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채희완선생님 『우리춤 생성미학行』
상황적 진실을 찾아가는 우리춤 미학의 새로운 행로
  • 일    시
    2026년 7월 27일 오후 1시 30분~5시
  • 장    소
    민족미학연구소 응접실(부산 서면)

진행·녹취·정리│송성아_춤비평가



채희완, 송성아



송성아: 선생님, 반갑습니다. 지난달에 『우리춤의 생성미학行』을 출간하셨습니다. 출간 이후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책의 반응은 어떤지, 다른 작업이나 계획이 있다면 편안하게 들려주세요.

채희완: 지난 5월 말에 발간한 『우리춤의 생성미학行』이라는 제목의 책은 부산에 소재하고 있는 전망 출판사에서 나왔습니다. 제가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무용학과에 부임한 게 1985년도였는데, 10년이 지나서 1995년 봄에 ‘신인춤제전’이라는 행사를 기획하고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갓 대학을 졸업한 사회 초년생 춤 지망 학도의, 말하자면 등용문 역할을 한번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그 제전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후 올해 32회까지 해마다 출연하는 젊고 푸른 춤꾼들에게 격려사를 써 올리곤 했는데, 그것을 모아서 조그마한 춤 선물처럼 책을 발간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분량이 너무 적고 또 내용도 빈약한 듯해서 격려사와 연관하여 몇몇 춤에 관해 평소에 써온 것을 일단 모아서 실어보기로 하다가, 조금 더 욕심을 부려서 완전하지는 않지만 춤에 대한 나의 미학적 견해랄까, 그런 단편적인 것들도 같이 싣고 또 ‘신인춤제전’에 연관된 춤평도 좀 실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춤의 미학을 향한 탐구의 한 과정으로 보고 그 일련의 과정 속에서 단편적이나마 우리 춤의 이모저모를 언급한 것도 모아보자 해서, 교양서이면서 조금은 이론적인 측면도 있는 그런 책을 내게 됐습니다.
현장 보고서라고도 할 수가 있지만, 또 인사말 모음도 있기 때문에 전문 서적이라고까지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춤에 대한 미학적 견해도 같이 실려 있기 때문에 학술 부분에 해당되는 것도 같이 가미한 편이 됐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이 책의 성격이 조금 모호해졌습니다마는, 그 책이 발간되고 춤 전문지에서 또 몇몇 문화 담당 신문 기자 쪽에서 인터뷰 요청이 좀 들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 책을 평론이기도 하고 현장 기록물이기도 하고, 그러나 한편 준창작론의 일면도 있고, 본격 미학 이론서에 준하는 춤미학 견해를 모은 듯한 그런 인상을 받는다고 평가를 내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산 지역에서도 크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았지만, 32회에 걸친 ‘신인춤제전’이 어떻게 생겨나고 수행되고 지금에 이르렀는지에 대한 관심이 일어서 의미 깊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면도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춤의 고장 부산 지역에서 젊은 춤꾼을 길러내는 데 하나의 작은 길잡이 노릇을 해왔다고 하는 그런 평가 속에서 ‘신인춤제전’에 대한 관심의 바람이 약간 일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 책을 낸 보람도 느낀 편입니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국내에서 젊은 춤꾼의 등용 과정의 하나인 행사가 춤계 또는 사회에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다행스럽고, 조금은 미래 전망적인 면도 있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춤에 대한 탐색 과정으로서, 젊은 춤꾼들과 발을 맞춰 같이 동행하면서 우리 춤의 갈 길이 어떠해야 될 것인지, 또 가는 길이 무엇을 향해 있는 것인지, 가다 보면서 얻어내는 성과 같은 것은 또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고민한, 이를테면 춤의 미학을 찾아가는 생성의 탐색 행로라고 보기 때문에 책 제목을 ‘생성미학행’이라고 했습니다. 미학행의 한 중간 보고서라고도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생성미학이라는 어감이 던져주듯이 젊고 푸른 우리 춤의 미학적 탐색이라고도 저는 말할 수 있겠다 싶습니다. 그러므로 무르익은 노경의 경지에 이른 사람의 글이 아니라는 점, 그것은 앞으로 도달해야 할 한 지점일 따름이고 지금은 과정이라는 점에서, 저의 춤의 실제 작업과 춤 이론 작업의 한 중간 도정에 있는 중간 결과 보고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평가하기는 그렇습니다.


우리춤에 대한 젊고 푸른 미학적 탐색의 행로

: 선생님께서는 오랫동안 우리 춤의 아름다움, 우리 춤의 미학에 관해서 연구해 오셨습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춤이 미학의 연구대상이 된 사례는 많지 않습니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유명 철학자의 논리를 빌려와서 연구를 진전시키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논의의 출발점이 철학이 아닙니다. 즉 철학을 설명하기 위해서 춤을 빌려오지도 않고, 또 춤을 설명하기 위해서 철학적 틀에 갇히지도 않습니다. 물론 부분적으로 인용을 하시기도 하지만 어떤 철학적 틀 안에서 춤을 설명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예술적 사실인 춤에 방점을 두시고 미학을 전개하시는데요. 그 까닭이 무엇인지요?



