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공개 심층 인터뷰: 박은화
현대무용가 박은화 공개 심층 인터뷰 1
  • 일    시
    2025. 10. 18.(토) 17:00 ~ 20:00
  • 장    소
    예술가의집(서울 대학로)

 인터뷰이│ 박은화        

인터뷰어│ 김채현·채희완·권옥희 

후   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춤비평가협회(춤비협)는 지난 10월 ‘원로·중견 춤작가 초빙 비평시각 공개 심층 인터뷰’로서 현대무용가 박은화님을 초청하여 진행하였다. 지난해 5차례를 열은 데 이어 이번이 여섯 번째이다.
인터뷰는 인터뷰이와 인터뷰어가 비공개로 진행하는 것이 통례이다. 이 공개 심층 인터뷰는 공개된 자리에서 복수의 인터뷰어가 진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예술인 즉 춤작가에 대한 인터뷰이므로 비평시각이 중심이어야 한다. 이 프로그램은 춤비협에서 재작년 연말에 제안되어 작년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활성화지원사업으로 선정되었다. 이를 기준으로 춤비협 내에서는 지난해에 춤작가 5인(배정혜·미나유·제임스전·안애순·김은희)을 선정한 바 있다. 올해 프로그램은 박은화·김순정 2인을 초청하여 올 11월까지 진행된다.
이 같은 유형의 심층 공개 인터뷰는 인터뷰의 일반적 관행과 형식을 탈피하므로 낯선 점이 있고 인터뷰이는 물론 인터뷰어에게도 사실상 선례가 없다시피 해서 그 형식을 모색하고 다듬어가야 할 것이다. 심층·공개·비평시각이라는 3요소를 춤작가와의 인터뷰에 녹여내어 춤작가의 면모를 가급적 충실히 드러내고 또한 공개 형식을 취함으로써 내용 면에서 객관성을 견지할 것이 요망된다. 앞으로 지속될 본 프로그램이 무용인들의 작업을 깊이 있게 재조망하고 비평의 토대를 다지는 데 이바지할 것을 기대하며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박은화님 초빙 인터뷰를 위한 패널로 김채현(<춤웹진〉편집장)·채희완(민족미학연구소장)·권옥희(춤비평가), 3인이 정해졌다. 패널들은 박은화가 제공한 공연 및 비평 자료들을 숙지하고 사전에 비대면 예비 모임을 가져 이번 인터뷰의 주제를 몇 가지로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한 바 있다.
10월 18일 공개 인터뷰는 서정록(무용원 교수)의 사회로 참석자 소개를 간략히 가진 후 본론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공개 인터뷰 취지에 맞춰 참석자들이 의견을 표하는 기회도 제공되었다. 박은화님 인터뷰는 분량을 고려하여 〈춤웹진〉에 2회로 나누어 게재된다. - 편집자



<춤웹진〉 독자들을 위한 박은화 간략 참조 사항
밀양 출생 / 밀양여고 졸업 / 중앙대 무용과 졸업 / 부산대 무용학과 교수 역임 / 안나 핼프린 타말파연구소 연수 / 튜닝 시리즈 안무 발표 / 자연춤 안무 발표



지난 10월 18일 오후에 있은 춤작가 박은화 초빙 비평시각 심층 공개 인터뷰, 예술가의집, 서울 대학로, 한국춤비평가협회 주최 ⓒ춤웹진



 

김채현: 오늘 이 자리에 박은화 선생님 제자들이 보이고 타말파연구소 관련 국내에서 활동하는 분들도 많이 오셨군요. 간략한 사회에 이어 인터뷰를 시작하겠습니다. 공개 인터뷰를 하는 목적은 대충 소개되었습니다. 박은화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전화상으로 대화를 많이 나누었고 박은화 선생님의 춤 활동 자료들을 수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패널 분들이 각자 모든 자료를 검토하면서, 지지난 주에 다시 패널 세 사람이 비대면으로 두어시간 동안 인터뷰에서 중시할 점, 초점에 대해 상의하며 인터뷰를 준비하였습니다. 3주 전 즈음에 박은화 선생님과 전화통화로 주요한 화두를 정리 했습니다. 오늘 인터뷰 중간 즈음에 20분 정도 박은화 선생님이 자신의 자료 가운데서 동영상을 갖고 그에 대해서 멘트를 다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인터뷰에서는 인터뷰의 주역이 말하는 데에 중점을 둘 것입니다. 공개 장소에서 진행하더라도 편안한 마음으로 마음껏 이야기 해주시기 바랍니다. 박은화 선생님에 대한 그동안의 여러 궁금증이 풀리길 바라고, 또 춤을 수십년간 추셨는데, 그 초점이 다시정리되었으면 합니다. 창조적으로 생동감 있는 인터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끝무렵에는 인터뷰에 참여하신 청중석에서 공개 질문을 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진행 편의상 제가 박은화 선생님께 먼저 질문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춤의 입문이라고 그럴까요, 박은화님이 특히 현대무용에 입문한 동기를 간략히 소개해주시면 어떨까 합니다.


