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채희완선생님 『우리춤 생성미학行』 2
상황적 진실을 찾아가는 우리춤 미학의 새로운 행로
  • 일    시
    2026년 7월 27일 오후 1시 30분~5시
  • 장    소
    민족미학연구소 응접실(부산 서면)

진행·녹취·정리│송성아_춤비평가



채희완, 송성아



송성아: 앞서 컨템퍼러리 예술을 대표하는 퍼포먼스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다음에 제가 궁금한 것은 우리 전통춤과 관련해서 그 짜임새를 어떻게 파악 하는가 입니다. 선생님께서 연산구조(連山構造)라는 개념으로 한국 전통춤의 구성을 설명하신 바가 있습니다. 상당히 오래전에 제기하신 개념인데요. 지금도 여전히 많은 후학들이 이 개념을 인용합니다. 직접 설명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채희완: 연산구조는 춤뿐만 아니라 음악, 연주, 연극, 서커스, 민속놀이를 다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연행예술과 관련된 것으로, 연행예술이 어떤 구조(structure)로 구성됐는가를 설명할 때 동원되는 용어입니다. 가장 보편적이고 대다수의 설명은 문학의 구조를 얘기할 때 쓰이는 말들입니다. 피라미드 구조라고 하죠. 단순 구조가 아니라 피라미드 구조인데, 문학에서는 기승전결(起承轉結)이라고 합니다. 발단, 전개, 절정, 대단원으로 설명하는 이것이 일반적이고 기본적인 구조라 할 수 있습니다. 기승전결은 하나의 작품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양식 틀인데, 크고 작은 기승전결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우리 연행에서는 그 구조 구분을 제1과장, 제2과장, 제3과장 또는 한 마당, 한 거리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서양연극 특히 근대극에서는 막과 장으로, 3막 5장 이렇게 막과 장이라는 이름으로 구분했습니다. 그러니까 막은 액트(act)라고 표현하고, 장은 씬(scene)이라고 표현해 가지고, 한 막 안에 여러 장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 세분화된 방식을 활용하여 우리 연행의 거리를 장으로 본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한 작품을 마당판으로 하면, 세 마당 다섯 거리 이렇게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눴을 때 금방 닥치는 문제가 생깁니다. 3막 5장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전체 틀이 3막 5장의 틀이고, 전체 구조는 기승전결로 돼 있다는 뜻입니다. 즉 기승전결의 구조 틀을 가지고 있으며, 그 실제는 3막 5장의 장면 구성으로 돼 있다는 뜻입니다.