채희완



: 춤에 관한 이론서, 이를테면 춤의 철학, 춤의 사상, 춤의 문화사적 이해, 이런 것이 춤의 미학을 다루는 데 선행 연구여야 된다고 평소에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춤의 현장적 실체를 놓고, 계속 변화무쌍하게 춤의 모양이 달라지고 있는 그 현상을 추적하면서 거기서 추출되는 또는 발견되는 미학적 문제의식이 무엇인가, 그러니까 문제의식으로서의 미학적 관점을 한번 통용 시켜보자 라는 것이 저의 기본적인 의도였습니다.
어떤 이론 체계를 놓고 그 춤을 설명하고 접근해 나가는 방식보다는 춤 현상을 놓고, 그 현상이 어떻게 지금 생겨나서 실행되고 가고 있는가를 살피면서 추정되거나 확정되거나 전망되는 그런 과제들을 떠올려서 그것을 실제와 맞닥뜨려 가지고 거기에서 의미 내용을 추출하고, 발견해 내고 창작해 내고 상상해 내는 것, 이런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근사하게 얘기하면 우리가 어떤 사물을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그 사물이 있게 된 배경적인 이해에서부터 그것이 싹이 트고 자라고 성장하고 진화된 모습을 쭉 추적해 나가는 것으로서, 한 현상이 고정불변에 머물러 있지 않고 변화무쌍하게 흘러가고 있는 모습을 통해 무엇이 그렇게 변화무쌍한 방식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는가, 그 변화의 본체를 밝히는 작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어떤 기본적인 춤을 보는 관점을 투사해서 그 작품을 해석하는 방식이 아니라, 현상을 추적하면서 생겨나는 문제의 생성, 문제의 변화를 계속 추적해 보는 방식, 이를테면 보이는 질서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질서의 힘과 맥락과 흐름의 근원적인 바탕을 추정하면서 궁구하는 것, 그야말로 생성미학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이미 존재돼 있는 것에서 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가능케 한 생성의 어떤 바탕을 추적하는 방식으로, 곧 존재가 존재를 낳는 게 아니라 생성이 존재를 낳는다고 하는 이른바 생성론의 관점을 통해서 바라보자라는 것이 기본 자세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드러나고 있는 춤의 현상을 기본적인 물체로 놓고 그 안을 살피는 그런 방식을 택했다는 것이죠.

: 저는 선생님께 오랜 동안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이기도 합니다. 강의하실 때마다 춤에 대한 미학적 접근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는 철학에 방점을 두고 춤을 연구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춤 그 자체로부터 미학을 진전시키는 방식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설명을 들었을 때 저는 ‘난 춤이 좋아. 생생한 춤의 현장이 좋아. 그래서 어려운 말이나 관념보다는 예술적 사실에 해당하는 춤 그 자체에서부터 출발하고 싶어. 떠다니는 이야기는 잘 모르겠고, 보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춤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하고 싶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춤 형식을 지속적으로 연구하게 된 계기입니다. 그런데 선생님 말씀을 이렇게 들다보니 제가 너무 단순하지 않았나 싶습니다(웃음).

: 그게 가장 더 기본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실천적 이론, 이론적 실천, 이것을 동시에 수행하는 과정에서의 방식은 어떤 면에서는 실천해 나가면서 이론을 창출해 나가는 것, 실천해 가면서 생성 원리를 거머쥐는 것, 그것을 택해 보자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선 먼저 춤의 현상적 실체를 그야말로 보고, 만지고, 느끼고, 그것을 해명해 보려고 하는 그런 자세를 취하는 것이죠. 주어진 어떤 관점을 통용시켜서 춤을 보는 것보다 그게 더 유리한 조건으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춤의 현장을 접할 수 있었고, 또 실제로 춤을 춰보기도 하고, 춤을 제작하고 기획하고 만들어 보는 그런 계기를 스스로 마련하거나 주어지게도 해봤기 때문에, 그런 춤의 생성 현장에서 출발하자, 이번 경우에는 그렇게 생각을 했기 때문에 춤의 실체가 먼저 다가오는 것이죠.

: 선생님께서는 미적 대상인 춤의 성격을 규정하실 때 문화인류학자 쿠르트 작스(Curt Sachs)의 두 구절을 아주 즐겨 인용하십니다. 하나는 “춤이란 한 단계 고양된 삶일 뿐”이라는 구절이고요. 또 다른 하나는 “춤추지 않고서 어찌 인생을 알리오”라고 하는 그노시스교의 찬송가 구절입니다. 이를 통해 선생님께서 주로 강조하시는 것은 인류는 죽고 사는 생존을 위해, 의식주와 관련된 각종 생활을 위해, 그리고 존재 가치 활동을 가능케 하는 에너지원인 생명 유지를 위해 일상적으로 늘 춤추었다는 점입니다. 특히 우리 춤은 생존과 생활과 생명을 위협하는 요소, 흔히 ‘살(煞)’이라고 하는데요. 이 살, 즉 죽임을 적극적으로 풀어내는 살풀이적 성격이 강하다고 보십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무엇일까요?

: 쿠르트 작스의 『춤의 세계사』가 1부, 2부로 나뉘어져 있다면 1부는 ‘종족의 춤’이라고 하는, 이를테면 춤의 인류학에 연관돼 있는 내용이고, 2부가 이제 ‘춤의 세계사’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관통하고 있는 시각은 그 책의 첫머리에 있듯이 춤이란 사람이 사는 일과 같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 사는 일이라고 하는 것이 목숨을 부지하는 것, 종족을 보존하는 것, 그리고 그 이외에 남는 에너지를 문화적인 역량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여기서 문화적 역량으로 풀어내는 것이 춤이다, 이것을 대전제로 하고 있죠. 그러니까 살아가는 것, 살아 있음을 대전제로 춤을 인류학적으로, 세계사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었습니다.