춤 입문
 

박은화: 제가 태어난 것부터 이야기하면 저는 밀양에서 태어났습니다. 밀양은 산세가 좋은 곳이고 또 문화제가 매년 있은 곳이고. 그곳에서 제가 자연을 보는 눈, 제 몸에 자연스레 남아있는 민속적인 음악, 춤사위 뭐 이런 것들은 배워서라기보다는 저절로..

김채현: 방금 말씀하신 문화제는 밀양의 축제지요? 밀양에서 오래 있었던 밀양아랑제 말씀이지요?

박은화: 네, 밀양아랑제입니다. 아랑 전설에서 그 축제가 시작되었지요. 억울하게 죽은 아랑의 넋을 기리는 축제였죠. 규모가 컸습니다. 환경이나 주변의 여러 가지 에너지가 나를 만들어 가고, 나의 생각을 구축해가는 시스템으로 보기 때문에 고향이나 부모를 얘기 안할 수가 없다고 생각해요. 제가 어릴 때 춤의 입문할 때 어떤 음악적 요소, 한국적 요소, 땅의 요소, 자연의 요소 이런 것들이 나에게 영향을 주었고, 밀양이라는 고향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놨었다고 봅니다. 제가 1남 5녀의 막내였어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지병을 앓고 계셨고 집에서 굿을 자주 하셨어요. 소화만 안되면 체했다고 물린다고 안방에서 대나무를 막 잡고 무당이 징을 엎어놓고 진쇠장단에 징을 치고 장구를 쳤습니다. 막내니까 엄마 무르팍에 누워서 보면 징을 엎어놓은 눈높이와 제 눈높이가 딱 맞았어요. 징을 치는 그 모습이 조금 두렵기도 했었어요. 그렇지만 엄마 옆에 있은 때문인지 그 징 소리를 들으면서 제가 잠에 들곤 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컸었을 때 엄마의 그리움을 작품으로 꽤 많이 했었는데 그때 그 장단을 가지고 했었지요. 작곡가에게 이런이런 악기를 써서 진쇠장단을 갖고 해달라 해서 만든 게 <솔로2> 이런 작품이었어요. 내 춤의 입문이 그런 것이었구나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 더 말씀드리면, 대학 진학하러 서울에 오니까 감도 돈을 주고 사 먹고 민속놀이 뭐 병신춤 그리고 농악 이런 것들을 무대에 올려놓고 입장료를 받더라고요. 어머나 우리 동네에서는 옥상에 올라가 손만 대면 감 홍시를 따먹고, 2월이 되면 동네 아줌마들이 갑자기 무용수가 되어서 집에 와서 지신밟기로 꽹과리를 쳐주고 소고를 하고 이렇게 해주고 가셨습니다. 그런 춤만 보다가, 무대에 올려놓고 돈도 받고, 감조차 사 먹고 이런 것들이 굉장히 생소했었어요. 저는 그냥 살면서 자연이 주는 것들을 먹고 마시고, 또 동네 아줌마들이 갑자기 무용수가 되어 춤을 추고, 막 병신이 되어 춤을 추고, 밀양 백중놀이 양반춤 이런 것들을 곁에서 계속 보면서 자랐습니다. 이런 것들을 사람들이 따로 무대에 와서 봐야 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은 거지요. 그러면서 아 밀양의 것들이 이미 내 몸의 리듬으로 들어와 있었구나 고 생각을 하면서 굉장히 감사하게 여깁니다. 제 춤의 입문을 이야기하면 태어난 밀양에서 보아왔던 모든 환경이 저의 춤의 입문이 아니었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중학교 때 공부한다고 춤을 안 추다가, 고등학교 때 시험을 봐서 밀양여고를 갔었어요. 밀양여중이라는 학교에서 춤을 배워 온 애들이 춤을 곧 잘 추는 거예요. 저는 추첨으로 밀성여중에 진학했거든요. 고등학교 때 그 친구에게 “야 니가 배운 선생한테 춤을 좀 배우면 안되겠나?” 이러니깐 “가보자”고 합니다. 그래서 갔더니 그 선생이 “너희는 이제 대학을 가야 하니까 나 같은 선생한테 배우면 안된다”고 하면서 선생이 자기 기억을 들려주었어요. 부산에 황무봉무용학원이 있는데 거기에 마스코트 같은 김현자라는 애가 있었는데 자기가 부산 광안리를 지나올 때 김현자 김현숙 무용학원이란 간판을 봤다는 것입니다. 그때가 75년경이었고 선생님이 우리를 무작정 데리고 갔습니다. 그때 광안리가 진흙탕이고 논밭이 죽 있었어요. 그래서 김현자 선생을 만나게 되었고, 당시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부산시립무용단 단장으로 와계셨어요. 김현자-김현숙 무용연구소는 동생 김현숙 선생이 춤을 주로 가르치고, 우리는 배웠어요. 가끔 연습을 크게 한다든지 하면 우리는 부산시립무용단 연습실을 쓰면서 춤을 배우고 제1회 김현자 김현숙 무용단 발표회 때 제가 출연했었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부산과 밀양을 오갔고 저는 김현자 선생이 서울 4년제 대학을 보낸 첫 제자였어요. 연구소에 한국무용을 하는 애들이 너무 많으니까 콩쿨에나가면 다 한국무용만 하면 상을 받기가 어려우므로 저에게 “니가 발레를 좀 해서 나가도록 하자. 너는 조그마하니깐 발레를 하면 좋겠다”고 해서 콩쿨에는 주로 발레로 나갔고 상도 받았지요.