연산구조와 8폭 병풍과 판소리

채: 그런데 여기서 연산구조라고 하는 것은 기승전결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의 구조 틀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 마당이 연이어 서로 접속돼 있다는 뜻에서 연산구조라고 합니다. 그것은 기승전결의 방식이나 삼각형의 모양을 띠고 있지 않은 구조라는 점에서 옴니버스스타일(omnibus style)이라고도 달리 얘기합니다. 옴니버스 스타일은 한 버스인데, 요즘 서울 가 보니까 2층 버스, 3층 버스가 막 생기대요. 한 버스인데 2층, 3층이 막 있어요. 그런 버스를 이제 옴니버스라고 하는데, 그 버스에 탄 사람은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칸을 달리해서 따로따로 가고 있죠. 그것은 한 철도의 열차가 한 칸 한 칸 연이어져 있는 것과 거의 엇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적극적인 것은 가로로 연결돼 있는 게 아니라, 세로로 돼 있으니까 더 직접적인 연결의 방식입니다. 점선이 아니라 실선으로 구획되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각각 한 칸 한 칸은 정말 독자적입니다. 2층에 있는 사람하고 3층에 있는 사람은 다르다는 뜻입니다. 가는 데는 같아요. 근데 1층, 2층, 3층, 4층마다 가면서 벌어지는 양상은 다 제각각입니다. 3층 버스인데 1층에서 어떤 내용을 하고 있습니다. 2층에서 하는 내용하고 달라요. 또 3층도 3층대로 하고 있는데 다른 내용이에요. 그런 1층, 2층, 3층이 다 각각 다른 소재, 다른 주제, 다른 틀로 이루어지는데 가는 방향은 같습니다. 목적은 한 방향으로 같이 해놓고, 가는 내용의 표현 방식이 다르다는 그런 구조 틀로 가는 겁니다. 그렇게 됐을 때 연산구조라고 합니다.
이런 걸 연상하면 아주 손쉽습니다. 판소리12마당은 각기 다른 열두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각의 작품은 다른데 12개를 묶어 총칭할 때 판소리12마당이라고 하는 겁니다. 또 굿은 하나의 굿인데 12마당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예컨대 황해도 다리굿이나 평안도 다릿굿과 같이 하나로 총괄시키는 명칭은 있지만, 그 구성은 12개로 분산되어 있고, 그 분산돼 있는 것이 12층의 버스로 방향을 잡아서 가는 그런 것과 흡사하다고 했을 때 연산구조라는 말입니다.
크게 보면 한 산맥입니다. 그런데 그 산맥을 구성하듯 작은 봉우리,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모여서 한 맥을 이루고 있죠. 그 하나의 맥이 작품의 큰 이름입니다. 예를 들어, 일곱 마당으로 구성된 〈봉산탈춤〉은, 연산구조라는 관점에서 볼 때, 〈봉산탈춤〉이라고 하는 큰 산맥의 구성이 일곱 마당으로 돼 있다는 것입니다. 또 각각의 구성은 첫째 파계승 마당, 둘째 노장마당, 셋째 말뚝이마당, 넷째 영감‧할미마당 등등으로 이렇게 돼 있듯이 오광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랬을 때도 옴니버스스타일이라고 하고 연산구조로 돼 있다고 합니다.
병풍을 연상시켜도 좋습니다. 8폭의 병풍이 있다고 하면 하나의 병풍입니다. 그 안에 한 폭마다 보면 일관된 주제가 아닙니다. 폭마다 다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고, 보는 사람은 한 장 한 장 봅니다. 김홍도 풍속화첩도 여러 그림이 한 묶음으로 돼 있는데, 그걸 김홍도의 풍속화첩이라는 이름으로 총칭하지만 각각은 씨름판, 기와 이은 지붕, 또는 농사짓는 것, 배 타고 가는 것, 뭐 이런 각각의 주제와 소재, 내용이 다른 것을, 한 면 한 면 분리되어 있는 것을 합쳐놓은 겁니다.
물론 하나의 총괄적인 그림을 12폭 또는 8폭으로 만든 것도 있습니다. 십장생 그림 같은 것은, 십장생 그림을 펼치면 한 폭입니다. 그런데 접으면 12폭인데, 이렇게 하다 보면 하나의 그림이 2폭, 3폭에 겹쳐져 있는 경우가 있어요. 한 폭만 떨어뜨려 보니까 다 안 보입니다. 그때는 적어도 두 폭을 같이 펴야 되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다 보자면, 한꺼번에 다 보자면 12폭을 모두 다 펴야 됩니다. 그런 부분 집합으로 돼 있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연산구조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병풍은 8폭이라고 하면 8가지의 각각 다른 주제와 소재로 돼 있대요. 보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큰 한 폭으로 돼 있지만, 주제가 여럿이니까 한 작품이라고 볼 수가 없죠. 여러 작품이 뭉쳐져 있는 것인데, 우리는 전체 흐름을, 그런 병풍을 볼 때는 전체를 봐야 되는 겁니다. 전체를 생각하면서 부분을 보는 거지요. 8폭인데 여기 한 폭, 또 여기 셋째 폭, 다섯째 폭 이렇게 똑똑 떼어서 봐가지고는 전체를 봤다고 할 수가 없지요. 보는 것은 한 폭씩 보되 전체가 펼쳐져 있는 것을 크게 생각하면서, 그러니까 목적지가 한 군데 크게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따로따로씩 봐야 되는 거지요. 하나를 보되 여럿으로 보는 거죠. 이것을 봐서 한 폭의 큰 이미지를 생성시키게 만드는 거죠. 그리고 거꾸로도 얘기할 수가 있습니다. 그 12폭 중의 하나는 폭포를 그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여름을 그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 펴야만 사계절을 얘기한 것이고 산천 전체를 얘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산천 전체, 12달, 사계절을 다 그렸다고 하는 큰 흐름을 상정하지 않고 한 폭만 가지고 얘기하는 것은 부분을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그렇게 보는 관점이 하나 있고 또 거꾸로 보는 수가 있습니다. 12폭의 한 부분인 한 폭만 가지고도 전체를 다 보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때는 전체를 구성하는 한 부분이 전체를 대표하고 있다. 이럴 때 연산구조라고 얘기합니다. 이게 20세기에 부분과 전체가 어떤 식으로 결합돼 있는가를 설명할 때 흔히 예를 드는 그런 의미로서의 연산구조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구조가 또 있습니다.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서 집을 만들었을 때, 벽돌 한 장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벽돌은 쌓아야만 구조 틀로서 집이 생기겠죠. 그러니까 그때 부분은 전체를 위해서 포괄돼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는 전체를 위해서 희생을 당한 거죠. 하나로서 자기 소리를 부르짖기가 어렵습니다. 이때 하나는 전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구조는 연산구조라고 하지 않습니다.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이 전체를 대표할 때, 연산구조라고 합니다. 산맥 속에 있는 한 봉우리가 그 산맥 전체를 대표해서 발언할 수 있게 돼 있는 구조, 한 개인이 자기가 속해 있는 집단 전체의 구성원에 지나지 않는 일개인이지만, 전체에서 빠져나가서 전체를 대표할 수도 있다고 하는 그런 체제일 때 연산구조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춘향전〉 완판은 8시간, 9시간 걸려요. 그런데 이런저런 사유로 춘향과 이도령이 처음 오작교에서 만나는 한 부분만 해도, 〈춘향전〉 전체를 다 부른 것에 못지않다고 합니다. 또 옥중가 쑥대머리도 있지요. 그것만 하나 불러도 〈춘향가〉를 다 불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옥중대목은 〈춘향가〉를 구성한 여러 대목의 하나일 뿐이에요. 부분일 뿐인데 그것만 불러도 〈춘향가〉를 다 불렀다고 생각할 수 있게끔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승무〉 완판을 42분 걸려서 하는 것 못지않게 처음 장단이 뭐죠? 염불장단이지요. 먼저 염불장단 몇 마루하고, 굿거리장단 몇 마루, 타령은 아예 빼버리고 당악 몇 마루 해서 축소연합을 시키는 것만 해도 완판을 한 것과 못지않은 전체상이 드러나게 해주는 구조, 이럴 때 연산구조라고 했어요.