춤이란 한 단계 고양된 삶일 뿐

: 그 서문은 그야말로 명문이라고도 할 정도로 춤의 정곡을 찌르고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서 얘기하고 있는 삶은 그저 그렇고 그런 생존 차원의 목숨을 이어가는 개체 보존적, 종족 보존적, 이를테면 본능적 삶, 그 바로 위 단계까지 가 있는 삶의 한 양상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고양된 삶으로서 춤을 보는 그 시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고양된 삶이 춤이라고 할 때, 삶은 삶이되 한층 고양된 그것이 춤의 본연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고양된’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저로서는 삶의 본연의 모습에 가깝게 사는 것이라는 점에서, 살아 있음을 스스로 확인시켜주는 것, 내가 이렇게 왜 살고 있는지, 또 살아서 어떻게 되자는 것인지, 또 같이 사는 사람들하고는 어떻게 살아나가는 것인지 등등과 긴밀한 연관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 점에서 제대로 된 삶, 누리는 삶, 그다음에 어떤 좋은 세상 속에서 같이 더불어 산다고 하는, 인류의 보편적인 어떤 아름다운 세상의 삶이 실현되고 있을 때의 그 모습, 그런 것을 작스는 고양된 삶, 곧 춤의 세상이라고 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 해석을 합니다.
특히 그 책의 맨 첫머리에 인용하고 있는 춤추지 않고서야 어찌 산다고 할 수 있겠느냐 이런 그노시스의 잠언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겁니다. 춤의 의미를 가장 핵심적으로 얘기해주고 있다고 보는데, “춤추지 않고서야 어찌 인생을 알리오(whosoever danceth not, knoweth not the way of life)”에서 인생은 영어로 하면 ‘the way of life’입니다. 이것을 삶의 길이라고 번역할 때, ‘길’이라는 의미가 여러 가지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방도나 기술적인 측면만은 아닐 겁니다. 길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삶의 진정한 의미가 실현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저는 춤, 댄스의 어원이라고 하는 산스크리트어 ‘탄하(tanha)’의 의미와 맞바로 통한다고 봅니다. 생명력의 자기 충일, 생명력이 막 뿜어 나오는 그런 상태를 지칭하는 탄하, 텐션이 터져 나왔을 때 생명력의 충일한 분출, 그러니까 팔딱팔딱 뛰는 점핑 동작이 춤의 근원이라고도 할 수가 있는 거죠. 나중에 느리고 우아하고 사색 깊은 춤이 추가된 것이고, 원래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향유하는 자의 어떤 삶의 모습을 춤이라고 얘기하는 것이죠. 기운이, 생기가, 생명 기운이 펄펄 나는 듯한 모양, 환희용약(歡喜踊躍)의 모양을 춤이라고 지칭하는 그 원래의 뜻과도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한층 고양된 삶으로서의 춤이 제대로 살아 있음을 확인케 하는 춤이라면, 우리 춤에서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위협, 살(煞)이라든지 죽임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항하고 문제를 해소하는 춤은, 그야말로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춤의 모범적인 전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 그렇게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건 너무나 단순한 논리로도 얘기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것은 춤추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것만이 춤을 출 수 있기 때문에 춤출 수 없게 하는 죽음과 죽임을 물리치는 것 또 그 죽임과 죽음을 부여잡고 죽자 살자 춤추는 것, 그것은 춤의 본연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상징적으로 얘기하는 것이야말로 살풀이입니다. 살기, 죽음, 죽임, 못살게 구는 것, 삶을 저해하는 것 전체를 액(厄)이라고 본다면 그 액이 바로 살이고 죽음이니까, 그 살을 풀어내는 것, 춤추지 못하게 하는 살을 풀어 물리치는 것, 이것이야말로 살게 하는 춤이고 목숨을 부지하게끔 만드는 것인 동시에 생명을 부여하는, 새 생명을 부여하는, 생명 기운을 부여하는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그런 의미로 춤추지 못하게 하는, 춤출 수 없는 상황을 뚫고 나가기 위한 아주 적극적인 행위의 방식을 일컬어 살풀이라고 한다면, 살풀이야말로 그런 의미 그대로 죽임의 세력과 맞장을 뜨는 것, 죽임이란 무엇인지를 드러내서 그 정체를 밝히면서 그것과 한판 붙는 것, 그래서 지든 이기든 대결 국면에 이를테면 죽임 세력의 정체를 밝히면서 그와 한판 붙는 그런 적극적인 삶의 방식 하나로 살풀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우리의 경우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상징적이고 실제적인 일례가 중세 때 유럽 대륙에 사는 사람의 3분의 1을 몰살시켰다고 하는 ‘죽음의 춤’이라고 하는 무도병(舞蹈病)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무도병의 한 일환일 수 있는 춤병(역병)을 물리치는 한 방식으로서 추어졌다고 볼 수 있는 또 어떤 면에서는 병과 대결해서 그것을 물리치고자 할 때 활용되었던 병굿의 일환으로 추어졌던 〈처용무〉도 살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보편적으로는 세시풍속에서, 농경사회에서 그야말로 명절 행사로서 행해졌던 그런 놀이의 핵심은 분명히 노래 부르고 춤추는 것이었을 겁니다. 제의적인 절차가 지나가고 나서 한판 먹고 떠들고 신나게 노는 것이 당연히 명절 놀이였고, 그런 명절놀이는 지극히 생명의 리듬을 살려주는 아주 고도의 사회적 장치라고 봅니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것, 병고나 가난이나 환란을 마을 단위로 막아내고 안전과 행운을 비는 그런 축복된 한 해를 맞이하고자 하는 새해맞이, 정초의 많은 민속놀이의 핵심은 흔히 벽사진경(辟邪進慶)이라는 공동 주제를 가지고 있다고 그러잖아요. 벽사진경, 사악한 것, 흉년, 병고, 가난, 억압, 사회적 모순 구조를 뚫고, 제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그런 것을 공동으로 제거하는 과정을 명절날 집중적으로 행하듯이, 그때 활용되고 있는 춤은 전부 그런 살풀이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쿠르트 작스가 얘기하듯이, 특히 원시시대의 경우에 춤이 없이는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웠다, 살기가 어려웠다 할 정도로 온갖 삶의 형태에 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전쟁춤이나 사냥춤과 같이 주술적 효능(magic power)을 얻기 위해 일을 벌이기 전에 한 번씩 예행연습 삼아서 하는 그런 일련의 행위뿐만 아니라, 살아나가는 일 그 자체에도 계속 노동의 힘겨움이 있습니다. 그 일의 과정을 조금 더 경쾌한 심신으로 할 수 있게끔 부추기는 것이 노래와 춤이라고 한다면, 그 밑에 깔려 있는 생명의 리듬(생체의 리듬)을 타면서 하는 모든 삶은 전부 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상의 호흡과 리듬이라고 하는 것은 춤으로 집중돼서 드러나고 있다. 그 일상의 리듬화, 일상 동작의 리듬화, 더 진전시켜서 일상의 리듬화, 일상의 장단화, 장단을 탄 삶의 모습, 산문의 세계가 아니라 노래하는 세계와 같은 일탈이면서 현실에서 벗어난 일탈이 아니라 현실과 함께, 현실에 발을 딛고 일탈하는 그런 모습으로서의 춤, 이것이 고양된 삶으로서의 춤이다. 이렇게 의미 연결을 해보는 것이지요.