김채현: 그럼 당시 무용학원에서 한국무용 발레 등을 다 배웠던가요?

박은화: 한국무용, 발레, 현대무용을 다 했었어요.

김채현: 춤 만능에 입문한 듯합니다. 계속하시지요.

박은화: 황무봉연구소에서 그 세 가지를 다 했고, 김현자-김현숙 제1회 발표회 때 황무봉연구소 멤버들이 찬조 출연으로 현대무용을 하고, 발레하는 백연옥님도 출연했어요. 저는 그때 심청이 아버지 역할도 했지요. 이제 중앙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는데, 당시 국내에서는 무용과가 예술대학에 소속되어있는 대학은 중앙대학뿐이었어요. 서라벌초급대학이 그대로 중앙대학으로 들어왔지요.

김채현: 그럼 중앙대학교 진학 입시를 치른 춤 장르는 무엇이었는가요?

박은화: 부채를 들고 점프하면서부터 시작하는 창작무용으로 작품을 했었어요. 그때 중앙대에는 송범님, 발레의 서정자님, 두 분이 교수로 계셨고, 현대무용 교수는 안 계셨어요. 우리학과가 30명 정원이었는데, 29명이 한국무용 전공생이었어요. 광주에서 온 한 친구가 발레를 했고, 다 한국무용을 했지요. 전 국립발레단 예술감독 김긍수 선생님이 내 동기인데, 그도 한국무용을 전공했다가 발레로 전환했죠. 전홍조님도 한국무용을 하다가 발레를 했고요. 저도 한국무용을 하다가 전공을 바꾸게 됩니다. 무용학과 발표회를 하면 저는 세 가지를 다 공연했었어요. 한복 입고 춤 추다가 발레복으로 갈아입고 춤추다가 현대로 갈아입고 춤추다가 했지요.
아무튼 제가 중앙대학을 간 건 굉장한 행운이었다고 봅니다. 문예창작과, 또 건축미술학과 등 예술 분야 8개 학과가 한 건물 안에 있었어요. 왜냐면 서라벌 초급대학 자체가 중앙대학교로 이동했기 때문에 건물 이름이 서라벌홀이었어요. 예술대학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무용학과에 있었던 것은 전국에서 처음이었습니다. 제가 입시 과정에서 인터뷰를 하러 갔는데 학장님이 모든 학생을 다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그때 계셨던 분이 소설가 김동리 선생이셨어요. 저는 책에서만 보던 분이었어요.(웃음) 그때 저는 이 학교에 응시했다는 게 너무 감사했었어요. 저런 예술가를 내가 가까이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 생각으로 학교에 대한 자부심을 엄청 가졌습니다. 그때 교수진으로 정병호 교수는 민속학자이시면서 창작, 교육무용 같은 것들도 가르치면서 저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주셨습니다.


현대무용 입문

김채현: 춤 입문 과정과 관련 더 말씀하실 게 있으신가요?

박은화: 네, 제가 다녔던 시절에 현대무용은 키도 크고, 마사 그라함 테크닉으로 발바닥을 무대에 딛는 드라마틱한 춤이 우리나라에 보급되고 있었어요. 저는 현대무용과 상관없는 무브먼트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왜냐하면 현대무용이 너무 거친 춤이라고 생각했었지요. 김현자 선생 같은 아름다운 라인을 가진 분들의 춤을 봐왔기 때문이지요. 제가 초등학교 때에는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때라서 한국 창작무용을 했었어요. 그래서 톱니바퀴를 내가 만들어서 옷에 달고 그랬습니다. 우리 때는 독일 계통의 표현예술 춤이 일본에서 들어오면서 톱니바퀴가 막 달린 것들을 갖고 창작하는 그런 춤들을 췄었어요. 대학에 진학해서 현대무용과 저는 관계가 없는 춤이라 생각했었습니다. 대학 1학년 때 서진은님이 우리 학교 시간강사로 오셨어요. 대학원을 갓 졸업한 분이셨어요. 첫 수업에 들어갔더니 그 선생이 “박은화 좀 남아봐라” 이러는 겁니다. 그 선생님이 “박은화 너 현대무용 한번 안 해볼래?” 하시는 거예요.

김채현: 당시 대학 입학 연도를 말씀해 주시지요.