채희완



연산구조와 마루

채: 그래서 기승전결과 관련해서는 더 세밀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전체를 구성하는 여러 부분이 있는데, 그중에서 무엇을 어떻게 선택해야 전체상이 드러나는가. 그 뽑아내는 방식의 가장 기초적인 개념이 ‘마루’ 개념입니다. 마루는 첫머리를 하면 최소한 그 마지막까지 하게 돼 있는 한 덩어리입니다. 최소 단위의 한 묶음을 이루고 있는 것을 중간에 뚝뚝 잘라서 따로따로 분할했을 때에는 마루 개념이 아니잖아요. 일상 언어생활에서도 마루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 때 올라가서 꼭대기에서 내려오는 게 한 마루라면, 그 앞부분까지만 가고 마루를 넘었다고 얘기할 수가 없듯이, 최소한 더 이상 분할될 수 없는 최소 단위의 의미 체계를 구성하고 있을 때, 한 마루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것을 뽑아내야 하고, 그것의 연합, 축소연합, 그 다음에 연산구조를 잘 활용할 것,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승무〉 한 판을 다 공략하지 않고 몇 마루만 뽑아서 하더라도 완판에 못지않게 할 수 있는 거죠. 일단 그렇게 잘 뽑아내서 접속시키는 것, 그러니까 마루를 손상시키지 않고, 또 마루와 마루가 같이 합쳐야만 의미가 구성되는 최소 단위가 있겠죠. 한 마루만 가지고는 안 되니까 그런 최소한의 의미 단위를 모아서 축소된 형태로, 42분 걸릴 것을 10분 이내에 끝낼 수도 있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또 판소리를 하면 몇 대목만 뽑아내서 해도 전체가 손상 받지 않습니다. 기승전결의 방식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한 부분을 빼내면 와르르 무너지는 벽돌 구성 방식이에요. 그렇지 않게끔 돼 있는 특징과 장점이 있기도 하지만요. 그런데 판소리의 구성을 잘 보면, 쪼개고 넣고 할 수 없는, 한 생명체로서 그 자체로 완결돼 있는 세포 조직이 있습니다. 그것의 이름을 마루로 하든지 어떤 것으로 하든지 구성의 아주 최소한의 생명 구조들, 이것을 어떻게 손상하지 않고 살려내는가가 핵심입니다.
단지 시간이나 장소가 협소하기 때문에 이렇게 막 줄였다, 그런 공연은 하지 말아야 하죠. 줄이지 말아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술적으로 잘 뽑아내기 위해서는 연주자들과 같이 입을 맞추지 않으면 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인자들, 협력자들, 같이 구성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합의가 없이는 뽑아낼 수가 없는 거지요. 음악은 막 서너 마루를 해 놓고 여기서는 두 마루만 하고, 그럼 일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다른 마루를 뽑아놓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춤을 맞출 수 없고. 그러니까 춤꾼과 연주자들, 그것을 구성하는 요인들, 인자들끼리의 합의가 돼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평소에 이렇게 짝짝꿍이 잘 맞아야만 “오늘 뭐만 뽑아서 합시다” 하면 “어, 그러자” 하고 금방 되는 거죠. 그걸 가지고 논의를 하고 막 하다 보면 공연을 못하는 경우가 많죠. 그러니까 한통속을 이루고 있을 때 가능한 거죠. 공동체성이 확보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공동체성이 확보돼 있지 않은 데에서는 한 개인이 단체를 대표할 수 없다는 그런 얘기 같아요. 그것이 잘 돼 있는 것이 또 시나위 구조라는 거죠. 거기는 평소에 그냥 짝짝꿍이 잘 맞아서 눈빛 하나씩 하면 “이 대목으로 넘어가지” 하고 넘어가 버리고, 다음은 누구다 할 것 없이 직접 받아내는 것이 전제돼 있을 때 가능한, 지독한 공동체의 협연 방식이지요.

송: 이것과 관련해서 하나 더 여쭙고 싶은 것은, 이애주 선생님께서는 연산구조 개념이 전통춤의 구조를 규명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하고 잘 뽑아낸 개념이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승무 같은 경우에는 어떤 정서를 절정으로 몰아가는, 이애주선생님 표현으로는 ‘서정적 서사’ 또는 ‘서사적 서정’이 〈승무〉 저변에 깔려 있다고 보십니다. 그래서 독립적인 에피소드 예컨대 염불과장, 타령과장, 굿거리과장, 법고과장, 당악, 뒷굿거리까지 쭉 이어지는데, 이 안에 기승전결과 유사한 어떤 일정한 관계성이 있어서 임의적으로 뽑아 재구성하기는 힘들다. 즉 각각이 부분의 독자성과 대표성을 가진다고 해서 이것을 임의적으로 뽑아 재구성한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송성아