송성아



: 그런데 선생님, 오늘날 우리는 일상적으로 춤추지는 않습니다. 만인이 춤추는 시대는 아닙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삶의 곳곳에 편재했었던 춤의 여러 기능들, 예컨대 노동 생산성 증진을 위한 춤, 신과 교섭하기 위한 종교춤, 자연과 교섭하는 춤, 공동체 의식을 강화시키는 춤, 수렵이나 전쟁 승리를 위한 춤, 심신 치유를 위한 춤, 통과의례를 위한 춤, 생체 에너지 충전을 위한 춤, 유희 본능을 위한 춤, 인성과 감성 교육을 위한 춤, 건강 증진과 몸매 관리를 위한 춤, 여가 선용을 위한 춤 등 삶 속에 존재했던 여러 춤의 쓰임새를 복원시켜서 만인이 일상적으로 춤추는 세상이 되어야 된다고 늘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춤추지 못하는 사람을 대신해서 춤추는 사람, 그것이 댄서고 춤꾼이겠죠. 이 춤꾼들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십니다. 특히 젊은 작가들에 대한 기대가 남다르십니다. 그래서 30년 넘게 ‘젊고 푸른 춤꾼 한마당’이라고 하는 ‘신인춤제전’을 매년 개최하고 계시기도 합니다. 이 땅의 춤꾼들, 조금 좁혀 이 땅에서 춤을 추고 있는 신진 작가들이 어떤 춤을 무궁무진하게 만들어 나가기를 기대하시는지요?