박은화: 78학번입니다. 그래서 “제가 현대무용을요?”라고 답을 했었어요. 선생님이 “현대무용 안 해볼래?” 할 적에 벌써 제 마음에는 “이거 해볼게요”하는 생각이 들었었어요. 제가 손도 작고, 발도 작고, 얼굴도 한국무용을 하게 생겼는데 내가 무엇을 했길래, 왜 그 선생님이 현대무용을 하라고 했을까 하는 생각이 지금도 듭니다. 제가 교수가 되고 보니까 저 같은 아이가 눈에 띄었어요. 테크닉은 안 되어 있어도 너무 행복하게 춤 추는 아이가 있거든요. 뭔지 모르지만 자기 것을 하고 있어요. 그런 아이들이나 춤이 너무 예쁘게 보입니다. 리듬 있는 아이들이라 할까. 그래서 저는 춤에서 아무리 체형이 좋고 라인이 좋아도 리듬이 없으면 저는 약간 부정적입니다. 체형이 어쨌든 리듬을 타는 몸을 보면 너무 행복하고 예뻐요. 그래서 아마 그 선생님이 저의 그런 면을 봤나고 짐작하곤 합니다. 그때는 저는 바로 답을 안 하고 “네. 우리 고등학교 선생님께 물어볼게요” 라고 답했지요. 그러고 나서 김현자 선생께 전화를 했어요. “선생님, 제가 현대무용을 한번 해보려고 합니다”고 말씀드리니 “니가 무슨 현대무용을 하나?” 그러셨어요.
현대무용은 너무 재밌는 춤이에요. 한국무용과 발레는 따라 하라고 그러거든요. 그런데 현대무용은 그냥 해보세요 그러는 겁니다. 점프할 때도 크게 뛰어보라, 작게 뛰어보라, 아름답게 뛰어보라고 하니 제 맘대로 뛰어도 되는 겁니다. 이거 뭐 이런 춤이 다있나, 이거 내 춤이라고 생각이 들었지요. 밀양에서 자라고 자연에서 뒹굴며 마음대로 움직였던 그 정서가 그때 확 일으났던 거죠. 그래서 내 조건이 어떻든, 체형이 어떻든 상관없이 이 춤은 내가 춰야하는 춤이라 생각하고, 현대무용으로 진로를 딱 바꿨어요. 그래서 김현자 선생이 “계속 해볼 수 있겠나?”고 물어 “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했지요.

김채현: 현대무용으로 진로를 정하기까지 얘기였는데, 춤 입문 관련하여 계속 소개하시렵니까?

박은화: 네, 그때부터 김현자 선생은 부산시립무용단에 일본 안무를 하는 분을 모셔 와서 시립무용단원들에게 특강을 좀 여셨어요. 그럴 때는 저한테 전화를 주셨어요. 특별히 저를 시립무용단 언니들과 함께 춤추게 하셨지요. 김현자 선생께 배웠던 것은 한국춤 이런 것보다도 굉장히 열정적으로 새 것을 하고, 새로운 눈으로 보려고 하며 춤은 춤이어야 한다는 그런 모습을 가르쳐주신 스승 중 한 분이시죠. 그런데 제 대학 2학년 때까지만 해도 현대무용 교수가 안 계셨고, 서진은 선생이 자주 유인하셨어요. 자기 선생님이 박외선 선생님인데, 미국에 계시다 면서 자기가 개인공연을 할 때 미국 가서 할 건데, 너도 데리고 가겠다는 겁니다. 아주 그러시러면서 저희하고 체육관을 빌려 춤 추러 다니고 그랬지요. 그 다음에 중앙대 강사로 김화숙 교수가 오셨어요. 그래서 김화숙 교수 연구소가 서울 연남동에 연구소가 있었어요. 그래서 거기 가서 춤을 배우고, 방학이 되면 엄마가 너는 집에 안 오느냐고 해서 너무 배울게 많다고 했지요. 제가 제대로 겪어보지 못한 현대무용을 해야 되니까요. 저는 서울에서 미국 문화원 ,독일 문화원을 내 집처럼 드나들면서 거기서 영상들, 비디오들을 보았고, 그리고 월간 <춤>지를 평생 보리라 생각했지요. 발행인 조동화 선생이 학생들에게 구독을 권하러 학교에 오시기도 했어요. 그때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춤이 어떻게 이 땅에 뿌리 내려야 하는지, 원로 선생님들이 계신 것들이 너무 감사한 일이었어요. 그래서 제 머리에 춤의 정신이 그런 데서부터 만들어지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는 대학 3학년 말부터 졸업을 준비해야 하는데, 현대무용 선생님이 안 계시니깐 졸업하기가 난감했었어요. 3학년 말까지도 현대무용 전임이 안 계셨어요. 발레는 학생들이 졸업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고, 저는 발레로 졸업해야 할 판이었어요. 현대무용이 너무 하고 싶은데. 그래서 학과 교수를 매일 쫓아다니면서 “현대무용 선생님 좀 뽑아주세요. 저 졸업하기 전에” 맨날 이렇게 얘기를 했는습니다. 이정희 교수가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오셨는데 3학년 말 무렵에 저를 보더니 “니가 그 무서운 애냐?” 그러시더라고요. 아마 현대무용 선생님을 뽑아달라고 제가 난리를 쳤었던 그 얘기를 들으신 모양입니다. 이정희 선생이 오셨을 때 너무 행복했죠. 그리고 저와는 아주 다른 스케일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저는 작은 거, 작고 둥근 이런 것들을 좋아하는데 비해 그 분은 무대 자체가 컸었어요. 그래서 저의 작은 것들을 어떻게 저런 스케일에 놓을 수 있을까에 대해 눈뜨게 해준 분이셨어요. 그리고 우리를 야외에 데리고 나가서 한국의 야외춤을 만드신, 처음 오픈해준 그런 분이기 때문에 제가 제자들을 끌고 무대 밖으로, 들판으로 나갈 수 있는 힘이 아마 그 영향을 받고 성장했던 게 아닌가 합니다.