채: 그거는 조금 다른 의미예요. 결정적으로 다른 의미예요. 여기서 ‘서정’은 감정의 곡선을 그린다는 것인데, 그래서 ‘서정적인 서사’라고 하는데, 서정과 서사는 같이 놓을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일의 진행과 연관된 서사는 구조를 얘기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서정적인 것을 가지고 기승전결에, 처음에는 잔잔하다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것을 서정이라고 해서 기승전결과 연결시키고 또 서사라고 했는데, 그거는 조금 덜 맞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다만 무슨 뜻인지는 감(感)은 와요. 정서라는 것은 긴장과 이완, 밀고 당기는 것, 음악의 강약과 같은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얘기돼야 되는 거지, 구조의 틀 속에 집어넣는 건 아니라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정서라고 한다면 ‘정서적 서사’라는 것도, 서사는 스토리텔링 하는 겁니다. 스토리는 지금 얘기대로 말할 수가 있습니다. 발단에서부터 시작해야죠. 씨를 뿌리고 그다음에 줄기가 뻗고 이파리가 나고 열매를 맺고 떨어지고. 서사니까 그게 사건의 전개입니다. 서사라고 하는 것은 틀림없이 기승전결의 방식이 있는 것이지요. 서사인 경우에 아무리 쪼개도, 가령 발단, 전개까지만 하고 그것을 끊고, 또 클라이맥스를 따로 이렇게 하는 것은 구조 틀을 깬 것입니다. 그야말로 서사식으로 전개한다고 하면 일정한 정도의 기승전결 방식을 가져야 되는 것이죠. 그거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서정적인 것까지 잔잔한 기분에서 몰아치고 올라갔다가 다시 이완하고, 다시 올라갔다가 이완하고, 그건 아닙니다.
그런데 가령 〈승무〉를 놓고, 염불장단, 그다음 이어지는 것이 타령장단, 그다음에 굿거리장단이죠. 또 그다음에 법고, 그다음에 당악, 다시 굿거리장단입니다. 이 각각을 한 마당이 아니라 한 악장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악장 같으면 그것이 서사적인 흐름이든 또는 서정적인 흐름이든 음악적 양식 속에서 이미 규정돼 있는 게 있잖아요. 제1악장은 A, 제2악장은 B, 다시 제3악장은 B, 마지막은 다시 A로 끝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악장별 구성 방식은 어떤 의미에서는 넓은 의미의 기승전결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승무〉의 장단 구분을 악장 식으로 제1악장 염불, 제2악장 굿거리, 제3악장 타령 등등으로 볼 수 있겠는가?
가령 〈승무〉에서 ‘염불장단을 아예 빼버리고, 타령장단으로부터 시작을 해버려’라고 한다면, 1악장이 없어지는 셈입니다. 1악장이 없이 2악장을 하는가? 교향악에서는 아주 독특한 연주 방식 이외에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전개를 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야 교향악이 되니까. 전체를 구성하는 한 부분만 딱 뽑아내 가지고는 도저히 할 수가 없죠. 그런데 우리가 감상할 때 무슨 교향곡 제2악장만 틀어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제2악장을 듣고 전체상을 다 연상하면서 듣는가, 아니면 2악장 그 자체로만 듣는가? 따로 들으면 딴 곡인 거예요. 전체를 듣는 게 아니라 2악장만 듣는 것이지, 그 부분만 듣는 거예요. 부분만 해석할 뿐이지 전체상과 같이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아까 그 얘기(연산구조)하고는 통하지 않습니다.
또 2악장이 전체를 대표하고 있는가. 어떤 교향곡의 2악장은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런데 대부분의 교향곡은 그런 구성으로 안 돼 있죠. 2악장을 들었다는 것은 집을 구성하는 벽돌 하나를 뽑아내서 집을 감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벽돌을 감상하는 거죠. 집의 한 부분을 감상하는 것이지 전체 구조 틀을 감상하는 게 아니죠. 전체 구조 틀을 연주하는 것도 아닙니다. 집에 여러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의 하나를 제공해줄 뿐이지, ‘전체상을 연상해 다오’ 그런 게 아니잖아요. 부분의 독자성을 인정해서 그것만 하는 거지요.

송: 그렇다면 선생님, 이애주 선생님의 〈승무〉라든지 현행 〈처용무〉 같은 경우에는 연산구조라고 보기 힘든가요?


서정적 서사와 승무

채: 그런 부분이 많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애주 선생이 얘기하고 싶어 하는 것은 염불장단, 타령장단, 굿거리장단 등 여러 마당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마당마다 서정적 흐름의 기승전결이 있다, 그걸 주장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염불장단이 여러 장단으로 구성되는데 그 전체 흐름은 서정적인 피라미드 구조로 돼서 처음에 잔잔하게 나오다가 염불장단다운 어떤 클라이맥스가 있고, 계단을 이룬 다음에 다시 다른 장단으로 넘어가서, 또 다른 정서적 굴곡을 만들며 피라미드 구조를 지어서 끝나고, 또 이렇게 돼 있다는 겁니다. 즉 피라미드 구조의 연결이라고 그렇게 보고자 하는 것이죠.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그렇다면 그건 연산구조가 아닙니다. 연산구조는 부분의 집합에서 부분의 독자성이 아까처럼 전체를 구성하면서도 독자적인 것으로 드러날 경우에, 그러니까 극히 제한적인 용어로 써야 됩니다.
모든 병풍이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잘 짜여 있는 판소리는 다 그래요. 부분의 집합에서 한 부분이 총체성과 직결돼 있는 그런 관계일 때, 각각의 개인이 아주 독자적인 완결성을 지니고 있는 식으로 네트워킹 할 때는 여럿이 모여 있지만 하나가 뽑혀 나와도 전체의 대표성을 지니고, 전체가 무너지지 않죠. 여럿이 있는데 한두 놈이 농땡이치거나 안 오거나 하면 전체가 무너진다, 그거는 연산구조가 아니죠. 무너지는 것이죠. 한 봉우리가 무너지면 산맥이 무너지는 것 같은 것은 연산구조라고 얘기할 수가 없다. 한 봉우리가 부각되는 것이 그 옆에 있던 모든 것, 인접한 것까지 같이 부각되게 만드는 것, 이건 연산구조라고 할 수 있죠.
이게 말하자면 ‘하나는 전체를 위해, 전체는 하나를 위해’ 하는, 개인과 집단의 관계에서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내가 얘기하고 싶은 거죠. 그게 다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개체의 자아 발현에서 공동체에 개인이 묻히지 않을 어떤 토대가 아니겠는가. 그 생각으로 그렇게 얘기를 해보는 것입니다. 이건 사회주의를 얘기하는 것과도 조금 연결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런 얘기는 노동과 정치의 관계에서, 또 양자역학이나 이런 데서 얘기하는 원리하고도 조금 통하는 바가 있고, 개체 생명성을 살려내는 것이 사회주의의 모순 구조를 극복하는 한 방안이라고 하는 얘기하고도 연결됩니다. 공동체성과 개별성이 어떤 관계에 놓여져야 가장 합당하고 이상적인가, 그런 것이 실현되는 예술 구조를 얘기하기 위해서 자꾸 끌어들여 보고 싶은 거죠.
그리고 주역에서 삶 전체를 얘기할 때 가장 중요 명제가 ‘모든 것은 변한다. 그런데 변한다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입니다. 하나는 전체인데 전체가 하나일 수 있게끔 계속 자생적 회귀 곡선을 그을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틀, 전체로서 같이 사는데 개인의 삶이 명쾌하게 보장된 그런 사회, 그게 최고의 이상적인 사회 아닐까요. 그걸 자꾸 부추기는 그런 예술 구조를 자꾸 하다 보면 그런 사회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향성의 의미도 다분히 있는 거죠. 아마 그런 뜻으로도 주역에서 개별적 독자성을 강조하고, 개개인의 삶과 공동체성의 관계를 얘기하는 부분과 통하는 바가 있지 않았겠는가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차용해본 것입니다.
오늘날 전통문화유산의 전승방식에서 원형과 전형이란 말을 새로이 내세우고 있는데, 이 점도 이와 결부시켜 볼 수 있습니다. 또 사회주의리얼리즘 논의에서 한 사람의 사회적 삶을 그려내 한 시대 사회의 전체상을 부각시킨다는 전형성 이론도 이와 견주어 얘기해 볼 수도 있습니다.