: 그래서 우리는 ‘신인춤제전’의 이름을 딴 말로 ‘젊고 푸른 춤꾼 한마당’이라고 합니다. 이 ‘젊고 푸른 춤꾼 한마당’이 여기저기 운동의 모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영남권이 춤의 고장이라고 하는데, 그 지역에서부터 무엇인가 생활 현장 속에서 실현되기를, 그리고 젊은 춤꾼들이 선두 주자 역할을 하여 실현되기를 요망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허망한 꿈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실현 가능하고 실현되는 세상이 바로 저의 표현으로는 ‘개벽의 세상’이라는 겁니다.
개벽의 세상은 춤추지 못했던 사람들이 춤추는 세상이고, 이름 없는 사람이 자기 이름을 갖고, 묻혀 있었던 삶이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는 그런 세상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게 요즘으로 얘기하면 여성적인 것, 약자의 것, 소외된 사람의 것, 이것이 전면적으로 부각되는 그런 세상이 오도록 앞서서 미리 춤으로 앞당겨주는 그런 역할을 젊은 층에게 요망하는 것이죠. 그래서 기대를 한다는 거죠. 물론 기성 춤꾼이나 오래된 춤꾼, 그런 사람들의 힘을 배제한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쨌거나 조금 오래됐으나 그 힘이 지속적인 힘을 발휘하기가 어렵게 된 진정한 의미의 것이 다시 생명을 얻고 부활되는 것, 그것을 앞서서 실현시키고자 하는 사람을 젊은이로 보는 거죠.
그런가 하면 70, 80대가 된 지금도 우리 사람들은 뭔가 판만 주어지면 저절로 몸이 막 들썩거리고 움직여지잖아요. 그건 그야말로 미적 평화의 세계입니다. 노경(老境)의 세계이죠. 왜 그러냐 하면 손 한 번 들어도 춤이 돼버리는 그런 세계입니다. 그런데 그런 무르익고 쩔은 춤이 아니더라도, 젊은 기운은 죽어 있는 식물을 이파리 나게 하고 춤추게 할 수 있는 생기가 훨씬 더 강렬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이 잠재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젊음의 힘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동양 미론을 얘기할 때 동양 세계에서는 약경(若境)이라고 하는 젊은 기운, 약관 몇 세 할 때 20세 전후의 그 약경과 대립되는 것을 노경의 세계라고 얘기하지요. 동양 예술의 마지막 도달 지점은 노경의 세계라고 얘기했는데 그것은 힘이 없어지는 무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더 적극적인 의미로 노경의 세계는 무에서 유(有)를 창조한다고 하는 약경의 세계에 반대되는 것이지만, 그런 약경의 세계가 무르익어 쩔은 세계, 그것을 또한 노경의 세계라고도 봅니다.
여태까지 노경은 있음의 세계에서 없음의 세계로 나아가서 없음의 세계에서 무한한 가능성, 있음의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그런 것으로 보았습니다. 소멸의 세계, 적막의 세계 이런 것과 연관되는 식으로 노경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었는데, 저는 달리 생각해서 약경이 무르익은 세계, 그것을 노경의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무에서 유 이것이 약경이고, 노경은 유무가 순서 없이 혼연일체로 같이 가는 세계로 봅니다. 개벽 세상의 춤은 노경의 세계에 있는 분보다 약경의 세계에 있는 분이 훨씬 더 얻어내기가 유리한 조건이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도 나이로 치면 노경의 세계에 접어들어야 되는데, 지금 아직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니까 약경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지만, 노경은 약경의 생성력(생명력)이 소멸되고 다시 없음의 생성가능성을 열어놓는다는 그런 단계론으로서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유무가 엉켜 있으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지극한 기운이라고 하는 있고 없고가 한데 얽혀 있는 혼연지일기(渾然之一氣)로서의 그 무엇이 무르익어서 잠재적으로 또는 폭발적으로 드러나는 세계라는 것이지요. 창조적인 것이 맨 처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창조적 진화로서의 결말이 아니라 창조적 진화로서의 노경의 세계, 그것이 삶을 살아나가는 과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맨 처음에 우리가 ‘고양된 삶이 궁극적인 삶의 세계를 지향한다’고 얘기했지만, 궁극이 끝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어떤 높은 유토피아가 어디 따로 설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 진행 과정 속에 있다는 것, 그것을 얘기하고 싶은 것이죠. 춤으로 얘기하고 싶은 것이죠.


창조적 생명적 진화로서의 노경의 춤

: 그러한 것이 우리 춤에 깔려 있습니다. ‘춤을 배워서 추나’라는 말이 통용될 수 있는 그런 춤의 세계를 우리는 행복하게도 이미 품고 있는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행복한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억압당하는 고초를 우리 선배들이 많이 겪었기 때문에 또 그런 고난의 과정도 우리 몸속에 이미 배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풍성한 춤의 경험들이 이미 잠재돼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게 오히려 우리에게는 행운, 행복이라고도 얘기할 수 있습니다. 춤을 제대로 잘 출 수 있는 그런 역사적인 인자들을 이미 많이 품고 있었기 때문에, 행복하게 즐거움의 세상으로만 살았던 그런 경험보다는 훨씬 더 근사하고 멋있는 춤의 세상으로 옮겨갈 수 있는 유리한 역사적, 신체적, 창조적 진화의 힘을 온통 많이 몸으로 물려받고, 역사적으로 물려받고, 지정학적으로도 물려받은 그런 편이어서 춤이 잘 추어질 수밖에 없는 땅덩어리에 우리가 살고 있다, 이 시절에 살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것을 젊은 사람들한테 몸으로 스스로 좀 체득하게끔 그렇게 은근히 부추기는 일을 ‘신인춤제전’이라는 이름으로 해왔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송: 선생님, 앞서의 질문들은 미적 대상으로서의 춤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와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방향을 조금 달리하여, 선생님께서는 예술적 사실 그리고 현장성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어려움 중 하나는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춤의 짜임새, 즉 구성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구성이 규명되어야 체계적인 해석과 평가가 가능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땅의 춤 형태는 매우 다양하지만 창작 작품의 경우 그 짜임새를 파악하는 선생님만의 노하우가 계신지요. 물론 좀 오래됐습니다만, 선생님께서 『춤지성』 창간호에서 서브젝트 매터(subject matter), 우리말로 흔히 제재(題材)라고도 하고, 선생님 표현을 빌자면 ‘주제적 소재’라고도 하는 그 개념을 중심으로 설명하신 바가 있습니다. 너무 오래 전이니 그 개념을 중심으로 다시 설명해 주셔도 좋고, 혹 방법론이 바뀌었다면 바뀐 방법론으로 설명 부탁드립니다.

