화려한 것보다는 “그냥 너의 몸의 언어 그걸로 얘기를 하면 된다”고 강조하세요 항상. 늘 많은 장르를 보도록 하시고 이제 장르의 벽이 무너졌기 때문에 저희에게는 그냥 몸을 이용해서 그런 언어를 하시는 그런 분이신 것 같아요.
김채현: 다른 제자 청중의 요청을 요약하면 무용가 이스마엘 이보와 가진 인연을 알고 싶다는군요.
미나유: 앨빈 에일리가 브라질로 순회공연을 갔을 때, 어느 소극장에서 발견하고 뉴욕으로 데려온 흑인이 이스마엘 이보였어요. 당시에 앨빈에일리무용단의 스타 쥬디스 제미슨은 키가 엄청 큰데 파트너 구하기에 애를 먹고 있었어요. 그 파트너를 염두에 두고 뉴욕에 데려왔는데, 이보는 춤 기본이 허약하니 유럽으로 가서 삼바 워크숍을 하고 다녔어요. 체격이 기가 막혀서 그러니까 소문이 난 거에요. 그렇게 워크샵을 하다가 이보는 비엔나의 기획자와 함께 국립무용단을 만들려고 했어요. 그것을 목표로 자기들이 투자해서 먼저 무용단을 만들면서 나에게도 연락이 와서 합류를 했어요. 그런데 비엔나 쪽의 텃세로 무용단은 못 만들고 비엔나의 임풀스 탄츠 페스티벌이 생긴 거에요. 그 이스마엘 이보가 베니스 비엔날레 예술감독으로 가면서 저와 계속 교류를 했는데, 이 분은 브라질의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으로 재임하다가 코로나로 목숨을 잃었지요.
김채현: 좀 궁금하기도 하고 확인하고 싶은 사항입니다만, 그리스에 가서도 안무를 하셨잖아요. 어떤 연유로 하신 건가요?
미나유: 제 제자 중에서 그리스 여자애가 하나 있었어요. 그 아이가 엘빈에일리학교를 졸업하고 저를 엄청 따랐어요. 독일까지 따라 와서 유학을 했어요. 그런데 그 아이가 그리스로 돌아가서 ‘선생님이 오셔서 티칭을 좀 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한번 가서 티칭을 했습니다. 거기 서머 페스티벌의 유명한 연극연출가가 자기 작품에 안무를 저한테 의뢰를 한 거예요. 살로니케가무용단하고 아테네 국립연극단하고 출연진이 100명이에요. 제가 그쪽 안무자로 갔을 때 공항에 벌써 차가 딱 나와서 모시고 좋은 호텔에다 굉장히 돈을 쓰더라고요.
그리스가 또 너무 좋아요. 왜냐면 그리스에서 바라보는 달은 왜 그렇게 아름답지요? 미치겠네. 같은 달인데 그리스에 비치는 달은 기가 막혔어요. 너무 아름다우니까 아름다운 곳에서 내 인생을 보내자 그런 생각을 잠깐은 했었어요. 그 정도로 좋았습니다. 아크로폴리스, 이런 데서 공연할 때 야외극장이잖아요. 조명이 필요 없어요. 근데 달을 보고 달의 사이즈에 맞춰서 무용 아니 연극단체든지 무용 공연단체가 오더라. 그러니까 보름달은 세계에서 최고인 단체고 초승달 때는 아마도은 후진... 그것도 거기서 그때 배운 거에요. 달 사이즈에 의해서 단체 레벨이 정해지는 것 같은 것 말입니다.
청중(손나예): 선생님하고 작업할 때 “뭔지 알지?”가 되게 큽니다. 되게 긴 말이 아니어도 같이 작업할 때 그리고 저한테 또 어떤 해석의 여지가 있는 것 그러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굉장히 선생님 방식대로 리서치하시고, 저희들한테 주신 어떤 단서들과 핵심적인 부분들이 공감을 찾아가는 시간들이자 과정인 것 같아요. 퍼포머로서 선생님하고 작업한다는 건 그런 거였던 것 같고, 그 하고 싶은 것이 명확하고 진짜이기 때문에 함께 연습하는 동안에 늘 공연처럼 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 같아요. 제가 진짜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알아야 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도 찾아야 되고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야 되는 것도 고민해야 됩니다.
김채현: 다른 제자 청중의 질문을 요약해서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무용교육 측면에서 그간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지금의 무용교육에 대해 선생님의 판단은 어떠십니까?
미나유: 아니, 대학에 무용과가 너무 많지 않아요? 제 개인 소견은 그렇습니다. 줄어드는 중이긴 합니다만. 그다음에 자기 것을 하면 되는데 자꾸 옆모습을 보고 박수에 그렇게 신경을 쓰는 것, 저는 그런 게 정말 힘들어요. 그렇게 힘들어 이럴 바엔 차라리 없어지는 게 낫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한답니다.
김채현: 오늘 빵 터짐이 좀 있었군요. 오늘 죽 들은 말씀을 제가 간결하게 압축한다면 선생님은 출연자가 자각하도록 유도하는 안무법을 적용해 온 것 같아요. 피나 바우쉬에서도 그게 굉장히 강하게 드러났는데 이제 그런 점을 우리가 많이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오늘 시간 관계상 빵 터지기를 유보한 것도 적지 않으리라 봅니다. 다음 기회를 기대하며, 오늘 심층 인터뷰에 참가하시고 경청하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