송: 끝으로 전통춤에 대해 한 가지 더 여쭙겠습니다. 오늘날 전통춤이라는 용어가 지시하는 범위가 상당히 넓습니다. 예를 들어 전통춤 공연의 상당 부분은 개인의 창의성을 강조한 창작 작품입니다. 그런데 전통춤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모두 다 전통춤이라고 명명합니다. 춤 용어는 단순히 호칭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춤을 이해하는 관점과 인식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 점에서 전통춤 용어의 정리 내지는 정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전통춤의 정의와 범위를 어떻게 잡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선생님의 견해가 궁금합니다.

채: 복잡한 문제인 것 같지만 아주 단순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전통사회의 춤이 전통춤입니다. 즉 전통사회의 춤 전체가 전통춤이라는 것이지요. 이처럼 전통이라는 총괄적 의미와 연관시켜서 해석하는 것이 하나 있겠습니다. 또 하나는 춤의 한 갈래를 지칭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 갈래의 춤이 있는데 ‘이건 전통춤양식이다’라고 하는, 춤의 양식 중 하나로서의 전통춤이 있습니다. 그러면 두 가지 경우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두 번째 경우는 조금 의미를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전통사회에서의 모든 춤은 전부 전통춤이라고 총칭할 것이냐, 아니면 전통사회에서의 춤 가운데 한 가지 양식인 춤만을 지칭할 것이냐 입니다. 또 한 가지는 전통사회의 춤이 아니고 지금의 춤이고 오늘날 당대의 춤인데, 전통사회에서 통용됐던 춤 양식을 보유하고 있는 춤을 지칭하는 말로도 쓰고 있죠.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마지막의 경우입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전통사회라고 얘기할 수 없는데, 오늘날 사회에 통용되는 양식으로서의 전통춤, 곧 춤의 하나인 전통춤이죠. 춤의 여러 종류 중 하나인 전통춤, 춤의 일종인 전통춤이라는 것이 오늘날 어떻게 통용되고 있는가. 저는 그 문제 영역 속에서 계속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고 봅니다.


전통춤이라는 용어와 창조적 수원지로서 전통

송: 선생님 말씀을 정리하면, 먼저 전통사회에서 추어지던 춤들, 그러니까 흔히 말해서 1910년 이전의 춤들을 전통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춤의 한 의미 규정으로서의 전통춤, 즉 여러 가지 춤이 있는데 그중 하나로서의 전통춤이 있다. 그리고 문제가 되는 것은 두 번째 의미와 관련된 것으로, 오늘날 당대의 춤인데, 전통사회에서 통용되었던 춤 양식을 보유한다는 점에서 전통춤으로 명명되는 것이다. 맞는 요약인지요?