: 아주 비근한 예를 하나 든다면, 어느 책에서도 한 번 ‘사람은 왜 춤을 추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놓고 해본 얘기입니다. 파도가 출렁이고 물살의 기운이 막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부산 사람은 자주 목격할 겁니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도 그 밑에는 고요한 것 같지만 아주 출렁이는 큰 파동이 지어지고 있는 모양을 볼 겁니다. 파도나 파동은 모두 움직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춤춘다’라고 표현할 때도 있고, ‘오늘 파도가 조금 일렁이네’, ‘파도가 치네’, ‘물결치네’ 이렇게 보고 마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파도가 물결치는 모양을 ‘파도가 춤춘다’라는 표현으로 이전시켜서 보는 눈(目), 사물을 받아들이는 마음, 이것이 제일 먼저가 아니겠는가 싶습니다. 같은 움직임인데, 같은 물의 움직임인데 어느 것은 그냥 물결치는 움직임이고 어떤 것은 춤추는 움직임으로 파악하는 것, 거기에 어떤 변별 지점이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파도가 춤춘다’는 표현은 의인화된 표현이죠. 파도는 결코 춤추는 게 아니죠. ‘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다’고 할 때, 그 ‘아름답다’라는 것에 꽃의 자의식이나 의도가 숨어 있는 게 아닙니다. 꽃은 이렇게 생존적 차원에서 피어 있는데, 또 아름답게 피어야 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지 않은데, 우리는 그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파악합니다. 그것은 심경의 이동, 보는 눈의 이동, 마음의 이동입니다. 대상을 바라보는 자기 마음의 관점 이동입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춤뿐만이 아니라,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춤을 본다는 것은 사물을 의인화시켜서 본다는 것이고, 사람의 마음과 엇비슷하게 같이 맞춰간다는 뜻이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얘기하면 그 사물을 단순한 사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물로, 생동하는 사물로, 기(氣)가 어려 있는 사물로 본다는 뜻이 되는 거죠. 잘 모르는 얘기긴 하지만, 20세기 들어와서 신과학에서 얘기하고 있는 것으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자기의 조직 운동을 한다, 자기의 생명 운동을 한다, 마음을 가지고 있다, 티끌조차도 생명체라는 것입니다. 제 시각은 이런 얘기들과 좀 통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각으로 움직임을 보는 것, 그것이 가장 기본적인 것이겠죠.
그렇다면 그냥 움직이는 걸 춤으로 표현한다고 하는 것은 다분히 의인화시키는, 보는 사람의 기의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는 생기(生氣)의 준말인데 생명 기운이죠. 살아 있음으로 본다는 것이죠. 살아 있는 근원 활동,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이 단순 존재가 아니라, 계속 무엇인가 활동하고 있고 생기가 돌고 있고 생명 기운이 어려서 무슨 일을 해내고 있는 것으로 본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칫하면 정령주의, 모든 사물을 정령주의적 관점으로 보는 것과도 일면 통하지만, 그렇게 극단적인 예가 아니더라도 모든 사물들은 그 자체 다른 것과 유기적 관계 속에서 협동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보통 그런 식으로 21세기 들어와서 생태학에서는 기본적인 보는 눈을 설정하고 있잖아요. 그런 것으로 보는 시각이 제일 일차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근대 예술의 한 특징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자아의식, 자아의식의 발견, 자아의식의 표현, 독창성, 이렇게도 얘기합니다. 자의식대로 관찰해서 얻어내는 어떤 의미 체계, 삶의 의미 체계를 표현해내는 것이 예술이다 이렇게 하는데, 물론 거기에 개체의 생명력을 파지할 수 있는 저의 마음도 있지만, 그 개체가 공생하고 삼라만상과 서로 유기적 관계 속에 있다는 것도 같이 파악하는, 개체이면서 공생 관계에 있다는 것을 동시에 파악하는 그런 것을 21세기는 요망하고 있습니다. 그게 생태의 중요성을 얘기하는 사람마다 가장 강조하는 지점입니다. 그런 관점으로 사물로서의 생기를 품고 있는 예술로 파악하는 것이 첫째 시각이 아닌가 싶습니다.


기가 통하는 감정이입의 호성

: 서로 주고받고 하는 관계를 보통 동양에서는 기가 통한다, 이렇게 얘기를 하잖아요. 사물의 기와 본인의 기가 서로 통하는 것, 그것도 어쩌면 20세기적 미적 체험의 한 이론이기도 합니다. 그 이전까지 예술은 작품을 통해서, 내가 사물로서의 예술 작품과 서로 교류하는 가운데, 예술 작품이 나한테 와서 자아화(객체의 주관화) 되거나 또는 자아가 객체 속에 빠져드는 주체의 객체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것을 감정이입이라고 하는데, 감정이입은 그렇게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일어나지요. 여태까지 예술의 대부분은 내가 사물로서 존재하는 세계에 마음을 줘가지고 거기서 일어나는 어떤 무엇을 불러일으켜서 사물을 새롭게 만들어 가지고 내가 거기에 합쳐지는 방식, 즉 사물에 의미를 부여해서 그 의미가 나와 잘 맞게끔 조정하는 것을 감상이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감정이입을 본다면, 사물 자체도, 예술적 존재자도 그 자체 생명 운동을 매번 벌이는 것입니다. 아까 티끌도 생명 운동을 한다고 하는 그런 차원에서 그것과 서로 만나는 것이지, 인간의 의식이 거기에 침투해가지고 그것과 일치되도록 하는, 객체와 나의 일체감이 서로 통하는 방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여러 가지 생명적 기운과 나의 생명적 기운이 서로 교류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일방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게, 최근 감정이입의 새로운 통로입니다.
그런 사례들이 요즘에는 그런 표현을 얻기 어렵지만, 우주 생명과 잘 통하는 예, 그러니까 아주 비근한 예를 든다면 예수님의 기적, 또 강증산의 기적, 초인의 어떤 좀 남다른 것, 이런 것을 어떻게 종교적 심성의 해석 외에 어떤 식으로 풀이해 볼 것인가, 그게 많은 사람들이 고민했던 부분인데 김지하 시인이 강증산의 여러 생활 속에서의 이적을 설명할 때, 자연 자체가 지니고 있는 지극한 전일적 생명력과 내가 일치됐을 때 그런 기적이 실제화 된다고 설명을 했어요. 사물적 존재자의 전일적 생명력이 나와 동일체가 됐을 때 그런 것은 일상적이고 자연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기적이 아니라는 얘기죠. 전 생명체와 내가 일체화돼 있을 경우에는 물 위를 걷고, 휘파람 한 번 불면 큰 폭풍이 몰아오는 거죠.