만남: 안나 핼프린

김채현: 춤 입문의 여정 소개가 깁니다. 계속 하시렵니까?

박은화: 네, 입문의 마지막입니다. 제 춤의 길 중에서 만난 한 분이 안나 핼프린이라는 무용가입니다. 제가 2007년도에 매일 서울-부산을 오르내리는 차를 운전해서 주말마다 왕복했어요. 너무 젊었을 때니까 남편이 서울에서 병원에 있었고, 나는 부산 학교에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다 교통사고로 갈비뼈 11번이 부려져서 아주 고생했었지요. 아 이렇게 죽는 거구나 하던 차에 육개월 만에 제가 유방암을 또 앓게 되었어요.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다니다가 제가 유방암 수술까지 하게 되면서, 신이 나에게 무슨 일을 더 시키고 싶어서 이런 경험까지 하게 하나 생각이 들게 했어요. 당시 우연히 <몸>자를 보게 됐어요. 거기에 이정명이라는 분이 표현 예술치료에 대한, 치유 예술로서의 춤에 대한 칼럼을 게재하고 있었어요. 저는 대학원 논문을 도리스 험프리에 대해 썼어요. Fall and Recovery 테크닉에 대해 말할 때 포스트모던댄스의 선구자의 이름으로 안나 핼프린의 이름이 몇줄로 나왔었고, 핼프린이 굉장히 새로운 생각을 가졌고 그분의 선생이셨던 마가렛 두블러의 <경험으로서의 춤> 그 책을 제가 대학원에서 텍스트 북으로 사용하고 있을 때였어요. 그런 때문에 그분의 제자가 안나 핼프린이라는 것을 제가 알고 있었는데, 이정명이라는 분이 그 사람에 대한 글을 쓰고 있어서 “이 사람이 살아있었어?” 하고 관심이 있던 차에 제가 암을 앓았었고, 안나 핼프린도 암을 두 번이나 앓았더라고요.
타말파연구소가 샌프란시스코에 있고, 핼프린이 거기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제가 암에 걸리자마자, “아 난 여기 찾아가야 되는구나”고 생각하고 <몸>지를 통해 이정명 선생에게 연락을 했더니 홈페이지에서 컨택하라는 답을 얻었지요. 그해 여름 2주간 안나의 특강이 있어서, 그 특강을 들으려고 접수를 하고 보니깐 홈페이지에 플래니터리댄스 행사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보니까, 산에서 해 뜰 때부터 시작해서 해질 때까지 춤추며 진행하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산에 올라가서 치유의 춤을 추는 겁니다. 근데 저도 2000년대로 세기가 바뀔 때 금정구청에서 의뢰를 받고 부산의 명산 금정산에서 고당봉의 할미와 아기 장수를 소재로 춤을 안무하고 총괄 지휘를 했었어요. 그때 한국무용 하는 강미리 선생을 고당 할미로 하고 부산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오디션을 해서 아기 장수를 뽑고 제가 안무를 하고, 이석금 선생께 할미의 탈을 부탁하고, 황의종 교수께 한국음악을 부탁하고. 의상은 부산대학교 의상학과의 교수께 부탁해서 종이 옷을 만들면서 세벽에 그 행사를 진행했지요. 1월 1일 새벽에, 그 추운 고당봉 815미터 그 산꼭대기에서 사람들이 기도하느라 천막을 치고 자는 그곳에서 행사를 했습니다.
알고 보니 안나 핼프린이 하던 그런 행사를 저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자연의 힘, 치유의 힘을 저도 잘 알고 있었죠. 그래서 편지를 썼죠. “나도 암을 앓았고, 2000년도에 이런이런 춤을 췄는데, 그 타말파마운틴이 그렇게 영험하다는데 내가 거기 가서 내 암 걸린 거 다 털어내고 오고 싶다. 그래서 춤을 좀 추게 해달라”는 편지였어요. 그랬더니 답이 왔지요. “웰컴, 와라. 메인 퍼포먼스는 1년 전에 다 짜였기 때문에 당신을 초대를 못하지만, 그 산에서 하는 건 다 열려 있다. 언제나 와서 해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워크숍 하기 일주일 전에 가서, 이정명 선생님 숙소에 갔더니 이도희라고 한국에서 자랑할만한 무용가가 있었어요. 이도희님 집에서 안방을 빼앗아 한 달간 그 지역에 머물렀어요. “도희님, 내가 엠알 음악을 준비해왔는데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당신이 소리를 해주고 징을 쳐다오. 징을 엎어서 우리 엄마가 옛날에 굿할 때 그 소리가 나는 너무 좋으니 그걸 쳐다오” 했어요. 그 산에 올라가서 이도희님이 노래하고 징을 쳐주고, 저는 제가 만든 승무를, 종이 옷을 만들어 입고 찢고 하면서 췄었어요. 제 암을, 내가 갖게 된 그것들을 풀어내는 춤이었어요.