채: 춤의 일종으로서의 전통춤이 있다. 그러니까 첫째, 전통사회에서의 춤으로서 전통춤, 둘째, 춤의 하나로서의 전통춤이 있다. 이 두 가지가 기본적으로 있다. 그런데 지금 전통춤이라는 말을 자꾸 쓰는 이유는, 전통사회가 아닌 오늘날에 춤의 일종으로서의 전통춤을 강조했을 때, 국한돼서 쓰여야 될 말이, 오늘날 사회에 통용돼야 될 전통사회의 춤이라는 개념으로 너무 넓혀져서 활용되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겁니다.
그럼 좁은 의미의 춤의 하나로서의 전통춤은 어떤 춤인가. 종목을 댈 수가 있다는 거예요. 전통사회의 춤 일반 전체를 통칭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 당시에 추어졌던 모든 춤들이 지금 다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건 종목으로 구분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전통사회에서 추어지던 춤 중에서도 오늘날까지 이음새를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을 전통춤이라고 지칭하는 거 아니에요? 이음새가 이미 끊어져 버린 것은 전통춤의 내용에 못 들어가는 거죠. 그러니까 어차피 종목 단위로 전통춤을 얘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1차 의미에서 지금 전통춤이란 무엇인가 할 때는, 전통사회에서 추어지던 춤이 연명돼서 오늘날에도 추어지고 있는 춤을 지칭하는 말인데, 그것은 전통사회에서 추어지던 춤 전체를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오늘까지 연명돼서 일정한 정도 있다는 것은 역사적 생명력을 어느 정도 보장받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문화재적 가치, 문화재라고 하는 유산의 의미가 다분히 들어가 있는 것이겠죠. 오늘날의 전통춤이란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국한돼야지, 전통사회 전체를 얘기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전승되고 있는 전통사회의 춤’이란 의미로 국한시켜야 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전통사회에서 추어졌다는 기록은 있지만 전승되고 있지 않은 전통춤 종목도 있기 마련이죠. 그러니까 〈무애무〉라든지 〈검결〉이라든지, 전통사회에서 추던 춤인데 불행히도 그 인맥을 유지할 수 없고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아서 찾아볼 도리가 없는 것들이 있죠. 그런 것은 자연히 배제될 수밖에 없는데, 배제되기에는 그 이름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점에서 추정의 꼬투리는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실체는 없더라도 그것이 당대에 추어졌을 때의 어떤 의미가 지금도 의미 있게 우리에게 생각된다면, 그것도 전통춤으로 봐야 된다는 것이 나의 의견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든 복원의 길을 찾고, 또 복원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의미, 당대적 의미를 계속 문자로라도, 실체는 없더라도 어떤 의미가 부여돼 있는 그 역사는 계속 이어져 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게 아쉽게도 여러 종목이 있을 거라고 보고, 나는 그런 것 가운데 내 취향에 맞는 것으로 〈무애무〉 같은 것, 〈검결〉 같은 것, 풍물 가락에서 1900년대 초에 있었던 기가 막힌 풍물장단 같은 것은 사라진 게 너무나 억울할 정도로 아쉽죠. 그런 것도 지금 전통춤 논의에 충분히 들어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논리의 핵심은 전승되는 종목 가운데 전통사회에서 추어졌던 것의 에너지, 연속될 수 있는 지속 가능성, 그리고 그것에 담겨 있는 문화 인자적 측면들, 앞으로도 계속 개발돼야 될 개발 가능성이 있는 전통춤, 창조의 세계에 수원지적 역할을 하는 춤, 그런 의미입니다. 전통춤이 이어지고 개발될 가능성을 품고 있는 수원지적 역할을 하는 춤, 이런 의미로 조금 의미를 압축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지점에서 한국춤의 한 양식으로 보고 있는 이른바 신무용의 개념과 양식적 특성이 문제입니다. 한국춤의 근대시기의 춤인 신무용은 전통과 근현대를 잇고 있는 과도기의 춤이라는 점에서 전통춤이나 근대 한국춤의 논의에서 가장 강력한 전환 포인트일 것입니다.


전통춤 계승을 위한 규범 마련

채: 전통춤 논의에서 이제 의미를 상실한 것(당대적 기능은 확실하나 현재 와서는 그 기능을 상실했거나 사라져 버린 것) 또 의미가 많이 왜곡되거나 다른 방식으로 흘러간 것, 이런 것을 엄격하게 규명해서 전승 체계에서 잊혀져야 될 부분이 있고, 계속 전개 ‧ 유지해야 되는 부분이 있고, 더 개발돼야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더 개발시켜야 할 것입니다.
전통의 경우 모든 것을 다 이어받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어받음새의 어떤 가치 규준에 관한 규범이 마련돼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규범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가 전통춤의 문제에서 핵심이라고 보는데, 과연 어떻게 세울 것인가.
그것은 춤만이 아니라 전통문화, 전통적인 삶, 넓은 의미에서 전통사회의 문화 인식, 사상 체계와 연관시켜서 이 일을 해야지 춤으로만 국한시켜서는 안 될 것 같아요. 그러니까 문화 일반론, 역사문화 일반론 또는 문화인류학적, 미학적 여러 측면이 붙어야만 그 가치 기준의 한 틀을 구성할 수 있고 이런 문제를 조금 더 편하게 풀어갈 수 있지 않겠는가 싶은 거죠. 그러니까 계속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유하고 있는 것인가 아닌가를 판별해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전통성, 전통춤이라는 이름에 해당되는 모든 것이 다 가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대전제 위에서, 당시에는 가치 있게 여겨졌지만 지금은 기능적 가치나 미학적 가치가 떨어진 것이 있겠죠. 그것을 가려내는 역사적 · 미학적 안목이 필요하다는 것. 대전제로 역사적 측면과 미학적 측면, 그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 기준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이것과 관련된 것이 문화재의 규정 방식일 겁니다. 우리에게 역사성이 있으니까 몇 세대에 걸쳐 계속 지속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지속 가능성을 유지하니까 ‘재(財)’자를 붙여서 뒤에도 계속 활용돼야 될 것이라는 점에서 어떤 명칭을 부여해주고 전승의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겠죠. 그런데 미적 가치인 경우에는 작품은 사라졌지만 그것을 옹호해주고 가치 높게 봤던 그런 심성, 작품이 없다고 하더라도 구비적이거나 여러 가지 심성적으로, 가령 어떤 〈무애무〉을 좋아하고 가치 있게 봤던 당대의 미의식이나 미적 감성, 미적 환경, 이런 것도 같이 전승돼야만 전통춤의 흐름을 제대로 이어가게 하는 것이 될 겁니다. 작품이 없어졌다고 해서 그런 미의식이나 이런 게 다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니까요. 그래서 이름만이라도 남아 있는 것이 지니고 있었던 그 무엇을 다시 살려내는 것도 전통춤을 살려내는 일이라는 거죠. 형체는 더 이상 만들어내기가 어렵지만, 그것을 동시에 진행해야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거기에 적합한 역사 전승 의식, 그 다음에 미감이나 미의식 또는 미적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 이런 것에 해당되는 판단 기준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가 과제겠죠.
용어상으로는 이렇게 할 수 있지만, 규범이라고 하면 원리를 규정해줘야 되잖아요. 말로 규정해줘야 되는데, 그것은 문화역사학자하고 미학자하고 전승을 맡고 있는 당사자 세 분야, 더 나아가서는 정책 입안자 내지는 정책 수행 관리자가 함께 규정을 만들어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전형, 창조적 진화를 가능케 하는 유형적 틀