생성론과 생성미학

: 그런 차원에서 예술 작품을 바라보자는 게 이른바 생명론적 미학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는 아까 무엇을 표현할 것인가에 구체적인 소재거리를, 자기가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 그 내용물과 일치시켰을 때, 그 소재를, 바람을 표현한다 하더라도 자기가 표현하고자 하는 전일체로서의 생명을 표현하고자 하는 식으로 이 소재거리를 바꿔놓은 소재, 이것을 제재라고 하지요. 그것은 바로 얘기하고자 하는 바, 주제에 가장 근접해 있는 소재거리로 만들어 놓은 것, 소재를 주제로 얘기하고자 할 때 가장 가깝게끔 바꿔놓은 것, 그것을 서브젝트 매터(subject matter)라고 해석할 수 있지 않겠는가 했습니다.
지금과 같이 소재(matter)에서 주제(subject)로, 내용(content)으로 가는 코스가 있습니다. 또 다른 한쪽은 재료(material)에서 매체(medium)로, 형식(form)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쪽은 소재, 주제, 내용으로 가는 길이고, 저쪽은 재료, 매체, 형식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렇게 해서 내용과 형식이 한 덩어리로 되는 그런 식으로 작품론을 설명했던, 20세기 최대의 한 정점이라고 얘기하는 올드리치 예술철학의 예술작품론에서 결정적으로 빠져 있는 것이 제재, 즉 서브젝트 매터(subject matter)의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재는 널려 있지만 널려 있는 소재를 자기화 시키고, 자기가 주장하고 던지고 싶은 주제에 가장 가깝도록 그 소재를 이동시켜 놓는 것, 생각을 이동시켜 놓고 있는 것, 그게 제재죠. 제재가 바로 주제를 얘기해 주는 결정적인 것인데, 그것을 작동시키게 하는 방식을 저는 동양적인 관점에서 기운을 불어넣는다, 생기를 넣는 소재, 생기가 통하게 된 소재라고 설명해 보고자 했습니다.
그러니까 작품을 살아 있는 작품으로 보자는 것, 생기가 도는 작품으로 해서 그 생기와 나의 생명 기운을 서로 마주치게 하는 감정이입, 그것이 이성적이든 감성적이든 또 합친 것이든 그런 차원으로 설명을 조금 바꿔보는 게 어떻겠는가라는 것입니다.

: 앞서 인용하신 올드리치는 예술작품(a work of art)에 방점을 둡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결과물로서 예술작품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일련의 과정 자체를 중시하는 퍼포먼스(performance)가 각광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특히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행해지는데요, 이런 퍼포먼스는 무엇을 중심으로 살펴보시는지요?

: 그건 지금 얘기하신 대로 어 워크 오브 아트(a work of art), 예술에 관해서 작업한 결과물이 작품이죠. ‘워크(work)’라고 하는 생성체, 형성체가 물질로서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퍼포먼스를 생성체라고 한다면 ‘시리즈(series)’라는 명칭을 붙입니다. 시리즈 오브 프로세스(series of process), 어 워크 오브 아트가 아니라 시리즈물, 그러니까 한 다발의 과정, 창작의 여러 단계의 다발들, 시리즈 프로세스, 과정의 여러 단계로 작품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작품이 아니죠. 시리즈물이기 때문에 완성된 하나의 물체로서의 워크가 아닌 시리즈로 하니까 여러 단계의 과정들의 연합체라는 의미로 작품 개념이 바뀐 겁니다.
일반적으로 작품을 사이에 두고 창작과 감상이 양쪽으로 분리돼서, 이쪽은 창작자가 하는 일, 저쪽은 감상자가 하는 일로 분리 되었는데, 이러한 분리를 극복해 내는, 이전해 내는 한 방식으로 시리즈, 연속체, 과정을 얘기하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상황론 같이 되는 거죠. 작품론이 아니라 하나의 상황론. 그 상황을 수행하는 일련의 과정을 퍼포먼스라고 합니다.
퍼포먼스는 여러 사람들이 ‘수행’이라고 번역을 하던데요. 퍼폼(perform)이니까 수행하다는 것이겠죠. 그런데 그걸 놀이나 예술로 한다면 그걸 행위라고 번역해도 되는가. ‘임무를 수행한다.’ 이것도 퍼포먼스죠. 그런데 여기에서는 임무를 수행한다는 그런 의미보다는 문화 상황을 만들어내는 한 장(場)을 이루는 것, 필드(field)를 이루게 하는 것, 그러니까 문화 복합 상황입니다. ‘문화 복합 상황’이라고 얘기해야지 작품이라고 얘기할 수 없는 그런 예술 작업들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많은 공연들이 문화복합 상황입니다. 장소와 시간이 주어져야 되기 때문에. 그것의 가장 비근한 예로, 미국에서는 럭비나 미식축구 현장 전체를 예술 작품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걸 기존의 어 워크 오브 아트라는 개념으로서의 작품이라고 하기 보다는 하나의 큰 상황, 한 판, 한 마당, 필드(field)라고 얘기를 해야죠. 밀고 당기고 수행되고 있는 일련의 과정 전체의 문화 복합 과정들을 퍼포먼스 개념의 중심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현대 연행예술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보고, 20세기 이후 미국의 여러 문화적 상황을 설명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용어로 떠올랐던 것이죠.
1970년대 존 듀이(John Dewey)의 흐름을 받은 아놀드 벌리언트(Arnold Berleant)의 첫 논문이 『Art as Performance』라는 것인데, 그것이 미국의 예술 상황을 설명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떠올랐습니다. 미국적 예술 상황을 설명하는 환경예술이라든지 이벤트라든지 또 퍼포먼스라든지 이런 것을 미국의 20세기 연행 장르라고 한다면, 그 중심 개념이 퍼포먼스죠. 그 퍼포먼스의 개념을 그렇지 않은 예술 장르의 기본적인 속성에까지 확대 해석을 했습니다. 모든 예술은 퍼포먼스 개념 속에 들어올 수 있다, 들어오도록 지금 흘러가고 있다고 하는 것이죠. 예술가와 창작자가 분리돼 있었고 또 그것의 중간 통로가 작품이라고 얘기했던, 그렇게 세 가지로 나뉘어져 있던 것을 통괄적으로 보게 하는 시각으로 예술 작품이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요즘 특히 수용미학이 더 진전되면서 ‘작품은 예술가의 손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관점이 통용되면서, 그렇다면 소비자인 독자나 청중, 관람자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 부분들이 더 많지 않느냐는 것이죠.