김채현: 그 행사가 ‘지구 행성의 춤’(플래니터리 댄스 · Planetary Dance)이라는 거죠?

박은화: 네, 제 춤은 플래니터리 댄스 안의 춤이었습니다. 메인 행사는 아니었어요.제 춤을 추고 메인 행사장에 오니까 안나 핼프린이 계시더라고요. 90살 나이였어요. 그러면서 저한테 “내가 작년까지만 해도 그 산에 올라갔었다. 그런데 90이 되어 이번에는 못 갔다. 그런데 당신 춤이 참 보고 싶구나. 그러니까 여기서 해줄 수 있겠어요?” 제가 의상 다 찢어지고 해서 머뭇거렸더니, 도희님이 “괜찮아요” 해서 거기서 춤을 췄어요.

김채현: 참고로 안나 핼프린은 2021년에 이 세상을 떴습니다. 그분은 세상을 뜨기 전해까지도 계속 춤을 추었던 걸로 압니다.

박은화: 네, 플래니터리 댄스 행사에서 Earth-Running이라는 지구를 돌면서 하나의 에너지가 모여서 함께 공동체가 될 때 새로운 에너지로 발현되고 거기서 치유의 힘이 만들어지는 그런 철학으로 진행되며 그리고 자연과 우리 인간은 굉장히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얘기하면서, 제일 먼저 저를 위해 기도를 해요. 박은화가 평화롭길 희망하는 기도. 두 번째는 가족을 위해서, 세 번째는 이웃을 위해서, 네 번째는 나라를 위해서, 다섯 번째 세계를 위해서, 마지막에 플래니트리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행성을 위해서, 우주를 위해서, 이렇게 우리는 나로부터 모든 우주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그런 춤을 만들어서 지금은 그 제자들이 전 세계 약 60 몇 개국의 나라에서 플래니터리 행사를 하고 있지요. 저는 2010년부터 네이쳐 댄스, 자연춤이라는 이름을 걸고 안나와 같은 패턴의 프로그램을 갖고, 부산에서 하고 있습니다. 우리 제자들과 2년에 한 번씩 합니다. 가장 먼저 한 행사가 리커버리, 회복의 춤이란 타이틀로 했었는데, 그때 부산에서 어린애를 성폭행해서 죽여 정화조에 넣어버린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그 장소에 가서 우리 제자들이 춤을 췄었어요. 몇 시간을 돌면서 춤을 출 때 제자들 정신이 넘어갔어요. 음악가들은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어요. 왜냐면 그 아이가 갖고 놀던 인형들이 방에 있고 그랬었거든요.
그래서 그런 류의 춤추기 이벤트를 우리는 지금까지 10년 넘게 지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의 춤의 입문에서부터 지금까지 자연과 함께 해왔다 봅니다. 안나 핼프린도 암에 걸리기 전에는 “삶이 나의 예술을 풍성하게 만들었다”라고 했다면, 암을 앓은 후에는 “이제 예술이 삶을 풍성하게 할 때다”라면서, 커뮤니티적인 행사를 하고, 온 세계에 치유예술로서의 춤을 전파하고, 교육과 예술과 치유가 통합된 작업을 하셨지요. 한국에도 타말파 지부가 있고, 저도 거기에 즉흥 같은 것을 교육하고 있습니다. 200명이 훨씬 넘는 타말파 졸업생들이 한국의 교육과 치유와 예술의 영역에 많은 작업을 있습니다. 저는 그로부터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받으며 춤을 추었습니다. 너무 길었죠? (박수)

김채현: 네, 너무 길었습니다. 인터뷰이로서 품은 아주 포괄적인 입문 개념을 존중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입문의 소개가 길어졌군요. 듣고 보니 박 선생님 본인의 춤 활동이 변화되는 어떤 변곡점, 그러니까 또 다른 계기나 에너지가 새롭게 형성되는 과정마다 말하자면 새로운 입문에 해당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우리 패널들이 지난번에 정리한 주제들 중에서 춤 입문 과정, 그리고 자신에게 영향을 주신 분들에 대한 이야기가 첫 번째, 두 번째 주제였는데, 이미 그 이야기는 다 된 것 같고 일단 이 정도에서 넘어가겠습니다. 자 그러면 박은화 선생님의 튜닝 시리즈라든가 자연춤, 평화기도춤, 그런 화두와 더불어 패널 분들이 지금부터 질문 삼아 말씀해 주시지요.