채: 지금 그나마 문화재와 관련하여, 원형(原形)이라는 법률 규정을 전형(典型)으로 전환시킨 것은 어느 정도 시의적절하다고 봐요. 처음에 원형을 고집하지 않고, 그야말로 크게 변함이 없이 계속 생성 역할을 할 수 있는 그 틀을 이제 전형이라고 할 수 있겠죠.
생성의 힘을 지니고 있는 틀, 새롭게 만들 수 있는 틀이어야지 고정불변한 틀이 아닙니다. 생성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유형적 틀, 이것이 전형이지 그조차 다 막아놓고 ‘이거 안 돼’라고 하는 그런 식의 압박은 앞에 얘기한 원형 규정하고 크게 다른 바가 없으니까요.
생성 가능성으로서의, 그러니까 전승 또는 생성의 가능성으로서의 유형적인 틀이지요. 할 때마다 다르듯이 지속적인 생성 변화 가능성, 그러니까 창조적 원리로서의 전형입니다. 창조와 진화, 창조적 진화를 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그 유형적 틀, 창조적 진화를 할 수 있게끔 열어놓고 있는 유형적 틀, 그걸 전형이라고 한다면 맞는 말이라고 저는 봅니다.

송: 선생님께서는 오늘날 전통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요즘 무용학과에서도 소외 외국무용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전통춤을 아예 추지 않고, 추어야 한다는 생각도 별로 하지 않거든요.

채: 그것은 문화적 단절, 문화적 위기, 문화사적 왜곡의 가능성을 기본적으로 열어놓은 비교육적인 방식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한국춤의 갈래가 아닌 전공 분야로서 발레나 모던댄스를 하는 전공자들에게도 한국의 전통춤은 공동 유산이기 때문에, 한국춤 전공자에게만 해당되는 유산이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이 땅의 문화의 산물이기 때문에 앞으로 이 땅에서 문화적 작업을 하는 사람들의 공동 유산이 돼야지, 누구는 받고 누구는 안 받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까 얘기한 창조적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그런 틀이라고 한다면, 그건 창조의 힘, 에너지, 기운, 그런 것은 받아 마땅하지요. 수원지적 역할을 해주는 것으로, 고여 있는 저수지에 갇혀 있는 그런 물이 아니라, 수원지에서 계속 흐름을 지나 장관을 이루고 뻗어나갈 수 있게끔 해주는 물살과 같은 그런 힘으로 받아들여져야 되는 거죠.


우리춤 언어로 춤 창작하기

채: 또 한 가지, 춤의 경우에는 그것은 우리춤 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문학에서만 통용되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말을 가지고 우리가 쓰고 살고 있잖아요. 문화적 작업의 반 이상은 말로, 글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넓은 의미의 언어라고 한다면, 소통 매체 아니에요. 언어라고 하는 소통 매체로서 우리말을 쓰고 있는데, 지금 쓰고 있는 우리말들이 훈민정음 당시의 말은 아니잖아요. 또 그 이전에 우리말로 쓰였던 것이 훈민정음이 세상에 나와서 어느 정도 정착을 하지만, 또 소멸된 것도 있으니까 그런 것까지 다 포함해서 다시 재생되어야 될 우리말도 있는 거조. 그리고 우리말도 계속 적응하면서 음운도 많이 바뀌고, 넓혀지기도 하고 표기도 달라지기도 하고, 가로쓰기, 세로쓰기, 또 없어진 말이나 기호도 있죠. 그런 것들이 왜 계속 흘러오면서 적응이 안 되고 사라졌는지, 다시 회복할 길은 없는지 이런 것을 같이 생각하는 거죠.
오늘날 통용되고 가꾸어 사용돼서 좋은 언어생활을 할 수 있게끔 해주는 그런 의미로서의 한글도 있듯이, 어떤 춤의 형식이든 우리 몸짓말의 언어적 기능을 갖고 있는 그런 몸짓으로 춤을 추는 것이어야 되지 않겠는가. 당위이면서도 지금 현재는 더욱더 절실합니다. 지금 한글이 세계적인 언어로 활약하면서 힘과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보면, 우리 몸짓말에 해당되는 것은 오히려 위축되어 오그라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쌩쌩하게 전해지고 있는 우리(몸짓)말인데도 안 쓰고 있잖아요. 배우려고도 생각 안 하잖아요. 춤 언어, 즉 비발성언어의 경우에는 제대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최고 교육기관이라고 하는 대학의 춤 교육에서, 한글에 해당되는 우리 춤 언어 교육은 거의 한글 교육의 10분의 1도 못 간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공동 유산으로서의 한글이듯이, 공동 언어 유산으로서의 우리 몸짓말도 한국춤 전공자에게만 국한돼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한국춤 말로 이루어진 춤인 경우, 그 어휘나 문장들은 이해력이 딸려 잘 소통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협소한 언어교육은 빨리 시정돼야 해요.
전통춤을 얘기할 때 가장 핵심적인 과제도 전승 가치를 가지고 있는 전통춤의 언어입니다. 우리 춤 언어로서의 전통춤이라고 한다면, 전통춤의 종목들이 포괄하고 있는 어휘들뿐만 아니라, 지금 전통춤으로 인정되지 않고 문화 유산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저평가되고 있는 춤을 다시금 치켜세워서 거기에 쓰인 언어도 익혀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몸짓말 공부를 지도자도, 학습자도 해야 하고 정책에서도 좀 해줘야 된다는 겝니다. 특히 어릴 때 어휘력을 풍부하게 해주는 것, 이것이 원만한 언어생활, 표현생활을 하는 데 결정적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노는 것, 여러 가지 형태로 몸짓·발짓하는 것, 이런 것을 부추겨주고 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끔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줘야 된다고 봅니다.