채희완, 송성아



연행으로서의 예술과 수용미학

: 관람자의 판단과 평가에 의해서 재창조되는 것으로서의 예술 작품, 이렇게 얘기가 되니까 독자 모임이 거의 창작 모임과 같이 되는 거죠. 어떤 작가 중심의 독자 모임이 그 작품을 새롭게 창작, 창조해 내는 그런 모임으로 만들어지고, 거기 모인 사람들이 새로운 소설을 쓰는 모임으로도 가는 것이죠. 그러니까 독자가 단순히 수용자로서의 감상자만이 아니라 작품을 재해석하면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수용미학으로 흘러가면서 수용자의 역할이 더욱더 강조되고, 수용자가 개입해야만 작품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그런 예술 작품이 나타나는 거예요.
수용자의 발길이 닿아야만, 또 손길이 닿아야만, 수용자가 그 자리에 같이 있어야만 작품이 이루어지고 생성되는 그런 식으로 작품 활동을 전개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감상자에게 많은 부분을 넘겨주는 작업을 예술가가 실제로 행하기도 하고, 그것이 20세기 말의 한 예술적 현상이라고 하는 그런 추세와 더불어서 그런 현상을 설명하는 가장 바탕이 되는 견해이죠. 탁월한 견해이죠.
특히 미국 쪽 상황에서는 듀이까지 올라가 그렇게 됐는데, 넓은 의미의 필드로서, 장르로서의 예술 상황을 우리는 작품으로 접하게 돼 있다. 그전의 위대한 작품, 걸작, 명작, 이런 개념은 여지없이 파괴되는 거예요. 그야말로 하나의 이벤트, 하나의 퍼포먼스라고 하는 좁은 의미의 퍼포먼스, 함께 뛰는 것, 한판 벌려보는 것, 이런 것조차 예술 장르 속에 포함되는 식으로 바뀌어가는 20세기 후반기 예술적 상황의 변화된 한 모습이라고도 할 수가 있지요.

: 그런 작품에서는 일단 그것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예술가의 아이디어와 실행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 이때의 예술가는 기획, 연출, 프로듀서(producer)의 역할을 하고, 작품은 한 판입니다. 연행이 수행되고 있는 한 판, 문화 복합 현장을 ‘판’이라고 할 수 있고,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은 많은 부분 배우이기도 하고 관객이기도 하고, 합쳐져 있기도 합니다. 저는 작품을 가운데 두고 예술가의 작업, 감상자의 작업, 이 경계선이 깨지고 따라서 작품도 하나의 새로운 것이 돌출되는 상황으로 변화된다고 봅니다.
고전적 명작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과 장소를 떠나서 영원한 존재자로서 생명력을 우리에게 부여해 주는 것, 그것이 명작입니다. 그런데 여기 와서는 시간과 장소를 떠나서 영원히 존재한다는 개념이 없습니다. 한때 한 게임 뛰고, 일회성이고, 무형체성, 형체를 남기는 게 아니에요. 한 상황이 주어져 있고 그것도 그 상황이 끝나면 끝나는 것, 그것이 퍼포먼스의 실제 개념이죠. 또 그런 것을 지향하는 작품들이 막 쏟아져 나오고 있고 그걸 또 인정해 주잖아요. 전에는 ‘어림도 없는, 그게 어떻게 예술이냐’고 했는데 이제는 그걸 인정해 주는 것이어서,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연행문화에서 판놀음, 마당이라고 하는 의미가 새롭게 살아날 수 있는 않겠는가, 이런 개념 속에서도, 최신의 개념 속에서도, 예술을 규정하는 최신의 개념 설정에서도 어쩌면 한물갔거나 예술 이전으로 봤던 마당, 판, 필드, 이런 개념들이 살아날 수 있는 때를 만난 거죠. 한판 벌인다. 예술은 한판 벌인다는 뜻이다. 이렇게 돼버리는 거잖아요.


- 다음호에 계속

송성아

춤이론가. 무용학과 미학을 전공하였고, 한국전통춤 형식의 체계적 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표저서로 『한국전통춤 연구의 새로운 방법론: 한국전통춤 구조의 체계적 범주와 그 예시』(2016)가 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겸임교수로 있다.​

2026. 9.
*춤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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