튜닝 착안
 

채희완: 저는 특히 박은화 선생님과 장년 시기에 이웃사촌처럼 같은 대학에서 거의 룸메이트같이 지낸 적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헤어진 지 10년 넘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춤비평가협회에서 수많은 사람 중에 박은화 선생님을 선택한 것에 대해서 제가 흔쾌히 패널로 참여하겠다 했습니다. 왜냐하면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20여년을 이웃사촌처럼 지내면서도 춤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특히 박은화 선생님의 아리따운 마음의 원천에 대해서 서로 아무 얘기가 없었지요. 그런데 오늘 만나자마자 모든 궁금증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단지 선생님이 밀양에서 태어나서, 그 좋은 풍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특히 밀양의 백중놀이, 병신춤 등 춤 문화의 기저와 함께 잠들고 먹고 했다는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특히 황무봉 선생 밑에서 그리고 김현자 김현숙 선생과 인연이 깊었고, 김현자 선생과는 부산시립무용단에서 인연이 이어진 듯하고요. 중앙대학에서 송범 선생 아래에서 한국춤을 하다가, 정병호 선생 그리고 서진은 선생께 배우며 현대춤으로 넘어갔어요. 그렇게 된 것이 좋은 것인지, 아닌지, 몸에 맞는 것이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춤 인생을 위해서 좋은 계기였는지 더욱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서 김화숙 선생, 이정희 선생과 가까이서 배우면서 더욱더 자연스럽고 야외에서의, 넓은 시각 속에서 또 스케일이 큰 속에서 춤을 춘다는 것이 자신의 지향성과도 맞아떨어졌는지 그 속에서 새로운 길을 걷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특히 암 수술과 함께 여러 경험 속에서 자기 삶의 지향성이 확실하게 정해지기 시작했고 그것이 춤으로 발현되었다고 하셨지요, 산과 함께.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 빠진 거라면 2006년 경인가 당시 부산대 교수였던 고현철 국문과 교수가 교정에서 떨어져 목숨을 바쳤던 일과 연관된 것입니다. 그분의 뜻을 기리는 추모 행사에서 박은화 선생이 춤추는 모습을 저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선생님은 자연과의 만남 속에서 자연과의 얽힘을 튜닝이라 얘기하고 몸 섞기, 몸 고르기로 하여 터득해 나갔던 것인데,
그 심지에 자연 자체와 내가 동일시된다는 것, 말하자면 자연스럽지 못한 모든 변고나 사회적 질환까지 대상으로 나에게서 산으로 자연으로 우주로 넘어가는 과정, 춤과 사람과의 만남을 얘기해주어서 선생님의 작업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튜닝을 통해 나를 찾고 내 영혼과 만나는 내용이지요. 두 가지를 질문하겠습니다. 한국춤에서 현대춤에서 넘어가는 동기로서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나는 리듬이 있는 아이다. 리듬을 탈 줄 아는 아이다.” 서진은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던 것일까요? 리듬을 탄다는 그것은 스스로 생각하신 건가요?

박은화: 서진은 강사가 왜 현대무용 첫 수업에 저에게 남으라고 그랬는가가 굉장히 궁금했거든요. 그때는 물어보지는 못했지요. 저는 현대무용을 해본 적이 없는데 첫 수업을 하고 저더러 현대무용을 권하는데, 왜 그랬을까? 그걸 모르고 있다가 제가 대학교수가 되어서 어떤 아이들을 보니까 너무 예뻐서, 현대춤을 하면 좋겠다 하고 생각을 했지요. 그 학생들은 신체적 조건 때문이 아니라 몸에 리듬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이어서, 저는 “아마 내가 그랬었나?” 하는 생각을 품었던 겁니다.

김채현: 그러니까 그 당시에 리듬이란 말을 직접 들었던 것은 아니고? 그다음에 해석을 해보니깐 그런 판단이 들었다는 뜻이군요.

채희완: 리듬이라는 말이 아주 쏙 들어오는 말인데, 율동, 율조라는 것이고 어떻게 보면 튜닝의 또 다른 말일지도 모르지요. 왜냐하면 몸, 춤, 율동, 율조... 심지어 몸이 우주의 박자 장단을 탄다라는 식으로 얘기할 수 있죠. 우주와 조율하는 것이 리듬을 타는 것이죠. 삶과 내 몸이 만나는 것을 호흡이라고 얘기를 하죠. 호흡도 리듬이 좌지우지하죠. 호흡이 있어서 리듬이 아니라, 리듬이 호흡을 작동시키는 거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굉장히 멋지고 원천적인 얘기인 것 같습니다. 춤은 리드믹한 무브먼트라고 얘기하잖아요. 이 얘기는 저로서는 아주 소름돋는 얘기입니다. 우리춤의 대가 한성준 선생님이 얘기하신 것과도 통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춤은 어떤 일상적 동작에 장단을 입히는 형식입니다. 장단을 타게 하면 다 춤이 된다 그렇게 얘기하신 적이 있거든요. 일하는 것이 춤일 수 있는 계기를 보여주신 건데요. 실제 일상의 삶과도 연결되어 우주적 리듬과도 통하는 바가 선생님의 활동 작업에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 나머지 질문은 나중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박은화의 춤 〈Tuning-Xi-돌〉 (2013.11.5., 영화의전당)