송: 오늘 춤의 본질과 연구방법, 전통춤의 구조, 전통춤의 개념과 계승 방안, 전통춤의 현재적 의미 등에 관해 장시간 좋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늘 제가 한 질문은 저의 고민이기도 했습니다. 좋은 길잡이가 되어주신 것 같아 거듭 감사를 드립니다. 끝으로 더 하고 싶은 보완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요.

채: 아까 〈승무〉를 얘기할 때, 이애주 선생님이 〈승무〉 구조를 파악하는 방식과는 조금 달리, 점 ‧ 선 ‧ 면 ‧ 원의 개념을 가지고 〈승무〉 구조를 파악하고자 애쓰는 김은희 선생의 관점에서는 어쩌면 아까 우리가 얘기한 작은 단위, 마루라고 했죠. 또는 연산구조라고 했죠. 그것을 설명하는 데 훨씬 더 유효한 측면도 있습니다. 그런 걸 느꼈어요. 점, 선, 면, 원, 무대 구성, 이렇게 발전시켜서 우리 춤의 원리를 한 체계로 정착시키고 있는데, 그곳에서 이매방 선생의 〈승무〉를 가지고 그런 식으로 파악하다 보니까 안 통하는 게 없다고 합니다.
그 점, 선, 원이 어쩌면 한 마루채를 구성하는 하나의 원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고, 마루채를 구성하는 그런 방식이 넓은 의미의 연산구조 방식을 택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거든요. 마루채 개념의 자율 단위의 엮음이, 넓은 의미로 조금 더 확대하면 연산구조식의 발상 속에서 그런 가능성이 훨씬 넓다는 것이지요. 또 실제로 이매방 선생의 무적이라고 하죠. 춤의 흔적, 동선이 하나씩 조그맣게 완결 구조를 가지고, 작은 완결 구조의 엮음새로 가야겠다는 그런 얘기하고 통한 것이어서, 마루 개념이나 연산구조의 개념과 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승무는 사방춤이지’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무대화된 〈승무〉의 프로시니엄 무대의 단점을 지적하는 아주 도발적인 용어이기도 한데, 그런 생각을 좀 하게 돼요.
그러면서 또 한편, 한성준 선생이 〈승무〉를 무대화하면서 개척시켜놓은 프로시니엄 아치에 적합한 방식의 표현성을 얻어내려고 굉장히 애쓴 측면을 우리는 또 보게 됩니다. 꼭 프로시니엄 아치에 맞춰야만 되느냐, 그 문제를 떠나서 〈승무〉의 표현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개발한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그의 작품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전에도 한 번 얘기한 적이 있지만, 한성준 선생은 우리 전통춤의 집대성만이 아니라 우리 전통춤이 현대 무대에 맞도록 창의적으로 개발하면서 그 공간을 확대하고 의미를 더욱더 명쾌하게 해놓은 점을 우리는 같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작업이 우리에게 〈승무〉라고 하는 것을 새롭게 인식하게 해주고, 또 〈승무〉에 숨어 있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데 훨씬 더 도움을 주고, 결정적으로 그런 시선으로 보게끔 만들어놓은 좋은 예를 제공해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상황 속 진리 구현하기, 상황적 진실을 찾아가는 우리춤의 생성미학행

채: 그래서 계속 주장하는 것은 연산구조라고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형태이지만, 그것만으로는 해결하지 못하는 많은 국면에 우리가 부딪히고 있다는 거죠. 이를테면 마당극에서 개발한 한 방식으로 ‘서사적 구조를 지닌 연산구조’ 같은 것이지요. 그리고 한 사람, 개체와 전체의 관계에서 어떤 문제가 계속 일어나고 있는가. 이상향이지만 그렇게 가기 위한 여러 가지 방도들을 찾아야지, 이 길만이 그렇게 된다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때는 개별 희생이 필요한 때가 있기도 하든 것이지요. 전체 속에 한 사람이 묻히는 경우들이 하도 많으니까. 그렇다고 전체를 위해서 다 그렇게 희생당하고 그렇게 돼야 되는가, 그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과정에서 현실적으로 부딪히는 문제를 어떻게, ‘상황적’, 우리는 그렇게 표현합니다. ‘상황적 진실’ 속에서 어떻게 진리를 구현하는 것인가이지, 뚝 떨어진 진리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 국면 속에서의 진실, 진실로서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구현해내는가. 이게 계속 우리한테 닥치는 과제들이지요.

송: 상황적 진실 속의 진리, 마음에 담도록 하겠습니다. 여쭙고 싶은 것이 자꾸만 생겨나지만, 다음을 기약하겠습니다. 선생님, 장시간 감사합니다. 내내 건강하십시오.

송성아

춤이론가. 무용학과 미학을 전공하였고, 한국전통춤 형식의 체계적 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표저서로 『한국전통춤 연구의 새로운 방법론: 한국전통춤 구조의 체계적 범주와 그 예시』(2016)가 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겸임교수로 있다.​​

2026. 10.
*춤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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