박은화: 지금 선생님 말씀을 듣고 나니, 튜닝이라는 단어에 굉장히 운동성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리듬을 좋아하는 이유가 튜닝이라는 단어를 포착했던 순간이 생각납니다. 2000년이 되고 제가 마흔살 정도 불혹 나이에 혼자 혼돈에 빠졌어요. 2000년 새천년이 되어 세상이 바뀐다고 떠들썩하던 시기였는데, 저는 그때 대학 교수였고, 우리 아들도 태어나서 잘 자라고 있고, 우리 제자들도 무용단을 만들어 활동을 많이 하고 편안이 살던 상태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저한테 너무나 두려움이 엄습했어요. 이렇게 사는 게 사는 것인가 하는 의문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예술가가 맞는 거야?” 이런 혼돈이 닥치면서 2~3일을 앓았습니다.

김채현: 그때가 정확히 언제였습니까?

박은화: 2000년도입니다. 그런 현상이 저한테 일어나서, “이걸 어떻게 하면 좋지? 노라처럼 인형의 집에서 나갈 것인가?” 그래서 3일째 날 열이 나는 상태에서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 너 예술가잖아. 그러면 작품을 평생 해야지.” 이런 자각이 저에게 메시지를 탁 주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조각가하고 이야기를 하게 됐어요. “선생님 제가 요즘 혼돈스럽고... 예술가 같지 않게 평안함을 가지고 있는 환경이 나를 설레이게 하거나 가슴 뛰게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분이 말씀하실 때 튜닝이라는 단어를 섞어 하셨어요. 근데 그 단어가 “하나님 말씀은 원동력 면에서 내 골수를 쪼갠다”는 말이 있듯이, 저한테 딱 다가왔어요. 그래서 제가 그분한테 얘기했어요. “선생님 튜닝 단어로 제가 작업해야 할 것 같아요.” 정말 그 말이 저에게 와서 춤의 파트너가 되어줬어요. 튜닝이라는 단어를 지금 25년째 쓰고 있습니다.



박은화의 춤 〈Tuning-Xvi-꽃〉 (2019.10.24., 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



김채현: 춤의 파트너가 되었다, 그 뜻은 무엇인가요?

박은화: 튜닝 단어가 저의 파트너가 되었고, 저의 고유명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단어를 들어니까 생명력이 있고 운동력이 있고 리듬이 느껴지고... 저는 튜닝은 딱 줄을 대어서 다른 것들은 없애버리고 선별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 안에 있는 것들을 다 없애버리고, “내가 원하는 것만 해낸다”는 의미로 튜닝이라는 단어를 갖고 있었더라고요. 그러다 튜닝 시리즈 4를 준비하면서 무용수들이 연습하고 누웠는데, 매우 자연스러웠던 겁니다. 밖을 내다 보니까 부산대학에 가로수가 많아요. 그걸 자세히 보니까 새파란 잎, 말라비틀어진 갈색, 마르다가 만 것, 이런저런 것들이 섞여 있는데 너무 아름다운 겁니다. 저렇게 가지각색의 것들이 함께 모여있을 때 우리는 조화롭다, 아름답다고 하는데, 우리 인간들도 그러한데 왜 역겹다고 느끼지? 왜 이것들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지? 하면서 저의한 정체성, 그런 시각을 가진 저의 정체성이나 세상의 흐름이 저한테 다가오면서 “그래. 저렇게 갖가지로 흔들리는 것들이 튜닝이지. 팽팽하게 있는 줄이 아니야” 생각이 들어요. 그러다 튜닝 시리즈 6부터는 자연의 부제목을 붙이면서 작업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제가 작업하면서 또 삶을 바라보면서 제가 그것들을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느낌과 감각과 이미지들이 나의 생각을 만들어 가는지를 느끼면서 작품의 제목이 달라지고, 똑같은 주제이지만 매 순간 여러 방면으로 저를 들여다 보는, 그런 방법으로 나를 찾아갔습니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튜닝에 애착을 갖느냐?”고 묻는데, 사실 다른 대안을 못 찾았고 더 좋은 제목이 있으면 당장 바꿀 겁니다. 모든게 튜닝이었습니다.



      

박은화, 김채현, 채희완, 권옥희 ⓒ춤웹진


- 이하 박은화 공개 심층 인터뷰 제2편(춤웹진 12월호)으로 이어짐

 

2025. 11.
*춤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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